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불쾌한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의 세계 ​

박은미 / 박태성 / 삼성출판사 / 109쪽​

(2019. 3. 26.)​

철학책을 읽다 보면 '나만 힘든 세상을 사는 건 아니네, 이 사람도 힘든 세상 나름대로 살아 보려고 애 많이 썼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을 꽤 했었네.' 하는 생각이 듭니다.그 철학자 역시 나처럼 이 험한 세상을 살아 보려고 머리깨나 아프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도대체 이건 뭘까, 왜 이런 걸까?'하는 의문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철학을 합니다. 그렇게 인간을 괴롭히는 의문 중에서도 인간에게 가장 격력한 의문을 일으키는 것이 '삶의 고통'입니다.

살다 보면 '도대체 이 모든 고통을 왜 겪어야만 하는 걸까? 하는 탄식에 가슴을 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철학자들 중에서도 이 물음에 특히 집중했던 철학자가 쇼펜하우어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 철학자로 유명합니다. 염세주의 철학자 하면 바로 떠올리게 되는 철학자가 쇼펜하우어지요. 그런데도 그 사람 개인의 삶은 나름대로 행복했습니다. 인간이라면 피해 갈 수 없는 이 질문, '도대체 이 모든 고통을 왜 겪어야만 하는 것인가'의 질문에 대해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고민했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어떤 결론을 내렸기에 이 험난한 세상을 장수하며 잘 살았던 것일까요? 그 사람의 철학이 궁금해집니다.

(P.7)

쇼펜하우어가 모든 것에 대해 끝까지 회의하기만 했다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와 같은 대작을 남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저작을 남긴다는 것은 세상 사람 모두와 소통하고 싶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쇼펜하우어 연구장 중 한 사람은 그를 두고 "고독하지만 세상과 동떨어지지는 않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책을 제대로 읽어 줄 만한 독자를 만나기를 원했고 후대에라고 자신의 저작이 이해되기를 원했다. 그는 "후대의 독자는 이 책에서 비밀스러운 사실들을 읽어 낼 것이다. 내가 마치 달나라에 가 있는 남자처럼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이방인으로 잰재했음을 읽어 낼 것이다."라고 썼다. 계몽주의가 유행하던 당시는 이성의 철학이 지배적인 시대였고 쇼펜하우어는 완전히 그 반대에 해당하는 의지의 철학을 주창했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이방인인 것 같은 느낌에 시달렸던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서 쇼펜하우어가 고독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P.19)

쇼펜하우어는 이성의 철학이 유행하던 시기에 이성의 철학에 흥미를 느기는 독자들을 조롱하는 태도를 보였기 대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방식대로 글을 쓰지 않았고 자신의 지적인 정직성이 요구하는 대로 연구하고 저작 활동을 했을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쇼펜하우어가 옳고 당시의 독자들이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단지 그때 사람들은 이성의 철학에 매력을 느껴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었으며, 이성의 철학에서 문제점을 깨닫고 의지의 철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또 이성의 철학보다 의지의 철학이 나중에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고 해서 의지의 철학이 이성의 철학을 극복했다거나 의지의 철학이 이성의 철학보다 우위에 있다고 볼 수도 없다. 이성의 철학은 이성의 철학대로 의지의 철학은 의지의 철학대로 세상을 보는 철학 체계 중 하나인 것이다.

(P.21)

도대체 인간은 왜 고통을 겪게 되는가?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그것은 인간이 욕망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인간은 욕망이 충족되는 즉시 그보다 더 높은 수준의 욕망에 시달리게 되니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바다는 메워도 인간의 욕심은 채우지 못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 이유는 바다는 한계가 있지만 인간의 욕심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욕망을 갖지 않으면 고통에 시달리지도 않게 될가? 흔히들 로또에 당첨되면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은 듯 행복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로 조사를 해 보니 그렇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충족해야 할 욕망이 있을 때 인간은 삶에 대해 의욕을 느끼게 된다.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을 채우지 못하는 아쉬움에 시달리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은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묙망이 즉시 채워진다면 인간은 욕망에 시달리는 고통은 겪지 않겠지만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할지 알 수 없게 된다. 인간은 욕망을 느끼고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며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느끼기 때문이다.

(P.25)

불행은 행복보다 더 인간에게 생생하게 느껴진다. 기쁨은 늘 기대한 것에못 미치게 되고 괴로움은 늘 예상보다 큰 아픔을 준다. 권태는 끝없고 지속적이지만 행복은 순간에 그치게 된다. 사람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욕망의 노예일 수밖에 없다. 하나의 욕망이 충족되면 곧 또 다른 욕망이 생기고 지속적인 만족을 누리지 못한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 거들먹거리지만 그 만물의 영장이라는 게 결국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최고라는 것을 의미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싶다. 만물의 영장이기에 생각해야 할 것도 걱정해야 할 것도 그로 인한 고통까지도 최대치를 배당받은 것은 아닐까.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이미 괴로운 일인 것이다. 그러면 이미 태어난 우리는 도댗 어찌 해야 하는가? 그렇게 삶의 고통에 몸서리쳤던 쇼펜하우어도 결국은 오래도록 살았고 늘그막에는 명성도 얻었으며 제법 괜찮은 삶을 살았다고 한다. 도대체 그 사람은 어던 생각으로 이 세상의 어려움을 헤쳐 갈 수 있었던 것일까? 쇼펜하우어의 대표적인 저작인 <의지의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살펴보자.

(P.29)

내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면 어떻게 본다는 것인가? 쇼펜하우어의 대답은 '보게 되는 대로 본다'는 것이다. 인간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보게 되는 대로 보고서는 그것이 세상이라고 느낀다는 것이다.

같은 학교 앞 거리도 친구가 알고 있는 학교 앞과 내가 머릿속에 그리는 학교 앞의 모습은 다르다. 신발에 관심이 있는 친구는 신발 가게를 중심으로, 옷에 관심이 있는 나는 옷 가게를 중심으로 학교 앞 거리를 떠올리게 된다. 옷에 관심이 없는 친구가 학교 앞을 떠올릴 때 그 학교 앞 거리에는 옷 가게가 자리 잡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떠올리는 것'이 바로 표상이다.

'친구와 내가 머릿속에 그리는 학교 앞이 다르다'는 것을 어려운 말로 하면 '학교 앞 거리에 대한 친구의 표상과 나의 표상이 다르다.'라고 하는 것이다.

​(P.32)

인간은 자신도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쇼펜하우어가 <의지이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다. 의지는 세계를 움직이는 힘으로 작용하지만 직접적으로 인간에게 인식되지는 않기 때문에 인간은 의지에 따라 행동하면서도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의지의 작용을 알아 차리기 힘들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이 의지의 작용이 인간의 고통과 연관되기 때문에 거기에서 빠져나와야 고통으로인해 지나치게 힘들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P.34)

오래도록 서양 철학자들은 인간의 이성으로 무엇이든 파악하고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고 인간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바로 인간의 이성이라고 생각해 왔다. 쇼펜하우어가 활동하던 당시에 가장 유명했던 철학자는 헤겔이었으며 헤겔은 이성 철학의 최고봉이자 완성자라고 할 수 있다. 헤겔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이성의 작용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쇼펜하우어는 헤겔과는 완전히 방향을 달리해서 의지가 이 세상을 좌우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의지의 철학자'라고 불린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본질은 이성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쇼펜하우어에게 인간은 안정적이지 않고 변화무쌍하며 이유 없는 행위를 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나서는 나중에 이성으로 정당화하는 악동이다. 세계의 근원은 이성으로 포착할 수 없는 의지이기 때문에 이성은 생생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포착할 수 있는 힘이 없다고 보았다. 인간의 현실에서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은 아주 적다. 인간의 현실은 항상 이성이 설명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는 것이 사실이다. 이성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시대, 헤겔로 인해 이성의 철학이 가장 꽃피었던 그시대에 쇼펜하우어는 이해받지 못하는 씁쓸함을 견디고 고독을 감수하면서 과감하게도 의지의 철학을 내놓았다. 의지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에게 이성이라는 것은 두뇌 현상에 불과하며 의지에 기여하는 이차적인 것이다. 이성은 의지가 저지른 행위를 사후적으로 앞뒤를 맞춰 설명할 때 사용되는 부수적인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P.39)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세계가 한편으로는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의지의 세계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이성으로는 삶과 세계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고 보고 세계는 의지가 객관화 된것이며 의지에 의해 지배된다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세계는 의지가 객관화된 것'이라는 말은 세계는 의지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형태로 드러난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성을 통해서는 의지의 세계를 파악할 수 없다는 쇼펜하우어의 입장은 그동안 철학은 의지를 '이성에 종속된 것'으로 보아 왔던 전통적인 해석을 넘어선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이성이 파악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보고 지성의 상위에 두는 점에서 다르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바로 우리의 몸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몸은 우리가 직접적으로 의지를 느끼게 되는 마당이다. 치아는 먹고자 하는 의지가 객관화된 것이라고 본다. 여기서 객관화라는 표현이 뜻하는 바는 '객관적으로 드러난다, 구현된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된다. 쇼펜하우어가 몸을 의지의 발현으로 간주하는 것은 전통 철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관점이다.

이성과 의지의 관계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넘어선다.

(P.40)

인간의 의식의 조건상 주관과 객관이 구분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은 표상으로서의 세계만을 인식하지만, 이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의지라는 것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주요 내용이다. 의지의 부정을 통해 개별화의 원리에 얽매이지 않게 되면 주관과 객관의 구분이 없는 그런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P.43)

충분근거율에 관해서는 우선 '그럴 만해서 그런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다. '그럴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근거나 이유가 없이는 그렇게 될 수가 없다', '그렇게 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나 근거가 있어서이다'는 의미이다. 충분근거율의 정확한 뜻을 말하자면 '인간이 그렇게 파악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근거가 되는 원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P.46)

쇼펜하우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그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이유 내지는 근거가 있게 마련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아무런 이유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생각이다. 이유가 없는 것이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인간은 '왜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 존재는 왜 그러한 방식으로 존재하는지'에 관해 의문을 갖는다. 존재하는 것들은 왜 존재하는지, 존재하는 것의 특성은 왜 그런한지에 대해 항상 궁금해하는 것은 인간 사고의 근본적인 욕구라고 쇼펜하우어는 확신한다. 인간이 이렇게 근거를 찾아 올라가는 사유 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충분근거율이라는 인식의 원리에 따라 인식한다고 보았다.

쇼펜하우어가 <충분근거율의 네 가지 뿌리>에서 내리는 결론에 따르면 인간은 사유 방식의 특성상 근거를 찾아서 인식하게 되어 있다. 이것을 '충분근거율'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한다. 인간은 충분근거율이라는 이름 할 수 있는 네 가지 인식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통의 문제를 말하면서 왜 갑자기 '충분근거율'을 거론하는 것일까? 아시다시피 쇼펜하우어는 고통의 뿌리를 찾고 있는 중이다. 그는 고통이 생기는 것과 인간 사유 방식의 특성 사이에 어떤 연관 관계가 있다고 본다.

(P.48)

인간의 인식은 왜 주체와 객체가 구분된 상태에서 주체가 객체를 인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주체는 왜, 어떻게 객체를 인식할 수 있는지 많은 철학자들이 고민해 오기는 했지만 인간 인식의 한계상 명료히 밝힐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인식을 하려고 할 때 인식의 주체와 객체가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일일까? 인식을 하려면 인식하는 주체가 있어야 하고 인식되는 객체가 있어야 함은 피할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우리가 신의 인식 구조를 알 수가 없으니 인식이라는 것이 원래 주체와 객체가 구분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 아니면 이것이 인간의 인식 구조의 문제 즉, 인간 인식의 한계인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인식을 할 때 왜 주체와 객체의 구도에서만 파악할 수 있는지에 대해 우리 인간이 어떻게 알겠는가? 다시 말해 인간이 이렇게 생기게 된 이유를 스스로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주체가 없이 객체를 인식할 수는 없다' 그래서 주체와 객체 사이에는 증명 불가능한 관계가 정립되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이 증명 불가능한 관계'충분근거율'이라는 표현으로 포착한 셈이다. 주관이 인식을 하려면 이 근거율에 의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P.49)

충분근거율모든 표상들을 지배하는 법칙인데 객관과 관련되는 원리가 아니라 주관과 관련되는 원리이다. 쇼펜하우어의 주장은 인간이 표상을 할 때 존재의 근거율, 인식의 근거율, 생성의 근거율, 행위의 근거율이라는 충분근거율에 따라 표상한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이 표상을 할 때 표상의 방식에 작용하는 어떤 원리가 있는데 그 원리를 '충분근거율'이라고 명명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쇼펜하우어는 우리의 인식 능력의 다양한 법칙들을 '충분근거율'이라는 용어로 기술한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표상이라는 용어를 통해 설명하려는 것은 우리의 의식과 그 의식에 부합하는 대상이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상이 원래 그렇게 생겨서 우리가 그렇게 파악하는지 아니면 우리가 그렇게 파악하게 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파악하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그렇게 파악하게 되고 대상은 그렇게 파악된다는 말이다.

(P.51)

(ㅇ)

철학에서는 시간공간직관의 형식이라고 한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이 있어야 무언이든 지각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시간과 공간을 직관의 형식이라고 한 것이다. 직관은 직접적으로 본다는 뜻이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것만 파악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형식 안에 있는 사물만을 존재한다고 느끼고 파악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의 근거율은 시간과 공간이다. 시간과 공간을 배제하고는 무엇의 존재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표상들은 공간적인 위치와 시간적인 흐름 속에서만 파악된다. 공간적인 앞뒤의 구분이 없고 시간적인 선후의 구분이 없다면 표상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즉 우리가 무언가를 떠올릴 때 시간과 공간을 배제하면 그 무언가를 떠올리는 일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시간은 연속이라는 관계를 표현하고 공간은 위치라는 관계를 표현한다.

쇼펜하우어는 시간과 공간이 '개체와(개별화)의 원리'임을 전제하고 말한다. 시간과 공간을 개체화의 원리로 보는 것은 철학에서는 통상 인정되는 내용이다. 왜 시간과 공간이 개체화의 원리인가? 단순화해서 예를 들어 보겠다. 너와 나의 존재가 다른 것은 너와 내가 같은 시간에 존재하지만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 다르기 때문이다. 공간이 구분되지도 시간이 구분되지도 않는다면 너와 나는 동일한 존재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구분되지 않고서 이 존재자와 저 존재자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P.56)

(ㅇ)

1차적 표상을 오성의 작용으로 생긴 직관이라고 말한다. 직관이라는 것은 '직접적으로 본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어떤 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가지게 되는 상'을 직관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책에 대한 직관, 책상에 대한 직관, 스탠드에 대한 직관 등 무수히 많은 직관을 가지게 된다. 이 1차적 표상인 직관이 있기 때문 우리는 개념을 형성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웃는 얼굴에 대한 직관이 있기에 우리는 '행복'이라는 개념을 형성할 수 있다. 개념의 형성이성의 작용에 의해서 가능해진다. 이성은 인식의 근거율인 논리 규칙을 통해서 개념들과 판단들을 결합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이성은 오성을 통한 직관이 제공되지 않는 한 개념들을 만들어 낼 수 없다'고 말한다. 인간은 인식의 근거율인 이성의 논리적 규칙에 따라 인식을 한다는 것이 쇼펜하우어가 인식의 근거율로 설명하고자 하는 바이다.

(P.60)

쇼펜하우어는 세계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우리는 세계를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더 관심을 갖는다. 지금까지 쇼펜하우어의 대답은 인간은 충분근거율에 입각해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길을 가다 전봇대에 부딪쳤다고 하자. 이 경우 나는 전봇대를 '나' 라는 존재에 가해진 제한으로 경험한다. 전봇대는 나에게 타자이다. 전봇대와의 부딪침은 나에게 자아에 대한 경험과 동시에 타자에 대한 경험을 제공한다. 생각해 보면 나에게는 타자의 집합체가 바로 세계이다. 그런데 인간이 세계에 대한 경험을 하지만 세계를 있는 그대 로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전봇대와 부딪쳤을 때 전봇대에 대해 갖게 되는 표상과, 전봇대에 기대어 친구랑 놀 때 전봇대에 대해 갖게 되는 표상과, 전봇대의 고압선을 다루는 전기 기사를 볼 때 전봇대에 대해 갖게 되는 표상은 각기 다르다. 전봇대의 모양에 대한 표상은 같을지 모르나 그에 대해 느끼는 심상이 달라지기 때문에 이 세 가지 표상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표상표상을 가지는 주체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전개되는 세계의 문제는 그러한 세계를 인식하고 경험하는 주체, 즉 인간에 대한 물음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래서《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의지와 표상의 차원에서는 인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문제를 다룬다고 말할 수도 있다. 쇼펜하우어는〈충분근거을의 네 가지 뿌리에 관하여〉에서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것은 세계 자체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근거율을 통해서 파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세계에 대한 경험은 우리의 선험적인 인식의 제약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이 말은 앞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인간은 자신의 인식 능력의 범위 안에서 만(예를 들어, 시간과 공간 내에서만) 세계를 인식한다는 의미이다.

(P.63)

주관'인식을 행하는 바로 그것' 이다. 주관 즉, 주체는 충분근거율이 적용되지 않는 영역이기 때문에 충분근거율에 입각해 파악할 수 없다. 주체인 '나'는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형성하는 세계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세계가 표상으로서 존재한다는 쇼펜하우어의 주장은 주관이 먼저 있기 때문에 비로소 객관이 존재한다는 입장이나 객관이 먼저 존재하기 때문에 비로소 주관이 존재한다는 입장을 거부한다.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주관과 객관의 결합을 통해서 존재한다. 주관도 객관이 있기에 주관일 수 있는 것이고 객관은 주관이 있기에 객관일 수 있으며 표상은 주관과 객관이 있기에 정립될 수 있다. 주관의 존재 없이 사물 자체를 생각할 수는 없다.

객관은 주관에 대해서만, 즉 주관의 표상으로서만 한한다.

(P.68)

쇼펜하우어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계는 표상이며 이 세계라는 표상의지가 가능하게 한다.' 는 것이다. 그래서《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내용을 간략하게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세계는 표상으로서의 세계인데 그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의지가 드러난 세계이다.' 는 것이다.

이 세계는 표상이며 인식하는 인간이 표상의 주체라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쇼펜하우어의 주장이다. 그런데 이 인식하는 주체인 인간은 육체를 가진 존재이다. 쇼펜하우어의 설명에 따르면 육체세계의 다른 측면인 의지가 행동으로 드러나게 해 주는 매개체가 된다.

​(P.73)

세상에서 노는 것에 가장 시큰둥해하는 사람은 백수다. 그 사람에게는 일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일과 여가가 구분이 안 되고 그리하여 놀이가 놀이로서의 의미를 상실해 버렸기 때문이다. 삶의 역설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일을 열심히 해야 노는 것도 재미있어진다는 것,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인내를 발휘하지 않으면 하고 싶은 것도 어느새 시큰둥해져 버린다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라도 하기 싫은 것을 해야 한다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경우에도 그 하고 싶은 일이 무조건 내가 좋아하는 일로만 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 그러므로 인생을 살면서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

이제 행복의 비밀이 밝혀졌다. 행복은 불행을 그 이면으로 하고 있다. 충분히 목이 마를 때 마시는 물이 맛있고 충분히 배고플 때 먹는 음식이 맛있다. 그러니 행복이 있으려면 필연코 불행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삶의 비밀이다. 그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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