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 (亂) - 할인행사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 나카다이 타츠야 외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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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영상으로 형상화했을 때, 이보다 더 잘해낼 수 있을까?

처음의 각본은 ‘리어왕‘과 사뭇 달랐다고 하지만 극본 작업 과정에서 영화는 ‘리어왕‘의 충실한 리메이크로 변모했다고 한다. 초고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보는 내내 나는 이렇게 기묘할 정도로 원작에 충실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주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영화의 미학적 요소들부터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일본의 건축미 뿐 아니라 전반적인 예술미를 크게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여러 대가의 작품들에는 찬사를 보내지만, 전반적인 일본의 예술문화가 나와는 안 맞는 지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형상화한 일본 문화의 아름다움, 특히 비장미는 극강이다. 정확히 말하면 막부와 사무라이 시절의 미학을 재현한 것인데, 원작에서 묘사된 유럽 여러 나라와 지역 영주들간의 난세를 표현하기에 일본 전국시대만큼 딱 떨어지는 예도 없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영상미학 중 나를 사로잡은 것이 여러 가지 있는데, 스탠리 큐브릭의 배리 린든과의 유사성이다. 배리 린든은 제3자의 시선으로 한 인물의 지난한 삶을, 조금은 냉소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서술한다. 배리 린든이 그러하듯이, ‘란‘에서도 이야기 중간마다 자연풍광이 롱숏으로 들어온다. 하나의 광경이 그림 같이 나타난다. 구름은 어지럽게 이지러뜨려져 있는데, 그 아무 의미없는 변화가 인간사의 역경을 비웃듯이 평화롭다.
IMDB에서도 지적하는 사실인데, 이 영화는 클로즈샷이 매우 드물다. 히데토라의 얼굴이 그나마 가깝게 보이지만 나머지 인물들의 얼굴은 유심히 봐야 그 얼굴을 알 듯 하다. 셋째 아들인 사부로의 얼굴은 마지막까지 관객에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마지막 부처의 평안한 존안만이 인상적으로 기억될 수 있을 뿐이다. 이 인간사의 허망함을 가까이 들여다 보면 너무나 고통스러워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또 하나는 전투장면의 충실한 표현이다. 찬란하다고 표현할 만큼 미적으로 우수한 세번째 성에서의 전투 장면은 직접 성을 지어서 불을 지르는 상태에서 찍었다고 하니,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에 대한 고집을 엿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여러 장면은 히데토라의 충복들이 죽어가는 찰나의 모습들인데, 히데토라의 고집이 자기 사람을 고통스럽게 죽인다는 그 잔혹한 사실이 생생해서 특히 좋았다. 또한 근육질의 말들이 잘 드러나 무사의 이미지가 아주 잘 표현되었다. 이 영화는 인상적일 정도로 말들이 달리는 모습이 멋있다. 직접 말들을 길들이는 노력을 들여서 그런 것일까? 마술의 측면은 내가 잘 모르겠지만, 시각적으로는 확실히 훌륭했다.
호흡이 길기 때문에 참을성 없는 관객이라면 이 대작 앞에 지루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끔은 루즈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말 그대로 대작 아닐런지. 그러한 지점도 비극적 성격과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잘 지키고 있다. 폭풍전야는 항상 고요한 법이니까. 사부로와 무사들이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말 아래서 앉아있다가 군사들이 몰려오니 말 위로 재빠르게 올라가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멋졌다. 군사의 멋지고 빛나는 순간만을 보여주지 않고 그 과정 자체의 많은 사소한 것들도 포착한다.
가장 좋은 장면은 광대를 죽이려는 무사가 히데토라의 활에 맞아 죽고, 히데토라가 위에서 그 모든 광경을 노려보는 부분이었다. 모든 비극이 시작되는 버튼을 누르는 장면 같았다.

주제면으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절대비극이라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원작을 하도 옛날에 봐서 가뭇하긴 하지만 카에데와 스에라는 여성 캐릭터가 가미되며 영화 제목 ‘란‘이 모든 내용을 더욱 아우르게 되었다고 본다. 히데토라는 정말 불운한 인물로 나오고, 그의 예전 악행은 잘 보이지 않지만,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모든 일들은 그의 비극이 사필귀정임을 짐작하게 한다.
처음 나는 히데토라가 세 아들들에게 뭉쳐야 함을 가르칠 때, 사부로가 속된 말로 훼방꾼처럼 보였는데, 극이 진행될수록 정말 사부로가 한 말이 진심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히데토라가 해온 짓들, 그리고 아들들에게 보인 짓들은 화합과 단합을 가르칠 수 있는 언행들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약한 자들에게 해온 짓들, 후환이 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없애버리기 위해 한 잔악한 짓들이 잠복해 있다가 그를 덮쳤다. 아들들은 그를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하고, 공격하는 법만을 안다. 애초에 히데토라가 그들에게 그것만을 가르쳤다.
며느리인 카에데와 스에는 시아버지 때문에 모든 가족을 잃은 인물들이다. 스에는 불심의 힘으로 증오를 극복해냈지만 카에데는 그 증오와 원한을 뿌리 깊게 가진 인물이다. 카에데 역할을 한 배우의 연기에 찬사를. 그녀가 묘사한 카에데는 행동거지부터 전형적인 일본의 고전적 여인상으로 마치 인형이 걸어다니는 것과 같이 매력적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갑자기 내면의 광기를 폭발시키며 칼로 둘째 아들 지로를 위협하는 장면은 가히 전복적이다. 얼마나 많은 분노와 증오를 안에 꾹꾹 눌러담고 있었는지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를 미워할 수 없다. 끝에 잔혹하게 살해당하지만, 그녀는 우리의 또다른 면이다. 원한감정을 잊지 못하는 그녀는 자신의 복수에 성공했다. 혹자는 이 영화의 모든 이야기가 철저히 그녀의 계산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히데토라는 그녀 아니더라도 결국 이러한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스스로가 지옥을 열어둔 사람이었고, 그저 자신이 서있는 곳이 지옥임을 너무나 뒤늦게 알게 된 것일 뿐.
스에와 그 오빠 츠루마루는 가련하고 불쌍한 주인공들이다. 카에데처럼 분노에 가득찬 인물들은 아니지만 한 명은 부처에게 자신을 바침으로써 현세의 고통들을 외면하였고, 다른 한 명은 히데토라에게 눈을 잃어 현세의 아픔들을 보지 못하게 되어 초라한 오두막에 갇혀 있는 팔자이다. 카에데는 스에의 목을 원하고, 스에는 그러한 위협을 피하려 하지만, 츠루마루는 스에가 준 피리를 찾는다. 부처는 그런 그들을 보면서도 여전히 그림 속에서 잠잠히 웃고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 피리 하나가 무엇이 그리 중요하다고. 결국 다시 돌아간 그곳에서 스에는 자신을 돌봐준 나이 많은 하녀와 같이 죽고, 본인은 목까지 잃어버리고 만다.
히데토라 본인의 비극, 우리는 그것에 대해 논할 수 없다. 모든 것을 가졌다가 자신의 아집으로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의 불행이 설령 자기 자신의 과오로 비롯되었다 해도 우리는 그 아픔에 대해 논할 수 없다. 그를 보며 괴로워하는 역할은 광대가 대신 맡아주고 있다. 흔들리는 돌 위에서 뛰어내려야 함을 알면서도 안타까운 히데토라를 외면하지 못한 광대는 온갖 짜증을 내면서도 그를 주군이라 부르며 쫓는다. 이미 주종관계는 사라진지 오래인데, 광대가 그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연민 때문이다. 광대는 관객이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풍자적으로 논평하기도 하지만, 미칠 듯이 슬퍼한다. 그의 아픔은 히데토라를 보는 우리의 슬픔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국 맨 마지막, 절벽에서 헤매는 츠루마루의 모습이 비쳐질 때, 우리는 그 츠루마루가 광야에서 미친 듯이 헤매는 히데토라이며, 떨어진 부처의 그림이 펼쳐져 우리를 바라볼 때, 히데토라가 다시 우리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부처는 우리를 그렇게 멀리서 평안히 쳐다본다. ‘난‘을 사는 우리가 히데토라를 어리석은 인간이라 비웃을 수 있을까? 우리도 어쩌면 그처럼 우리가 저질러놓은 지난 날의 과오들이 어느 날 우리를 최종적으로 겨냥하여 그와 같이 모든 것을 잃고 나락으로 빠질지도 모른다. 그 때도 여전히 부처는 히데토라를 돕지 않은 것처럼 우리도 돕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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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변화라는 것은 ‘나‘라면 하지 않을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시라고는 교과서에서나 마주하는 것이었지 내가 따로 읽는 것은 아니었는데, 시간이 돌고 돌아 끝없어 보이는 여러 번의 바퀴를 돌고 돌아 이 자리에 오니 이상스럽게도 시라는 이름으로 자기를 나누는 이들의 애상이 눈에 밟힌다.
윤동주는 어쩌면 내가 요새 한국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아져서 그럴지 모른다. 겨우 백년 전 일인데, (우리는 일만년전의 과거까지 공부하고 있으니 백년이라 함은 정말 얼마 안 되는 한 줌의 시간 아닌가.) 그와 내가 조금만 시간의 조각이 맞아졌더라면 내가 그의 시간을 살았을 수도 있고 그가 나의 시간을 살았을 수도 있는 것인데, 우리는 정말 옷깃이라도 스쳤을 수도 있는데, 그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살았단 말인가?
기형도도 마찬가지다. 그의 글을 읽으며 믿을 수 없었던 점은 그의 글에서 시대를 읽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기형도는 1960년 생으로 우리 부모님 뻘이다! 단지 29살에 죽어 박제가 된 탓에 백년 전 사람인 윤동주나 그나 내겐 별 차이 없는 문학인인 것일 뿐. 그 역시 어떤 마음으로 살았단 말인가?
왜 나는 과거를 산 그들의 마음을 읽으려 하는 것일까. 왜 나는 그들의 글을 알려고 하는 것일까.
왜 나는 굳이 그들의 글자락이라도 스쳐지나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참 솔직하지 못해서, 같은 시간과 공간을 산다 해도 우리는 서로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인들은 적어도 예술로는 참 솔직해서, 그들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우리와 소통한다. 나는 영혼의 진실을 듣고, 위안을 얻고 싶었다.
하지만 그 영혼의 진실이 다 같은 식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나와 결이 다른 윤동주로부터는 사모하는 마음이 생기고, 나와 결이 비슷한 기형도에게는 연민과 공감이 생겼으니까.

1. 윤동주의 시집을 읽고

윤동주의 글을 읽노라면 한 번도 보지 못한 만주벌판의 허연 눈발과 극심한 추위만 떠오른다. 그곳에서 작은 집에 앉아 초롱불에 의지하고서는 창백하고 파리한 얼굴로 훨훨한 존재론적 아픔을 글로 푼 소년이 보인다. 윤동주는 결국 끝까지 소년이었다. 그의 글에는 성적이고 자연적인 것들이 제거되어 차마 마주 보지 못한 사랑 이야기가 만연하다. 그가 집중한 것은 욕망의 대상, 분노의 상대 같은 외면의 요소가 아니다. 그는 그것들을 통렬히 보려 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보려 했다. 부끄럽고 괴로운 자기 안의 소리를 잘 들으려 했다. 내면의 소리를 그가 잘 들을 수 있던 이유는 그의 마음에 잡음이 많지 않고 깨끗해서이다. 순결함을 사람에게 감히 묘사하는 것은 어찌 보면 무례할 수도 있지만 그는 적어도 시적으로 그러한 사람이다. 잎새에 지는 작은 바람에도 괴로워 하는 그의 고통은 숭고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우러르게 된다. 벌판의 눈발과 같이 시퍼렇게 차가운 내면이 그에겐 지옥이 되어 만사 형벌과 같아도 그는 그것을 인간으로 태어나 당연히 지는 짐이라 생각하고 결연히 목덜미를 드러내며 예수,
와 같이 그곳에 서 궁극에는 잔학한 외부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순연함을 지키다 비극적으로 죽었다.
그의 죽음에 경의를!
그의 시가 더욱 숭고하고 아름다워지는 이유는 그의 괴로움과 아픔이 가식이 아니라 진정이었음을 스스로 보인 까닭이다.

2. 기형도의 전집을 읽고

기형도는 반면 깨끗한 내면이 아니라 시궁창과 같아 괴로운 사람이다. 스물아홉에 죽었건만 그가 적은 글들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깊고 시커매 우리는 그의 글을 읽을 때 늪으로 초대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시인으로 유명하지만 나는 그의 산문이 더 좋았다. 시인으로서 생경하면서도 아삭아삭 질감이 살아있는 표현이 냉소적이고 자학적인 이야기와 섞이니 그가 살아생전 얼마나 울적했을까 상상하기 쉬웠다.
그는 매번 울고 싶고 죽고 싶구나 생각하니 종로 심야극장에서 남은 삶을 홀연히 버리고 뇌졸중으로 죽었다. 그가 만약 살아 21세기를 보았다면 어떤 글이 나왔을까 궁금하다.
다른 어떤 글을 떠올릴 것 없이, 그의 시나 산문을 합친 전집을 보면 결국 우리는 그 모든 글의 조각조각들이 다 그라는 한 시커먼 영혼에서 누출된 어둠임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그가 좋은 이유는 그의 우울함엔 군더더기가 없다는 점이다. 그는 명확히 직시하고 있고, 과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우울함이 나와 소통할 수 있다. 그에게는 아픔이 많고 절망도 많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기만을 하진 않는다.
시와 관해서도 그러다. 참회록이라는 수필에서 이리 말한다.
˝시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우문이다. 구원할 수 있다 혹은 없다의 구분은 이미 시에 기능이나 효용의 틀을 뒤집어씌운다. 따라서 어떠한 예술 장르가 최초에 성립되었을 때 본연적으로 갖는 기능이란 두말할 필요 없이 있음에 귀착한다. 따라서 이러한 질문은 그 질문이 던져져야 하는 상황과의 투쟁을 의미한다. .... 시가 구원으로서 군림해야 할 지금의 위치는? 그 설정 방향은?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따분하고 졸릴 뿐이다. 그런데 평자들이나 고고한 시인들은 이러한 문제를 끌까지 물고늘어진다. 사회학, 철학, 심리학, 심지어 컴퓨터까지 동원하여. 시는 시다. 그리고 말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얘기하고 듣는다. 그리고 감동한다. 감동? 감동...˝ p331
그래, 시는 시다. 그는 청년이었다. 어느 정도 세속의 때에 물들여졌던 그는 결국 나름의 도를 깨닫고 죽은 것이다. 시는 시다. 우리는 가끔 다른 언어를 동원해 설명하지 못할 것을 설명하려는 노력을 쉴 필요가 있다.

4. 요절한 이들에게 경배를. 그들이 더 살아 어떤 글을 적었을까 궁금해하지 말자. 이들은 지금도 살아있고, 나는 그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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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Vol.104 - 2016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 엮음 / 민들레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정말 수준높은 교육잡지. 자랑스럽습니다. 이때껏 잡지 1년 구독을 신청해 본 바 없는데, 꼭 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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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 누구나 철학총서 2
박병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3년 8월
평점 :
절판


  우연히 박병철의 비트겐슈타인 책을 읽었다. 처음에는 그냥 비트겐슈타인 인물 소개만 읽으려고 했는데 비트겐슈타인 철학이 너무 재미있어서 약 270쪽의 책을 문학책 읽듯 읽어버렸다. 간만에 책 한 권을 훌쩍 떼어버려 모쪼록 즐거웠다. 기대했던 바대로 비트겐슈타인은 흥미로웠다. 시간이 되면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읽어야 할 것 같다.

  전기 철학을 소개하는 부분에서는 사실 많은 반감이 들었다. 물론 그 이야기가 갖는 의의는 매우 유의미하다. 사고에 매몰되어 자신들이 사용하는 도구인 언어의 성격도 잊었다는 점을 철학사 안에서 이 정도로 드라마틱하게 지적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소위 그림이론이라 하여 세계와 언어가 대응된다는 논리 전반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한 체계를 바탕으로 문장(언어)를 하위요소까지 분석한 다음 참과 거짓을 가려내어 명제의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는 글에서는 어떻게 이 세상의 온갖 복잡다단한 다층적 요소들을 이렇게 단순화시킬 수 있는 것인가 싶어 이 사상이 참으로 위험하다 생각할 정도였다. 비트겐슈타인의 이론 자체보다는 그것이 악용될 만한 사례들이 걱정되었다고 하는 것이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더욱 흥미로웠던 것은 그가 결국 자신의 이론 안에서 여러 문제를 발견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이론을 수정, 비판하여 다른 이야기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저자의 책을 직접 보아야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이야기이겠으나, 박병철 씨의 해제에 의존한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와 후기가 그렇게까지 동떨어진 이야기는 아니라는 직감을 받는다.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와 탐구를 같이 엮어서 출판해달라고 했다는데, 그 두 가지를 같이 보아야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전반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일반성에 대한 갈망"을 포기하고 가족유사성을 제창하며 서양철학사에서 이론적 정초 작업을 시도하여 확보하려 한 객관성을 폐기한다. 그러한 습성은 유용하지 않고, 실제 생활의 다층적 차원을 반영하지 못한다.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며 나는 모든 다층우주론을 제기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여러 차원에서는 여러 새로운 규칙들이 통용되고, 그 규칙들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유의미함은 그곳 안에 참여함으로써만 확보할 수 있다는 실용주의적 사고야말로 사변적이거나 신학적이던 서양철학의 역사를 비로소 인간의 속세와 현세로 끌고 온 중요한 테제가 아닌가 싶다. 물론 아무리 비트겐슈타인이 20세기의 천재 호칭을 받았다 하나 나는 그조차 시대의 산물이라고 본다. 그의 철학은 체계적이고 군더더기가 없고 매끄럽다는 점에서 유용할 것이지만, 그 생각 자체는 현대의 많은 철학자들과 큰 차이가 없다. 전기 철학은 소개만으로도 칸트 철학과 엮일 수 있다는 것을 느꼈고, 후기 철학에서는 개인적으로 니체와의 차이도 근본적으로 발견해 낼 수 없었으며, 모든 상황이 언어게임이라면 이는 곧 규칙을 정하는 담론과 권력의 문제이므로 푸코로서도 읽을 수 있고, 플라톤적 엘리트주의 정초작업을 거부하고 진리의 문제를 절대성이 아니라 맥락성과 삶의 현장에서 찾은 들뢰즈와도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결국 교육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교육학과의 연결성도 느껴지고 (언어게임들의 규칙 설정에 영향을 주고 그것을 더 단단히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교육이므로) 결국 모든 상황 속에서 화용론적으로 사용되는 도구에 불과한 언어라면 그것을 통해 가치를 창출하고 삶에 쓸모가 되는 철학이므로 실용주의 철학에도 큰 영향을 준 것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로티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하므로.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직접 읽어보면 더 알 수 있겠지만, 요즘 들어 나의 생각을 미리 말해놓은 철학자들이 바로 이 실용주의의 계보를 가진 자들 아닌가 싶다.

  나에게 있어 푸코와 니체 식의 권력과 의지에 대한 탐구는 로티와 비트겐슈타인 식의 개별 상황에서의 유용성과 삶에서의 실용주의 노선으로 합쳐져 앞으로의 개인들이 주체를 형성하는데 어떠한 식의 개방적이고 열린 교육을 받을 수 있는지, 그로 인해 사회와 공동체는 어떻게 자신들의 권력을 내려놓고 분산시키며 자신들을 민주화시킬 수 있는지에 관한 연구야말로 핵심적 과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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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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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문예지 󰡔인간과 문학󰡕 2016 봄(제13호) 기고글

 

생존으로 사랑을 증명한 자의 이야기

-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The Revenant)」 평론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이하 「레버넌트」)는 글래스의 과거를 잠깐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런 다음, 화면은 곧 현재의 사냥 장면으로 넘어간다. 카메라가 뱀처럼 화면 위를 미끄러진다. 호흡이 길고, 시선의 곡선이 잘 끊어지지 않는다. 카메라가 호기심이 아주 많다. 사냥에 집중한 인물들을 이리저리 살펴본다. 가죽을 모으던 백인들이 원주민 부족의 기습을 받아 도망가는 장면처럼 급박한 순간에도 그렇다. 카메라는 유유히 좌우와 앞뒤, 그리고 위까지 올려다본다. 조금 어지러울 정도로 현란하다.

   인상적인 것은 인간들의 전투와 별개로 원거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자연이다. 인공 조명으로는 줄 수 없는 자연의 풍성한 햇빛이 영화를 가득 메운다. 장면에 인물만 있지 않고 산천초목이 어느 틈 사이에라도 자리한다. 만물이 적셔진 화폭은 풍성한데, 소리가 없다. 음악은 절제되어 있고, 대사도 마찬가지다. 풍경은 관조한다. 욕망, 증오, 살인, 복수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카메라는 화면을 집요하게 쳐다본다. 가끔 카메라가 인간을 보는지, 아니면 자연을 보는지 헷갈린다.

   곰이 글래스를 덮치는 장면은 기막히게 아름답다. 감독은 자연의 비정함을 외면하지 않는다. 자본의 힘은 사람들로 하여금 비릿한 현실에 달콤한 당을 입힌다. 우리를 지치게 하는 현실의 차가움이 곰의 압도적인 힘으로 대변된다. 인간이 왜곡한 곰의 여러 상(狀)을 뒤로 하고, 새끼들을 거느린 어미 곰은 본성대로 움직인다. 곰의 공격성은 당연하다. 글래스는 곰의 영역을 침입했다.

  글래스는 여러 번 내쳐진다.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단칼에 죽이는 것은 인간들의 낭만이다. 곰은 인간의 감각에 관심이 없다. 냄새 맡고, 건드리고, 물 뿐이다. 글래스에게는 한 가지 선택밖에 없다. 곰을 죽이는 것이다. 곰의 사정을 봐주는 것은 선택지에 있지 않다. 새끼 곰들을 향한 동정 역시 인간의 환상이다. 그곳에는 삶과 죽음만이 존재하며, 양 갈래의 길은 인간과 비인간을 차별하지 않는다. 자연은 공평히 무관심하다. 카메라는 글래스가 받는 고통의 일격들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공격당하는 그의 난관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대체 언제 끝나는지 모를 곰의 공격이 무섭고 끔찍해 신음소리를 내는 관객을 뒤로 하고, 글래스는 단도를 꺼내 있는 힘껏 곰을 찌른다. 결국 그는 산다. 카메라는 인간의 승리를 보지 않는다. 카메라 렌즈가 지켜본 것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다른 운명을 향하게 된 두 존재다.

   글래스와 혼혈아인 글래스의 아들에게 계속 시비 거는 피츠제럴드는 아주 평범한 인물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원주민을 야만인이라고 생각했다. 원주민들에게 머리가죽이 벗겨진 적도 있다. 그에게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목숨이다. 그는 브리저에게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말해준다. 목숨이 위험할 때, 피츠제럴드의 부친은 언덕에서 다람쥐와 마주쳤고, 굶주린 그에게 다람쥐는 신으로 보였다. 이처럼 피츠제럴드에게 신은 혹독한 세계에서 인간의 삶을 위해 그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다. 그는 이기적이다. 그에게 다른 존재들은 자신보다 중요하지 않다. 그는 자기가 잘 사는 것만 중요하다. 그의 신은 그에게만 자비롭다. 글래스의 죽음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된 것도, 글래스의 아들인 호크를 죽인 것도 그에게는 그저 그의 부친이 언덕 위에서 만난 다람쥐를 잡아 배를 불린 것과 같은 이치다.

   글래스의 아들이 목숨을 잃은 그곳은 을씨년스럽다. 하지만 동시에 매우 아름답고 고즈넉하다. 곰과의 사투 끝에도 죽지 않은 글래스의 끈질긴 삶이 피츠제럴드에게는 성가셨다. 하루 이틀 기다리던 피츠제럴드는 글래스에게 제안한다. 죽여주길 바란다면 눈을 깜박이라고. 눈을 움직이지 않는 글래스. 피츠제럴드는 말을 잇는다. 아들이 죽기를 바라는가? 어차피 곧 죽게 될텐데 모두 죽기를 바라는가? 글래스는 눈을 감는다. 신체적 한계 때문인지, 아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인지는 불확실하다. 분명한 것은 글래스가 아들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목을 조르는 피츠제럴드를 보고 놀란 호크가 소리를 질러대자, 피츠제럴드는 호크의 배에 기다렸다는 듯이 칼을 박는다. 이때 누가 자신을 보기라도 했을까봐 눈을 굴리는 피츠제럴드의 얼굴이 인상적이다. 브리저는 멀리 있고, 글래스는 누워 있다.

   피츠제럴드의 연기에 넘어간 브리저도 글래스를 남기고 떠나게 된다. 비참하게 남겨진 글래스는 네 발로 긴다. 아들의 죽음을 확인한 그는 아들에게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그런데 카메라가 갑자기 그들에게서 관심을 거둔다. 글래스의 거친 숨소리를 배경음으로 흐릿한 먼 설산의 봉우리가 비친다. 이 3초 이상의 응시가 인간사를 아득하게 만든다. 아들의 죽음과 글래스의 슬픔은 범사다. 눈 내린 산과 희뿌연 안개는 한 인간의 비극에 어떠한 응답도 해주지 않는다.

   세계의 무응답은 아름다운 배경이지만 서사는 아니다. 인간의 추상적인 말이 행위로 실현되듯, 글래스의 복수는 생존이라는 능동적 행위들을 전제로 삼고 그것이 이 영화의 이야기다. 영화는 글래스가 어떻게 자연의 역경과 원주민의 공격 속에서 살아남는지를 비중의 반 이상으로 둔다. 타당한 전개다. 글래스는 우선 살아남아야 한다. 관객들이 그 지난한 과정에 피곤할 수도 있지만 생존 자체가 그의 복수다. 그는 자연을 견디고, 온갖 위협을 거치면서도 자연물들을 활용한다. 세계의 무관심과 별개로 그는 스스로를 일으키는 자다. 그는 신이 남긴 사체의 복부를 가르고 그 안에 들어가 추위를 견뎌낸다. 그는 신을 먹고, 신의 냉기에 시달린다. 그러나 그가 하루하루 사는 것에 급급해서 그 고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길을 기어서라도 가고 있을 뿐이다.

   글래스는 끊임없이 피츠제럴드가 자기 아들을 죽였다는 기억을 되뇐다. 험준한 눈보라를 피해 동굴에 몸을 의탁하는 순간에도, 아무것도 없는 눈밭 위에서도, 피츠제럴드가 자기 아들을 죽였다는 사실을 쓴다. 묵묵히 살아남는 것에만 집중하니 말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 찰나에, 그가 언어를 전혀 잊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는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 자신의 과거와 감정과 서사를 잊지 않았다. 험로에서도 계속 마주하는 스스로의 무의식에서도 그는 끝없이 꿈과 환영으로 사랑과 과거를 정초시킨다.

   현실적이고 긴 카메라의 호흡 속에서 드문 빈도로 짧게 드러나는 장면들은 플래시백이다. 그 플래시백들을 통해서 우리는 글래스의 일면을 엿본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언어화하지 않는 유형의 사람이다. 그는 행동하는 사람에 가깝다. 그의 사랑과 기억은 꿈속의 짧은 접촉 장면과 여자의 음성으로만 드러난다. 코와 코를 맞대고 가깝게 있는 여인과 그, 아들과 셋이서 웅크리고 자는 모습은 그가 준거점으로 삼은 마음의 고향이 어디인지를 보여준다. 또한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여자의 속삭임은 그의 내면에 그의 사랑이 얼마나 깊히 박혀있는지 말해준다. 그러나 그 고향은 파괴되었고, 여자는 죽었다.

   글래스가 옛날에 미군장교를 죽인 이유는 단순하다. 그에게 국가의식 같은 거시적이고 추상적인 관념들은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가 사랑한 여자와의 결실이요 상징인 아들의 목숨이었다. 미군장교를 살해하는 것이 앞으로 그의 삶에 어떤 장애가 될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장교를 죽이고 아들을 보호했다. 그는 현실에 굴하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아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 정도로 소중히 여겼던 아들도 죽었다. 하지만 아들은 죽어서도 그의 마음에 머문다. 아들의 시선이 남아있는 한 글래스는 숨을 멈추고 포기할 수 없다. 아들의 곁에 남겠다는 맹세는 아내의 곁에 남아있겠다는 맹세이기도 하다. 그들이 그의 무의식을 장악하고 있다. 인간이 긴장을 풀 수밖에 없는 꿈속에서 그들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녀는 죽었지만 그를 아직도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글래스는 숨을 멈추고 포기할 수 없다. 그에게 피츠제럴드를 죽이는 것은 그들을 잊지 않았음을 보이는 유일한 입증 방법이다.

   가끔 복수를 하려는 자들이 복수 행위 자체에 매몰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를 잘 보여주는 예시가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이다. 그 영화의 주인공은 약혼녀를 죽인 살인마의 심연을 바라보다가 자기가 그 심연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는 자신이 결코 가질 수 없는 폭력성을 흉내 낸다. 그러나 그는 그 폭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한 복수는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하지만 동정심이 들 뿐, 공감은 할 수 없다. 비이성과 광기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레버넌트」의 복수극은 이성적이고 차분하다. 무절제하지 않고 단계적으로 정합적이다. 그의 보복 행위는 스스로 살아온 삶의 환경과 맥락에서 파생한다. 그는 과거를 방기하지 않는다. 자신이 선택하고 서술해낸 삶의 서사를 끝까지 지키고자 노력한다. 만약 한 사람이 자신을 이룬 모든 것들을 부정해버린다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무자아(無自我)다. 기억이 없는 자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이고, 기억을 버리는 자는 자기 자신을 생매장 하는 자이다. 글래스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 자신의 의무를 반복적으로 글과 꿈에 새겼다.

   글래스가 전초 기지에 귀환하자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이 두려움과 경이로 가득 찬다. 그의 생존은 모두에게 기적이다. 유령의 귀환에 겁에 질린 토끼가 잔뜩 내달린다. 피츠제럴드는 자신의 발을 묶어놓았던 돈을 훔쳐 달아난다. 글래스는 사냥을 시작한다. 차분하게 총을 들고,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숲 속을 응시한다. 원정을 함께 떠났던 대장 헨리가 동행하는데, 오히려 그가 피츠제럴드를 마주하고는 정의를 들먹인다. 피츠제럴드는 헨리를 비웃는다. 정작 아내의 얼굴은 까맣게 잊은 채 무의미한 말만 읊조리는 부잣집 도련님은 생존에 다급한 승냥이의 손쉬운 먹잇감이 된다. 하지만 글래스는 다르다. 그는 복수의 정당성을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피츠제럴드를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다른 사람의 모든 것을 빼앗는 것임을 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다.

   마침내 도망가던 피츠제럴드가 막다른 곳에 몰린다. 이제는 이판사판, 살기 아니면 죽기다. 글래스는 영화 초반에 곰과 사투를 벌였지만 결말에서는 피츠제럴드와 혈투를 벌인다. 이 싸움도 마찬가지로 살아남는 것은 둘 중에 하나뿐이다. 힘겨운 싸움 끝에 피츠제럴드가 무너진다. 피츠제럴드가 끝까지 약 올리려고 묻는다. 고작 나를 죽이러 이 먼 곳까지 왔느냐. 고작 나 하나를 없애러 온갖 고초를 거쳐 온 것이냐. 복수의 허무함을 상기시키는 것이야말로 죽어가는 피츠제럴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다. 그러나 글래스는 무너지지 않는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한다. 이 복수는 신의 손으로 행해졌다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 실린 피츠제럴드는 저 너머에서 이 광경을 구경하던 원주민들의 손에 잡혀 목숨이 끊어진다. 원주민들의 영역을 침입한 피츠제럴드는 범죄자다. 피츠제럴드로 대변되는 그 땅의 모든 침입자들 역시 범죄자다. 그러나 누가 불법이고, 누가 합법인지의 문제는 룰렛 위를 돌아가는 구슬이 어디에 멈출 것인지의 문제처럼 무작위적이다. 세계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지만 기막힐 정도로 무심하다.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 곰이 죽은 것처럼, 호크가 죽은 것처럼, 원주민들이 터전을 빼앗긴 것처럼, 글래스를 도운 원주민이 잔인하게 목매달려 죽은 것처럼. 만사는 원래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면 무의미하고 허무하다.

   그러나 복수에 성공한 글래스는 먼 빈 자연의 틈새에서 빛처럼 새어나오는 그녀를 만난다. 그녀는 그에게 너무나 장하다는 듯, 당신이 정말 자랑스럽다는 듯 환하게 웃는다. 그리고 그의 곁을 떠난다. 그제야 비로소 카메라가 글래스를 바라보고, 글래스도 카메라를 바라본다. 쉴 틈 없었던 글래스의 삶에 드디어 공백이 생긴다. 그의 시선이 대미를 장식한다. 이제야 카메라가 인정한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바로 죽음에서 돌아온 글래스, 그 사람의 이야기였음을.

   영화 「레버넌트」는 이처럼 인간의 삶이 증명 과정 자체라는 것을 보인다. 증명은 생존을 전제로 하며, 생존방식으로 그 내용이 구체화된다. 휴 글래스의 경우, 자신의 사랑을 잊지 않았고, 그 사랑을 삶의 목적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그것들을 빼앗은 자에게 똑같이 보복함으로써 분노가 아닌 사랑을 증명하였다. 그의 강인함은 자연의 무심함을 배경으로 삼았으며 비록 자연이 그를 보호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자신의 두 발로 그곳에 직립하였다. 이 영화에서 글래스가 피츠제럴드를 죽였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영화의 대결 구도는 글래스와 피츠제럴드가 아니다. 글래스 본인이 세계와 대결하는 구도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이 무의미한 세상에서 유의미를 창출한 의지의 인간이었으며 굳건한 사랑의 서사를 생존으로 증명해냈다는 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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