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토

장 폴 사르트르 / 방곤 / 문예출판사 / 352쪽

(201. 3. 2.)

무릇 물체들, 그것들이 사람을 '만져'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사용하고, 그것을 정리하고, 그 틈에서 살고 있다. 그것들은 유용하다뿐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나를 만지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참 을 수가 없다. 마치 그것들이 살아 있는 짐승들인 것처럼 그 물체들과 접촉을 갖는 게 나는 두렵다. 이제 생각이 난다. 지난날 내가 바닷 가에서 그 조약돌을 손에 들고 있었을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이 이제 잘 생각이 난다. 그것은 시큼한, 일종의 구토증이었다. 그 얼마나 불쾌한 것이었던가! 그것은 그 조약돌 탓이었다. 확실하다. 그렇다. 그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손아귀에 담긴 일종의 구토증.

(P.27)

“무엇을 드시겠어요. 앙투안 씨?”

그때 구토가 치밀었다. 나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내 둘레에 여러 가지 색채가 천천히 도는 것을 나는 보고 있었다. 나는 토하고 싶었다. 그렇다. 그때부터 '구토가 나를 떠나지 않는다. 그것이 나를 붙들고 있다.

(P.42)

나는 미래를 '본다'-미래는 거기에, 길 위에 놓여 있어, 현재보다 약간 희미할락 말락 할 뿐이다. 미래가 실현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까? 실현되어보았자 무엇이 더 보태질 것인가? 노파는 약간 절름거 리면서, 또박또박 걸으면서 멀어진다. 그 노파는 선다. 목도리에서 삐쭉 솟은 흰 머리칼을 잡아당긴다. 노파는 걷는다. 그 노파는 저기 에 있었는데, 지금은 여기에 있다...... 나는 내가 현재에 있는지 미 래에 있는지 알 수 없어졌다. 나는 그 노파의 동작을 보고 있는 것일 까? 그 노파의 동작을 세간하고 있는 것일까? 이제 나는 미래와 현 재를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계속된다. 조금씩 실현 되고 있다. 노파는 쓸쓸한 거리를 전진한다. 커다란 남자 신발을 옮 기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시간이란 것이다. 순수한 시간이다. 그것은 서서히 인간 존재에게로 다가온다. 그것은 기다려지고, 그리고 그것이 닥쳐오면 사람들은 답답해진다. 왜냐하면 그것이 오래전부터 거 기에 있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노파는 길모퉁이에 가까이 간다. 그 노파는 이미 검고 작은 헝겊 뭉치에 불과하다. 그렇다. 그것은 새 로운 일이다. 조금 전에는 노파가 거기에 없었다. 그건 그렇다. 하지 만 그것은 퇴색하고 케케묵은 새로운 것이어서 절대로 사람을 놀라 게 할 수는 없다. 노파는 길모퉁이를 돌려고 한다. 돈다-영원의 시 간 속을.

나는 창문 곁을 떠나서, 휘청거리면서, 방안을 걷는다. 나는 거울 에 바싹 끌려간다. 나를 본다. 내가 지긋지긋하다. 여기에도 영원이 또 하나 있다. 마침내 나는 영상(影像) 앞을 벗어난다. 그러고는 침 대까지 와서 그 위에 쓰러진다. 나는 천장을 바라본다. 잠이 온다.

정적, 정적. 이제 내겐 시간의 흐름이나 시간이 지나가는 희미한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천장에 영상들이 보인다. 처음에는 둥근 빛이 보이고 다음에는 십자가 형상이 보인다. 그것이 나비처럼 날개를 친 다. 그러고는 다른 영상이 이루어진다. 이번의 영상은 내 눈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무릎을 꿇고 있는 커다란 동물이다. 앞다리와 안장 이 보인다. 나머지는 희미하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내가 마라케크에서 본, 돌에 매놓은 낙타이다. 그 낙타는 계속해서 여섯 번이나 앉았다가 일어서곤 했다. 장난꾸러기들이 소리를 지르 고 웃으면서 낙타에게 집적거리는 것이었다.

(P.64)

산다는 것이 그런 거다. 그러나 사람이 삶을 이야기할 때에는 모 든 것이 변화한다. 다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는 변화이다. 그 증거로 사람은 정말 이야기를 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마치 정말 이야기가 있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사건은 한 방향에서 생기고 우리는 그 것을 그 반대 방향으로 얘기 한다.

(P.80)

어디에 나의 과거를 간직해둘 수 있을까? 사람은 자기의 과거를 호주머니에 넣어둘 수 없다. 과거를 정돈해놓기 위한 집을 한 채 가 져야만 한다. 나는 나의 육체밖에는 가진 것이 없다. 자신의 육체만 가지고 있는 아주 고독한 사람은 추억을 간직할 수가 없다. 추억은 육체를 거쳐서 지나가버린다. 나는 슬퍼해서는 안 된다. 나는 자유로웠으니 말이다.

(P.126)

'나는 존재한다는, 괴롭도록 되씹는 소리, 바로 내가 그것을 유지하고 있다. 나다. 육체는 한 번 태어나면 혼자서 살아 간다. 그러나 생각은 바로 '내가' 계속하고, 내가 전개한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오, 긴 뱀이며 , 존재한다는 그 감정-나는 그 감정을 고요히 전개한다...... 생각하는 것을 단념할 수 있다면! 나는 노력해본다. 나는 성공한다. 내 머릿속이 연기로 충만 되었다고 느낀다...... 그런데 그게 또 시작한다.

“연기...... 생각하지 않을것, ...... 나는생각하기 싫다...... 나는 생각하기 싫다고 생각한다. 나는 생각하기 싫다는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도 하나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럼 영원히 끝이 없지 않은가?

나의 생각, 그것은 '나다. 그래서 나는 멈출 수가 없다. 나는 생각 하는 고로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생각하기를 단념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그것은 무서운 일이다-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존재하기를 내가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갈망하고 있는 저 무(無)로부터 나 자신을 끄집어내는 것이 바로 나, '나'다. 존재하는데 대한 증오, 심증, 그것이 '나를 존재하게 하는' 방법이며, 존재 속에 나를 밀어넣는 방법인 것이다. 생각은 현기증처럼 내 뒤에서 생겨나고, 나는 그것이 내 머리 뒤에서 생기는 것을 느낀다. 만약 내가 양보하면 그것은 앞으로, 내 두 눈 사이로 오려고 한다- 다만 나는 언제나 양보한다. 생각이 커지고 커진다. 그리하여 거기 나를 충만케 하고 나의 존재를 새롭게 하는 무한한 것이 있다.

(P.186)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말할 수도 없고, 만족스럽다고 말할 수도 반대로 나는 압도되고 있다. 다만 나의 목적은 이루어졌다. 나는 알고 싶었던 것을 알고 있다. 1월부터 나에게 일어난 모든 것을 이해했다. '구토'는 나에게서 떠나지 않았고, 그렇게 쉽게 내게서 떠나리라 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더 이상 그것에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어떤 병도 아니고 지나기는 발작도 아니다. 나 자신인 것이다.

(P.236)

희극적...... 아니다. 거기까지는 가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 중에 희극적일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것은 마치 어떤 신파극 장면과 유사 하다고,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부동하는 유사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주체하지 못하는 거북한 존재의 무리였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누구나 거기에 있을 이유가 조금도 없다. 당황하고 어던지 불안한 각 존재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서 여분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여분', 이것이야말로 저 나무, 저 철책, 저 조약돌들 사이에서 내가 설정할 수 있는 유일한 관계였다. 마로니에를 '헤아리고' 그것들을 라 벨레다와의 관계에 '배치'히여 플라타너스의 높이와 비교하려고 애썼으나 허사였다. 그것들은 제각기 내가 그 속에 가두어버리려던 관계 속에서 빠져나가버리는 것이었고, 고립하여 넘쳐나오곤 했다. 그 관계를(인간 세계의 붕괴를 지연시키기 위하여, 유지하려고 내가 고집을 부리던 그 척도와 양과 방향의 그 관계를) 나는 필연성 없는 것이라고 느꼈다. 그 관계들은 사물에게는 이미 들어맞지 않는 것이었다. 약간 왼편 쪽으로 나의 정면에 서 있는 마로 니에, 그것은 '여분의 것'이었다. 라벨레다도 '여분의 것'......

그리고 '나'도-힘 없고, 피곤하고, 추잡하고, 음식을 삭이며, 우울한 생각을 되씹고 있는- '나 역시 여분의 존재였다.' 다행히도 나는 그것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특히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느끼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그것이 두렵다-나는 그것에 뒷덜미를 잡혀서, 높은 파도처럼 들어올려지지나 않을까 두렵다). 그 여분의 존재를 최소한 하나라도 말소시키기 위해서 자살이나 할까 막연히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나의 죽음 자체가 여분이었을 것이다. 나의 시체도, 그 미소 하는 정원 깊숙이, 이 조약돌 위, 풀 사이에 호를 피도 여분이다. 그리고 썩은 육체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땅속에서도 여분의 것이며, 또 깨끗이 씻기고, 껍질이 벗겨지고, 이빨처럼 깨끗하고 청결한 나의 뼈도 여분의 것이었으리라. 나는 영원히 여분의 존재였다.

​(P.240)

'부조리'라는 말이 지금 나의 펜 아래에서 태어난다. 조금 전에, 고원에 있었을 때 나는 그 말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 말을 찾지도 않았다. 말이 필요 없었다. 나는 말없이 사물을 '가지고' 사물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부조리, 그것은 나의 머릿속에서 생겨 난 하나의 관념도 아니고, 어렴풋한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발밑에서 죽은 기다란 뱀, 저 나무의 뱀이었다. 뱀이랄까, 손톱이랄까, 또는 매의 발톱이랄까, 아무 상관은 없다. 그리고 전혀 정확한 정의를내리지 않고, 나는 '존재'의 열쇠를, 저 '구토'의 열쇠를, 그리고 나 자신의 생활의 열쇠를 발견했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내가 이어서 파악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은 이 근본적인 부조리로 귀착한다.

부조리 역시 말이다. 나는 말과 싸운다. 거기서는 나는 사물을 만지작거리곤 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그 부조리의 절대적인 성격을 정착시키고 싶었다. 인간들의 채색된 조그만 세계에 있어서의 한 동작, 한 사건은 상대적으로만 부조리하다. 즉 그 동작, 또는 사건에 수반하는 상황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러하다. 이를테면 미친 사람의 연설은, 미친 사람이 있는 상황과의 관계에서 부조리한 것이지 그의 헛소리와의 관계에서 부조리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조금 전에 절대의 경험을 했다. 절대, 또는 부조리의 경험이었다. 그 뿌리, 그것이 부조리하지 않을 수 있는 관계란 아무것도 없었다.

(P.241)

한 권의 책. 물론, 처음에는 그것이 지리하고 피곤한 일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도, 또 내가 존재한다고 느끼는 것도 막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책이 완성되고, 내 뒤에 그것이 남을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 나는 그 책의 조그마한 박명(薄命)이 나의 과거 위에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아마도, 나는 그 책을 통해서, 나의 생활을 아무 형오감 없이 회상할 수 있으리라. 아마도 그 어느 날, 등을 오그리고 내가 탈 기차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이 시간, 이 음울한 시간을 분명히 회상하면서, 나는 아마 가슴이 더 빨리 뛰는 것을 느끼며, “모든 것이 시작된 것은 그날, 그 시간이다"라고 말할 때가 오리라. 그리고 나는-과거에서, 과거에 있어서만-나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밤이 된다. 프랭타니아 호텔 2층의 두 창문에 막 불이 들어왔다. 신역(新驛) 공사장에서 , 축축한 재목 냄새가 코를 찌른다. 내일 부빌에는 비가올 것이다.​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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