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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내가 2020년에 공부하면서 썼던 영어 글을 ChatGPT4를 이용하여 한국어로 번역한 다음, 그 뜻이 오독이 되지 않도록 다듬어서 올린 글이다. 최근에 한 철학 블로거 분이 개최하신 세미나에 참여하여 하버마스 로티의 논쟁에 관한 글들을 읽었는데 마침 그 모든 것이 내가 공부하다 멈추었던 철학의 지점과 딱 맞아떨어져서 순조로운 스타트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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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적 아이러니즘과 공적 리버럴리즘(자유주의)의 한계에 대하여: 리차드 로티의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현대 정치 철학자들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따라야 할 지침에 대해 논의할 때, 공동체의 공동 기반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근대 이전에 공동체 구성원들을 결합시켰던 신의 개념과 같은 절대적인 기초의 힘이 약화되었기 때문입니다. 한번 흔들리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지나온 과거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과거보다 느슨한 방식으로 공동체에 속하는 방법에 대한 새로운 규칙과 아이디어를 찾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현대 정치 이론에 대한 우리의 주요 질문 중 하나는, 우리가 공동체의 공동 기반이 과거에 믿었던 것처럼 일관되고 견고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공동체를 창조할 수 있는지 여부입니다.



이 논문에서는 제가 제기한 문제를 고찰하기 위해, 특히 그의 저서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에서 리차드 로티의 논증에 대해 비판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CIS'라고 줄여서 부를 것입니다) 로티의 글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사람들이 사적 영역에서는 아이러니스트가 되고 공적 영역에서는 자유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제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다양한 상황의 우연성을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보편적이고 일정한 기반에 의존하지 않고 공공의 연대를 유지하는 방법을 모색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의 논증에는 여러 문제점이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논의를 전개시키기 전에 간략하게 제 비판점들을 요약하고자 합니다. 우선, 로티는 언어의 특성에 대해 단순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이는 과학과 합리성의 유용성을 약화시킵니다. 언어는 인간의 마음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는 합리성과 과학이 단지 인간의 창조물이며, 언어라는 인간 질서의 산물이기 때문에 세계의 원리를 대표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언어의 우연적 특성을 강조하고 사회를 시적화하는 비전을 제시하며, 합리성과 과학의 유용한 기능을 폄하함으로써, 그는 이들이 외부 세계와 연결하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인간 사회를 구축하는 데 기여할 가능성을 간과합니다.



두번째로, 로티는 자신의 자유주의 사회에서 가능한 불평등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의 시와 문학에 관한 이야기는 연대를 창출하기 위한 '우리'라는 개념의 확장을 요구할 때 있어서, '우리'와 같은 언어 기반이 없는 '그들'을 위한 어떠한 보호도 제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존 커뮤니티 밖의 사람들은 커뮤니티 안에서 살아가는 시인이 사용하는 언어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연대의 확장이 불가능합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공공과 사적 영역 간의 구분은 로티가 공공 자유주의를 아이러니스트들의 사적 프로젝트보다 우선시할 때 불화를 드러냅니다. 이는 우리가 서 있는 기반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아이러니즘을 주장하면서도 그가 자유주의를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로티의 논증이 일관성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chapter 1 합리성과 과학의 유용함을 약화시키는 로티



로티에 대한 첫 번째 비판은 그가 합리성과 과학으로부터 거리를 둔다는 것입니다. 그는 철학적 기초를 약화시키지만 자유주의 기관을 강화할 때는 구체적인 합리주의를 긍정합니다. 로티는 자유주의 사회가 과학과 합리성에 반대해야 하지만 시적인 사회를 목표로 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을 여러 번 명확히 합니다. 그는 문화 전체가 계몽주의의 희망처럼 '합리화'되거나 '과학화'되기보다는 '시적화'될 수 있다는 자유주의의 재해석을 바랍니다. (CIS, 53) 로티는 합리주의와 과학이라는 단어를 피하고 그들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려고 최선을 다하는 듯 보이지만, 그가 제안하는 이상적인 공공 영역을 위한 자유주의 사회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합리주의와 과학들이 더 나은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다는 점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로티가 합리주의와 과학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티가 언어는 재현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CIS, 21) 그는 진리와 언어가 인간의 마음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주장합니다. 세계는 밖에 있을지 모르지만 진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진리를 만들어내고 있으며, 진리는 인간의 언어의 요소인 문장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CIS, 5) 즉, 인간의 언어가 진리를 만들고 이러한 진리들이 인간 세계의 질서를 구성하며, 세계가 실제로 어떻게 존재하는지와는 별개로 가치를 지시하고 어느 것이 참이고 거짓인지를 결정합니다.



문제는 로티가 "시적, 예술적, 철학적, 과학적, 또는 정치적 진보는 사적 집착과 공공의 필요가 우연히 일치할 때 발생한다"고 주장할 때부터 시작됩니다. (CIS, 37) 그는 또한 "위대한 과학자들은 세계의 묘사를 발명하여 일어나는 일들을 예측하고 통제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하고, 마찬가지로 시인들과 정치 사상가들은 다른 목적을 위해 그것의 다른 묘사를 발명한다"고 말합니다. (CIS, 4) 간단히 말해서, 그는 과학, 철학, 정치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언어의 부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로티의 관점이 언어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 활동에 대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의 관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인간과 무관하게 그대로 존재하는 세계에 대해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너무 인간 중심적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사람들이 밖에 있는 세계와의 연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계는 말하지 않고 오직 우리만 말한다" (CIS, 6) 고 그가 주장한다면, 인간만이 인간의 언어를 말하기 때문에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계에서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을 바탕으로 언어를 구축했습니다. 즉, 우리의 언어는 어느 정도 세계를 반영합니다. 언어가 세계의 모든 것을 그대로 대표하지는 않지만, 존재들은 인간의 마음을 넘어서 서 있으며, 과학과 합리성이 드러내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인간의 세계에 속하지 않지만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세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합리성이 자유주의 건설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것들을 배제하는 것은 비합리적입니다. 로티의 모순적 태도는 합리성과 과학의 결정적인 유용성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은 인간을 현실 세계로부터 격리시켜 자기중심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에 빠지게 합니다. 로티가 계몽주의 자유주의에 기여하는 실용적 합리성을 인정한다면, 과학화되지 않고 철학화되지 않은 사회를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과학과 철학을 전혀 포기할 필요가 없으며, 그것들이 종교의 힘을 가지거나 절대적 가치로 자처하지 않는 한 필요할 때 그들의 도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커뮤니티를 위한 시적 특성뿐만 아니라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특성도 필요합니다. 그들의 유용성을 인정한다면, 로티가 실용적 자유주의라는 개념으로 말하려는 것에 더 가까워질 것입니다. 대신, 시적 자유주의와 반합리주의 (그리고 반과학주의)에 대한 환상적 태도를 가지는 것은 그들이 사회에 제공한 것과 미래에 우리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공을 인정하지 않고는 부당합니다.


Chapter 2 언어의 본성으로부터 파생되는 불평등에 대한 불충분한 논의



로티의 두 번째 문제는 그가 인간 사회 전반에 걸쳐 언어의 결정적인 영향을 강조하기 때문에 첫 번째로 논의한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에게 언어는 인간이 의존하는 모든 가치와 도덕을 창조하는 것이며, 일관된 기초란 없습니다. 그가 인간 사회에서 언어의 우연성의 중요성을 얼마나 강조하는지 보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그는 언어 사용의 불균형에서 비롯되는 불평등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언어가 단순한 도구이고 인간이 예술가처럼 진리를 발명하는 존재라면, 예술적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의 격차가 그들의 진리 접근 능력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로티가 인간 사회를 위한 시적화된 사회를 꿈꾸면서 (CIS, 53), 그는 문학과 시에 대한 분명한 애정을 보여줍니다. 이는 "오직 시인들만이 우연성을 진정으로 감상할 수 있다고 니체는 의심했다" (CIS, 28) 이기 때문입니다. 시인들은 언어가 단단한 기반이 없으며 장난스럽고 아이러니한 재묘사를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언어가 새롭고 다른 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힘" (CIS, 39) 입니다. 그러나 시인처럼 새로운 비유를 만들어내고 단어를 가지고 놀 수 있는 능력은 실제로 언어에 대한 매우 진보된 기술을 요구합니다. 결론적으로, 로티가 이상적인 자유주의의 이미지는 시적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시에 대한 감정가의 재능을 가진 예술가적 재능을 가진 공동체 구성원들을 양성하는 방법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엘리트주의적 관점으로 들립니다. 사람들이 언어의 기술이 없다면, 시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고, 언어에 내재된 우연성을 인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언어 기술 수준의 차이는 피할 수 없으므로 이 비판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개선도 없는 불평등의 문제는, 로티가 제안하는 의미 있는 연대를 생성할 수 없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로티는 "우리는 모든 인간과 연대감을 느끼는 도덕적 의무가 있다" (CIS, 190) 고 말하고, "우리는 '그들'로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우리'의 감각을 확장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합니다.(CIS, 192) '그들'의 개념을 '우리'로 전환하는 것은 '그들'을 '우리'의 질서에 통합하는 언어적 작업을 요구합니다. 특히 시적인 언어의 높은 수준을 생각할 때, 평균 이상의 언어 경험과 교육이 필요합니다. 현실에서 예를 들어, 언어 기술이 미흡하여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든 이민자 커뮤니티와 난민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커뮤니티의 도덕성, 즉 로티가 '우리의 의도'라고 부르는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경계에 속하기 위한 추가적인 돋움대가 필요합니다.



로티와 롤즈의 이론은 개인이 다원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동시에 느슨한 원칙에서 공동체에 속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유사합니다. 로티는 롤즈를 계몽주의 자유주의를 유지하고자 하지만 계몽주의 합리주의를 버리려는 사람들 중 하나로 언급하며, 철학적 기반을 방어할 필요에서 해방된다면 자유주의 기관이 더 나아질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말합니다. (CIS, 57) 그러나 둘 사이의 차이점은 롤즈가 가장 불리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 자원의 보충을 보장해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주장하는 반면, 로티는 지원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연대의 확장만을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로티는 자유주의 사회의 영웅들은 강력한 시인들과 유토피아적 혁명가라는 생각이, 소외된 시인이나 혁명가의 관점에서는 모순적이고 실패할 것처럼 보일 것이라 주장합니다. (CIS, 60) 소외는 인간성을 대변하여 임의적이고 비인간적인 사회적 제한에 항의하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CIS, 60) 로티가 그들을 영웅이라 부르는 것은 중요한데, 이는 평범한 사람들이 영웅이 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의 관점에서 영웅은 소수에 불과하며, 이러한 영웅들이 대다수와 소통하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언어에 능통하고 커뮤니티에 속한 엘리트들만을 위한 것이 됩니다.



chapter 3 공적 리버럴리스트들에 의한 사적 아이러니스트들을 향한 억압



로티는 사람들이 두 영역을 가지고 있다고 제안합니다: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입니다. 사적인 영역에서는 개인의 목적이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한 태도와 관련이 없으며, 공적인 사안은 개인에게 관련이 없습니다. (CIS, 91) 반면에 공적 영역에서의 자유주의자는 다른 인간에게 행동할 때 그들이 겪을 수 있는 굴욕의 모든 형태를 인식하는 것을 요구받습니다. (CIS, 92). 그는 이 두 영역이 어느 정도는 같은 선상에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많은 경우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합니다. 때때로 개인이 아이러니스트 또는 자유주의자 중 어느 쪽을 선택할지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로티는 푸코를 자유주의자가 아닌 아이러니스트로 비판하면서 공적 영역에서의 그의 최종 어휘가 아이러니스트들이 그들의 의무를 끝까지 밀어붙일 수 없는 공적 영역에 서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로티는 자유주의 사회에 대한 낙관론을 강하게 표현하여, 서구 사회와 정치 사상이 더 이상의 개념적 혁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CIS, 63) 이는 그가 자유주의 사회보다 더 이상의 선구적인 혁명을 상상하지 않는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이러니스트들은 현재의 언어 구조에 반대하여 그들의 아이러니즘과 은유를 전진시킵니다. 그것의 본질은 공통된 기반을 파괴하는 것이며, 이것이 푸코가 '우리'라는 말을 거부하는 이유입니다. (CIS, 64) 그는 아이러니스트로서의 그의 결심에 충실합니다.



아이러니스트의 임무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구축한 견고한 기반을 전복하는 것으로, 처음에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자아와 정체성을 공격하기 때문에 배반이라고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합리주의가 철학적 기반이 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우연한 기반에 견고한 기반이 있으며, 이는 철학적 기반과 거의 동일하게 기능한다는 것입니다. 로티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절대적 가치는 없지만, 우연한 공동체적 기반이 연약하고 가소롭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것이 아이러니스트의 임무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정치적인 활동이 되는 이유입니다. 로티 역시 이를 알고 있으며, 그는 구식 언어 사용자들이 자신들을 구식으로 만드는 급진적인 은유를 사용하는 급진주의자들을 비난하는 장면을 묘사할 때 이를 인식합니다. 구식이 되지 않으려면, 기성세대는 비합리적인 자들로 젊은이들을 비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CIS, 48)



로티는 결정적 순간에 섰을 때, 니체와 하이데거와 같은 도전에 대해 최선의 방법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프로젝트와 숭고함에 대한 시도를 사적으로 전환하고, 정치와는 관련이 없으므로 민주적 기관의 발전이 촉진한 인간 연대감과 호환될 수 있도록 보라고 요청합니다. (CIS, 197)



이러한 사적 전환 요청은 숭고함을 잔인함과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욕망에 종속시키라는 요청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아이러니스트들이 해야 할 일은 바로 잔인함과 고통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구시대 언어와 새로운 언어 간의 권력 게임과 같은 전환은 불가피하게 잔인함과 고통을 수반합니다. 아이러니즘의 본질은 해체(잠시 데리다의 용어를 빌리자면)로서, 갈등과 마찰을 유발하는 것입니다.



로티는 아이러니스트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도 그들을 제한시킬 것을 제안합니다. 그는 공공성이 아이러니스트들의 세계를 구축할 능력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니체, 데리다, 푸코와 같은 자기 창조적인 아이러니스트들은 모든 개인에게 완전한 자율성을 상상하지만, 로티는 사회 기관이나 모든 인간 내에서 자율성의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이를 거부합니다. 그는 자율성이라는, 지배적인 언어 게임에 저항하는 아이러니스트의 주요 도구가 단지 소수에게만 가능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엘리티즘을 보여줍니다. 또는 그는 아이러니를 확장할 기회를 잔인함과 고통을 피하기 위해 포기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아이러니스트들이 진정한 목소리로 타인과 소통하지 못할 때 겪는 고통을 고려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로티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간의 구분에 대한 아이디어는 조화롭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공적 영역의 편을 듭니다. 이것은 균형 잡힌 대립이 아니라, 자유주의가 아이러니즘을 억압하는 불공정한 게임입니다. 아이러니즘은 사회의 변화를 위한 동기를 제공하는 중요한 힘인데, 이것이 약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모순적입니다. 로티가 진정으로 시인이 '영웅'인 사회를 원한다면, 아이러니즘의 정치적 가치를 결코 간과하거나 단지 사적 영역에만 가두어서는 안 됩니다.



로티의 이론은 커뮤니티의 공적 자유주의 부문과 사적 아이러니즘 부문이 공존할 수 있음을 제안합니다. 그러나 그의 이론에는 세 가지 주요 논리적 결함이 있으며, 이는 그의 이론 내의 모순을 보여줍니다. 그는 합리성이 그가 꿈꾸는 자유주의 사회 건설에 기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편, 합리성과 과학의 유용성을 경시합니다. 합리성과 과학을 인정하고, 그것들이 인간 중심적 세계에 우리를 가두지 않고 바깥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적 가치를 인식해야 합니다. 또한 그가 연대의 확장을 도덕적 의무로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어적 불균형으로 인한 가능한 불평등을 완화할 대안이나 지침이 없어 연대의 확장을 해칠 수 있습니다. 이는 그의 연대에 대한 관점이 실현 가능한 보충이 필요한 실천이 아닌, 단지 형식적인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로티는 공적 자유주의를 사적 아이러니즘보다 우선시하는 것과 아이러니스트들의 자율성 개념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그의 주장으로 인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간의 불균형이 발생합니다. 그의 이론의 핵심 부분이 아이러니즘이라면, 그것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이를 통하지 않음으로써, 그는 인간이 그들의 자율성을 바탕으로 언어와 은유를 발명하고 선택한다는 그의 실용주의 관점을 약화시킵니다. 개인이 그들이 무엇을 원하고 필요로 하는지 알 때, '그들'이 '우리'가 되는 그가 꿈꾸는 진정한 연대가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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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공부 - 조선 왕은 왜 평생 배움을 놓지 않았을까
김준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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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며


가볍게 읽는 책이라 페이지 인용은 생략하였다.


1. 아이와 함께


아기를 키우며 열심히 공부하면 한 가지 단점이, 흐름이 끊긴다. 아기가 잘 있다가도 울기 때문에 달래주어야 한다.


소위 손을 탄 아기라서 아기띠에 메고 살짝 걸어다니면 금방 진정을 하는데, 그 와중에 아기에게도 조금 읽어줄까-그리고 공부하는 스스로를 채찍질하기에 좋지 않을까- 싶어 군립도서관에서 여러 책 중 이 책을 빌렸다.


2. 조선시대는 참 흥미롭다


요새 조선이라는 나라의 운영 방식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어 앞으로도 관련 책을 많이 읽게 될 것 같다.


3. 공부론, 공부방법에 대해서는 유학자들을 따라갈 수 없지 않을까


이 왕의 공부라는 책은 기본적으로 조선 시대 왕이 어떤 공부를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인데, 결국 유학적 기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공부론이기도 하다. 여기서 왕이라는 단어를 자기 자신에게로 바꾼다면 우리 자신에게도 아주 많은 배울 점을 시사한다.


4. 감정, 호오를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이유


(1) 왕은 감정을 제어해야 한다

(2) 좋아하는 것을 절제해야 한다


왕도 인간인지라 사적인 마음이 드는 것 자체는 어쩔 수가 없다. 감정이 나타나는 것도 어쩔 수가 없다. 우리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언제나 분심을 다스려야 한다. 그리고 맑은 눈으로 스스로를 관찰해야 한다. 현재 우리 한국 사회에 분란을 일으키는 모든 문제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결국 사람들이 마음 공부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발생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심호흡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한다면 지금처럼 폭력적으로 자신의 이익만을 소리지를 수 없는데, 그것을 배우는 엄격함이 우리 사회에서 저물어버렸다.


우리는 형식적 엄격함, 엄정함을 "꼰대의식"으로 묻어버렸다. 물론 "꼰대"는 있으나, 이 사회는 극단적 치우침 때문에 중(中)을 찾는 미덕을 발휘하여 어떻게 새로운 질서를 창출해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감정과 호오를 절제하라는 윗세대들의 가르침을 여과하여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온고지신이라 했는데, 감정을 발휘하지 말라고 옛날 선비들도 말한 적은 없다. 다만 그 적절한 방식을 찾으라고 했다. 우리는 그 적절한 방식에 대해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5. 성의(誠意;뜻을 성실하게 세우라)의 중요성


우리 사회의 교육은 영혼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의 대안이 없어져 사회 공동체가 방향을 잃은 것과 같은 이치다.


과학적 지식으로서 영혼의 부재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영혼은 지향성, 방향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나침반이다. 어떻게 살아야 좋은 삶이냐를 자신이 정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따라야 하는 것은, 이 공동체, 이 사회, 이 환경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디에 있느냐 그 점찍힌 장소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나온다. 나는 이를 푸코가 잘 기술했다고 본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유학자들이 말하는 격물치지의 논리와도 상통하지 않나 싶다.


내가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성의 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만전을 기해야 하는데, 이때 이 만전을 기해야 하는 것은 행동 아니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성의를 "내가 배운 지식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라 하였다. 아무리 좋은 내용을 배웠다 한들, 당최 그것의 실천이 없다면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과연 옳은 말이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는 경건해야 할 것을 당부한다. 즉, 두려움을 간직하라는 것이다.


왜 두려움을 간직하느냐, 아무리 임금이 높다 한들, 또한 우리 현재 인간들의 인권이 높게 설정되어 우리 모두 스스로를 타인과 같은 위치에 둔다 한들, 이 자연만물 앞에 우리 인간이 보잘것 없음에 대한 상식이 없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죽음 앞에서, 위기 앞에서, 풍전등화의 존재인데, 그리하여 그 수많은 비극들 앞에 봉착했을 때 같이 똘똘 뭉치기 위하여 다른 이들이 중요한 것인데, 자기 자신만 잘난 줄 알고 까불대니 두려움이 없어서 무슨 일이든 성의 있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절실하게 해야 하는 것, 나도 절실하게 공부한다. 그리고 매사 두려움의 마음을 갖는다. 항상 낮추어야 할 필요성을 간직하고자 한다.


6. 왕이 공부하는 데 있어서 경연(經筵)의 중요성; 공부할 때 때를 정하고 장소를 정하고 훌륭한 인재들을 가까이 해야 할 필요성


조선시대에서 경연이 이루어진 것은 바로 앞에서 말했듯이, 임금에게 요구되는 학문 수양, 정심(正心)과 성의를 위해서는 끝없는 채찍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왕이 지속되는 공부를 게을리하는 것을 조선시대의 신하들은 경계하였다. 그리하여 경연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신하들은 꼭 간언하는 말을 하였다.


만약 책에서의 이 부분을 짧게 줄여본다면, 공부에서 중요한 것은 격식이라는 말이다.


 때와 장소가 안 정해져 있으면 금방 게을러지고 시간이 분방해진다. 훌륭한 신하들이 옆에 모여 같이 질의응답을 하는 것은,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서 열심히 토론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준다.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하고 성현의 옛 가르침을 남의 입을 통해 다시 배우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공부의 길이었던 것이다.


6. 조선시대에서 찾아볼 수 있는 파레지아(이른바 간언諫言, 솔직한 말하기)가 현대의 지식인들에게 부족한 미덕; 혹은 그 미덕이 자본주의적으로 변질되었을 수도


왕의 주요 자질 중 하나를 이 책에서는 경청이라 이야기하는데, 경청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옳은 말을 해주는 자들이다.


나는 일찍이 석사 논문에서 푸코가 중요하게 다루었던 파레지아라는 그리스 시대의 관습을 통해 민주주의를 고찰하였는데, 비록 조선시대는 당연히 민주정은 아니었으나 왕과 신하 사이에서 옳은 통치 방향성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옳은 말을 듣고 뱉을 수 있는 용기였다는 것은, 푸코 본인도 동서양의 여러 케이스들을 빗대어 인용한 바 있으니 모든 고전에서 왕정을 이야기할 때 중요하게 다룬 미덕이 바로 이 간언과 경청의 자세일 것이다.


나는 이 경청과 간언에 관한 부분을 보며 현재 우리 사회의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학계에서 자기들끼리만 속닥거릴 뿐, 대중들에게 일거의 말조차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어떤 점에서는 일리가 있는 것이, 현재의 소위 지식인들, 배운 자들, 지식을 연구하는 자들은 옛날 유학자들과는 마인드셋팅부터 다르다. 그들에게는 "이끌어간다" 혹은 공동체의 더 나음을 위해 "당연히 희생한다"는 정신이 없다. 그들에게는 "대학생들을 가르치고 지식을 연구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일이고, 그 위치에서 더 나아가 간언을 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긴다.


일면 이해가 간다. 왜냐하면 수많은 대중들의 공격이 따갑고, 그로부터 자신의 위치를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옛날 유학자들이라도 용기를 내는 신하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이 책에서도 말하듯, 좋은 군주가 있을 때는 용기를 내는 신하가 많아지지만 연산군과 같은 포악한 군주가 있을 때는 신하들이 모두 간신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왕정이 아니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우리가 지금 일궈낸 사회는 연산군과 같은 포악한 군주가 다스리는 사회와 다를 바가 없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사회가 대체 어떤 면에서 왕정보다 낫다는 말인가? 이 질문은 사실 노예의 길을 쓴 (내가 최근 노예의 길을 띄엄띄엄 읽고 있다) 하이에크에게서도 발견되는 질문이다. 그는 민주주의를 부정하진 않는다. (마치 차선을 선택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는 민주주의가 어떤 절대 지상 목표가 아님을 이야기하는데, 나 역시 비슷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가 지식인들이든 아니면 소위 "이끌어나가는 층"에서 옛날 조선시대 지식인들만큼도 못한 면을 발견한다면, 그리하여 그들이 패배하고 더 이상 사회가 교육을 숭상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 성찰하지 않는다면, 이 사회가 과연 촌스러운 왕정, 군주정과 무슨 차이가 있을 것인가?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것이다.


술술 읽히는 아주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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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소설 ‘성’과 ‘유형지에서’를 읽고-

소외에 관하여(부제: 성의 차별적 분리 전략과 세 개의 방안)

 

카프카의 우울함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그의 소설들은 모두 음산하고 음울하고 패배감에 가득하다. 인물들이 소외 속에서 고통을 겪기에 악몽과도 같다. 악몽이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경험한 총체의 심리적 반영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카프카의 소설이 허구만이 아니라 현실도 담아낸다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카프카의 이야기들은 개인과 사회의 폭력적 관계를 다루기 때문에 단순히 상상에만 의거하지 않는다.

 

우선 카프카의 우울함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카프카의 소설 “성”에서 드러난 소외를 살펴보자. 소외는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이유를 상실하고, 이를 타자의 권위로 대체할 때 발생한다. 즉, 누군가가 독립적이지 못하고 자기 결정권한을 잃어버린다면, 그 사람은 소외에 처한 것이다. (한국인에게 일본 제국주의에 관련한 역사를 언급한다면 바로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능할 것이라 본다. 국가와 정부 개념에서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의 정치권을 자신들의 결정권한으로 이양시켰을 때를 소외의 예시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말로, 소외는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고 다른 이들의 도구로 전락함을 의미한다.

 

[(1) 각주 : 본고가 쓰고 있는 ‘소외’라는 개념은 루소와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과 유사하다. 루소는, “소외는, 주거나 파는 것을 의미한다.” (루소, 160) 라 말한 바 있다. 그의 맥락에서 이 개념은 설령 인간이 노예가 된다고 해서 자유를 상실하고, 소외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주거나 파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소외는 근본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경우에는, 소외를 대상화가 발생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마르크스, 52) 특히 그의 맥락에서 소외는, 원래 한 사람에게 속했던 것이 그 사람에게서 떨어져 나와 “적대적이고 이질적”인 것이 되는 것을 뜻한다.]

 

소외는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하지 않는다. 소외를 발생시키는 일정한 전략과 권력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성”의 관료들은 상하관계를 고착화 시킴으로써 마을 사람들이 자립할 여건들을 파괴한다. K의 실패는 이러한 구조를 잘 보인다. 성은 마을 사람들에게 응답하지 않는 것, 성 자체를 마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권력을 신비화한다. 이로써 마을과 성이 분리된다. 이들의 분리를 보이는 좋은 예시 중 하나가, 마을 사람들이 성의 관료들이 자행하는 성적 착취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현상이다. 이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의 권력은 성 뿐만 아니라 마을에 의해서도 유지되는 구조다. 즉, 마을은 성의 분리 전략에 동참하며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이처럼 분리전략이 공고하며, 소외 상태가 지속된다면, 카프카의 소설에서 이 상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긴 한 것일까? 이 글은 이러한 질문에 세 가지 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카프카를 굉장히 긍정적인 방식으로 해석한다는 점을 주지할 필요는 있겠다. 세 가지 답안 중 두 개는 그의 소설 “성”에서, 하나는 단편인 “유형지에서”와 제시되며, 그 내용은 차례로 자기 의심, 자기 긍정,  그리고 연대이다.

 

만약 개인이 자립과 자율, 자치를 상실한다면, 되찾아야 한다. 첫번째로 길은 자김 의심이다. 자기 의심은 권위가 어디에서 그 힘을 창출시키는지 알도록 돕는다. 비록 K의 현재 상태에 대한 지속적인 의심과 질문들이 마을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천덕꾸러기로 생각하게 하지만, 그가 혼란을 야기한다는 점 자체는 매우 중요하다. 마을 사람들은 성 없이 자기들이 살 수 없다고 굳게 믿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믿는 것을 지속적으로 흔들어댈 장치가 필요하다. 두번째 요소인 자기긍정은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아멜리아가 좋은 예시다. 그녀는 소르티니(성의 관료)의 터무니없는 요구를 용감하게 거절한 자다. 프리다와 그녀의 엄마와는 다르게, 아멜리아는 자신의 몸을 성의 권력에 바치지 않았다. 그녀에게 강한 정신과 자기 확신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못할 일이다. 마지막으로 연대는 “유형지에서”라는 소설에서 끌어올 수 있다. 미완성작인 “성”에는 K나 아멜리아의 가족들이 소외를 극복한다는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유형지에서”는 권력의 전환기를 다루며, 이 과정에서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연대가 묘사된다.

 

이방인 K, 불완전한 독립에서 완전한 소외로 전락하다

 

“성”은 이방인으로서 성과 마을의 이상한 관계 사이에 껴버린 K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소설 맨 처음에 한 젊은 남자가 K에게, 성은 마을을 소유하며 마을 사람들은 모두 웨스트웨스트 백작 손 아래 있다고 말한다. (성 3, 4) K가 마을에 토지측량사로 왔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가 성에 속한다고 믿는다. (성4) 그가 어떤 종류의 편지나 전화를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는 그렇게 주장한다. 마을 사람들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에 있는 사람과의 전화 연결을 통해 우선 마을에 받아들여진다. (성 6) K는 그때부터 자신이 백작과 곧 만날 거라고 자신만만해 한다. 그래서 그는 성으로 바로 가려고 하나 이상하게도 성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한다. 고통스럽게 방랑하며 그가 깨달은 것은 그저 “마을은 끝도 없이 길기만 했다(성 12쪽)”는 것이다. 이는 성에 닿으려는 그의 노력이 소설 전반에 걸쳐 헛된 것임을 말한다. 그는 성에 가려고 무진 노력을 쓰나 마을을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시간이 갈수록 모든 것이 점점 더 불확실해지고, 그에 따라 K는 생명력과 자신감을 잃어간다.

            K는 극 초반부터 성과 거리를 둔다. 그는 “성에서 사는 건 저랑 안 맞을 거예요. 저는 저  자신의 주인이 되고 싶단 말입니다.” (성 8)라고 말한다. 성을 경계하는 그를 보면, 그가 이미 성과 자신이 대적할 운명임을 직감하는 것도 같다. 아래의 인용 부분에서 성과 K 사이의 긴장감이 역력하다.

 

            K는 귀를 쫑긋 세웠다. 그렇지, 성이 나를 토지측량관으로 인정했구나. 다른 한편 생각하면 성이 그에 관한 정보를 다 알고 있고, 모든 가능한 기회의 수들을 계산해 놓은 채, 미소 지으며 이 도전을 받아들이고 있기에 그에게 일들이 유리하게 돌아가긴 힘들다. 그렇지만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성이 K의 힘을 얕잡아보니 그에게는 행동의 자유가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이 그에게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어줄 지도 모른다. (성 6,7쪽)

 

K는 이미 자신 앞에 놓인 대결을 예감한 것이다. 물론 작품 내내 그는 말 그대로 성과 대적하며 성에 대한 반항적 태도를 유지한다. 그가 만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감히 성과 그 관료들과 만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조언하지만, 그는 그 말들을 무시한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성의 임금노동자 그 이상도 아니라는 점을 충분히 인지한다. 극 초반에 그가 염려한 문제는 임금값을 잘 받을 수 있을지 아닐지의 문제였다. “나쁘게 보수를 지급받아도” (성 7쪽) 불평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말이다. 이러한 소설의 묘사들을 고려하면 K는 누가 그를 권력으로 누른다 해도 자기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을 독립적인 사람으로 보인다. K는 권력에 길들여진 마을 사람들과는 다르게 스스로 말한 것처럼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려고 분투하는 것으로 보인다.

 

K가 이처럼 처음에는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던 이유는 성의 권력 때문이었다. 초반에 성과의 관계에서 자유로워 보였던 이방인은 마을에 머무를수록 성의 권위에 의존적으로 변한다. 그는 성을 위해 일하는 한, 스스로가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모순적인 이중성을 깨닫지 못한다. K는 자신을 성의 노동자로 간주하지만, 그 자체가 그로 하여금 스스로가 자유롭다 믿게 하는 요인이다. 성의 권력이 K가 마을에 머물러도 되는 승인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여관주인 한스와의 대화 중에 K는 자신이 타협적이면서 동시에 반항적인 성격임을 밝힌다. “제가 당신(여관주인)보다 힘 있는 사람들을 더 존중하지 않고, 그런 건 아니에요. 그저 저는 당신처럼 솔직하게 저 사람들을 내가 따른다, 이렇게 말을 못할 뿐이죠. 제가 힘 있는 사람들에게 온순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별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달까요.” (성 9) 그는 자신이 반항적인 면이 있긴 하지만, 성의 권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다. 최소한 K를 이곳으로 부른 건 성이다. 그렇기에 K가 자기 자신을 “성에 영향력이 좀 있고, 앞으로 더 생길 거에요”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 36) 만약 K가 생각한 것처럼 일이 돌아갔다면, 그가 성의 관료들 중 하나가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게 가능한지 의심했고, K는 증명을 위해 성과 클람을 쫓아다닌다. 토지 측량사로서의 확실한 신분을 보장받기 위해 그는 성과 접촉할 수 있는 모든 기회들을 찾아다닌다. 이러한 맥락에서, 클람은 K의 잠정적인 “후원자”이다. (성 36)

 

가끔 K가 클람에게 갖는 호기심이 지나쳐 보일 때가 있다. 특히 그가 구멍으로 클람을 훔쳐볼 때 그렇다. (성 38) 클람의 애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프리다에게 접근할 때도 그렇다. 프리다가 자신을 소개하자마자 K는 그녀가 “매우 대접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성 39) 그의 접근은 매우 의도적이다. 그는 “프리다가 (나 때문에) 모든 것을 져버렸는데 이제 내가 그녀한테서 뭘 기대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한다. (성 44) 클람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서라면 클람과 관계 있는 모든 것들이 K에게 중요하다. 하지만 프리다가 클람과 아무 관계가 없자 그녀는 그에게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쓸모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성에 속한다는 K의 믿음은 성으로부터의 직접적인 인정 없이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불운하게도, 자신이 성에 속한다는 그의 믿음은 시간이 갈수록 부숴진다. 성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그의 청원이 전화 상에서 “절대” 불가하다고 거절된다. (성 23) 통화 이후로 성의 전령이라는 바르나바스를 만나게 되나, 그도 성에 속한 자가 아니었다. (성 33) 바르나바스가 전달해준 클람의 편지에 적힌 대로 K는 이장을 만난다. 이장은 K에게 일어난 이 일들이 “가장 사소한 일들 중에서도 가장 사소한 일”이라고 딱 잘라 말한다. (성 68) 그리고 “우리는 토지 측량사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라고 덧붙인다. (성 69) “제가 이곳에 가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 (성 28쪽)다고 말하는 K의 바람과 다르게 그는 철저히 쓸모 없는 사람에 불과하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부터 프리다의 모친인 여관주인이 말한 것처럼,  “당신은 (여기서 K를 의미) 성에서 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을 사람도 아닌,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잖아요.  외려, 참 안타깝지만, 이방인에 불과” (성 50) 하다. 이 문장은 마을에서 K의 위치가 불안정함을 드러낸다. K 혼자 자기 처지가 어떤지 모른다. 그는 곧 성은 물론이요 마을에서도 자기 자리를 찾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다. K는 계속 실패를 거듭하며, 끝에 가서는 매우 피곤해한다. (성 289) 소설의 끝에서, 자신만만 했던 K는 사라지고, 아무도 환영해주지 않는 불쌍한 이방인만 그 자리에 남는다.

 

            K는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의 입지는 불안정하다. 초반에 야심만만하고 자신만만했던 그는, 성의 질서가 자신을 이곳으로 불렀다고 생각해 자신이 성에 속한 사람이며 성의 권력을 마주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성은 그의 상사, 고용인으로서 그의 정체성을 보장하고 그에게 일거리를 주어야 할 존재였다. 그래서 그는 일만 시작하면 성의 구조 안에 편입될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성은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는 성과 접촉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지만, 그러려고 하면 할수록 K는 성과 그 질서에 도전하는 모양새만 된다.

 

            K가 계속 실패하는 이유는 성에 편입되고자 하는 그의 요청이 성과 마을의 분리된 관계에 의해 항상 좌절될 운명이기 때문이다. K는 이방인이다. 그래서 성, 마을 둘 중 한 곳에 포함되고자 하는 그의 바람은 성의 권력으로 작동하는, 뚫을 수 없는 이중 시스템에 반한다.  분리 전략은 마을 사람들에게 특정한 행동패턴을 요구하는데, K는 마을 사람들이 따르는 질서를 전혀 따르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비정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 성을 무조건적으로 존중하며, 성의 관료들을 그들보다 우월한 존재로 상정한다. 이 구조는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이상한 일이 벌어져도 성에게 질문을 던지거나, 말을 걸지 못하도록 한다. 그렇기에 K가 말을 걸려고 하면 할수록,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서 더욱 멀어진다. 왜냐하면 그가 마을 사람들의 전통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성에서 온 사람이 아니라 성에 포함되지도 않는다. K는 성이 그를 고용했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관료 시스템 사이의 오류로 발생한 일이었다. 그는 촌장이 말한 것처럼, 마을에 속하지도 못한 채 그 안에 갇혀버렸다.

 

당신이 이곳에 왔다는 그 자체가 참 난감한 일이에요. 그래서 외려 우리는 당신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로 대우할 예정입니다. 근데 당신은 너무나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어요. 아무도 당신을 여기에 초대한 적이 없긴 해요.  그렇다고 우리가 당신이 여기서 떠나기를 바라는 건 또 아닙니다. (성 76)

 

이 애매한 상황에서 그는 길을 잃어버렸다. 이장의 조치에 K는 “성에게 어떠한 편의를 바라는 게 아니라, 단지 권리만을 원할 뿐”이라고 불평한다. (성 76) 이는 그가 처음에 성의 권력에 기대어 누렸던, 표면적인 독립을 잊지 못했다는 것을 보인다. 그는 여전히 성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초창기의 독립이 성의 권위에 의존적이었기에 불완전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토지 측량관으로 일하기 위해 K는 갖은 노력을 다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클람이 형식적인 편지를 보낸다 하더라도, 그는 꿋꿋이 “직접 만날 것” (성 124)을 주장한다. K는 이처럼 자기로부터 존재의 준거를 찾지 못해 완벽한 소외 속에 헤매고 있다. 그는 성에게 의존하는 것이 소외에서 벗어날 수 없는 길이란 사실을 꿈에서도 알지 못한다.

 

마을을 차별하고 착취하는 성의 전략

 

도입부 문단은 성의 민낯을 잘 보인다.

 

성이 자리한 언덕은 안개와 어둠 속에 가려져, 성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려줄 그 어떤 희미한 빛조차 없었다. 큰길에서 마을로 이어진 나무다리 위에서, K는 위에 자리한 신기루 같은 허공을 한참동안 응시하였다. (성 3)

 

위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성은 숨어있고, 신기루이며, 공허하다. 이는 성과 마을의 관계를 잘 보인다. 성의 권력은 유령처럼 마을 위에 존재한다. 그 위에서, 성은 마을의 자립이라는 핏줄을 조용히 빨아 마신다. 성은 흡혈귀처럼, 환한 빛에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는다. 희생자인 마을 사람들은 성에게 피를 빨려 자립을 잃고 빈 껍데기로만 남는다. 그들은 소외 속에서 성에 의한 졸병, 하수인에 불과하다.

 

성은 분리된 이중의 위계질서 너머로 숨었다. K는 성이 그에게 먼저 승인 권한을 주지 않는 한, 성에 다가갈 수 없다. 백작으로부터 허가를 받지 못한 K는 성에 들어갈 수 없다. 반면 바르나바스나 K의 조수들인 아서와 제레미야와 같은 마을 사람들은 성의 관료들을 만날 수도 있고 성에 들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독자들이 꼼꼼히 읽었다면 성의 관료들은 그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일을 맡길 때만 만나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예로, 조수들은 성이 내린 업무에 관해 “성으로 다시 돌아가 불만을 피력” (성 234)할 수도 있다. 제레미아는 K에게 클람의 대변인 노릇을 했던 갤레이터라는 관료가 조수직을 맡겼다고 했다. 그 일은 K가 너무 진지해서 이 상황에 대해 쓸데 없이 생각하는 게 많으니 그를 “조금이라도 북돋아주는 일”이었다. (성 234) 조수들은 토지 측량사로서의 일을 돕는 게 아니라, 그들이 하는 농담으로 K의 기분을 좋아지게 하는 것이 주요 업무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K와 성을 연결해주는 전령인 바르나바스의 경우도 비슷하다. 이 경우는 바르나바스가 성에 들어가 누가 그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기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점에서 더 끔찍하다. (성 239쪽) 바르나바스는 말 그대로 성의 전령이라는 수동적인 입장에 처해 있으며, 성의 허가를 필요로 한다.

 

게다가 성의 관료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기 때문에 독자들은 제레미아가 K한테 한 말들을 믿을 수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마을 사람들은 성에 대해 이야기도 하고 관료들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막상 그들이 성의 관료들과 직접 접촉하는 것이 맞긴 한지 의문스러운 경우가 꽤나 많다. 클람의 애인이라는 프리다마저도 “클람은 당신한테 절대 말 안 걸 거에요 … 나한테도 말 안 거는 걸요” (성 49)라고 말한다. 클람에게 말을 걸 수 없는데 도대체 클람이 누군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올가만이 이 수상쩍은 상황에 대해 분명히 집고 넘어간다.

 

“그가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는 마을에서 꽤 알려져 있어요. 어떤 사람들은 그를 보기도 했고, 모두가 그에 대해 들은 적도 있고, 곁눈질이나 소문이나 여러 왜곡된 이야기들을 통해 확실히 진짜 있기는 할, 클람이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졌죠. 하지만 그가 있다는 점에서만 그렇고, 자세한 부분들은 죄다 말이 달라서 클람이 진짜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를 일이에요.” (성 177)

 

클람의 생김새 뿐만이 아니라 성의 관료 체계도 수상하긴 마찬가지다.

 

“바르나바스랑 저는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요. 바르나바스가 하는 게 정말 성의 업무가 맞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고, 이게 허가를 받은 일인 건지도 모르겠어요. 바르나바스가 들어가는 부서가 진짜 성의 부서는 맞긴 한 걸까요? 만약 그렇다면 그 부서가 바르나바스가 들어가도 되는 그 부서가 맞긴 한 걸까요? (성 175)

 

그들의 의심이 합리적이라면 조수들이 클람의 대변인을 한 번이라도 만나긴 한 것인지, 바르나바스가 누구의 말들을 전달하고 있는 건지, 마을 사람들이 성의 체계를 이해는 하고 있는 건지의 여부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확실한 것은 그들이 성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로부터 일을 부여 받는다면, 그 일을 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게 조수들이 K가 어디를 가도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농을 좀 떨고, 웃기도 좀 한” 이유다. (성 234) 그들은 K가 일들을 덜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K가 갤레이터(조수들의 주장에 따르면)가 말한 것처럼 농담을 도저히 이해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임무는 실패했다. 조수들은 그들의 무능함이 아니라 K 탓을 할 작정이었다. 조수들이 불만을 털어놓을 사람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관건은 그들이 성에게 부여 받은 임무를 실패했으며, 마을 사람들은 성의 질서를 따르는 하인들로 존재할 뿐이라는 점이다. 보고를 받는 관료가 누구이든 성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는 하등의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성의 이와 같은 신비화 전략은 그들이 원하고 필요할 때 하위 가축들을 착취하게 만든다. 성과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정보의 불균형이 존재하며 이는 성의 착취를 돕는다. 상위층 사람들은 마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죄다 알고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은 K를 이미 알고 있다. 반면 마을 사람들은 성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다. 마을 사람들이 관료의 생김새를 묘사하거나 그들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지 못해 진술이 다 상반된다 하더라도, 성은 여전히 자신들의 우월한 존재를 유지하기 때문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성은 마을의 주인이며 마을의 승인 권한을 갖는다. 백작은 말 그대로 성을 소유하며 성은 마을 사람들에게 있어도 좋다는 허가(성 3)를 내린다. 마을 사람들은 그 대가로 성을 하인처럼 섬긴다.

 

이 왜곡된 상호 공존의 확실한 증거는 마을 여자들이 성의 남자들에게 성적 자원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성에 온 신사들만”을 위한 여관 (성 35)은 성의 관료들과 그 수행자들을 위해 여흥을 제공한다. 그곳에서 일하는 프리다가 K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아주 자랑스럽게 자신이 클람의 애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녀는 성에서 한 자리 차지할 생각 같은 건 없다며 더 높은 신분상승 같은 것은 바라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녀는 술집에서의 현재 위치에 만족한다. (성 39) 그녀의 엄마인 여관주인 역시 그녀의 딸이 클람의 애인이라는 사실에 아무런 부끄럼도 없으며 클람을 위해 딸이 봉사한다는 사실 자체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우리 프리다는 아주 특출나고 장해요. 나는 정말 죽을 때까지 우리 딸이 자랑스러울 거예요. 클람이 내 딸의 이름을 한 번이라도 불러봤고, 딸이 원할 때마다 클람이랑 말도 섞을 수 있고, 몰래 구멍으로 그를 쳐다볼 자유도 있다니 얼마나 영광인가요. 하지만 그렇다고 클람이 내 딸한테 말을 걸었던 건 아니지만. 이름을 불렀다고 딱히 사람들이 생각할 만한 일들이 꼭 벌어 났다고 할 필요는 없겠죠. 단순히 프리다 이름을 불렀다 (클람 머릿속을 누가 알겠어요?)는 것과, 프리다가 한 번이라도 그에게 갔다는 것 자체가 그 아이에게는 대단한 일이고, 그 아이가 어떤 문제도 없이 받아들여졌다는 건 클람에게 시혜를 받은 일이에요. 클람은 그 아이를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불렀고요.” (성 51)

 

이 여관 주인 (부부가 둘 다 여관 주인이라서 아주머니로 호칭하겠다)의 말은 두 가지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1) 독자가 이 문단에서 찾을 수 있는 첫번째 힌트는 성의 관료들에게 향한 봉사가 마을 여자들에게 엄청나게 영예로운 일이라는 것이다. 여관 아주머니가 자신의 과거를 K한테 고백할 때 그 이야기들은 분명 아주머니에게 좋은 추억들이며 잊지 못할 은혜롭고 명예로운 일들이었다. 그녀는 자기 딸은 클람에게 아무것도 받지 못했지만 자기는 선물을 세 개나 받았다며 자랑까지 한다. (성 81) 엄마와 딸이 같은 사람과 성관계가 있었을지라도 당사자들 모두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다. 이들이 이렇게 무신경한 것을 보고, 추정컨대, 독자들은 이러한 종류의 성관계가 마을에서 꽤나 자주 일어나지 않을까 상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사자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들을 관계라고 부를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클람은 마을의 애인들고 어떠한 대화도 없는 듯하다. 위의 문단에서처럼 “프리다에게조차 클람은 말을 하지 않는다.”

 

다음 인상적인 부분은 (2) 프리다가 자신을 클람의 애인이라고 할 만한 물증이 없다는 것이다. 클람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는 올가의 주장을 믿는다면, 클람이 그저 프리다 이름 몇 번 부르고 아무 일도 없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더 심하게 상상하면, 그 남자가 프리다와 여관 주인이 클람이라고 생각한 그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클람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클람에게 봉사했다는 사실을 꾸준히 강조할 뿐이다.

 

이처럼 이 여자들은 진짜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신들이 클람의 정부였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마을 사람들에게 성과 관계를 갖는 것은 영예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성의 미묘한 권력 구조와 영향력은 마을의 모든 곳에 영향을 끼치며 그들에게 실질적인 권력을 휘두른다. 특히 사람들의 말 속에서 그 권력을 확인할 수 있다. 프리다와 여관 아주머니의 정반대 격인 아말리아는 프리다의 행동 패턴을, 단순히 “모든 곳에서 들은 대로” 반복한다고 표현한다. (성 170) 프리다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들은 것을 토대로 성의 권력을 이해한 것이다. 프리다는 자신을 클람의 애인으로 소개하여 얻게 될 마을의 영향력을 바란 것이 아닐까. 이 지점은 왜 프리다가 술집에서의 위치에 만족하며 성으로 ‘올라’가려 하지 않는지를 설명한다. 그녀의 목적은 성의 권력에 의존해 마을에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남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부분은 뒷부분에서 더욱 자세히 설명한다)  

 

문제가 되는 지점은 프리다가 하는 행동이 자발적인 노예화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녀는 마을 사람들의 대표격이다. 권력으로서의 성의 이미지를 이용하면서 마을 사람들은 성에서 오는 관료들의 즐거움에 봉사할 뿐 아니라 성과 마을 간의 주종 관계 종속화에 기여한다. 그들은 성의 권력에 너무 의존한 나머지 이 구조에 자기 자신을 내던진다. 마찬가지로 성에게 권력을 부여하면 할수록 마을의 여자들을 향한 착취도 더욱 정당화된다. 올가가 여동생인 아말리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이야기할 때 독자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감을 잡을 수 있다.

 

“그 편지는 온통 야만스러운 말들로 가득했어요. 살면서 그런 말들은 들어본 적도 없고, 그 절반은 문맥으로만 짐작할 수 있었죠. 아말리아를 모르는 사람들이 그 편지를 봤다면 분명 편지를 받은 여자가 모욕 받았다고 했을 거예요. 애정 어린 말 따위는 한 글자도 없었고, 분명 구애 편지도 아니었어요. 러브레터가 전혀 아니었죠. 소르티니는 일하는 동안 아말리아가 자기 신경을 산만하게 만들었다고 아주 단단히 화를 내더군요. ” (성 192)

 

성의 관료와 마을 여자 사이의 관계는 “야만스러운 말”로 가득한, 상식적으로 명예롭다고 여길 수 없는 그러한 종류의 것이다. 마을의 여자들은 마을 관료들의 애인이나 연인이 될 수 없다. 애초에 그들의 관계는 절대 평등하지 않다. 마을은 성을 부를 수 없다. 이 관계는 일방향일 뿐, 상호적이지 않다. 올가는, “프리다와 클람 사이에 … 처음 관계는 아말리아와 소르티니의 것과 비슷했”다고 말함으로써 중요한 부분을 꼬집는다. 물론 K는 그 둘의 관계는 다르다며 이를 부정한다. (성 195) 올가는 질문한다. “클람이 프리다에게는 아말리아가 당한 것처럼 무례하게 글을 쓰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올가에 따르면 클람은 무례함으로 악명이 자자하다. (성 196) 올가는 더 나아가 클람을 “여자들을 폭군처럼 다루는 종류의 남자, 처음에 이 사람을 불렀다가 다음에는 다른 사람을 부르는 … 클람은 애초에 편지 쓰는 노력도 안 하는 사람” (성 197)으로 묘사한다. 하긴 소설 내용에 의하면, 클람은 자기 새 애인 엄마가 자기 옛날 애인이었다는 걸 신경도 안 쓰는 사람이니, 올가의 설명이 그럴 듯하다. 어쩌면 “애인”이라는 표현 자체가 프리다와 여관 아주머니를 미화하며, 성의 관료들이 하는 짓을 정당화하는 것일지 모른다.

 

마을 사람들은 착취 받는 것을 당연시하며 이를 심지어 특혜로 생각한다. 마을 사람들이 자율성을 잃고 성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게 메우 오래된 관행처럼 굳어진 듯 하다. 성이 아닌 마을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마을 사람들은 성의 수호자 노릇을 자청하며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아말리아, 벌 받다”라는 장을 보면 어떻게 마을 사람들이 아말리아의 가족들을 왕따시켰는지 전반적인 과정이 세세하게 드러난다. 아말리아의 아버지는 아말리아가 성상납을 거절한 이후에 모든 일거리를 잃는다. 아말리아의 가족들은 마을 사람들의 처벌로 고통을 받는데, 성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았다. 올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을 사람들의 냉대에 시달릴 동안 성은 우리에게 어떤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어요. 물론 우리가 과거에 성으로부터 호의를 받았다 해도 어떻게 받았는지 알 수 없으니, 지금 냉대를 받는 것도 무슨 수로 알 수 있겠어요?” (성 207) 성은 항상 저 먼 곳에 있다. 그리고 그들은 원하는 것을 요구할 때 빼고는 마을에 그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올가는 마을 사람들이 성을 두려워해서 자기 가족과 절연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올가는 마을 사람들이 자기 가족들과 다시 연결되기를 바랐다고 생각한다. 했어야 할 일은 마을 사람들에게 연락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가족은 성의 용서를 구하느라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성 208, 209) 그들은 극심한 공포에 빠져, 성이 마을 소녀인 아말리아에 관해 어떤 응답도 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성의 차별 전략은 마을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착취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마을 사람들에게 무슨 설명을 하기 위함이 아니다. 가족은 성의 권력에 사는 것이 너무 익숙해져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게 아말리아의 가족이 마을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복권시키지 못한 이유다. 이는 K의 상황과도 비슷하다. 그들 모두 성에 의존하면 안 된다는 것을 몰랐다. 그들은 성의 반응만을 기다리며 소외에 빠졌다.

 

어쩌면 외부자의 시선에서나 마을 사람들이 성에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쉬울 수 있다. 마을과 성 사이에는 매우 두껍고 왜곡이 심한 구조가 존재한다. 이 구조는 너무 심하게 비틀어져 있어서 외지인들은 이게 왜 이런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아마 그 지점이 마을 사람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왜 이방인들이 마을을 싫어하는지, 그리고 마을 사람들 역시 외지인을 안 좋아하는지 설명한다. (성 11, 14) 다른 환경에서 온 사람들은 곧 어떤 부분이 이상한지 바로 알아챈다. 이방인들은 상황파을 하기 위해서라도 마을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유심히 듣는다. 그들은 곧 성이 마을 사람들에게 언제나 모습을 감추고 있지만 모든 권력의 근원으로 작동한다는 점을 깨닫는다. 이방인들은 마을 사람들의 행동으로부터 이를 읽어낸다. 마을 사람들은 이런 환경에서 사는 것이 익숙해서 이게 문제라고 딱히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카프카는 독자들에게 이곳에서는 시공간조차 비틀어져 있으며, 마을과 성이 실질적인 차원에서도 왜곡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성으로 가는 길은 K에게 드러나지 않으며 (성 12), K에게는 얼마 안 된 시간이 어느새 한나절이 지나간 것으로 여겨진다. (성 18) 촌장은 K가 경험하는 것조차 확실하지 않다는 식으로 말한다.

 

“당신이 겪은 일들은 죄다 말도 안 되는 일들이에요. 여기 상황을 잘 모르니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전화도 마찬가지에요. 보시다시피 여기 제 집에서는, 성과 상시 연락을 취함에도 전화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 성과 주기적으로 취할 수 있는 연락망따위는 없어요. 우리가 성에 연락할 수 있는 중앙 연락처 자체가 없다고요.” (성 74)

 

이 말을 들으면, 성과 마을 사이에 직접적인 연락은 불가능한 것 같다. 다만 오로지 모호함만이 왜곡을 발생시킨다. 마을 사람들 입장에선 모든 게 수상쩍고 불확실하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파악하기를 포기한 것일 수 있다. 누구도 복잡한 일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타인에게 자치와 자립을 내주는 것은 전혀 좋은 일이 아니다. 복잡해 보이는 일들 뒤로 성이 안개 속에 서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온갖 이득을 취하고 있다. 성의 전략이 비록 가시적이지 않을 수 있으나 아말리아의 가족이 겪은 비극에서처럼 착취는 분명 일어나고 있다.

 

소외를 극복하는 방법 (1) 자기 의심

 

이러한 소외 현상을 근원에서부터 뿌리 뽑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이 글이 수차례 암시한 것처럼, 사람들은 자신들이 닿을 수 없는 것에 의존해선 안 된다. 그들은 직접 그들의 자치와 결정권한을 되찾아야 한다. 성의 종잡을 수 없는 안개 속을 뚫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유일하게 실질적으로 경험하는, 마을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지켜내야 한다. 올가가 이를 분명히 밝힌다.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자기들을 찾아주기만을 기다렸어요. 아버지가 공방을 다시 열기를 바랐고, 아말리아가 마을 사람들에게 꼭 맞는 예쁜 옷들을 다시 짜주기를 바랐죠. 우리에게 물건들을 다시 맡기기를 바란 거예요. 다들 우리를 배척하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니라,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한 거에요. 마을에서 존중 받던 한 가족이 갑자기 마을의 삶에서 배제된다는 건 모든 사람들에게 손해니까요.” (성 208)

 

그녀가 말한 이 단락에 문제를 풀 실마리가 숨어있다. 마을 사람들이 한 가족을 잃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손해”라는 부분이 그렇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성을 배제시킨다 해도 아무것도 잃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모르고 있다! 그 지점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치를 이룰 수 있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이미 자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 첫번째로 필요한 것은 자기 의심이다. 다른 말로 이는 현재 상황에 질문하는 능력이다. 이 자기 의심에 가장 좋은 예시는 이방인 K다. 그의 위치는 마을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각 그 자체이며, 그는 계속 질문을 던진다. 마을을 처음으로 방문한 그는 마을의 규칙과 정보를 알려고 노력한다. 그가 던지는 질문들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대답을 이끌어낸다. 예를 들어 K는 학교 선생한테 백작을 아냐고 물어본다. 선생은, “내가 왜 알아야 하는데?”라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성과 소작농들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도 없다”고 대화 말미에 말을 붙인다. (성 11) K의 질문은 이처럼 마을 사람들이 성과 만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이 같은 집단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질문하는 것 뿐 아니라 K의 행동들도 마을에서 그에게 가능한 일이 무엇이고 불가능한 일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연장선상이다. 그는 마을 사람들이 해야 한다는 일들을 최대한 거스른다. 하나의 예는 그가 헤렌호프(마을 관료들을 위한 여관)에 들어갔을 때이다. 주인장은 그에게 술 파는 카운터 밖으로 가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K는 하룻밤만 머물면 안 되겠냐고 조른다. 그가 집요하게 굴자 주인장이 흥미로운 말을 한다. “당신이 발견되면 나만 망하는 게 아니라 당신도 망해요. 이상하게 들린다는 거 알지만, 진짜 그래요.” (성 35) 마을 사람들은 이미 자기들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그들은 여전히 규칙을 따른다. 처벌이나 불이익을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여관 아주머니가 말한 것처럼 K는 “온갖 말썽은 다 불러일으키는” (성 50) 문제적인 사람이다. 그는 환영 받지 못하는 존재이며 마을에서 필요로 하지 않는 인간이다. 그는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토지 측량사이다. K 본인이 성의 보이지 않는 작동과 작동 오류의 한 예시다. 성이 불러 왔지만 그를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가 여기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의구심을 자아낸다. 왜 그가 여기 있는가? 왜 여기로 오게 된 것인가? 누가 그를 불렀나? 부른 게 성이라면, 왜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는가? 일련의 질문들은 현 상황을 가능케 한 권력과 승인 권한의 근본까지 파고든다.

 

하지만 비록 자기 의심이 사람들로 하여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현 상황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하더라도 여전히 한계가 있다. 이 글이 말하는 다른 두 요소가 없다면 자기 의심은 현재 지배세력의 위계질서를 답습하며 그 뒤를 좇는 데만 그친다.

 

소외를 극복하는 방법 (2) 자기 긍정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자기 긍정이다. 이는 자기 의심 안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자아를 고정해주는 역할을 한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근거를 두어야 하지 성과 같은 외부 요소에 의존하면 안 된다. 자기 긍정의 가장 좋은 예시는 아말리아이다. 그녀의 성격은 마을 사람들이나 K가 살면서 봐왔던 모든 여자들과 비교해서도 굉장히 독특하고 이질적이다. K는 그녀에게, “정말 이 마을 사람이에요? 여기서 태어났어요?” 라고 묻는다. (성 168쪽) 아말리아가 소설을 통틀어서도 오롯이 자기 긍정으로 차있는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에 상당히 날카로운 질문이다. K는 아말리아를 “너무나 사람을 능숙하게 잘 다뤄서 다른 사람들이 그녀가 연관된 일이 아니라도 그녀를 염두에 두고 일을 처리할 정도”라고 묘사한다. (성 172) 아말리아는 예외적인 존재이며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인물이기에 소르티니의 말도 안 되는 청원도 갈갈이 찢어발길 수 있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의지를 지켜내며 “성의 영향력”을 축소시킬 줄 안다. 아말리아와 K간에 다음과 같은 중요한 대화 부분이 있다.

 

“정말 그런 소문들이 당신에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마을 사람들 중에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죠. 당신네 두 명 (올가와 K)처럼 서로 머리 맞대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수다 떠는 사람들 말이에요. 그런데 당신이 그런 사람들 같을 줄이야.” K는 “맞아요, 제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소문에 관심을 안 가지고 남들은 어쩌든 나 몰라라 하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내 관심 밖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렇군요.” 아말리아가 말했다. “정말 다양한 종류의 관심사가 있긴 하죠. 그런데 그거 아세요? 옛날에 성에 대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생각하던 젊은 청년이 있었어요. 다른 건 신경도 안 쓰고 그러고 있으니 마을 사람들이 온통 걱정했죠. 성에 마음을 온통 빼앗긴 것처럼 굴었으니까요. 나중에 알고 보니 성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었어요. 성의 사무실에서 일하는 청소부의 딸 때문에 그랬던 거죠. 나중에 결국 그 청년은 그 딸과 잘 풀렸고, 모든 게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어요.” (성 206)

 

아말리아는 전체 이야기에 많이 등장하진 않지만 자기 긍정의 모범 그 자체다. 그녀는 루머나 소문 같은 정확하지 않은 이야기들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그러한 소문들은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발휘하는 성의 분리전략 중 하나다. 보이지 않는 말들은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더욱 큰 힘을 갖는다. 아말리아는 일부 사람들이 소문을 떠들어대며 즐거움을 얻는다는 사실을 안다. 흥미롭게도 K는 자신도 그런 부류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소문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남들은 어쩌든 나 몰라라 하는” 태도와 다름 없으며, 이는 공동체의 일원이라면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는 그의 가치관을 보이기도 한다. 다르게 말하면, 그가 소문을 좋아하는 마을 사람들처럼 남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굉장히 신경 쓴다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말리아가 비판한 것처럼 소문들은 틀릴 수도 있다. 소문들을 통해 사람들은 타인의 의도를 멋대로 짐작한다. 마을 사람들에게 말이란 것은 실제 상황에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인데, 문제는 그들이 진실에 다가갈 의지도 힘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성의 입장에서는 신기루 같은 공포를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키기에 적합하다. 사람들은 소문을 통해 성에 대한 섣부른 판단을 내린다. 소문의 이야기가 어떤 명확한 증거도 없는데도 거기에 살을 붙이고, 그에 기반해 자신들이 따라야 할 규칙들을 만들어내기도 하다. 이처럼 이러한 소문이 진짜가 아닐 수 있음에도, 사람들은 지레짐작으로 더욱 움츠러든다.

 

사람들은 자신의 감각과 결정을 따라야지, 타인의 환상을 쫓아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환상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설령 성의 관료들이 요청했다 하더라도 무례한 요청은 무시해야 한다. 그래야 특히 소문 떠들어대는 것을 좋아하는 마을 사람들의 자발적인 노예화를 막을 수 있다. 근거 없는 무형의 힘을 두려워 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게 아말리아가 어떻게 프리다랑 다른지의 차이다. 프리다는 자신의 행동에 마을 사람들로부터 들은 바를 그대로 반영하는 사람이다. (성 170) 프리다는 다른 사람들의 소문에 자신을 포함시키는 법을 안다. 사람들이 그녀를 클람의 애인이라고 인식하게 만듦으로써 그녀는 스스로를 성과 연결짓는다. 페피가 K와 프리다에 대해 해준 긴 이야기는 프리다가 클람의 애인이라는 소문을 통해 이득을 봐왔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그녀가 클람의 애인이라는 소문에는 다른 사람들이 제시할 만한 어떤 근거가 있지 않고 오로지 프리다의 진술에만 의존할 뿐이다. (성 298) 프리다의 권력은 사람들이 그녀를 클람의 정부라고 이야기하는 것으로부터 발생한다. 페피에 따르면 프리다는 더 이상 자신이 사람들한테 매력적이지도 않고 영향력도 없음을 눈치채고 작전을 바꿔야만 했다. 페피는 말한다. “프리다는 갈수록 사람들이 자기를 예전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어요. 클람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들을 언제나 계속 만들어낼 수는 없는 거잖아요. … 그래서사람들 사이에 스캔들을 불러일으키기로 작정한 거죠.” (성 300) 페피 말이 사실이라면 프리다는 참 안타까운 존재다. 클람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여자 밝히는 성의 본성에 의존하는 것이다. 남자들로부터 얻은 명성이 없으면 그녀는 아무런 밑천도 가지지 않는 것이다.

 

K가 비록 페피의 이야기를 부정하지만 (솔직히 어떤 사람이 결혼 사기극 피해자로 전락하고 싶겠는가?) 페피가 프리다에 대해 제시하는 설명이 올가의 이야기와 더 맞아 떨어진다. 올가와 아말리아는 3년 전에는 “사람들로부터 존중 받는 아가씨들이었고 프리다는 브릿지 여관에서 하인으로 일하는 무시 받는 여자”였기에 그들은 “프리다를 보지도 않고 지나쳤”었다고 말한다. (성 200) 프리다는 K한테 “그 여자(올가)와의 관계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 집에 가서는 당신 옷에 그 집 부엌 냄새를 잔뜩 묻혀온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정말 모욕이라고요” (성 247)라고 말한다. 프리다가 그들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들이 프리다처럼 믿을 구석 없는 사람들이라서가 아니라, 자기들 두 발로 충분히 서는 자립적인 존재들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이 말이 맞다면 프리다는 사실 너무나 연약한 존재 아닐까? 페피가 생각하는 것처럼 전적으로 거짓말만 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프리다도 자기의 상황이 싫어서 벗어나고 싶어할는지도 모른다. 프리다가 “나는 토지 측량사랑 같이 있어요!” (성 44)라고 부르짖는 장면에서는 거의 클람으로부터의 해방감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후반부에서 프리다는 다시 옛날의 자리로 돌아간다. 페피가 말한 것처럼 프리다는 이미 처음부터 모든 것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녀의 처음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여전히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하며 권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는 프리다가 이미 외부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소외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자기 긍정 역시 이 하나로는 충분하지 않다. 마을의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점에서 자기 긍정은 자기 의심처럼 불완전하다. 만약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그렇지 않은데 단 한 사람만 자기 자신에 긍정적이라면, 그 한 명은 오만한 사람으로만 보일 뿐이다. 이 부분이 올가가 후회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과거에 자매는 프리다에게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성 200) 올가는 가족에게 닥친 일에 대해 프리다를 포함해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그저 마을의 구조에서 살아갈 뿐이다. 그들은 이 소외를 어떻게 끝낼 수 있는지 그 방법은 알지 못하며, 지배 질서에 자신들을 맞춰 살아갈 뿐이다.

 

소외를 극복하는 방법 (3) 연대

 

본고가 제안하는 마지막은 연대다. 연대는 한 명의 개인이나 한 가족만이 아닌 모든 공동체 구성원 전부를 아우르는 넓은 개념이다. 아말리아의 가족에게 없었던 것이 바로 이 연대다. 아말리아와 그녀의 가족들은 이미 서로를 충분히 존중한다. 올가는 자기 자매를 “영웅”이라고 표현한다. (성 194) 아말리아가 소르티니의 청을 거절하는 바람에 완전히 낙오자가 된 그녀의 아버지조차 “가장 힘든 시간에도 아말리아를 비난하는 말은 절대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성 207) 하지만 그들은 마을로부터 스스로를 배제시켰고 처벌로서 모든 일을 받아들였다. 더욱 최악인 것은 그들이 “성의 용서”를 구했다는 것이다. (성 212) 이건 마치 그들이 아말리아가 잘못했고, 그들은 처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안타깝게도 성은 그 어떠한 긍정적인 미래를 약속하는 소설은 아니다. K의 실패와 아말리아의 가족을 기다리는 희망 없는 우울함만이 자리할 뿐이다. 마을 사람들 간 가능한 연대를 이야기하는 부분은 분명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만약 성의 이야기에서 연대를 끌어내려 한다면 그는 합리적인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이 글은 마지막 해결 방식을  카프카의 다른 소설인 “유형지에서”로 끌어내고자 한다. 이 소설에서는 성에서 나오지 않는 연대가 언급된다. 다른 카프카의 많은 소설들과 다르게 이 단편 소설은 구체제의 낡고 잔악한 제도가 폐지되는 전환기를 다룬다. 이야기에 나오는 두 명의 등장인물은 장교와 여행자이다. 소설에서 장교는 열정적으로 여행자에게 전임 사령관이 발명한 처형 장치의 작동원리를 설명한다. 새로 부임한 사령관은 이 비인도적인 처형 방식을 반대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의 그런 조치에 찬성하는 지지자들이 여자들(women, ladies라고 표현됨)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벌써 구토물이 기계 장치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 이게 사령관 탓이야!” 장교가 소리를 질렀다. 그는 멍한 얼굴로 바로 앞에서 동으로 만든 막대를 흔들었다. “내 기계가 무슨 마굿간마냥 지저분해졌어!” 손을 벌벌 떨며 그는 여행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여주었다. “내가 사령관한테 사형 직전 날에는 절대 사형수한테 음식을 주면 안 된다고 그렇게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했는데도 말이야! 새로운 사람은 새로운 규칙을 따른다 이거지. 사령관 옆에 붙어있는 그 여자들이 이 자식의 배대까리에 온갖 달콤한 것을 처맥였어. 이 인간 평생에 비린내 나는 생선 아니면 다른 걸 먹어본 적이 없는데, 단 걸 먹었으니!”  (유형지 208)

 

분명한 사실은 장교가 새 사령관과 그의 지지자인 여성들이 단 걸 먹이는 바람에 사형수가 토했다고 탓을 한다는 것이다. 장교는 여자들이 사령관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말한다. (유형지, 209) 독자들은 그의 말에서 이 여자들이 적극적으로 전환기를 이끌어내는 주역들임을 짐작할 수 있다.

 

왜 여자들은 사형수가 죽기 하루 전날에 디저트를 준 것일까? 보통 달달한 음식들은 설탕으로 만들어지는데, 설탕 가격이 싸지고 흔해진 것은 비교적 최근 일이다. 단 음식들은 생존에 필요한 음식이 아니라 말 그대로 미식을 위함이다. 게다가 장교가 말한 것처럼 사형수가 평생 생선만 먹었다면 단 음식은 그에게 매우 호화로운 음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독자인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여자들이 곧 죽을 사람을 위해 준 게 디저트였다는 것이다. 이는 동정의 표현이요, 사형수가 죽기 마지막에 조금이라도 기쁨을 누리기를 바란 것이며, 동시에 아무것도 먹지 말라고 명한 장교를 향한 저항인 것이다.

 

독자들은 소설에 언급된 여러 상황들을 고려하여 왜 여성들이 연대를 통해 저항하는지 그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잔인한 사형법은 전임 사령관이 고안한 이후로 꽤 오래 지속되어왔다. 장교의 다음 말에서 이를 유추해볼 수 있다. “수백명이 파리떼처럼 구덩이 옆에 모여 있던 옛날 같진 않아도,시체는 불가해한 방식으로 사뿐히 날아 구덩이에 떨어졌다.” (유형지 211) 게다가 사형수에게는 자신을 변호할 기회따위 없다. (유형지 198) 더욱이 행한 것에 비해 처벌이 가혹하다. 그의 죄목은 “보초로서 얌전히 서서 경계를 삼엄히” 하지 못한 주제에, 상사에게 산 채로 먹어버릴 거라 고래고래 소리 지른 것이다. (유형지 199, 200)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분명 죽은 사람 중에는 억울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잡범도 섞여 있을 것이다. 추가적으로 이 유형지는 섬이라서 지리적으로 외부와의 왕래가 힘들다. (성 212) 이런 여건을 생각하면 이때까지 죽은 사람들은 마을에 사는 여자들의 아들, 남편, 형제들일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즉, 모두 다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정을 전제하면 왜 연대를 형성한 여성들이 사람들의 죽음을 자신들의 손해로 여겨 막으려는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그들에게 이 일은 이미 오래동안 발생한, 그들이 참아내고 견뎌내야만 했던 일인 것이며, 그렇기에 그들이 장교에게 저항하는 것이다. 이 여성들은 개인이 아니며, 연대의 형태로 움직인다. 특정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 이 “여성들”은 사령관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며 (유형지 210) 뜻을 모아 사형수에게 선물을 준다. (유형지 222)

 

줄이면, 소설 “성”에서 마을 사람들이 창출해낸데 실패한 것이 바로 이 연대다. 사람 간의 진정성은 일상의 관계들로부터 생겨난다. 이 관계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소외시키는 것이야말로 지배 계층이 원하는 것이다. 성과 관료들은 마을 사람들의 일상과는 거리가 멀어 마을 사람들을 위한 절대적 권한으로 기능할 수 없다. 마을 사람들은 소외에 빠져 있는 스스로를 관조하지 못하고 노예로 전락하여 성적 착취를 은혜로 착각한다. 올가의 증언처럼 마을 사람들은 성의 영향력을 두려워 하며 성을 강력하다고 믿고 따른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한 가족을 잃는 것이 마을의 손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소설 “유형지에서” 일어난 일은 소외 상태에 빠진 마을 사람들과 K에게 그 상태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지침서가 될 수 있다.

 

본질적으로, 카프카의 우울함을 달래주는 길은 마을 사람들의 소외를 해결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의 병은 개인이 수동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아무런 설명도 없이 상위 질서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상황에서 연유한다. 다르게 말하면, 카프카는 성과 같은 강력한 위계질서에 의해 일방적인 폭력을 당하고 있어 괴로운 것이다. 모든 종류의 악몽에서 우리는 말도 안 되고 별 것도 아닌 것들의 기준을 우리가 만족 시킬 수 없다는 점에서 고통스러워 한다. 그러나 우리보다 우월한 존재도 아닌 자들에게 농락 당할 이유가 하등 없다. 모습을 보이지 않고 명령질만 하는 사람은 무시해야 마땅하다. 어처구니 없는 권력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허상의 질서에 가담하는 공모자가 되는 것과 다름없다.

 

겉으로만 그럴싸한 힘에 반항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저항전략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권력의 발생 지점을 찾아내기 위해 자기 의심을 실천해야 한다. 이는 해방에 필수적이다. 때로 외부인의 시선이 도움이 된다. 당연해 보이는 것이 사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하지만 단순히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다음 단계는 자기 긍정으로서, 중요하지 않는 소문에 신경 쓰지 않고 자기 할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부모와 가족을 신경 쓰는 것처럼, 자신이 해야 할 일만 묵묵히 하면 된다. 그래도, 자기 긍정이 굉장히 긍정적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변화가 하나 더 필요하다. 그것이 연대다.

 

성에 나오는 사람들과 카프카의 다른 소설들에 나오는 인물들은 자신들에게 발생한 비극을 극복해내지 못했다. 카프카 자신도 우울함을 떨쳐내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야기들은 강력한 질서의 피할 수 없는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그마한 가망성을 드러낸다. 은밀하게 감쳐진 권력은 카프카 소설의 모든 곳을 관통하며 흐른다. 사람들은 영향력에 압도되어 있지만, 그 힘이 어디서 오는지 알지 못한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충실히 권력을 사수한다. 더욱 영광스러운 노예가 될수록 소외 속에 침잠한다. 이것이 K가 항상 실패하고 소외 당하는 이유다. 완벽히 혼자가 되어 문제를 해결해 보려 하지만 충분치 않다. 그는 도움을 필요로 한다. 아말리아의 가족들이 이웃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마을 사람들이 성의 권력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 눈떠야 한다. 성의 영향력으로 그들이 손해보거나 희생을 감내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뭉쳐서 함께 저항해야 한다. 마치 유형지에서의 여성들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그때가 바로 사람들이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고 소외에서 해방되는 순간이며- 그 때가 오면, 모든 안개들은 걷혀지고, 마을 사람들은 그제야 – 아, 성은 저 위에 있지 않았구나!- 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Reference

Kafka, Franz, Willa Muir, and Muir, Edwin. The Castle. New York: Knopf, 1992. Print. Everyman's Library ; No. 127.

Kafka, Franz, and Joachim Neugroschel. The Metamorphosis, In the Penal Colony, and Other Stories: With Two New Stories. First Scribner Paperback Fiction ed. 2000. Print.

Marx, Karl. [1837-1894] 1978. The Marx-Engels Reader. 2nd edition. New York: Norton.

Rousseau, Jean-Jacques. [1754-1762] 2012. Basic Political Writings: Discourse on the Sciences and the Arts, Discourse on the Origin of Inequality, Discourse on Political Economy, on the Social Contract, the State of War. Cambridge: Hackett Publishing Company, Incorporated.

 

 


내가 영어로 쓴 글을 한글로 직역하고 다시 따로 엄청 다듬었다. 써놓고보니 내가 많이 허술하게 썼구나 싶더라. 디테일한 점들에서 이 문장들이 왜 나오는 거지 여기서?? 이런 게 많았다.ㅋㅋㅋㅋㅋ

아 그리고 영어 원서로 읽었기 때문에 카프카 영어 원서도 내가 따로 번역했다. ㅋㅋㅋ 에러 작렬로 예상해본다 ㅋㅋㅋ 번역 너무 어려워.. 왜냐면 내 영어실력이 고대로 뽀록나니까.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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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홉스의 Leviathan을 꾸역꾸역 영어로 읽었다. 18세기인가 옛된 영어라서 읽는 데 시간이 더 걸렸다. 학기에 읽지 않는다는 걸 알고 절반 정도까지만 읽고 접어버리긴 했는데, 재미없어 꾸덕꾸덕 읽어도 가끔 많은 부분에서 홉스의 현대 서양에 대한 영향력을 읽어낼 때마다 매우매우 인상적이었다.

은근 집요하게 사소한 것부터, 인간과 감각부터 정치론까지 파고 들어가는 그의 이론을 죽 읽다보면, 사실 그의 생각 자체가 흥미로운 점이 아주 많지는 않아도, 기본적으로 홉스란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잘 이해가 된다는 최장점이 있다. 

홉스가 인간의 능력에 대해 딱히 긍정적이었다고 볼 수는 없고, 인간이 많은 한계를 가졌기 떄문에, 인간 본성에 대해 두려움이 많았다는 점이 나는 근본적으로 그를 이해하는 하나의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과학적 이성, 국가, 종교가 그에게 왜 필요한 존재인지, 그리고 더 나아가서 특히 국가라는 지점에서, 왜 commonwealth가 필요하고, 인간 개별로부터 독립된 객관적 존재를 필요로 하는지까지 나아간달까? 즉, 그에게 인간은 너무나 불안정하고 너무나 주관적인 존재라서 객관타당한 존재를 상정하여 공동체 운영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인간에 대한 불신은, 결국 인간 개별이 자신의 권리를 자연스럽게 포기하여 그것을 국가에게 양도하는 시스템으로의 전환을 낳게 한다. 이것만이 우리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홉스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치를 떨고, 인간은 미개하고 가망성이 없어서 힘으로만 다스려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사람들. 

사람들의 이중성이 너무나 재밌는 이유는, 사람들은 개돼지라는 말을 들으면 발끈하지만 사실 한편으로는 인간 계급을 나누며 개돼지와 다를 바 없는 자신들의 행태를 곧 인정하는 경우도 꽤나 많다는 것이다. 즉, 상황에 따라 이중적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열받지 않거나 자신이 이득을 보는 상황이면 개돼지라는 말을 쉽게 한다. 


이 자학적이고, 겁많은 인간 본성에 대한 두려움은 홉스에게 있어 우리가 우리 개인의 자유를 일정 정도 양도하고, 사리분별을 파악할 객관성의 권위를 제3의 기관에게 넘겨버리게 하는 근거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나는, 저번에 내가 읽었던 Purcell (2016) 논문에 동의하면서, 홉스 식의 사회계약론이 우리로 하여금 자율성을 상실하게 하고 엘리트 통치의 정당성과 국가 권력의 강대함을 승인하는 기능으로 전락했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런데 홉스가 기반으로 하는 이 근거가 사실 얼마나 빈약하고 비객관적인가? 

우선 홉스 말을 따르면, 인간 지식과 애초에 그 지식을 습득하는 인간 신체기관과 인식기관이 그렇게나 오류에 취약한데, 그 기관들로 축적된 인간 지식, 즉 과학으로 하여금 객관성을 습득하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 

또한 가상적 사회, 모두가 모두의 적이 되는 그러한 상황에 대한 가정은 사실 그의 어림짐작 뿐 아닌가? 공포에 가득찬 두려움 뿐 아닌가? 그의 두려움이 기정사실이라 쳐도, 우리에게 국가라는 제3 기구에게 우리의 권리를 양도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것이 옳을까? 그저 국가권력의 정당화 뿐 아닐까?


아무튼, leviathan에 대한 질문은 많이 생성시켰는데, 내가 오늘 글에서 마키아벨리 군주론과 연결 시킬 지점은 바로 그의 논의, 즉 공과 사의 개념이 분리되어 도출된다는 주장이다.

27번 글에서 그는 앞에서 말한 일련의 과정, 즉 불안전한 개인의 한계로 인해 개인들이 권리를 몰빵해서 발생하는 공의 개념이 생겨 공적 범죄와 사적 범죄가 생긴다고 표현하다. Public crime / Private crime 

내가 이 논의를 받아들이면 결국 공과 사의 개념은 우리 인간이 인간 개별의 상호작용 과정과는 별도로 운영되는 정치공동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생기는 부산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었다. 별로 이 책에 대해서 딱히 많은 할 말이 있지는 않다. 단지 내가 앞에서 말한 공과 사의 구분 개념과 관련하여, 흥미로웠던 지점은, 이 책은 우리가 소위 도덕을 정치 영역에서 분리시켜야 한다고 설파했다는 점이다. 그는 좋은 정치인이란, 보통 그 시대 인간들이 생각했던 악덕에 가까운 행동들은 만약 원하는 목적에 부합하는 이득을 주는 효과적인 것들이라면 고려해야 할 뿐 아니라 시행하는 것도 주저해선 안 된다고 본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그래서 어떻게 보이냐에 치중한다. 그에게는 자신이 점령하는 성/도시국가에서의 주민들로부터 사랑받는 것이 필요하다. 그들에게서의 사랑은 한편으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어렵다. 그리고 사랑받는 것에 실패하면 적어도 두려움의 대상이라도 되어야 한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주장이다. 


나는 이러한 마키아벨리의 주장이 가능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공과 사가 구분되었다는 그 개념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이중인격이 가능한 이유는 자신의 한쪽 얼굴을 다른 한쪽 면에서 가릴 수 있기 때문에 가식과 위선이 통하는 것이는 것이다. 가식과 위선이라는 말이 너무 가치중립적이지 못해 불편하다면 타고난 정치적 감각을 발휘할 수 있다는 표현으로 바꾸어보자.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도 좋을 것이다. 그게 왜 가능하느냐. 상황이 확확 바뀌는 공적 상황과 사적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전제가 있다는 것이다.


3.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자. 

나는 이 논의가 과연 현대 정치에 부합한가? 고민을 해보았다. 별로 아닌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최근 미투운동에서부터 심지어는 트럼프까지, 모든 종류의 정치와 공동체 이슈를 보자.

아니면 한국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에 핏발 서는 모습을 관찰해보자.

예를 들어 군대를 안 간 연예인 (공)은 엄청나게 비난 받고 심지어는 연예계 활동(사)에도 지장을 받는다.

왜 그런 걸까?

나는 사람들이 멍청해서라고 보지 않는다.

그게 아니다.

공과 사가 대체 얼마나 갈라지는 것인가? 

이 질문을 생각해보면 사실은 그것만큼 애매모호한 게 없기 때문이다. 

이것만큼 인위적인 구분이 없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나 홉스 시절, 왕정 시절에는 사실 이게 어느 정도 가능했다. 아니 심지어는 내 보기에 90년대까지 한국에서도 이게 가능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 이슈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도껏 해봤자 카더라 통신 어디 뉴스 정도였고, 소위 인터넷의 파급력이라는 게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거의 모든 사람들의 정보를 가지고 있는 그러한 시대가 도래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냐, 우리가 "일군의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을 만큼" 격변하는 상황 속에서 당신이 취할 모든 얼굴들이 다 까발려지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저 위쪽에서 행한 일이 아래쪽에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제는 오른쪽에서 한 일을 왼쪽 사람들이 알게 된 세상이 온 것이다.

기술이 하도 발달해서, 모든 것을 연결시키고 다 빠르게 접목시켜놓으니, 우리에 관한 정보들과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융통되고 알려지고 심지어는 가공까지 되는 시기로 온 것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현대 정치의 신도덕론은, 다름 아닌 푸코가 말했던 자기윤리/자기배려의 시대로의 귀환이다.

나의 현재 생각은, 우리가 고대그리스 시절로 귀환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그것도 매우 역설적인 도식으로 말이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연결되고 있고, 그만큼 자율적일 수 있으나, 그만큼 자율을 포기하는 구조 속에 살고 있기도 하다. 

취해야 하는 가면이 많아지고, 공과 사의 구분이 엄격하면 엄격할수록 자율성은 저 멀리로 날아간다. 

정치구조는 그 구조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그 구분이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기득권을 누리던 엘리트들의 입지는 사라지니까.

인터넷 어딘가의 누군가가 저 상아탑의 전문가보다 더한 전문가일 수 있게 된 이 시대가 온 것이고, 이제 소위 정치인/고위층들은 우아한 고급 귀족으로서 항상 근엄하고 인자한 얼굴을 취할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뒤에서 갖은 욕과 갑질을 하는 모습들이 우리들 카메라로 찍혀 세상에 나뒹굴 테니까.


이런 시대에 취해야 하는 소위 "정치인"의 모습, 혹은 정치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취해야 할 참된 정치의 신도덕론적 방향은, 말한 것처럼 자기윤리, 자기배려, 우정의 자기자율의 힘으로 스스로가 스스로를 재창조하고, 살피고, 그 맥락에 따라 움직이며, 파레지아(용감한 말하기)를 실천하는 언행일치하는 자의 얼굴이다. 이때의 그 얼굴은 모든 면에서 분리된 "현대인"의 얼굴이 아니다. 그는 어디에서나 자유로운 "나"의 얼굴인 것이다.


4.


언급된 참고문헌


Mark Purcell  (2016) "For Democracy: Planning and Publics without the 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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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obbit & The Lord of the Rings Boxed Set (Multiple-component retail product, slip-cased)
J. R. R. Tolkien 지음 / HarperCollins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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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반지의 제왕"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반지의 제왕" 이야기를 하면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마 오늘의 이 글만으로도 끝나지 않으리라.


1. 이게 어떻게 꿈일 수가 있죠?


2001년 겨울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를 본 10살짜리 꼬맹이는, 영화가 3부작임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프로도와 샘의 뒷모습부터 모르도르의 어두컴컴한 배경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에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충격을 받았다.


2002년 2편이 영화 상영되기까지 그 1년 간, 내 기억에 따르면, 나는 "반지의 제왕" 책들을 전부 다 읽었다. 그 책의 출판사가 황금가지였나, 1권부터 6권까지 출판된 책을 사서 다 읽었다. "호빗"도 읽었다. "실마릴리온"도 읽었다. 그렇게 중간계의 역사를 다 꿴 꼬맹이는 2편 영화를 10번? 20번? 영화관에서 보았다.


3편이 나오기 전까지는 1편과 2편의 확장판까지 구입해서 메이킹필름까지 확인했다. 


개인적으로 영화 3부작 중 최고는 2편, 두 개의 탑이었다. 왜냐하면 그런 순간 있지 않은가. 사과 첫 맛은 너무 신데 맨 마지막 맛은 너무 물려서 먹기 가장 좋은 건 중간쯤인 것. 순전히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십대 때 나는 많이 연약했다. 처음 만나는 세상의 추위와 나 자신의 다름을 어떤 식으로 해결해야 할지 모르는, 전형적인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었달까? 그럴 때 나는 판타지 세계로 깊이 침잠했다. 일본만화 나루토, 소설 반지의 제왕을 읽으며 그들의 세계관과 역사 속에 빠져들었고, 상상 속에서는 그러한 역사 속의 영웅이었다.


한 번은 너무 심하게 이 현실을 탈피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고, "반지의 제왕"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심하게 해서, 꽤나 우울해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의 초연함, 강함 그리고 자연 속에서의 영성을 부러워 했던 것 같다.


2.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다시 접하면서 새롭게 "반지의 제왕"을 마주하기 시작하다


물론 어렸을 때도 "반지의 제왕"을 영어로 읽으려 한 적이 있었다. 호빗을 아주 재미나게 읽진 않았기 때문에, 가장 좋아하는 반지의 제왕을 읽으면서 영어공부를 해야겠다는 야무진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너무 어려웠다. 사실 그 나이 때는 반지의 제왕을 한국어로 읽는 것도 마냥 쉽지는 않았다 (맙소사, 지금 생각해보니 초등학교 4학년에서 6학년 때 일이다!) . 


다만 읽으면서 이 이야기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구나.. 감탄을 할 뿐이었다. 매우 고풍스럽고 우아했다. 비교하는 건 적절하지 않겠지만, 동시대에 유명했던 환상소설인 해리 포터가 현대물과 같은 느낌이라면, 반지의 제왕은 정말 아름답지만 섬세하고, 신화 같을 때도 있지만 동시에 인물들이 우리와 같이 느껴질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한국어로 읽을 때도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최근, 나는 갑자기 "반지의 제왕"을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강하게 했다. 시간 여유가 있는 연말/연초에는 3부작 영화를 한 번에 몰아보는 것이 백미지! 그리고 선택된 것이 고전 중의 고전이었던 것이다. 수첩을 보니 4일 날 그렇게 몰아본 이후부터, 여운이 가시지 않아 소설 반지의 제왕을 집게 되었다. 물론 이번에는, 영어로 말이다.


그런데 영어로 읽으니, 왜인걸, 아주 많은 생각이 머릿 속에 엉키게 되었다.


3. 본질, 선과 악, 그리고 나는 간달프의 말을 드디어 마음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우선, 다시 읽기 시작하는데, 한국어를 읽는 것만큼 속도가 빠르진 않지만, 소리내어서 읽다보니, 이 글이 얼마나 수려하고 아름답고 운문체인지 절감하고, 또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렸을 때는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았던, 간달프의 말을 드디어 마음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I wish it need not have happened in my time,’ said Frodo. ‘So do I,’ said Gandalf, ‘and so do all who live to see such times. But that is not for them to decide. All we have to decide is what to do with the time that is given us.

; The Lord of the Rings: The Fellowship of the Ring, The Two Towers, The Return of the King (p. 51). HarperCollins Publishers. Kindle Edition.

 [번역(내 맘대로 엄청 의역)]

프로도가 말했다. "우리 시대에 이런 일들이 일어날 필요가 없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나도 그렇다네." 간달프가 말했다. 

"이러한 시대를 겪어야 하는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겠지. 그러나 선택권은 없네. 주어진 시간 안에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의 문제만 빼고." 


‘No, and I don’t want to,’ said Frodo. ‘I can’t understand you. Do you mean to say that you, and the Elves, have let him live on after all those horrible deeds? Now at any rate he is as bad as an Orc, and just an enemy. He deserves death.’ ‘Deserves it! I daresay he does. Many that live deserve death. And some that die deserve life. Can you give it to them? Then do not be too eager to deal out death in judgement. For even the very wise cannot see all ends.

; The Lord of the Rings: The Fellowship of the Ring, The Two Towers, The Return of the King (p. 59). HarperCollins Publishers. Kindle Edition. 

 [번역(내 맘대로 엄청 의역)]

"아니요, 그러고 싶지 않아요." 프로도가 말했다. "간달프 당신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골룸이 그런 끔찍한 일들을 저질렀는데도 엘프들과 간달프 당신이 골룸을 살려줬다는 거에요? 하여간 지금 골룸은 오크만큼이나 사악한, 그저 적에 불과할 뿐이에요. 죽어도 싸다고요."

"죽어도 싸다고! 그렇다고 말할 수 있지. 살아있는 많은 이들이 죽어 마땅하고, 죽은 자들이 살아 마땅한 경우가 있으니. 자네가 그들에게 삶과 죽음을 나눠줄 수 있기라도 한가?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성급히 누가 죽어야 할지 정해 놓지 말게. 매우 현명한 자들도 끝을 이야기할 수 없는 법이니까."


옛날부터도 생각한 거지만, 간달프는 우리 마음의 희망을 대변하는 존재다. 그리고 희망은 간달프가 가진 지혜, 더 큰 것을 조망할 줄 아는 제3의 눈으로부터 온다. 

왜냐하면 희망을 없애는 것은 두려움과 좌절인데, 두려움과 좌절은 이성을 상실하고 눈이 멀어 한치 앞을 보지 못할 때 찾아오기 때문이다. 


위의 대화 중 첫번째에서 보여지듯이, 진정한 현자는 한탄하며 현실을 피하지 않는 법이다. 현실을 돌파할 뿐이다. 인간과 세상의 본질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 인간과 세상은 잡탕이다. 선과 악이 회색지대로 섞여 있어 그것들을 구분해 내는 방법이란 애초에 없다. 선이 얼굴을 돌리면 악이 나오고, 악이 얼굴을 돌리면 선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처음부터 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밖에 없다. 바로 "나의 선택에 따른 행동" 뿐이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우리는 아는 것이 많지 않다. 소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방치하면 언제나 우리는 자기도 잘 알지 못하는 선택을 하고, 옳지 못한 선택에서 자신으로 말미암은 행동의 결과도 책임질 준비가 되지 못하여, 결국 추락하고 타락한다. 


그래서 진정한 현자는 항상 몸을 낮춘다. 언제나 잘못되고 그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아니까. 그리고 진정한 선인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항상 수련하고, 공부하고, 연마할 것을 주문한다. 학식에 갇혀서 몸이 묶여 지식의 죄수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읽는 한 글자를 몸에 체득하여 그것을 언제든 "증명"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간달프가 말했듯이, 그 시험의 순간이 언제인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다. 다만 그 때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위해 매사 살아나갈 수 있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다시 생각해보면 시험의 순간은 언제나 항상, 매분매초이다. 


또한 두번째 대화에서 간달프는 끝을 성급하게 재지 말라고 주문한다. 이는 간달프가 왜 호빗들에게 절대반지를 맡겼는지, 왜 자신은 절대반지를 맡지 않으려고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사실 이 문제는 실마릴리온 역사를 살펴보면, 그리고 고금의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원래 자기 자신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쉽게 타락한다. 가장 높이 나는 자들이 가장 높은 데서 추락하는 이치다. 그리하여 동양에서도 어려서 출세한 경우, 부모가 영향력 있는 경우, 재능이 뛰어난 경우를 경계한다. 왜냐하면 너무 빨리 자기 그릇에 충분치 못한 것을 받아들일 때 균형을 쉽게 잃기 때문이다. 


아라고른의 경우를 생각해도 그렇다. 그는 두네다인 족장이고 고귀한 혈통이지만 방랑자로서의 온갖 위험한 역경을 거쳤고, 익명에 숨어 오롯한 자기 자신을 증명하는 수많은 과정을 거쳤다. 그가 그렇기에 인간 중에 최고의 인간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왜 온갖 영웅들에게 시련이 필요한지 그 이유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성숙할 많은 기회들 속에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가장 좋은 배움은 자기 자신이 뛰어나다고 혹은 열등하다고 주입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좋은 배움은 이 세상이 얼마나 넓고 얼마나 아름답고 배울 것이 많은지, 그리하여 자기 자신이 얼마나 작고 작은 존재인지, 그러나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나만의 무엇인가로 자라나서 다시 그 넓고 아름다운 세계의 일부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그러한 성질의 배움이다.


힘이 크고 재능이 뛰어난 이들은 절대반지를 맡지 않는 것이 자기 자신을 증명하고, 균형점을 유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현명한 만큼 자기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평화 속에서 소박한 것들만 바라는 것이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관습이 된 호빗들이야말로 절대반지의 악에서 강하게 버텨낼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물론 골룸이라는 개별차가 있긴 하니 일반화 시킬 수는 없지만, 소박하고 아름다운 백엔드의 삶을 사랑한 프로도와, 정원사로서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는 것을 소망한 샘을 생각하면,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그리고 가끔은 이러한 소시민이 왜 필요한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 진짜로 강한지, 약한지, 어리석은지, 현명한지는 매사 그 순간마다 결정되며, 그 끝은 결국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다. 

타락은 대단한 것이 아니며, 당장 내일 아침 오른쪽 길로 갈지 왼쪽 길로 갈지 정도의 문제다. 

그러니 우리도 타인을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비난은 쉽지만, 그 사람의 입장에 선다면, 당신도 똑같이 행동할 확률이 높다. 

그러고 싶지 않다면, 부단히 노력하고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결국 우리는 타인을 쉽게 비난할 근거를 상실할 것이다. 노력과 증명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그 안에 자리한 선과 악이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함을 직면할 터이니. 


4. 그가 노래한 순간, 세상이 만들어졌노라- 환상과 현실의 경계 속에서


"반지의 제왕"을 소설로도 읽고, 영화로도 읽으며 생각한 것은, 이야기의 창작이 바로 나의 논문/연구와도 그렇게 분리되어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피터 잭슨은 어떻게 이렇게 원작을 토대로 영화화를 잘 할 수 있었을까? 물론 잭슨과 그 제작진의 부단한 노력, 성실함, 재능이 빛을 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톨킨에게 집중하고 싶다.


단도직입적으로, 잭슨이 영화화를 잘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톨킨의 상세하고 방대하고 성실한 작업물이었다고 본다. 그에게 이 작업은 정말 일루바타르가 자기 자신이라고 이야기할만큼 대단한 것인데, 보통 사람들이 꿈결에서나 혹은 지나가는 상상으로 그칠 것을 그가 글로 하나하나씩 기록해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를 대단한 능력이라 이름 붙일지 모르나, 나는 이 능력은 다름이 아니라 성실함과 꾸준함이라고 밖에 보지 않는다. 그는 중간계의 언어들을 만들어냈고, 호빗과 엘프와 난쟁이들을 상세하게 "관찰"했다. 그리고 그는 기록을 남겼다. 그는 자신이 공부했던 옛 신화와 전승들에서 발견한 것들을 조합하고, 편집해냈다. 


요즘과 같은 시대에 글을 쓰는 것을 하나의 특기로 두고자 하는 나로서, 그의 이러한 서술과 이야기 창작 능력이 영상매체와 같은 현대기술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고민을 해봤다. 나는 그가 정말 순수한 "창조자"로서 백지들에 수많은 이미지들을 촘촘히 던져놓았다고 말하고 싶다. 언어로 그는 수많은 정보들과 지침들을 제공했고, 그러한 기록된 섬세함을 바탕으로 잭슨과 같은 많은 할리우드 기술자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바탕으로 이미지를 구체화 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리하여 바로 이러한 톨킨의 성취가 바로 나의 성취가 되어야 함을 나는 직감한 것이다. 나는 다만 정치를 예술로 구현하고 싶을 뿐이다. 혹자는 정치와 환상문학이 무슨 관계냐고 묻겠지만,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우리의 현실은 누군가가 이미 누군가가 꿈꿔놓은 상(이미지image)였다고 말이다. 소설가들과 철학자, 모든 말을 업으로 삼은 자들이 얼기설기 그려놓고 계획한 것들을, 기술자들이 살을 덮어놓아 숨쉬게 만들었다. 


나는 그리하여 내가 배우고, 내가 보았던 상들을 조합하여 현실의 정치현실에서 기술적으로 구현하고, 작동 가능한 이야기와 담론들을 생성해야 한다. 


어쩌면 직접민주주의와 아나키즘은 환상에 불과할 수 있다. 대체 어느 시대에 그런 게 있었다는 것이죠? 우리한테 그런 일이 가능하긴 한 거죠?


그렇다면 내가 노래하리라. 나한테 주어진 시간들 속에서 말을 계속 내뱉고 주문을 외우고 편집하고 조건들을 설치하고 일궈내고 영향을 주며 그려진 청사진이 언젠가 뚜렷해지면, 그 때 아주 소수의 사람만 꾸었던 환상이 아주 많은 사람들이 보는 현실이 되며, 경계선이 사라지리라. 


5. 다시 묻기를, 이게 어떻게 현실일 수가 있죠?


그리하여 나는 요새 행복하다. 내 마음 속에는 감사함이 샘솟고, 즐거움이 자리한다. 물론 어떤 때에는 이 세상의 악함과 내 마음의 악함이 간혹 무섭고 두렵다. 내가 저지른 악업과 잘못들 속에서 언제 내가 무너지고 타락할까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로 주문을 외운다. 내 언젠가 이 시험에서 통과할지 안 통과할지 모르겠으나 통과하기 위해 하루하루를 부단히 노력하며 살겠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니 항상 몸을 낮추고 살며,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사랑하고, 모든 욕심과 근심을 버리며,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 내 두 발로 서며, 조건이 달라져 모든 것이 쇠한다 하여도 최선을 다해 마주하고 동시에 끝나는 것을 슬퍼해 눈물을 흘릴 지언정 순리에 거스르는 일을 하여 나 스스로를 윤회의 억압에 빠지게 하지 않으리!


여러 상황 속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장 귀여운 생명체와 함께 셋이서 가족을 오순도순 만들어 사는 데 감사하고, 몸 건강히 살아있음을 감사하고,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충분히 할 수 있는 여건에서, 배우는 즐거움을 누리는 데서 감사한다.


이 감사함을 바탕으로 비양심의 순간에 언제나 가장 정직하게 나 자신을 바라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불의를 선택하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흑백이 구분되지 않는 순간에 내 안의 기준으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성실할 것이며, 내가 받은 온갖 좋은 것들과 온갖 나쁜 것들을 잊지 않고 좋은 것은 그 이상으로 나누고 더 좋게 만들 수 있도록 발벗고 나설 것이며, 나쁜 것들은 나쁜 것들로 이어지지 않도록 좋은 승화의 방법을 찾아 악영향을 중화시켜 순환의 고리가 끊겨지도록 마찬가지로 발벗고 나설 것이다.


그러니 다시 묻기를, 이게 어떻게 현실일 수가 있는가?


이 거대한 하나의 세계는 우리가 만들어놓은 환상이지만, 우리는 이 환상과 단 한 번도 분리되어 있던 적이 없다. 그렇기에 우리가 사랑하고, 아파하고, 죽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믿는다. 이천만번을 다시 태어나 이 세계의 모든 우리가 언젠가 억압의 고리를 끊고 진정 아름다운 선택만을 할 그 날이 도래하리라는 것을. 바로 극락의 때를-

그리하여 나는 믿는다. 내가 죽어도 결국 내가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을. 

"나"는 "인간"이 죽지 않는 이상 없어지지 않을 것이니. 







‘I wish it need not have happened in my time,’ said Frodo. ‘So do I,’ said Gandalf, ‘and so do all who live to see such times. But that is not for them to decide. All we have to decide is what to do with the time that is given us.

; The Lord of the Rings: The Fellowship of the Ring, The Two Towers, The Return of the King (p. 51). HarperCollins Publishers. Kindle Edition.


‘No, and I don’t want to,’ said Frodo. ‘I can’t understand you. Do you mean to say that you, and the Elves, have let him live on after all those horrible deeds? Now at any rate he is as bad as an Orc, and just an enemy. He deserves death.’ ‘Deserves it! I daresay he does. Many that live deserve death. And some that die deserve life. Can you give it to them? Then do not be too eager to deal out death in judgement. For even the very wise cannot see all ends.
(p.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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