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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이 글에서 다루는 주요 결론을 미리 요약 제시

(ㄱ) 리버럴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누칼협을 들이댈 정도로 인간은 자유롭지만은 않다

(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젠더차별과 갈등, 낮은 출산율, 자살을 둘러싼 모든 현상이 바로 생명정치와 연관되어 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캐치프레이즈를 써본다.

"성공적이지 않은 인간은 낳을 필요가 없고, 생산적이지 못한 인간은 살릴 필요가 없고, 기존 보통 여성은 발이 묶일 때 기존 보통 남성은 고립되는 사회"

아래는 푸코의 원문에 대한 해석에서 나아가 우리 사회에 대한 나의 단순 비판을 섞은 좀 더 나아간 요약

=> 인간 자본화된 생산의 문제에서 성공하지 못한 경제적 인간이 성공적인 인간 자본을 낳을 수는 없다는 계산 > 낮은 출산율

=> 비생산적, 고립되고 단절된 인간들에 대한 안전 방편 없음 > 노인 자살율

=> 기존 보통 여성은 이때까지의 전통사회에서 부여된 가정을 돌보는 주체라는 이데올로기 덕분에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불리한 입장. 신자유주의 사회 안에서 자신의 독립성을 추구하는 것에 목표 지점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가정에 어떤 식으로든 기여할 것을 주문받고 있음. 그래서 역설적으로 신자유주의적 남성에 비해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약자이면서 동시에 전통사회적 끈도 덜 약화되어 있음 (특히 자식-아기로서 남성보다 더 선호받는다는 현상에 주목) > 제약이 많음

=> 기존 보통 남성은 이때까지의 전통사회에서 부여된 경제적 가장이라는 이데올로기 덕분에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 편입되어 가장 신자유주의적 주체로 변모, 그에 따라 고립 의식도 강화되며, 그에 따라 제2차 인간 생산의 안정성이 옛날만큼 따라와주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차별의식 주장 > 고립이 쉽게 됨

이 중 보통 남성과 여성은 서로 제약과 고립이 따로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둘이 같이 일어나기도 함. 제약이나 고립이라는 단어는 일반적 경향성에 대한 나의 짐작임.


1. 이 글을 쓰게 된 배경

2022년 막바지, 나는 이번 년도에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쓰인 화제의 단어 중 하나가 바로 "누칼협 (누가 너보고 네가 하는 일을 하라고 칼 들고 협박했냐?)"이었다는 말을 듣고 소름이 쫙 돋았다. 이미 한 두 해전인가-신자유주의가 승리하여 이 땅에 도래한지 이미 오래라는 글을 쓴 당사자임에도, 아니 어쩌면 이렇게나 신자유주의적인 단어가 사람들 사이에 대유행이 될 지경이 온 것인가-놀랍기도 하고 우려스럽기도 하고.

이러한 리버럴적 정신이 만연한 사회를 살아가며, 이미 70년대에 2022년의 대한민국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한 푸코의 "생명정치의 탄생"을 일독하는 것만큼 값어치 있는 일이 또 있을까?

라는 생각에 이 책을 읽게 된 것이다.


2. 내가 읽은 텍스트

생명정치의 탄생 The Birth of Biopolitics Lectures at the College de France 1978-79

© Editions du SeuiVGallimard 2004, Edition estabLished under the direction of Franl;ois EwaLd and ALessandro Fontana, by Michel SeneLlart. TransLation © Graham Burchell, 2008.

이라는 영어 판본으로 읽었다.

언젠가는 불어를 꼭 구사하리-라는 굳은 결심을 혼자서 스리슬쩍 해본다.


3. 글의 구성에 대한 미리 알림

글의 구성은 푸코의 글들에서 내가 밑줄 쳐놓은 것들부터 하나하나씩 가볍게(?) 둘러보도록 한다. 영어는 모두 인용이다.


4. 정치경제학, 정치-경제 간의 관계

16쪽에서 푸코는 "political economy" 정치경제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Finally, the last point explaining how and why political economy was able to appear as the first form of this new self-limiting governmental ratio is that if there is a nature specific to the objects and operations of governmentality, ... In other words, there will be either success or failure; success or failure, rather than legitimacy or illegitimacy, now become the criteria of governmental action. So, success replaces [legitimacy].*

정치경제학이 중요한 이유는 통치성의 문제에서 이전까지는 정치적인 정당성, 소위 무협이나 중국역사에서나 많이 볼 법한 '명분'과 같은 문제보다는 정치 공동체를 경영하는 데 있어서 일련의 일들이 성공을 거두었느냐 실패를 하였느냐는 문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효율성의 극한을 추구한다는 경제적인 문장이 현재 정치와 사회 전반에서 그 영향력을 휘두르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사회의 양태를 미리 예견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20쪽에서 푸코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Politics and the economy are not things that exist, or errors, or illusions, or ideologies. They are things that do not exist and yet which are inscribed in reality and fall under a regime of truth dividing the true and the false.

...

At this moment he has laid down clearly the principle of the self-limitation of governmental reason. But what does "the self-limitation of governmental reason" mean? What is this new type of rationality -in the art of government, this new type of calculation that consists in saying and telling government: I accept, wish, plan, and calculate that all this shquld be left alone? I think that this is broadly what is called "liberalism."*

정치와 경제라는 것은, 푸코가 이 책 3쪽에서 언급한 광기의 문제처럼, 처음부터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 속에서 참과 거짓을 가르는 진실의 영역에 속하는 무엇이다. 나는 이 부분이 시사하는 것은 정치와 경제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정해진 팩트, 바꿀 수 없는 사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그것을 통치하는 기반 방식인 통치성에 끊임없이 개입하고, 동시에 그 개입하는 정치와 경제의 내용을 다시 인간들이 변용하고 간섭하는 상호작용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푸코가 이야기하고자 했다고 본다.

그러한 점에서 소위 리버럴리즘, 자유주의가 이야기하는 국가는 국가의 작동에 자기 제어를 가하는 국가이다. 그리고 이것이 푸코가 생각하는 자유주의 버전의 국가가 작동하는 통치성이기도 하다.

31쪽에서 푸코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In the middle of the eighteenth century the i market no longer appeared as, or rather no longer had to be a site of jurisdiction. On the one hand, the market appeared as something that obeyed and had to obey "natural,"*

... they permit the formation of a certain price that Boisguilbert3 will call the "natural" price, the physiocrats will call the "good price,"4 and that williater be called the "normal price,"

가격에 대해서도 “natural, good, normal”이라는 형용사가 붙으면서 마치 어떤 확실히 존재하는 것이 어느 정도에 다다라야만 기준치를 충족하고 정상이 된다는 인식, 즉, 시장의 자연성에 대한 인식이 생겼고, 이에 따라 마켓이 진실을 다루는 장소가 된 것이다.


5. 자유주의-리버럴-는 정말 자유를 담보하는가. 누칼협은 과연 온전히 맞는 말인가.

63쪽과 64쪽에서 각각 푸코는 다음과 같이 아주 중요한 구절을 남긴다.

If I employ the world "liberal,"...

it is a consumer of freedom. It is a consumer of freedom inasmuch as it can only function insofar as a number of freedoms actually exist: freedom ofthe market, freedom to buy and sell, the free exercise of property rights, freedom of discussion, possible freedom of expression, and so on. The new governmental reason needs freedom.

Therefore, new art of government consumes freedom. It consumes freedom, which means that it must produce it. It must produce it, it must organize it. The new art of government therefore appears as the management of freedom, not in the sense of the imperative: "be free," with the immediate contradiction that this imperative may contain. The formula of liberalism is not "be free." Liberalism formulates simply the following: I am going to produce what you need to be free. I am going to see to it that you are free to be free.

64

Liberalism must produce freedom, but this very act entails the establisllment· of limitations, controls, forms of coercion, and obligations relying on threats, etcetera.

푸코는 자유주의, 리버럴에 대한 환상을 까발린다. 나는 위의 부분이 "누칼협"이라는 요새의 단어와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누칼협"이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뉘앙스를 상정한다.

너가 무슨 일을 하든 너의 자유였고, 지금도 그 일을 하든 말든 너의 자유인데, 왜 너는 이걸 마치 네가 어쩔 수 없이 행한 것처럼 억울해하는 거니?

만약 푸코의 비판을 "누칼협"에 적용한다면, 우리가 지금 자유라고 생각하는 이 사회는 단순히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소비자이다. 푸코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자유 그 자체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조건들을 리버럴 사회에서 누리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푸코가 언급한 것처럼 시장의 자유, 사고 팔 자유, 개인 사유권의 자유로운 행위, 토론의 자유, 가능한 표현의 자유 등의 여러 가지의 자유가 실질적으로 얼마냐 이 사회에 존재하냐에 따라 우리는 그만큼 자유로운 소비자인 것이다.

푸코는 이 시점에서 이미 마르크스의 시대 분석을 뛰어넘었다.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그곳에서 촉발된 많은 담론들은 이미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촌스러운 빨갱이 사상 정도로 여겨지고 있다. 사실 빨갱이 자체보다 문제적인 것이 "촌스럽다"는 인식이다. 계급 투쟁과 계급 의식의 공격성과 고루함, 올드하고 반시대적인 이미지가 이번 화물연대의 시위를 무너뜨린 한 가지 중요한 토대이지 않았을가.

아무튼, 푸코는 명시적으로 눈에 보이는 계급상의 투쟁이 더 이상의 우리 사회를 설명해주지 못한다고 본 듯 하다. 오히려 권력은 그가 말한 것처럼 미시적으로, 더욱 촘촘하고, 더욱 개별적으로 들어간다. 어찌 보면 이 시대의 권력과 담론들, 통치성은 "포스트모던"적으로 행위한다. 미시권력적 차원으로 우리 삶의 차원에 들어간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유행 단어를 빌어보자면, 이제 우리 모두는 어떠한 “장”에 속하여 있다. 푸코는 이 시대의 개별자들이 그 장의 원리원칙을 삶의 근거로 삼아야만 우리는 자유를 가질 수 있는 개별 주체자로서 자유를 추구하게 될 것임을 예견해냈다.

푸코의 말처럼, 리버럴리즘의 체제 아래에서 자유란 것은 지속적으로 생산되는 것이지, 자유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라면 "누칼협"도 사실상 딱 들어맞지 않는 말이다. 왜냐하면 정말 순수한 자유의 개별의지로 내가 지금 무엇을 행하고 있는 것이냐, 라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때의 이 자유란 것도 “리버럴리스트들의 자유”에 불과한 것이다.


(반론)

그러나 여기서 그럼 우리에게 자유란 없는 것인가? 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없다. 푸코는 자신에게 구조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일 것을 완강히 거부하다 죽은 듯 하지만, 그의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장이든, 그 장이 여러 가지이든 하나이든, 어쨌든 그 장에 속하는 순간, 우리 인간의 개별 의지와 개별 자유라는 것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필연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리버럴리즘의 체제든, 인간 운명에 우리가 종속되는 것이든, 인간에게 자유란 없다면, 그렇다면 우리에게 대체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그런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가?

이 질문이 윤리적 차원으로 나아간다면, 우리의 선악조차 우리의 책임이 아니라면 인간의 윤리적 선택들에서 우리 자신은 그저 자유롭지 못한 노예에 불과한 것이란 말인가?

법적 차원으로 나아간다면, 자유롭지 못한 노예 인간을 대체 무슨 명목으로 처벌/교화할 것이란 말인가?

존재론적 차원으로 나아간다면, 근본적으로 애초에 자유든 어떤 것이든 어떤 개념(이데아)에 대응하는 완벽한 실물적 존재가 존재는 하는 것이냐? 아니면 단순히 인간 사회가 만들어내는 경험적이고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것만 존재하는 것이냐?

아마 맨 마지막 질문에 푸코는 이데아는 없고 이 사회의 모든 관념들은 역사적인 것이라고 대답하면서, 자신은 정확한 구조들의 이해가 아닌 불명확성을 기반으로 한 이해를 끝까지 상정하겠다면서 후기 구조주의자로서 자신의 대답을 내놓을 듯 하다.

그러나 또 한 번 생각할 것은, 푸코는 자기 자신을 구조주의자나 심지어는 후기 구조주의자라고 이야기조차 하지 않았던 듯 싶다. 외려 자신을 역사적인 분석을 사용한 역사학자/계보학이라는 니체의 방법을 사용한 계보학자 정도로 생각한 듯 한데, 후기 구조주의가 암시하는 불분명성은 다른 학계에 속한 사람들로 하여금 수많은 반감을 사기도 했다.

아무튼, 이러한 모호함, 우리에게 자유가 얼마나 있느냐의 문제를 푸코가 계속 후기 철학에서 알아내고 발견하려 하였으며 그 뒤에 나오는 자기배려나 파레시아, 주체에 대한 문제가 자기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하는데, 본인이 죽어버리는 바람에 뚝 끊겨버린 듯한... 그런 지점이 있다는 것을 지금 이 글에서 밝혀두고 싶다.

읽으면서 참고한 위키피디아 두 항목.

https://en.wikipedia.org/wiki/Post-structuralism


6. 경제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이 사회의 주문-

성공적이지 않은 인간은 낳을 필요가 없고, 생산적이지 못한 인간은 살릴 필요가 없고, 기존 보통 여성은 발이 묶일 때 기존 보통 남성은 고립된다

푸코는 66쪽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First, we can say that the motto of liberalism is: "Live dangerously." "Live dangerously,"

...they are conditioned to experience their situation, their life, their present, and their future as containing danger. I think this kind of stimulus of danger will be one of the major implications of liberalism.

리버럴 자유주의는 흥미롭게도 삶을 더 위험하게, 더 리스크를 걸도록 주문한다.

174쪽에서 나오는 부분과 연관지어 보도록 하겠다.

Concretely, in this liberal society in which the true economic subject is not the man of exchange, the consumer or producer, but the enterprise, in this economic and·social regime in which the enterprise is not just an institution

but a way of behaving in the economie field in the form of competition in terms of plans and projects, and with objectives, tactics, and so forth-you can see that the more the law in this enterprise society allows individuals the possibility of behaving as they wish in the form offree enterprise, and the greater the development of multiple and dynamic forms typical ofthis "enterprise" unit, then at the same time so the number and size of the surfaces of friction between these different units will increase and occasions of conflict and litigation multiply.

나는 우리가 리스크를 걸어야 하는 것-하면 최근에 수많은 사람들이 투기에 빠져들었던 사회적 순간이 기억난다. 사람들은 돈을 벌 수 있다는 희망으로 자신들의 돈을 걸었고, 일확천금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게 비트코인 광풍이 벌기도 했었다. 리버럴 자유주의 안에서 우리는 푸코가 말하는 것처럼 이제 단순한 소비자나 생산자가 아니다. 우리는 enterprise 하나의 사업체이다. 마침 자영업 비율이 높은 대한민국 사회와 그럴 듯하게 어울리는 표현 아닌가? 우리는 경쟁이라는 비자연적 (경쟁이 비자연적이라고 푸코가 120쪽에서 말한 부분이 있다) 요소 안에서 충실하게 자유주의적 사업체가 되어 이 모든 "비즈니스 관계"를 훌륭하게, 그러면서 self-limited 자기제한적인 요소로 관리해주는 "법칙 rule of law"에 의존하는 게임 플레이어들이 되었다.

그리고 이 Enterprise에 대한 개념이야말로 이제 더 이상 소위 옛 맑시즘이 완벽하게 설명해내주지 못하는, 인간들이 단순히 계급 투쟁을 할 정도로 계급화하거나 사회화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기업체 수준으로 바라보며 리버럴 사회 안에서의 정치 경제학적 질서를 재생산해내고 활동하는 주역이 된다는 점을 드러낸 것이다.

푸코의 글 226쪽에서 그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 분석 중 하나를 소개해보고 싶다.

In neo-liberalism-and it does not hide this; it proclaims it-there is also a theory of homo oeconomicus, but he is not at all a partner of exchange. Homo oeconomicus is an entrepreneur, an entrepreneur of himself. This is true to the extent that, in practice, the stake in all liberal_analyses is the replacement every time of homo reconomicus as partner of exchange with a homo oeconomicus as entrepreneur of himself, being for himself his own capital, being for himself his own producer, being for himselfthe squrce of [his] earnings.

Homo oeconomicus, 즉 경제적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는 푸코가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존 스튜어트 밀이 정치경제학 이야기하면서 나왔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은 잠깐 차치하고, 푸코가 경제적 인간을 일컫는 것은 바로 위에서 말한 인간 개별들이 enterprise가 되는 현상과 동급이라고 보면 된다.

이제 우리는 리버럴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모두 경제적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biopolitics 생명정치의 문제에서 바로 젠더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실제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젠더 갈등이 심화된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경제적 인간은 바로 생명을 낳고 관리한다는 그 지점과 연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푸코도 228쪽에서 바로 유전자 공학으로 인간 조작하는 것 따위의 상상을 언급은 한다. 자신도 SF적 상상이라고 겸연쩍어 하는 듯 하지만, (글의 맥락은 70년대다!!) 특히 대한민국의 낮은 출산율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 입장에서는 전혀 웃을 이야기가 아니다.

228쪽 원문을 공유해보겠다.

a child whose human capital,

understood simply-in terms of innate and hereditary elements, is high, you can see that you will have to make an investment, that is to say,

you will have to have worked enough, to have sufficient income, and to have a social status such that it will enable you to take for a spouse or coproducer of this future human capital, someone who has significant human capital themselves.

우리가 경제적 인간이라 함은, 바로 우리가 낳는 또 하나의 인간, 우리가 생산해내는 또 하나의 인간이 바로 인간 자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당연히 아이는 투자해야 할 무엇이 된다.

그런데 만약 자기 자신이 투자할 만한 훌륭한 인간이 아니라면? 내가 훌륭한 경제적 기업체가 아니라면? 내가 또 다른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그러한 "자격"이라도 있는 것일까?

이제 인간 생산은 단순한 경제적 생산만이 아니라 이 사회에서 살아나갈 경제적 인간으로서의 가치까지 허락받아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우리 양심에 손을 얹고 보면, 가난한 사람은 아이를 낳아서도 안 된다는 수많은 이 시대의 사람들이 도처에 있지 않는가. 가난해도 덮어놓고 애를 낳았던 옛날 시대와는 천지차이의 사고방식인 것이다.

245, 246쪽에서 푸코는 결혼 생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이야기한다.

Well, it is that this contract between spouses enables them to avoid constantly renegotiating at every moment the innumerable contracts which would have to be made in order for domestic life to function." Pass me the salt; I will give you the pepper." This type of negotiation is resolved, as it were, by a long-term contract, which is the marriage contract itself, which enables what the neo-liberals call-and I think they are not the only ones to call it this moreover-an economy to be made at the level of transaction costs.

결혼생활은 불필요한 합의의 과정들을 다 생략해줌으로써 경제적 비용을 최소화하고 이윤을 막대하게 하는 사업체 간의 합의가 된다. 물론 이 이야기들도 옛날의 결혼 제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일 수 있긴 하지만, 특히 개개인이 경제적 인간이 된 요즘 시대에 빗대어 보면, 결혼은 손해다 그래서 할 필요가 없다, 혹은 결혼을 하려면 아예 동등한 합의체가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때 동등하다는 것은 서로 간의 소득 수준, 공평한 반대반의 소비 구조, 같은 속칭 계급까지 포함한다).

그리고 이러한 결혼의 난이도 상승이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신자유주의 주체화에 가장 열심인 젊은 남성들에게 동거 등 여러 대안을 제시해주지 못한 채 그들의 독립/고독을 심화시킨다.

우리는 모두 경제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주문 안에서 기존 보통 남성들은 이때까지 남자는 밖에서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사회 안에서 자기 몫을 해야 한다 (바깥 양반)라는 굉장히 전통적인 가치에 따라 신자유주의 시스템으로 어정어정 기어들어가 가장 먼저 신자유주의적 주체가 되었다. 그러나 큰 문제는 신자유주의 안에서 경제성의 극단적 추구와 그들이 이야기하는 rationality 이성은 인간 하나하나에게 기업체 수준의 자율성을 강요하고, 그에 따라 자기 자신에게 더 큰 책임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때까지의 남성들에게 독립, 주체성, 자율성을 문화적으로 중요시 여겼던 점들은 한편 독이 되어 돌아와 그들이 가장 신자유주의적 주체로 변모되었음에도 그에 따라 전통사회의 기존 가치들-가족이나 사회적 측면-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고립에서 취약해진다. 그들은 소외되지는 않는다. 돈이 있고 돈을 벌 수 있는 젊은 몸뚱이가 있는 한 아직은 소외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고립될 뿐이다. 연대의 필요성을 딱히 느낄 필요도 없지만 기회도 많지 않다. 그리하여, 여러 이점에도 불구하고, 결혼, 짝을 만나지 못한다는 불평등함이 강하게 제기된다.

신자유주의의 상징인 마가렛 대처가 한 그 유명한 말을 생각해보라. 그녀는 사회도 없고 국가도 없고 단지 남자와 여자 그리고 그들이 결혼해 사는 가정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아래는 그녀가 한 말

There is no such thing! There are individual men and women and there are families and no government can do anything except through people and people look to themselves first.

그런데 지금 보라, 결혼을 안 하니 가정도 없다! 신자유주의적 주체에게는 사실 나라는 경제적 인간과 그 성공한 경제적 인간이 낳을 수 있는 제2세의 홈그라운드인 가정까지는 필요한데, 그것까지 못 가고 있는 것이다. 사회도 국가도 없는 신자유주의적 주체라고 인간의 사회성이 아예 말살된 것은 아니다. 그것을 충족시켜 줄 가장 최소의 사회기준인 가정이 없으니 그들은 독립/고립의 위치에 서게 된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동거 문화가 발달한 것도 아니니 신자유주의적 주체라 할지라도 혼자인 상태로 남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결혼을 하고 가정을 한다고 해서 안전한 가정이 존속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OECD 자살률 1위라는 우리나라의 기록을 살펴보면 연세 드신 노인들이 가장 많이 죽는다. 이들은 신자유주의적 체제에 적응을 못하거나 패배한 것이지, 어렸을 때부터 신자유주의적 가치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지 않는가. 그들도 대부분 전통 사회 질서에 순응을 하고 타협을 하여서 결혼 정도는 했을 텐데, 여전히 단절되었음을 호소한다. 즉, 우리에게 이제 가정/전통문화 질서란 옛날만큼 강한 울타리의 작용을 해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기사를 한 줄 요약. 왜 노인들이 자살을 생각하느냐. 딱 세 가지 문제이다. 돈 없어서, 아파서, 가족과 단절되어서.)

이때 웃긴 건, 나는 다른 하나의 이상한 현상을 스스로 관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기존 보통 여성들의 위치이다. 기존 보통 여성은 이때까지의 전통사회에서 부여된 가정을 돌보는 주체라는 이데올로기 덕분에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불리한 입장이다. 멀리 갈 것 없이 애 낳을 수도 있다는 점 때문에 취직하기가 힘들거나 회사 들어가도 버티기가 힘들다는 그 이야기, 모두가 알고 들어본 그 이야기가 바로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경제적 인간으로서 경쟁에서 불리한 여성의 위치와 관련된 이야기일 것이다. 그리하여 요새 많은 여성들은 신자유주의 사회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독립성을 추구하는 것에 목표 지점을 둔다. 즉, 결혼을 하지 않는다.

어쩌면 여기까지는 평이한 이야기인데, 나는 이번에 임신이라는 개인적 경험을 통해 아주 이상한 가설을 세우게 되었다. 한때는 남성 선호 사상이었다지만, 요새는 아이를 낳을 때 부모가 딸을 낳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저 그냥 딸이 귀여워서 그런가보다 정도였는데, 이번에 나도 딸을 임신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주변이나 사회적 인식에 대해 챙기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요새는 딸을 더 마음 속으로 선호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아들이나 딸이나 크게 상관은 없을 텐데, 왜 그런 걸까? 보통 사람들은 딸이 더 귀여워서, 키우기 쉬워서, 나중에 엄마인 나랑 더 친하게 지낼 수 있어서, 아들보다는 나를 더 챙겨줄 것 같아서-라는 대답으로 귀결되는데, 이를 찬찬히 살펴보니...

결국 딸한테 이때까지의 전통 사상에서 아들들에게 요구되었던, 가정을 지키고 부모에게 효를 다하는 (?) 그러한 전통 사상적 측면들이 계속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딸을 낳는다 해도 그 딸이 아이를 낳을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지만, 지금 나의 가정이 더욱 '원활하게 혹은 오순도순하게, 즉, 조금 옛날 전통문화적 가족 같이' 유지될 확률이 딸을 통해 더 보장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본다면 설령 여자가 아이를 낳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자식 노릇을 한다는, 계속 가정에 어떤 식으로든 기여할 것을 주문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가설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지점에서 살펴보면, 역설적으로 신자유주의적 남성에 비해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약자이면서 동시에 전통사회적 끈도 덜 약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꼭 좋은 것이냐, 그것은 아무도 쉽게 대답을 할 수 없는 문제인 것 같다.

20대 자살을 살펴보면 남자가 여자보다 2배 이상 많이 죽지만 여자들의 자살 시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보다 높다는 기사를 확인했다.

이 기사와 내 개인적 생각을 말미암아 생각해보면, 젊은 여성들은 발이 이곳저곳 묶이고 제약이 많아서 우울감을 많이 느끼는 것이고, 젊은 남성들의 경우 혹시라도 신자유주의 사회에 적응이 실패하면 고립된 상태에서 바로 자신의 실패를 견디지 못하고 죽게 되는 것은 아닌가... 이런 마음 아픈 추측이 든다.

즉, 다시 똑같은 말을 반복해야겠다.

성공적이지 않은 인간은 낳을 필요가 없고, 생산적이지 못한 인간은 살릴 필요가 없고, 기존 보통 여성은 발이 묶일 때 기존 보통 남성은 고립되는 지금 우리의 사회. 그게 지금 우리 사회 아닐까나.


7. 남아 있는 논의-시민 사회의 역할

푸코는 296쪽에서 이 신자유주의 체제를 굴러가게 하는 두 가지 요소가 하나 경제적 인간, 다른 하나가 바로 시민 사회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시민 사회를 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미시권력이 미칠 수 있는 장의 범위라고 보는 것 같은데, 내가 사실 이 후반부는 조금 힘이 딸려서 이해가 부족한 듯 하다.

그리하여 이 책의 정리를 끝내고 다음에는 바로 이 책의 논의들과 관련된 다른 2차 논문들, 글들을 찾아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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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사실 어제 이 글을 내 공부 일과와 함께 적었었는데 싸그리 다 날아가버려서 다시 적는다. 옛날에 가끔 매일 내가 무슨 공부를 했는지 적곤 했는데 앞으로 열심히 적어보려고 한다. 


1.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되어야 민주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가에 관한 고민을 하려는 정치철학자. 지금 나는 그 목적을 위해 박사 지원을 준비하고 있다. GRE 시험은 그 준비의 일환이라고 보면 되는데 원체 재미가 없게 여겨지는 측면이 있다. 


2. GRE 공부를 하다가 답답해졌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면 공부를 더 안 할 것 같고 해서 손을 뻗자마자 닿은 책이 Leo Strauss의 What Is Political Philosophy? And Other Studies 였다. 물론 나는 여러 지점에서 레오 스트라우스랑 의견이 다르긴 하지만, 그가 정치철학의 본질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것에서는 많은 공감이 되었다. 이 책은 사실 영국 아재 수업을 위해서 빌린 거였는데, 이 책을 읽는 게 마음에 위안이 되다니, 참 영국 아재의 학식에 내가 빚진 게 많다는 감사함이 든다. 


거두절미하고 레오 스트라우스는 정치철학은 기본적으로 공동체의 더 나음을 고민하는 학문이라고 진단한다. 이 나음과 좋음/안 좋음에 대한 추구 자체가 사실 굉장히 고대 그리스적인 사고방식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본질에 가깝기도 하다. 왜냐하면 다른 철학 분야에 대해서 내가 확신하긴 힘들지만 그 어떤 정치철학자라도 자신의 이론을 내놓을 때 그 이론이 "공동체에 더 낫다/ 적어도 그 공동체가 더 나아지는 데 필요한 비판"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그 이론을 자신있게 내놓을 수 없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스트라우스의 생각에 나는 공감한다. 


그렇지만 스트라우스의 의견에서 내가 살풋이 달라지는 것은, 그 때 영국 아재 수업 들을 때도 영국 아재가 이야기했던 것이, 스트라우스가 꼭 고대 그리스로의 회귀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가 상징하는 사실상의 "true standard"를 제공해줄 수 있는, 어떤 본질로서의 정치철학을 꾀하고자 한 것이 핵심이라는 그 부분이다. 즉, 스트라우스는 무엇이 현 상황보다 더 나아진다는 것을 위해서 파악이 필요한 것은 바로 "true standard" 참된 기준이다. 기준자가 없으면 당연히 우리는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나아졌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지만 나 같은 경우는 그 부분에서 스트라우스와는 의견이 좀 달라진다. 고정된 참된 기준은 존재하지 않다. 하지만 이 말이 정답이 없다는 말과 똑같지 않다. 정답은 존재한다. 이건 마치 수능 문제를 푸는 것과, GRE 문제를 푸는 것과도 같다. 상황이 있고 이 상황에 기반하고 있는 여러 전제조건들이 있다. 이 컨디션들이 우리의 상황을 특정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도록 몰아주며 비계까지 깔아놓는 순간 우리는 특정 정답에 가까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마 이게 영국 아재 같은 사람들과 나 같은 사람들이 꾀하는 종류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항해서 포스트모더니즘적 생각을 어느 정도 깔면서 내놓고자 하는 대답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착각하면 안 되는 게, 절대적인 것은 없다. 수능 문제도 수능문제위원에 개인이 저항하고 항거할 때 그 내부 논리의 모순성을 발견하면 정답을 바꾸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그리고 그것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형성시키는 문제들의 조건들도 가변적이기 때문에 그 조건들에 대한 이해도와 그 조건들을 특정 방향으로 바꾸고자 하는 개인들의 의지가 맞물려질 때 존재할 수밖에 없는 정답도 가변적으로 그 성격이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스트라우스는 어떤 "절대적"인 정답에 대해 약간 고민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정답에 다가가는 방식이 크게 나와 다르다고 보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totality, 혹은 the whole"을 바라보고 조망해야 하는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며, 또한 political knowledge와 political opinion은 다르다고 선을 긋는 부분은 특히 지식인 워너비가 되고 싶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새겨 들어야 한다고 보았다. 스트라우스 본인이 적은 것처럼, 이 시대는 지식의 내용도 너무나 빨리 바뀌고 (위에 적었던 그 가변성의 속도들이 이전보다 훨씬 빠르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변성이 그 이전보다 훨씬 더 확보되고 있기 때문에 opinion의견이 Knowledge 지식을 대체한 시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마 이 부분은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다. 더 이상 공중파 뉴스, 검찰, 등에 대해 authority 믿을 만한 권위가 없어지고 유튜브 오피니언 리더들, 유튜버들의 입들로 의견이 지식과 혼동이 되기도 하며 지식인지 의견인지 우리가 따질 기준도 존재하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스트라우스는 과학과 역사가 발전된 현재 이 시대의 지식 모델들을 과감히 비판한다. 그는 정치 과학은 정치 철학과 분명히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정치 사상사 (역사)의 발전 역시 정치 철학을 대체할 수 없다고 이야기함으로써 철저히 정치철학의 영역을 absolute한 것으로, 비역사적이며 비과학적인 것, 즉 어떠한 맥락 속에서 가변적 형태로 존재하지도 않으며 인간사의 문제를 계량적이고 과학적인 차원에서 접근할 이유도 없는 무엇인가로 설정하려고 한다. 정치철학의 위상을 지키려고 하는 그의 노력을 보면 왜 스타라우스 학파가 정치철학에 남아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기도 한다. 


일단 여기까지가 내가 짧게 읽은 스트라우스 부분이며 더 읽어야 저번에 읽었던 이야기들을 더 잘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중요한 건 스트라우스의 질문이 나한테 화두를 전해준다는 것이다. 이 글 쓰다 보니 내가 저번에 영국 아재 수업 때 냈던 한쪽보다 더 안 되는 짧은 think piece 글이 기억났다.


3. 


           Strauss claims that political philosophers should pursue the knowledge of the whole situation to understand human beings and politics (17), looking for a better life and a better society for us (10). However, it is questionable if I could say the concept of the whole and common good exists. In this diversified and complex era, there are not many comprehensive factors that combine people, make them go towards the same good goal, and maintain its integrity. In other words, it seems we need to build the communal base of “us” in which people can belong in the sense of unity to find out what would be good for us. Therefore, it is hard to agree with Strauss when he says history and science destroyed political philosophy (18), not because of people losing the necessity of universal good. Instead, history and science are mere tools for people who have lost the universal truths.


스트라우스는 정치철학자들은 철학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위해 전체 상황에 관한 지식을 추구해야 하며 (17) 우리를 위한 더 나은 사회와 더 나은 삶을 찾아야 한다고 (10) 주장한다. 하지만 전체적이며 공통적인 선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지가 개인적으로 의심스럽다. 다각화되고 복잡한 이 시대에 사람들을 공통으로 묶어주며 같은 종류의 긍정적인 목표로 이끌어나갈 뿐 아니라 전체적인 통일성을 유지시켜 줄만큼 포괄적인 요소들이 많이 없기 떄문이다. 다른 말로,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엇이 좋을지 만들어 줄 수 있는 공통적인 감각을 제공해줄 만한 "우리"라는 공통적 토대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스트라우스가 역사와 과학이 정치철학 (18)을 파괴한다고 말하는 것에는 공감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공통적인 선의 필요성을 잃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역사와 과학은 이미 공통적인 진실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단지 도구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As to a reason why people let the concept of universality go away, I could go further by casting a question. When Strauss argues political philosophy should replace opinions with the knowledge of the nature of political things (11), it means there is an answer in the name of fundamental knowledge of politics. In this case, I could not resist myself asking who is qualified to attain this true knowledge. There are no differences between positivists and Strauss to me since both of them sound conformists. He criticizes positivists pretend to be neutral in the name of relativism, while what they are doing is selecting what they prefer based on their benefits, making people become conformists by not thinking of what would be truly good (20). However, it is the same as what the classical political philosophers have been doing by using vague words such as virtue and good, trapped in the formality of idealism. By maintaining a tautological claim such as virtue is good, they have selected what would be the truths. Those truths are attained by certain people who can understand the idealism with rationality, conforming to the virtues of their society. The meaning of truths has been set up for mainly western white male intellectual class who can be educated on the concept of virtue and being a good citizen based on the western education traditions. In light of this perspective, I can see why people are no more looking for virtues, but freedom, not as the classics did (36). It seems the excluded started raising their voices to have the freedom to find out their virtues, not as a given answer by certain people.


왜 사람들이 공통성이라는 개념이 없어지도록 냅두게 되었는지 이유를 생각해보면 나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더 논의를 전개시켜 볼 수 있다. 스트라우스가 정치처락이 정치적인 것들의 본질에 관한 지식을 의견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11) 이 말은 철학에는 근본적인 지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미 전제로 까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경우에 나는 누가 이러한 종류의 지식을 과연 가질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실증주의자들과 스트라우스 간의 차이는 나에게 명료해 보이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모두 순응주의자와 다를 바가 없이 들리기 때문이다. 스트라우스는 실증주의자들이 사실 자기들 이익을 위해 연구할 뿐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이 진짜 좋은지 생각하지 않게 함으로써 그들을 순응주의자로 만든다고 (20) 상대주의라는 이름에서 중립적인 척 한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전통적인 정치 철학자들 역시 이상주의적(관념론적) 형식에 사로잡혀 미덕과 선이라는 모호한 말들을 남발한 것도 실증주의자들이 한 일과 다를 바가 없다. 미덕은 좋은 것이라는 뻔한 소리를 계속 함으로써 그들은 무엇이 진실인지를 선별해왔다. 그러한 진실들은 이상주의를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등치시키는 종류의 이해를 통해 그 사회의 미덕들에 순응한 사람들에게 계속 유지되어 왔다. 이러한 진실이 갖고 있는 의미는 보통 흔히 미덕의 개념, 서구적 교육 전통을 기반으로 한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함에 관한 교육을 받을 수 있어 왔던 서구 백인 남성 지식인층에게 맞춰져 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나는 왜 사람들이 고전주의자들이 한 것 (36) 과는 정반대로 미덕이 아닌 자유를 추구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배척받은 자들은 특정 부류한테 받은 정답이 아닌, 그들 자신의 미덕을 찾기 위한 자유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4. 헉 ㅋㅋㅋㅋㅋㅋ 3번 내가 쓴 글인데 내가 번역하면서 헉 했다 ㅋㅋㅋㅋ 나 정말 과감하게 썼었구나 ㅋㅋㅋㅋㅋ 그것도 백인 남자인 영국 아재 앞에서 과감하게 백인 남성들이 지들이 "진리"를 독점해왔다고 쓰고 스트라우스한테 니나 잘하지 뭘 남들 까고 있냐 이렇게 글을 썼었네 ㅋㅋㅋㅋㅋ 아... 


그렇지만 뭐 지금 와서 보면 나는 내가 글 잘 썼다고 생각한다. 문법은 어색한 면이 많은 것 같지만 그래도 스트라우스한테 못할 말한 건 아니라고 보고. 3번에서 이야기한 스트라우스의 장점은 사실 내가 4번 항목에서 가감하게 스트라우스 단점을 깐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가변적인 의미의 진리를 어떻게 convincing하게 성립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만 절대적인 진리를 주장하며 위에서 아래로 시혜적인 마인드로 주는 것에 대해서는 나는 반감을 가지고 있다. 이 지점에서 나는 다른 학문은 모르겠으나 정치철학은 현실과 유리 되서는 안 된다고 본다. 특히 내가 하는 종류의 정치철학은 그렇다. 왜냐하면 나는 그러한 시혜의식에 맞서서 어떻게 하면 "개인"이 "공동체/그룹"이라는 상위 조직에 개인으로서의 권리를 상실하지 않고 타협해가며 공존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지점에서 개인들에게 공동체의 이미 정해진 "선/좋음"이 강요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비민주적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개인들은 어떻게든 그 "선/좋음"을 만들어내는 프로세스에 아주 적어도 형식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실질적으로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선취해 나가야 한다고 본다. 


5. 결론. 더 열심히 공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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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나오는 인용문들은 영어로 써져 있던 것들을 내가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직역보다는 의역했고, 본문들은 다 영어이니 확인시 유의)


개인적으로 디즈니 영화 피노키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제페토 아저씨가 커다란 고래의 뱃속에 갇혔을 때였다. 어린 나로서는 그렇게 큰 생물체의 창자에 인간이 들어가 안전하게 낚시도 하고 불도 지피며 산다는 것이 너무나 이상해 보였다. 그래도 보면 고래 입으로 들어오는 생선들도 많았고, 어쩌면 그 고래가 크고 강력하니 그 안에 살고 있는 제페토 아저씨도 덩달아 안전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나이가 먹고 나니 지금 생각으로는 내가 제페토 아저씨처럼 거대 고래 안에 기생하며 안전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리바이어던, 성경에 나온 큰 고래, 홉스가 권위체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시킨 거대 괴물의 이름. 나는 내가 거주하고 있는 이 거대 괴물을 한나 아렌트, 토마스 홉스, 미셸 푸코의 개념을 사용해 살펴보고자 한다.

 

글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권위체의 정의부터 정리하고 넘어가자. 이 부분에서 나는 한나 아렌트가 무엇이 권위체인지 말한 해석을 잠시 빌리려고 한다. 


“권위체는 강요와 같은 외부적 방법의 사용을 허락하지 않는다. 힘이 개입되면 권위체는 실패한다. 그렇다고 권위체가 설득의 방식을 채택하는 것은 아니다. 설득이란 평등을 전제로 하며 논의의 과정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 93)

 

아렌트는 플라톤에서부터 시작하는 중요한 역사적 원천을 지적한다. 플라톤은, 아렌트의 해석에 따르면, 대화의 방식 없이 공적 문제들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아렌트, 93) 유혈사태를 피하는 것이 목적 중 하나이기 때문에 권위체를 작동시키는 데 있어서는 강제나 힘이 개입되면 안 된다. 반면, 그렇다고 아렌트가 설득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데, 설득은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 개인 간의 소통과 평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즉, 아렌트가 해석한 플라톤 식의 권위체란 비폭력적이지만 그렇다고 개인들이 평등하지는 않은 정치 시스템이다. 이는 권위체가 평화적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평등한 위치를 포기한다는 것을 내포한다.

 

토마스 홉스는 권위체의 성립을 위해서는 일반 대중으로부터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들의 안녕을 위해 권위체에 권력을 양도하는 것을 합의했다고 주장한다. 그게 그가 권위체를 정당화시키는 방법이다.

 

“나는 나 자신을 다스릴 권리를 포기한다. 이 권리는, 이 한 사람에게, 혹은 이 하나의 의회로, 조건 하에 양도되며, 그렇기에 그대들은 그대들의 권리를 그(권위체)에게 넘기며, 같은 원리로 그의 행동들을 허락하는 바이다” 라고 선언함으로써 하나의 존재로 집약된 대중이 탄생한다. 이 집약된 존재가 바로 라틴어로 씨비타스라 불리는 커먼웰스이다.” (홉스, 246)

 

위의 인용은 홉스가 사람이 근엄한 약조를 함으로써 어떻게 개인의 권리를 하나의 권위체에 양도하는지 보이는 장면이다. 이 양도 과정으로 권위체는 리바이어던이라는 이름과 함께 커먼웰스로 등극하여 모든 개인에게서 차출되어 집약된 권력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내게 있어 홉스의 이러한 방식은 문제적인데, 사람들이 정말 홉스가 말한 것처럼 이러한 맹세를 했는지 안 했는지가 근본적으로 의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류의 맹세가 존재한다고 사람들이 보통 알고는 있나? 우리는 특정 권위체 (국가나 정부가 이 권위체라는 말과 바뀌어 쓰일 수 있다고 본다)에 기반한 사회들을 선택한 적이 없다. 우리는 무작위로 태어났고, 이에 속절없이 적응해야만 했다. 현재 사회에 어느 정도 만족한 사람들일지라도 크게 다를 건 없다. 지금은 행복할지 몰라도 만약 그들에게 선택지가 주어졌더라면 그들도 이 만족스러운 사회를 버리고 다른 사회를 선택했을지 모를 일이다. 한마디로, 우리에게는 선택할 권리가 없었던 만큼, 대안을 선택하기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홉스의 이론이 단순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사람들이 위와 같은 맹세를 한 적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왜 그가 단순히 개인들이 맹세를 했다는 식의 주장에서 나아가 이론을 완성시키기 위한 정당화 혹은 명분을 만드는 이유이다. “사람들이 공통된 권력이 없이 살았을 시절에 그들은 항상 이해할 수 없는 공포에 빠져 살았다. 그 시절에는 전쟁이 있었다. 이 전쟁 속에서 만인은 만인에 투쟁한다.” (홉스, 178) 이 주장은 그의 이론을 받쳐주는 완벽한 디딤돌로, 우리에게 권위체가 필요하냐 하지 않느냐의 질문을 무용하게 만들어 버린다. 왜냐하면 그가 이 질문에 인간 본성이란 기본적으로 폭력적이라 다스려야 할 질서가 필요하다고 대답하기 때문이다.

 

나는 홉스의 이론을 비판하는 입장이지만, 비판하기 이전에 그의 이러한 주장이 왜 유효한지 지적하고 넘어가고 싶다. 홉스는 자신의 이론에 맞는 나름의 정당한 이유와 맥락을 갖고 있다. 그의 시대는 권위체로 작동하던 왕정이 혼란에 빠진 상태였고, 그는 권위체의 근원과 원리를 사람들에게 이해시킴으로써 권위체의 안정을 꾀하고자 했다. 그의 이론은 왕정주의자들과 의회주의자들 양측에서 다 환영받지 못했는데, 왕정주의자들은 홉스가 권위체의 권력은 민중에서 온다고 주장함으로써 왕정 권력의 신비화를 방해하기 때문에 싫어했고, 의회주의자들은 권위체의 신성불가침적 권력을 강조하는 홉스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홉스의 주장은 교체기라는 혼란한 시기에 권위체의 정체성을 재정립함으로써 양측을 화해시키려고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자, 이제, 홉스한테 내가 진정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질 차례이다. 권위체가 없다면 사람들이 잘 살 수 없다는 홉스의 명분은 정당한가? 그 주장은 참인가? 문제는, 권위체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폭력과 재앙 속에 살고 있다.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머나먼 이야기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일분일초 매 살아가는 나의 삶 속에서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홉스와 같은 사람들은 인간이 폭력을 최대한 줄이고 통제하기 위해 암묵적으로 그리고 필수불가결한 방식으로 우리의 자유와 권리를 양도하여 권위체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의 이 삶이 권위체가 없는 경우보다 폭력과 전쟁을 덜 발생시키는 구조일까? 우리가 그를 어떻게 알 수 있지?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만약 사실이라치손, 개인의 자유를 희생하면서까지 권위체를 만들 필요가 있나? 아니면, 권위체야말로 폭력을 만들어내는 주체 아닌가?

 

만약 우리가 이 모든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커먼웰스가 정녕 필요한지 아닌지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모두 대충 짐작하다시피,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여기에는 하나 숨겨진 문제가 있다. 강력한 힘을 가진 리바이어던이 시간이 지나면서 진화를 거듭해왔기 때문이다. 이 괴물은 자신의 무기를 아무 맥락 없이 휘두르는 멍청이가 아니다. 외려, 시간의 조류를 따라 헤엄치며 온갖 변화를 거듭해왔다. 이 영리한 생물은 자신의 힘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생산해낸다. 제자리에 얌전히 있지 않고 어디 가든 아주 최선을 다하면서 말이다. 그 결과는 홉스가 고안했던 이론적 영역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우리가 사는 현실에까지 넘어온다.

 

미셸 푸코가 바로 이 점을 지적한 학자이다. 그의 많은 저작들은 어떻게 권력이 생산체계를 조직하고, 결과를 생산해내며, 사회 안에서 담론의 내용을 결정하고, 사회 시스템을 작동시키는지를 다룬다. 그의 책 “비정상인”은 진실의 담론이란 “과학적 상태 혹은 과학 기관들에서 검증받은 사람들에 의해 배타적으로 표현된 담론” (푸코, 6)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는 권력이 전문성과 과학의 권력을 중시하는 현대 사회의 맥락 안에서 작동됨을 보인다. 즉, 리바이어던은 변신의 단계에서 홉스식의 커먼웰스라는 껍데기에서 탈피해 푸코식 판관으로 변태한 것이다.

푸코의 지적은 그가 권력체가 가진 힘이 인간을 육체만이 아닌 영혼도 구속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는 알가론이라는 사람의 사례에서 이를 입증한다. 이 경우에, 소위 정신과 의사들이란 사람들은 다음처럼 증언했다.

 

“그가 범죄자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우리의 관할영역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가 범죄자라고 가정하고, 정말 그 일을 했다는 전제 하에서, 정신과 전문의인 저는 그가 어떻게 그러한 범죄를 저질렀을지 여러분에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푸코, 16, 17)

 

위의 인용은 종교재판관이나 카톨릭 사제들처럼 신의 이름으로 신도들을 판단하던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신이라는 이름이 단지 요즘에는 과학으로 대체되었을 뿐, 이제 그것들은 국가를 승인하고 다른 종류의 권위체들로 하여금 사람을 진단하고 조사할 수 있도록 허락을 내려준다. 한때 십자군이 종교가 권위체와 사회 규범의 근원으로 작동하던 시기에 성스러운 해방운동으로 여겨졌던 것처럼, 이제 과학과 이성이 모든 이의 잣대가 된 시대에 폭력은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취급된다. 이는 이제 권위체가 홉스가 이야기하는 식으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권리를 한곳에 양도받아 머물러있는 식이 아니라 누가 정사잉고 아닌지의 판단의 잣대를 설정해가며 개인들의 윤리를 재고 그 영혼을 판단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을 보인다. 즉, 권위체는 누가 폭력적이고 아닌지, 정상인이고 아닌지를 가리는 힘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푸코는 이를 “한마디로, 그것들은 (여기서 ‘법적 진술’을 의미함) 법적 차원의 진실을 생산해내는 과정에서 특정 진술들의 초법적 성격이라는 진실과 권력의 특정한 효과를 갖는다” (푸코, 11)고 잘 요약한 바 있다. 이 말인즉슨, 푸코가 이야기하는 초법적 성격의 특정 효과는 권력체의 본질을 관통하여 권력체 스스로에게 유리할 진실과 판단들과 잣대들을 생산해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리바이어던에게 권리와 자유를 양도한 우리는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적법한지 아닌지의 여부를 따질 능력을 더 이상 지니지 않는다.

 

이때까지 나는 아렌트에 기반해 권위체의 정의를 처음에 살펴본 다음, 권위체를 정당화하는 홉스의 이론도 같이 살펴보았다. 그의 이론은 권위체가 개인간 발생할 수 있는 폭력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개인 간 합의를 전제로 성립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푸코가 지적한 것처럼 개인들에게는 폭력이냐 아니냐의 기준을 정할 판관으로서의 권리따위 갖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어떤 종류의 행동양식이 폭력적이고 비정상적인지를 권위체의 판단을 통해서만 알 분이다. 리바이어던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확립하여 사회 체계 안에 깊숙이 그 또아리를 틀어박은지도 오랜 시간이 지났다. 이 권위체는 사회양식을 생산하는 능력을 독점하고 있으며 우리가 권위체를 필요로 하는지조차의 질문에 대한 열쇠도 자기 품 안에 가지고 있다. 리바이어던은 우리에게 권위체가 필요하며 폭력과 비정상을 사람들 등 위에 낙인찍으며 폭력의 증거들을 입증한다. 하지만 무엇이 진실인지 분별할 능력이 우리에게 있지 않는 한, 그리고 그게 우리 소관도 아닌 한 이제 그 증거들이 참인지 아닌지도 믿지 못한다. 우리는 이제 그들의 판단을 믿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두 가지 길이 남는다. 하나는 이 권위체를 유지시켜 권위체가 생산해내는 판결과 설명에 의존을 하든지, 혹은 권위체를 의심하며 새로운 대안을 찾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판단이다. 위대한 괴물인 리바이어던을 우리의 수호자로 모시며 살든지, 혹은 사냥해서 이놈의 뱃속을 갈라 빠져나오든지 말이다.

 

         

Reference:

Arendt, Hannah. 1961. Between Past and Future. New York: The Viking Press, Inc.

Foucault, Michel. 2003. Abnormal: Lectures at the collège de France, 1974-1975. 2003. London: Verso

Hobbes, Thomas. 2009. Leviathan: The Matter, Forme, and Power of a Common-Wealth Ecclesiastical and Civill. Floating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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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저번 학기 글을 번역한 것인데 많이 쳐내고 좀 다듬은 것도 있지만 기본 글 방향은 바꾸지 않았다. 그래서 읽으면서 스스로 이 글에 대한 비판지점을 여러 가지 생각해보았다. 선생이 코멘트 달아준 것 중 하나는 내가 너무 홉스가 성악설인 것처럼 이야기한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홉스가 인간 본성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을 내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을 수 있다.

그것도 그렇고, 논리가 하나 흔들리는 지점이 있다. 나는 이 글에서 권위체가 홉스식 리바이어던 괴물에서 푸코식 판관으로 진화했다고 주장하는데, 글을 보면 그 두 가지 양식이 같은 시대에도 존재했던 것처럼 이야기한다. 즉, 권위체가 가진 홉스식 성격과 푸코식 성격이 어떤 시대에도 항상 작동하느냐 아니면 시대를 따라 진화했느냐- 나는 후자로 봤는데 글을 읽으면 부분적으로 내가 이 두 가지를 동일선상에서 같이 일어나고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 것은 아닌가 싶다. 그 부분의 내적 동일성이 충돌한다는 점에서 이 글을 비판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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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I. 서론


II. 자아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1. 감각을 통한 물리적 범위 형성

2. 언어를 통한 사회적 위치 형성


III. 자아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1. 마음이 그려낸 세상 

2. 예술적 자아론


Ⅳ. 결론: 규정된 경계를 뚫고 나아가는 예술적 삶을 위하여


참고문헌 


Ⅰ. 서론


세상에 태어나 만난 가장 큰 인연은 누구인가? 필자는 주저 없이 ‘자기 자신’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막상 나 자신이 누구인가 고민해보면, 나의 의지만 오롯한 진정한 주체도 아니요, 주변 요소들로만 이루어진 단순 합성물도 아니다. 나는 나의 의지와 외부의 지형이 만나 만들어졌다. 그러한 스스로를 바탕으로 한 평생을 살아가니, 자기 자신이야말로 가장 귀하고 특별한 인연이지 않을까? 필자는 그러한 자기 자신을 ‘자아(自我)’로 고정하여 이에 대해 논의해보고자 한다. 만들어져 있지만 앞으로 만들어나가야 하는, 수동적 운명을 따르지만 능동적으로 나아가는 이 존재를 고찰해보고 싶다.

 

이 논문의 관심은 100년의 삶을 사는 인간이 자아를 떠날 수 없다는 전제조건 아래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만들어져 있다. 그 사실을 통렬히 아는 것이 첫 번째 작업이다. 자아는 인생을 주재할 수 없다. 우리는 영원히 세상에 남을 수도 없고, 언젠가 죽어서 해체되어야만 한다. 그런 허무함이 순리다. 그것을 받아들인 다음 우리는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불교에서는 해탈을 주장한다. 모든 업력을 청정시켜 열반에 이르는 것이 불교 사상의 큰 종착점 중 하나이다. 윤회의 업을 끊고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철저한 없음이 우리가 언젠가 도래할 종착지라면, 우리의 삶은 지금 왜 이렇게 펼쳐져 있는가? 정녕 내가 사는 지금 이 삶에 아무 의미도 없단 말인가? 이것들이 다 순간이고 가짜라면,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다 착각에 불과하단 말인가?

불교에 의하면 우리는 깨달음을 통해 이 세상 만물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이 바로 연기론의 핵심 내용이다. 그래서 나누어진 실체는 가유(假有)다.[주석1]  하지만 우리의 일상 삶은 그러한 진리에 의거해 이루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인간 사회는 자아라는 하나의 고정된 개체, 즉 헛된 의식을 상정해 작동한다. 우리는 그러한 분별의식을 필수 전제로 세상을 산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우리가 육체와 언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무한함을 엿볼 수 있지만 우리 자체가 무한해질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한계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렇게 우리는 인간으로서 ‘종적 환상’을 산다. 종적 환상[주석2]은 큰 그림에서 보면 미몽이지만, 우리의 작은 눈에서는 삶의 터전이다. 그 종적 환상이 우리를 인간으로 승인한다. 그 기준에서 벗어난다면 인간이 되지 못한다.

 

어떤 정해진 절대 기준이 우리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임의적으로 고정된 기준이 우리를 만들었음을 알아야 한다. 깨달음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자신의 모든 것이 가짜라는 허무의식에 빠졌다면 온전히 깨닫지 못한 것이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다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다음으로 자신이 앞으로 스스로를 만들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아야 한다. 모든 것의 기반이 허무지만 그것이 바로 예술적 자아가 갖는 무한한 가능성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만들어 내는 것이 곧 인간을 만드는 것이며, 인간을 만드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임을 알게 된다. 즉, 만들어졌기 때문에 앞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 그것이 필자가 생각하는 참된 해탈이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다시 정리해보자면,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이어진다. 첫 번째 지점은 자아가 물질적으로도, 사회적(혹은 관념적)으로도 제약받아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몇몇 사상을 살펴보면 물질과 정신을 이분한 상태에서 정신의 자유를 설파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필자는 우리의 자아가 실상 양 측면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본다. 동서양의 여러 논의를 참고하여 그 점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다음 두 번째 지점에서는 자아의 능동적 측면을 이야기하려 한다. 첫 번째 지점에서 자아가 형성되었다는 수동적 측면에 집중한 것과 반대된다. 자아라는 그 얼기설기한 화합물들이 한 발짝 전진하여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그에 따라 세계도 변화시키는 예술적, 창조적 주체라는 관점이 필자의 최종 결론이다.


Ⅱ. 자아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1. 감각을 통한 물리적 범위 형성

 

자아라는 말을 필자는 일종의 자기 정체성이라고 받아들인다. 나는 누구인가? 이 말을 더 정확히 풀어쓰면 “나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이다. 앞의 ‘나는’의 나와 뒤의 ‘내’라는 나가 같은 존재인 것일까? 자기동일성을 지닌 나라는 주체는 누구인걸까? 아니, 그 주체는 언제부터 있었던 것일까? 나는 그 자아를 언제부터 나 자신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걸까? 어쨌든 분명한 것은, 여기에서 그 둘을 같은 것이나 혹은 적어도 유사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면 논의가 무의미해진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아가 논의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가지는 자기 동일성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자아가 자기 자신이라는 동일성을 가지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감각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이다.

 

필자는 자아가 스스로를 자각하고, 단 하나의 존재로 의식하기 위해서 필요한 첫 번째 단계가 자아와 외부의 충돌이라고 본다. 자신은 남과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은 경계의 설정이다. 경계는 외부와의 지속적인 충돌을 통해 정립된다. 무한히 펼쳐져 있고 평화롭게 겹쳐질 수 있다면 경계선이 생길 이유가 없다. 그러니 유한한 영역 안에서 충돌들은 자연스럽고, 그것을 감지하게 해주는 것이 우리의 감각이다. 그렇지만 감각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감각은 금방 흘러가버리고, 현재에서 벗어나버리기 때문이다. 감각을 묶어내고 보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언어이다. 무차별적으로 발생하는 감각들을 의미에 따라 묶어내고 분류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해야 그때 비로소 자아가 태어난다. 하지만 언어는 다음 항목에서 더 상세히 이야기를 하고, 이곳에서는 우선 감각만 논의하겠다.

 

감각은 외부 대상들의 존재를 자신에게 알려주는 지표이다. 또한 자신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알려준다. 자아가 누구인지를 질문하고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남들과 분리되어 있고, 그렇기에 남들과 자신 사이에 선을 그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필요성은 자신 아닌 다른 존재가 분명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서부터 나온다. 감각은 인간이 자신과 자신 아닌 다른 것을 느끼게 하는 중요한 자극들이다.

 

사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세상과 조우하는데 이때부터 감각은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아니, 심지어 엄마의 뱃속에서 웅크리고 있을 때도 감각은 존재한다. 불교에서도 태아 때부터의 육체 형성을 인정하는데, 이를 이전 생의 업이 태아의 뱃속으로 수정된다고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이 단계에서 앞으로의 감각을 가능하게 하는 신체가 형성된다. 이 육입처(六入處)라 불리는 것들을 통해 현실화된 기관들은 삶에서 접촉(觸)을 낳고, 그 접촉은 느낌, 집착 등을 연속적으로 발생시킨다.3 불교에서는 이것이 무아를 깨닫지 못한 무명에서 비롯된 집착으로 설명한다. 그렇기에 궁극적으로는 해방되어야 할 윤회의 끈이다. 중요한 점은 신체 기관이 다른 것들과 만나는 일종의 입구 역할, 시작점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업이 끊어지지 못하고 재생산된다. 그 입구에서 발생된 감각들을 통해 우리는 나라는 존재를 세계와 분리해내고, 나의 테두리가 어디까지인지인지 확인한다. 그렇게 해서 아집이 발생한다. 감각은 세상과 자신을 분별시킨다.

단지 불교철학에서만 감각과 자아의 발생을 연결짓지 않는다. 프로이트 역시 감각을 자아가 세계와 자신을 분리시키는 작업 중 하나로 보았다. 미국의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1956년 생)는 자신의 책에서 [주석4]프로이트의 저서 󰡔On Narcissism󰡕[주석5]에서 나온 빌헬름 부쉬(Wilhelm Busch)의 시 「발두인 발라민(Balduin Bahlamin)」중 한 행을 인용한다. “어금니의 좁다란 구멍 안에서만 영혼이 머물고 있는 것이다.(Einzig in der engen Höehle, des Bachenzahnes weilt die Seele)”[주석6]이다. 해당 구절이 나온 맥락은 버틀러가 후에 󰡔자아와 이드󰡕라는 글로 발전한 프로이트의 사상을 소개하는 것이다. 그 글에서 프로이트는 육체의 고통이 육체적인 자아발견의 전제조건[주석7]이라고 밝힌다.


두 논의를 살펴보면 감각은 이중으로 설명된다. 불교에서 감각은 우리가 이전 생에 지은 업의 결과이며 다시 그 다음 업을 잇게 하는 연결고리이다. 감각은 우리로 하여금 경계 짓게 만들어 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다소 부정적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한편 프로이트적 관점에서 일단 우리 스스로의 존재를 ‘자아’로 키워내는 것이 감각이다. 극심한 분열과 그로 인한 고통으로 세상과 자아 사이의 경계지점을 나타내주는 필수요소이다. 자아가 다른 것들과 접촉할 수 있는 입구는 육체이고, 그 육체로 인한 감각이 매개체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접촉을 통해서 발생된 호오의 느낌이 우리로 하여금 계속 움직이게 하는 힘을 산출한다는 점에서 불교와 프로이트의 관점이 상통한다.

감각의 역할을 주로 살펴보았는데, 감각을 경험하는 방식과 그 대상에 여러 가지가 가능하다는 점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사람들은 주로 시각에 의존해 세상의 다른 존재들을 관찰한다. 그러나 그 뿐 아니라 자신의 몸도 만져보고 탐구함으로써 육체를 체험한다. 자신의 몸에 관심을 가지게 됨으로써 자신의 몸의 경계를 알게 된다. 그것의 기능과 작용을 파악한다. 기본적으로 감각은 우리로 하여금 어디까지가 팔부터 목, 다리부터 허벅지인지를 파악하게 만든다. 그 뿐 아니라 어디를 어떻게 만지면 좋고, 어디를 어떻게 만지면 아픈지도 알아낸다. 자신이 갖고 있는 기관들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자신이 얼마나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이 구조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를 살핀다. 한마디로, 감각이라는 느낌 작용은 우리 자신의 테두리를 실험하고 시도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총체적인 능력의 선이 어디까지인지도 확인하게 돕는다. 세상과의 분별 뿐 아니라 자신의 한계도 측정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육체적 고통이 생기면 우리의 온 신경이 집중한다. 이처럼 고통이라는 감각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고통을 호소하는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있는지, 왜 그런 일이 생긴 건지 필사적인 관심을 쏟는다. 고통은 강렬한 감각으로써 그에 필적하는 관심과 집중을 요한다. 고통과 비슷하게 아주 인상적인 감각일수록 충격이 배가된다. 보통 강렬한 감각이 발생하는 이유는 자신을 이루는 경계가 이때껏 마주치지 못한 강한 힘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감각경험 중 보편적으로 강렬한 것이 단연 고통이다. 고통은 그 어떤 감각보다도 효율적으로 경계선을 느끼게 해준다. 불교에서 고통에 주목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아집으로 인해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느낀다고 하는 불교의 설명은, 우리가 자신의 경계선에 속박되어 있을 때라고 말한다. 유한한 자기 자신에 머무르면 우리는 제한되고, 제약받기에 끝없이 고통 받는다. 우리가 거스를 수 없는 어떠한 강하고 압도적인 힘에 억눌려지거나 적어도 자신과 준하는 힘에 의한 저항을 통해 피곤할 정도의 긴장을 겪기 때문이다. 즉, 자신을 향한 세계의 여지없는 폭력과 대면하는 것이 바로 고통이다.

그렇게 생긴 고통, 혹은 감각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놀라운 진리는 이 세상이 명백히 자신의 뜻과 생각에서 어긋나게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세상과 자신은 분리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가 스스로 어떤 존재인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게 해준다. 우리는 미약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들이다. 세계는 굳건할 뿐 아니라 강력해서 자아로 하여금 좌절을 맛보게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외부의 세계에는 우리를 능가하는 큰 힘이 작동한다. 자아로 하여금 자신의 힘이 미약함을 느끼게 한다. 구부려질 수 없는 그 힘 앞에 자아는 외부의 것과 자기 자신이 철저히 다르다는 이질성을, 그리고 자신의 약한 힘으로는 그 강한 힘을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가져왔던 세상에 대한 의지를 버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고통이다.

 

불교가 인간이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아집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충분히 납득되지 않는가? 자신의 경계선이 지어질 때 우리는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고, 그로 인해 자신의 것인 줄 알았던 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다. 세상이 우리를 내동댕이칠 때마다 우리는 고통을 경험한다. 강력한 감각들을 경험한다. 그것은 분열의 경험이기도 하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해탈을 한다면 자아의 경계선에서도 해방되어 고통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경계선에서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아라는 한 존재가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가장 분명하게 느끼는 사건이다. 그것은 존재의 아픔이며 실존적 고통이다. 존재가 세계라는 시공간 안에서 겪는 물리적 범위 설정의 문제이다. 그리고 감각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2. 언어를 통한 사회적 위치 형성

 

그러나 이러한 감각을 가졌다고 해서 우리가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는 이르다. 우리가 보통 의미하는 자아가 되기 위해서는 연속성이 필요하다. 동일성은 시간적 지속성을 요구한다. 이제 남은 하나의 것, 인간이 스스로에게 자기동일성을 부여하기 위한 한 가지 전제 조건은 바로 언어다. 수많은 감각경험들이 인간으로서의 내가 가진 경험들이 되기 위해 단지 언어를 기다린다. 감각적 계기를 통해서 자신과 외부 세계를 구분하고, 경계를 지어 범위를 설정했다면 이제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바로 해석과 공유, 분별을 위한 의미화이다. 이 의미화 작업을 통해 언어는 매순간 범위 지어진 한 개체를 묶어내어 인간 사회 안으로 진입시킨다.

이제 인간이 해야 할 작업은 바로 사회 안에서 살아나갈 자신을 규명하는 일이다. 자기가 이때껏 느껴온 자신을, 감각으로 범위 지어진 자신을 말로 풀어내고, 말에 빗대어 이해를 시키는 시도이다. 자신이 세계와 다르고, 어느 정도 분리되어 있고, 얼마나 다른 존재임을 피부로 느낀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러한 감각은 모든 순간들에서 이루어진다. 생물학적 원리로 물질계에 현현된 존재들이라면 기초적으로 갖고 있는 성질이다. 동물 중 인간이 자신을 하나의 개체가 아닌 종족 구성원으로 인식하기 위해, 이제 우리는 순간에만 작용하지 않고 일관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사회적 근거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자아 설정의 작업이 가능할 인간의 생체적, 사회적 나이가 어느 때인지 생각해보면 아마 사춘기 때일 것이다. 여러 모로 자신의 몸 뿐 아니라 다른 세계들에 대한 경험도 어느 정도 쌓아둔 상황이고, 자신이 세계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나이이기도 하다. 그것 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언어의 습득 정도가 성숙해졌을 때이다. 물론 사람의 성숙도와 축적된 경험의 양에 따라 자아를 고민하는 문제가 더 이르게 찾아올 수도 있고, 더 늦게 찾아올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때껏 스쳐지나간 경험을 놓치지 않고 그것을 언어를 이용해서 규명하고 생각하는 작업, 자기 자신을 언어로 물어보기 시작하는 때가 바로 그 자아 형성의 순간이라는 점이다.

 

언어는 우리로 하여금 사회 안에서 스스로를 경계 짓게 만든다. 감각이 실존적이고 물리적인 세계 차원에서 경험적인 범위 설정을 하게 만든다면, 언어는 인간 사회의 구조 안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설정하게 만든다. 이는 자아가 사회 속의 한 개체로서 안정성을 획득하도록 만든다.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허망한 언어에 우리 스스로를 묶어버리는 무명의 극치일지 모른다. 계속 변하며, 연결성에 의존한 존재를 하나의 위치로 귀속시키기 때문이다.

 

언명은 인위적 고정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엄마’가 되기도, ‘아빠’가 되기도, ‘연인’이 되기도 한다. 그 이름에 해당하는 수많은 의무들이 이름을 따라온다. 그 단어를 차용해서 쓴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무거운 일이다. 사회로부터 발생한 언어에는 사회가 기대하는 수많은 의무와 제약조건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로 자신을 안전하게 위치 짓는 것에만 한정되지 않고, 스스로가 안정화 되게끔 유도한다. 단순히 다른 사람들의 의무가 따라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그 역할을 찾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기대되는 것들에 스스로를 맞추어나가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사회라는 인간 생태 안에서 일정한 위치에 안착하여 그에 따른 여러 명시적, 암묵적 혜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 사회에서 좋은 친구라 불리는 여러 덕목과 의무를 잘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그가 자신의 이름값을 잘 수행한 대가가 그로 하여금 유능하고 신뢰할 만한 사회 구성원이 되게 만든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감각 자체는 어떻게 보면 자아 형성 의미를 주지 못한다. 감각은 휘발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언어로 이루어진 사회를 구성해서 만들어 나가는 동물이기 때문에 휘발되는 감각들조차 가치와 연결되어야만 고정된다. 언어가 감각을 만나면 그 감각경험들에 의미가 부여되고 그 부여된 의미에 따라 경험들이 분류가 가능해진다. 즉, 묶이게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서 동일한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자아는 그 동일한 것들 위에 정체성을 다지게 된다. 그 근본은 매우 가변적이다. 하지만 일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그것의 기원을 따지기보다는 현상적 측면에 기대어 살아간다. 무한함이 진리이지만 우리에게는 유한한 삶이 주어져 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들이 비록 허상일지라도 마음 놓고 의존하는 것이다. 거시적으로 보면 위험천만하지만 미시적으로 보면 안전하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후기철학에서 언어의 이러한 기능 및 역할을 논의한 바 있다. 특히 필자가 인상적으로 본 부분은 언어 혹은 언어게임이 본질적으로 공적이라는 점[주석8]과 관련해서이다. 언어 그 자체가 공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독자적인 것을 말할 수 없다. 사적인 경험을 그 자체로 드러낼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독자적으로 개발해낸 것은 사용될 수 없다. 아무리 표현해본들 수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이라는 독자성을 언어화해서 정체성으로 삼을 수 없다. 어차피 공적인 언어가 개입하면 모든 사적인 것들은 파괴된다.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사용하는 도구인 언어는 단순히 인간을 사회적인 맥락에서 정의 내리는 데 도울 뿐 아니라 한 개인으로 하여금 개별 언어의 특성과 그 언어가 쓰이는 맥락에 종속되게 만든다. 그 언어가 쓰이는 문화라는 배경이 우리의 자아를 묶어버리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어떻게 탄생되는지 보면 이해가 쉽다.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이 한국어를 쓰며 한국 문화에 포섭되는 것을 보라. 한국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한국의 문화와 접하는 것이고, 태어날 때부터 한국어를 모국어로 삼는 사람들은 한국어가 불러일으키는 모든 상(像)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상들이 바로 그를 그로 만들기 때문이다.

 

부연설명하자면 우리가 사적 경험으로 얻은 내적 감각이라 해도 그것을 외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인 언어로 인해 공적인 틀에 포섭된다. 애초에 의미가 그렇게 주어진다.[주석9] 그 의미는 우리가 자유롭게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맥락에서 파생된다. 우리는 텍스트이며, 맥락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맥락이 우리를 사회라는 인간 공동체 안의 한 개인으로 인정한다. 언어를 통해 사회 안에서 자신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이 작업이 다른 말로 사회화이다. 이 작업들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자아를 가진 한 인간이 태어난다.

 

Ⅱ. 자아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1. 마음이 그려낸 세상

앞에서 자아가 만들어지기 위해 필요한 두 조건들을 고찰해보았다. 자아는 외부 환경과 사회 맥락에 의해서 특정하게 경계 지어진 존재이며 그 경계선을 따라 정체성을 형성한 결과다. 한 사람이 어떤 특정한 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규정되어야 하고, 한계 지어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감각과 언어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처럼 자아는 가변적이다. 제한적이고, 외부에 의존적이다. 우리의 자아는 무한한 활동성을 보장받지 못한다. 우리의 실상이 무한한 것과 별개이다. 우리라는 존재는 물질과 세계의 엄연한 장벽에 의해 가로막힌다. 또한 우리는 사회라는 맥락 안에서 타인들에게 인식되고, 다시 자신도 자신을 인식하기 위해 언어라는 사회화 작업을 필요로 한다. 그렇게 하나의 자아로 탄생한다. 스스로를 대상화시킨 자아는 이제 그것을 바탕으로 타인과 세계에 접속한다. 우리는 외부 맥락에서 끝없이 자아라는 경계선을 인식 받고 있는, 여러 한계를 통해 선이 그어진 존재들이다. 세계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 의미도 공급받지 못한다. 우리는 구성물이고 만들어진 존재들이다.

 

하지만 가장 재미난 이야기는 지금부터이다. 그 제작의 과정은 일회적이지 않다. 현재진행형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변화해나갈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서조차,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변화 속에서 지각도 못한 채 계속 바뀌고 있다.

이때까지의 논의는 우리를 공포에 빠트릴 수 있다. 우리 자신의 주체성과 일관성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나라는 정체성도 결국 내 손이 아닌 다른 자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나는 그들의 영향력 속에서 항상 내 자신의 위치를 지정받고 있다. 얼마나 무기력한가? 얼마나 수동적이고 나약한 존재인가? 나란 없는가? 미래도 정해진 것인가? 아니, 모든 것이 짜인 시나리오에 불과한가?

 

여기서 다시 불교의 논의를 끌어올 필요가 있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오온의 인연화합물이라고 이야기한다.[주석10] 이는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가 경계와 조건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형성물이라는 이야기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고정된 나라는 생각이 허상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계에 법이 있다는 믿음도 다 허상, 공(公)임을 아는 것이다. 즉, 법무(法無)이다. 자아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열쇠가 그곳에서 비롯한다.

 

우선 자아를 만들어낸 기준들이 감각과 언어라는 가변적인 경계로 인함을 안다면, 그 경계를 지워내는 작업이 가능해진다. 그 작업은 불교에서 말하는 공과 직면하려는 노력을 통해 가능하다. 개체의 경계를 지워내면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바로 무한의 마음, 공의 마음[주석11]이다. 모든 것은 사실상 거대하고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는 단 하나이다. 우리는 단지 그 중 조각내어 이어진 일시적 파편들이다. 그곳에서부터 우리의 여러 한계가 생성될 뿐, 우리를 이루는 진짜 정체는 단 하나의 일심(一心)임을 볼 수 있다.

우리가 갖는 분별의식조차 사실은 이 일심, 거대한 심층 아뢰야식에서부터 나온다. 즉, 세계는 마음이 그려내는 거대하고 지속적인 작품이다. 흥미로운 점은 불교에서 설명하는 아뢰야식의 작동 기제를 살펴볼 때, 아뢰야식이 일방적으로 세계에 관한 모든 상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이므로 근본적인 마음이 모든 현상을 그려내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이 그려내는 과정에서 그 구체적인 상은 의식이나 말나식의 활동인 현상세계의 업이 남긴 종자가 아뢰야식에 심어지고, 다시 그 심어진 종자들이 기반인 아뢰야식에 떨어지고, 그 떨어진 것이 싹을 틔워 다시 현상으로 올라오는 구체적인 전개를 따른다. 이 과정을 다른 말로 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 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이라고 한다.[주석12] 이것은 모든 것이 만들어진 과정들이 계속 순환되고 있음을 보인다.

이처럼 이 세상을 만들어내는 일심의 끊임없는 활동성을 이해한다면 왜 우리를 만들어낸 조건들이 가변적인지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그만큼 앞으로 우리가 충분히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충만함에 도달할 수 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따라 구체적인 모습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업력의 중요성이다. 만약 우리가 여러 흐름에만 이끌린다면 우리가 심는 업조차 타성적인 것을 있는 그대로 반복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자아에 대한 통찰을 가지고 변할 수 있다는 혹은 열반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행동한다면, 이때까지의 반복을 끊고 다른 길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만약 불교에서 해탈하기 위해 수행을 강조한다면, 필자는 그것을 진정한 주체성의 확보라고 이해한다. 여기에서의 주체성은 단순히 하나의 실체적 개체만을 상정하는 유아론적 아집을 전제로 삼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주체성은 무아라는 통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존재인지 명확히 아는 작업은 자신이 연결된 하나의 망에서 어느 특정한 지점 위에 올라와져 영역 지워졌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다. 그래서 자신의 현재 지점, 위치, 경계선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 즉, 자기 자신의 흐름과 역사를 아는 것이 바로 세상을 읽는 길이기도 한 것이다. 그 공부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갑자기 어디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이때까지 먼저 존재해온 많은 것들의 합임을 알게 된다. 그것을 향한 수행법 중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관(觀)이 일맥상통하는데, 자신에게 흐르는 모든 것들을 관한다는 의미는 자신과 관련한 모든 것을 살핀다는 자기배려[주석13]와 유사하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마음 작용과 우리 자아의 경계선을 잘 살필 때,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산물이며 우리를 지금 여기 있게 한 많은 것들이 무엇인지 볼 수 있게 된다. 이 세상은 일심이 그려낸 무한한 그림이며 그 수많은 부분들은 서로 끝없이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중 자아는 연결된 무한의 조각들 중 아주 임의적이고 우연한 곳에 놓인 존재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읽어야만 자신이 독자적으로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연결고리들이 수없이 얽혀져 표현되는 하나의 장(場)임을 알 수 있다.

 

그때서야 그 다음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를 넘어선 다른 존재를 상상할 수 있다. 우리는 특정한 텍스트의 산물이다. 그렇기에 이것이 재배열, 재위치화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변이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게 만든다. 나는 변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달라진 내가 행하는 업이 다시 이 일심을 변화하게 만든다. 달라진 일심은 새로운 세계의 상을 그리고, 그 상이 다시 새로운 자아의 장을 형성한다. 이 세상은 이처럼 끝없이 창조되는 현재진행형 무대인 것이다.

 

2. 예술적 자아론

 

이 부분에서 한 번쯤, 세상을 다르게 만드는 능동적 작업 중 하나를 예시로 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주디스 버틀러가 이야기한 젠더 패러디 개념이 그러한 작업을 설명한다. 성소수자들은 젠더 개념 아래에서 패러디 작업을 시도했다. 이들의 패러디는 선행적으로 만들어진 경계 안에서 의미가 고착화된 언어를 자신만의 새로운 의도로 재사용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활용을 통해 언어에 따라 고정되어 있던 정체성이 사실 특정 권력에 의해 생성된 경계선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주석14] 많은 퀴어들(우리말로 성소수자들)은 처음에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적 질서에서 배제되는 정체성을 지녔다. 그들이 이성애자 남성/이성애자 여성으로 설명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성애자 체계에서 남자는 여자를 좋아하며 여자와 자식을 낳는 존재이고, 여자는 남자를 좋아하며 남자와 자식을 낳는 존재였다. 이는 마치 상식처럼 여겨졌는데, 감각적으로 분별된 생물학적 차이와 언어로 규정된 남성과 여성의 이분 체계가 이를 공고히 했다. 그래서 그 구분 속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비정상인들로 취급받았다. 영어 퀴어(queer)의 원뜻은 ‘이상한, 괴상한’이라는 사실을 알면 이해가 훨씬 쉬워진다.

  

하지만 ‘퀴어’들은 곧 그러한 이분 체계의 틈을 노리게 된다. 여성이 남성 역할을, 남성이 여성 역할을 흉내 내는 식으로 패러디를 시도한다. 그러한 패러디의 충격은 곧 당연시된 경계로 보인 체계가 사실은 인위적 구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고, 결국 기존의 이성애 중심 질서는 그 권위와 확실성을 도전받기에 이른다. ‘퀴어’라는 용어가 확장하여 중립적인 의미로 성소수자들 전반을 가리키게 된 것도 기존에 쓰이던 단어의 맥락이 다른 식으로 변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LGBT(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를 의미한다)라는 언어가 등장하여 성소수자들을 표현하게 되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들이 행한 저항이 얼마나 새로운 개념의 확장을 일구었는지 체감할 수 있다.

 

이처럼 기존에 만들어진 세상과 반대되는 그 무엇을 꿈꾸기 위해서는 저항을 해야 한다. 저항을 한다는 것은 먼저 기존의 자신을 억압하는 규칙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자신이 이곳에서 어떻게 낙인찍어져 있는지, 그리고 자신을 형성하는 이 세계가 얼마나 위압적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즉, 자신과 자신의 주변 지형을 잘 알아야 한다. 푸코는 이것과 관련해 자기배려라는 윤리적 방법론을 이야기한다.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하면서 중요한 것은 세계와 인연을 끊고, 또 자기 자신을 절대적인 것으로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정확하게 세상에서 자신이 점유하고 있는 위치와 자신이 속해 있는 필연적인 체계를 헤아리는 것이다."[주석15]


주디스 버틀러가 젠더 관점을 극복하기 위해 이야기한 패러디 기법의 근본적 성격은 무엇인가? 자신을 잘 안 다음에 비트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 과정을 통해 기존을 전복하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뒤집을 때 확신하는 것은 그것을 뒤집는다 해도 모든 것이 멸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성애 중심주의가 아닌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주장할 때,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와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모든 것이 만들어진 것이고, 기울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파괴와 전복이 허용될 수 있다. 그러한 주장은 많은 사람들을 우려스럽게 만들 수 있기도 하고, 어쩌면 허탈하게 만들기도 한다.[주석16]

하지만 철저한 무, 혹은 공을 직시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두 가지, 해탈하고 열반에 가든가 아니면 이 세계에 남아 끝없이 세계 속 하나의 개체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만들고, 우리의 파괴도 우리가 만든다. 이 세계를 우리의 마음이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 부분에 집중한다면 이 세상은 우리가 창조하고 만들어내는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이러한 예술론이 우리로 하여금 드디어 자유로운 주체가 되도록 한다. 유희와 예술을 통해 모든 것이 무라는 니힐리즘 개념을 극복할 수 있다고 설명한 니체가 이러한 사상의 대표주자이다.

 

니체는 예술이 진리보다 더 가치 있다고 주장한다. 그 주장은 인간이 꾸는 종적 환상 너머를 응시한다. 우리의 삶은 인간이라는 특정한 종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꾸며낸 무수한 오류들에 영향 받는다. 이 모든 것은 일종의 인간적 왜곡이지만, 적어도 우리가 만들어낸 것들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면 우리 자신의 관점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집착을 버릴 수 있게 되고, 자신을 억누르는 힘들로부터 해방된다. 그리고 그때서부터 적극적인 창조의 시대가 개막한다. 왜냐하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의 가치, 방향 모두 직접 자아가 스스로 창조하고 지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상의 공과 허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자야말로 니체가 말하는 위버맨쉬이다.[주석17]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예술론은 한편으로 윤리론이요 존재론이다. 인간으로 태어나고 만들어진 우리가 모든 것을 돌아보고 나면 인간이라는 가치조차 누군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푸코와 니체가 한 계보학적 작업의 의의가 그에 있다. 경로를 추적하면 신화화되었던 것들이 사실 역사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가 변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 모든 것들도 앞으로 변한다. 모든 언어적 개념과 물리적 경계로 빚어진 이 세상이 우리의 현재 행동에 따라 영향 받고 다시 다른 방향으로 바뀌어나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누구냐 그 정체성을 만드는 것은 자기 자신이지 다른 존재들이 아닌 이 태도를 푸코는 일종의 현대적 태도로 이해한다.

"그러나 보들레르에게서 현대성은 단지 현재에 대한 관계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해 정립해야 하는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자발적인 현대적 태도는 필연적으로 금욕주의와 결합되어 있다. 현대적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들의 흐름 속에 있는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복합적으로 공을 많이 들여서 세련되게 만들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현대적이 된다는 것은 보들레르 시대의 표현을 따른다면 멋부리는 것dandysm이다. 다음과 같은 잘 알려진 구절들을 상세하게 떠올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천박하고, 저속하고, 비열한' 본성에 대한 구절들, 스스로에 대한 인간의 필연적인 반항에 대한 구절들, 가장 끔찍한 종교보다 더 전체적으로 '열정 있고 교만하지 않은 제자들'에게 부과된 '우아한 교리'에 대한 구절들, 마지막으로 그의 신체, 그의 행위, 그의 감정과 정열, 그의 실존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댄디의 금욕주의에 관한 구절들 …… 보들레르에게서 현대인은 자기 자신, 자신의 비밀, 자신의 숨겨진 진실 따위를 발견하려고 하는 사람은 아니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을 창조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다.[주석18] 현대성은 ‘인간을 자기 자신의 존재로부터 해방시키지 않는다’. 현대성은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생산하라는 과업을 떠맡는다."[주석19]

 

 

철학과 윤리가 예술의 창조성과 만날 때, 예술가들은 이제 단순히 특정 직업인으로 남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작업의 방식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의 방법적 표본이 된다. 푸코에게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1821년 생)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실의 진실과 자유의 실행 사이를 오가는 힘겨운 상호작용[주석20]”, 그것이야말로 현재를 새롭게 창조해내는 자유로의 몸짓, 예술적 자아론이다.

Ⅳ. 결론: 규정된 경계를 뚫고 창조하는 예술적 삶을 위하여

 

본 논문에서는 우선 자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고찰하였다. 비록 아집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일지 몰라도 자아는 감각으로 물리적 범위를 형성하고, 언어로 사회적 위치를 확립한다. 그렇게 해서 인간 사회 안에서 인간으로 기능하는 하나의 자아가 탄생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우연한 존재이며 가변적이다. 불교에서 우리를 오온의 연기화합물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그 진리를 더도 덜도 말고 표현한다. 얼기설기 붙여져 규정되고 제한되는 바가 바로 현재의 나를 만든다. 그렇게 규정된 경계는 인간이 적어도 사회 안에서 안온하게 지낼 수 있는 쉼터를 제공한다.

 

하지만 그러한 자세는 안일하다. 본질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소 괴롭더라도 우리의 인생이 공이며 가(假)임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를 이루는 경계성이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일심으로부터 생성되며, 그 무한한 마음이 세계와 소통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을 성찰하지 않는 것이 자신을 방치하는 것, 나아가 이 세계를 방치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저 변하는 대로의 흐름에 자신을 맡긴다면 그것은 자신을 배려하지도 않는 것이며, 세상을 배려하지도 않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을 그려내고 있고, 그래서 우리가 하는 모든 창조적 행위가 다시 이 세상을 그려낸다는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그것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우리가 자신의 위치에서 더 좋은 ‘나’와 ‘세상’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의무를 발견한다. 불교에서는 “신(信)이 깊어지면 지(智)가 깊어진다”[주석21]는 말을 한다. 자기 자신을 만든 규칙과 일심을 믿고 그에 소통하면 다시 자신을 만들어내는 규칙과 일심이 변화한다. 그 와중에 자아가 서있다.

허무함과 허상은 긍정해야 하는 것이지, 부정해봤자 자기기만이다. 물론 미약하고 연약한 자신의 어깨에 세상이라는 너무 무거운 짐이 올라와 힘들 수 있다. 하지만 그 무거워 보이는 무한성을 그리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깃든 마음에서부터 시작한다. 그것을 이해할 때 우리는 우리의 유한성을 사랑하고 긍정하게 된다. 우리의 유한성이 가진 한계는 우리를 답답하게 만들지만, 그 유한성이야말로 우리가 세계의 무한함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는 현세를 긍정하는 여러 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이 세계를 어떻게 보냐에 따라 이곳은 극락이 될 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도 있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하지만 만약 인간이 현세를 긍정하고자 한다면, 가장 바른 길, 즉 정도(正道)는 무엇일까? 자문자답하자면, 바로 인간이 속한 인간 사회 안에서 인간의 길을 충실히 걸어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한다. 이때의 충실함이 무조건적인 ‘네’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또한 반발심과 반항심에 차서 앞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니요’만 외치는 것도 아니다.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 낙타의 길도 아니고 사자의 길도 아니다.

 

다만 우리의 몸짓은 어린아이처럼 가볍고 무용수처럼 즐거워야 한다. 자신이 가변적이고 우연한 고리 중 하나라고 해서 자신을 쓸모없는 무한 개 중 하나라 볼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자신의 실존을 형벌처럼 받아들 필요도 없다. 끝없이 말하고, 춤추고, 이야기하고, 소통하면 된다. 그것이 바로 가변성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다고 슬퍼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언제나 변화할 수 있음을 즐겁게 받아들이자. 지금의 자기 자신을 배려하는 것, 자기 자신을 행복에 다다르게 하고, 앞으로의 자기 자신이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계속 살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창조다. 창조는 무책임한 행위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을 살피지 않는 배려 없는 태도도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이 이 세상인 것을 알고, 자신의 기준을 세워 완벽히 자립하는 것이 창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불행한 삶을 살면서 불행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 동시에 행복한 삶을 살면서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도 그만큼 존재한다. 어떤 세상을 어떤 식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일까? 나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 것일까?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면 된다. 그저 당신이 혼자가 아니며 당신과 이 모든 세상이 하나라는 것만 알면 된다. 그러면 당신이 그리고자 하는 세상을 향해 당신의 삶이 펼쳐질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규정된 경계를 뚫고 창조하는 예술적 삶의 본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Ⅴ. 참고문헌

김용준, 이유선, 황설중, 임건태, 이병철, 󰡔로티의 철학과 아이러니󰡕, 아카넷, 2014.

박병철, 󰡔비트겐슈타인 철학으로의 초대󰡕, 필로소픽, 2014.

한자경, 󰡔불교철학과 현대윤리의 만남󰡕, 예문서원, 2010.

한자경, 󰡔불교철학의 전개, 인도에서 한국까지󰡕, 예문서원, 2010.

Butler, J. 김윤상 옮김,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인간사랑, 2003.

Butler, J. 조현준 옮김, 󰡔젠더 트러블󰡕, 문학동네, 2008.

Foucault, M. 정일준 편역, 󰡔자유를 향한 참을 수 없는 열망󰡕, 새물결, 1999.

Foucault, M. 심세광 옮김, 󰡔주체의 해석학󰡕, 동문선, 2007.

단행본 꺽쇠 󰡔 󰡕

[주석]

 

한자경, 불교철학의 전개, 인도에서 한국까지, 예문서원, 2010, p51.

 

2.한자경, 불교철학과 현대윤리의 만남, 예문서원, 2010, p66. 이 책에서 인간이라는 종이 일정한 공통성에 의해 갖는 종적 환상이라는 개념을 빌려왔다.

 

3.한자경, 불교철학의 전개, 인도에서 한국까지, 예문서원, 2010, p61.

 

4.주디스 버틀러, 김윤상 옮김,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인간사랑, 2003, p119

 

5.한국어 번역 제목은 나르시시즘에 관한 서론이다. 지그문드 프로이트, 윤회기 옮김, 무의식에 관하여, 열린책들, 1997 참고

 

6.주디스 버틀러, 위의 책, p475

 

7.주디스 버틀러, 위의 책, p120

 

8.박병철, 비트겐슈타인 철학으로의 초대, 필로소픽, 2014, p208

 

9.박병철, 위의 책, p215

 

10.오온은 색수상행식으로 이루어진 인연화합의 축적물이다. 이 오온에 관련한 설명은 한자경, 불교철학의 전개, 인도에서 한국까지p32에 자세히 나와 있으므로 참고가 가능하다. 여기서 대략적으로 요약을 하자면, 우리가 흔히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이 단일하거나 결정된 요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요소들이 임의적으로 만나 형성되었다는 무아론(無我論)의 원리라 할 수 있다.

 

11.한자경, 불교철학과 현대윤리의 만남, 예문서원, 2010, p27

 

12.한자경, 위의 책, p39

 

13.자기배려는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1926년 생)가 자신의 후기 이론에서 윤리적인 삶의 방향을 모색하며 이야기한 개념이다. 자기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적 작업으로, 불교에서 하는 수행법인 관과 유사한 지점이 있어 언급하였다.

 

14.주디스 버틀러, 조현준 옮김, 젠더 트러블, 문학동네, 2008, p350

 

15.미셸 푸코, 심세광 옮김, 주체의 해석학, 동문선, 2007, p567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본 책에서는 이 부분을 푸코의 강의록 중 <타자들>에서 인용했다고 밝히고 있다.

 

16.이성애중심 체계를 기반으로 한 결혼 제도, 가족 제도에 대한 회의가 바로 잇따를 수 있다

 

17.김용준, 이유선, 황설중, 임건태, 이병철 , 로티의 철학과 아이러니, 아카넷, 2014, pp231~233. ‘위버맨쉬는 흔히 초인으로 알려져 있다. 위 책은 로티 철학을 설명하는 책이지만, 미국 철학자 리차드 로티(1931년 생)가 어떻게 니체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설명하는 부분에서 니체 철학을 잘 설명하는 부분이 나와 인용하였다.

 

18.밑줄은 필자가 본 논문과의 연결성을 강조하기 위해 첨가하였다.

 

19.미셸 푸코 외, 정일준 편역, 자유를 향한 참을 수 없는 열망, 새물결, 1999, p190 본 책 중 <계몽이란 무엇인가>의 한 부분이다.

 

20.미셸 푸코 외, 위의 책, p189

 

21.한자경, 불교철학의 전개, 인도에서 한국까지, 예문서원, 2010,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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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이 유난히 센 날이면 한강 물결도 거칠다. 순종적으로 한 방향으로만 강너울을 푸아 뱉어낸다. 먹구름이 잔뜩 껴 물조차 검어보이는 길을 걷던 내 눈에 누군가가 매우 밝은 조명으로 시커먼 강가를 비추는 것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영영 못 찾겠구나."라는 문장을 조립했다. 물 위로 무엇이라도 떨구면 곧 저 멀리 헤엄쳐 가버릴 정도였다. 찾기를 포기한 듯 빛의 깜박임은 곧 무기력해졌고, 나도 시선을 거두었다. 수면에서 물살인지, 불은 살점인지 구분치 못할 무엇인가를 보기라도 할까 비겁하게 두려워 하며 그곳을 벗어났다.

  예전에 동호대교에서 시작해, 동호대교로 돌아온 짧은 산책을 한 적 있다. 가기 전에는 없던 새로운 광경이 있었다. 원래 한강을 거니노라면 자전거를 타는 점들과 걷거나 뛰는 선들을 빼고는 그닥 바뀌는 배경이라곤 없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구급차가 서있었고, 저 머지 않은데도 아득한 강가에 하얀 천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귀중히 덮어놓은 무엇인가가 뉘어져 있었다. 얼굴을 보이지 않고 모자만 차분히 눌러쓴 남자 두 명이 곁에 적장자들처럼 서있었다. 죽은 것과 산 것의 차이는 바로 이 지표면 한 장의 차이였다. 나는 지금 위에서 걷고 있지만, 언제 저 아래 누워 하얀 천을 덮고 시퍼렇게 웃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2015년 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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