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cratic Schools, Second Edition: Lessons in Powerful Education (Paperback, 2)
James A. Beane / Heinemann / 200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론은 추상적이고 구체적 예시는 와닿지 않는다. 누구 잘못이 아니다. 교육은 실천하는 자의 것이라서 그런 거라 생각한다. 이들의 방향성에 동의한다 해도 그 자세한 이야기는 내가 맞닿아 있지 않는 맥락이하서 그런 거라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로쟈 > '세계의 지성' 톱10

읽을거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수입] Nymphomaniac: Extended Director's Cut Volume 1 & 2 (님포매니악 볼륨 1 & 볼륨 2)(지역코드1)(한글무자막)(DVD)
Magnolia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전에 올렸던 것을 다듬어서 계간지 '인간과 문학'에 보냈는데 당선되었습니다. 


////


허무라는 구멍에 쾌락을 부으며 살아온 한 여자의 이야기

영화 Nymphomaniac Vol.Ι,Ⅱ (2013, Lars Von Trier 작)


 

 

 


 

 

 

  살아있는 유럽의 거장,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님포매니악’은 바쿠스의 무녀들처럼 동물성을 버리지 못한 원시인류, 원초적인 에너지를 포기하지 못한 자들,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지나치게 충실한 자들의 이야기다. 성[Sex]은 그것을 다루는 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영화적 요소, 유희적 장치다.

  그러나 원시인의 시대를 한참 탈피한 지금 시대에는 난장판에서 들짐승들을 산 채로 죽였던 여사제들의 시대는 이미 야만과 비합리성 그 자체다. 이제 사람들은 그 비슷한 것을 보는 것만으로 역겨움에 시달린다. 이 시대에 욕망은 생생한 날 것 그 자체로 살아 있을 수 없다. 우리의 인간사회는 논리를 발달시켰고, 언어라는 틀로 동물적 본성을 제어하는데 성공했다. 인간은 이제 무엇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언어화해야 하며, 서사를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의무는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서사라는 뼈대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욕망 그 자체의 본질적 내용은 사적이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공유 불가능하다. 언어를 통해 성공시키는 것은 부분적인 의사소통, 단편적인 신호의 전달일 뿐이다. 무엇의 실제를 있는 그대로 포착해낸다고 하기에 언어에는 파악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장벽들이 존재한다. 우리의 욕망은 타인에게 불가해하다. 불협화음, 미끄러지는 차원의 어긋남에서 우리는 자신의 자아라는 탈출할 수 없는 구덩이에 떨어져 외롭다.

  영화의 중요한 틀은 Joe와 Seligman의 대화 구조다. 이 영화가 사실상 처음부터 끝까지 이 둘의 대화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 설정은 소통에 대한 통찰로 읽을 수 있다. 그 둘은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나 Seligman의 집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길고 긴 대화를 시작한다. 영화의 초반 전개는 상당히 인상적인데, 분명 험한 꼴을 당한 Joe를 Seligman이 구조한 상황 속에서 대화가 비교적 덤덤하게 시작되기 때문이다. 모든 이들의 만남이 그러하듯 이들의 만남도 상당히 우연적이고, 즉흥적이다.

  대화의 구조 안에서 각 인물이 맡은 위치를 살펴보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주된 화자인 Joe와 그 이야기들을 듣는 Seligman이 있다. 관객인 우리의 입장은 Seligman과 유사하다. 그러나 우리와 Seligman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우리는 침묵을 지키고 머릿속으로 감상을 이어나가는 처지이지만, Seligman은 이야기의 화자인 Joe와 대면하고 있다. 그렇기에 관객인 우리는 적어도 영화를 보는 시점에서 Joe의 이야기 뿐 아니라 Joe와 Seligman이 나누는 대화까지 전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사실은 ‘우리’야말로 Joe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미묘한 환상을 심어준다.

  이들의 대화에서 관객에게 흥미로운 지점은 Joe와 Seligman이 대척점에 서있는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주인공 Joe는 성적인 쾌락, 그 에너지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인물이다. 그녀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가 Sex고, 그러한 의미에서 그녀는 진실로 님포매니악이다. 반면 Seligman은 지성과 이성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다. 그는 박식하고, 백과사전에 가깝다. 모르는 것이 없어 보이는 그가 모르는 것은 육체적인 경험뿐이다. 이성과 감성, 남성과 여성, 대칭적인 상징들은 상당히 도식적이기까지 하고, 감독의 전작인 '안티크라이스트'의 구성처럼 보이기도 한다.

  Joe와 Seligman의 대화는 사회의 다른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 철저히 언어에 기반을 둔다. Seligman은 Joe의 이야기를 듣는 맨 처음부터 끝까지 Joe를 자신의 인식 틀로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우연히 마주친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그가 동원한 것은 그가 기존에 갖고 있던 재료들이다. Seligman 같은 경우 성적인 경험이 없다보니 Joe의 모든 섹스 이야기들을 그가 기존에 알고 있던 수학적인 연산, 매듭 묶기, 베토벤과 푸가, 신화적 상징들로 치환시킨다. 이 영화 안에서 섹스 장면만큼이나 중요한 미적 장치는 바로 Seligman의 지식의 풍요로움과 인용의 다채로움이다. 다섯 번째 장인 ‘작은 오르간 학교’에서 보여주는 섹스 장면들과 바흐 음악의 세 개의 성부가 이루어내는 조화는 미적으로 거의 완벽에 가깝다. 성적인 긴장감이 제거된 Seligman의 단편적인 지식들은 그를 순수하고 무성적인 인물로 보이게끔 하고, 우리로 하여금 자극적일 수 있는 Joe의 이야기들을 중화시킨다.

  그 뿐 아니라 Seligman이 Joe의 이야기를 들으며 보이는 이성적이고 학문적인 일련의 이해 시도들은 문학적인 차원에서 놀라운 비유가 되기도 하고, Joe를 해석하는 데 있어 유용한 설명을 하기도 하며, 심지어 Joe 본인도 몰랐던 그녀의 심리를 발견해내기도 한다. 문제는 그가 부분적으로는 Joe를 이해하고 포착해내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여전히 Joe의 경험들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점이다. 사실 무엇인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두 인격체가 결코 해낼 수 없는, 애초에 불가능한 목표다. 원래 하나였던 덩어리들이 신의 벼락에 의해 떨어졌다는 것은 단지 신화에 불과하다. Seligman의 생뚱맞아 보이는 해석에 지친 Joe가 그의 매듭 이야기를 이때껏 들었던 연결고리 중 가장 재미없고 무용하다며 짜증내는 장면은 소통에 실패한 채 어긋나버린 분열과 갈등의 단면을 그대로 고발해준다.

  이처럼 소통은 상정하는 전제에서부터 구조적인 결함을 갖는다. 예를 들어 Seligman은 Joe의 이야기를 몇몇 지점에서는 신뢰할 수 없는 기억으로 문제 삼는다. 특히 Jerome과의 만남에 관해서 그러하다. Seligman은 그 만남이 지나치게 우연에 의존한다고 말한다. 그러한 지적은 관객인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 지적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Joe가 하는 이야기들을 믿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 한다. Joe가 대꾸하는 것처럼, 남의 이야기를 듣는 데 있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은 그 이야기를 믿거나 안 믿거나 둘 중 하나뿐이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상호소통이 강제적인 신뢰 위에서만 싹튼다는 역설적인 지점이다. 우리가 무엇을 해석하고 이야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것이 앞에 분명히 있다는 ‘믿음’이다.

  Joe가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고, 실수로 누락한 것일 수도 있다. 진실은 어차피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본인조차도 그렇다. 남아있는 것은 우리의 믿음, 불완전할 확률이 매우 높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어야만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 뿐이다. 그 필연적인 기만의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는 우리의 두 눈과 귀로 경청하고, 평가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최대한 공정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지만, 신과 같은 평정심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차선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잊는 순간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잊어버리고, 정말로 나와 타인이 같은 순간을 정확하게 같은 것으로 공유했다는 환상에 빠지기 때문이다.

  Joe 역시 그러했다. 그녀는 Seligman에게 드디어 온전한 첫 번째 친구를 만들게 되어 기쁘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우리를 배신한, 불안한 결말은 결국 무엇이었던가? 완전한 소통은 불가능하다는 사실 뿐이었다. 이성Reason은 자신이 무성이라고 주장하지만, 의식이 있는 곳에 욕망이 있다. 우리는 Seligman을 그의 지식과 상식들이라는 필터로 걸러서 보았다. 순결한 줄 알았던 그가 Joe에게 자신의 물건을 들이댈 때, 그가 숨기고 있던 욕망이 수면 위에 올라왔다.

  다른 존재를 자신의 잣대로 해석하고, 그를 바탕으로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욕망에 무릎 꿇리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시도하는 소통은 어떤 종류의 폭력이 될 수 있다. 이 숙명적인 불행은 영화 안에서 결말의 총의 발사로 형상화된다. 하지만 안전한 대화 구조 바깥에서 소통의 붕괴를 목도한 관객을 통해서도 반복된다. 관객인 우리는 이 영화를 보았지만 그들을 제대로 본 것인지, 그 이야기를 제대로 알 수 있기는 했던 것인지, Joe를 정말 제대로 본 것인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우선 Joe의 이야기를 믿어보기로 하고, 이야기의 내용을 더 살펴보자. 이 영화 내용의 전반적인 재료는 주인공 Joe의 삶이다. 그녀의 삶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욕망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걸까? 필자는 우리 안, 우리의 눈으로는 도저히 찾아낼 수 없는 구멍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 구멍은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고,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니체가 근원적 니힐리즘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 바로 그러한 공허함이다.

  어린 Joe는 수술을 앞둔 병원의 복도에서 자신의 외로움을 온전히 감지한다. 그 철저한 외로움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우주 안에 혼자로 존재하고, 몸 안에 외로움과 눈물만이 가득 차는 기분이 든다. 주위 지나쳐가는 사람들한테 외로워요, 살려주세요, 외쳐본다 해도 아무도 들어줄 사람이 없을 것만 같다. 옆을 지나쳐가는 무수한 사람들 앞에서 존재의 이유를 발견할 수 없는 그 순간, 외로움이 자연히 고르고 있던 숨소리를 거칠게 내쉬기 시작한다.

  그 결여를 무엇으로 메울 수 있는지 모르겠다. 영화 속 ‘뚫리지 않는 문을 혼자 통과하려는’이라는 대사처럼, 텅 빈 공간의 입구에는 투명하지만 튼튼한 막이 있어서 그 무엇도 그 공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런데 살다보면 이 세상의 어떤 물질이 그 막을 넘어 구멍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 온다. 그 순간 자체가 오르가즘의 작동원리와 유사하다. 수많은 긴장, 아슬아슬하게 한계선을 넘을 것 같으면서 못 넘을 것 같은 문턱의 틈에서 모든 것이 폭발하듯 터져 나와 온 몸에 젖어들어 강력한 과잉을 유희하는 몇 초의 영겁.

  그리고 우리는 또 한 번 착각한다. 우리가 완벽한 소통이 가능할 거라고 믿은 것처럼, 그 짧은 강력함이 우리의 불완전함을 채울 수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어떤 결여를 채운 것이 아니라 순간을 향유한 것에 불과하다.

  Joe의 경우는 명백히 섹스에 탐닉함으로써 그러한 착각에 빠진다. 모든 인간이 Joe처럼 외로운 순간들을 섹스로 달래는 것은 아니다. H 부인은 Joe가 외로움을 달래는 방법을 모른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건 적절한 비난은 아니었다. Joe가 문제가 된 이유는 그녀가 다른 사람들의 꿀단지를 건드리는 방식으로 외로움을 달랬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섹스의 강력함을 좇기보다 솔리테어를 하기도 하고, 좋은 영화를 보기도 하고, 친구와 대화도 하면서 순간의 텅 빈 공간을 채워낸다. 아니면 Joe의 아버지처럼 나뭇잎들을 수집하고, 관찰하면서 감탄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도 있다. 얼마나 얌전한가. 오로지 문제가 되는 것은 향유의 방식일 뿐이다. 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가 문제다. 그녀의 헤픈 몸이 다른 사람들의 가정, 몇 십 년 된 감정들을 산산조각 내버릴 수 있다는 게 유일한 문제다.

  Joe는 오믈렛을 만들려면 계란을 몇 개 깨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의 냉정한 말에 Seligman은 원래 중독자들은 공감을 하지 못하는 법이라고 응수한다. 그의 말에 Joe 역시 바로 대답한다.

  “전 제 욕망에 중독된 것이지, 결핍에 의한 중독이 아닌 걸요. 어딜 가나 모든 걸 파괴한 바로 그 욕망이요.”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들은 기본적으로 마음 안에서 텅 빈 채 덩그러니 남겨졌다고 느끼는 무엇인가를 채워나가려는 우리의 노력이다. 그 근원적인 결여는 사실 채울 수 없다. 결핍 자체는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우리는 그저 갖고 있는 것을 이용해 새로운 차원의 과잉을 향유한다. 구멍은 채워지지 않고, 우리는 채워지지 못해 채우려고 욕망한다. 욕망의 연쇄다. 그래서 Joe의 말은 옳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런 것처럼, 그녀 역시 결핍이 아닌, 오히려 결핍을 채우려 하는 그 욕망에 중독되었다.

  어떻게 보면 Joe는 교육 받은 것에 충실하다. Joe가 사랑한 아버지와의 관계는 눈여겨 볼만한 부분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스승이었다. 필자는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가르쳐 준 것이 다양성의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그 교육을 물론 Joe 본인이 그냥 따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에 맞게 변용시켰다는 점은 고려해야지만 말이다.

  Joe의 아버지는 나무를 좋아했는데, 나무들도 자세히 보면 개체마다 다 다르다. 나뭇잎 사이로 드리워진 약한 빛 아래에 선선히 불어오는 건조한 바람을 맞으며 나무의자에 앉아 위를 향해 지긋이 치켜보고 있노라면, 푸른 하늘이 적셔진 하얀 구름을 가리는 나뭇잎들이 눈에 찬찬히 들어온다. 서있는 위치도, 그들의 뿌리가 내려진 토양도, 심지어는 꽃이 얼마나 농익게 피어올랐는지도, 그 순간마다 제각각인 그들 자신의 빛깔, 색깔, 향.......그런데 우리는 그 수많은 나무들을 ‘나무’라고 부른다. 기껏해야 더할 수 있는 것은 종에 따라 나무라는 단어 앞에 음절 몇 개 더 얹혀주는 것이 고작이다. 우리 인간의 수용력과 표현력의 한계는 참 제한적이고, 묘사의 방식인 언어는 빈곤하다.

  Joe는 아버지의 교육에 영향을 받아 공책에다 나뭇잎을 수집했다. 그런 식으로 다양한 남성들의 성기도 수집했다. 그녀의 인체에 대한 호기심, 사람이라는 군群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하나하나 보고자 했던 욕망, 그것은 그녀 말처럼 석양이 더 아름답기를, 그 색이 더 화려하길 바랐던 단순한 바람과 비슷한 것 아니었을까? 자연의 아름다움을 더 향유하고자 했던 그녀의 이 바람이 쉽지 않은 요구처럼 보였다면, 그건 그저 그것을 허락지 않은 사회 인습의 강력한 힘에서 우리가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 아닐까?

  Joe가 찾아낸 영혼 나무는 험난하고 높은 바위 위에서 위태롭게 한쪽으로 쏠려 있었다. 이 세상에 나고 자라 죽는 모든 존재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순간들을 채워나가기 위해 지금도 분투하고 있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간이라는 종에 걸맞게 사회가 원하는 요구에 맞추어 살아나간다. 그곳에서 허락받은 일들, 권장되는 일들, 바람직한 일들을 선택해가며 살아간다. 그러면 모든 것이 그나마 쉬워진다. 사람들은 올바른 토양 위에서 따뜻한 햇볕을 받아가며 생존하기를 바란다. 안전한 둥지 위에 오순도순 한 평생 토끼 가족처럼 살아가는 것을 꿈꾼다. 하지만 우리는 Joe와 같은 나무들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험난한 곳에서 거칠게 생존한다. 그 순간마다 얼마나 힘겨울까? 하지만 그들은 그 길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 모양이, 바로 그 힘듦이 그들이 선택한 삶의 가치, 그 자신의 본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고난 결여를 채울 수 없고, 그래서 순간을 향유하며 살아간다. 그 1초는 휘발되지만 우리가 부여한 가치에 의해 천금이 된다. Joe는 그녀와 잔 남자들에게 최고의 연인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의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섹스를 하고 난 다음 남자들에게 해주는 말, 오르가즘을 준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었다는 그 말은 최고의 찬사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말 하나 때문에 으쓱하는 남자들의 모습이 유치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말 하나 때문에 Joe의 남자들은 Joe와의 시간을 흐릿하게나마 좋게 기억할 것이고, 추억으로 남길 것이다.

  Joe는 수많은 남성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섹스를 즐겼고, 그 많은 시간들을 종합해 자신만의 연인, 혹은 섹스라는 긴 시공간 축의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지루해지고, 닳게 되면 더 깊고 다양한 것들을 찾아 대담한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그녀의 여행은 사실상 사회의 많은 제약 속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그녀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깎이고 마모된다.

  어렸던 Joe는 상대적으로 사회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웠다. 어린 아가씨 둘이 기차에서 남자 낚시질을 하러 돌아다닌 것은 분명 발랑 까진 일이지만, 아주 지탄 받을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혼하지도 않았고, 아이도 가지지 않았고, 또 젊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직 사회의 규율에 대해 잘 모를 나이라서 사회의 시선에서 자유롭다. 아직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따스하다. 갱생의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친구인 B와 만들었다는 ‘작은 모임’ 역시 그렇게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상황이나 분위기에 따라 그 정도 어린 여성들이 자신들의 성에 대해 눈을 떠서 불경한 노래들을 부르며 섹스에 탐닉하는 작은 모임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동네 애들이 놀러 다니면서 작은 그룹을 만들고 거기에 이름 붙이고 논 것과 큰 차이 없다. 치기 어리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치기 어림이 사회의 자신만만한 권능, 그들을 좌시하고는 있지만 언제 어떤 식으로도 진압 가능하다는 점 아래에서 존속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의 재미있는 장난이 같은 사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밥그릇을 건드리고 다녔다는 점은 문명의 질서와는 확실히 위배된다. 그러한 서곡을 보여주는 H 부인 이야기는 전체 영화에서 가장 시선을 끄는 시퀀스이다. 이 시퀀스는 웃기기도 하고, 배우 우마 서먼의 훌륭한 연기에 감탄하게 되는 지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엄청난 블랙 코미디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은 결국 H 부인과 가여운 망아지 같은 세 아들들의 똘망똘망한 눈에도 Joe가 죄책감을 느낀 것은 하나도 없어 보인다며 Joe를 비난했을 수 있다. 물론 Joe가 이때의 사건을 통해 정말 아무것도 안 느꼈을 수 있다. 그녀 말마따나 그저 계란 네 개가 깨진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건들은 시작점에 불과하다. 그저 남편의 불륜에 화가 난 미치광이 여자가 자식들을 데리고 쳐들어온 사건으로 축소시킬 일은 아니다. 그 이야기에는 상징성이 있다. 처음 기차에서 낯선 남자의 오랄 섹스를 해준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적어도 그 이야기에서 남자의 아내는 남자가 외간 여자한테 오랄 받은 사실은 모른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이 Joe의 행동에 원한을 갖고, 악하다고 여기고, 비난하기 시작한다. 유부남과 불륜 관계인 젊은 여자 이야기는 사실 매우 흔한 이야기다. 그러나 Joe의 이러한 일탈은 이미 적발되었다는 것 하나로 수많은 사람들의 눈에 뜨인다. 또한 Joe가 아무리 자신을 변호하고, 자신의 욕망의 권리를 주장한다고 해도 실제로 깨진 계란들이 저 너머에 존재한다. 그것 역시 분명한 지점이다. 그녀의 욕망은 분명 다른 이들의 밥그릇을 건드린다.

  우리가 지니는 가치판단의 기준은 우리보다 선행하여 존재하던 사회에서 왔다. 우리는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의 규칙을 배우고, 그것들을 우리 안에 내면화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바다에 태어난 거북이와 같다. 그 조류가 나 자신의 고유함과 다르다 해도,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사회의 법칙이 있다. 사람들이 만약 젊은 사람을 향해 모르는 것이 많고, 치기 어리다고 말한다면, 젊은 사람들이 실제로 정말 아직 많이 모르고, 치기 어리기 때문이다. 젊을수록 경험은 적고, 고초를 덜 겪었기에 아직 때 타지 않았다. 조금 더 법망에서 자유롭다. 법망은 매우 촘촘한 그물이다. 우리의 바깥에서 우리를 무한한 무게로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교묘하게 존재한다. 산소처럼 우리를 투명하게 통과한다. 우리의 신체와 사고 안에 침투하여 우리 자신의 행동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재생산해낸다. 그 재생산은 궁극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사회 안의 법망에 더욱 효과적으로 갇히게 만든다.

  배우가 아역에서 성인으로 교체하는 접점을 그러한 맥락에서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어린 Joe는 비교적 쾌락을 즐기며 자유분방하게 살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 여성으로서의 권능을 무기로 성적 욕망을 채웠다. 그 모든 것들이 남성의 욕망이 허가하는 한 지속되고, 권장되며, 사회 안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져 그녀는 비교적 책임에서 자유로웠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성적 쾌락을 잃고, 그때서야 사랑하는 남자와 정서적인 안정을 누리며 아이를 낳고, 결혼을 한다. 더 이상 남성들과의 단순한 섹스가 그녀에게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 그녀는 고갈되었지만 여전히 버릇을 고치지 못한다. 그녀의 넘쳐나는 욕구를 받아주지 못한 Jerome은 결국 그녀에게 다른 남성들을 허락한다.

  그 지점이 Joe가 성인으로 변하는 지점이다. 계란들을 신나게 까부숴서 원하는 만큼 오믈렛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허용범위는 무제한적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답게 Jerome과 아들, 가족의 안온함이 아닌 채찍질이라는 쾌락을 선택한다. Jerome은 그런 그녀를 용서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용서하지 않은 것을 Joe 스스로도 용서하지 못한다. Seligman 앞에서 아들을 빼앗긴 것에 대해 이야기하던 Joe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컵을 내던졌다. Joe는 감성적인 것이 거짓이라서 싫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가 스스로 그 거짓에서 자유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그녀는 잠시 섹스중독 치료를 받기도 하는데,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이 그녀의 방종한 행동에 제약을 주기 때문이다. 그녀는 직장 상사로부터 섹스중독 치료 권유를 받게 된다. 치료의 일환으로 섹스를 떠올리는 것들을 집에서 치워버리는데, 치우고 나니 집이 온통 텅텅 비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래도 자신의 본능을 거스르지 못한다. 그녀는 자기 자신이 그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떳떳함을 만천하에 밝힌다. 상담 받으러 간 장소에 배치된 거울 속 그녀의 어린 모습은 그녀의 본연적 기질이 원래 그러했음을 보여준다. 그녀는 정신상담사에게 사회의 경찰 노릇을 한다고 비난하며, 사람들 앞에서 자기 자신이 님포매니악임을 당당히 선포한다. 섹스를 섹스 그대로 즐기는 그녀는 바로 님포매니악이지, 남의 언어에 따라 규정된 섹스 중독자가 아니다.

  Joe는 그러한 선포 이후로 주류 사회에 완벽한 이방인이 되고, 사채업이라는 음지에 속하게 된다. 이 부분은 다소 조금 이상한 설정이다. 성적인 고문을 통해 남성들에게서 돈을 받아낸다는 설정은 비현실적인 느낌이다. 영화의 흠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렇게 Joe가 사회적으로 배제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그 즈음 더욱 변두리로 몰린 그녀는 성병으로 추정되는 신체적인 고통까지 안게 된다.

  Seligman에게 Joe는 자신이 매우 사악한 존재이고, 자신이 한 일들은 모두 그릇된 것들이라고 말한다. 한편 그녀는 자기 자신의 본능이 얼마나 반사회적이고 문제적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만큼 스스로 각오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자신의 죄책감을 청산하지 못했다. 자기 자신을 죄인이라고, 나쁘다고 말하는 그녀는 사회의 기준과 다른 자신의 욕망은 긍정했지만, 사회의 기준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죄인이 아니라고 선포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치워내는 데 실패하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했지만, 그것을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죄인으로 살기를 선택했고, 죄인의 굴레를 기꺼이 머리 위에 면류관으로 받아들였다. 공중도덕보다 자신의 쾌락을 따른 그녀는 이미 남의 밥을 훔치는 도둑년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본인도 스스로를 도둑년이라고 생각하며 자기 자신에게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단 사회, 다른 사람들, 아무 상관없는 타인들이 Joe를 더러운 년이라고 비웃는 것만은 아니다. 그녀가 가진 욕망에 가장 큰 형벌을 가한 사람은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가 사랑했던 Jerome이었다. 욕망과 별개로 존재하는 사랑이라는 굴레에서, 가장 능동적인 몸의 주체였던 그녀도 결국 자신이 거스를 수 없는 더 큰 힘 앞에서는 무력했다.

  사랑의 속성은 다채로움이라는 개방성보다는 통합에 대한 지향이라는 보수성과 연결된다. “욕망은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지만, 사랑은 본성을 포장하는 가식”이라는 Joe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욕망은 상대방을 자유롭게 만들지만 사랑은 상대방을 구속한다. 사랑과 욕망의 차이점을 확실히 구분 짓고 넘어가야 한다. 욕망은 Joe가 말한 것처럼 쉽고, 진실 되고, 순간적이다. 아무런 의미가 없고, 단순해서 별일 아닌 것처럼 넘어갈 수 있다. Joe가 맨 처음 Jerome을 J로만 보았을 때도 그녀는 그를 단순히 첫 잠자리 상대로 괜찮은 남자 정도로 생각했다. 단지 그의 손이 근사하다는 게 접근의 이유였다.

  그러나 사랑은 욕망과 다르다. 욕망이 일회적이라면 사랑은 은근하다. 사랑은 단순히 손이 근사해서 빠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근사한 손에 의해 정렬되고 조직되고 다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어린 왕자 식으로 말하자면, 사랑은 길들여지는 것이다. 사랑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몰입과 집중을 하게 만들고, 다른 한 존재를 사유화 하게 만든다. 그래서 사랑이 질투에 어린 욕정일 수 있지만,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순간을 향유하는 매우 강력한 방식 중 하나가 된다. Joe에게 있어 어리고 허세 있고, 섹스도 못했던 J가 루갈라를 케이크포크로 먹는 Jerome이 된 것 같이, 사랑은 한 사람을 고유한 무엇으로 만든다.

  Jerome과의 관계는 여러 에피소드들로 연결된 영화 안에서 처음과 끝의 수미상관으로, 유일하게 관통하는 하나의 큰 줄기다. 역을 맡은 남자배우 샤이아 라보프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인물을 치졸하고 소심한 남자로 해석하였다고 밝혔다. 배우가 자기가 맡은 인물에 그토록 박한 평가를 주었다는 사실은 상당히 흥미롭다. 배우는 정작 다자연애나 자유로운 섹스를 긍정적으로 바라본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누구에게나 상대방을 사랑하고 그의 선택을 존중하기 위해 자신의 소유욕이 좌절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좌절된 소유욕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온전히 채우지 못한다는 절망감이 Jerome으로 하여금 그녀를 비난하게 만들긴 했지만 결혼생활을 끝장내게 하지는 못했다.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Joe가 Jerome을 벗어나 아예 그가 상상하지도 못하는 새로운 영역으로의 쾌락을 쫓고, 그럼으로써 자신과 자신의 아이까지 버리는 선택을 했다는 점이다. 물론 Joe가 직접 스스로 아이를 버리는 선택을 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이미 그녀는 자신의 쾌락이 더 우선이 되어 아이를 돌보는 데 매우 소홀했다. 그러한 지점은 Jerome조차 참을 수 없는 지점이었고(그 역시 그다지 성실한 남편감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 그녀의 솔직한 욕망은 그녀의 인생에서 배우자와 자식을 끊어내게 만든다.

  하지만 단순한 이별만이 Jerome이 내린 잔인한 형벌, 3+5를 일으킨 것은 아니다. Joe는 자신의 애인이자 딸인 P를 자신이 사랑한 유일한 남자에게 빼앗긴다. 운명의 장난 같고, 어떻게 보면 한 편의 막장 드라마 같은 이 관계도는 필자에게 인위적이거나 개연성이 없거나 하지 않았다. 그녀의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그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함의 때문이었다. 그함의는 나이든 여자라는 위치에 대한 은유를 암시한다. 님포매니악 1부는 즐겁고, 비교적 경쾌한데 그 이유는 주인공인 Joe가 어리고, 싱싱하고, 예뻐서 수많은 남성에게 숭배의 대상이 된다는 점 때문이다. 그녀 때문에 그녀의 이십대에 많은 남자들이 그리고 그들의 많은 부인들이 괴로워했다. 그건 철저한 힘의 놀이였다. 둥지와 계란들을 원하면 다 깨트려서 자신의 쾌락을 즐길 수 있던 그녀의 권력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놀이도 결국 시간이 변하자 끝나버렸다. 세계와 사회는 그 이상을 용인하지 않는다. 이제 그녀의 성기는 고통에 시달린다. 그리고 새로운 싱싱하고 어린 여자가 Joe의 옛 남자와 관계를 맺고, 그녀의 자빠진 얼굴에 오줌을 갈긴다. 그건 그녀가 젊고 아름다웠을 때 행했던 권력의 남용과 별 차이가 없이 똑같은 힘의 놀이다. 나이 들고 병든 Joe가 사랑 앞에서 겪어야 하는 고통은 무참하다. 자신의 어린 애인을 빼앗은 자신의 사랑, 변해버린 그 마음에 총을 들고 분노를 발산하려 했지만, 그녀의 무의식이 그걸 막는다. Jerome은 보잘것없는 Joe를 구타하고, 그녀 앞에서 어린 P와 3+5, 자신과 Joe가 맨 처음 나누었던 그 암호를 섞으며 "이제 나는 너랑 자는 것에는 관심 없다. 나는 어린 여자랑 잘 것이다. 너의 모든 힘은 나에게서 떠나갔으니 꺼져 라 이 늙은 여자야."라는 형벌을 가한다.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며 사회의 질서에서 엇나가 남편과 아이라는 여자의 의무를 저버린 그녀에게 가장 큰 징벌이 바로 그 3+5였다. 그 가혹한 형벌에도 불구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왔을 Joe가 영화 맨 처음 시작에서 뻗어 누운 상태로 괜찮다고 중얼거린 건, 어떻게 보면 그녀 스스로 Jerome에 대한 사랑이 그제야 완전히 끝났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아직 언급되지 않은 곳이자, 영화 전체에서 가장 이질적인 부분이기도 한 ‘섬망’을 다루며 이야기의 논의를 마무리 짓고자 한다. ‘섬망’은 Joe의 아버지가 죽는 내용을 다루는 장이다. Joe가 인생의 쾌락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1부의 후반부에서 그녀는 아버지의 질병과 죽음을 보게 된다. 그녀는 아버지를 돕고 싶어 하지만, 도울 수 없고, 오히려 병원에서 외간 남자랑 섹스를 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그 자리에서 애액을 분비한다. 이렇게 보면 고통과 욕망은 동전의 양면처럼 떨어진 것이 아니라, 섞인 잡탕 같다. 어쩌면 삶의 마지막이 처절하게 괴롭고, 외면당하는 고통으로 가득할 것이라는 그 허무함이 우리에게 이 순간만큼은 향유해야 한다는 욕망의 원동력일지 모른다. 일단 아버지는 죽었지만, 그녀는 살아있다. 필자는 Joe가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성적으로 흥분한 것이 프로이트 식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신체가 죽음 앞에서 삶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애액의 분비로 표현한 것이라 보았다.

  그렇듯 강한 Joe는 Seligman에게 자신의 강력한 욕망과 앞으로도 싸우겠다고 의지를 표명한다. 자신의 욕망, 자신을 파멸 시키는 강력한 구멍을 그녀는 외면하지도, 무시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언제나 그렇듯 준비가 되어 있고, 기울어진 형태로라도 존재하기 위해 열심히 투쟁할 것을 다짐한다. 물론 그녀의 이러한 의지에 대해 감독인 라스 폰 트리에는 친구처럼 다정한 줄 알았던 Seligman이 흐물흐물한 성기를 들이대는 것으로 나름 비관적인 관점을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총소리가 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의 Joe가 살인자가 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비틀린 인생, 조금 더 비틀어지면 어떻겠는가. 필자가 지나치게 그녀의 인생에 대해 낙관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몸에는 아직 구멍이 남아 있다. 자신의 삶의 즐거움을 찾기 위해 SM에 입문하거나 흑인들과 접선하는 등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그녀인데 걱정할 게 딱히 있을까?

  이 영화를 보는 많은 사람들이 죄다 Joe가 불쌍하고 힘겹게 보인다고들 많이 말한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그녀의 인생은 힘들고, 굴곡지고, 유별나다. 그러나 그녀의 나무가 원래 그렇다. 그녀의 기질이 원래 그렇다. 그녀의 선택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어떤 나무들은 따뜻한 평지가 아니라 높은 절벽 위에서라도 비틀린 채로 살아간다. 어떻게 저런 형태로 살 수 있을까 기겁하고 의문 가질 필요 없다. 생명의 다양성을 잉태하는 그 구멍, 생명력을 부여하고 삶에 의미와 재미를 선물해주는 그 구멍이 우리에게도 엄연히 실존한다.

  우리 인류는 어차피 혼자 남을 운명이다. 게다가 욕망은 결여를 채울 수 없기에 순간을 향유한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자 함은 필연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함몰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외부 세계와 사회로 눈을 돌리게 만든다. 하지만 인간의 운명 속에서 진정한 비극은 우리 욕망의 대상인 외부 세계가 우리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신이 아니며, 우리의 이야기와 욕망은 신화가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뼈아픈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 역시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만큼이나 인간을 우울하게 만든다. 자아와 세계는 대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고, 세계의 가혹한 규칙에 복종하지 못한 인간 개인의 욕망은 Joe의 경우처럼 가혹한 형벌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욕망은 구멍을 갖고 살아가는 모든 자들에게 수반될 수밖에 없는 필수불가결한 에너지이고, 인간의 욕망은 여러 가혹한 형벌 속에서도 죽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쾌락을 향해 솟구친다. 넘쳐흘러야 할 구멍을 메우지 못한 인간은 그 에너지로써 고통의 칼춤을 춘다. 어차피 구멍을 찾아 없애지 못할 바, 그 니힐리즘을 니체가 말한 것처럼 적극적으로 껴안고 어린아이의 정신으로 춤을 추며 매사 즐기는 것도 (물론 고통의 순간도 있겠지만) 확실히 나쁜 선택지는 아닐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받아들이고, 싸우고, 즐기는 주체적인 의지가 건강한 삶의 초석이다. 그렇게 본다면 Joe의 이야기도 딱히 우울하지 않고, 힘겨워 보이지 않는, 그저 또 하나의 형태의 삶에 불과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코스모스 - 보급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거 지금 읽는 중인데 부록2 증명 과정 맞는 건가요..? 번역이 잘못 된 건지, 오류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수학과 대학원생한테 물어봐도 이상하다고 하고...p691 정n면체가 갖는 면들 총수가 n x F라고 나오는데 정육면체면 6 x F(690쪽에서 정다면체 면 수라고 하면 6이고) 그러면 면 총수가 36 이라는 건데... 이 부분 잘 이해가 안 됩니다 혹시 아시는 분 도움 주시기를 ㅠㅠ 수학쪽 머리가 아니라 잘 모르겠네요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설표 2015-06-21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제가 수학과 대학원생 분한테 부탁해서 이해했습니다. 원문이 잘못된 건지 아니면 부록 번역이 잘못된 건지 모르겠는데 691쪽 부록 2 피타고라스의 다면체 증명과정에 한 부분이 오류네요. 정n면채가 갖는 면들의 총수는 엔 곱하기 에프가 아니라 정엔면체를 다루는 도형들을 해체했을 때의 총 모서리 수를 다루는 식이더군요. 대입해야 하는 엔은 정엔면체의 엔이 아니라 그 정엔면체를 구성하는 엔각형의 엔이고요. 출판사에서 이 부분 확인하셨으면 하는데, 어떻게 연락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이 부분 지금 최근 버전에서는 수정되었으려나... ㅎㅎ
 
배리 린든 - [할인행사]
스탠리 큐브릭 감독, 라이언 오닐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여러 군데 올린 글입니다. 혹시 보지 않으신 분은 안 보시는 걸 권장합니다.>>


  스탠리 큐브릭의 배리 린든은 정말 명작이다. 스탠리 큐브릭의 숨겨진 명작. 보고나면 헨델의 사라방드가 계속 머릿속에 울려 퍼진다.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스탠리 큐브릭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스탠리 큐브릭의 입지가 굉장히 고유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소설가나 영화가나 예술 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가 만들어내는 작품들이 일정 정도 자기 반복적으로 창조된다. 왕가위나 홍상수, 김기덕, 페드로 알모도바르 등등 영화를 만들 때마다 자기만의 특정한 스타일을 창조시켜 변형시키는 경우들이 상당히 많다. 전체적인 테마가 비슷할 때도 있고, 색감이 비슷할 때도 있고, 화면 잡는 것이 그럴 때도 있고, 특정 정서(여성혐오로 보이는)가 반복될 때도 있다. 아니면 라스 폰 트리에 같은 경우, 영화를 창조해내는 형식이나 방법은 자기가 설정해놓은 삼부작들의 주제마다 상당히 다른 것 같은데 왜인지 모르게 그 사람이 만든 영화 자체들이 품는 성격 자체가 비슷하기도 하다. 그런데 스탠리 큐브릭은 이상스러운 게, 자기 작품들이 다 서로 엄청나게 다르다. 매의 눈이거나 영화공부한 사람이면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적어도 나는 그렇다.

  스탠리 큐브릭이 대충 열두, 열세개의 영화를 찍은 것 같은데, 본인이 본인 것으로 셈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 스파르타쿠스를 제외한다 쳐도 그의 많은 작품들이 성격이 다르다. 공통점을 굳이 찾자면 문학으로 있는 작품들을 자기가 고친 적이 많다는 정도인 것 같다. 그런데 그러한 형식으로 시도한 영화들도 장르들과 주제들이 서로 많이 다르다. SF도 있고, 시대극도 있고, 공포영화도 있고, 부부의 불륜을 다룬 것도 있다. 하나의 장르를 다룬 영화를 마치 도장깨듯 높은 완성도로 만든 다음에 다른 장르, 다른 성격의 영화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유유히 시작하는 그의 놀라운 재능을 보면 영화계의 모차르트가 현신이라도 했나 싶을 정도다. 처럼 스탠리 큐브릭이 워낙 다양한 시도를 많이 했고, 그 시도들이 각 영화 장르에 성공적으로 고전이 된 탓에 상대적으로 흥행성적도 약했고, 가장 무난해 보인(?) 배리 린든이 스탠리 큐브릭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묻힌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배리 린든을 보는 내내 나는 딱히 큰 단점을 찾지 못했고, 다만 그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 뿐이었다. 왓챠 보면 좀 뻔한 스토리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최근에 내가 본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처럼 인생사 한 편의 꿈이란 것을 정말 잘 보여주는 영화라 생각한다. 사실 그 영화보다 작품 질은 훨씬 우수하다는 게 내 솔직한 생각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스토리 라인이나 전개 방식은 내 생각에 완벽 그 자체다. 이 영화는 내레이션이 극을 이끌어 나간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배리 린든을 맡은 배우가 라이언 오닐인데(라이언 오닐의 '페이퍼문'을 최근에 보기도 했으므로 나는 그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를 연속으로 본 셈이다), 이 욕심 많은 배우가 스탠리 큐브릭한테 주인공보다 대사가 훨씬 많은 내레이션도 자기 시켜달라고 징징대서 스탠리 큐브릭이 분노하여 다신 배우로 쓰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비하인드 스토리다. 어쨌든, 이 내레이션은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등장인물들에 대한 직접적인 평을 가리지 않는다. 내레이션은 주인공의 불행한 결말을 몇 번 정도 암시하며, 절대적인 서술자마냥 모든 이야기를 다 알고 있다는 자못 오만한 어조를 취한다. 이 내레이션의 어조는 시대극을 고집한 스탠리 큐브릭의 의도에 적확하며, 그 준엄하고 귀족적인 목소리는 우리로 하여금 상당히 옛스러운 시대를 산 한 남자의 불운한 이야기를 차분하게 듣도록 이끈다.

  이 극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배리 린든이라는 남자가 아니라, 배리 린든이라는 남자를 다루는 이 영화의 시선이고, 내레이션의 차가움은 바로 그러한 시선을 반영한다. 배리 린든이라는 남자의 인생 자체는 어떻게 보면 그렇게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영화의 독자적인 시선이 배리 린든의 인생을 해석함에 따라 그의 인생을 다룬 이 이야기도 자못 신선해진다. 배리 린든의 이야기는 크게 전기, 후기로 나누어져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전기에서 배리 린든은 그 누구보다도 가장 순결한 사랑 때문에 자신이 가진 많은 것을 잃고 방랑하여 군에 입대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세상에서 가장 용기 있는 순정남이었던 그는 무참한 세월 속에서 점차 초기의 순진한 마음을 잃고, 여차저차 귀족부인의 환심을 사 결혼하여 부자가 된다. 변질하여 다른 사람이 되는 배리 린든의 모습을 보는 관객의 마음은 고로 이중적이 된다. 관객은 전기에서는 배리 린든의 고초를 마음 아파하며 그가 방랑생활을 접고, 무사귀환하기를 응원한다. 그러나 관객은 영화 후기에서 배리 린든의 질 나쁜 행동에 질색하며 얼른 양아들이 그를 징벌하기를 바라게 된다. 스탠리 큐브릭은 인물의 이러한 변질에 어떠한 드라마적 감상도 배제하고, 그의 몰락 역시도 차근차근 전개해 나간다. 내레이션은 정말 배리 린든이라는 인물의 삶에 대해 어떠한 동조적 감정도 갖지 않는 것처럼 말한다. 그래서 대충 결말을 암시 받았더라도, 관객들은 도대체 어떻게 배리 린든이 몰락하는가에 초유의 관심을 집중하게 된다. 관객이 궁금증에 안달복달하더라도 내레이션은 여유로움으로 가득찬 신사마냥 이죽거리며 뜸을 들이다가는, 결국 최후에 가서 그의 처절한 몰락을 이때껏 그래왔듯 한껏 무관심하게 서술한다. 내레이션의 목소리를 들으며 비참하게 마차에 올라타는 배리 린든의 뒷모습을 보며 관객은 인생이 얼마나 허망하고 꿈 같으며, 사람이 얼마나 쉽게 변하고 또 변할 수 있는지를 영화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배리 린든의 영화 장면들이 매우 아름답다는 것은 이 영화의 또 다른 장점이다. 인조광 하나 없이 자연광으로만 찍었기 때문에 모든 장면들이 굉장히 섬세하게 아름답다. 흡사 유럽의 옛그림들을 보는 기분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호화스러운 실내 장면보다 자연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담아내는 (구름부터 바닥의 땅까지) 장면들이 정말 잘 찍은 사진처럼 아름답단 생각을 했다. 스탠리 큐브릭 본인이 사진작가로 시작했기 때문에 장면미학에 엄청난 집착을 가지고 영화 일에 임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어두운 곳에서 촛불조명으로만 영화를 찍기 위해 나사에서 직접 카메라 장비를 빌렸다고 하는데, 그 행위가 좀 지나친 오버 아니냐는 몇몇 사람의 냉소에도 불구하고, 본 장면들(어두운 곳에서 카드 게임하는)은 실제로 정말 아름답게 찍혔다. 그 시대의 의상분야에 관심이 없는지라 자세히 말은 못하겠지만 고증에도 충실한 것 같아 보였다. 인물들의 하얀 분칠가루가 그 정도로 진하게 발라진 영화를 본 기억이 잘 들지 않는다. 그러한 분장술조차도 그 시대의 아름다움을 포획하기 위해 들인 스탠리 큐브릭의 공이 아니었나 싶다.

  음악에 대해선 더 이야기할 것도 없다. 헨델의 사라방드가 얼마나 아름다운 음악인지 깨닫게 된다. 나도 요즘 만날 듣는다. 그런데 스탠리 큐브릭이 그의 여러 작품에 클래식을 쓴 걸 생각해보면 그가 그 분야에 대해 조예가 깊지 않았나 싶다. 아니면 이렇게 시의 적절하게 음악을 쓸 수가 있나 싶을 정도. 헨델이 아마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를 보았으면 매우 흡족해 했을 것 같다. 그런데 만약 스탠리 큐브릭 본인의 감각이 아니라면 스탠리 큐브릭이 같이 일한 음악감독이 훌륭했던 건가 싶기도 하다. 이 분야에 대해서도 잘 모르니 더 이상의 언급이 흔들지만 알려진 감독의 성격상 전자에 가까울 것이라 예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