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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 ㅣ 누구나 철학총서 2
박병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3년 8월
평점 :
절판
우연히 박병철의 비트겐슈타인 책을 읽었다. 처음에는 그냥 비트겐슈타인 인물 소개만 읽으려고 했는데 비트겐슈타인 철학이 너무 재미있어서 약 270쪽의 책을 문학책 읽듯 읽어버렸다. 간만에 책 한 권을 훌쩍 떼어버려 모쪼록 즐거웠다. 기대했던 바대로 비트겐슈타인은 흥미로웠다. 시간이 되면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읽어야 할 것 같다.
전기 철학을 소개하는 부분에서는 사실 많은 반감이 들었다. 물론 그 이야기가 갖는 의의는 매우 유의미하다. 사고에 매몰되어 자신들이 사용하는 도구인 언어의 성격도 잊었다는 점을 철학사 안에서 이 정도로 드라마틱하게 지적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소위 그림이론이라 하여 세계와 언어가 대응된다는 논리 전반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한 체계를 바탕으로 문장(언어)를 하위요소까지 분석한 다음 참과 거짓을 가려내어 명제의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는 글에서는 어떻게 이 세상의 온갖 복잡다단한 다층적 요소들을 이렇게 단순화시킬 수 있는 것인가 싶어 이 사상이 참으로 위험하다 생각할 정도였다. 비트겐슈타인의 이론 자체보다는 그것이 악용될 만한 사례들이 걱정되었다고 하는 것이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더욱 흥미로웠던 것은 그가 결국 자신의 이론 안에서 여러 문제를 발견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이론을 수정, 비판하여 다른 이야기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저자의 책을 직접 보아야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이야기이겠으나, 박병철 씨의 해제에 의존한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와 후기가 그렇게까지 동떨어진 이야기는 아니라는 직감을 받는다.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와 탐구를 같이 엮어서 출판해달라고 했다는데, 그 두 가지를 같이 보아야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전반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일반성에 대한 갈망"을 포기하고 가족유사성을 제창하며 서양철학사에서 이론적 정초 작업을 시도하여 확보하려 한 객관성을 폐기한다. 그러한 습성은 유용하지 않고, 실제 생활의 다층적 차원을 반영하지 못한다.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며 나는 모든 다층우주론을 제기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여러 차원에서는 여러 새로운 규칙들이 통용되고, 그 규칙들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유의미함은 그곳 안에 참여함으로써만 확보할 수 있다는 실용주의적 사고야말로 사변적이거나 신학적이던 서양철학의 역사를 비로소 인간의 속세와 현세로 끌고 온 중요한 테제가 아닌가 싶다. 물론 아무리 비트겐슈타인이 20세기의 천재 호칭을 받았다 하나 나는 그조차 시대의 산물이라고 본다. 그의 철학은 체계적이고 군더더기가 없고 매끄럽다는 점에서 유용할 것이지만, 그 생각 자체는 현대의 많은 철학자들과 큰 차이가 없다. 전기 철학은 소개만으로도 칸트 철학과 엮일 수 있다는 것을 느꼈고, 후기 철학에서는 개인적으로 니체와의 차이도 근본적으로 발견해 낼 수 없었으며, 모든 상황이 언어게임이라면 이는 곧 규칙을 정하는 담론과 권력의 문제이므로 푸코로서도 읽을 수 있고, 플라톤적 엘리트주의 정초작업을 거부하고 진리의 문제를 절대성이 아니라 맥락성과 삶의 현장에서 찾은 들뢰즈와도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결국 교육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교육학과의 연결성도 느껴지고 (언어게임들의 규칙 설정에 영향을 주고 그것을 더 단단히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교육이므로) 결국 모든 상황 속에서 화용론적으로 사용되는 도구에 불과한 언어라면 그것을 통해 가치를 창출하고 삶에 쓸모가 되는 철학이므로 실용주의 철학에도 큰 영향을 준 것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로티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하므로.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직접 읽어보면 더 알 수 있겠지만, 요즘 들어 나의 생각을 미리 말해놓은 철학자들이 바로 이 실용주의의 계보를 가진 자들 아닌가 싶다.
나에게 있어 푸코와 니체 식의 권력과 의지에 대한 탐구는 로티와 비트겐슈타인 식의 개별 상황에서의 유용성과 삶에서의 실용주의 노선으로 합쳐져 앞으로의 개인들이 주체를 형성하는데 어떠한 식의 개방적이고 열린 교육을 받을 수 있는지, 그로 인해 사회와 공동체는 어떻게 자신들의 권력을 내려놓고 분산시키며 자신들을 민주화시킬 수 있는지에 관한 연구야말로 핵심적 과제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