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내가 2020년에 공부하면서 썼던 영어 글을 ChatGPT4를 이용하여 한국어로 번역한 다음, 그 뜻이 오독이 되지 않도록 다듬어서 올린 글이다. 최근에 한 철학 블로거 분이 개최하신 세미나에 참여하여 하버마스 로티의 논쟁에 관한 글들을 읽었는데 마침 그 모든 것이 내가 공부하다 멈추었던 철학의 지점과 딱 맞아떨어져서 순조로운 스타트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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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적 아이러니즘과 공적 리버럴리즘(자유주의)의 한계에 대하여: 리차드 로티의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현대 정치 철학자들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따라야 할 지침에 대해 논의할 때, 공동체의 공동 기반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근대 이전에 공동체 구성원들을 결합시켰던 신의 개념과 같은 절대적인 기초의 힘이 약화되었기 때문입니다. 한번 흔들리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지나온 과거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과거보다 느슨한 방식으로 공동체에 속하는 방법에 대한 새로운 규칙과 아이디어를 찾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현대 정치 이론에 대한 우리의 주요 질문 중 하나는, 우리가 공동체의 공동 기반이 과거에 믿었던 것처럼 일관되고 견고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공동체를 창조할 수 있는지 여부입니다.



이 논문에서는 제가 제기한 문제를 고찰하기 위해, 특히 그의 저서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에서 리차드 로티의 논증에 대해 비판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CIS'라고 줄여서 부를 것입니다) 로티의 글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사람들이 사적 영역에서는 아이러니스트가 되고 공적 영역에서는 자유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제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다양한 상황의 우연성을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보편적이고 일정한 기반에 의존하지 않고 공공의 연대를 유지하는 방법을 모색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의 논증에는 여러 문제점이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논의를 전개시키기 전에 간략하게 제 비판점들을 요약하고자 합니다. 우선, 로티는 언어의 특성에 대해 단순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이는 과학과 합리성의 유용성을 약화시킵니다. 언어는 인간의 마음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는 합리성과 과학이 단지 인간의 창조물이며, 언어라는 인간 질서의 산물이기 때문에 세계의 원리를 대표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언어의 우연적 특성을 강조하고 사회를 시적화하는 비전을 제시하며, 합리성과 과학의 유용한 기능을 폄하함으로써, 그는 이들이 외부 세계와 연결하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인간 사회를 구축하는 데 기여할 가능성을 간과합니다.



두번째로, 로티는 자신의 자유주의 사회에서 가능한 불평등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의 시와 문학에 관한 이야기는 연대를 창출하기 위한 '우리'라는 개념의 확장을 요구할 때 있어서, '우리'와 같은 언어 기반이 없는 '그들'을 위한 어떠한 보호도 제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존 커뮤니티 밖의 사람들은 커뮤니티 안에서 살아가는 시인이 사용하는 언어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연대의 확장이 불가능합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공공과 사적 영역 간의 구분은 로티가 공공 자유주의를 아이러니스트들의 사적 프로젝트보다 우선시할 때 불화를 드러냅니다. 이는 우리가 서 있는 기반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아이러니즘을 주장하면서도 그가 자유주의를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로티의 논증이 일관성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chapter 1 합리성과 과학의 유용함을 약화시키는 로티



로티에 대한 첫 번째 비판은 그가 합리성과 과학으로부터 거리를 둔다는 것입니다. 그는 철학적 기초를 약화시키지만 자유주의 기관을 강화할 때는 구체적인 합리주의를 긍정합니다. 로티는 자유주의 사회가 과학과 합리성에 반대해야 하지만 시적인 사회를 목표로 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을 여러 번 명확히 합니다. 그는 문화 전체가 계몽주의의 희망처럼 '합리화'되거나 '과학화'되기보다는 '시적화'될 수 있다는 자유주의의 재해석을 바랍니다. (CIS, 53) 로티는 합리주의와 과학이라는 단어를 피하고 그들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려고 최선을 다하는 듯 보이지만, 그가 제안하는 이상적인 공공 영역을 위한 자유주의 사회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합리주의와 과학들이 더 나은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다는 점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로티가 합리주의와 과학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티가 언어는 재현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CIS, 21) 그는 진리와 언어가 인간의 마음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주장합니다. 세계는 밖에 있을지 모르지만 진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진리를 만들어내고 있으며, 진리는 인간의 언어의 요소인 문장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CIS, 5) 즉, 인간의 언어가 진리를 만들고 이러한 진리들이 인간 세계의 질서를 구성하며, 세계가 실제로 어떻게 존재하는지와는 별개로 가치를 지시하고 어느 것이 참이고 거짓인지를 결정합니다.



문제는 로티가 "시적, 예술적, 철학적, 과학적, 또는 정치적 진보는 사적 집착과 공공의 필요가 우연히 일치할 때 발생한다"고 주장할 때부터 시작됩니다. (CIS, 37) 그는 또한 "위대한 과학자들은 세계의 묘사를 발명하여 일어나는 일들을 예측하고 통제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하고, 마찬가지로 시인들과 정치 사상가들은 다른 목적을 위해 그것의 다른 묘사를 발명한다"고 말합니다. (CIS, 4) 간단히 말해서, 그는 과학, 철학, 정치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언어의 부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로티의 관점이 언어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 활동에 대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의 관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인간과 무관하게 그대로 존재하는 세계에 대해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너무 인간 중심적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사람들이 밖에 있는 세계와의 연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계는 말하지 않고 오직 우리만 말한다" (CIS, 6) 고 그가 주장한다면, 인간만이 인간의 언어를 말하기 때문에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계에서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을 바탕으로 언어를 구축했습니다. 즉, 우리의 언어는 어느 정도 세계를 반영합니다. 언어가 세계의 모든 것을 그대로 대표하지는 않지만, 존재들은 인간의 마음을 넘어서 서 있으며, 과학과 합리성이 드러내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인간의 세계에 속하지 않지만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세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합리성이 자유주의 건설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것들을 배제하는 것은 비합리적입니다. 로티의 모순적 태도는 합리성과 과학의 결정적인 유용성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은 인간을 현실 세계로부터 격리시켜 자기중심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에 빠지게 합니다. 로티가 계몽주의 자유주의에 기여하는 실용적 합리성을 인정한다면, 과학화되지 않고 철학화되지 않은 사회를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과학과 철학을 전혀 포기할 필요가 없으며, 그것들이 종교의 힘을 가지거나 절대적 가치로 자처하지 않는 한 필요할 때 그들의 도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커뮤니티를 위한 시적 특성뿐만 아니라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특성도 필요합니다. 그들의 유용성을 인정한다면, 로티가 실용적 자유주의라는 개념으로 말하려는 것에 더 가까워질 것입니다. 대신, 시적 자유주의와 반합리주의 (그리고 반과학주의)에 대한 환상적 태도를 가지는 것은 그들이 사회에 제공한 것과 미래에 우리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공을 인정하지 않고는 부당합니다.


Chapter 2 언어의 본성으로부터 파생되는 불평등에 대한 불충분한 논의



로티의 두 번째 문제는 그가 인간 사회 전반에 걸쳐 언어의 결정적인 영향을 강조하기 때문에 첫 번째로 논의한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에게 언어는 인간이 의존하는 모든 가치와 도덕을 창조하는 것이며, 일관된 기초란 없습니다. 그가 인간 사회에서 언어의 우연성의 중요성을 얼마나 강조하는지 보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그는 언어 사용의 불균형에서 비롯되는 불평등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언어가 단순한 도구이고 인간이 예술가처럼 진리를 발명하는 존재라면, 예술적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의 격차가 그들의 진리 접근 능력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로티가 인간 사회를 위한 시적화된 사회를 꿈꾸면서 (CIS, 53), 그는 문학과 시에 대한 분명한 애정을 보여줍니다. 이는 "오직 시인들만이 우연성을 진정으로 감상할 수 있다고 니체는 의심했다" (CIS, 28) 이기 때문입니다. 시인들은 언어가 단단한 기반이 없으며 장난스럽고 아이러니한 재묘사를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언어가 새롭고 다른 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힘" (CIS, 39) 입니다. 그러나 시인처럼 새로운 비유를 만들어내고 단어를 가지고 놀 수 있는 능력은 실제로 언어에 대한 매우 진보된 기술을 요구합니다. 결론적으로, 로티가 이상적인 자유주의의 이미지는 시적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시에 대한 감정가의 재능을 가진 예술가적 재능을 가진 공동체 구성원들을 양성하는 방법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엘리트주의적 관점으로 들립니다. 사람들이 언어의 기술이 없다면, 시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고, 언어에 내재된 우연성을 인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언어 기술 수준의 차이는 피할 수 없으므로 이 비판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개선도 없는 불평등의 문제는, 로티가 제안하는 의미 있는 연대를 생성할 수 없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로티는 "우리는 모든 인간과 연대감을 느끼는 도덕적 의무가 있다" (CIS, 190) 고 말하고, "우리는 '그들'로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우리'의 감각을 확장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합니다.(CIS, 192) '그들'의 개념을 '우리'로 전환하는 것은 '그들'을 '우리'의 질서에 통합하는 언어적 작업을 요구합니다. 특히 시적인 언어의 높은 수준을 생각할 때, 평균 이상의 언어 경험과 교육이 필요합니다. 현실에서 예를 들어, 언어 기술이 미흡하여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든 이민자 커뮤니티와 난민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커뮤니티의 도덕성, 즉 로티가 '우리의 의도'라고 부르는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경계에 속하기 위한 추가적인 돋움대가 필요합니다.



로티와 롤즈의 이론은 개인이 다원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동시에 느슨한 원칙에서 공동체에 속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유사합니다. 로티는 롤즈를 계몽주의 자유주의를 유지하고자 하지만 계몽주의 합리주의를 버리려는 사람들 중 하나로 언급하며, 철학적 기반을 방어할 필요에서 해방된다면 자유주의 기관이 더 나아질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말합니다. (CIS, 57) 그러나 둘 사이의 차이점은 롤즈가 가장 불리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 자원의 보충을 보장해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주장하는 반면, 로티는 지원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연대의 확장만을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로티는 자유주의 사회의 영웅들은 강력한 시인들과 유토피아적 혁명가라는 생각이, 소외된 시인이나 혁명가의 관점에서는 모순적이고 실패할 것처럼 보일 것이라 주장합니다. (CIS, 60) 소외는 인간성을 대변하여 임의적이고 비인간적인 사회적 제한에 항의하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CIS, 60) 로티가 그들을 영웅이라 부르는 것은 중요한데, 이는 평범한 사람들이 영웅이 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의 관점에서 영웅은 소수에 불과하며, 이러한 영웅들이 대다수와 소통하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언어에 능통하고 커뮤니티에 속한 엘리트들만을 위한 것이 됩니다.



chapter 3 공적 리버럴리스트들에 의한 사적 아이러니스트들을 향한 억압



로티는 사람들이 두 영역을 가지고 있다고 제안합니다: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입니다. 사적인 영역에서는 개인의 목적이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한 태도와 관련이 없으며, 공적인 사안은 개인에게 관련이 없습니다. (CIS, 91) 반면에 공적 영역에서의 자유주의자는 다른 인간에게 행동할 때 그들이 겪을 수 있는 굴욕의 모든 형태를 인식하는 것을 요구받습니다. (CIS, 92). 그는 이 두 영역이 어느 정도는 같은 선상에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많은 경우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합니다. 때때로 개인이 아이러니스트 또는 자유주의자 중 어느 쪽을 선택할지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로티는 푸코를 자유주의자가 아닌 아이러니스트로 비판하면서 공적 영역에서의 그의 최종 어휘가 아이러니스트들이 그들의 의무를 끝까지 밀어붙일 수 없는 공적 영역에 서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로티는 자유주의 사회에 대한 낙관론을 강하게 표현하여, 서구 사회와 정치 사상이 더 이상의 개념적 혁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CIS, 63) 이는 그가 자유주의 사회보다 더 이상의 선구적인 혁명을 상상하지 않는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이러니스트들은 현재의 언어 구조에 반대하여 그들의 아이러니즘과 은유를 전진시킵니다. 그것의 본질은 공통된 기반을 파괴하는 것이며, 이것이 푸코가 '우리'라는 말을 거부하는 이유입니다. (CIS, 64) 그는 아이러니스트로서의 그의 결심에 충실합니다.



아이러니스트의 임무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구축한 견고한 기반을 전복하는 것으로, 처음에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자아와 정체성을 공격하기 때문에 배반이라고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합리주의가 철학적 기반이 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우연한 기반에 견고한 기반이 있으며, 이는 철학적 기반과 거의 동일하게 기능한다는 것입니다. 로티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절대적 가치는 없지만, 우연한 공동체적 기반이 연약하고 가소롭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것이 아이러니스트의 임무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정치적인 활동이 되는 이유입니다. 로티 역시 이를 알고 있으며, 그는 구식 언어 사용자들이 자신들을 구식으로 만드는 급진적인 은유를 사용하는 급진주의자들을 비난하는 장면을 묘사할 때 이를 인식합니다. 구식이 되지 않으려면, 기성세대는 비합리적인 자들로 젊은이들을 비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CIS, 48)



로티는 결정적 순간에 섰을 때, 니체와 하이데거와 같은 도전에 대해 최선의 방법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프로젝트와 숭고함에 대한 시도를 사적으로 전환하고, 정치와는 관련이 없으므로 민주적 기관의 발전이 촉진한 인간 연대감과 호환될 수 있도록 보라고 요청합니다. (CIS, 197)



이러한 사적 전환 요청은 숭고함을 잔인함과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욕망에 종속시키라는 요청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아이러니스트들이 해야 할 일은 바로 잔인함과 고통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구시대 언어와 새로운 언어 간의 권력 게임과 같은 전환은 불가피하게 잔인함과 고통을 수반합니다. 아이러니즘의 본질은 해체(잠시 데리다의 용어를 빌리자면)로서, 갈등과 마찰을 유발하는 것입니다.



로티는 아이러니스트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도 그들을 제한시킬 것을 제안합니다. 그는 공공성이 아이러니스트들의 세계를 구축할 능력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니체, 데리다, 푸코와 같은 자기 창조적인 아이러니스트들은 모든 개인에게 완전한 자율성을 상상하지만, 로티는 사회 기관이나 모든 인간 내에서 자율성의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이를 거부합니다. 그는 자율성이라는, 지배적인 언어 게임에 저항하는 아이러니스트의 주요 도구가 단지 소수에게만 가능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엘리티즘을 보여줍니다. 또는 그는 아이러니를 확장할 기회를 잔인함과 고통을 피하기 위해 포기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아이러니스트들이 진정한 목소리로 타인과 소통하지 못할 때 겪는 고통을 고려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로티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간의 구분에 대한 아이디어는 조화롭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공적 영역의 편을 듭니다. 이것은 균형 잡힌 대립이 아니라, 자유주의가 아이러니즘을 억압하는 불공정한 게임입니다. 아이러니즘은 사회의 변화를 위한 동기를 제공하는 중요한 힘인데, 이것이 약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모순적입니다. 로티가 진정으로 시인이 '영웅'인 사회를 원한다면, 아이러니즘의 정치적 가치를 결코 간과하거나 단지 사적 영역에만 가두어서는 안 됩니다.



로티의 이론은 커뮤니티의 공적 자유주의 부문과 사적 아이러니즘 부문이 공존할 수 있음을 제안합니다. 그러나 그의 이론에는 세 가지 주요 논리적 결함이 있으며, 이는 그의 이론 내의 모순을 보여줍니다. 그는 합리성이 그가 꿈꾸는 자유주의 사회 건설에 기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편, 합리성과 과학의 유용성을 경시합니다. 합리성과 과학을 인정하고, 그것들이 인간 중심적 세계에 우리를 가두지 않고 바깥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적 가치를 인식해야 합니다. 또한 그가 연대의 확장을 도덕적 의무로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어적 불균형으로 인한 가능한 불평등을 완화할 대안이나 지침이 없어 연대의 확장을 해칠 수 있습니다. 이는 그의 연대에 대한 관점이 실현 가능한 보충이 필요한 실천이 아닌, 단지 형식적인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로티는 공적 자유주의를 사적 아이러니즘보다 우선시하는 것과 아이러니스트들의 자율성 개념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그의 주장으로 인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간의 불균형이 발생합니다. 그의 이론의 핵심 부분이 아이러니즘이라면, 그것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이를 통하지 않음으로써, 그는 인간이 그들의 자율성을 바탕으로 언어와 은유를 발명하고 선택한다는 그의 실용주의 관점을 약화시킵니다. 개인이 그들이 무엇을 원하고 필요로 하는지 알 때, '그들'이 '우리'가 되는 그가 꿈꾸는 진정한 연대가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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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공부 - 조선 왕은 왜 평생 배움을 놓지 않았을까
김준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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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며


가볍게 읽는 책이라 페이지 인용은 생략하였다.


1. 아이와 함께


아기를 키우며 열심히 공부하면 한 가지 단점이, 흐름이 끊긴다. 아기가 잘 있다가도 울기 때문에 달래주어야 한다.


소위 손을 탄 아기라서 아기띠에 메고 살짝 걸어다니면 금방 진정을 하는데, 그 와중에 아기에게도 조금 읽어줄까-그리고 공부하는 스스로를 채찍질하기에 좋지 않을까- 싶어 군립도서관에서 여러 책 중 이 책을 빌렸다.


2. 조선시대는 참 흥미롭다


요새 조선이라는 나라의 운영 방식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어 앞으로도 관련 책을 많이 읽게 될 것 같다.


3. 공부론, 공부방법에 대해서는 유학자들을 따라갈 수 없지 않을까


이 왕의 공부라는 책은 기본적으로 조선 시대 왕이 어떤 공부를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인데, 결국 유학적 기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공부론이기도 하다. 여기서 왕이라는 단어를 자기 자신에게로 바꾼다면 우리 자신에게도 아주 많은 배울 점을 시사한다.


4. 감정, 호오를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이유


(1) 왕은 감정을 제어해야 한다

(2) 좋아하는 것을 절제해야 한다


왕도 인간인지라 사적인 마음이 드는 것 자체는 어쩔 수가 없다. 감정이 나타나는 것도 어쩔 수가 없다. 우리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언제나 분심을 다스려야 한다. 그리고 맑은 눈으로 스스로를 관찰해야 한다. 현재 우리 한국 사회에 분란을 일으키는 모든 문제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결국 사람들이 마음 공부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발생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심호흡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한다면 지금처럼 폭력적으로 자신의 이익만을 소리지를 수 없는데, 그것을 배우는 엄격함이 우리 사회에서 저물어버렸다.


우리는 형식적 엄격함, 엄정함을 "꼰대의식"으로 묻어버렸다. 물론 "꼰대"는 있으나, 이 사회는 극단적 치우침 때문에 중(中)을 찾는 미덕을 발휘하여 어떻게 새로운 질서를 창출해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감정과 호오를 절제하라는 윗세대들의 가르침을 여과하여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온고지신이라 했는데, 감정을 발휘하지 말라고 옛날 선비들도 말한 적은 없다. 다만 그 적절한 방식을 찾으라고 했다. 우리는 그 적절한 방식에 대해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5. 성의(誠意;뜻을 성실하게 세우라)의 중요성


우리 사회의 교육은 영혼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의 대안이 없어져 사회 공동체가 방향을 잃은 것과 같은 이치다.


과학적 지식으로서 영혼의 부재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영혼은 지향성, 방향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나침반이다. 어떻게 살아야 좋은 삶이냐를 자신이 정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따라야 하는 것은, 이 공동체, 이 사회, 이 환경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디에 있느냐 그 점찍힌 장소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나온다. 나는 이를 푸코가 잘 기술했다고 본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유학자들이 말하는 격물치지의 논리와도 상통하지 않나 싶다.


내가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성의 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만전을 기해야 하는데, 이때 이 만전을 기해야 하는 것은 행동 아니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성의를 "내가 배운 지식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라 하였다. 아무리 좋은 내용을 배웠다 한들, 당최 그것의 실천이 없다면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과연 옳은 말이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는 경건해야 할 것을 당부한다. 즉, 두려움을 간직하라는 것이다.


왜 두려움을 간직하느냐, 아무리 임금이 높다 한들, 또한 우리 현재 인간들의 인권이 높게 설정되어 우리 모두 스스로를 타인과 같은 위치에 둔다 한들, 이 자연만물 앞에 우리 인간이 보잘것 없음에 대한 상식이 없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죽음 앞에서, 위기 앞에서, 풍전등화의 존재인데, 그리하여 그 수많은 비극들 앞에 봉착했을 때 같이 똘똘 뭉치기 위하여 다른 이들이 중요한 것인데, 자기 자신만 잘난 줄 알고 까불대니 두려움이 없어서 무슨 일이든 성의 있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절실하게 해야 하는 것, 나도 절실하게 공부한다. 그리고 매사 두려움의 마음을 갖는다. 항상 낮추어야 할 필요성을 간직하고자 한다.


6. 왕이 공부하는 데 있어서 경연(經筵)의 중요성; 공부할 때 때를 정하고 장소를 정하고 훌륭한 인재들을 가까이 해야 할 필요성


조선시대에서 경연이 이루어진 것은 바로 앞에서 말했듯이, 임금에게 요구되는 학문 수양, 정심(正心)과 성의를 위해서는 끝없는 채찍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왕이 지속되는 공부를 게을리하는 것을 조선시대의 신하들은 경계하였다. 그리하여 경연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신하들은 꼭 간언하는 말을 하였다.


만약 책에서의 이 부분을 짧게 줄여본다면, 공부에서 중요한 것은 격식이라는 말이다.


 때와 장소가 안 정해져 있으면 금방 게을러지고 시간이 분방해진다. 훌륭한 신하들이 옆에 모여 같이 질의응답을 하는 것은,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서 열심히 토론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준다.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하고 성현의 옛 가르침을 남의 입을 통해 다시 배우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공부의 길이었던 것이다.


6. 조선시대에서 찾아볼 수 있는 파레지아(이른바 간언諫言, 솔직한 말하기)가 현대의 지식인들에게 부족한 미덕; 혹은 그 미덕이 자본주의적으로 변질되었을 수도


왕의 주요 자질 중 하나를 이 책에서는 경청이라 이야기하는데, 경청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옳은 말을 해주는 자들이다.


나는 일찍이 석사 논문에서 푸코가 중요하게 다루었던 파레지아라는 그리스 시대의 관습을 통해 민주주의를 고찰하였는데, 비록 조선시대는 당연히 민주정은 아니었으나 왕과 신하 사이에서 옳은 통치 방향성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옳은 말을 듣고 뱉을 수 있는 용기였다는 것은, 푸코 본인도 동서양의 여러 케이스들을 빗대어 인용한 바 있으니 모든 고전에서 왕정을 이야기할 때 중요하게 다룬 미덕이 바로 이 간언과 경청의 자세일 것이다.


나는 이 경청과 간언에 관한 부분을 보며 현재 우리 사회의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학계에서 자기들끼리만 속닥거릴 뿐, 대중들에게 일거의 말조차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어떤 점에서는 일리가 있는 것이, 현재의 소위 지식인들, 배운 자들, 지식을 연구하는 자들은 옛날 유학자들과는 마인드셋팅부터 다르다. 그들에게는 "이끌어간다" 혹은 공동체의 더 나음을 위해 "당연히 희생한다"는 정신이 없다. 그들에게는 "대학생들을 가르치고 지식을 연구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일이고, 그 위치에서 더 나아가 간언을 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긴다.


일면 이해가 간다. 왜냐하면 수많은 대중들의 공격이 따갑고, 그로부터 자신의 위치를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옛날 유학자들이라도 용기를 내는 신하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이 책에서도 말하듯, 좋은 군주가 있을 때는 용기를 내는 신하가 많아지지만 연산군과 같은 포악한 군주가 있을 때는 신하들이 모두 간신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왕정이 아니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우리가 지금 일궈낸 사회는 연산군과 같은 포악한 군주가 다스리는 사회와 다를 바가 없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사회가 대체 어떤 면에서 왕정보다 낫다는 말인가? 이 질문은 사실 노예의 길을 쓴 (내가 최근 노예의 길을 띄엄띄엄 읽고 있다) 하이에크에게서도 발견되는 질문이다. 그는 민주주의를 부정하진 않는다. (마치 차선을 선택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는 민주주의가 어떤 절대 지상 목표가 아님을 이야기하는데, 나 역시 비슷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가 지식인들이든 아니면 소위 "이끌어나가는 층"에서 옛날 조선시대 지식인들만큼도 못한 면을 발견한다면, 그리하여 그들이 패배하고 더 이상 사회가 교육을 숭상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 성찰하지 않는다면, 이 사회가 과연 촌스러운 왕정, 군주정과 무슨 차이가 있을 것인가?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것이다.


술술 읽히는 아주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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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파이돈·향연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 플라톤의 대화편 현대지성 클래식 28
플라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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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플라톤의 변론을 읽었다. 옛날 학부 시절에 한글로 읽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 때 나의 인상은, 참 소크라테스가 비호감이다- 그 자의 변론이 계속 되면 될수록 사람들이 반감을 가지고 죽어라 쪽에 표를 던진 것은 아니었을까 멋대로 생각해본다. 이런저런 정황을 똑바로 파악하라면 그 시절의 사회상도 알고 있어야 하는데 아직은 그 정도가 아니라서 짐작해 볼 뿐이다.



2.

옛날에는 플라톤이 그린 소크라테스를 보며 오만한 노친네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이번에는 읽으면서 후반부쯤 눈물이 나더라. 아마 나이가 들어서 자신의 진실을 사수하기 위해, 자신의 마음이 속삭이는 소명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선택인지를 체감할 수 있어서 그런 것 아닐까?


십년 전에는 소크라테스가 노년이니 죽는 것을 생각보다 쉽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몇 살이 되어도 인간이 죽음 앞에 무력하다는 사실을 더 이해하게 되니, 소크라테스의 선택이 단순히 노인의 마감만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는다.


플라톤 본인이 소크라테스를 어떻게 그려냈는가, "진실한 소크라테스"가 어떤 사람이었을까는 어차피 답할 수 없는 것이니 남겨두고, 제자가 그린 스승의 이미지를 염두에 두며 질문을 해볼 수밖에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과연 “철학자"인가, 아니면 “신의 사도"인가?

미셸 푸코는 그를 진정한 “파레시아스트"의 사례 중 하나라고 규정한 바 있다.


왜 그는 그의 “진실"을 사수해야 했던 것일까?

그는 그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믿었다. 그것도 신에게서 부여받은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종교인가, 철학인가?

이것은 윤리인가, 욕망인가?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철학자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가 하는 행위가 "철학"인가? 철학은 진실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어원을 그리스어로 갖고 있다고 하는데, 대체 "진실"이 무엇인가?



3.

심지어 소크라테스 본인도 고발된 내용이 공동체의 젊은이들을 현혹시키고 신이 아닌 다른 것을 추종한다는 이유로 고발된 것이 아닌가.


즉, 그의 "진실"이 타인의 "진실"과 다를 때, 우리는 무엇을 판별기준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4.

대체 소크라테스가 자기말고 다른 사람들이 이해를 했다 못했다의 그 기준을 삼는 건 대체 뭐란 말인가?

그는 신으로부터 자신이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는 신탁을 받고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을 두루 만나며 시험을 해보았다.

그 결과로 얻어낸 것은 인간은 모두 무지한데 자신만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자신이 가장 현명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어떻게 철학일 수 있단 말인가?

종교와 거리가 멀어진 현대인들은 사실 이것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는 자신의 마음에 깃든 신의 신탁을 스스로 "해석"해내어 그것이 "진실"임을 그 누구보다도 "믿음"을 가졌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믿음이 현실이 되고, 탄압을 받았을 때 그는 "진실을 사랑한 철학자"로 기록되고 기억된다.



5.

만약 나의 의심이 사실이라면,

우리에게 참과 거짓을 판별한 기준이 무한히 상대적인 것이라면,

절대적인 것이 없다면,

결국 수많은 소위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말한 것처럼,

이 세상은 잣대와 기준과 권력과 힘이라는 조건들로 구성된, 한 판의 잘 만들어진 컴퓨터 프로그래밍 게임에 불과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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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The Wild One (위험한 질주)(한글무자막)(Blu-ray)
Mill Creek Ent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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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0. Sons of Anarchy를 보다가 검색해서 어찌저찌 보게 된 영화이다. 말론 브란도가 나오는 고전영화가 전편이 다 올려져 있어서 보게 되었다. 링크는 아래


https://www.youtube.com/watch?v=KmOipZaw_qY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단순히 마쵸남자들의 으쌰으쌰 깡패놀이 보여주는 게 목적도 아니고, 혹자들이 비난하듯 약자나 여성 괴롭히는 것을 정당화하는 구린 영화도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공권력과 저항력, 그 영원한 딜레마 사이에서 괴로워 하는 민초의 마음을 주인공 "캐시"로 형상화하고 있는 명작이다. 이 영화는 나에게 어떤 한쪽의 단순한 구도로 읽히는 영화가 전혀 아니었으며 오히려 세상 본질이 단순한 선과 악의 사이드로 나뉜 것이 아니라 굽히려는 힘과 굽히지 않으려는 힘 사이에서의 불협화음을 그대로 보이는 예술작품이었다.

1. 말론 브란도가 주인공이 아니라 "캐시"를 주인공으로 본다면

나의 이러한 해석은 기본적으로 이 영화의 주인공을 말론 브란도가 주연한 쟈니가 아니라 마을의 삼촌 카페에서 아르바이트 하고 있는 캐시로 상정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물론 배우 이름값이나 상징성을 생각하면 쟈니도 매우 중요하다. 오히려 영화 제목이 The Wild One이니 당연히 쟈니가 주인공인데, 나는 생각보다 이 영화의 대칭성 때문에 쟈니가 주인공으로 여겨지지 않은 것이다.

무엇이 대칭이냐, 바로 쟈니가 몰고 다니는 wild, 날 것의 오토바이 갱단이 상징하는 반항하는 자들과 한곳에 상주하며 조그마한 마을을 이루고 공권력에 의지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마을사람들의 대칭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 사이에 바로 캐시가 서있다. 그래서 내가 캐시를 주인공으로 생각한 것이다. 

사람들이 딱 보기에는 물론 오토바이 갱단 놈들이 깽판을 치고 캣콜링하며 술 마시고 행패부리는 것이 혼돈 그 자체에 무례하고 상스러운 마초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영화가 여성억압적인 깡패집단을 미화한다라는 비난들이 있다. 실제로 물론 어느 정도 그러한 면이 있다. 그 정화되지 않은, 여과되지 않은 날 것의 리비도와 자유로움, 무절제함과 내일 없이 사는 망나니들의 모습 안에서 섹슈얼한 상대를 대상으로 자신의 본능을 그대로 표현하는 무례함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지만 나는 캐시가 중간에 쟈니와 오토바이를 둘이서 타고 난 다음의 대화를 보며, 그리고 이 영화에 묘사된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밥그릇이 위험해지자 바로 무장과 폭력을 선택하는 그 양상을 보며, 과연 소위 마초적인, 그리고 여성억압적인 면이 그 "상스러운 마초"들한테만 있었던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즉, 만약 이 영화에 여성억압적인 측면이 있다면, 오토바이 갱단만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질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아내를 잃고 어울리지도 않는 마을의 보안관 노릇을 하며 껍데기처럼 남아 있는 "가부장제"와 기존 질서의 상징인 아버지에 대한 동정과 책임감으로 옆에 남아 있는 캐시에게는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강력하게 작동하며,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는 별개로 그녀를 무의식적으로 억압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캐시가 매일 어떤 "백마 탄 왕자님"이 나타나 자신과 사랑에 빠져 마을 밖으로 자신을 꺼내주기는 애타게 바랐던 것이다.

이 영화에서 성별에 대한 노골적이고 깊은 성찰은 아주 분명하지 않다. 사실, 성별이 문제가 아니다. 캐시가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억압적 측면도 같이 드러나는 것이지,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억압"에 대해 성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억압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 사회의 본질이다. 캐시가 만약 동네에서 자라나는 아들내미라고 생각해보자. 과연 마을을 떠났을 수 있을지? 떠나지 못하는 아들에게도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는 강력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캐시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시민의 모습에 가깝다. 외모는 평범하지 않지만, 항상 일해야 하고, 부모와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며,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탈을 꿈꾸기 때문이다. 쟈니가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 것은 어느 정도 이성적 호감도 있지만, 동시에 쟈니가 그녀에게서 자기 자신을 어느 정도 보았기 때문이다. 쟈니는 실제로 자신을 꿈꾸며 자신이 좋다고 들이대는 여자에게는 아주 냉정하다. 사실 들이대는 여자가 거의 답정너를 요구하는 식으로 나는 너 좋아 너도 나 좋니를 물어봐서 짜증을 낸 것이기도 한데, 캐시에 대한 끌림은 자연적이기도 하고 동시에 여러 모로 미묘하다. 쟈니는 캐시에게도 구속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캐시와 쟈니의 관계를 조금 더 상징적으로 보았다. 쟈니가 이 영화가 의미하는 the wild one이겠지만, 내 생각에 그는 캐시 안에 존재하는 the wild one이었던 것 같다. 캐시는 보통의 옛날 스테레오 타입의 상상을 거쳐 자신의 탈출 욕구를 "자신과 일시에 사랑에 빠지는 이방인"으로 미화를 거쳤지만, 사실 그게 로맨틱하게 들려서 그렇지, 결국 가출하고 싶다는 이야기 아닌가. 쟈니처럼 막무가내로 목적지 없이 정처없이 달리고 싶은 것, 그러한 야생성이 캐시가 받아들이기 두려워 울면서 도망쳐야 했던 그 지점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곱게 교육 받은 캐시에게는 결국 사랑에 빠지기에는 너무나 부담스러웠던 것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마지막 장면, 금상을 캐시에게 주는 쟈니, 그리고 그 둘의 마주 보는 웃음은 캐시 내면의 불만과 가출 욕구가 쟈니와 쟈니가 몰고온 폭주단들의 소동으로 인해 어느 정도 해소된, 즉, 캐시 내면이 평화를 어느 정도는 찾은 모습이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보면 이 영화는 모터사이클 갱단의 이야기가 아니라, 마을 안에서 누군가가 와주기만을 기다리는 한 여자의 갈등하는 내면이 해소되는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2. 정의가 아닌 공권력, 대책은 없는 저항력

아주 뻔한 인용을 이 시점에서 할 수 있다. 사실 너무 뻔해서 구절도 대충 기억은 안 나는 건데, 니체 말이다. 니체가 선과 악, 좋고 나쁨의 기준에 대해 접근할 때 이것조차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역사적 관점으로 쌓이고 쌓인 일종의 문화적이고 변동적인 가치라고 일찍이 이야기하지 않았나. 이 영화가 그 이야기를 고대로 한다. 

마지막에 쟈니를 풀어주는 경찰 높은 양반이 쟈니를 보며 내가 너를 볼 때 너 안에 무슨 선/좋음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풀어준다는 이야기를 대충 하는데, 이 경찰 높은 양반은 공권력을 상징하고, 공권력의 눈에 자신에게 반항하고 저항하는 쟈니에게는 어떠한 선도, 좋음도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에게 저항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쟈니에게서는 선이나 좋음이 파악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쟈니나 모터사이클 갱단은 애초에 선이나 좋음을 쫓아서 그 일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하지 말라는 것이 너무 많고, 행동에 제약을 가하는 사회에 말 그대로 반항을 하고 저항을 하는 것 뿐이다. 반작용적인 것이다. 

나의 야매 정신분석을 돌려보면, 마을 사람들한테 얻어맞는 쟈니가 옛날 내 애비가 때리는 것보다 약하다 라며 조롱하는데, 한 번 통밥 굴려 때려 맞춰보면 쟈니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한테 두들겨 맞은 것이다. 즉, 그는 자신보다 더 큰 권위한테 얻어맞는 것이 지긋지긋하던 찰나에 오토바이를 타고 튀지 않았을까 한 번 상상의 나래를 펼쳐볼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쟈니 아버지가 경찰이나 그 비슷한 것이었다면 이단 콤보로 그의 상위권력에 대한 알러지 반응이 더 이해도 될 것이고.

방금 이전 문단은 내가 영화의 대사 한 토막을 통해 상상의 나래를 돌려본 것이고, 결국 어쨌든 그들은 "상대방이 가진 무언가"에 대한 저항을 끝도 없이 하는, 한마디로 존재 자체에 대한 반항, 끝없는 혼돈과 변동, 격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이 상태에서 우리는 마을 사람들과 오토바이 갱단을 이들을 코스모스와 카오스, 공권력과 저항력, 질서와 혼돈으로 양분하여 바라볼 수는 있다.

그렇지만 강조하건대, 이것을 정의와 비정의로 나누는 것은 철저히 공권력 입장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물론 혼돈과 카오스가 불러 일으키는 짜증남과 혼란의 씨앗에 대해서는 우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할 수밖에 없다. 사고만 치는 것들, 자기들이 가장 강한 놈팽이들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싶어 안달이 난 놈들,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보자.

그런데, 그러면 공권력은? 

그들이 질서를 지키며 공동체를 안정으로 유지시키며 자신들이 법이고 질서이고 정당성인양 서있네? 그런데 한 번 물어보자. 너희들이 그냥 대빵 깡패 아닌가? 즉, 국가가 가장 큰 깡패 아니냐는 말이다.

실제로 국가와 질서에 기댄 마을 공동체가 과연 정의롭고 비폭력적이고 이상적인 것이냐, 보면 그렇지 않다. 캐시의 아버지인 보안관은, 모터사이클 갱단에 맞서서 싸우려 드는 마을의 한 아저씨가 어렸을 때부터 깡패였다는 식으로, 그래서 말릴 수가 없다는 식으로 대사를 친다. 이게 무슨 뜻일까? 마을 안에 있는 사람들도 다 인간의 집단 군상이며 어떻게 보면 호전적이기도 하고 분연히 총으로 자신을 맞서는 놈들을 패주고 쏴서 죽이려는 그 사람들도 당장 모터사이클 갱단에 들어가서 오토바이만 안 끌고 다닐 뿐, 자신의 맥락에서는 충분히 사적인 제재와 폭력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수호하고 안위를 지키려고 하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영화에 나오는 안경 낀 아저씨는 우리 사회의 지식인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혔는데, 한쪽이 나쁜 짓 하다고 똑같이 나쁜 짓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나름 양식 있는 말을 호전적인 마을 아저씨는 겁쟁이가 하는 소리로나 치부해버리는 것을 보면, 지식인의 말을 대중은 항상 무시한다-는 패턴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아무튼, 공권력과 경찰에 힘을 빌리고 빗대어 있지만 결국 마을 공동체는 그 평화 안에 나름의 힘과 권력 앞에 붙어 있는 것이고, 그 큰 권력 앞에 이죽거리는 저항군단은 사실상 술 마시고 행패 부리는 폭도들이지만, 결국 경찰들이 너네 혼난다 하면 깨갱해버릴 수밖에 없는, 국가라는 최종보스 앞에서는 깨갱하는 소규모 양아치들인 것이다.

나의 이러한 해석에 빗대면 결국 우리는 이 길을 선택하나 저 길을 선택하나 억압, 억압, 억압 속에 갇혀 있는 중생들인 것이다. 마을 안에서 평화롭게 있는다 치손 결국 우리는 강력한 힘에 깃대어 돌아가고 있는 사회 질서의 억압에 갇혀 있는 것이며, 그 반대로 가봤자 철부지 양아치 짓하면서 손가락질이나 받고 금방 빨리 죽기에 딱 좋은 위험한 일이나 하는 또 다른 종류의 사회 질서의 억압에 갇히는 것이다. 


3. 남자다움 혹은 badass에 대하여

마지막 관전 포인트는, 이 시점에서 나와야 하는 것인데, 바로 남자다움에 관한 것이다.

참 요즘 같은 시대에 미묘한 단어선택이 아닐 수 없다. 

한 번 생각해보자. 대체 남자다움이 뭐냐?

영미권에서는 badass라고 속칭되는, 말론 브란도나 제임스 딘으로 형상화되는, 영원한 반항아들. 어떤 시점으로 보면 철부지 같은 놈들이기도 하고. 절대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말 같은 사람들.

우리가 남자답다, 멋있다-라고 표현하는 이 종류의 사람들은 내 생각에 기존의 문화 질서에서 남자들이 숭상하는 남성다움의 전형을 보인다고 생각한다. 

남자답다, 멋있다 할 때의 기준은 보통 옛날 관용구들을 생각해보면, 사나이가 한 번 칼을 빼면 무를 썰어야지 이러한 말들이 떠오르는데, 나는 이게 주체적인 삶의 자세, 적극적이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어떠한 자세를 보통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여자는 "백마 탄 왕자"가 와서 꺼내주길 기다리고, 보통 남자라면 자신이 마을 밖으로 나가 사내라면 한 번 이것 저것 해보고 살다 죽어야지!라는 그 고정관념? 옛날 마인드의 결정체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나는 이 자세에서 남성이나 여성의 성별적 구별을 버려버리는 순간, 그것이 바로 이 딜레마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되는 자립의 마음가짐이나 태도의 씨앗이 드러나는 것 아닌가 싶다.

결국 인생은 억압받는 것이고, 위태로운 것이다. 공권력에 기대 있다고 해서 죽지 않는 것도 아니고 잃지 않는 것도 아니다. 저항력에 빠져 자유를 만끽한다고 해서 무조건 자유로운 것도 아니고 행복한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떤 종류의 선택을 내려야 하고 그 선택에 걸맞게 분연히 자기 갈 길을 걸어야 하며, 그 선택의 길에서는 변명도 딱히 필요 없고 두려워 하는 모습도 필요치 않은 것이다. 

쟈니는 자신에게 억울한 순간이 왔을 때도 자신이 해야 하는 말만,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말만 군더더기 없이 했다. 그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말하고 행동했다. 

자신은 자신만이 보호할 수 있고 자신만이 그 길에 책임이 있다는 그 분연한 자세-그것을 우리는 멋있다-남자답다라고 표현해 왔으나 이제는 앞으로의 시대에서 모든 개인이 바라는 그러한 자세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독고다이적 자세가 동시에 얼마나 공동체성을 취약하게 할 수 있는가. 약자에 대한 연대나 공감, 연민을 위해 어느 정도 길을 틀어줄 수 있는가. 자립은 연대와 어떤 종류의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 거기까지는 논의가 쉽게 갈 수는 없는 것 같다. 

실제로 쟈니는 그냥 달린 것 뿐이고, 달리다 보니 어중이 떠중이들이 붙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쟈니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패고 싶기도 하다. 그들이 친구인가? 어떤 연대인가? 그 연대는 얼마나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그러한 막무가내 연대가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게 얼마나 정당화되는가? 그들을 그렇다면 항상 억압해야 하는가? 그렇지만 그들이 동시에 우리의 또다른 모습, 우리가 갖고 있는 양면인데?

그렇지만 인간이 자유를 꿈꾸는 한 그것에 대해 분연히 "자립의 길"을 가려는 그 지향성, 그리고 그 지향성에서 나오는 저항의 매력이라는 강력한 힘을 나는 부정할 수 없을 것 같고, 그 길에도 큰 매력이 있다. 오토바이 갱단이 찾아온 날은 아수라장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옛날 옛적 바쿠스 신을 모시는 무녀들이 벌였다던 환락과 혼란의 축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실제로 페스티벌이 있는 이유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루 쯤은 해방구를 주기 위해서라고 하지 않나.

이 모든 딜레마와 아수라장이 섞인 사이에서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가 바로 이 The Wild One이었다고 생각한다. 


4. (사족)


영화에 대한 열망이 10대보다는 많이 시들해져 요즘은 무슨 영화를 봐도 시큰둥하였는데, 이 영화는 생각지도 않게 보았어도 이렇게 긴 글까지 적을 수 있었다. 나는 영화의 리뷰를 쓸 때, 내 안에 말이 차오르는 영화만 쓴다. 이건 마치 대화와 같은 것이다. 영화는 길기 때문에 마치 내가 술집에 앉아 있는데 어떤 낯선 사람이 들어와서 나에게 주욱 두시간 정도 일장연설을 늘어놓으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이다. 보통 흥미없는 경우라면 네 그렇네요, 대충 재미있는 경우라면 네 재밌네요, 답변하고 지나칠 것이지만, 가끔 정말 나한테 그 이야기가 의미가 있다면, 나도 내 이야기를 풀게 되고, 내가 느낀 바를 죽 대답하듯 적게 되는 것이다. 정말 최근에는 영화에 한참 시들해져 있던 나에게 영화의 중요성, 아름다움을 다시 가르쳐준 영화라 더 의미가 있는 리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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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이 공각기동대 애니메이션을 재미로 다 본 게 아니라, 필요한 부분만 보았다. 나한테 이 만화는 재미의 차원보다는 언제나 철학적 차원으로의 접근이었기 때문이다. 



1. 타치코마들


타치코마들은 분명 정보를 공유하고 병렬화되어 있는 기계들에 불과하다. 그들은 원래 정보를 공유하는 말 그대로 기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 중 하나가 바토에게 '선택받고' 바토에게 '길들여지면서' 예상하지 못한 고스트, 즉 우리 말로 하면 영혼을 가지게 되고 개성을 가지게 되는 차원까지 나아가게 된다. 이 한 개체가 개성을 가지면서 정보를 공유하는 다른 타치코마들까지도 개성을 가지게 되면서, 어떤 타치코마는 온갖 책들, 문학 책까지 보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개성이 무기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본 쿠사나기 소령에 의해 타치코마들은 퇴역/폐기 절차를 밟게 된다. 


2. 웃는 남자


웃는 남자의 정체는 26화에 나온다. 진짜 정체로 밝혀진 아오이란 청년-사실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모든 사건들을 불러일으킨 "첫번째 오리지널"이 아니었다. 그조차도 어떤 논문을 보고 그 논문에서부터 자신이 해야 할 의미를 추출해내고 변용한 "복제품"이었던 것이다. 그는 6년 전 일에만 관계가 있었을 뿐, 사후의 모든 일들은 아오이의 행동에서 다시 영감을 얻어내어 "웃는 남자"라는 상징성에 기댄 자들의 홀로서기 증후군 Standing Alone Complex 때문에 생긴 일들이었다. 


3. 홀로서기 증후군의 이유


홀로서기 증후군이 생기는 이유에 대해 내가 주목한 것은, 이것이 바로 정보의 바다에 빠져 정보의 공유라는 현상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가는 인간 개체들의 우울함 때문이다. 비록 공각기동대가 픽션이긴 하지만, 이 픽션은 지금 현재 우리의 모습과 맞닿아 있다. 지금 우리 인간들 역시 그 어느 때보다도 내밀한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지만 동시에 그만큼 광범위하게 작동하는 여러 정보와 암시에 빠져 자기 자신의 개성과 인간성, 내러티브를 거대한 담론에 의해 좌지우지 당하고 있다. 특히 요새 이론적으로 바라보면,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내러티브에 좌지우지 당하여 "돈"이 모든 자유와 권력의 척도가 된 시대에서, 무수히 펀딩하고 투자하고 부동산을 바라보며 자신의 안위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다른 말로, 우리 삶의 의미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 요소에 의하여 결정지음 당하는 것이다.


이때 인간들은 괴로워한다. 돈에서 지면 자신의 가치를 잃어버려 우울해지고, 심지어는 어떤 사람들은 자살도 한다. 이처럼 거대담론에 치우친 사람들은 자신의 개성, 자신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 자기 자신의 내러티브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정보를 얻었고,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과 자기 주변의 관계를 상실하여 방향성을 잃어버렸다. 이때 그들은 완전히 상실된 채, 파편화된 채 홀로 고독하게 떨어져 있게 된다. 이때 이들은 자폐처럼 침전되거나 혹은 외부에서 보여지는 강한 목적의식에 자신을 맡긴다. 신자유주의적 내러티브에 빠져 돈이 최고 하면서 미친 듯이 돈을 벌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도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극 중에서 사람들은 비슷한 이치로 웃는 남자에게 빠져들었다. 웃는 남자는 일종의 안티히어로로써 강한 존재감, 혹은 강한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갑갑한 이 세상을 돌파하고 어떤 선례를 남기면서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은 적에게 맞서싸우는 자는 우리가 기다리고 상상해온 '영웅'의 이미지와 정확히 맞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파편화된 여러 사람들은 아무런 위치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다가 어느 날 만난 강렬한 "웃는 남자"의 의지에 빠져들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호응해버린다. 그들의 존재 의미가 존재하지 않다가, "웃는 남자"라는 상징에 의해 호응되면서 존재의 가치가 부여된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 '영웅'이란 오리지널은 없다. '영웅'이라는 이미지에 부응하여 '영웅적 행동'을 수행하는 '영웅이 되고 싶어 자신을 영웅으로 만드려 하는 주체화의 과정'만 있을 뿐이다. 아오이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들은 자신에게 없는 어떠한 "의지"를 보고 그대로 따라 하려 한다. 자신이 의지가 없기 때문에 "타인의 의지"를 보고 따라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근본적으로 그 모방행위가 바로 다시 오리지널의 위치에 올라간다. 이 세상에 진품은 없기 때문이다.


"원본의 부재가 원본 없는 사본을 만드는 것," 그것을 공각기동대에서는 "홀로서기 증후군"이라고 표현한다. 


4. 인간과 로봇을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만약 그들에게 모두 똑같이 영혼(고스트)이 있다면


공각기동대에서는 특이하게 고스트라는 개념이 있는데, 살펴보면 우리가 말하는 '영혼'이란 것과 같은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것은, 3번에서의 홀로서기 증후군에 대한 어떤 종류의 문제의식에 대해 쿠사나기 소령이 대답하는 해답이 바로 1번 타치코마들에게서 발견된 "개성"인 것이다.


이 시대의 문제는 사람들이 마치 로봇처럼 몰개성화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잃어버리고 외부의 거대한 정보를 공유하게 되면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고스트를 잃고 로봇이 된다. 


그런데 거꾸로 공각기동대에서는 인간들이 영혼을 잃는 반면 로봇들에게서 영혼이 태어난다. 그 태어나는 과정의 묘사를 살펴보면 나는 두 가지의 선행조건이 필요했다고 파악했다.


첫번째는 애정이다. 타치코마들은 바토라는 남자가 쏟아주는 애정(여기서는 바토가 규격과 맞지 않는 사제 오일로 상징한다)에서 발생한 "우연의 일치"로 "오작동"으로 인해 개성을 갖기 시작한다.

두번째는 쿠사나기가 말한 "호기심"이다. 쿠사나기는 바로 이 "호기심"이야말로 정보 병렬화 현상에서 너무나 많은 정보 공유 현상으로 사람들이 방향성을 잃었을 때도 개성을 잃지 않을 수 있는 해법이라고 제시한다. 


실제로 타치코마들은 정말 어린아이 같이 행동한다.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들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토론하고 질문한다. 그리고 그 와중에 자신들의 해답과 토론으로 자기 자신들의 개성을 만들어 나간다. 바로 이 "질문하는 힘"이야말로 그들 스스로가 "개성"을 만들어나가는 실마리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도대체 누구에게 영혼이 있는지 질문하게 된다. 인간의 육체와 로봇의 기계육신의 차이는 무엇인가? 고스트가 로봇에게 있고 인간에게 외려 고스트가 없고 아무런 질문의식 없이 조건에 따라 반응하며 살아간다면, 사실 로봇이 인간적인 것이고 인간이 로봇과 같은 것 아닌가?


5. 정치철학적 관점으로 연결지어서 생각한다-바로 "호기심"은 민주주의의 주체인 시민들이 필요한 "비판능력"이다


내 블로그를 보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나는 민주주의를 정치철학으로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긴말 필요 없이, 나는 현재 대의민주주의 문제가 바로 공각기동대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인간을 비인간적인, 탈개체화하고, 몰개성화하여, 일종의 거수기 혹은 물질을 소모하고 자본을 창출하는 기계적 인간으로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의 이 문제의식에 대한 대답은, 인간이 직접 참여하는 능력을 키워야 하며, 대의제가 궁극적으로 직접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강조하는 민주주의의 주체가 함양해야 할 능력을 범박하게 묘사하자면, 바로 이 "호기심" 다른 말로 "비판능력"이다.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은 철학자 미셸 푸코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에서 변용하는 자기 자신을 배려하는 실천윤리다.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단순히 철학 교과서에서 이야기하는 껍데기 식의 주지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나 자신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부모는 누구인가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 내가 속한 이곳은 어디인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 자신은 정해져 있지 않다-우리 자신은 그러한 질문들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끝없는 문답 과정에서 나라는 한 명의 개성이 만들어지고, 나를 둘러싼 내러티브들이 태어난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났고 어떤 성별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부모를 가지고 있고 어떤 조건 속에서 살아왔으며 어떤 선택을 내리고 어떤 취미를 가지고 어떤 특기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목적을 갖고 살아갑니다 -


이런 주체의 의식이 없이 우리는 민주주의에 참여할 수 없다. 그러한 주체의식이 없는 사람은 민주주의에 참여가 아니라 끌려다닐 뿐이다. 


이를 다시 한 번 공각기동대의 맥락에 적용시켜보자면, 원본이 없을 때, 원본이 진짜 있냐 없냐는 하등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 원본이라는 이미지에 감응하여 내가 만들어 나가는 원본과는 다른 사본, 그러나 원본과는 다르기 때문에 또 다른 종류의 원본이 되는 것- 그 행위에 필요한 것은 바로 호기심, 질문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옳습니까? 이대로 가면 괜찮습니까? 당신은 이렇게 사는 것에 만족합니까? 나는 이런 삶과 사회에 만족합니까?"


아오이는 지가 베르토프라는 영화감독의 말을 인용한다. 


"나는 내가 보는 세상을 모두에게 보여 주기 위한 기계다" 


나는 이를 이렇게 정치철학적으로 해석했다. 


나라는 인간이 스스로 질문하고 대답함으로써 만들어 낸 자기 자신의 세상을 타인과 공유할 때, 보여주는 나와 그것을 보는 관객들이 묶인 "공동체"가 태어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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