쇼펜하우어, 돌이 별이 되는 철학

(나를 마주하는 당당한 철학,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읽기)​

이동용 / 동녘 / 464쪽

(2019. 5. 6.)

염세주의 철학,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일컫는 말이다. 염세주의는 삶을 가치 없는 것으로 판단한다. 고통에 대한 인식을 출발점으로 삼고 체념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한편으로 맞는 말이지만, 결코 현재를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고통이 있는 현재를 가치 있게 본다는 점에서는 오해가 되기도 한다. 유독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많은 오해에 시달렸다. 왜 그런 오해가 생겼을까? 편현합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끝까지 읽어 낸 자가 별로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부정에서 시작해 무로 마감한다. 고통에서 시작해 해탈로 끝난다. 자기 자신을 거부하면서도 끝까지 끌고 간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구원한다. 구원은 구원 이전의 존재 형식을 모두 거부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구원 이후의 자기 자신은 구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모두가 성불이 될 수 있듯이 자기 자신이 구원의 원인이 되는 셈이다.

(P.9)

세상이 힘들다는 것, 인생이 눈물로만 채워져 있다는 것, 가슴이 아파 견딜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에게 염세주의 철학은 위대한 위로의 해결책으로 다가온다. 그 철학은 위기의 순간에 더욱 큰 효과를 발휘한다. 자살 밖에 생각할 수 없는 답답한 순간에 새로운 세상으로 확 트이는 탈출구를 발견하게 한다. 염세주의 철학은 모든 것을 부정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모든 것을 얻는 비결을 알려준다. 삶의 무게를 극복하면, 마치 육중한 돌이 별이 되어 은하수로 충만한 우주 공간의 한 일원이 되는 듯한 행복감을 얻게 된다. 쇼펜하우어의 목소리는 간절할 때 포근한 위로의 소리로 들릴 것이다. "진리는 창부가 아니라서 갈망하지 않는 자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는다"는 그의 거침없는 주장이 여기에서 이해될 것이다.

​(P.28)

염세주의 철학은 일종의 비관주의 철학으로 부정의 힘을 길러준다. 쇼펜하우어 철학은 부정과 거부의 방법을 통해 속박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이것이 바로 삶에 대한 수많은 독설에도 불구하고 독자층을 형성할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닐까? 죽음에 대해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는 자는 삶에 대해서도 진지해질 수 있다. 단념에 대한 이론을 내는 사람은 궁극적인 획득에 대해서도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쇼펜하우어 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삶에의 의지의 부정은 숨 가쁘게 돌아가는 현대인의 삼을 되돌아보게 하고, 맹목적인 본능으로 내몰린 도시 생활에 대해 비판의 거리를 갖게 한다. 그의 사상은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던 욕망의 불꽃을 잠시 식히고 냉정한 인식으로 충만한 새로운 삶으로의 문을 열어 준다.

(P.66)

플라톤이 동굴의 비유에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우리가 보는 이 세계가 바로 그림자와 같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철학에서는 이데아가 진실계이며 동시에 실재이다.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 현상계는 오로지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경험적 현실세계는 비본래적이고 비본질적인 존재로 이해될 뿐이다. 그 배후에는 하지만 본래적이며 본질적인 존재가 숨어 있다. 경험적 사물들은 다양한 현상에 의해 변화하며 무상한 반면 그 개념들인 이념은 불변하고 영원하다.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경험적 사물 셰계의 존재는 다만 가상일뿐이고, 본래적이며 본질적인 존재는 이념의 존재이다. 즉 플라톤의 이념은 실재하는 것이며 또한 영원불변의 것에 해당한다.

그에게 있어서 이념들은 사물의 영원한 형식인 셈이다. 현상계의 모든 개별자들은 원상들에 대한 모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이념은 다르게 해석되고 이해된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이념에 대한 직시는 어떠한 현상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하지 않지만,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이념은 물자체로서의 의지에 가장 적합한 객체성으로 주관을 위한 직관적 표상으로 해석된다. 그러니까 쇼펜하우어에게 이념은 주관이 관여하는 인식의 조건에 의해 다양하게 해체됨을 의미한다. 그것은 똑같은 상황에서도 이념이 다르게 형성될 수 있다는 말이다. 현상에 대한 인식 없이 이념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인식 주관이 없으면 무라고 할 수 있다."0

(P.114)

플라톤의 눈에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꿈을 헤매는 듯이 보였다. 본질을 보지 못하고 현상에 눈이 멀어 있다고 생각했다. 보는 눈을 가졌음에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눈뜬장님으로 말이다.

플라톤과 쇼펜하우어 철학의 논쟁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단정과 맞물린다. 쇼펜하우어 철학의 논쟁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단정과 맞물린다. 쇼펜하우어의 의문점은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해석이다. 정말 존재하지 않을까? 무슨 근거로 눈에 보이는 이 모든 장관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란 말인가? 인간이 자신의 내면적 존재에게 너무 치우친 나머지 외면적 존재를 무시해 버리는 어리석은 판단이 아닐까? 어느 한 쪽을 거부하고 다른 한 쪽을 선택하는 이런 흑백논리 앞에서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철학을 위한 실마리를 찾아낸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는 명제로부터 시작한다. 염세주으 철학의 첫 출발점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을 놓치면 바다한가운데서 나침반 없이 표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표상을 무시하면 시작할 수도 없다. 이것이 바로 플라톤 철학과 차이점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표상을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진정한 인식은 그것에서 시작한다.

(P.118)

칸트의 비판철학은 경험론과 합리론을 모두 비판하면서 새로운 인식의 방법론으로 대두된다. 그가 선택한 것은 비판이었다. 그가 말하는 비판은 인식을 위한 비판이다. 소위 말하는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질문을 하더라도 인식을 위한 질문인지는 들어 보면 안다. 질문이 질문다울 때 인식은 찾아오는 법이다. 특히 경험론과 합리론을 동시에 비판하면서 자신의 철학을 정립해내는 대표적인 문장은 다음과 같다.

내용 없는 생각은 공허하고,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전반부에 해당하는 '내용 없는 생각은 공허하다'는 말은 경험을 무시한 사고를 비판한 말이다. 그리고 후반부에 해당하는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라는 말은 생각 없이 경험적 직관만을 위주로 한 방법론을 비판한 말이다. 쉽게 ㅁ라하면, 전자는 '사상누각'의 의미처람 방안에 틀어박혀 공상만 하는 사람에게는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말로, 그리고 후자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아는 것이 없으면 보이는 것도 없다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P.124)

플라톤도 칸트도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선사했다. 쇼펜하우어는 바로 여기에 전환점을 마련했다. 이성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 자체가 이미 혁명적 사고에 해당한다. 쇼펜하우어가 바로 그렇게 생각했던 철학자이다. 그의 생각 속에서 이성이란 그저 이차적인 능력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이성은 의지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이성은 의지의 거울일 뿐이다. 이성은 의지를 드러내기도 하고 숨기기도 한다. 이성의 도구는 말, 즉 언어이다. 말은 의지의 지배를 받은 이성에 의해 합리성이라는 가면을 쓸 수도 있다.

(P.148)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이성을 읽어보자.

'이성은 여성적인 성질을 갖고 있다. 즉 이성은 받아들인 다음에만 줄 수 있을 뿐이다. 이성이 그 자체로 홀로 갖고 있는 것은 내용이 없는 조작의 형식뿐이다.'(제10장)

이성은 "내용이 없는 조작의 형식"이다. 그래서 이성의 힘은 일단 무엇인가가 내용으로 들어올 때에만 발휘한다. 먼저 받아들이고 나서야 작용을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이성은 "여성적인 성질"로 해석된다. 소극적인 역할을 담당한다는 뜻이다. 또한 이성은 개념과의 관계 속에서만 작동하는 형식이다.

'그런데 개념들은 일반적으로 그것에 선행하는 직관적 쇼팡들 다음에 비로소 생기는 것이며, 그 표상과의 관계가 개념의 전체 본질을 이루게 된다. 따라서 개념은 이미 표상을 전제로 하고 있다.'(제10장)

"직관적인 표상"이 없다면 이성은 "내용이 없는 조작의 형식"일 뿐이다. 이성은 언제나 표상을 전제로 한다. 외부로부터 표상이 들어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한 적합한 개념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성은 직관적 표상으로 내용을 얻어 왔다"(제10장)는 말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이성을 통해 의식으로 축적되는 것을 "지식"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필연적으로 "이성의 제약"(같은 곳)을 받는다.

(P.172)

이성은 언제나 자기 생각에 집착하고 얽매이게 한다. 그래서 이성의 또 다른 한계로 옹졸함이 거론될 수 있다. 다양성을 허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하기의 원리 속에서 아무리 큰 숫자를 들이댄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더하기의 원리를 적용할 뿐이라는 사실이 그렇다.

이성에 얽매인 사람은 옹졸하다. 옹졸한 사람은 이성의 격률만을 따른다. 그는 "이성이 오성으 후견을 맡도록" 함으로써, 모든 것을 해석에 의존하고 또한 설명이 없으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것에는 한없이 즐거워하고 납득이 가지 않는 것에는 견딜 수 없는 불안을 초래한다. 법이 있으면 안심하고 법이 없으면 당황한다. 외적인 형식에 얽매이다 보니 내용에는 부실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경우도 많다. 정해 놓은 형식 속에는 정해진 것만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옹졸함은 이미 결정되고 규정된 사고 형식에서 오는 "경직된 확실성"만을 고집하는 것과 관련한다. 옹졸함과 경직성은 언제나 함께 한다. 그것은 현재의 다양한 변화를 수용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옹졸한 사람은 "현명치 모사고 몰취미하며 쓸모없는 사람으로 인정"받기 십상이다. 이로써 쇼펜하우어는 이성적 인간에게서 인류의 모범을 찾으려 했던 관념론자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결과에 이르렀다.

(P.177)

오성과 이성에 대한 문제가 도대체 왜 쇼펜하우어 철학에 중요할까?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쇼펜하우어는 고통스러운 삶을 종식하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비결을 알려주고자 한다. 인생은 오생과 이성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인생을 구원할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성은 의지를 이념의 도움을 통해 드러나게 한다. 하지만 이성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한계를 내포한다. 잘못된 논리에 빠지면 쉽게 빠져나오지못한다. '일방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성은 그래서 오성의 도움을 반드시 요구한다. 만병 통치약처럼 여겨지던 자유의지는 논리적 오류에 빠질 위험이 많다. 오성적 판단이 결여될 때 그렇다. 객관성이 배재된 주관성은 독단과 광기의 범주를 벗어나기 힘들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이렇게 독일 관념론이 주장하는 이성의 신앙에 맞서 과감하게 내민 도전장과 같다. 세상이 결코 이성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밝히고 싶었고, 그 이유를 고통스러원 삶에서 찾았으며, 이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성의 통제뿐만 아니라 다른 방법까지 동원이 되어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노력했던 사상이 바로 쇼펜하우어의 철학이다.

(P.180)

개인으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는 참된 지혜를 얻기 위한 초석이 되어야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 없이 아무것도 주어질 수 없다. 첫 출발은 자기 자신이다. 좋은 지도 앞에서도 자기 위치를 모르면 어디로도 나아갈 수 없음이 바로 이런 이치다. 여행을 하는 이유도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함이다. 그래서 끝까지 가 보면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된다. 그 끝은 물론 개인의 능력에 따라 다르겠지만,누구든 자신이 힘이 닿는 데까지 가면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된다. 그것이 고행의 묘미이다. 참고 견디면 주어지는 인식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사바세계라 했다. 산스크리트에서 참고 견디는 땅이라는 뜻이다. 참고 견뎌 나가는 세상이라는 뜻이다. 끝까지 견뎌야 하는 세상이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뜻이다. 개인으로서 자기 자신은 끝까지 함께 가야 할 동반자이다. 연꽃의 뿌리가 진흙탕에 뿌리박으면서 수면 위에서 꽃을 피우듯이. 그 진흙탕을 버려서 안 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이 고통의 원인이 된다고 해서 함부로 버려서 안 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P.284)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것, 이것만이 염세주의가 윤리적 차원에서 도달하려는 최고의 목표이다. 쇼펜하우어의 정언명법은 다음과 같다.

'아무도 해치지 말고, 할 수 있는 데까지 모두를 도와주어라.'

할 수 있는 데까지. 힘이 닿는 데까지. 그러니까 끝까지 남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 진정한 도움의 전제다. 조금이라도 힘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도와준 것이 아니다. 참으로 힘든 요구다. 오로지 타인을 향한 생각과 마음으로만 살아야 한다. 무엇이든지 타이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모든 것은 타인이 중심에 서 있어야 한다. 어더한 경우라도 해쳐서는 절대로 안 된다. 타인을 해치는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이 안 된다. 오로지 도와주어야만 한다. 이것이 동정이다.

(P.323)

누가 악한 사람일까?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동기가 주어지고, 외부의 힘이 저지하지 않는다면 언제라도 부당한 일을 한 용의가 있는 사람을 우리는 악하다고 부른다." 쇼펜하우어의 주장은 간단하면서 단호하다. 동기가 주어지고 그것을 의지의 노력을 통해 거침없이 행동으로 옮기는 자는 악하다고 한다. "외부의 힘이 저지하지 않는다면"이란 제약이 우리를 더욱 낯 뜨겁게 만든다. 누군가 더 강력한 사람이 나타나서 하지 말라고 명령하지 않으면 누구나 부당한 짓을 하려고 한다. 누군가를 괴롭히던 사람이 사라지면 그 다음으로 강한 자가또다시 그 약자를 괴롭힌다.

그래서 악한 사람은 자신의 삶의 긍정에만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다른 개인들에게서나타나는 의지를 부정"하기에 이른다. 자신의 의지로 다른 개인의 의지를 꺾는다. 자신의 자유를 위해 다른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다. 자신이 편하기 위해 다른 개인의 불편을 어떤 양심의 가책도 없이 도모한다. 그는 타안이 자기 자신의 "의지에봉사하기를 요구"하고, 그들이 자신의 "의지의 노력에 방해가 될 경우"에는 가차 없이 "그들의 생존을 파괴하려"한다. 방해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러한 모든 행동의 원천은 이기심이다. 이기적인 사람의 특성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그런 사람은 "삶에의 의지가 아주 격렬하고, 그 자신의 삶에 대한 긍정을 훨씬 넘어서는 삶에의 의지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자기 의지가 객관화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은 적대실할 뿐이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의지만이 격렬하게 작용하고, 다른 모든 것은 그것에 봉사를 해야만 한다. 둘째, "전적으로 근거율에 헌신하고 개별화의 원리에 사로잡혀 있는 그의 인식이 이러한 개별화의 원리를 통해 정해진,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 간의 전적인 차이를 굳게 고수한다는 점"이다. 이기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아니다'라는 말부터 꺼내 놓아야 직성이 풀린다. 일단 부정하고 본다. '나는 너와 다르게 생각한다.' 이런 차별성이 그를 존재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개별화의 원리만이 그를 굳건하게 세워 주고, 그것만이 타인과의 차별성을 가능하게 한다.

(P.32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