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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강한 국가 예찬


p78-79

뉘앙스의 차이는 있지만 그들 모두 (여기서 자유주의 혁신가들을 의미) 시장을 민주주의적 요구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강한 국가'의 필요성을 이론화함으로써 그 출발부터 신자유주의와 권위주의를 연결시켰다. 그렇다면 강한 국가란 정확히 무엇이며, 그것을 규정하는 특징은 무엇일까? ...

따라서 강한 국가의 일반적인 목표는 무엇보다 정치가 시장의 자유로운 작동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선 부정negative의 임무들이 도출된다. 사회국가를 해체하고, 사회적 이익의 압력에 굴복하지 말 것이며, 필요에 따라서는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시장의 효과적인 기능을 방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억제해야 한다. 국가와 경제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정의하는 긍정positive의 임무도 있다. 시장의 올바른 기능을 보장하고 일탈을 제재하는 국가의 기능으로, 뤼스토프가 말한 '시장 경찰'의 임무이다.


즉, 한마디로 말하면, 신자유주의자들이 꿈꾸는 강한 국가라 함은 시장주의라는 제 1원칙을 실천하는 데 있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권력의 힘을 집중시켜내는 든든한 존재인 것이다. 나처럼 부정적으로 신자유주의를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신자유주의의 강한 국가는 장자가 한 말처럼 큰 도둑은 나라를 훔쳐도 칭찬받는, 큰 깡패 정도 될 것이다.


p80

신자유주의의 강한 국가 옹호에 자양분을 제공한 건 다름 아닌 법학자이자 철학자인 카를 슈미트였다. 슈미트는 국가가 '경제를 탈정치화'하기 위해 사회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방향을 지향하는 정치적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다시 말해 사회정의에 대한 요구와 그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정부가 취하는 조처들로부터 시장경제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1932년 7월, 슈미트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대중의 민주주의적 요구에 굴복한 '약한 국가'라고 비판한다.


p82

그러나 슈미트가 소망한 국가는 나치나 파시스트 국가가 아니며, 중세의 동업조합 시스템에 기초한 국가도 아니다. 슈미트가 보기에 나치즘과 공산주의라는 이중의 위험으로부터 독일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 체제는 대통령 중심의 국가다.


p87-88

이렇게 현실 민주주의가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하이에크는 '디마키Demarchy'라는 말로 정치 시스템을 정의하고자 했다. 하이에크는 공적 행동의 제한 원칙에 기초한 이 개념이 '지속적인 남용으로 오염된' 민주주의 개념을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야만적 힘'의 사용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크라틴Kratein을 어원으로 한다는 사실 자체가 '민주주의Democracy'의 근원적 약점이다. 반면 아르케인archein과 데모스demos가 합쳐진 말인 디마키는 '규칙에 의한 통치'를 의미한다. '디마키'는 원칙적으로 오로지 일반 규칙만을 따르며 일시적인 다수파의 독단에 휘달리지 않는다. 디마키는 특정 집단에 '특혜'를 주거나 특정 집단을 차별하는 모든 조처를 금지한다.


P89

그들에 따르면 사적 권리 와 시장 질서 등 근본 가치를 수호 하기 위해 제출된 의견들만이 수용 가능하며, 그 외 모든 입장, 특히 평등과 사회 정의를 요구하는 주장은 자유와 시장에적적인 입장으로 간주하여 이성적인 토론 의 공간에서 추방 해야 한다. 엘리트주의적 민주주의에 자리를 둘러싼 경쟁, 즉 정치 집단들 간의 대립이 존재할 수는 있지만, 이런 싸움은 어디까지나 시장 질서의 경계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따라서 이러한 질서를 위협하는 반대자들에 대한 해결책을 고려해야 하고, 민주주의적 다원성 자체를 문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P93

질서 자유주의 자들의 경제관은 계획 경제에 기울어 있던 나치의 전시 경제체제에 반영 되지는 못했지만, 나치 정권은 일을 전후 평화 시기 의 모델로 고려 했다. 나치의 법학자 에른스트 루돌프 후버는 질서 자유주의로부터 ‘시장 경찰’이라는 개념을 도출 했다. 이는 나치 에 복종 하는 자유에 대한 정확한 정의였다. “질서 자유 주의는 국가가 삶에 행사 하는 법이 안정된 경제 의 존속을 위한 강제적인 규범이라는 것을 인정 한다. 그러나 질서 자유주의의 자유는 가장 고결한 의미의 자유다. 국가와 맺는 약속이 속박과 강제에 의하지 않고 자발적인 복종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서술 하는 흐름을 계속 쫓다 보면 많은 것이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다. 특히 이 시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느낌이 든다. 특히 상품을 사고 소유하고 누리는 그 권리들이 지금 우리 시대에는 너무나 기초적인 인간의 자유나 권리의 측면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즉 이 책에 따르면 신 자유주의 들이란 이전 자유주의들과는 다르게 인간의 소유 할 권리가 국가로부터 강력하게 보호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주저하지 않고 정치적인 측면에서 독재도 선호 한다는 것이다.


아니, 특히 독재를 선호한다는 것이 문제적이다, 왜냐하면 다른 이것저것 자유로운 사상, 사회주의적사상과 같이 돈을 아끼거나 돈을 같이 모아서 쓴다라는 개념 자체는 공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우호적으로 생각해야 할 유일한 사상이란 인간 개인이 물건들을 소유하고 그럴 만한 능력을 갖추기 위하여 과감하게 경쟁에 참가 하고 투쟁 해야 한다는 사상 그 자체를, 그것만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Instagram과 같은 곳에서 혹은 TikTok 같은 곳에서 수만은 쇼츠로 우리가 도파민 분비를 즉각적으로 하고 있다고 하는 새로운 문화 상에서는 수많은 선택들이 오가는 중에서 나 자신이 얼마나 많은 해택을 누리고 있는지 이미지 화하여 보여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 시대의 기술조차도 신자유주의적인 기능과 궁합이 딱 맞아서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그러한 기쁨을 전시 하기에 충분 한, 한때는 옛날 귀족들만 가능했던 작품 전시가 이제는 일반 평민들 아니, 돈이 많은 새로운 신흥 귀족들에게 (혹은 워너비들) 전시 할 만한 가치가 있는 행동이 된 것이다.


p101

미제스가 말한 폭력은 막스 베버가 말한 국가가 독점하는 합법적인 물리적 폭력과는 무관하며, 사회의 민주적 요구에 대항하여 시장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국가가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폭력이라는 의미로서 난폭성, 더 나아가 '브루털리즘(brutalisme)'에 가깝다.


마지막 인용은 국가의 폭력이 합법화, 정당화되는 방식으로서의 의미보다는 하나의 체제가치만을 위해 수호하는 난폭하고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의미로서의 사용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저자와 같이 신자유주의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이 아닌, 긍정적인 지지자들이라면 다르게 생각할 여지가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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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신자유주의의 대중 혐오


p58

1981년 11월 15일부터 19일까지, 칠레 발파라이소에서 멀지 않은 비냐 델 마르에서 몽펠르랭 협회 지역 학회가 개최되었다. 전 세계 신자유주의 조류를 대표하는 이들이 모여 한목소리로 '민주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피노체트가 세운 새로운 질서를 칭송했다. 이는 하이에크주의자, 프리드먼주의자, 질서자유주의자, 공공선택론(public choice theory)을 따르는 이들 사이의 근본적인 합의, 즉 민주주의는 자유와 문명에 적대적인 위협이라는 견해에 이들 모두가 동의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p59

몽펠르랭 협회 회원이자 훗날 칠레 중앙은행장과 재무부 장관을 역임한 카를로스 프란시스코 카세레스는 같은 자리에서, 1973년 이후 "우민 선동과 도덕적 타락"으로 귀결될 "무제한적 민주주의 체제"로 돌아가는 것은 한순간도 고려한 적 없으며, "인간 본성에서 우러나온 근본 권리 위에 공공의 이익 보존을 우선하는 국가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말했다.


이 문제를 살펴보는 우리도 잘 생각해보자.

민주주의는 인간의 본성인가?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평등이 인간의 본성과 반한다면, 진짜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신자유주의가 말하는 것처럼 무제한적 경쟁, 자연스러운 위계인 것인가?


p61

이처럼 현대 민주주의에는 총체적 국가로 나아갈 위험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선거의 결과나 인민들의 결집이 시장의 법칙을 위험에 빠뜨린다고 여겨지면 신자유주의는 민주주의에 대항하는 실질적인 전쟁 이데올로기로서 제시된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사회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을 향해 경계한 것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사실 공산주의가 진행되는 역사적 과정만 지켜보면 그들의 경계와 걱정은 많은 부분 맞았다. 소위 일컬어지는 맑시즘이 그 초기에는 자연스러운 역사 속 진행단계로서의 사회주의를 말하였다 하더라도, 결국 그 과정에서 엘리트들, 선두자들이 이끄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도래가 이루어졌고, 급기야 공산당과 같은 일당독재가 발생했다.

이렇듯, 누군가가 이끈다는 것 자체가 전체 안에 존재하는 개개인들의 의지와 자유를 말살하고, 하나의 특정한 장소로 우리 전체를 이끈다는 것, 그 자체를 신자유주의자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막기 위한 정부가 필요한 것이다.


p61

신자유주의의 모든 조류는 '인민주권의 신화' 위에 수립된 민주주의를 지속적으로 비판해왔다. 자유주의의 정치적 기초를 세운 선구자들(루이 루지에, 월터 리프먼, 루트비히 폰 미제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빌헬름 뢰프케)은 '민주주의에 대한 광신', 즉 여론의 지배 혹은 대중의 어리석음이야말로 자유주의를 위협하는 진정한 위험이며, 인민주권 도그마의 유해한 효과를 제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들은 엘리트주의적이고, 개인의 선택과 사적 소유라는 최상위 원칙을 존중하는 제한된 형태의 민주주의만을 인정한다. 이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자유민주주의'다.


즉, 신자유주의자들은 대놓고 엘리트주의 집단인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만인에게 솔직한 이론가들일 수도 있다. 많은 학자들, 특히 대학에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일하는 학자들 중 양심불량, 혹은 인지부조화에 놓인 자들이 매우 많아서, 자신들이 철저히 엘리트주의적인 위치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등해야 한다는 기조를 유지한다는 것에서 그렇다.

그러나 저 플라톤부터 보라. 많은 철학자들이 뿌리를 두고 있는 고대 그리스의 사상 구조부터 살펴보라. 그들이 "민주주의"를 진정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가? 철저히 교육받은 "시민"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민주주의"가 "진짜 민주주의"인가? 어쩌면 신자유주의자들은 가장 솔직한 자들인 것이다. 그들은 인민을 경멸하고, 우매한 떼법을 경멸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어떠한가? 인민인가, 아니면 엘리트인가? 아니면 인민이라 생각하는 엘리트인가, 아니라면 엘리트라 생각하는 인민인가?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부터 스스로 인민인지 엘리트인지, 엘리트가 되고 싶은 인민인지, 인민 주제에 엘리트도 되지 못하는 것인지, 참으로 알쏭달쏭하지만, 솔직히 엘리트를 지향하는 건 사실이다.

그런 내가 아나키즘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나는 왜 "이런 주제"에 아나키즘을 바라는 걸까? 엘리트의 폐해를 너무 직접 겪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오히려 엘리트의 혜택을 너무 직접 받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p62

1938년 리프먼 학술대회에서 루이 루지에는 '자유민주주의'와 인민주권 위에 수립된 민주주의의 차이를 완벽하게 요약했다. 그는 후자를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라고 명명하며 '불가피하게 전체주의 국가로 귀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p64

하이에크에게는 '교환학적 게임(jeu catallactique)'속 개인의 선택의 자유가 가장 중요하다. 따라서 시장의 자율적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지적 자유의 축소 혹은 철폐를 용인할 수 있다. 또한 그에 따르면 전체주의에 민주주의를 대립시키는 것은 완전한 착오다. 전체주의의 반대는 자유주의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지도자를 선택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지 그 지도자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p68

하이에크는 알려졌다시피 경쟁의 결과와 도덕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 중 하나다. 그가 보기에 시장은 도덕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에게 시장은 어떤 집단적 원리로도 반대할 수 없는 최상의 가치인 개인의 자유와 관련된 것이다. "자유로운 인간들의 사회에서는 개인을 구속하는 의무적인 집단적 행동 원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무언가를 실현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자신이 선택한 목적 달성을 위해 재능을 펼치는 보호된 영역(그들의 '소유')을 개인들 스스로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하이에크는 이러한 흥정과 주권 및 정의의 '미신들'로부터 적극적인 경제정책과 사회정책, 복지국가 행정, 우편 혹은 교통 등 특정 서비스에 대한 국가 독점, 노동조합 같은 '수탈자들', 완전고용 정책 등이 탄성했다고 보았다. 또한 이 같은 지속적인 협박에 굴복한 정치권력은 노예가 되며, 그 역시 탄압을 일삼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마치 "주정뱅이가 운전하는 압축 롤러 장비와도 같다."

이러한 일탈은 국가가 선험적으로 최상의 사회질서를 정의할 수 있다는 합리주의적 환상에서 비롯된다.


방금 인용한 바와 같이, 하이에크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특히 나는 신자유주의적 논리를 차용하고자 적극 노력하는 대한민국인들의 정신병에 문제가 있다면, 특히 신자유주의의 기본 논리들과 상당히 괴리감이 있는 한민족의 이때까지의 성향이 이질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이에크는 국가에 의존하는 자유 개인따위는 바라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한민족은 국가가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환상에 젖은 사람들이 많다. 국가의 통치보다는 사회의 자치를 꿈꾸는 나로서도 그와 같은 "국가중심주의"는 상당히 경계가 되는 바다. 하이에크는 이를 오만이라고 정의내리는 듯 하나, 나는 오만이 아니라, 부모와 같은 거시 권력에 기생하고자 하는 나약함, 경계하고자 하는 의존성, 큰 누님형님에게 안기고자 하는 소인의 마음가짐이라고 본다. 소국으로 살아온 우리의 민족성 안에 이러한 점이 있다고 비판하는 나의 의견에 이 글을 읽는 이들이 동의할런지, 아니면 반대할런지?


p68-60

질서자유주의자 발 터 오이켄은 ... 그에 따르면, 정신적 공허함이 지배하는 신 없는 세계에서 대중은 자 신들이 전능하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무능한 총체적 국가에 자신의 구원을 의탁한다. 대중은 만족을 얻을수록 평등의 이름으로 더 많은 요구를 내세우게 되고 국가는 약해진다. 잘못은 대중의 지나친 요구에만 있지 않다. 신자유주의자들은 합리주의에 사로잡혀 사회와 경제의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통치할 수 있다고 믿는 지식인들의 해로운 역할을 지적한다. 그로부터 계획경제, 중앙집권제, 사회주의, 그 모두를 아우르는 '집산주의'가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p73-74

모든 신자유주의자에게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었다. 어떻게 '대중'으로 이해되는 인민의 권력을 제한할 것인가? 루지에의 답은 명확하다. 새로운 '귀족'에게 권력을 양도해야 하며, 대중으로부터 분리된 정치적 권력기관을 세울 수 있는 '통치의 기술'을 점령해야 한다.

(책 내에서 길게 루지에 인용)"통치의 기술은 지혜, 기술, 고귀함을 요구한다. 또한 과거에 대한 지식, 미래에 대한 대비, 가능성에 대한 감각, 그것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수단들에 대한 지식, 책임감, 역량 등이 요구된다. 통치의 기술은 본질적으로 귀족적이며 엘리트에 의해서만 행사되어야 한다. 통제되지 않은 대중은 이와 정반대다. 대중은 마술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 가능성을 판단하는 감각이 없다. 대중은 지도자들의 배신이나 악의 때문에 자신들이 원하는 기적을 이루지 못한다고 믿는다. 대중은 무지하고 거만하다. 대중은 스스로를 만능으로 여기며, 기술자와 지식인(intelligenzia)의 자리를 넘본다. 대중은 프랑스혁명 법정이 라부아지에에게 사형을 선고하며 "공화국은 과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고 한 말을 기꺼이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


참으로 흥미롭다. 이토록 21세기의 대한민국, 전세계 사회상을 표현하는 말이 있을까! 마치 미래를 읽은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인문학자, 철학자들 이상으로 점궤 잘 맞추는 점쟁이들이 세상에 또 있을까?

그렇다. 내가 일전에 사람들에게 경고했던 것처럼, 우리는 신중세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신분이 사라진 사회에서 평등이라는 새로운 가치에 적응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우월성을 끝없이 찾아나가는 인스타그램을 보라. 인스타그램의 아름다움 속에서 아름다움 그 자체에 만족하지 못하고 거짓 필터로 환상을 만들어나가며 우월함을 뽐내는 그 행동에, 인스타그램 자체의 죄는 없다. 언제나 기술은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마음이 문제인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 새로운 중세의 신을 만들어내어 자신들의 육체를 또 한 번 구속시킨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천민화" 시킨다. 대한민국의 신자유주의 주체들이 "이 불행한 지옥에서 노예를 만들어내지 않기 위해" 임신과 출산을 안 한다는 구호를 생각해보라. 이미 우리의 마음 속에 이 세계는 신분사회이고, 노예를 나의 대에서 끝이 나야 한다는 그 결연한 구호의 진의를 생각해보라.

그리고 이러한 신자유주의 사회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만들어진 사회이다. 신자유주의에 크게 기여한 미제스를 인용한 본책의 2장 마무리로 나의 이번 글도 끝낸다.


p76

미제스 역시 이를 인정했으며 제자들에게 이념 전쟁을 독려했다. "대중은 사유하지 않는다. (...) 정신적으로 인류를 지도하는 일은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맡겨야 한다. 이들은 우선 자신들이 고안한 생각을 수용하고 이해할 줄 아는 집단에 행동을 취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의 생각이 대중에게 확산될 것이며, 점차적으로 응축되어 시대의 여론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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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칠레, 최초의 신자유주의 반혁명


p32

그 (하이에크를 말함)의 역할은 경제학 이론가를 넘어 정치적 지도자에 가까웠다.


p32-33

존 래널라프가 전하는 일화에 따르면, 1970년대 말 보수당 정치 모임에서 한 발언자가 실용주의 노선을 옹호하기 시작하자 대처는 테이블 위에 하이에크의 [자유헌정론]을 올려놓으며 참석자들을 향해 '이게 우리가 믿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 그로부터 몇 달 후, (앞에서 언급된 1981년 1월 5일 대처의 하원 발언 이후) 1981년 4월, '하이에크 교수'는 피노체트 독재 정권을 지지하는 <엘 메르쿠리오 El Mercurio>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지하다시피, 독재자가 자유주의적 방식으로 통치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자유주의의 완전한 부재 속에서 통치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자유주의를 결여한 민주 정부보다 자유주의적 독재를 선호합니다."


독재자가 자유주의 통치가 가능한 것, 민주주의가 자유주의와 상관없이 작동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내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도 학교 교과서에서부터도 사회 시간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상반되는 가치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이 균형을 이룸으로써 우리 사회가 운영된다는 표현을 배웠던 적이 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불필요/쓸모없는' 민주주의를 제거하고, 자유주의만 남는다면 어떻게 될까?

책은 그 다음부터 프랑코주의라든지 아옌데 정권을 언급하며 역사적 맥락을 상당히 인용하는데, 정말 아쉽게도 이 부분에 대해 지식이 충분하지 않은 나는 솔직히 고백하건대 헉헉대며 내용을 따라가고 그에 대한 의의를 파악하는 데만 집중하였다. 그러나 고맙게도 책은 피노체트의 군사정권이 어떻게 최종적으로 법을 정리하였는지 소개한다.


p41

그리고 마침내 피노체트의 군사정권은 1978년과 1980년 두 차례에 걸쳐 '노동 플랜 The labor plan'이라는 새로운 노동법을 공표한다. 국가, 자본, 노동 간 새로운 관계를 제도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이 법은 노동조합의 권리를 매우 엄격한 조건으로 제한했을 뿐 아니라 노동자 조직을 최대한 분열시키기 위해 각 직장 내 복수 노조 설립과 노조 간 경쟁을 장려했다. 또한, 1978년부터 1982년까지 '7대 현대화'라고 명명된 개혁 조치들이 시행되면서 부분적 또는 전면적인 민영화가 추진되었다. 개혁의 범위는 노동법, 연금, 보건, 교육, 사법, 농업과 농지 문제, 지방분권 등을 망라했다. 그리고 그 사이 1980년, 신헌법이 공표되었다. 이 헌법은 정부 정책 노선의 변경을 사전에 차단하는 법적 자물쇠 역할을 했다.


그리고 본문은 칠레 헌법에 대해 계속 이야기를 시작한다. 칠레와 남미 역사, 문화, 정치에 대해 기초적인 수준조차도 지식이 없는 나는 챗지피티 4o를 활용하여 피노체트 군사정권이 보수적인 독재정권이었다는 사실도 지금에서야 알았다.


p42

군사정권의 권력 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구스만은 카를 슈미트가 고안한 '제헌 권력 pouvoir constituant' 개념을 동원했다. 슈미트에 따르면, 실존적으로 주어진 의지에 의해 정초되고 국가의 존재 의의가 명시된 헌법만이 유효하다.


p44

상원은 보통선거로 선출된 26명의 의원과 별도로 여러 국가기관에서 지명한 9명의 의원을 둔다. 그 중 4명은 각 군 사령관이 맡는다. 하이메 구스만에 따르면, 이와 같은 '임명된' 의원들을 두는 이유는 "선거로는 국가의 근본적이고 영원한 의지를 철저히 구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칠레 정치체제에서 보통선거의 영향을 제한하기 위해서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정치권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중앙은행의 자율성이 헌법에 명시되었다. 이런 독립성은 신자유주의의 직접적인 영향을 여실히 보여준다. 사실상 어떤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이 새로운 질서를 수정하거나 되돌리지 못하도록 하는 게 목적이었다.


이 부분을 읽을 때는 옛날에 능력주의 meritocracy라 하여 일반 보통선거로부터 국가의 기능과 공무원들의 업무를 보장하는 중국의 체제가 떠올랐다. 딱 독재 운용할 때 같은 맥락의 시스템들이 활용되는 것이다. 칠레나 중국이나 상관없이 말이다.


https://blog.aladin.co.kr/wolf974/9691202


p45-46

이 체계의 핵심을 이루는 근본 원칙이 있으니, 바로 보충성의 원칙 principle of susidiarity이다. 이 원칙은 19세기에 고안되고 20세기 코포라티즘(주: 1960년대 유럽에서 정치적 안정과 지속적 경제 성장을 위해 임금을 억제하고 노동시장을 통제하기 위해 정부, 고용주, 노동자 대표가 참여하는 각종 위원회가 등장하였다. 이런 위원회들의 작동 원리나 이념을 가리켜 코포라티즘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에 의해 전용된 가톨릭교회의 사회 교리에서 유래되었다. 이 교리는 개인들을 통합하여 사회집단을 구성하는 자연적 공동체들 사이의 위계를 강조한다. 자연적인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현대 정치에 대항하여, 개인의 의지에서 시작해 사회 내 자연스러운 집단으로 여겨지는 가족, 동업 조합, 지역, 교회, 군대 나아가 국가와 같은 일련의 조직들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칠레 독재정권의 이데올로그들은 보충성의 원칙을 사회를 마비시키는 국가주의를 끝장내고 경제적 자유, 사적 소유, 시장을 지탱하는 근본인 개인의 자유를 방어하는 원칙으로 재해석한다. 그들에 따르면 보호받는 개인들의 영역은 어떤 집단적 주체도 합리적으로 변형시킬 수 업는 문화적 전통들의 비의도적 자연선택의 결과이다. 이러한 생각은 하이에크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보충성의 원칙의 장점은 사회질서에 대한 자연주의적 묘사와 개인들 간 경쟁이 이루어지는 시장의 가치를 화해시킨다는 점이다.

... 따라서 국가는 민간 부문이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때만 시장의 영역에서 행동을 개시한다. 이런 논리에 의해 기본 서비스가 민영화되고, 기본권(보건, 교육, 주체, 연금 등)이 사적 영역으로 이양되며, 국가는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책임으로부터 면제된다.


즉, 사회주의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체계가 가지는 불만이라 함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조직들 혹은 개인들 간의 위계를 비자연적으로 조작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질문을 해볼 수 있다. 과연 그러한 위계가 자연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자연적이라는 말이 담보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과정이 필요한가? 나는 이러한 주장을 공격하는 데 있어서 역사학의 중요성을 체감한다. 인간이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이 처음부터 a는 a대로 작동했으니 그저 그러려니-하면 끝나는 것이겠지만, 기록이 있다면 a는 b라는 이유로 c로 작동하다가 어느새 다시 d로 작동한 것인데 사람들이 d가 시초부터 유지된 줄 알고 있다-와 같은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다.


p51-52

칠레 신자유주의의 특성 중 신자유주의의 근본 논리를 드러내는 것으로 다음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신자유주의적 사회의 구축은 국가와 사회의 관계를 재구성한다. 국가를 약화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시장의 규율 권력을 창조하고 보강하는 국가기관들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국가는 결코 '약한 국가'가 아니라 '행동주의적이고 유능한 국가'이다. 둘째, 신자유주의는 단순히 경제정책을 실행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냉혹한 시장 법칙에 의해 모든 사회적 관계를 근본적으로 개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 셋째, 경제의 '탈정치화'와 사법의 헌법화가 함께 진행된다. 이러한 결합은 프리드먼을 신자유주의의 창시자로 칭송하는 데 그치지 않고 칠레의 신자유주의 실험에 대한 하이에크의 영향을 재평가할 것을 요구한다. 호세 피녜라의 표현을 빌리자면 '보호된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것, 다시 말해 민주주의를 정치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이 관건이었는데, 여기에서 "정치를 폐위시키자"라는 하이에크의 슬로건이 곧바로 연상된다.


방금 인용한 부분은 특히 신자유주의가 무엇이냐에 관해 고전적인 자유주의 (Laissez Faire)의 자유방임적 가치에 비롯한 작은 정부를 신자유주의 이념과 헷갈려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법하다. 신자유주의는 지향하는 바를 위해 적극 노력하는 극한의 효율 정부를 추구한다. 그렇게 하다보니 정부의 사이즈가 작아지기 쉬울 법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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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 대중 혐오, 법치 -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피에르 다르도.크리스티앙 라발.피에르 소베트르 지음, 정기헌 옮김, 장석준 해제 / 원더박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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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이 책을 읽는 이유


이 책을 거의 한 3분의 2 내지 읽긴 읽었는데, 하도 중요한 책이라는 판단이 들어 처음부터 다시 접어두었던 데를 여기다 기록하면서 세세하고 정밀하게 논하고자 한다.


내가 미국에서 석사할 때 신자유주의라는 수업을 할아버지 교수님 학부 심화 수업으로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그 할배 교수님 덕분에 신자유주의를 공격하는 일군의 미국 정치이론 political theorist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버클리대학에서 재직했었던 웬디 브라운도 자주 인용되는 바, 신자유주의를 이 세계 사회가 병든 문제라고 지적하는 일군의 학자들이 있고, 그 첨두에 선 자들이 바로 이 프랑스의 피에르 다르도, 크리스티앙 라발이며, 나는 이 둘의 공저인 책을 읽었는데, 그 책은 한국어로 번역이 안 된 듯 하지만, 그 책도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의 기원을 열심히 파내는 내용을 다루었다. 그리하여 우연히 이 책이 한국어로 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보았는데, 영어번역도 아직 안 된 듯 했고, 그리하야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이 책을 냉큼 구입하게 된 것이다.


(1) 이 책이 중요한 이유; 특히 이 책이 대한민국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점은? 정신병을 조장하는 신자유주의 사회를 공격하기 위하여


나는 우리 사회를 자살사회라 명명하고 싶다. 우울증 사회도 좋겠지만, 죽는 것을 긍정하고, 1999년도 아닌데, 세기말적이고, 노스트라무스의 예언이라도 믿는 것처럼 모두 태어나면 불행하고 헬조선이고 지옥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쓰는 이 사회. 이 사회는 병들었다. 분명히 병들었고, 그것을 지적하고 싶다.


나는 인간-자연세계는 불교의 설명이 가장 옳다고 본다. 최근 법륜스님의 영상 속에서 아주 내 심금을 울린 말이 있었다.


이 몸뚱아리 하나는 천해질래야 천해질 수 없고, 귀해질래야 귀해질 수 없다.


우리의 삶은 난 것 그대로, 날 것 그대로, 공허한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그 자체일 뿐이다. 그곳에 어떠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행위이다.


그리고 우리는 불교적 혹은 도교적 인간-자연세계의 법리에서 작동하는 대자연의 순리만이 아니라, 인간적 정치-법망사회의 법리에서 작동하는 인간이면 인간으로 살아야 하는 유학, 법가 등등의 인간 질서를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살아있는 그 자체로 존귀하다. 태어난 그 자체로 이미 1등이고 존귀한데, 어찌하여 인간이 태어나고 자기 자신을 천하다고 여기는가? 그것 자체가 이미 "정신병"인 것이다.


그리고 이 "정신병"을 조장하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다.


2. 신자유주의를 이해하자. 대단한 사상이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이 책을 해부해보자.


이 책의 서론인 "신자유주의 내전의 전략들"을 펼쳐보자.


p24

이 책은 ‘순수한 시장 사회’를 위한 신자유주의의 기획가 그것을 실현하는 전략의 긴밀한 연관을 밝혀내고자 한다. … 신자유주의는 이론, 저서, 저자들의 집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형태의 사회주의, 더 나아가 모든 종류의 평등 요구를 무력화하려는 기획으로, 애초부터 정치적 기획자(Entrepreneurs politiques)인 이론가와 저술가들에 의해 수립된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명료한 법과 원칙의 틀 속에서 경쟁에 기초한 자유 사회, 사법의 사회를 수립하려는 공동의 정치적 의지에서 발현했다. …. 달리 말해 신자유주의는 사회주의와 파시즘과 같은 대체로 ‘집산주의적 collectivste’이라고 간주된 정치적 기획들에 대항한 전략적 투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의 목표는 사회에 일련의 표준적인 기능을 부과하는 데 있다. 그중 모든 신자유주의가 첫째로 꼽는 것은 개인-소비자의 주권 보장을 전제로 한 경쟁이다.

((집산주의적 주석=집산주의는 일반적으로 자유방임 개인주의에 반대해 생산 수단의 사회적 소유를 주장하는 이념이다. 1869년 바쿠닌이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할 때는 국가권력 없는 협동조합 사회주의를 의미하였으나, 점차 생산수단 국유화, 사회주의적 경제 통제 일반을 의미하게 되었다. 집산화 경향은 사회주의 국가, 뉴딜 정책을 내세운 미국뿐 아니라 이탈리아, 독일, 일본 등 파시즘 국가 등에서도 두루 관철되었다. 하이에크 등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유주의를 옹호하려는 의도로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나 계획경제 일반을 집산주의와 동일시하였다.))


내가 방금 인용한 부분에서, 이 책의 가장 주요한 목표는, 신자유주의의 지상목표라고 보이는 '순수한 시장 사회'가 하나의 거대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생산 수단의 사회적 소유라는 사회주의적 개념에 극심한 알러지 반응을 보인다.


p26

2000년대 초에는 신자유주의가 기업, 기관, 개인, 국가 간 경쟁을 부추긴다는, 독특하면서 동시에 일반적인 기능에 주목하는 해석이 존재했다. 이 해석은 당시의 신자유주의를 무법사회(이른바 '정글의 법칙')에 근접한 초자유주의로 보거나 애덤 스미스의 자연주의로의 회귀, 또는 본래의 '순수한 자본주의'의 복원 등으로 해석하던 오독을 바로잡는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시장 질서에 필수적인 법적 기반을 창조하고 유지하는 신자유주의 고유의 개입주의 형식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신자유주의의 급진적인 반민주주의를 과소평가했으며, 신자유주의의 통치 방식이 개혁에 개혁을 거듭하고, 작은 수정과 승리들, 일련의 실험과 시행착오들을 거쳐 평화적으로 자리 잡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요컨대 최근 신자유주의의 발전을 살펴보면, 이 계보의 해석들은 상황에 따라 신자유주의를 강요하는 수단이 되는 폭력을 간과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방금 인용한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 사실 내가 작업하다 말다 작업하다 말고 있는 아나키스트 라이브러리를 살펴보면, 아나코 캐피탈리스트라고 해서 신자유주의와 아나키즘을 거의 일치시켜서 보다가 가장 메인인 아나키스트(?)들의 철퇴를 맞고 너희는 아나키스트 아니다! 라고 구박받는 세력이 있는데, 신자유주의를 살펴보다 보면 왜 아나코 캐피탈리스트가 자기들을 바득바득 아나키스트라고 주장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요컨대 자본을 국가든 무엇이든 자신들을 조종하거나 하는 세력 없이, 자유로운 자본 속에서 인간의 자유를 찾아나갈 수 있다고 보는 사람들은 우파적인 의미로 아나키즘을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 가장 크게 발생한 문제, 이 책의 투사들이 가장 주목하는 것은, 신자유주의가 고전 자유주의나 일군의 아나코 캐피탈리스트나 하는 사람들처럼 무언가 단순히 개입없는 보이지 않는 손에서의 순수한 자본주의를 꿈꾸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는 정반대로, 신자유주의는 엄청난 정치적 기반을 창조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손따위는 치워버리고, 자신들이 만들고자 하는 사회를 위해 온 몸을 불사른 열정적 투사들이요, 학문적 노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꿈꾸는 그 정치적 기반이 상당히 '반민주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 문제 때문에 민주주의적 운영을 꿈꾸는 메이저 아나키스트들이 불같이 화를 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좁디좁은 아나키즘적 영역에 불과했겠지만, 아나키즘은 차치하고, 신자유주의가 먹어가고 있는 혹은 먹어버리고 포화되어 어쩌면 다른 것으로 진화하고 있을지도 모를 이 사회 안에서, 신자유주의의 씨앗 혹은 진화과정은 민주주의라는 정치 가치에 불을 지펴버리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한 번 생각해보라. 요새 세상에 민주주의에 대한 비웃음과 조롱이 얼마나 팽배해졌는지... 민주주의 사회에 꼭 필요한 관용과 이해가 사라지고 혐오와 공격과 테러로 나아가고 있는 이 사회를 보라... 사회 내부에 적으로 가득 차, 당최 '공통, 공공성'을 이야기할 수 없는 이 사회를 보라... 이것이 정신병이 아니라면 당최 무엇인지?


p27-28

이미 월터 리프먼 학술대회에서 질서자유주의자 알렉산더 뤼스토프는 평등에의 요구를 정면으로 비난했다. 그는 "봉건 영주제가 강요한 인위적인 서열을 자연적이고 자발적인 위계로 대체하는 대신, 서열의 원칙 자체를 부정하고 그 자리에 평등이라는 잘못된 허위의 이상을 가져다 놓았다"라고 이야기하며, 평등에 대한 요구를 시대의 '병리적 증상'으로 보았다. 따라서 신자유주의가 벌이는 전쟁은 경쟁을 위한 전쟁인 동시에 평등에 대항한 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중요한 구절이다.


나는 요새 아주 흥미로운 현상을 본다. 인스타그램이든 인터넷 커뮤니티이든, 한국인들이 아주 자주 하는 말이 생겼는데, 모두 다 유전자 때문이니 노력은 그른 것이다?라는 소리인 것이다. 저번에 누칼협이라는 신조어를 접하고서도 참 어찌 이렇게 신자유주의가 한국인들과 전세계인들을 정신병으로 몰고간다는 나의 이론이 착착 떨어질까 무서울 정도였는데, 유전자 드립 치는 것을 보면 와-정말 내 이론이 백프로 맞다-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그게 신자유주의적 이론이다. 사람들은 이제 평등을 믿지 않는다. 사람들은 서열, 위계, "근본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우리 하나하나가 소중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클래스들과 우월한 클래스들이 있고 그 안에 태어난 사람들은 행복한 꽃길을 걸어 마지않으나, 아닌 자들은 그대로 글러먹었다-뭐 이런 것이다.


이런 정신병을 갖고 있는데 아기를 낳고 싶을까?


이렇게 보면 신분사회가 사라졌지만, 그 사라진 신분사회에 신분을 어떻게든 우겨서 다시 재창조해서 만들어나가고 있는 것이 인간이 아닐까 싶다. 신자유주의의 정신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관성인 것이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다른 논리를 적용해서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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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내가 2020년에 공부하면서 썼던 영어 글을 ChatGPT4를 이용하여 한국어로 번역한 다음, 그 뜻이 오독이 되지 않도록 다듬어서 올린 글이다. 최근에 한 철학 블로거 분이 개최하신 세미나에 참여하여 하버마스 로티의 논쟁에 관한 글들을 읽었는데 마침 그 모든 것이 내가 공부하다 멈추었던 철학의 지점과 딱 맞아떨어져서 순조로운 스타트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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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적 아이러니즘과 공적 리버럴리즘(자유주의)의 한계에 대하여: 리차드 로티의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현대 정치 철학자들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따라야 할 지침에 대해 논의할 때, 공동체의 공동 기반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근대 이전에 공동체 구성원들을 결합시켰던 신의 개념과 같은 절대적인 기초의 힘이 약화되었기 때문입니다. 한번 흔들리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지나온 과거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과거보다 느슨한 방식으로 공동체에 속하는 방법에 대한 새로운 규칙과 아이디어를 찾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현대 정치 이론에 대한 우리의 주요 질문 중 하나는, 우리가 공동체의 공동 기반이 과거에 믿었던 것처럼 일관되고 견고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공동체를 창조할 수 있는지 여부입니다.



이 논문에서는 제가 제기한 문제를 고찰하기 위해, 특히 그의 저서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에서 리차드 로티의 논증에 대해 비판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CIS'라고 줄여서 부를 것입니다) 로티의 글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사람들이 사적 영역에서는 아이러니스트가 되고 공적 영역에서는 자유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제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다양한 상황의 우연성을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보편적이고 일정한 기반에 의존하지 않고 공공의 연대를 유지하는 방법을 모색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의 논증에는 여러 문제점이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논의를 전개시키기 전에 간략하게 제 비판점들을 요약하고자 합니다. 우선, 로티는 언어의 특성에 대해 단순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이는 과학과 합리성의 유용성을 약화시킵니다. 언어는 인간의 마음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는 합리성과 과학이 단지 인간의 창조물이며, 언어라는 인간 질서의 산물이기 때문에 세계의 원리를 대표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언어의 우연적 특성을 강조하고 사회를 시적화하는 비전을 제시하며, 합리성과 과학의 유용한 기능을 폄하함으로써, 그는 이들이 외부 세계와 연결하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인간 사회를 구축하는 데 기여할 가능성을 간과합니다.



두번째로, 로티는 자신의 자유주의 사회에서 가능한 불평등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의 시와 문학에 관한 이야기는 연대를 창출하기 위한 '우리'라는 개념의 확장을 요구할 때 있어서, '우리'와 같은 언어 기반이 없는 '그들'을 위한 어떠한 보호도 제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존 커뮤니티 밖의 사람들은 커뮤니티 안에서 살아가는 시인이 사용하는 언어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연대의 확장이 불가능합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공공과 사적 영역 간의 구분은 로티가 공공 자유주의를 아이러니스트들의 사적 프로젝트보다 우선시할 때 불화를 드러냅니다. 이는 우리가 서 있는 기반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아이러니즘을 주장하면서도 그가 자유주의를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로티의 논증이 일관성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chapter 1 합리성과 과학의 유용함을 약화시키는 로티



로티에 대한 첫 번째 비판은 그가 합리성과 과학으로부터 거리를 둔다는 것입니다. 그는 철학적 기초를 약화시키지만 자유주의 기관을 강화할 때는 구체적인 합리주의를 긍정합니다. 로티는 자유주의 사회가 과학과 합리성에 반대해야 하지만 시적인 사회를 목표로 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을 여러 번 명확히 합니다. 그는 문화 전체가 계몽주의의 희망처럼 '합리화'되거나 '과학화'되기보다는 '시적화'될 수 있다는 자유주의의 재해석을 바랍니다. (CIS, 53) 로티는 합리주의와 과학이라는 단어를 피하고 그들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려고 최선을 다하는 듯 보이지만, 그가 제안하는 이상적인 공공 영역을 위한 자유주의 사회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합리주의와 과학들이 더 나은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다는 점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로티가 합리주의와 과학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티가 언어는 재현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CIS, 21) 그는 진리와 언어가 인간의 마음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주장합니다. 세계는 밖에 있을지 모르지만 진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진리를 만들어내고 있으며, 진리는 인간의 언어의 요소인 문장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CIS, 5) 즉, 인간의 언어가 진리를 만들고 이러한 진리들이 인간 세계의 질서를 구성하며, 세계가 실제로 어떻게 존재하는지와는 별개로 가치를 지시하고 어느 것이 참이고 거짓인지를 결정합니다.



문제는 로티가 "시적, 예술적, 철학적, 과학적, 또는 정치적 진보는 사적 집착과 공공의 필요가 우연히 일치할 때 발생한다"고 주장할 때부터 시작됩니다. (CIS, 37) 그는 또한 "위대한 과학자들은 세계의 묘사를 발명하여 일어나는 일들을 예측하고 통제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하고, 마찬가지로 시인들과 정치 사상가들은 다른 목적을 위해 그것의 다른 묘사를 발명한다"고 말합니다. (CIS, 4) 간단히 말해서, 그는 과학, 철학, 정치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언어의 부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로티의 관점이 언어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 활동에 대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의 관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인간과 무관하게 그대로 존재하는 세계에 대해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너무 인간 중심적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사람들이 밖에 있는 세계와의 연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계는 말하지 않고 오직 우리만 말한다" (CIS, 6) 고 그가 주장한다면, 인간만이 인간의 언어를 말하기 때문에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계에서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을 바탕으로 언어를 구축했습니다. 즉, 우리의 언어는 어느 정도 세계를 반영합니다. 언어가 세계의 모든 것을 그대로 대표하지는 않지만, 존재들은 인간의 마음을 넘어서 서 있으며, 과학과 합리성이 드러내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인간의 세계에 속하지 않지만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세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합리성이 자유주의 건설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것들을 배제하는 것은 비합리적입니다. 로티의 모순적 태도는 합리성과 과학의 결정적인 유용성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은 인간을 현실 세계로부터 격리시켜 자기중심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에 빠지게 합니다. 로티가 계몽주의 자유주의에 기여하는 실용적 합리성을 인정한다면, 과학화되지 않고 철학화되지 않은 사회를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과학과 철학을 전혀 포기할 필요가 없으며, 그것들이 종교의 힘을 가지거나 절대적 가치로 자처하지 않는 한 필요할 때 그들의 도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커뮤니티를 위한 시적 특성뿐만 아니라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특성도 필요합니다. 그들의 유용성을 인정한다면, 로티가 실용적 자유주의라는 개념으로 말하려는 것에 더 가까워질 것입니다. 대신, 시적 자유주의와 반합리주의 (그리고 반과학주의)에 대한 환상적 태도를 가지는 것은 그들이 사회에 제공한 것과 미래에 우리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공을 인정하지 않고는 부당합니다.


Chapter 2 언어의 본성으로부터 파생되는 불평등에 대한 불충분한 논의



로티의 두 번째 문제는 그가 인간 사회 전반에 걸쳐 언어의 결정적인 영향을 강조하기 때문에 첫 번째로 논의한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에게 언어는 인간이 의존하는 모든 가치와 도덕을 창조하는 것이며, 일관된 기초란 없습니다. 그가 인간 사회에서 언어의 우연성의 중요성을 얼마나 강조하는지 보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그는 언어 사용의 불균형에서 비롯되는 불평등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언어가 단순한 도구이고 인간이 예술가처럼 진리를 발명하는 존재라면, 예술적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의 격차가 그들의 진리 접근 능력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로티가 인간 사회를 위한 시적화된 사회를 꿈꾸면서 (CIS, 53), 그는 문학과 시에 대한 분명한 애정을 보여줍니다. 이는 "오직 시인들만이 우연성을 진정으로 감상할 수 있다고 니체는 의심했다" (CIS, 28) 이기 때문입니다. 시인들은 언어가 단단한 기반이 없으며 장난스럽고 아이러니한 재묘사를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언어가 새롭고 다른 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힘" (CIS, 39) 입니다. 그러나 시인처럼 새로운 비유를 만들어내고 단어를 가지고 놀 수 있는 능력은 실제로 언어에 대한 매우 진보된 기술을 요구합니다. 결론적으로, 로티가 이상적인 자유주의의 이미지는 시적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시에 대한 감정가의 재능을 가진 예술가적 재능을 가진 공동체 구성원들을 양성하는 방법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엘리트주의적 관점으로 들립니다. 사람들이 언어의 기술이 없다면, 시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고, 언어에 내재된 우연성을 인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언어 기술 수준의 차이는 피할 수 없으므로 이 비판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개선도 없는 불평등의 문제는, 로티가 제안하는 의미 있는 연대를 생성할 수 없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로티는 "우리는 모든 인간과 연대감을 느끼는 도덕적 의무가 있다" (CIS, 190) 고 말하고, "우리는 '그들'로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우리'의 감각을 확장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합니다.(CIS, 192) '그들'의 개념을 '우리'로 전환하는 것은 '그들'을 '우리'의 질서에 통합하는 언어적 작업을 요구합니다. 특히 시적인 언어의 높은 수준을 생각할 때, 평균 이상의 언어 경험과 교육이 필요합니다. 현실에서 예를 들어, 언어 기술이 미흡하여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든 이민자 커뮤니티와 난민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커뮤니티의 도덕성, 즉 로티가 '우리의 의도'라고 부르는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경계에 속하기 위한 추가적인 돋움대가 필요합니다.



로티와 롤즈의 이론은 개인이 다원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동시에 느슨한 원칙에서 공동체에 속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유사합니다. 로티는 롤즈를 계몽주의 자유주의를 유지하고자 하지만 계몽주의 합리주의를 버리려는 사람들 중 하나로 언급하며, 철학적 기반을 방어할 필요에서 해방된다면 자유주의 기관이 더 나아질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말합니다. (CIS, 57) 그러나 둘 사이의 차이점은 롤즈가 가장 불리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 자원의 보충을 보장해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주장하는 반면, 로티는 지원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연대의 확장만을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로티는 자유주의 사회의 영웅들은 강력한 시인들과 유토피아적 혁명가라는 생각이, 소외된 시인이나 혁명가의 관점에서는 모순적이고 실패할 것처럼 보일 것이라 주장합니다. (CIS, 60) 소외는 인간성을 대변하여 임의적이고 비인간적인 사회적 제한에 항의하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CIS, 60) 로티가 그들을 영웅이라 부르는 것은 중요한데, 이는 평범한 사람들이 영웅이 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의 관점에서 영웅은 소수에 불과하며, 이러한 영웅들이 대다수와 소통하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언어에 능통하고 커뮤니티에 속한 엘리트들만을 위한 것이 됩니다.



chapter 3 공적 리버럴리스트들에 의한 사적 아이러니스트들을 향한 억압



로티는 사람들이 두 영역을 가지고 있다고 제안합니다: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입니다. 사적인 영역에서는 개인의 목적이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한 태도와 관련이 없으며, 공적인 사안은 개인에게 관련이 없습니다. (CIS, 91) 반면에 공적 영역에서의 자유주의자는 다른 인간에게 행동할 때 그들이 겪을 수 있는 굴욕의 모든 형태를 인식하는 것을 요구받습니다. (CIS, 92). 그는 이 두 영역이 어느 정도는 같은 선상에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많은 경우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합니다. 때때로 개인이 아이러니스트 또는 자유주의자 중 어느 쪽을 선택할지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로티는 푸코를 자유주의자가 아닌 아이러니스트로 비판하면서 공적 영역에서의 그의 최종 어휘가 아이러니스트들이 그들의 의무를 끝까지 밀어붙일 수 없는 공적 영역에 서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로티는 자유주의 사회에 대한 낙관론을 강하게 표현하여, 서구 사회와 정치 사상이 더 이상의 개념적 혁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CIS, 63) 이는 그가 자유주의 사회보다 더 이상의 선구적인 혁명을 상상하지 않는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이러니스트들은 현재의 언어 구조에 반대하여 그들의 아이러니즘과 은유를 전진시킵니다. 그것의 본질은 공통된 기반을 파괴하는 것이며, 이것이 푸코가 '우리'라는 말을 거부하는 이유입니다. (CIS, 64) 그는 아이러니스트로서의 그의 결심에 충실합니다.



아이러니스트의 임무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구축한 견고한 기반을 전복하는 것으로, 처음에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자아와 정체성을 공격하기 때문에 배반이라고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합리주의가 철학적 기반이 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우연한 기반에 견고한 기반이 있으며, 이는 철학적 기반과 거의 동일하게 기능한다는 것입니다. 로티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절대적 가치는 없지만, 우연한 공동체적 기반이 연약하고 가소롭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것이 아이러니스트의 임무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정치적인 활동이 되는 이유입니다. 로티 역시 이를 알고 있으며, 그는 구식 언어 사용자들이 자신들을 구식으로 만드는 급진적인 은유를 사용하는 급진주의자들을 비난하는 장면을 묘사할 때 이를 인식합니다. 구식이 되지 않으려면, 기성세대는 비합리적인 자들로 젊은이들을 비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CIS, 48)



로티는 결정적 순간에 섰을 때, 니체와 하이데거와 같은 도전에 대해 최선의 방법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프로젝트와 숭고함에 대한 시도를 사적으로 전환하고, 정치와는 관련이 없으므로 민주적 기관의 발전이 촉진한 인간 연대감과 호환될 수 있도록 보라고 요청합니다. (CIS, 197)



이러한 사적 전환 요청은 숭고함을 잔인함과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욕망에 종속시키라는 요청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아이러니스트들이 해야 할 일은 바로 잔인함과 고통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구시대 언어와 새로운 언어 간의 권력 게임과 같은 전환은 불가피하게 잔인함과 고통을 수반합니다. 아이러니즘의 본질은 해체(잠시 데리다의 용어를 빌리자면)로서, 갈등과 마찰을 유발하는 것입니다.



로티는 아이러니스트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도 그들을 제한시킬 것을 제안합니다. 그는 공공성이 아이러니스트들의 세계를 구축할 능력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니체, 데리다, 푸코와 같은 자기 창조적인 아이러니스트들은 모든 개인에게 완전한 자율성을 상상하지만, 로티는 사회 기관이나 모든 인간 내에서 자율성의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이를 거부합니다. 그는 자율성이라는, 지배적인 언어 게임에 저항하는 아이러니스트의 주요 도구가 단지 소수에게만 가능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엘리티즘을 보여줍니다. 또는 그는 아이러니를 확장할 기회를 잔인함과 고통을 피하기 위해 포기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아이러니스트들이 진정한 목소리로 타인과 소통하지 못할 때 겪는 고통을 고려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로티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간의 구분에 대한 아이디어는 조화롭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공적 영역의 편을 듭니다. 이것은 균형 잡힌 대립이 아니라, 자유주의가 아이러니즘을 억압하는 불공정한 게임입니다. 아이러니즘은 사회의 변화를 위한 동기를 제공하는 중요한 힘인데, 이것이 약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모순적입니다. 로티가 진정으로 시인이 '영웅'인 사회를 원한다면, 아이러니즘의 정치적 가치를 결코 간과하거나 단지 사적 영역에만 가두어서는 안 됩니다.



로티의 이론은 커뮤니티의 공적 자유주의 부문과 사적 아이러니즘 부문이 공존할 수 있음을 제안합니다. 그러나 그의 이론에는 세 가지 주요 논리적 결함이 있으며, 이는 그의 이론 내의 모순을 보여줍니다. 그는 합리성이 그가 꿈꾸는 자유주의 사회 건설에 기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편, 합리성과 과학의 유용성을 경시합니다. 합리성과 과학을 인정하고, 그것들이 인간 중심적 세계에 우리를 가두지 않고 바깥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적 가치를 인식해야 합니다. 또한 그가 연대의 확장을 도덕적 의무로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어적 불균형으로 인한 가능한 불평등을 완화할 대안이나 지침이 없어 연대의 확장을 해칠 수 있습니다. 이는 그의 연대에 대한 관점이 실현 가능한 보충이 필요한 실천이 아닌, 단지 형식적인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로티는 공적 자유주의를 사적 아이러니즘보다 우선시하는 것과 아이러니스트들의 자율성 개념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그의 주장으로 인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간의 불균형이 발생합니다. 그의 이론의 핵심 부분이 아이러니즘이라면, 그것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이를 통하지 않음으로써, 그는 인간이 그들의 자율성을 바탕으로 언어와 은유를 발명하고 선택한다는 그의 실용주의 관점을 약화시킵니다. 개인이 그들이 무엇을 원하고 필요로 하는지 알 때, '그들'이 '우리'가 되는 그가 꿈꾸는 진정한 연대가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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