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 (亂) - 할인행사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 나카다이 타츠야 외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영상으로 형상화했을 때, 이보다 더 잘해낼 수 있을까?

처음의 각본은 ‘리어왕‘과 사뭇 달랐다고 하지만 극본 작업 과정에서 영화는 ‘리어왕‘의 충실한 리메이크로 변모했다고 한다. 초고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보는 내내 나는 이렇게 기묘할 정도로 원작에 충실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주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영화의 미학적 요소들부터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일본의 건축미 뿐 아니라 전반적인 예술미를 크게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여러 대가의 작품들에는 찬사를 보내지만, 전반적인 일본의 예술문화가 나와는 안 맞는 지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형상화한 일본 문화의 아름다움, 특히 비장미는 극강이다. 정확히 말하면 막부와 사무라이 시절의 미학을 재현한 것인데, 원작에서 묘사된 유럽 여러 나라와 지역 영주들간의 난세를 표현하기에 일본 전국시대만큼 딱 떨어지는 예도 없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영상미학 중 나를 사로잡은 것이 여러 가지 있는데, 스탠리 큐브릭의 배리 린든과의 유사성이다. 배리 린든은 제3자의 시선으로 한 인물의 지난한 삶을, 조금은 냉소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서술한다. 배리 린든이 그러하듯이, ‘란‘에서도 이야기 중간마다 자연풍광이 롱숏으로 들어온다. 하나의 광경이 그림 같이 나타난다. 구름은 어지럽게 이지러뜨려져 있는데, 그 아무 의미없는 변화가 인간사의 역경을 비웃듯이 평화롭다.
IMDB에서도 지적하는 사실인데, 이 영화는 클로즈샷이 매우 드물다. 히데토라의 얼굴이 그나마 가깝게 보이지만 나머지 인물들의 얼굴은 유심히 봐야 그 얼굴을 알 듯 하다. 셋째 아들인 사부로의 얼굴은 마지막까지 관객에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마지막 부처의 평안한 존안만이 인상적으로 기억될 수 있을 뿐이다. 이 인간사의 허망함을 가까이 들여다 보면 너무나 고통스러워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또 하나는 전투장면의 충실한 표현이다. 찬란하다고 표현할 만큼 미적으로 우수한 세번째 성에서의 전투 장면은 직접 성을 지어서 불을 지르는 상태에서 찍었다고 하니,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에 대한 고집을 엿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여러 장면은 히데토라의 충복들이 죽어가는 찰나의 모습들인데, 히데토라의 고집이 자기 사람을 고통스럽게 죽인다는 그 잔혹한 사실이 생생해서 특히 좋았다. 또한 근육질의 말들이 잘 드러나 무사의 이미지가 아주 잘 표현되었다. 이 영화는 인상적일 정도로 말들이 달리는 모습이 멋있다. 직접 말들을 길들이는 노력을 들여서 그런 것일까? 마술의 측면은 내가 잘 모르겠지만, 시각적으로는 확실히 훌륭했다.
호흡이 길기 때문에 참을성 없는 관객이라면 이 대작 앞에 지루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끔은 루즈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말 그대로 대작 아닐런지. 그러한 지점도 비극적 성격과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잘 지키고 있다. 폭풍전야는 항상 고요한 법이니까. 사부로와 무사들이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말 아래서 앉아있다가 군사들이 몰려오니 말 위로 재빠르게 올라가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멋졌다. 군사의 멋지고 빛나는 순간만을 보여주지 않고 그 과정 자체의 많은 사소한 것들도 포착한다.
가장 좋은 장면은 광대를 죽이려는 무사가 히데토라의 활에 맞아 죽고, 히데토라가 위에서 그 모든 광경을 노려보는 부분이었다. 모든 비극이 시작되는 버튼을 누르는 장면 같았다.

주제면으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절대비극이라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원작을 하도 옛날에 봐서 가뭇하긴 하지만 카에데와 스에라는 여성 캐릭터가 가미되며 영화 제목 ‘란‘이 모든 내용을 더욱 아우르게 되었다고 본다. 히데토라는 정말 불운한 인물로 나오고, 그의 예전 악행은 잘 보이지 않지만,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모든 일들은 그의 비극이 사필귀정임을 짐작하게 한다.
처음 나는 히데토라가 세 아들들에게 뭉쳐야 함을 가르칠 때, 사부로가 속된 말로 훼방꾼처럼 보였는데, 극이 진행될수록 정말 사부로가 한 말이 진심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히데토라가 해온 짓들, 그리고 아들들에게 보인 짓들은 화합과 단합을 가르칠 수 있는 언행들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약한 자들에게 해온 짓들, 후환이 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없애버리기 위해 한 잔악한 짓들이 잠복해 있다가 그를 덮쳤다. 아들들은 그를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하고, 공격하는 법만을 안다. 애초에 히데토라가 그들에게 그것만을 가르쳤다.
며느리인 카에데와 스에는 시아버지 때문에 모든 가족을 잃은 인물들이다. 스에는 불심의 힘으로 증오를 극복해냈지만 카에데는 그 증오와 원한을 뿌리 깊게 가진 인물이다. 카에데 역할을 한 배우의 연기에 찬사를. 그녀가 묘사한 카에데는 행동거지부터 전형적인 일본의 고전적 여인상으로 마치 인형이 걸어다니는 것과 같이 매력적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갑자기 내면의 광기를 폭발시키며 칼로 둘째 아들 지로를 위협하는 장면은 가히 전복적이다. 얼마나 많은 분노와 증오를 안에 꾹꾹 눌러담고 있었는지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를 미워할 수 없다. 끝에 잔혹하게 살해당하지만, 그녀는 우리의 또다른 면이다. 원한감정을 잊지 못하는 그녀는 자신의 복수에 성공했다. 혹자는 이 영화의 모든 이야기가 철저히 그녀의 계산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히데토라는 그녀 아니더라도 결국 이러한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스스로가 지옥을 열어둔 사람이었고, 그저 자신이 서있는 곳이 지옥임을 너무나 뒤늦게 알게 된 것일 뿐.
스에와 그 오빠 츠루마루는 가련하고 불쌍한 주인공들이다. 카에데처럼 분노에 가득찬 인물들은 아니지만 한 명은 부처에게 자신을 바침으로써 현세의 고통들을 외면하였고, 다른 한 명은 히데토라에게 눈을 잃어 현세의 아픔들을 보지 못하게 되어 초라한 오두막에 갇혀 있는 팔자이다. 카에데는 스에의 목을 원하고, 스에는 그러한 위협을 피하려 하지만, 츠루마루는 스에가 준 피리를 찾는다. 부처는 그런 그들을 보면서도 여전히 그림 속에서 잠잠히 웃고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 피리 하나가 무엇이 그리 중요하다고. 결국 다시 돌아간 그곳에서 스에는 자신을 돌봐준 나이 많은 하녀와 같이 죽고, 본인은 목까지 잃어버리고 만다.
히데토라 본인의 비극, 우리는 그것에 대해 논할 수 없다. 모든 것을 가졌다가 자신의 아집으로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의 불행이 설령 자기 자신의 과오로 비롯되었다 해도 우리는 그 아픔에 대해 논할 수 없다. 그를 보며 괴로워하는 역할은 광대가 대신 맡아주고 있다. 흔들리는 돌 위에서 뛰어내려야 함을 알면서도 안타까운 히데토라를 외면하지 못한 광대는 온갖 짜증을 내면서도 그를 주군이라 부르며 쫓는다. 이미 주종관계는 사라진지 오래인데, 광대가 그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연민 때문이다. 광대는 관객이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풍자적으로 논평하기도 하지만, 미칠 듯이 슬퍼한다. 그의 아픔은 히데토라를 보는 우리의 슬픔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국 맨 마지막, 절벽에서 헤매는 츠루마루의 모습이 비쳐질 때, 우리는 그 츠루마루가 광야에서 미친 듯이 헤매는 히데토라이며, 떨어진 부처의 그림이 펼쳐져 우리를 바라볼 때, 히데토라가 다시 우리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부처는 우리를 그렇게 멀리서 평안히 쳐다본다. ‘난‘을 사는 우리가 히데토라를 어리석은 인간이라 비웃을 수 있을까? 우리도 어쩌면 그처럼 우리가 저질러놓은 지난 날의 과오들이 어느 날 우리를 최종적으로 겨냥하여 그와 같이 모든 것을 잃고 나락으로 빠질지도 모른다. 그 때도 여전히 부처는 히데토라를 돕지 않은 것처럼 우리도 돕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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