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파간다 - 대중 심리를 조종하는 선전 전략
에드워드 버네이스 지음, 강미경 옮김 / 공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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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상급식을 두고 벌이는 논쟁을 보면 으레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포퓰리즘’이란 단어가 바로 그것이다. ‘포퓰리즘’의 정확한 개념적 정의를 별개로 이 단어에는 비이성적인 대중영합적인 정책이란 의미가 숨겨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대중을 규정하는 ‘비이성적’이란 단어이다. 대중의 광기에 집중하여 한쪽을 비이성적이라고 규정하는 낙인효과는 꽤나 섬뜩하다. 대중의 요구는 그저 철모르는 아이의 울음 정도로 치부되곤 한다. 그래서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행정기관에서 내놓은 광고에 등장한 아이의 우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대중은 자신의 요구가 받아지지 않으면 울면서 떼쓰는 아이에 불과하다. 광고사진이 어른의 몸에 아이의 얼굴을 합성한 사진은 대중이란 어른의 몸을 빌렸을 뿐 여전히 아이 정도의 판단력밖에 못 지닌 존재이다. 

 대중사회가 도래할수록 선전과 홍보의 역할이 지대하다. 이는 곧 대중을 유약하면서 충동적인 집단으로 여성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대중은 휩쓸리기 쉬우며 적당한 촉매제를 넣어주면 불꽃처럼 반응한다.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프로파간다’는 대중의 여론을 조작하고 선전하기 위한 전략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프로이드의 사촌이기도 한 저자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과 대중심리학을 결합하여 대중을 선동하는 방책을 내놓는다. 대중을 조종하는 선동가는 냉철하고 남성적인 이미지로 그려진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선전은 ‘보이지 않은 정부’의 역할을 수행한다. 시장의 작동원리처럼 은밀하게 대중의 심리에 스며드는 이 정부는 전쟁 참여의 정당성부터 흡연의 정당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일을 한다.   

 히틀러의 선전장관인 괴벨스가 탐독했다는 이 책은 자연스럽게 전체주의 사회를 떠올리게 한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그려진 전체주의 사회는 텔레스크린이 도처에 깔려있는 감시사회이기도 하지만 잦은 집회로 대중을 선동하는 사회이다. 전체주의 사회의 선전이 직접적으로 외쳐대는 확성기라면 민주주의 사회의 선전은 은밀한 속삭임이다. 정치장에서 중요했던 선전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광고라는 탈을 쓰고 등장한다. 너나없이 들고 다니는 잇백에서 우리는 광고의 힘을 느낀다. 유행은 파리, 뉴욕, 도쿄, 서울 등을 가릴 것 없이 순식간에 우리를 휘감는다. 잡지에 넘쳐나는 온갖 브랜드의 광고를 보면 브랜드의 이름과 이미지만 있을 뿐이다. 거기에 제품의 기능이나 가격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 않는다.  

 선전은 은밀하게 다가온다. 저자가 교묘하게 자신의 주장을 포장하는 방법에서 이는 쉽게 들어난다. 버네이스는 자신의 주장을 직접화법으로 전달하지 않는다. 간접화법에 담긴 그의 주장은 무의식을 염두한다. 최대한 객관적인 화법으로 전달되는 책의 서술방식에 담긴 선전은 놀랍다. 언어를 조작하여 마음을 조작한다. 버네이스는 바람직한 사회로 대중을 이끌기 위해서 선전의 정치적 힘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 바람직한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그 사회란 지배엘리트 계급이 꿈꾸는 사회로 플라톤의 ‘국가’에서 등장할 법한 철학자왕의 국가이다. 바람직한 사회로 부르든, 유토피아로 부르든 그 사회의 지향점을 결정하는데 소수의 엘리트의 역할만 강조되어 있다. 우리를 따르라는 구호만 있을 뿐 왜 따라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변은 없다. 

 한국사회는 민주주의 사회이자 자본주의 사회이다. 그러나 정치적 힘은 전직 대통령의 자기고백적 말을 빌리자면 경제적 힘에 굴복한지 오래이다. 자본의 압력에 우리는 불안을 느낀다. 지금의 불안은 미래의 불안으로 이어지고 삶의 전망을 어둡게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저항은 분노이다. 분노의 힘은 결국 우리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다는 깨달음으로부터 나온다. 분노하기 위해서 우리는 명확하게 현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데이비드 버네이스의 ‘프로파간다’는 우리를 뒤엎고 있는 선전의 원리를 깨우치는데 유용하다. 도처에 넘쳐나는 선전의 물결에서 중심을 잡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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