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햘한 의식의 모험

헤겔의 정신현상학

강순전(글), 김양수(그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 삼성출판사 / 109쪽

(2018. 11. 9.)

헤겔은 칸트와 더불어 독일을 대표하는 철학자이다. 두 사람은 철학의 역사에서 서로 뚜렷이 구별되는 대표적인 두 가지 사고의 들을 제공 한다. 현대의 주요한 사상들도 대부분이 칸트와 헤겔의 사상을 응용한 것일 만큼, 두 사람은 사상사에 큰 영향을 끼셨다. 그런 헤겔의 대표작이 바로《정신현상학》이다. 철학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그냥 지나 치지 못하는 이유가 짐작이 갈 것이다. 게다가,《정신현상학》은 헤겔의 사상을 풍부한 소재를 통해 설명해 주는 책이라 더욱 읽을 만하다.

왜 사람들은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벌려고 할 까? 왜 어떤 사람은 자존심을 굽히지 않으려고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목숨이 아까워 쉽게 자존심을 버리는 걸까? 세상은 왜 내 마음 같지 않은가? 나의 선한 이상이 왜 부조리한 세상사의 거친 풍파에 부딪혀 좌초해야만 하나? 청년들은 자기 이상에 따라 세계를 변혁하려 하고, 노인들은 세상에 자신을 기꺼이 맞추며 살아간다. 어느 쪽이 더 현명할까?

《정신현상학》은 이러한 질문들에 답을 줌으로써 인간을 깊이 이해하게 해 준다. 더 나아가 사회를 이해하는 지침을 제공하기도 한다. 개체가 공동체에 앞서는가 아니면 공동체가 개체에 대해 우선인가?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기? 이러한 문제들을 생각해 보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도 크게 도움이 된다.

(P.7)

헤겔 사상을 대표하는 것은 변증법이다. 누구나 헤겔 하면 변증법을 떠올릴 만큼 변증법은 헤겔 사상의 핵심이며, 그의 변증법은 후대의 다른 사상가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러면 변증법이란 무엇일까?

사실은, 변증법 사상을 처음 선보인 사람은 고대 그리스의 헤라클레이토스라는 철학자였다. 그는 “신은 낮과 밤, 전쟁과 평화, 배부름과 배고픔이다.”라고 말했다. 해리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이 낮과 밤, 전쟁과 평화, 배부름과 배고픔처럼 대립된 것들의 쌍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한 것이다.

헤겔도 위와 아래, 아버지와 아들, 동쪽과 서쪽 따위를 변증법적 관계의 예로 든다. 위는 아래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위이고, 아래도 위에 대해서 아래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도 아들이 없으면 그냥 남자 어른일 뿐이다. 또, 동쪽은 서쪽에 대해서 동쪽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한쪽이 없으면 다른 쪽도 없다. 이처럼 모든 것은 대립하는 것과 짝을 이룬다는 것이 변증법의 핵심 내용이다.

홀로 존재하는 것 같은 사물도 사실은 반드시 다른 사물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 즉 한 사물은 다른 사물과 어떤 것과 다른 것, 원인과 결과, 현상과 본질, 가능성을 가진 것과 현실적인 것 따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예컨대, 아무 관계도 없어 보이는 나무와 돌은 서로 '어떤 것' 과 다른 것(타자)' 이라는 관계를 맺고 있고, 불은 연기와 '원인' 과 '결과' 라는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씨앗은 '가능성을 가진 것' 으로서 열매라는 '현실적인 것'과 짝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관계들의 양쪽을 나타내는 말들-어떤 것, 다른 것, 원인, 결과 등-을 철학자들은 '범주' 라고 한다. 범주란 사물을 분류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일반적인 개념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관계 들은 모두 서로 대립하는 범주의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모든 사물 이 다른 사물과 관계하면서 존재한다는 말은 사물들이 대립적인 것들의 통일 속에 있음을 뜻하게 된다. 결국 모든 것은 대립적인 것들의 통일로서 변증법적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P.25)

헤겔은 먼저 사물 세계의 질서를 일반적인 범주들의 체계로 정리 하였고, 그러자 모든 사물이 대립하는 것들의 쌍으로 이루어져 있음이 드러났다. 이처럼 헤겔은 범주들을 가지고 세계를 분석한다. 그리고 그렇게 분석된 세계는 변증법적 논리의 지배를 받는 세계이다.

하지만 변증법이 단지 사물이나 사건을 구성하는 대립적 요소들의 정태적 통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변증법은 한 사물이나 상태를 구성하는 두 규정들 사이의 분리 불가능한 상호 작용에서 다른 상태로 이행하는 운동의 논리이기도 하다. 우리는 보통 변증법이라는 방법론 아래서 '정', '반', '합'이라는 도식을 떠올린다. 그것은 부정확하고 추상적인 도식이기는 하지만 변증법을 가장 간편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설명 방식이다. 그 도식을 통해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두가지 대립되는 계기들이 상호 작용 끝에 새로운 단계로 이행한다는 이행의 논리일 것이다. 새로운 단계를 합으로 말하는데, 그것도 또다시 정과 반이라는 대립된 두 요소로 이루어진다.《정신현상학》에서도 하나의 의식의 형태는 그것을 형성하는 지식과 대상이라는 두 가지 대립된 계기들의 상호 작용에 의해 다른 의식 형태로 이행한다.《정신현상학》은 이러한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의식이 진리를 향해 운동해 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의식의 경험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기서도 변증법은《정신현상학》의 서술을 지배하는 방법론으로서 작용한다.

(P.27)

《정신현상학》은 원래 '의식의 경험의 학' 이라는 이름으로 기획되었다. 그렸던 것이 구성에 혼선이 빚어지면서 '정신현상학' 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된 것이다. 실제로 처음 출판된 책들 가운데 몇 권은 겉표지 제목이 '정신현상학', 미처 제거하지 못한 속표지 제목은 '의식의 경험의 학' 이다. 한 책에 제목이 두 개인 꼴이다. 이는 단지 출판상의 실수라고만 보아 넘길 일 이 아니다.《정신현상학》'의식의 경험의 학'이기도 하다. 의식과 정신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둘의 관계를 어린아이와 노인의 관계에 비유하면 이해하기 쉬울 듯하다. 의식은 정신의 어릴 적 모습이고, 정신이 완전히 성장한 모습이다.《정신현상학》은 의식이 여러 경험을 거지면서 성장하여 마침내 정신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 준다.

아이가 자라면서 세상의 모든 것을 알려고 하는 것처럼, 의식은 세상의 진리를 알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의식은 대상을 파악하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들을 사용한다. 의식은 자신이 사용 한 방법이 진리를 탐구하는 데 가장 적합한 방법이고, 그렇게 손에 넣은 진리가 진짜 진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은 늘 자기 생각을 되돌아보기 마련이다. 청년이 된 아이는 옛 모습을 되돌아보고는 그렇게나 확신에 가득 차서 했던 일들이 부질없는 짓이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청년기 역시 성장의 과정인 한, 그가 한 일도 장년이 되면 부질없게 느껴질 터이다. 인간은 산전수전 두루 겪으면서 성숙해 가고, 노인이 되어서야 마침내 세상의 이치에 통달한다. 의식도 마찬가지다. 진리를 얻었다고 확신했다가 그렇지 않음을 알고 절망하기를 거듭한다. 의식이 그런 시행착오 끝에 도달 하는 목적지는 정신이다. 정신은 그때까지 의식이 경험한 모든 내용을 자기 것으로 품어 안은 진리이다.

노인이 지난날을 되돌아보듯이, 정신은 자신이 겪어 왔던 험난한 모험의 과정을 되돌아본다. 노인의 회상 속에서 생에의 여러 장면들이 떠오르듯이, 정신의 회상에서는 이전에 인식했던 이런저런 진리들이 모습을 드러낸다.《정신현상학》이 '의식의 경험의 학' 이기도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의식이 끊임없이 진리를 향해 전진하는 모습을 그린 '의식의 경험의 학' 이 곧 정신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모습을 그린 '정신의 현상학' 인 것이다.

​(P.31)

의식의 경험 혹은 정신의 현상은 '감각적 확신' 이라는 의식에서 출발한다. 감각적 확신이란 '감각으로 파악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인식 방식' 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감각적 확신은 가장 단순한 것을 파악하는 가장 약한 인식임이 밝혀진다. 이제 감각적 확신을 대체할 보다 고차적인 인식으로 '지각'이 제시된다. 지각은 경험주의 인식론처럼 경험을 통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확실한 진리 획득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각 역시 인식이 단지 사물에 대한 파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이 갖는 관계까지 파악하여야 한다는 것을 경험하고는 자신의 주장을 거둔다. 진리를 찾아 헤매는 의식은 다시 '오성' 으로 이행한다. 오성은 사물들의 관계, 즉 법칙을 파악하는 과학적인 인식이지만 정태적인 과학적 인식은 보다 고차적인 생명에 관한 실천적 인식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자기의식을 본질로 하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까지도 파악하여야 우리는 보다 고차적인 진리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의식의 대상이 사물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실천적 관계로 바뀌고 의식은 '자기의식' 이 된다.

사람들은 자기만 인격으로서 인정받으려고 하고 남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서로 싸우고, 그 때문에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생겨난다. 그런데 헤겔은 결국 주인이 노예에 의존하고, 노예는 주인의식을 갖게 됨으로써 상호 인정하는 관계로 나아가게 된다고 한다.

이제 보편성을 깨달은 의식은 진리의 내용을 자신이 모두 간직하고 있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바로 세계의 내용이라고 거침없이 주장하는 '이성' 이 된다. 헤겔이 여기서 말하는 이성은 칸트식의 개인주의적 인간 중심주의 사상을 말한다. 이성을 가진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제일이라는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져 있다. 헤겔은 이런 사람을 돈키호테에 비유한다. 돈기호테는 창을 들고 풍차로 돌진한다. 이 풍차가 나타내는 것은 세상사이다. 제 아무리 잘난 개인도 세상사에 부딪치면서 결국 세상이 진리이고 개인은 그것을 거슬러 살 수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이 세상사에 담긴 진리가 바로 '정신' 이다. 개인적 차원의 이성이 진리가 아님이 밝혀지면서 이제 진리는 정신임이 드러나게 된다. 헤겔은 정신이 예컨대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처럼 개체와 공동체가 조회를 이룬 이상적인 상태라고 서술한다. 정신은 가장 풍부한 지식이고 그 안에 모든 것의 진리 근거가 들어 있다. 의식은 이로써 정신과 일치하게 되고 마침내 자신의 목적지에 도달한다.

​(P.33)

칸트개인의 의식 속에 세계의 진리와 실천 규범이 완벽한 형식으로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헤겔우리가 인식에서나 실천에서나 항상 세상의 구체적인 대상들과 부딪쳐 가면서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누구 말이 맞는가? 사실은 두 주장이 모두 설득력이 충분해서 우열을 가릴 수 없다. 칸트와 헤겔 이후의 철학사를 보더라도 그렇다. 후대의 수많은 철학자들이 두 사람의 사상을 자기 사상에 응용하고 있다. 개인의 주체성과 양심을 중시하는 자유주의와. 개인과 공동체의 합일을 꾀하는 공동체주의가 현대의 대표적인 두 철학 사조라는 사실에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칸트와 헤겔의 사고방식이 모두 현대 철학에도 막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P.37)

대상을 가장 확실하게 인식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렇게 파악된 대상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어떤 용감한 사람이 가장 먼저 "나는 눈으로 보는 것만이 가장 확실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대답한다. 헤겔에 따르면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은 감각적 확신이라는 의식의 형태다. 의식의 첫 번째 형태는 이러한 사람들의 생각을 말한다. 이 생각은 우리가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진리란 무엇인가?' , '참된 인식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이 가장 확실한 인식을 가져다준다고 밀하곤 한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아무 생각 없는 것이다.​

​(P.45)

감각적 확신은 이러한 보편적인 것을 파악하는 데 너무 무기력하다. 처음 우리는 감각적 확신이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인식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에는 그것이 가장 빈약한 인식이라는 반대의 결과를 얻게 되었다.

가장 풍부하고 확실해 보였던 감각적 확신이 왜 가장 빈곤하고 불완전한 인식으로 전락했을까? 감각적 확신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파악하는 방법인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게 파악된 개별적인 대상은 말로 표현하자마자 보편적인 것으로 바뀐다. 존재하는 것은 구체적인 개별자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일반적인 것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다. 철학사를 공부해 보면 이러한 헤겔의 생각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플라톤은 보통 사람들이 생생한 현실 세계라고 하는 현상 세계가 사실은 그 자체로 인식될 수 없는 가상의 세계라고 말한다. 반면 인식 속에서 분명하게 파악될 수 있는 일반적인 관념이 참된 세계라 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구체적인 개별자가 인식의 대상이지만 그것이 인식될 때에는 개념이라는 일반적인 것을 통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헤겔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이러한 부류의 철학자들을 주지주의자(主知主義者)라고 부른다. 이들은 지(知), 즉 이성으로 파악되는 지가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다른 말로 합리주의자, 이성주의자라고도 한다. 헤겔은 이런 합리주의, 이성주의의 마지막 주자이다.

(P.51)

우리는 지식을 보편적인 개념의 형태로 갈무리한다. 감각적 확신은 자신이 대상을 가장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파악한다고 믿지만, 자기가 안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려고 할 때 바로 어려움을 겪는다. 알긴 아는데 분명 하게 말로 표현하지는 못하는 처지에 놓이기 때문이다. 이성주의자 플라톤은 그런 경우 정말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지식말로 분명히 표현되어야 하고 남에게 전달될 수 있어야 하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함은 전달할 수 있는 지식의 꼴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말과 같다는 것이다. 감각적 확신은 대상을 말로 표현할 때 그저 '이것' 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내용에 대해서 아무것도 전달할 수 없는 가장 빈약한 지식이다.

​ 감각적 확신은 대상을 감각을 통해 직접 인식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도 풍부한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그 대상은 단순한 개별자이고, 그것에 대해서 감각적 확신은 그저 '이것' 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에 대해 반성을 해 본 결과, 감각적 확신의 대상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복잡하고 보편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의식은 단순한 것을 파악하는 감각적 확신의 형태로는 대상을 더 이상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음이 드러났다.​

(P.52)

사물이 고유한 본질을 지니려면 다른 것과 구별되어야 한다. 그런데 구별은 다른 것과 관계하는 것이다. 결국, 사물은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것과 관계해야 한다는 모순 속에 놓인다. 이제 사물의 동일성은 관계가 된다. 동일성이 관계라는 것은 모순이다. 사물은 본래 자기 동일적인 것이라고 했지만 자기 동일적 사물은 모순에 의해 파괴되고 만다.

사물이 몰락한다는 것은 사물이 동일성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사 물은 그 자신으로 있지 못하고 파괴되어 해체된다. 사물이 파괴되고 해체 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것은 하나의 단위로 통일되어 있던 사물이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제 사물은 하나의 통일체로 존재하지 못하고 관계가 된다. 관계란 자기와 다른 것이라는 두 개의 관계 형틀로 이루어진다. 결국 하나의 통일체로서 사물은 부정되고 두 개의 사물들, 두 개의 관계항들로 이루어진 관계가 사물의 진리임이 밝혀진다.

지각의 대상은 사물이다. 지각은 처음에 사물을 하나의 통일체로서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이 통일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진리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사물을 잘 관찰해 보면, 지각의 생각과는 달리 그것이 통일체가 아니라 관계임이 밝혀진다. 관계는 하나의 사물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지각에 의해서는 더 이상 파악될 수 없다. 지각의 방식으로 진리를 파악하고자 했던 의식은 좌절하고, 의식은 이제 새로운 진리 인식의 방법을 필요로 한다.

​(P.58)

지각과 경험의 결과인 관계를 파악하는 의식오성이다. 동일적 대상으로서의 사물은 결국 관계 속에서 그것의 진리를 파악할 수 있음이 드러났다. 사물은 지양되어 사물과 사물의 관계인 법칙 속에 위치하게 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진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하나의 사물을 그대로 받아 들이기만 하면 진리라는 지각의 생각은 단순한 생각이다. 하나의 사물이 다른 사물과의 관계 속에 있고, 진리는 하나의 사물 차원에서가 아니라 관계 속에 있다는 생각이 오성의 생각이다.

​(P.61)

헤겔은 법칙의 뒤집힌 세계 논리가 생명의 논리와 같다고 한다. 이로써 헤겔이 말하려는 바는 법칙보다 생명이 더 높은 단계의 진리라는 것이다.

후대의 여러 철학자들이 헤겔의 이러한 통찰을 탁견이라 평가하였고, 그의 견해에 동조하여 과학주의비판하였다. 과학주의 입장에 선 사람들은 과학적 지식이야말로 최고의 진리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철학자들은 과학이란 세계를 설명하는 다양한 방식들 가운데 한 가지일 뿐이며, 과학을 비롯 하여 모든 형태의 지식들의 원천인, 우리의 생활 세계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학적 지식만이 지식의 표본으로 간주되고 다른 모든 지식이 무시된다면 세계는 추상화하고 세계의 다양성들이 무시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세계를 생생하게 파악할 수 없다고 헤겔은 비판한 것이다.

헤겔은 법칙에 대한 지식보다 더 우위에 있는 것이 생명에 대한 지식이라고 말한다. 의식의 경험에서 이제 새로운 대상은 생명이다. 이제 의식은 자신과 똑같이 생명을 가진 존재를 대상으로 한다. 이러한 의식을 우리는 자기의식이라고 한다. 이전에는 대상에 대해 의식했지만 이제 자기와 동일한 것, 자기 자신을 의식한다. 이렇게 의식의 진리는 자기의식임이 밝혀지면서 우리는 자기의식이라는 의식의 형태가 겪는 경험으로 넘어간다.

(P.66)

동물은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자기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수치심은 자기의식에서 비롯한다. 자기의식이란 자기에 대한 의식이다. 우리는 자기를 어떻게 의식하는가? 나는 나이다. 이것이 자기의식의 출발점이다.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나이고 나여야 한다. 이러한 나에 대한 의식을 우리는 자아에 대한 의식, 자의식이라고 한다. 자의식을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고한 의식, 즉 주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는 남에게 주체로서 존중 받기를 원하지, 객체로 이용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자의식은 곧 자존감이다. 남이 내 자의식을 무시하거나 그것에 상처를 주었을 때, 우리는 자존심 상해 한다.

자기의식을 존중하는 것을 헤겔은 인정이라고 부른다. 인간이 자기의식을 본질로 하는 존재인 한,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 한다. 또한, 우리는 자신이 인격으로서 존중 받으려면 남의 인격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의식 만 남에게 존중 받기를 원하고 남의 자기의식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들기 십상이다. 이렇게 인간의 자기의식은 욕구의 형태로 나타난다. 욕구란 자아가 존재에 관계하여 그것을 부정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인간은 욕구를 채우기 위해 맛있는 음식을 먹어 치우고 산을 깎아 집을 짓는다. 자연의 사물을 부정하여 자기의 의도대로 변형함으로써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킨다. 꼭 자연에 대해서만 그러는 것이 아니다. 같은 인간을 상대로 해서도 남을 부정하고 자기 마음대로 부리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남을 자기와 똑같이 자기의식을 가진 인간으로 대우하려 하지 않는다. 남의 자기의식을 무시하고 마치 자기의식이 없는 동물이나 사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루려고 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취급 받기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결국 싸움이 벌어진다. 그것은 사람들이 저마다 인간으로서 인정받기 위해 벌이는 싸움이다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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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타인을 인정하기보다 타인에게 인정받기를 원한다. 남을 자기의식으로서 섬기기보다 남의 자기의식을 부정하며, 그러면서도 자신의 자기의식은 남이 존중하고 섬겨 주기를 바란다. 그 의중에 남에게 인정 받으려는 욕구와 욕구가 서로 충돌하여 싸움이 일어난다. 이 싸움은 자기 의식을 가진 인간으로서 대우 받느냐, 아니면 자기의식을 부정당한 채 동 물이나 사물처럼 취급당하느냐를 결정하는 중대한 투쟁이다.​

이때 한쪽의 자기의식은 동물적 생명을 초월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말처럼,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자가 그렇지 않은 자에게 승리를 거두고 인정을 받는다. 그에게는 동물과 공유하는 생명보다 인간을 인간다운 존재로 만들어 주는 자기의식, 자존감이 더 중요하다. 이 자기의식이 바로 주인의식이다. 남에게 자기의식을 인정받은 승자는 주인이 된다. 한편, 다른 쪽의 자기의식은 자기의식으로서 자신을 주장하기보다 죽음을 두려워하여 생명에 집착한다. 그는 '제발 목숨만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패자이다. 패자는 주인의 아량 덕분에 목숨은 부지할 수 있지만, 그 대가로 자기의식을 철저히 부정당한다. 자기의식을 전혀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나 사물처럼 취급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가 노예이다. 그리고 이로써 주인-노예의 관계가 성립된다.

​(P.74)

주인-노예 관계를 논리적으로 고찰해 보면 겉보기외는 반대로 관계가 뒤집힌다. 주인의 자기의식은 '자기=자기' 라는 동어 반복의 성격을 지닌 추상적인 자기의식이다. 주인은 자연에 직접 관계하지 않고 노예의 노동의 결과를 향유한다. 이는 주인이 노예를 통해서만 대상과 관계를 맺고 노예를 통해서만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음을 뜻한다. 결국 주인은 그의 욕구 충족을 노예에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또한 주인이 주인일 수 있는 것은 노예를 통해서이기 때문에, 주인 개념 역시 노예에 예속되어 있다. 그렇게 보면, 주인은 겉보기에는 자립적인 의식이지만 실제로는 비자립적인 의식임이 드러난다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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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은 철학적으로 노예를 주인보다 높이 평가한다. 왜 그럴까? 헤겔이 노예를 더 중시하는 것은 그가 노동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노예는 노동의 상징이다. 노예제 사회에서 노동은 노예나 하는 부정적인 활동이었고, 귀족은 정치적 실천에만 관여했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노동은 사회 형성의 원리로 간주 된다. 노동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노동은 자연의 가공을 통해 자기의식을 자연에 부과하고 그 본질을 실현함으로써 의식이 발전해 가는 원동력이 된다. 헤겔은 노동이 사회 형성의 원리일 뿐 아니라 인간의 본질이라고 본다. 또, 노동을 통해 사회를 형성하는 노예의 노동만이 보편적 자유의 이념을 실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민 사회란 노예가 주인이 되는 사회라고 규정한다. 시민 사회에서는 각 구성원이 남이 소비할 상품을 공급한다는 의미에서 남을 섬기는 노예이고, 남이 생산한 상품을 향유한다는 의미에서 남의 주인이 된다. 시민 사회는 사람들이 누구나 노예이자 주인인 사회이다. 우리는 헤겔의 그러한 생각에서 인간에 대한 탁월한 통찰을 엿볼 수 있다. 노동자라고 남을 위한 수단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 아니고, 노동은 하지 않으면서 목적으로만 대우 받으려는 것도 허위의식임을 그의 시민사회론은 일깨워 준다.

(P.79)

자기와 다른 사물이 아니라 자기처럼 생명을 가진 인간을 대상으로 하면서 의식은 자기의식이 된다. 자기의식의 대상은 생명을 가진 인간이다. 주체인 자기의식은 대상인 인간을 동등한 자기의식으로 대하지 않고 자기의식이 없는 생명처럼 취급하려고 한다. 물론, 객체인 인간도 인간인 한 똑같은 태도를 취하며, 인정투생을 통해서 승패가 결정됨으로써 주체인 주인과 객체인 노예가 결정된다. 하지만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노예가 노동을 통해 자기의식을 획득하고 주인이 편협한 자유의식을 보편적 자유의식으로 발전시키면서 해체된다. 이로써 주인만이 자유롭다는 일면적이고 개별적인 자기의식은 모두가 주인이라는 보편적인 자기의식으로 발전한다. 자기의식이 대상으로 삼았던 생명의 진리는 자기의식임이 밝혀졌고, 자기의식은 자신의 상대방도 자기의식임을 인정하면서 보편적 자기의식으로 바뀐다.​

(P.81)

이성은 자연을 자기방식대로 파악할 뿐 아니라, 사회에 대해서도 자신의 생각이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방식대로 세상사를 규정하고 변경하려고 한다. 칸트는 앞의 것을 이론적 이성이라고 하고 뒤의 것을 실천적 이성이라고 부른다. 이론적 이성에 대해서나 실천적 이성에 대해서나, 헤겔은 칸트의 입장을 비판한다.

먼저, 이론이성에 대한 헤겔의 비판을 살펴보자. 헤겔은 세계란 인간 안에 미리 갖추어진 보는 방식에 따라 이러저러하게 규정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의 인식을 그때그때 세계의 내용에 맞추어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칸트와 헤겔의 이러한 차이는 이미 제1부에서 살펴보았다. 칸트는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이 우리의 의식 속에 갖추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의식 안에 있는 인식의 도구를 잘 파악해서 오류에 빠지지 않고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수영장에 들어가기 전에 수영의 기술을 미리 터득해 두어야 한다는 주장과 같다.

하지만 수영은 언제나 잔잔한 수영장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고, 물살이 센 강이나 파도가 거친 바다에서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리고 장소가 달라지면 그에 맞추어 수영 방식도 바꾸어야 한다. 헤겔은 경험이 항상 대상에 따라 달라진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보아 온, 의식의 다양한 경험이 그것을 말해 준다. 단순한 성질들을 감각을 통해 파악할 때가 있는가 하면, 사물을 파악할 때에는 지각의 방식으로 사물의 성질들을 받아들이며, 더 복잡한 대상인 사물들의 관계오성을 통해 인식한다. 또한, 죽은 사물뿐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도 인식의 대상이 되며, 그 경우에는 분명히 또 다른 인식 방식이 적용된다. 헤겔은 이처럼 대상의 종류에 따라 서로 다른 인식의 방법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P.84)​

실천이성에서도 칸트와 헤겔은 대립한다. 먼저. 칸트의 생각을 알아보자. 실천이성이란 실천을 인도하는 이성이고, 이성이 이끄는 대로 수행하는 실천이 도덕이다. 도덕이란 무엇인가? 아니, 더 구체적으로, 도덕적으 로 행동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남이 보지 않거나 남에게 들키지 않더라도 도둑질이나 거짓말을 하기를 꺼린다. 그 꺼림칙함의 정체는 무엇이고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것이 바로 양심의 가책이고, 우리가 가책을 느끼는 것은 이처럼 우리에게 양심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행동이 도덕적인지 아닌지는 남이 판단해 주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양심이 행위의 도덕성을 판정하는 심판관이다. 칸트는 인간은 누구나 양심을 가지고 태어나고, 양심이 있는 한 어떤 것이 도덕적이고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프리카 인이든 한국인이든, 미국인이든 아랍인이든, 모두가 양심과 양심에 따라 생각하는 실천 이성을 가진 인간인 한 도덕에 관해 합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칸트는 도덕이 개인적 양심에 근거를 두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헤겔의 생각은 그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는 인간의 행위를 윤리적으로 만드는 것은 풍습, 관습 등을 비롯한 공동체의 규범이라고 생각한다. 헤겔은 사람들이 그저 거짓말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도둑질하지 말아야 한다는 등의 몇 가지 추상적인 명제에 대해서만 의견 일치를 볼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런 추상적 명제는 어떤 행동을 어떻게 하는 것이 윤리적인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윤리적 규범으로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헤겔은 주장한다. 그러면 어찌 해야 하는가? 헤겔은 윤리적 행동이란 무엇인지를 배우려면 우선 공동체의 규범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각각의 공동체는 그에 속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며, 공동체의 규범은 그 구성원들의 생활 방식을 결정한다. 아프리카 사람은 한국 사람과 다른 풍습과 관습 속에서 살아 왔으며 살아가고 있다. 아랍 사람은 미국 사람과 다른 종교와 문화 속에서 살아 왔고 살고 있다. 물론 그들 모두가 인간으로서 이성을 공유하고, 도덕적 행위에 대하여 서로 합의를 이를 수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헤겔은 구체적 행동과 관련해서는 그런 공통성보다 차이가 더 크고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개인의 윤리적 행위는 그가 사는 공동체의 규범에 맞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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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주관 안에 보편적 자기의식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실천의 측면에서 보자면, 보편적 자기의식은 곧 실천이성이다 실천이성은 우리에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지를 가르쳐 준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고,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성이 가르치는 내용에 따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안다. 이성이 가르치는 내용이 도덕 법칙이다.

그런데 헤겔은 칸트의 도덕 법칙이 주관적 의식의 보편에 머물 뿐, 객관적 현실에까지 높여지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칸트의 도덕 법칙은 인간 주관에 공통된 것이지만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령, 칸트의 도덕 법칙은 '누구나 진리를 말해야 한다.' 거나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고 말한다. 하지만 헤겔은 그것만으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첫 번째 법칙에는 '진리를 안다면' 이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먼저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그것을 실천 할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법칙 자체는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도덕 법칙도 그것을 구체적 상황에서 실천하려면 사랑이라는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알이야 한다. 이러한 전제와 구체적 상황이 바로 세상에서 통용되는 현실이다.

이처럼, 헤겔은 칸트의 도덕 법칙이 구체적인 현실을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고 비판한다. 설령 보편적이라 할지라도, 그 보편이란 주관적 의식 안에 머무는 보편이지, 객관적 현실을 반영하는 보편일 수 없다. 덕의 기사가 세상을 상대로 실천하다 좌절하고 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성은 보편적 자기의식이다. 하지만 그 보편성은 주관적 보편일 따름이어서 객관적 현실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이성은 세상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음을 알고 좌절한다. 하지만 이성은 자연을 관찰하고 세상 속에서 실천하면서 객관적 현실에 관한 내용을 습득한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을 통해 객관적 현실로 지양된 이성이 정신이다.

(P.93)

헤겔이 그리는 인륜적 공동체의 이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편으로 구성원 모두가 전체의 목적을 깨달아 그에 기여하는 활동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서로 구별되는 각 구성원들의 자각적 활등을 통해 공동체 자신이 주체적인 성격을 획득하는 상태, 곧 개체와 공동체의 통일이다. 달리 말해서, 그것은 인륜적 정신이 자각적으로 스스로를 구별하고 그 구별을 통해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의 내용을 형성해 가는 과정이다. 결국 헤겔의 인륜적 정신은 당대의 대표적인 두 사상인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일면성을 비판하면서 둘을 통일하는 사상인 것이다.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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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에게 승고한 마음을 가지고 우러르지 않을 수 없는 두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내 머리 위의 별이 빛나는 밤하늘과 내 마 음속의 도덕 법칙이다.” 평생을 경건한 마음으로 철학을 했고, 욕구를 억

​제하고 도덕적 의무를 띠를 것을 설파했던 대철학자 칸트의 묘비에 적현 이 문구를 읽는 우리의 마음은 실로 경건해질 수밖에 없다. 칸트는 평생 이 두 영역의 진리를 탐구했고, 그 오묘한 이치에 경외심을 금치 못했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은 우주의 이치를 말하며 그것은 《순수이성비판》의 대상이다. "내 마음속의 도덕 법칙”은 도덕의 세계를 말하며 그것은《실전이성 비판》의 대상이다. 칸트 철학의 두 원리는 이처럼 나 밖의 자연이라는 객관과 내 안의 도덕 세계라는 주관의 영역으로 구분될 수 있다. 칸트에게 자연은 인간 주관이 어찌할 수 없는 타자의 요소를 지니지만, 도덕은 전적으로 주관적 사실이다.

헤겔은 도덕과 인륜은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 현실 속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칸트에게 객관적 현실이란 내 머리 위에 별이 빛나는 밤하늘이요 도덕이란 단지 주관적인 것일 따름이었다면, 헤겔에게 도덕과 인륜이란 내 머리 위에서 빛나는 객관적 현실이었다. 헤겔이 생각하는 윤리는 더 이상 개인의 양심이라는 좁은 틀에 갇혀 있지 않다. 윤리적 행위의 기준과 지침은 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현실로 서 공동체의 규범 속에 있다. 이로써 우리는 고등학교《시민윤리》교과의 〈민주적 도덕 공동체의 실현 과정〉 단원에서 “개인과 사회와 국가의 관계로 윤리를 치환함으로써 국가 공동체의 윤리를 정립”하였다고 헤겔 윤리학을 평가한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현대의 공동체주의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 이 공동체 윤리는 칸트의 영향을 받은 자유윤리와 대립한다. 결국 현대의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윤리사상 사이의 대립은 칸트와 헤겔의 후예들이 두 사람을 대신해 치르는 대리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자유주의는 개인이 사회에 우선한다는 사상이다. 존 로크에서 시작하여 칸트로 이어진다. 공동체주의는 개인은 사회 속에서만 완성될 수 있다는 사상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했던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해서 루소와 헤겔, 마르크스 같은 주요한 사회철학지들로 이어진다. 이 두 사상은 현대에도 주요한 사상 조류로 살아남아,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현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서로 다른 대안들을 제시해 가고 있다.

(P.104)

​ 지금까지 우리는 의식의 경험의 긴 여정을 따라왔다. 의식은 감각적 확신, 지각, 오성이라는 대상의식의 형태를 띠고 진리를 파악하려고 했다. 하지만, 곧이어 대상의식의 진리는 자기의식임이 밝히지고, 자기의식으로서의 의식이 보편적 자기의식으로 고양되는 것을 목격했다. 이성으로서의 보편적 자기의식은 개별적 의식 차원의 보편성만을 확보했기 때문에 보편적 자기의식은 주관의 제한을 넘이서 객관적 현실로까지 확장되어 정신이 되어야 했다.

의식은 자기 밖의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한다. 의식의 여러 형태들은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 대상을 파악하려고 한다. 대상을 파악 한다는 것은 대상과 합치하는 것을 뜻한다. 대상과 분리된 의식은 그것과 하나되는 진리라는 고향을 찾아 끊임없는 모험을 감행한다. 결국 의식은 정신이 되면서 자신의 고향인 진리의 왕국에 도달한다. 정신은 대상과 합일한 진리이기 때문에 자기 외부의 자기와 다른 대상을 추구하지 않는다. 정신은 스스로 자신을 분리하여 자신의 다른 모습으로서 대상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인식함으로써 자신을 인식한다. 이러한 정신의 활동 속에는 지금까지 여러 형태의 의식들이 제각각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추구하였던 진리의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한 의식의 형태가 지양되어 더 높은 의식의 형태에 포함되는 식으로 의식의 경험이 진행되는 터라, 마지막 단계의 정신은 앞의 모든 의식 형태들이 파악한 진리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이제 정신의 활동은 의식의 형태들의 내용을 산출하는 것이고, 지금까지의 의식의 경험은 정신의 활동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감각적 확신이라는 출발점에서 앞쪽을 보면 의식은 진리를 향해 전진한다. 하지만 정신이라는 도달점에서 되돌아보면 앞의 의식들의 경험이란 바로 정신의 자기 전개의 모습들이다. 정신 안에는 모든 것이 들어 있고 그것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의식의 경험들은 인간이 신을 알아 가는 과정에 비유 될 수 있다.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는 것이 신이듯이, 의식의 경험을 가능케 하는 것은 정신이다. 종교가 세상의 모든 것을 신의 계시로 간주하듯이, 《정신현상학》은 세계의 모든 것을 정신의 현상, 정신이 자신을 보여 주는 모습으로서 설명한다.

(P.106)

우리는 인식을 통해 무엇을 지향하는가? 모든 학문 활동이 지향하는 바는 진리이다. 철학은 진리가 무엇인지를 말해 주려고 한다.《정신현상학》 은 의식의 경험을 통해 진리 추구의 여러 모델들을 소개하고 진리가 어떤 성격을 지녀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정신은 진리이며, 진리를 찾아 헤매는 의식의 고향이다. 《정신현상학》은 진리로서의 정신이 의식 속에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 준다. 의식은 대상에 대한 의식으로서 대상인 세계의 모습을 포함한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의 경험 속에서 나타나는 정신은 곧 세계 속에서 현상하는 진리의 모습이다. 《정신현상학》은 의식의 경험, 즉 인식의 진리에 관한 이론이자 진리로서의 세계의 내용을 밝혀 주는 이론이다. 이 책이 말하려는 것은 '인식의 진리는 곧 세계의 내용'이라는 평범하게 들리는 내용이다. 하지만《정신현상학》은 그것을 의식의 경험과 정신의 현상이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서술함으로써 이전의 철학적 이론들의 한계를 비판하고 새로운 철학적 방법론의 지평을 열어 놓았다.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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