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
알랭 레네 감독, 사샤 피토에프 외 출연 / 키노필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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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고한 과거의 성을 가득 채운 무한한 현재들 - 알랭 레네,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를 보고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를 보는 것은 미궁처럼 이어진 부조리한 꿈속을 헤엄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영화는 수수께끼 같은 특징에도 불구하고 매우 실험적이고 흥미로운 작품이다. 우선 아름답고 몽환적인 카메라의 시선이나 움직임이 무척 유려하고, 고풍스러운 대저택과 그 안을 채우는 사물들이 꽤나 감각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가장 매혹적인 것은 영화가 제시하는 독특한 시간이미지이다. 그 시간이미지는 미궁이기도 하며 동시에 부조리한 꿈이기도 하다.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의 『모렐의 발명』을 원작으로 삼은 이 작품은 카사레스가 소설 안에서 보인 환상적 이미지와 현실적 이미지의 혼동을 근사한 유럽적 분위기로 재탄생시켰다. 이미지의 혼동이라는 테마를 물려받아 마찬가지로 관객들에게 혼동을 불러일으키는 이 영화를 보면서 논리적으로 이야기의 전개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이 영화가 포착하는 시간이미지는 더 강렬해지는데, 전개의 비논리성이 다소 정적으로 보이는 인물들의 움직임과 상당히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시간의 방향성을 종잡을 수 없다. 무엇이 어느 것의 앞에 위치하고, 무엇이 어느 것의 뒤에 위치하는지 알기 위해서 이 영화를 백 번 돌려본다 해도 아마 명확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여자를 만났다고 주장하는 남자 X의 진술 속에 펼쳐지는 많은 이야기들과 여자 A의 끊임없는 부정 속에서 우리는 무엇이 진실로 일어난 일이고 무엇이 단순한 가정 혹은 짐작에 불과한 일인지 파악해 낼 수 없다. 이렇게 관객이 이 영화 안에서 길을 잃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영화 속에서 제시되는 이미지들의 묘사적인 성격 때문이다. 이러한 묘사되는 이미지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 바로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인 알랭 로브 그리예인데, 그는 남자주인공 X의 내레이션을 통해 진실로 있을지도 모를 사물들조차 무색하게 지워버릴 정도로 세부적인 기억의 묘사를 시도한다. X는 A에게 기억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기억들을 묘사하는데, 그 묘사는 심지어 가끔 제시되는 이미지와도 불일치한다. 이러한 불일치를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X의 진술과는 달리 열려져 있는 문 앞에 A가 서있는 장면이다. X는 나타나는 이미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호소하기 위해 내레이션임에도 불구하고 문은 닫혀 있었다고 애타게 외친다. 그의 간절한 내레이션을 듣는 관객은 그 때쯤이면 도대체 이 엇갈리는 진술 속에 존재하는 진실이 무엇인지 궁금증을 참을 수 없게 되어 영화의 다음 장면을 기다리게 된다.

 

  그러나 진실이라는 것은 진실이 아닌 것만큼이나 이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 끊임없는 불일치와 모호함 속에서 이 영화의 모든 장면들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진실이지 않느냐는 지표를 상실한지 오래이다. 이 영화의 이미지들은 식별불가능성의 지점에 도달해 있다. 그렇기에 관객의 눈에 들어오는 모든 이미지들은 현재에 진행되는 일이며 동시에 과거의 일이기도 하고, 현실적이면서도 동시에 상상 속에서 일어난 일이 된다. 이러한 끊임없는 분열이 바로 이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진실에의 갈증을 느끼게 하고, 동시에 헤어 나올 수 없는 미궁에 빠진 느낌을 갖게 한다.

 

  이 영화가 갖는 식별불가능성의 지점을 반짝이듯 보이는 장면은 영화의 맨 처음, 연극 장면에서부터 제시된다. 관객으로서는 놓치기 매우 쉽지만, 작품 안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주인공들의 대사는 연극의 대사와 일치하며 주인공들의 밀회의 공간인 대저택의 공원 역시 바로 연극의 배경으로 제시된다. 이 연극 장면은 앞으로의 영화 전체의 줄거리를 압축적으로 반영한다는 점에서 잠재적인 이미지이며 동시에 상영되고 있는 연극이라는 점에서는 현실적인 이미지이다. 이렇게 이 영화 안에서 현실적 이미지와 잠재적 이미지는 합착되어 있는데, 그렇기에 이 장면은 결정 이미지로 기능한다. 이 연극 장면은 마치 거울과 같은데, 영화라는 작업 안에 다시 연극이라는 작업이 내포되어 있는 상태로 영화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결정이미지를 통해 관객은 단순히 등장인물들끼리의 진술에서만 불일치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영화 속의 사건 그 자체들 속에서도 불일치와 식별불가능성이 발견된다는 점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리고 대사의 일치는 기묘하게도 연극과 영화 속의 두 핵심주인공에서만 일치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모든 등장인물들의 지나가는 대사 역시 그냥 흘릴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장면에서 나오는 인물들의 대사와 닮아있거나 혹은 동일하다.

 

  이렇게 영화 전반에 이미지들의 혼동이 들어가 있는 이유는 로브 그리예와 알랭 레네의 시간을 주제로 한 만남의 특성이 그대로 영화 속에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감독인 알랭 레네의 경우 전작인 『내 사랑 히로시마』를 통해 현존하는 과거라는 시간이미지의 테마를 보인 바 있다. 그는 끊임없이 분열하는 현재 혹은 과거의 분기점에서 과거의 실존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로브 그리예는 알랭 레네와는 다른 시간이미지를 받아들인다. 그것은 현재의 첨점이라는 개념과 맞닿아 있다. 로브 그리예는 현재 혹은 과거의 분기점에서 항상 영원한 현재를 말한다. 그렇기에 그의 현재들에는 연속성이 존재하지 않고, 순간순간이 항상 다채로운 현재로서 마치 현기증을 일으킬 것만치 등장한다. 과거가 아닌 현재로 존재하게 된 이미지들은 다양한 인물들에게 서로 다른 현재를 분배해주고, 그러한 결과로 서로 다른 현재들이 그대로 존재하는 일종의 다우주적인 상황이 초래된다. 상식적으로 공존이 불가능한 영원한 현재들의 공존은 영화 안에서도 여러 예시적 장면들로 상징된다. 우선 가장 기본적으로 X가 A를 알았다 주장하지만 A는 X를 알지 못한다는 모순적인 현재 역시 그러하다. 또한 총소리가 나며 누군가가 죽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과 달리 그것을 인물들은 부정하고, X가 밀회의 장소에서 도피하다 사고로 죽었음을 암시하는 장면과는 달리 X가 멀쩡히 살아 A와 어디론가 떠나는 후반의 장면들도 예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모순된 암시들은 서로 상반된 상태로 존재하지만 그 어떤 것도 부정되지 않은 상태로 현재라는 정체성을 갖는다.

 

  그러나 말했듯이 이 영화는 로브 그리예만의 것이 아니다. 로브 그리예의 다소 산만할 수도 있는 다채롭고 생명력 넘치는 수많은 현재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온 세계를 방랑하지 않는다. 이 순수한 현재들을 대저택이라는 한 공간에 묶어두는 것은 바로 알랭 레네의 시간 이미지에 대한 해석이라 볼 수 있다. 레네는 시간을 견고하고 웅장하게 서있는 바로크 성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레네의 영화에서 분명히 굳건하게 존재하는 시간을 느낄 수 있다. 이 바로크적 성 안에서 발생한 모든 일들은 마치 퇴적되듯 성 안에 쌓인다. 그러한 기억의 퇴적, 견고하게 존재하는 기억의 정체는 맨 처음 펼쳐지는 연극 대사로도 제시된다.

 

  “몇 초만 더, 그것은 응고되어 갑니다. 영원히, 대리석의 과거 속으로. 돌에 새겨진 이 정원처럼. 이 건물, 방들은 이제 버려졌고, 움직이지 않고 침묵하고 있는 아마도 오래 전에 죽은 사람들이 여전히 지키고 있는 그 많은 복도를 따라서 당신을 만나려고. 가면 같은 얼굴의 울타리를 거쳐서 주의 깊고 냉담한 얼굴들을 거쳐 당신 앞에 선다.” 그리고 연극은 여자배우가 “자, 이제 저는 당신의 것이에요.” 라고 말하며 끝난다.

 

  성 안에 쌓이는 기억들은 무엇일까? 그 기억들은 바로 성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 모든 현재들일 것이다. 알랭 레네가 제시하는 시간의 견고한 성 안에서 로브 그리예의 무한한 현재들이 마치 유령처럼 저택을 돌아다닌다. 그러므로 음산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음악이 영화 전체에서 반복되는 것은 상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카메라는 이 성 안에 퇴적될 기억들을 하나라도 더 담기 위해 사람들의 대화를 열심히 쳐다보며, 초반에 대화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순간적으로 멈추기까지 한다. 그들의 대화는 서로 닮았으며, 그들이 겪는 만남도 서로 유사한 데가 있다. 어쩌면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성일지도 모르며, 이 영화 안에서 제시되는 이미지들은 성의 기억들일지도 모르겠다. 

 

  알랭 레네와 로브 그리예의 시간 이미지에 대한 관점이 달랐다 해도 그들의 합작이 이런 근사한 이야기, 공간, 그리고 기억이미지들을 제시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필시 현재와 과거가 아무리 다른 존재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본 정체에 있어서는 베르그송의 생각처럼 동일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따르는 영화 속의 성은 시간이 지날 때마다 현실이자 과거인 방문객들의 기억들을 자신의 내면에 퇴적시킨다. 그렇기에 처음 보면 길을 잃는 것이 불가능이라 생각할 정도로 직선의 공간인 성은 자신의 응고된 기억을 엿보려는 자들을 퇴적된 기억의 조각들과 화강암의 포석들 사이에서 미아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영화는 다소 장난스럽게도, “당신은 이제 길을 잃어버렸다, 영원히. 깊은 밤에, 나와 함께.” 라며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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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르윈
조엘 코엔 외 감독, 저스틴 팀버레이크 (Justin Timberlake) 외 출연 / 콘텐츠게이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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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있습니다.



1. 

 

  포크송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주인공 말부터 맞더군요. 듣다보니 이 노래가 저 노래 같고, 저 노래가 이 노래 같은 현상이 생겼습니다. 그렇지만 크게 상관 없이 정말 좋은 노래가 개인적으로 세 곡이었습니다. 

  제일 좋은 곡은 Hang me ~ Oh, hang me 네요. 구슬픈 선율이 르윈의 '비참한' 인생 같아 제 맘이 시큰해졌습니다. 코 끝이 짜한 느낌 들게 만드는 불쌍한 노래지만, 단순히 불쌍하다고만 표현하면 그 곡에 미안해져요. 콧소리 담긴 오스카 아이작의 인생을 보고 나면 왜인지 이해되는 가사가 별 볼일 없는 사람 마음을 더 울리기도 합니다.

  그 다음으로 좋은 곡은 Please~mr.kennedy네요. ㅎㅎ 이건 저도 듣자마자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단 웃기긴 하잖아요. 중간중간에 목소리 넣는 건장한 청년의 Outer! Space!가 진지살까지 더해져서 말이죠. 저스틴 팀버레이크는 근데 정말 몇 분 나오더군요. 그래도 나름 의미 있는 역할이긴 하지만.

  원래는 둘이서 부르다가 혼자 되어 불러 더 처량해진 Fare thee well도 좋았어요. 뭐 더 할 말은 없고, 이것도 가사가 좋더군요. 

 

 

2. 

 

  한 번 영화를 보고 나면 르윈 데이비스란 사람이 뭐하고 사는 놈인지 알 수 있게 되는, 그런 영화인 것 같아요. 앨범 제목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인사이드 르윈 데이비스'가 제목인가 싶었습니다. 맨 처음 나오는 부분이 뒤에도 반복되면서 그 인간이 왜 그런 소리 들었고, 왜 그런 취급을 받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니까요. 게다가 그 인간이 어떤 면에선 참 한심하고 어떤 면에선 동시에 불쌍한 인간이란 것도 알게 되었죠. 캐리 멀리건 역의 배우가 거의 독기 품다시피 말한 것처럼 그 사람이 적어도 여자에 관련해 건드린 것들은 좋게 풀린 일이 없더군요. 자기 아이가 있다는 것을 낙태하려 했던 산부인과 의사한테 듣는 심정은 어떤 것일까요? 아마 허탈하겠죠. 로맨스 영화들의 공식과는 철저히 먼.

  이 영화는 영화답지 않죠. 주인공도 고전적인 면에선 주인공답지 않아요. 어중간한 재능을 가진 것으로 나오죠. 그런 주제에 자신만의 기준은 너무나도 확고해서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음악이 좋다고 음악을 하지만 음악이 자기를 더 비참하게 만드는, 끔찍한 짝사랑을 보는 느낌이기도 해요. 개인적으로 저는 제 처지가 이입되어서, 요 근래에 본 영화 중 가장 비극적이면서 울림을 주었어요. 대박을 칠 음악의 저작권료보다도 현실의 돈 한 푼이 더 급해서 다른 선택을 내리기도 하고, 남의 고양이 잘못 주워서 아주머니 비명 지르게 만들고. 그나마 자기들 거두어주시는 착한 교수님 부부 아니면 잠잘 데도 거의 없는 형편이죠.

 

 

3.

 

  게다가 그런 주제에 죄책감까지. 다른 분들은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자기 애 가진 여자가 있는 동네쪽으로 가보지도 못하고 계속 가던 길에 지나가던 괴물체(고양이 형상) 보고 급정거하게 된 그에게 뭔가 연민이 들더군요. 참 이상한 일이에요. 아마 현실이든, 영화에서든 자기가 주워온 고양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자기 애 가진 여자들의 애도 그냥 쓱쓱 지우게 만드는 그ㅡ런 남자 이야기를 들었다면 불쌍하긴 뭐가 불쌍하나 싶었을 거에요. 그런데 그래도 불쌍하더군요. 그리 살다가 타임즈에서 온 비평가한테 좋은 평을 받아서 대박 가수가 되는 꿈 ...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고 안 일어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영화 안에서 그의 그러한 꿈은 정말 말 그대로 잠자며 드는 꿈 같은 일일 겁니다.

  그리고 그게 어른이 된 사람들한테 대다수 일어나는 일들일 거에요. TV에 나오는 사람들, 아니면 영화 속의 짐과 진처럼 어떤 식으로도 어떤 위치를 가진 사람들은 나랑 다른 인생, 적어도 나보단 성공한 인생들이죠. 아주 잘된 사례들은 TV에 나오거나 엄친아의 경우처럼 주위 사람 건너건너에게 질투심과 열등감을 유발시켜 잘된 얘기 듣는 사람 마음 따끔해지게 만들겠죠. 아니 저 나사 빠진 놈이 대체 뭐가 나보다 낫다는 거지? 그렇지만 그건 나만의 관점이고, 냉정한 세상은 르윈 데이비스 같은 사람들에게 죽은 사람과 다시 합치라는 조언이나 하죠. 그리고 말씀드린 것처럼 아마 그게 대다수 인생일 겁니다. 안 될 놈은 안 되는 그런 불공평하고, 비참한 인생 말이죠. 그런데 그런 르윈 데이비스이기 때문에 그의 노래가 더 슬프게 들려오고, 그를 다룬 이 코엔 형제의 영화가 영화의 수많은 영웅적인 주인공들이 아닌, 현실 속의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한 영화라는 묘한 생각이 드는 것일 터입니다. 

 

 

4.

 

 

  아주 잘 만든 영화에요. 지금도 이 영화 생각하면 가슴 한 구석이 아련해지네요. 고양이가 지하철 바깥을 보는 그 어린아이 같던 모습이 잔잔하게 남습니다. 코엔 형제는 이 고양이 배우를 다루는 게 꽤나 힘들었다고 하지만요. 고양이 대역을 세 마리 정도 썼다고 하더라고요. 매우 겁 많은 고양이 키우는 사람으로서 저는 이 세상에 저렇게 잘 안겨 사람 많은 지하철에서도 몇 초라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는 고양이가 존재한다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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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마틴 스콜세지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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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상을 잘 못 받는 것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크게 안타까워 하진 않습니다. 분명 매력적인 배우인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저 같은 경우도 그 사람의 매력에 빠져 주연한 영화들을 일일이 다 찾아본 경험이 있으니까요. [아이언 마스크]를 보고 갑자기 정나미가 뚝 떨어져서 더 안 찾아보긴 했지만요. 어쨌든 개인적으로 이름이 알려질 운명을 타고났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이효리씨처럼 이름이 독특해서요. 이게 아마 보시는 분들 입장에선 무슨 얼토당토 않는 소리인가 싶으시겠지만, 그리고 실제로 얼토당토 않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이름이 독특하면서 예쁜 사람은 그 이름 값을 하지 않나 싶어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니, 너무 예술적인 이름 아닙니까. 

   마틴 스콜세지의 페르소나로 그의 작품들에 열심히 등장하면서 자기복제에 가까우면서 묘하게 반복적인 기능공 연기를 하는 그이입니다. 저는 냉정하게 말씀 드리자면, 그가 절치부심하거나 대오각성을 하지 않는 이상, 소위 '연기를 인정받는 상'을 받긴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연기 못한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에요. 잘합니다. 그런데 대체로 비슷비슷한 느낌이 들어요. 모든 배역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는 개인의 아우라가 사라지지 않기도 하는 감상이 들기도 합니다.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신 쟝고에서의 악역도 저는 사실 다른 작품들에서의 그가 보여준 연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디카프리오가 옛날의 고운 얼굴이 사라지고 난 다음 거친 역할들을 많이 맡기 시작했는데, 저는 그 거친 역할들 자체가 서로 유사한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배우에 대한 제 개인적 감상이 사족으로 먼저 들어가는 이유는 이 배우가 보여준 그 비슷비슷한 연기들 속에서도 저는 이번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에서 보여준 모습이 가장 훌륭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명확한 이유는 왜인지 잘 모르겠어요. 마약에 취해서 엉금엉금 기어 고급 차(기종이 무엇인지 모르겠네요)에 올라타려고 발악하는 모습 보며 저는 레오나르도 고생했네를 연발 외쳤거든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두번째 마누라가 그냥 건성으로 마지막 섹스를 해주는 장면에서 완전 사랑에 도취된 채 삽입하는 연기 장면이었습니다. 얼마나 비참한 연기를 그렇게 끔찍하게 잘 이해하며 영상에 표현하던지. 조단 벨포트 역으로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어요. 조단 벨포트의 정상과 몰락의 아주 세밀한 감정과 소회가 그의 얼굴에 분명 비쳐지고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금융계에서 도덕 윤리따위는 잠시 안드로메다로 집어치우고 마약과 섹스를 일삼으며 천문학적인 부를 누리는 남성들을 다룹니다. 섹스와 마약이 정말 오질나게도 나오더군요. 남성이 중점적으로 많이 나오긴 합니다만, 굳이 언급하자면 이곳에 나오는 여성들의 모습도 쉽고 거칠게 표현하면 속물들이죠. 조단 벨포트는 자본주의의 허락 받지 못한 사이비 교주 중 하나였습니다만 그의 신도들은 교주와 큰 차이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교주는 이렇게 말하지요. 나는 부자로 사는 삶이 좋다. 부자가 싫다고 말하는 새끼들은 다 맥도날드 가서 서빙 일이나 해라. 그러므로 우리는 샤넬 옷을 입고 벤츠를 몰면 되는 겁니다.  마치 올림픽 경기를 뛰듯 연속적으로 쾌락 속을 종횡무진하며 자극과 아드레날린이 폭발적으로 분비되는 바닷 속에 침몰하듯이 말이죠. 그러나 한때 배우 김정은 씨가 찍은 화제의 광고였던 '여러분 모두 부자되세요'를 생각해보면, 한국이든 어디든 그러한 소비행태가 권장되는 사태는 놀랍지 않은 일이죠.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중반부터 극심한 피곤함을 느꼈습니다. 오르가즘이든 고통을 주는 자극이든 무엇이 한계치에 도달하면 그 감각마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그 선에 도달해버린 것이죠. 이곳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절 피곤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눈을 부릅 뜨고 이 몰락을 차근차근 보았습니다. 실화라는 것을 강조하는 영화인데, 영화는 그저 영화 같습니다. 비정상적으로 예쁜 여자들과 살면서 보기도 힘든 요트들, 집들, 물건들, 파티가 나오고, 무슨 범죄 영화에서나 볼 법한 마약들이 쏟아져 나오죠. 우리가 예사로 들어본 마약들은 이 사람들 기준으로 마약 취급도 못 받는 것이고요. 이러한 삶에 젖어든 사람들에게 그 모든 삶이 멈춘다면 삶은 재미없는 무엇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조단도 친구인 도니한테 마약을 끊고, 알코올을 중단한 다음 그렇게 말하죠. 인생이 아주 재미없어졌다고요. 인생은 사실 원래 재미없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돈으로 삶을 영화처럼 살아온 거죠. 

   사실 몇 달 사이에 어떤 분이 (혹시 이 글을 보실지 모르겠네요. 듀나게시판 분이라서요.) 아주 인상적인 말을 해주셨습니다. 누군가를 거짓말 하게 만드는 상황에 빠지게 해놓고 그 누군가에게 왜 거짓말을 했느냐고 다그치는 것이 과연 옳은지에 대한 말씀이셨어요. 어쩌다 나온 이야기였지만, 저는 그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깊이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그 말씀이 생각났어요. 자본주의 사회 자체가 바로 함정 그 자체가 아닌가 싶어서요. 부자가 되는 것이 다들 좋다고 말해서 부자가 되었다면, 그게 어디에 문제가 있을까요? 도덕과 윤리는 원래 승리자들한테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조약에 불과한 것 아니었습니까? 조단과 친구들에게 사기꾼 말에 걸려 넘어지는 그 어리숙한 놈이 그저 문제 있는 호구입니다.

   만약 지금 당장의 저에게 조단 벨포트처럼 살 것이냐, 지금처럼 살아갈 것이냐고 묻는다면 제가 당차게 나는 지금의 나 자신이 좋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제가 확실한 것은 있습니다. 만약 제가 조단 벨포트의 삶을 조금이라도 맛본다면, 아마 저는 지금처럼 살 것이냐 조단 벨포트처럼 살 것이냐의 문제에서 조단 벨포트의 삶을 선택할 확률이 더 높아질 거에요. 그런데 이런 유치한 양자택일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사는 사회는 우리에게 그러한 자극의 힘을 끝없이 제공하며 유혹합니다. 그 모든 것들이 도처에 놓여 있습니다. 자본은 우리에게 변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주며 다른 사람들을 누르고, 다른 사람들의 것을 빼앗으며 안온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죠. 나와 내 가족, 내 친구들'만' 잘 살면 됩니다. 다른 사람까지 구조해 줄 정도로 배가 넓지 못하기 때문이죠. 아니, 애초에 그 사람들을 쫓아내야 배에 자리가 나는 구조가 바로 자본주의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조단 벨포트가 과연 '죄인'이냐는 문제에 있어 쉽게 입을 뗄 수 없습니다. 물론 법적으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는 죄인입니다. 그리고 사회적인 가치라고 불리는 윤리적 기준에서도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저는 그저 평범한 저란 인간, 영화의 마지막, 부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저 자신을 봅니다. 그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우리, 부추기는 사회, 이 안에서 살아가는 한 조단 벨포트의 삶이 언제 내 삶이 될지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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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다르크의 수난 - [초특가판]
Carl Theodor Dreyer 감독 / 스카이시네마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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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 다르크의 얼굴이 카메라의 시선에 커다랗게 잠긴다. 빛나는 성스러움이 수수한 얼굴을 채운다. 곧 하얀 대사가 검은 화면 위에 고혹히 등장한다.

    “은총 속에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제게 계속 은총을 내려주실 것이고, 은총 속에 있지 않다면 하나님께서는 제게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현재 시중에 돌아다니는 이 영화의 판본은 맨 처음의 것은 아니다. 영화의 첫 부분인 해설 자막은 이 영화가 겪어야 했던 수난을 설명한다. 어떻게 보면 영화 ‘스타워즈’ 도입부분과 비슷하다. 방식 자체는 있었던 일들에 대해 단순히 나열하는 평범한 방식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마치 잔 다르크의 화신처럼 검열 받은 영화의 불운함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설명에 따르면 이 영화의 초기 판본들은 세상의 빛을 보기도 전에 성녀가 죽은 것처럼 장렬하게 화형 당했다. 

    그리고 어느 날, 80년대에 들어서야 노르웨이의 정신병원에서 잘 보존된 덴마크 판본이 발견되었다. 신의 가호가 있었던 걸까? 영성으로 충만한 이 작품이 세상에서 쫓겨난 자들의 구금된 장롱 속에서 그 야윈 깃털을 숨긴 채 간신히 숨 쉬며 은닉해 있었으니 말이다. 몇몇 조력자들의 노력에 의하여 드디어 이 영화는 우리의 곁에 날아올 수 있을 만큼 깃털도 자라났다. 

    하지만 이 영화는 100년 전 만들어졌을 그 당시의 모습 자체로 화석 같이 굳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음악이라는 생생한 변주가 곁들어져 있다. 이 영화가 무성 영화였기 때문에 당시 영화가 상영될 때는 현장에서 음악이 연주되는 방식이었는데, 시중에서 현재 접할 수 있는 이 영화의 판본인 Criterion Collection에서는 리차드 에인혼의 “voices of light”가 배경음악으로 쓰이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 역시 이 판본에 나오는 해설자막에서 확인할 수 있다. 리차드 에인혼의 음악들은 1994년에 만들어졌다. 그의 음악은 이 영화를 위해 태어난 예술적 피조물이기에, 우리는 지금 이 무성영화를 보면서 현대인들의 이 영화에 대한 새로운 음악적 해석을 체험할 수 있다. 칼 드레이어 감독이 어떠한 음악도 배경음악으로 선정한 적이 없다 하더라도 에인혼의 음악은 실로 잔 다르크의 수난이라는 영화를 위해 봉납된 신실한 제물이다. 

    이 영화를 이야기하며 역사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러한 시도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하지 않았을까? 칼 드레이어 감독이 잔 다르크가 치른 전투에서의 수많은 업적을 영화에 형상화하려고 했다 생각하지 않는다. 칼 드레이어 감독을 놀라게 한 것은 고등 교육을 받은 성직자들 앞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낸 소녀 그 자체였다. 이 영화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은 오히려 잘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배경이다. 역사적 사실을 끊임없이 주지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영화 속에서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본다. 인물들에 대한 강렬한 클로즈업은 신의 의지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교회와 신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하는 가녀린 소녀의 대립만을 보인다. 그녀의 공적에 대해선 언급도 되지 않으므로, 그녀는 카메라 앞에서 더욱 무력하고 평범해 보인다. 

    영화가 비추는 소녀의 얼굴과 성직자의 얼굴 주름들은 영화 전체에서 역사적인, 사회적인 맥락을 지워버린다. 우리는 인간인 그들의 감정과 그들의 속마음이라는 미시적 차원에 주목하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의 참된 대립각은 성직자들과 잔 다르크만이다. 내면의 감정만이 핵심으로 부상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군가의 국적이 아닌 권위자들과 권위 없는 한 소녀의 대화이다. 칼 드레이어 감독이 가장 기본으로 한 것 역시 심문 과정에서 이루어진 대화록이며, 이 대화록에서 보여준 잔 다르크의 신성함은 자신을 짓누르는 권위에 맞서 대항하는, 그녀와 같이 보잘 것 없는 존재에게서는 도출될 수 없는, 다른 무언가로부터 발현되는 내적 힘이다. 

    성직자들은 잔 다르크를 조롱하고, 가히 침을 뱉듯 그녀를 이단이라 비난한다. 잔 다르크, 그녀는 그리스도교 정통파 성직자들에게 괴물이다. 서커스의 야수이며, 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비천한 여자다. 나이가 몇 살이냐고 묻자 잔 다르크는 손가락으로 떠듬떠듬 숫자를 센다. 성직자들이 모두 기가 막혀 한다. 주기도문도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낭송조차 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널 보내셨다고?”

    그들의 생각에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적어도 부름이라도 받기 위해서 인간에게는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유식해야 하며, 교육 받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 남성 옷을 입는 것이 자유로울 수 있도록 남자로 우선 태어나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태어나지 못한 주제에, 잔 다르크는 감히 수많은 질문에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다. 성직자들이 술렁인다. 잔 다르크에게 미카엘을 보았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그녀가 보았다는 천사의 존재와 하느님의 형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들이 무신론자처럼 보일 때도 있다. 성직자들은 소녀 하나를 앞에 두고 몰락시키기 위해 머리를 맞댄다. 그들 앞에서 그녀는 자신의 내면 안에서 끓어오르는 말들을 하나하나 말하지만, 성직자들 앞에서 흔들리는 두려움까지 숨기지는 못한다. 영혼의 구원을 바란다는 잔 다르크를 향해 성직자들은 신성모독을 외치는데, 그들은 잔 다르크가 신과 영접했다는 사실을 완벽히 부인한다.

    이 나이 많고 많이 배운 남성 성직자들의 모습이 문제시되는 이유는 그들이 과연 성직자인지 세속인인지 파악하기가 힘들다는 점에 있다. 그들이 말하는 신은 그들이 내세우는 가상의 관념으로 떨어진지 오래이며, 그들 안에서 진실한 신앙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들한테 신의 진리가 먼저인지, 아니면 현실의 복잡한 정치 관계가 먼저인지? 게다가 그들은 신을 보았다고 말하는 잔 다르크를 부정하는데, 그 모습이 시기 어린 질투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그들의 의심은 어느 정도 타당해 보일 수도 있다. 신이 대체 어떻게 아무것도 아닌 여자에게 강림하여 그녀의 조국에 대해 지시를 내리고 그녀에게 길을 제시하였단 말인가? 만약 어떤 길이 필요했다면, 신에게 다가가기 위해 정진한 남성 고위 성직자들에게는 왜 다가가지 않으셨단 말인가? 이성적으로, 인간의 논리와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만약 신이라는 것이 진정 있다면, 신이 대체 언제부터 미천한 인간에게 그 뜻을 가르쳐주려 했단 말인가? 신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기는 한단 말인가? 그런 것이 가능했던 적은 있는가? 성직자들은 결국 모든 것을 자신들의 잣대로 판단하기에 이르며 결국 그들이 그녀에게 부여하는 괘씸죄는 정치적이고 인간적이다. 그녀를 파괴하는 이유는 남성의 권위에 도전하여 여성이 남성의 옷을 입고 남성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는 사회적인 것, 그리고 자신들의 세속적 노력과 반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이 무지한 여성이 신을 만났다는 참을 수 없는 ‘불경함’ 때문이다. 

    그들은 신을 보지 못하고, 천사를 보지 못한다. 성직자들은 그녀에게 자신들의 신을 강요한다. 자신들을 거치지 않은 그녀의 신은 과연 신인가? 그들은 그녀에게 착한 천사와 타락한 천사를 구별할 수 있는지를 질문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가능한가? 그들이 자신의 권위를 내세울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바로 이 타락한 지상에서만큼은 권력을 잡은 신의 대리자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이 내려왔다 한들 그 사실을 그들은 현실적인 이유로 인정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인정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신을 진심으로 신실하게 믿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종교가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서 변질된지 오래이기 때문에, 유일한 길은 그녀를 죄인으로 모는 것뿐이다. 몇몇 양심적이고, 진실한 성직자들만이 자신들의 권위에서 벗어나 그녀를 도와주려 노력하지만, 그것 역시 쉽지 않다. 다른 성직자들이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성직자들은 신이 있는 하늘로 닿기에는 지상의 인간 사회의 굴레에 지독히도 묶여 버렸다. 그들은 지상의 시련을 통과하는 데 실패했다. 

    “학식 있는 박사님들이 과연 잔 다르크 너보다 현명하단 말이냐.” 

    잔 다르크는 이렇게 대답한다. 

    “하지만 신이 더 현명하십니다!”

    성직자들은 잔 다르크를 굴복시키려 한다. 그들은 서로 끊임없이 대치한다. 잔 다르크가 성직자들을 향해 한 명씩 악마라고 가리키며 비난하는 강력한 정서의 폭발은, 무성영화의 역사 안에서도 손꼽히는 명장면일 것이다. 

    전쟁영웅인 잔 다르크가 이 핍박 속에서 언제나 꿋꿋한 모습만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칼 드레이어 감독은 그녀를 너무나도 인간적인 존재로, 끝없이 절망하고 눈물 흘리는 소녀로 그린다. 그녀가 고통 앞에서 의연함만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에 강력한 철의 여인을 기대한 사람들로서는 실망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게 그녀가 고난 속에서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에 그녀의 숭고한 내면의 전장이 가치를 갖는다. 그녀의 표정에서 우리는 대사와 언어가 보여줄 수 없는 심연을 엿보게 되고, 그러한 지경에서 희극배우 마리아 팔코네티는 잔 다르크가 되어 유래 없는 비극의 여주인공으로 탈바꿈한다.

    이어서 소녀를 윽박지르는 교회의 위협은 절정에 다다른다. 그들은 그녀의 왕, 조국을 들먹이며 그녀가 내면의 소리를 외면할 것을 종용한다. 팔코네티의 얼굴에서 이성이 사라진다. 마침내 잔 다르크가 굴복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멘. 성직자들은 그녀를 파문시키지 않고, 그들의 하나님, 과연 진정한 하나님의 모습이 있기는 한 것인지 모를 그들의 보호 안에 죄인의 이름으로 잔 다르크를 수감시킨다. 부조리에 반감을 갖는 이들은 오히려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일반 백성들이다. 

    삭발한 그녀의 머리카락, 그리고 눈동자에 어린 좌절의 눈물. 잔 다르크는 영화 내내 새처럼 쉼 없이 울지만, 이 장면만큼 그녀가 우는 모습이 가련해 보이는 장면은 또 없다. 잘린 머리카락을 보며 그녀가 슬퍼하는 이유는 이내 밝혀지듯 자신의 마음의 목소리, 즉 신의 말씀을 두려움 앞에 거절한 자기 자신에 대한 모멸감 때문이었다. 곧 재판관들을 다시 소집한다. 그녀는 자신의 죄를 밝힌다. 그녀가 고백한 죄는 바로 거짓말, 신에 대한 불복종이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들었던 말들을 신의 음성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신이 아니라 부정하지 못한다. 죽음이 결국 그녀를 꺾지 못한 것이다.

    이 세상과 타협하지 못한 그녀의 비극에서 바로 그녀의 성스러움이 태어난다. 그녀는 못 배웠고, 비천하고, 죽음을 무서워하는 보통의 인간이다. 곧 이제 화형 당한다는 말에 잔 다르크의 오른쪽 뺨이 근육경련을 일으킨다. 그녀를 도와주던 성직자는 그녀에게 하나님의 말을 아직도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 질문한다. 하나님의 사고방식이 우리와 다르다고, 자신이 그의 자식이며, 신이 자신의 승리와 순교, 죽음까지 약속했다고 말하는 잔 다르크. 

    성직자들이 마지막 미사를 준비한다. 그녀를 경멸했던 자들도 이제 함부로 다시 비웃지 못한다. 그녀는 마지막 고해, 미사를 받는다. 잔 다르크를 음해하고자 했던 성직자가 그녀의 미사 장면을 몰래 훔쳐본다. 그녀의 신실하고 순수한 믿음이 부러웠을까?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심지어 자격을 갖추는 것까지도 쉬운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사랑은 항상 실천이 어렵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결국은 그 남자의 말이 아닌 행동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잔 다르크의 죽음이 다가오면서 민중들이 그녀의 죽음을 보기 위해 모여든다. 잔 다르크의 화형은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진다. 그녀는 십자가를 끌어안고 너무 오랜 고통을 피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올린다. 끝까지 주님을 찾는 그녀, 아이가 젖을 물다가 갑자기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다시 젖을 문다. 신이 그녀를 보고 있을까? 십자가조차 빼앗겨지고, 그녀는 끝없이 울며 화형대 앞에 혼자가 된다. 교회 지붕의 끝, 십자가에서 새들이 날아가고, 나무 장작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그녀가 죽는 걸 보며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그 눈물조차 뜨거운 열기를 식혀 잔 다르크를 지상에서 구원 받게 해줄 수는 없었다. 

    민중의 누군가가 성녀를 화형 시켰다며 소리를 내지르고, 성의 병력은 민중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교회의 이름으로 죄인이 된 성녀를 성녀라 불렀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폭압의 상황에 놓인다. 계속 불타는 그녀의 시신을 앞에 두고 마지막, 혼란의 대치 상황이 발생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자막은 그녀의 위대함을 칭송하며, 그녀가 프랑스인들의 마음에 영원히 남을 것이라 찬양한다. 나 같은 경우 종교인이 아니기에 그녀가 보고 들은 것, 혹은 그러했다고 믿은 것에 대해서는 사실 알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요컨대 그녀가 신의 이름을 걸고 나온 광인이었는지, 아니면 진정한 기독교의 수호자였는지 말이다. 기독교적 신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나의 논평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다만 칼 드레이어 감독의 영화에 나온 그녀가 어떤 존재였는지는, 그가 형상화한 대화록 안에서의 잔 다크르가 어떤 인물인지는 확실히 알 수 있다. 잔 다르크가 진정 신이라는 존재를 순수하게 믿은 사람이며, 지상의 모든 욕망과 공포라는 감정들로부터 연유되는 시련들을 통과하여 자신이 가야 한다 믿은 곳으로 갔다는 사실 말이다. 한 특정 종교의 힘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 그럴 거면 신을 믿는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왜 자신들이 믿는 신의 길을 따르는 데 실패한단 말인가? 중요한 것은 그녀가 자기 자신의 ‘도덕률’, 내면의 소리,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끝까지 믿어냈다는 점이다. 그게 신이든 마귀든 무엇이든 다른 인간들의 억압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바늘 같이 소름끼치는 눈치를 받으면서, 이 사람들이 나를 해코지 할까봐 무서워 덜덜 떨게 되는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자신의 내면을 지켜낸다는 것, 그 행위는 종교를 믿든 안 믿든 해내기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잔 다르크, 그녀는 그것을 해낸 사람 중 한 명이다. 내가 그녀가 믿은 종교를 믿지 않는다 해서, 그녀가 나에게 성녀가 아닐 이유는 없다. 단지 그녀가 무식하고 순수해서 가능했던 일인 걸까? 글쎄, 원래 가장 순수한 사람들은 자신의 감각에 가장 솔직하기 마련이다. 옳다고 믿는 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그런 문제와는 또 다른 문제이다. 대체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는지? 멀리 안 가서도 개인성이 역사상 가장 존중 받는 지금의 시대에서도 우리 모두 잘못된 일이란 걸 알아도 대부분 다 군말 없이 까라면 까라는 대로 하지 않나. 종교의 이름이든 무엇이든 아닌 걸 아니라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 용기가 필요한 일은 항상 그 자체로 성스럽다. 그리고 억압이 크면 클수록, 지켜내기 어려운 일이면 어려운 일일수록 그 성스러움을 기억하는 사람의 숫자는 더욱 늘어나는 것이 이치이다. 칼 드레이어도 그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잔 다르크의 수난'이라는 놀라운 성스러움을 기억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 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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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 일반판
웨스 앤더슨 감독, 에드워드 노튼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  이 세상의 모든 예술가들이여, 그대들에게 축배를!

((전반적으로 내용이 아주아주아주 상세합니다.))

 

 

      묘지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간 여자가 한 동상 앞에서 책을 읽기 시작하듯이, 영화가 시작하기 10분 전 급하게 영화표를 한 장 샀다. 이미 보았던 영화지만, 다시 보아야겠다는 필요성에서였다. 어떻게 딱 그렇게 시간이 났는지. 표를 사자마자 읽고 있던 종이꾸러미를 들고 황급히 내 자리에 앉았다. 시간은 오후 한시 삼십분, 모든 것이 적적한 십삼 시이다. 싸늘하게 추운 자리,어두운 조명, 언젠가 보았던 파리의 지하묘지 같다. 공간에는 시간이 깃들고, 그 다음에는 내 기억이 번진다. 이 영화관은 수많은 영화들의 묘지, 홀로그램 육체가 전시된 영상의 박물관이다.종이꾸러미 위에 놓인 철학자의 이름, 집중이 잘 안 되어서 독서는 접었다. 한시 사십분, 내 신체 안의 욕망이 두런두런 침묵을 잡아먹고 곳곳에 피어오를 때쯤, 영화가 시작된다.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내가 읽어야 할 새로운 이미지 꾸러미.

 

   1985년의 작가는 창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창작이란, 우리 주변의 인물들의 삶 속 이야기라고. 곧 이어질 영상들의 환상성과 가상의 공화국을 고려하면 궁금증이 떠오른다. 이 모든 가상적 이야기에 현실성을 부여하는 그 뻔뻔한 시도는 쓸데없는 무위인가, 아니면 당연한 행위인가? 그 문제에 대해선 아직 충분히 고민할 여유가 없다. 이내 시청자는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소나기에 맞아 죽어갈 소녀처럼 흠뻑 젖게 되니까.

 

 

 1968년의 젊은 작가는 신경쇠약 때문에 다 쇠락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요양 중이다. 지식인들이 걸릴 법한 그 신경쇠약의 근원은 무엇인지? 그는 우연히 호텔의 주인인 제로 무스타파와 조우한다. 눈에 뜨일 우울함을 얼굴 주름들 사이에 깊이 새긴 무스타파의 이국적 풍모가 작가의 시선을 끈다. 그들은 곧 편하게 말을 섞고, 무스타파는 근사한 저녁을 대접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제공한다. 이러한 일이 자연스럽게 가능했던 이유는 젊은 작가가 무스타파에게서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무스타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신경쇠약과 같은 우울함을 앓고 있다. 

 어찌 되었든, 이야기를 시작한다.

 

 

1부 무슈 구스타브 

 

       1932년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미래의 쇠락한 시점과 같은 건축 특징을 공유하지만, 발산하고 있는 에너지는 상당히 다르다. 이때의 호텔은 아름답고, 깔끔하고, 우아하고, 인기가 많은 장소이다. 그리고 그 구심점에는 일류 호텔지배인 무슈 구스타브가 있다. 구스타브라는 캐릭터는 자신의 일이 천직인 사람이다. 아마 그는 호텔지배인이 아닌 자신을 상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타고난 그는 세련된 것을 좋아하고, 자신의 미학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자기 손으로 관리하고 주도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아마 아름답지 않으면 삶에 큰 의미를 두지 못하는 인간 유형일 것이다. 그의 미학에는 그의 개성을 반영하는 특정한 취향이 잠재되어 있고, 그는 자신의 속물근성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나이 들고 돈 많고 권세 있는 귀부인 고객들에게는 카사노바 노릇도 한다. 그는 예술가이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전형적이고 전문적인 예술가. 마치 그림을 그리듯 자신의 구도에 무엇 하나가 맞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사람. 클리셰, 진부한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심지어 자신의 연인이자 윗사람인 마담 D에게도 손톱 색깔에 대해 조언한다. 자기 영감이 떠오를 때면 시도 외우고. 미학자 나셨다. 이쯤 되면 무조건 예뻐야 한다고 총까지 직접 제작 주문한 금자씨 수준이다.

      이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을 보고 배우게 된 제자는 바로 제로이다. 전쟁난민인 이 소년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institution이라고 표현한다. 나야 뭐 영어에 대해 크게 지식 없는 사람이니 영어사전을 참고했는데, 소년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어떤 이상적인 배움터로 생각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영화자막을 번역한 사람도 그러한 의미로 옮겨놓았고. 자신의 미학을 존중하고, 배우고 싶어 하는 어린 학도를 만났는데 어찌 구스타브가 매정하게 내쫓을 수 있으랴. 전반적으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미학을 가르치는 대학이고, 구스타브는 미학과 교수님이며 제로는 도제관계로 배우는 제자 꼴이다. 어쨌든, 그 때부터 제로는 로비 보이가 되어 구스타브의 곁에서 호텔에 대한 모든 것, 아니 정확히 말하면 호텔에 대한 구스타브의 '해석'을 배우게 된다.

      호텔이라는 사치 공간을 예술로서 창조하고 유지하는 사람들 말고도 음식으로서 예술을 펼치는 사람들도 있다. 혀 전반을 자극하는 달달한 버터크림, 코에 밀가루를 묻힌, 얼굴에 멕시코 모양 점이 있는 아가씨.

      아니, 그 아가씨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잠시의 망설임. 지금은, 말을 이을 수 없다.

 

 

2부 마담 D

 

 

      전쟁이 났다고 한다. 맙소사, 마담 D가 죽었다. 구스타브는 아끼는 술을 챙겨 기차를 타고 루츠 성을 향해 떠난다. 가는 길에도 고양이 오줌 맛 나는 술은 참을 수 없다. 우리의 로비보이 제로도 같이 있다. 그 둘은 바깥 풍경을 보며 기차를 타고 가는데 어느 수수한 곳에 다다르자 기차가 멈춘다. 한 무리의 군인들이 곧 객실로 들어와 그들의 정체를 검열한다. 구스타브는 문제가 없지만, 제로한테 문제가 있다. 개성을 검열하는 시커먼 파시스트 놈들 같으니. 유럽 놈들한테는 언제나 피부색깔이 문제다. 제로를 끌고 나가려는데 구스타브가 격렬히 저항한다. 그의 사치품에 대한 열망과 고상함에 대한 욕망과는 어울리지 않는 휴머니즘, 그것 역시 구스타브의 천성이다. 모를 일이지. 어쩌면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사람으로서 배척받는 외부인, 아웃사이더의 비통함을 참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사람은 결국 천성대로 살고, 반항하는 구스타브와 제로는 군인 남성들의 무장한 힘에 압도되기 직전이다. 그 때, 헨켈스가 들어온다.

      헨켈스는 어렸을 때 아버지의 손을 잡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간 적이 있는 군인이다. 그리고 구스타브의 아름다운 돌봄에 감동을 받았던 사람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은 사람에게 어떠한 신뢰를 보장한다. 이 사람의 정체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일종의 신분증 같은 것이다. 헨켈스는 구스타브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이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구스타브를 도와준다. 글쎄, 어떤 이들은 이 구사일생의 상황을 아직까지는 낭만이 통용되는 시기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후반의 무스타파가 하는 이야기지만, 구스타브가 꿈꾸는 세계는 이미 옛날에 죽은 지 오래이다. 어쩌면 구스타브가 세상에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사실 언제나 그렇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란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단 한 번도 자신이 꿈꾸는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원해 본적 없는 세상에 태어났다. 그렇기에 구스타브에게는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 자신의 희망이고, 그라는 존재가 추구한 가치의 따스함을 느낀 다른 존재가 그와 그의 동료의 목숨을 구했을 뿐이다.

      용케 목숨을 구하고 루츠 성에 입성한 그들은 그 집의 집사 서지 엑스, 그리고 죽은 마담 D를 만난다. 마담 D의 시체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배려를 다 한 구스타브는 이제 본격적인 갈등, 즉 이야기의 꽃에 접어들게 되는데 이때 들어가는 카메라 구도가 환상적이다.

      시체의 옆에 있던 문으로 카메라 시선이 움직여지고, 문이 차례로 열리며 카메라가 그 안으로 들어간다. 이 이야기가 영화라는, 창조라는, 인위적이라는 것을 알리는 예술가의 세심한 붓질이다. 케이크를 만들면서 장식을 놓치지 않는 제빵사의 손길이고, 리본을 꼭 묶어야 선물이라 믿는 자의 꼼꼼함이다. 게다가 이 구도는 단순히 기능적이지 않고, 분명히 위험한 인물들과 대면하며 본격적인 갈등으로 진입하는 주인공들의 운명을 알리는 종소리이기도 하다.

      호텔 주인의 법적 대리인이자 죽은 마담 D의 유언집행인인 변호사 코박스는 곰 조각상 옆에 선다. 중후한 그의 앞에는 떡고물을 바라는 수많은 일가친척들이 시체를 노리는 독수리들처럼 허공을 앉은 채 맴돌고 있다. 그 중에는 죽은 이의 진정한 친구였던 구스타브와 그의 로비보이도 껴있기는 하다. 하지만 독수리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살점을 물어뜯을 자격이 있는 맹수들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강렬한 남성성과 검은 코트, 콧수염, 머리, 까만 눈을 자랑하는 날선 코의 드미트리와 그의 충직한 금이빨의 사냥개가 조용히 앉아 있다. 강렬한 배우들이 불꽃 터지듯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그 긴장 넘치는 순간, 고인의 미술 작품 '사과를 든 소년'이 fruit인 구스타브의 손에 떨어지게 되고, 그와 동시에 드미트리의 컵도 바닥으로 떨어진다.

      성정체성을 공격하는 드미트리의 여러 욕들을 들으며 구스타브는 자신의 기분에 대해 전혀 생각조차 해주지 않는 못돼먹은 드미트리와 맞서게 된다. 전형적인 마초성의 눈에 호텔의 아름다움을 관리하는 구스타브는 확실히 이상한 놈처럼 보이긴 할 것이다. 쟤가 남자이긴 한가? 게다가 욕심 많은 아들은 모든 것을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데 마음에도 안 드는 이 이상한 놈에 의해 그 꿈이 좌절되었으니, 더 화나는 건 그 놈이 자신의 어머니와 섹스까지 했다는 사실이다. 생각해 보시길. 저런 인간한테 게이 혹은 바이섹슈얼로 보이는 남자가 자기 어머니와 잤다는 사실은 세상에서 가장 믿기 힘든 불편한 진실일 것이다. 관객의 상당히 중립적인 눈으로 보기에도 드미트리와 구스타브는 서로 생각과 수준이 맞지 않는 사람들이다. 다른 취향에, 다른 세계를 사는 이 사람들의 조우란. 그들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확실히 너무나도 다르다. 그러니 폭력적인 갈등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아니, 마초성과 폭력성을 지향하는 입장에선 이 비정상적인 '괴짜'는 탄압해야만 한다. 이제 그리고 신나는 주먹싸움 장면! 드미트리도 퍽! 로비보이도 퍽! 마지막으로 강펀치를 날리는 것은 조플링이다. 폭력으로는 이 프라다 가죽 재킷을 입은 남자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

      그림을 보게 된 제로와 구스타브는 사과를 들고 있는 소년의 그림을 얼른 빼서 그 자리에 춘화를 대신 건다. 그림과 기밀서류를 주인 몰래 은근슬쩍 포장해준 서지의 떨떠름한 얼굴과 작별한 그들은 기차에 다시 몸을 싣는다. 가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구상하는 구스타브, 그의 과거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이다. 한 번도 본인이 이야기를 해준 적 없으니까. 어쩌면 구스타브의 과거는 최악의 인간이었을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엄청난 시련과 비극의 주인공이었을 수도. 아니, 아니. 어쩌면 그냥 평범했을 수도. 그러나 누구한테 그것이 중요할까? 그의 현재 삶은 호텔 예술인, 상속 받은 명화를 그 집에서 챙겨 도망가는 죽은 노파의 정부이니 말이다. 그의 창조적 오늘이 그의 어제를 죽인지 오래다. 그리고 이번에 그는 또 한 번 명화에 대한 가치와 자신의 생명에 대한 두려움으로 명화를 팔고 도망갈 구상을 한다. 그를 마냥 비장하고 거창한 인간으로 만들지 않는 중요한 요인은 바로 그의 그러한 소시민적인 모습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이웃집의 조금은 유별난, 수채화 그리는 텔레비전 속 밥 아저씨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러한 독특한 평범함 말이다. 어쨌든 이 김에 구스타브는 제로를 자신의 상속자로 위임하게 된다. 물론 내용을 살펴보면 상속자 겸 시종이긴 하지만. 그래도 1.5%는 너무 심한 거 아닌가? 하긴, 이러한 박함도 일종의 소시민성이라 간주해줄 수는 있다. 여기서 20%를 떼어 준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하다.

      호텔로 무사히 도착한 줄 알았더니, 이런, 경찰이 그를 찾는다. 헨켈스는 마담 D의 살해용의자로 구스타브를 연행한다. 튀려고 하지만 잡힌 그. 그리고 그는 더 깊게 영화 같은 수렁에 빠지게 된다.

 

 

3부 체크포인트 19 교도소

 

 

       멘들 빵집의 양과자를 챙겨 온 제로는 멍 자국이 얼굴에 잔뜩 난 구스타브와 만난다. 제로는 그에게 핵심 증인인 서지가 사라졌다는 말을 전한다. 물론 감옥 안에서도 구스타브는 삼류 소설책의 지침을 충실히 따르며 자신의 삶의 원칙을 여전히 쫓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삼류 소설책의 내용이 그에게 실제로 도움을 주긴 한다는 것이다. 환상의 세계는 실제의 세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가상과 실제의 경계가 모호하다. 자신이 믿고 인식하는 것이 우리의 세상을 이룬다. 우리의 형이상학이 우리의 현실에 침투한다. 참으로 구스타브답게 이 와중에도 그는 두고 온 호텔을 걱정한다. 자신이 만들어 낸 창조물을 걱정하는 것이 창조주의 의무라도 되는 듯이. 하지만 서지의 여동생을 찾아가 위협하는 무서운 조플링의 모습을 본 관객들에게 있어서는 그의 걱정이 참 절로 걱정스럽다.

      교도소 안에서도 열심히 옥수수 죽을 나르는 구스타브는 결국 여기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로 만들 기세이다. 우리의 영혼을 묶는 것이 목적인 이 교화소는 예술가를 비참하게 만들 수 있을지언정 예술을 지향하는 마음을 죽이지는 못한다. 사실 아름다움을 쫓는 마음은 어디서도 죽이지 못한다. 게다가 구스타브의 영혼은 누구보다도 자유롭다. 그는 칸막이 지워지고, 고정화 되고, 세분화된 공간들에서조차 그 사이로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마치 호텔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런 그의 모습이 항상 어둠 속에 수용되어 있던 인상 나쁘고 덩치 좋은 사내에게는 뱃속을 든든하게 만들어줄지 모른다. 어떤 인간은 클리셰가 아닌 존재에 감탄할 수 있을 정도로 섬세한 감각을 잃지 않기 때문에.

      들고 온 멘들 양과자를 4등분한 채 쪽쪽 손가락까지 빨아먹는 죄수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다. 그들의 죄가 무엇이든, 그들의 평소 생활이 어떠했든, 아름다움, 맛, 향은 우리 모두에게 즐거움을 준다. 교도소, 사회의 비정상적 인간들을 잡아두는 것이 목표인 이 인간성 말살의 공간에서 그들은 달콤한 양과자를 먹으며 탈옥을 꿈꾼다. 아직 그들의 영혼은 죽지 않았다. 죽일 수도 없다! 그들은 자신의 인간성을 수호하기 위해 탈옥계획을 짠 상태이고, 구스타브에게 그 계획을 제안한다.

      가끔 생존을 위해서는 놀랍게도 사치품이 필요하다. 물론 사치품 없어도 어떻게 살기야 하겠지. 동물들도 사치품 없이 잘 사니까. 그러나 꽉 막힌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끔 여유라는 것을 가지고 다른 방향으로 현 상황에 대해 질문해 볼 필요도 있다. 예를 들어, 멘들 빵에 칼을 몰래 가져온다든지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교도소 안으로 칼을 빵 안에 숨겨 보내는 것이 가능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한 용기라는 자질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우리 모두에게 용기라는 것이 있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었겠지.

 

 

 무스타파는 눈물을 멈출 수 없다. 그의 깊은 의식을 과거에서 현재로 끌어올리는 유일한 주제는 그녀, 아가사, 즉 사랑이다. 사랑, 언제나 가장 강력한 것 중 하나이다. 우리는 살아있는 존재로서 나와 사사건건 대립하는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마냥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세상 모든 것들을 대상으로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예술행위 중에서, 가장 강렬한 감각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은 사랑이다. 가장 온전한, 순간의 보관소. 그렇기에 몇 십 년이 지난 지금, 소년 제로가 아닌 할아버지 무스타파가 자신의 아가사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

 

 

      우리는 빵과 소시지는 벌컥벌컥 썰 수 있다. 빵과 소시지야 원래 썰어먹는 것이라 해도, 멘들 양과자는 한 번 썰면 모양이 붕괴한다. 멘들 양과자를 당신이라면 썰어낼 수 있는가? 아마 몰인정한 사람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아름다운 것을 좋아한다. 아니라고 감히 내 앞에서 말해보시지. 단지 우리에게는 차이로서 아름다움이 존재할 따름이지, 아름답지 않은 걸 사랑할 순 없다. 당신이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 친구들한테 물어보라. 그 사람이 아름답냐고 아름답지 않냐고. 우리는 다른 이들의 대답과 상관 없이 항상 그 대상을 사랑한다. 왜냐면 우리의 두 눈에선 그 사람이 아름답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하는 그 모든 것들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우리의 눈을 통해 본 아름다움이든, 정말 그 대상 안에 잠재해 있든 간에. 아름다운 것은 우리의 마음 안의 깊숙한 본능, 열망을 일깨운다. 그 열망은 단순한 육체적 쾌락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데, 왜냐하면 그 열망이 우리가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즉, 종교적 차원이다. 우리에게 삶을 사는 근거를 주는 존재의 성질은 아름다움이다. 내가 왜 저 사람을, 내가 왜 이러한 선택을, 내가 왜 이러한 삶을 사는지, 그 근저에는 그 방향 안에서 어떻게 하면 추해지지 않고 나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유지하며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안타까운 우리만의 발버둥이 있다. 다만, 그 선택이 이 세상의 수많은 것들처럼 클리셰인지 아니면 자신만의 것인지의 차이가 있겠지만. 

      변호사 코박스가 자신의 신념을 지킨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죽은 이의 수수료, 그런 게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그냥 이 못돼먹고 무서운 불한당들에게 고개 한 번 조금 숙여주면 고양이가 떨어져 죽을 일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놀랍게도 무시무시한 생존본능보다도 다른 것을 선택할 때가 있다. 산다는 것 자체보다도, 어떻게 사는지의 방향을 더 중요시하면서 정할 때가 있다는 말이다. 다리가 후들후들한 데도 해야 할 말을 하게 되는, 그러한 이상하고 불길한 순간. 가진 모든 것을 날려버리게 될지 몰라도.

      그러나 불한당들이 그러한 선택의 아름다움을 알 정도로 생명을 사랑한다면, 불한당들이라고 불리울지 아니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키운, 당신이 시간을 들인 것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당신의 가까운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멀리 하라. 천성이 잔인한 사람이니. 이 영화에서 미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하이라이트 중 한 부분은 모순적이게도 코박스가 살해되는 장면이다.

      코박스는 고양이의 시체를 쓰레기통에 넣고 쿤스트 박물관으로 들어간다. 자신을 뒤쫓는 살인마를 피해 15분이 남은 박물관을 선택한다. 이 어찌나 괴상한 선택인지. 하긴 그는 자신의 인생이 15분 남았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부분의 장면들은 기본적으로 이 영화의 다른 수많은 주요 장면들처럼 인위적이고 가상적이며, 환상적이다. 모든 것이 진실로 있었던 일인 것처럼 시치미 뗄 때는 언제고, 갑자기 내가 바로 영화라는 티를 팍팍 낸다고 해야 할까나. 폐관 직전의 아슬아슬함과 사람 없는 조용함 속에서 살인마와 변호사의 그림자가 서로를 의식한다. 박물관 안의 반복적인 전시품들과 바닥의 타일 무늬는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감을 낳게 한다. 강박적이고, 편집증적인 반복 속에서 우리는 이 추격전이 언제 끝날지 조마조마하게 지켜본다. 보이지 않는 살인마의 구두 소리만이 끔찍하게 크게 들린다. 코박스가 출구를 찾기만을 간절히, 수동적으로, 그 세상의 건너에서 지켜보는 우리는 살인마가 신발을 벗는 순간을 목격한다. 하나의 아름다움이 지는 것을 막을 수 없겠구나, 탄식하는 순간 손가락 네 개가 똑 떨어진다. 여성 관객의 비명이 들린다. (두 번 다 영화관에서 봤는데, 두 번 다 그랬다.) 손가락들을 수거해 가는 조플링의 뒷모습이 시선에 잡힌다. 삶에의 의지 하나가 세상에서 거세당했다.

      한편, 감옥에서 탈옥이 시도된다. 이 탈옥 장면은 꽤나 우습고, 어찌 보면 복고적인 느낌을 준다. 하나하나의 과정이 끝날 때마다 보물섬을 찾아 떠나는 아이들의 여행처럼 일사천리이다.가끔 장애물들이 나타나지만 무리 없이 장애물들이 제거된다. 구스타브 덕분에 배가 불렀던 덩치 큰 죄수가 그들의 탈옥을 돕는다. 구스타브는 빠짐없이 감사를 표시한다. 당한 거나 갚은 거나 잊지 않는 구스타브의 꼼꼼한 성격은 역시 큰 자산이다.

      하나의 권력 체계, 거대한 힘으로부터 탈출하는 네 마리 생쥐 중 한 마리 생쥐가 순직을 하고 만다. 필수불가결한 희생에 구스타브와 나머지들은 어깨를 으쓱한다. 그래, 우리가 그렇게 큰일을 하고 있는 거야. 그들은 앞으로 달려 나갈 뿐이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정신인 것인지, 아니면 영화라서 그렇게 묘사가 되는 건지. 아마 후자일 것이다. 이런 종류의 무용담은 오히려 이렇게 배수관 구멍 뚫듯이 막힘이 없어야 하는 법이다. 예를 들어 14대 1로 싸웠다는 전설적인 이야기처럼. 어쨌든, 그들은 쓱싹쓱싹 탈출하고, 무사히 밖으로 빠져나온다. 우리는 그저 영화 보듯 보면 된다.

      나오자마자 구스타브는 제로에게 성질을 부린다. 나머지 죄수들은 버스를 갈취하고 총총 퇴장한 상태이다. 제로는 그의 이기적인 횡포에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가끔 사람들은 투정을 부리기 마련이고, 구스타브도 그러한 때이다. 이를테면 자기가 당한 거대 권력의 횡포로부터 비참했기 때문에 밖에 나와서 자기의 작은 도제 소년한테 종로에서 맞은 뺨을 한강에서 푸는 격이다. 그러나 그들의 작은 실랑이도 얼마 되지 않아 끝난다. 구스타브는 그렇게 못되고 이기적인 놈이 아니다. 그는 남의 감정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아마 그러한 이유는 구스타브 자신이 자신의 감정을 그만큼 중요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순간들이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임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폭력적인 사람이 아니다. 어쨌든 싸움을 마무리한 그들은 시를 공유하며 어긋날 위기였던 감정을 매듭짓는다. 이러한 순간에도 시를 꼭 암송해야 해? 물론 그렇다. 이러한 순간이니까. 그렇지만 일단 도망친 다음에 더 듣자고.

      그러나 공권력이 그렇게 만만한 존재들은 아니다. 탈옥한 장소를 꼼꼼히 살피는 헨켈스의 고개는 여러 방향에 머물러 있다. 그의 시야는 전체에 머물러 있다. 그것이 바로 공권력이다. 하지만 그 공권력 밖에는 가끔 공권력보다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거대한 사적 권력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어느새 현장에 들어와 있는 조플링을 헨켈스가 내쫓는데, 조플링을 애초에 이곳에 들어올 수 있게 했던 것은 그의 뒤에 있는 한 가문의 가세 때문이다. 어쨌든, 사냥개 노릇을 잘 하고 있는 조플링은 멘들의 양과자 맛을 이미 맛본 상태이다. 너무 몸집이 크고 시야가 광범위해서 우둔해 보이기도 하는 공권력과는 다르게, 훨씬 더 날쌔게 개인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사적 권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공권력과 사적 권력의 압박이 강해지는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구스타브는 어떻게 다시 한 번 구사일생의 기회를 잡아야 할까? 일전에도 말했지만, 구스타브를 구할 수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구스타브 자신이다. 그가 이때껏 해왔던 것처럼, 그는 그 자신답게 이 모든 일을 해결해야 한다. 그것만이 길이기 때문에.

 

 

4부 십자열쇠협회

 

 

      십자열쇠협회는 일종의 예술가 서클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무려 다섯 명의 호텔 지배인들에게 연락이 간다. 그 호텔은 모두 아름답고, 각자만의 개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들 곁에는 역시 로비보이들이 있다. 아름다움은 그 고유의 씨를 뿌리고 전파되는 속성을 갖고 있다.

      그들은 기꺼이 구스타브를 도와준다. 이들의 권력은 상당히 미시적이라서 소믈리에와도 인맥이 닿는다. 그들이 공권력처럼 대단한 수의 경찰,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름다움의 영역에선 확실히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들도 어떻게 보면 막강하진 않을지 몰라도 하나의 사적 권력이다. 구스타브에게 무려 향수도 챙겨주는 걸. 비록 조금 소량이긴 하지만. 그리고 그들은 분명 그걸 돈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다. 구스타브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애초에 갖고 있던 구스타브에 대한 존경심이 구스타브를 살렸다.

      잘 생기긴 했지만 예술에 관심 없는 드미트리가 그림이 바뀐 것을 아는 것도 드디어 이맘때쯤이다. 도대체 여자 성기가 다 보이는 동성애 춘화랑 얌전한 소년이 사과를 든 그림이랑 바뀐 걸 이때껏 알아채지 못한 건 대체 뭐란 말인지. 그만큼 드미트리가 '예술적인 아름다움'에 관심이 없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드미트리 본인한테서는 수컷냄새가 풀풀 난다는 매력이 있다. 그리고 그건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들의 폭력성 자체가 또 다른 종류의 매력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 중 아름답지 않은 존재는 없다. 위험한 악당도 어떤 의미로는 아름답긴 하다. 모든 생명이 갖는 의지는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다만 각자의 취향 차이와 윤리적 문제가 걸릴 뿐이지. 애초에 조플링이 모는 오토바이부터 장난이 아닌 걸.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하이라이트는 역시 이 산꼭대기 정상에서의 활극일 것이다. 서지의 메모를 바탕으로 모든 인물들이 모여드는데, 물론 우리의 구스타브는 향수를 꼭꼭 뿌려주시기 때문에 그 냄새를 만인이 알아챈다. 그리고 서지를 찾아 제로와 구스타브는 산꼭대기 위까지 올라가게 된다.

      이 부분의 아름다움을 문자로 설명하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다. 우선 음악부터 그들의 활극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수도사를 처음 만나는 부분은 케이블카의 중간에서이다. 케이블카가 멈추어서 끼익-거리는 소리가 음악과 조화를 이룬다. 그들은 수도사들의 도움을 받아 계속 올라가게 되고, 수도사 옷을 차려입게 되며, 심지어는 그들의 음악까지 참여하게 된다. 대충 그렇게 수도사 4명을 거쳐 그들은 고해성사를 하러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서지와 만나게 된다. 그들의 급박한 만남에서 그들은 서지가 사본을 챙겼다는 중요한 비밀을 접하게 되지만, 그 순간에 서지는 살해되고 만다. 조플링 역시 수도사 복장을 차려입고 어느새 들어와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스키, 썰매 추격전을 벌이게 된다.

      이 부분 역시 놀라운 영화적 기교를 자랑하는데, 이 장면을 미니어처로 만들었다고 하니 그 작업이 매우 번거롭고 수고로웠을 것 같다. 그러나 고생한 값어치를 한다. 상승에는 수많은 버퍼링과 반복이 걸렸지만, 내려갈 때는 씽씽 무지막지한 속도감을 자랑한다. 산에서의 활극은 감옥에서의 탈출처럼 순조로우면서 동시에 여러 과정을 거치는데, 확실히 현실감을 주는 요소는 아니다. 맨 처음에 작가가 분명 우리는 놀랍게도 현실에서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받는다고 말하지만, 이러한 영화적 처리는 그 진술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바로 핵심이다. 우리의 기억, 우리가 갖는 현실이란 것을 생각해보자. 어차피 우리의 관점이라는 하나의 예술이 모든 현실적 순간들을 윤색하고 왜곡한다. 그 의미부여는 한때 사실이었던 것을 환상으로 만들어버린다. 예술은 우리의 인생이 바로 그러한 것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은유이다. 우리는 항상 예술적 삶을 살고, 그렇기에 환상과 세계는 구분될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스키를 타고 내린 조플링과, 절벽에서 죽을 위기에 처한 구스타브가 마지막 위협 앞에서 시를 읊조리는 장면은 기가 막히다. 구스타브는 자신의 인생을 수없이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며 사는 인간 유형이다. 그는 삶 속에서 그것을 실천해내며 자신의 삶을 클리셰가 아닌 살아있는 창조물로 만들어낸다. 그가 갖는 소시민성을 그의 그러한 예술성이 압도한다. 그리고 그의 예술성은 그 자신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는 순간에도 굴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의 미적 자식이자 형제인 제로가 선방을 날려 조플링을 ‘제거’해버리는 것은 통쾌한 한 방이다. 그들의 예술성이 드디어 그들의 의지를 위협하는 하나의 의지를 제거하였다.

      공권력이 때마침 등장하여 굴복을 권유하지만, 그러한 권유에 제로와 구스타브가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서지를 위한 묵념을 잊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대단원도 하강세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5부 두 번째 유언의 사본

 

 

      마지막 전쟁의 시작이다. 팔에 완장이 걸쳐진 군인들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점령한지 오래이다. 자신의 근거지가 그 꼴이 난 것을 보고 통재를 금치 못하는 구스타브. 그의 미학이 사라지고 다른 인간들의, 다른 시대의 물살이 넘실거린다. 이 와중에 최종 보스인 드미트리가 호텔에 들이닥치고, 그는 그림을 빼내는 데 성공한 아가사와 그림을 알아본다. 호텔 6층까지 따라간 드미트리는 아가사와 추격을 시작하는데, 곧 뒤따라온 구스타브와 제로와 맞닥뜨리게 된다. 분노한 드미트리는 총을 꺼내어 발사를 한다. 그리고 곧 한편에서 시작된 총성에 놀란 다른 편의 군사들도 총을 꺼내어 제각기 발사를 하기 시작한다. 전쟁에 대한 훌륭한 은유가 시각적으로 구현되었다. 우리는 아무 이유 없이 총질을 시작하고, 자신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에 다 같이 총질을 시작한다. 이 의미 없는 폭력전 아래서 사랑에 집중한 제로는 아가사와 함께 멘들 빵 위로 떨어짐으로써 목숨을 구하고, 그들은 그림 뒤에 숨겨져 있던 두 번째 유언의 사본을 발견한다.

      그 사본은 결국 공권력, 사법부에 의해 인정받게 되고 모든 것은 구스타브의 몫이 되며, 드미트리는 사라진다. 그러나 결말이 해피엔딩인가?

      제로는 후계자가 되었고, 아가사와 결혼하여 몇 년을 살았지만 아가사와 아이는 프로이센 독감이라는 병으로 죽었다. 역시, 현실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아무리 아름답고 용감한 존재라도. 그리고 전쟁이라는 커다란 물살로 인해 공화국은 사라졌다.

      구스타브는 언젠가 벌판 앞에 선 기차에서와 똑같이, 똑같은 선택, 똑같은 행동을 한다. 참 변함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순간에서는 그의 아름다움조차 그를 구해주지 못한다. 어쩌면 그렇기에 그 때가 그의 마지막인 것이겠지. 시대가 변한 것일까? 글쎄. 그렇지 않다. 어쩌면 영화는 이 부분에서야말로 흑백화면을 통해 이것이 현실이고, 진실임을 말해준 것일지 모르겠다. 운이 좋았던 어느 날의 그 기분 좋았던 때가 아닌, 우리를 먹어 삼켜버린 잿빛 하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우울한 사실. 아무리 우리가 아름다움을 쫓아도 결국 진정한 의미에서 생존을 언제나 보장받을 수 없는 때가 존재한다는 비참한 진실. 그의 죽음이 나오지 않은 것도, 그의 죽음을 영화처럼 다루지 않은 것도 감독의 그러한 슬픔에서 기인할지도 모른다. 감독은 예술인의 입장에서 구스타브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어찌 되었건, 여전히 호텔에는 그림이 매달려 있다. 적자를 감수하고서도 지키고 있는 이 호텔에서 무스타파의 뒷모습은 살짝 쓸쓸해 보이기도 한다. 그는 구스타브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 아가사와의 추억을 위해 이곳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구스타브와의 기억은 그에게 아마 이젠 방법론적인 문제, 그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그 자신에게 녹아든 무엇일 것이다. 구스타브의 세상을 살아가고자 한 미적인 노력이 무스타파의 몸에 베인지는 오래였을 것이라 본다.

 하지만 무스타파에게 몸에 베인 것과 다른 문제인 것이 사랑이다. 그것은 기억이다. 한 사람과의 우정과 의리를 통해 배운 것들이 몸에 남은 것과는 다른 문제로, 이젠 가버린 영원한 순간을 영원하지 못한 것으로 잡아두려는 애탄 노력. 그렇기에 호텔은 낡아가고 있고, 마찬가지로 무스타파 역시 늙어가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그가 우울해 보였던 이유일 것이다.

 

 

   노작가의 집은 새로 페인팅 중이다. 과거를 다 말한 그의 곁에는 손자가 있다. 새로운 희망이 이어지고 있다. 창작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새로운 것을 쓰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변에서 창작의 방법을 찾아나간다. 작은 순간순간에 있어, 항상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우리는 우리의 방법을 지향하기 마련이다. 우리의 삶 자체가 예술이다.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채워나가는지, 어떻게 그려나가는지가 문제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창작의 요소를 현실에서 채워나간다. 그 방법은 영화감독으로라도 좋고, 가정주부라도 좋고, 호텔 지배인으로도 좋고, 빵 굽는 사람으로도 좋고, 한 사람의 애인으로서도 가능하고, 한 사람의 친구로서도 가능하다. 그것 역시 우리가 만들어 나가는 것, 우리는 어차피 언제나 우리만의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간다. 말했듯이, 클리셰로 남든 클리셰를 벗든 그것 역시 하나의 선택이 될 수 있겠지만. 어차피 모든 사람이 알아봐 줄 필요 없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알아봐줄 지기를 찾는다면 될 문제이다.

 

      묘지 안의 여자가 책을 다 읽고 덮듯이, 스크린에 배우들의 이름이 하나씩 올라간다. 두 번 본 것을 다시 볼 필요는 없겠지. 나 역시 영화를 다 읽었으니 이제 나가야 할 차례이다. 새로운 순간이 이젠 기억으로 다시 전환되고, 이제 다시 이곳에 나의 기억 조각 하나를 남기고 떠나련다. 길었다. 이만하면 되었다. 새로운 나를 찾아, 새로운 순간을 창작하기 위해 간다. 안녕,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이 세상의 모든 예술가들, 존재들을 위해 축배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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