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현상학

랄프 루드비히 / 이동희 / 이학사 / 276쪽

(2018. 11. 12.)

그는『현상학』을 우선 전체 체계의 “서론"으로 생각하고 썼다. 이 “서론”이 이제는 비록 체계의 “제1부”로 불리지만 셸링에게 보낸 한 편지를 보면 헤겔은『현상학』이 출판된 후에도『현상학』을 서론으로 간주하려는 태도를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서론은 “알게 모르게” 확장되었고. 내적-외적 압력을 받으면서 “거의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짧은 시간 안에”(테오드르 헤링). “헤겔의 예나 생활의 위기의 최정점에서”(알트하우스) 지금의 부피로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사이에 서론은 자기 목적이 되어『정신현상학』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현상학』의 부피가 괴물같이 되어 버린 것은. 헤겔이 소용돌이에 빠진 것처럼 집필에 너무 빠져 버려서 더 이상 멈출 수 없 었다는 주장으로 설명된다.

『현상학』을 쓸 당시 헤겔은 후대의 세대들이 이 저작을 자신의 철학 의 “탄생지” (칼 맑스)로 여기고. 그것을 그의 저서들 중 가장 유명하고도 영향력이 있는 저서로 천명하리라는 사실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현상학』이 완성된 후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그의 체계 안에서『현상학』에게 가장 알맞는 자리를 부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헤겔은 자신의 주저인 뉘른베르크『논리학』(통칭『대논리학』〕이 간행되고 하이델베르크『엔치클로패디』가 예측되는 시기에도『현상학』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몰랐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앞의 주장들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은 이론이 주장된다. 즉『현상학』은 기대하지 않았던 헤겔 철학 체계의 선행적 작품이다. 헤겔은 후기의 체계적인 서술만을 전적으로 애호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시어머니처럼 이『현상학』을 구박하게 된다.

​(P.18)

헤겔의 거대한 사유가 흘러가는 강줄기는 관념론이다. 관념론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그토록 난해한 헤겔 사유의 도정을 더더욱 이해하지 못 할것이다.

관념론은 다음과 같은 그리스어에서 기원한다. idein=보다, eidos= 형상. 원래 감각적인 의미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매우 오래 전부터 감각적인 봄과 외형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뜻했다. 다시 말해 형상과 봄의 기초가 되는 어떤 것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현실과는 대비되는 지금의 말인 "이상Ideal" 과 유사하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에게 “형상Bild”은 정신적 원형, “이데아Idee” 이다. 그리고 손으로 파악 가능한 세계의 모든 현실들은 단지 모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원형, 즉 이념을 단지 구체화시킨 인화된 사진에 불과하다.

대체로 이 생각이 형이상학으로서. 전래의 모든 서양 철학을 지배해 왔다. 이 전래의 서양 철학은 모든 존재의 통일적 근거를 세계의 기초가 되는 정신적인 것, 이념적인 것에 대한 사상 속에서 찾아 왔다. 이 세계는 우리의 표상들 안에 주어져 있다.

이런 생각은 인간 사유에 의한 엄청난 결렬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이 결렬은 계몽주의와 그 결과인 자연과학의 지칠 줄 모로는 발전에 의해 이루어진다. 인간적 이성은 종교와 교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서 모든 인식의 참된 내용인 자연에 기초한다. 경험은 17~18세기의 기계적 유물론에서 최정점을 이를 때까지 제1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경험론이라는 이름하에 인간적 인식이 내리는 최상의 축복을 받는다. 힘과 질료는 새로운 근본 개념이며, 자연사自然事는 신 없이 인과관계의 도움만으로도 해명이 되었다.

우리는 관념론의 위대한 사상가들이 이런 발전에 “대항을 해 왔다"는 철학사의 과장된 정식을 인용할 수 있다. 비록 그들의 전반적인 사상 속에서 이런 정식이 확연하게 눈에 띄지는 않을지라도 말이다.

(P.20)

* 관념론

물질보다는 정신에 가치를 둔 철학 사상으로, 관념 혹은 관념적인 것을 실재적이고 물질적인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실재론 혹은 유물론과 반대적 성격을 갖는다. 관념론은 정신에 의해 세계가 만들어진다고 주장하며, 의식과 독립한 사물(事物)이 아닌 인간의 의식이 만들어낸 관념적인 것만이 세계에 관한 지식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관념론은 사물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정신적인 의식의 세계만을 인정하며, 물질적 세계의 실재에 대한 인식론적 입장을 나타내기도 한다. 관념론은 다음과 같이 주관적 관념론, 객관적 관념론, 선험적 관념론으로 나눌 수 있다.

① 주관적 관념론 : 우리를 둘러싼 사물과 세계는 표상(表象)이나 감각에 불과하며, 우리의 주관적 인식을 떠나서는 어떠한 세계도 있을 수 없다는 견해이다. 대표적 학자로는 버클리, 흄, 피히테 등이 있다.

② 객관적 관념론 :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본질을 정신적인 것으로 파악하였으며 주관적 의식과는 독립한다고 보는 견해이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헤겔셸링 등이 있으며 이들에 의해 19세기 중심 철학으로 자리 잡았다.

③ 선험적 관념론 : 형식주의적 관념론이라고도 하며, 18세기 철학자 칸트가 주장하였다. 세계를 인식하는 힘은 경험보다도 선험적 주관인 의식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견해이다. 인식의 근거를 초월적인 주관에서 찾았다는 데 의의가 있다.

정신의 발전을 나타내 보여 주는 것이『정신현상학』의 궁극적 테마이다.

처음에 정신은 자기 자신과의 격렬한 씨름을 벌인다. 즉 의식으로서의 정신은 변증법적 나선 속에서 자기의식으로 고양하기까지 자신을 도야해 가며, 결국 정신으로서 세계의 무대에 등장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정신의 발전 과정이라는『현상학』의 제목에 계속해서 접근해 갈 수 있다. 이렇게 보면『정신현상학』은 다음과 같이 “정신의 현상들에 관한 이론”을 의미할 것이다.

- 우선 개별적 의식 안에 있는 정신의 현상들은, 감각적 의식으로부터 시작해서 자기의식에 이른다.

- 결국 정신은 세계와 역사 속에서 현상하며, 절대적 정신 속에서 자기 실현에 이르게 된다.

(P.26)

또 하나의 간결한 요약 정리. 우리는 이 요약 정리로 변증법적 운동 법칙을 계속해서 안전하게 확보하고자 한다.

​- 개개의 대상은 우선 자기 자신과 동일하며. 즉자적이다.

- 그러나 그 대상은 또한 구별, 즉 자신의 대립, 나 혹은 다른 것을 위한 존재를 갖는다.

- 이 대립은 또한 지양된다. 그리고 즉자와 대타 사이의 통일은 나의 지知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지知를 풍부하게 한다. 이 통일은 대자 존재에 있다.

이제 새로운 어떤 것이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이로써도 또한 양자 사이의 타당한 절대적 통일, 즉 주체와 객체 사이의 통일은 달성되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직 달성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항상 새로운 변증법적 운동들 안에서 지知와 대상 사이의 대립은 항상 새로운 단계를 거쳐 가면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 진행은 대립이 운동의 종말에 가서 궁극적으로 극복될 때까지 계속된다.

(P.49)​

첫 번째 걸음에 대한 정리

감각적 확신이라는 단순한 형태의 의식은, 우리의 의식이 개별적 대상에 곧바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관계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은 오류이다. 소위 개별적인 것은 오로지 일반자로서만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 지금 그리고 여기라는 개념들, 그리고 무엇보다 언어는 개별자가 일반자라고 폭로하기 때문이다. 지知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물어 간다.

(P.70)

두 번째 사유 운동의 정리

우리는 정신의 두 번째 사유 운동으로서의 지각을 발견한다. 지각은대상을 이제 일반자로서 파악한다. 속성들이 드러나면서 지각은 통일성과 일반성 사이의 모순에 빠진다. 지각이 그에 대해 대답을 주려 할 때 지각은 기만에 봉착하고 만다.

(P.81)

세 번째 단락의 정리

오성은 [예를 들어〕레몬 열매의 개념에 있어서 이〔다양한〕계기들을 함께 생각하고 개념에 있어서 어떤 보편적인 것과 무제약적인 것, 즉 힘을 발견한다. 오성은 힘을 변증법적으로 끝까지 그려 내고자 하며 [힘의〕대타 존재를 힘의 발현, 즉 신맛이 나는 식물. 건강 촉진 등등으로 부른다. 그러나 힘은 또한 대자 존재이다. 비타민 c로 서의 잠재적 힘은 열매의 “내부”에 머물러 있다. “자기에게로 떠밀려 들어온 힘"으로서의 비타민은 대자 존재와 대타 존재의 통일로서 나의 오성의 산물로 남아 있다. 오성은 이제 사물이 힘을 갖는다는 것을 알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知에 대해서도 또한 알게 된다.

(P.91)

노예는 노동에 의해서 자신의 자립성을 획득한다. 주인은 노예에 의존하게 되며 노예는 주인에게 의존하게 된다.

헤질의 사유 과정은 아래에서 급격한 도약을 한다. 그는 저지된 욕구로서의 노동에 대한 정의에서 우리가 추적하기 힘든 다음과 같은 사상으로 나아간다. 즉 노동은 대상을 형성하고 형식화할 뿐만 아니라 또한 노동하는 인간도 형성하고 형식화한다는 사상이다.

앞을 내다보는 사람은 이 구절이 가져온 역사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나중에 칼 맑스라는 젊은 학생도 우리가 읽었던 것과 동일한 말을 읽었다. 맑스는 헤겔의 이 구절에서 노동에 관한 자신의 개념을 도출해 내게 된다. 헤겔의 이 구절은 맑스에게 주요한 사상적 맹아였다. 맑스는 이 맹아를 그 당시에 다음과 같은 자신의 현실적인 혁명적 사신使臣으로 발전시킨다. 즉 노동은 인간을 형성하고, 새로운 산업 사회의 비인간적 노동 조건은 노동자를 탈형성화한다. 맑스는 후에 다음과 같은 입장을 확고히 한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그 자신의 소외를 생산해 낸다!

그러나 헤겔에 있어 이 구절은 맑스와 달리 긍정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의식은〕노동에 의해서 자기 자신에 이른다.” 더욱이 주인의 자유에 의해서 자기 자신에 이른다. 칼 맑스는 자신의 사회적 성향에 기초해서 헤겔의 이 말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다음과 같이 전도시켰다. 노동자는 비인간적인 노동 조건 때문에 자기 자신에〔자기 자신의 자유에〕도달하지 못한다. 그리고 노동자는 사회적으로 비난받아야 마땅할 이런 사실을 불타 오르는 분노의 횃불로 만들어 자본가의 머리를 향해 던진다.

(P.123)​

칼맑스

그는 헤겔 전문가들 중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강력한 인물이다. 그는 헤겔이 죽은 지 5년째가 되던 해 베를린으로 온다. 베를린에서 그는 에두아르드 간스의 강의를 통해 비로소 헤겔 철학과 친숙해진다. 헤겔/맑스라는 이 주제는 관찰자가 갖는 각각의 세계관적 입장에 따라 이득이 될 만한 연구 영역을 제공한다.

우리는 [헤겔과 맑스의 관계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을 이끌어 낼 수 있을것이다.

첫 번째 관점: 헤겔과 맑스 이 두 사람은 동일한 요구를 한다.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철학은 현실적인 지知가 되어야 한다.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철학은 실현되어야만 한다.

여기서 칸트가 이미 여러 모로 추구했던 다음과 같은 물음이 새롭게 터져 나온다. 지知와 사유에 있어서 이성 사용은 실천적 차원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칸트는 이 물음을 긍정하며 이론적 이성보다 실천적 이성을 우위에 둔다.

헤겔 또한 지知와 행위(이론과 실천〕사이의 관계를.「이성」과「정신」사이를 이어주는 구절 안에서 회복시키고 있으며 이 관계를 “현실적 지知”로 요약한다. 그러나 이 개념은 맑스의 귀에는 너무나 비실천적으로 들렸다 철학은 이성이 무엇을 위한 능력이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지시해야 한다고 맑스는 요구한다. 맑스는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장으로부터 핵심적 개념을 이끌어 내어 수용한다. 노동 안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에 이른다. 여기서 헤겔은 실제로 [맑스의〕대부이다. 그러나 대부는 [맑스에게〕신랄하게 비판당한다. 헤겔은 단지 정신적 노동을 알 뿐이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현실적인 구체적인 노동자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맑스의 추종자들은 이 비판에 공감해서 헤겔에게 노동이란 지知[이론〕의 발전을 바라보는 일면적 관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맑스의 적대자들은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그들은 경제적 생산과 그것의 결과 만을 고려하는 이 일면적인 연관에 있어서 노동의 개념이 현실적으로 파악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질문한다.

두 번째 관점: 맑스는 헤겔의 변증법적 도식을 수용한다. 자기 실현은 자기 외화라는 우회적인 길을 통해서 일어난다. 맑스에 의한 헤겔의 전복을 단순화시켜 말해 본다면. 이런 것이다.

A. 헤겔: 자연과 물질적인 것은 정신의 외화의 결과이다.

B. 맑스: 이념적인 것과 정신은 질료의 진화적 산물이다.

(아주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질료는 맑스에게 어떤 광물 조각이나 물리적 요소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에 대해 노동을 가하며 또한 그것에 의해서 스스로를 형성해 가는 인간이다!)

앞에서 언급한 명제 A와 B를 정확하게 살펴 본 사람은 매우 본질적인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주어가 이 명제들 속에서 서로 다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헤겔에 있어 주어는 자기의식의 운동이요. 맑스에 있어서 주어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운동이다.

여기서 우리는 변증법을 묘사할 때 쓰였던 머리와 발이라고 하는 유명한 그림을 드디어 만나게 된다. 맑스는 헤겔을 비판하기를. 우리를 둘러싼 사물들은 우리의 머리 속의 의식 단계가 매번 만들어 내는 모사가 아니라(그런데 헤겔은 이렇게 주장한 적이 한번도 없다!). 오히려 머릿속의 개념은 현실적인 사물의 모사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래서 맑스는 이 “이데올로기적 곡해"는 수정되어야만 하며 머리로 서 있던 헤질의 변증법을 다시 다리로 서게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맑스에 따르면 철학의 중요한 관심사란. 이성이 실천적이 되어 노동자가 처해 있는 비인간적 상태와 정의롭지 못한 상태에 이성이 관여할 수 있는 현실을 산출해 내는 것이다.

​(P.24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