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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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문예지 󰡔인간과 문학󰡕 2016 봄(제13호) 기고글

 

생존으로 사랑을 증명한 자의 이야기

-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The Revenant)」 평론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이하 「레버넌트」)는 글래스의 과거를 잠깐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런 다음, 화면은 곧 현재의 사냥 장면으로 넘어간다. 카메라가 뱀처럼 화면 위를 미끄러진다. 호흡이 길고, 시선의 곡선이 잘 끊어지지 않는다. 카메라가 호기심이 아주 많다. 사냥에 집중한 인물들을 이리저리 살펴본다. 가죽을 모으던 백인들이 원주민 부족의 기습을 받아 도망가는 장면처럼 급박한 순간에도 그렇다. 카메라는 유유히 좌우와 앞뒤, 그리고 위까지 올려다본다. 조금 어지러울 정도로 현란하다.

   인상적인 것은 인간들의 전투와 별개로 원거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자연이다. 인공 조명으로는 줄 수 없는 자연의 풍성한 햇빛이 영화를 가득 메운다. 장면에 인물만 있지 않고 산천초목이 어느 틈 사이에라도 자리한다. 만물이 적셔진 화폭은 풍성한데, 소리가 없다. 음악은 절제되어 있고, 대사도 마찬가지다. 풍경은 관조한다. 욕망, 증오, 살인, 복수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카메라는 화면을 집요하게 쳐다본다. 가끔 카메라가 인간을 보는지, 아니면 자연을 보는지 헷갈린다.

   곰이 글래스를 덮치는 장면은 기막히게 아름답다. 감독은 자연의 비정함을 외면하지 않는다. 자본의 힘은 사람들로 하여금 비릿한 현실에 달콤한 당을 입힌다. 우리를 지치게 하는 현실의 차가움이 곰의 압도적인 힘으로 대변된다. 인간이 왜곡한 곰의 여러 상(狀)을 뒤로 하고, 새끼들을 거느린 어미 곰은 본성대로 움직인다. 곰의 공격성은 당연하다. 글래스는 곰의 영역을 침입했다.

  글래스는 여러 번 내쳐진다.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단칼에 죽이는 것은 인간들의 낭만이다. 곰은 인간의 감각에 관심이 없다. 냄새 맡고, 건드리고, 물 뿐이다. 글래스에게는 한 가지 선택밖에 없다. 곰을 죽이는 것이다. 곰의 사정을 봐주는 것은 선택지에 있지 않다. 새끼 곰들을 향한 동정 역시 인간의 환상이다. 그곳에는 삶과 죽음만이 존재하며, 양 갈래의 길은 인간과 비인간을 차별하지 않는다. 자연은 공평히 무관심하다. 카메라는 글래스가 받는 고통의 일격들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공격당하는 그의 난관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대체 언제 끝나는지 모를 곰의 공격이 무섭고 끔찍해 신음소리를 내는 관객을 뒤로 하고, 글래스는 단도를 꺼내 있는 힘껏 곰을 찌른다. 결국 그는 산다. 카메라는 인간의 승리를 보지 않는다. 카메라 렌즈가 지켜본 것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다른 운명을 향하게 된 두 존재다.

   글래스와 혼혈아인 글래스의 아들에게 계속 시비 거는 피츠제럴드는 아주 평범한 인물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원주민을 야만인이라고 생각했다. 원주민들에게 머리가죽이 벗겨진 적도 있다. 그에게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목숨이다. 그는 브리저에게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말해준다. 목숨이 위험할 때, 피츠제럴드의 부친은 언덕에서 다람쥐와 마주쳤고, 굶주린 그에게 다람쥐는 신으로 보였다. 이처럼 피츠제럴드에게 신은 혹독한 세계에서 인간의 삶을 위해 그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다. 그는 이기적이다. 그에게 다른 존재들은 자신보다 중요하지 않다. 그는 자기가 잘 사는 것만 중요하다. 그의 신은 그에게만 자비롭다. 글래스의 죽음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된 것도, 글래스의 아들인 호크를 죽인 것도 그에게는 그저 그의 부친이 언덕 위에서 만난 다람쥐를 잡아 배를 불린 것과 같은 이치다.

   글래스의 아들이 목숨을 잃은 그곳은 을씨년스럽다. 하지만 동시에 매우 아름답고 고즈넉하다. 곰과의 사투 끝에도 죽지 않은 글래스의 끈질긴 삶이 피츠제럴드에게는 성가셨다. 하루 이틀 기다리던 피츠제럴드는 글래스에게 제안한다. 죽여주길 바란다면 눈을 깜박이라고. 눈을 움직이지 않는 글래스. 피츠제럴드는 말을 잇는다. 아들이 죽기를 바라는가? 어차피 곧 죽게 될텐데 모두 죽기를 바라는가? 글래스는 눈을 감는다. 신체적 한계 때문인지, 아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인지는 불확실하다. 분명한 것은 글래스가 아들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목을 조르는 피츠제럴드를 보고 놀란 호크가 소리를 질러대자, 피츠제럴드는 호크의 배에 기다렸다는 듯이 칼을 박는다. 이때 누가 자신을 보기라도 했을까봐 눈을 굴리는 피츠제럴드의 얼굴이 인상적이다. 브리저는 멀리 있고, 글래스는 누워 있다.

   피츠제럴드의 연기에 넘어간 브리저도 글래스를 남기고 떠나게 된다. 비참하게 남겨진 글래스는 네 발로 긴다. 아들의 죽음을 확인한 그는 아들에게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그런데 카메라가 갑자기 그들에게서 관심을 거둔다. 글래스의 거친 숨소리를 배경음으로 흐릿한 먼 설산의 봉우리가 비친다. 이 3초 이상의 응시가 인간사를 아득하게 만든다. 아들의 죽음과 글래스의 슬픔은 범사다. 눈 내린 산과 희뿌연 안개는 한 인간의 비극에 어떠한 응답도 해주지 않는다.

   세계의 무응답은 아름다운 배경이지만 서사는 아니다. 인간의 추상적인 말이 행위로 실현되듯, 글래스의 복수는 생존이라는 능동적 행위들을 전제로 삼고 그것이 이 영화의 이야기다. 영화는 글래스가 어떻게 자연의 역경과 원주민의 공격 속에서 살아남는지를 비중의 반 이상으로 둔다. 타당한 전개다. 글래스는 우선 살아남아야 한다. 관객들이 그 지난한 과정에 피곤할 수도 있지만 생존 자체가 그의 복수다. 그는 자연을 견디고, 온갖 위협을 거치면서도 자연물들을 활용한다. 세계의 무관심과 별개로 그는 스스로를 일으키는 자다. 그는 신이 남긴 사체의 복부를 가르고 그 안에 들어가 추위를 견뎌낸다. 그는 신을 먹고, 신의 냉기에 시달린다. 그러나 그가 하루하루 사는 것에 급급해서 그 고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길을 기어서라도 가고 있을 뿐이다.

   글래스는 끊임없이 피츠제럴드가 자기 아들을 죽였다는 기억을 되뇐다. 험준한 눈보라를 피해 동굴에 몸을 의탁하는 순간에도, 아무것도 없는 눈밭 위에서도, 피츠제럴드가 자기 아들을 죽였다는 사실을 쓴다. 묵묵히 살아남는 것에만 집중하니 말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 찰나에, 그가 언어를 전혀 잊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는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 자신의 과거와 감정과 서사를 잊지 않았다. 험로에서도 계속 마주하는 스스로의 무의식에서도 그는 끝없이 꿈과 환영으로 사랑과 과거를 정초시킨다.

   현실적이고 긴 카메라의 호흡 속에서 드문 빈도로 짧게 드러나는 장면들은 플래시백이다. 그 플래시백들을 통해서 우리는 글래스의 일면을 엿본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언어화하지 않는 유형의 사람이다. 그는 행동하는 사람에 가깝다. 그의 사랑과 기억은 꿈속의 짧은 접촉 장면과 여자의 음성으로만 드러난다. 코와 코를 맞대고 가깝게 있는 여인과 그, 아들과 셋이서 웅크리고 자는 모습은 그가 준거점으로 삼은 마음의 고향이 어디인지를 보여준다. 또한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여자의 속삭임은 그의 내면에 그의 사랑이 얼마나 깊히 박혀있는지 말해준다. 그러나 그 고향은 파괴되었고, 여자는 죽었다.

   글래스가 옛날에 미군장교를 죽인 이유는 단순하다. 그에게 국가의식 같은 거시적이고 추상적인 관념들은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가 사랑한 여자와의 결실이요 상징인 아들의 목숨이었다. 미군장교를 살해하는 것이 앞으로 그의 삶에 어떤 장애가 될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장교를 죽이고 아들을 보호했다. 그는 현실에 굴하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아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 정도로 소중히 여겼던 아들도 죽었다. 하지만 아들은 죽어서도 그의 마음에 머문다. 아들의 시선이 남아있는 한 글래스는 숨을 멈추고 포기할 수 없다. 아들의 곁에 남겠다는 맹세는 아내의 곁에 남아있겠다는 맹세이기도 하다. 그들이 그의 무의식을 장악하고 있다. 인간이 긴장을 풀 수밖에 없는 꿈속에서 그들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녀는 죽었지만 그를 아직도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글래스는 숨을 멈추고 포기할 수 없다. 그에게 피츠제럴드를 죽이는 것은 그들을 잊지 않았음을 보이는 유일한 입증 방법이다.

   가끔 복수를 하려는 자들이 복수 행위 자체에 매몰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를 잘 보여주는 예시가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이다. 그 영화의 주인공은 약혼녀를 죽인 살인마의 심연을 바라보다가 자기가 그 심연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는 자신이 결코 가질 수 없는 폭력성을 흉내 낸다. 그러나 그는 그 폭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한 복수는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하지만 동정심이 들 뿐, 공감은 할 수 없다. 비이성과 광기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레버넌트」의 복수극은 이성적이고 차분하다. 무절제하지 않고 단계적으로 정합적이다. 그의 보복 행위는 스스로 살아온 삶의 환경과 맥락에서 파생한다. 그는 과거를 방기하지 않는다. 자신이 선택하고 서술해낸 삶의 서사를 끝까지 지키고자 노력한다. 만약 한 사람이 자신을 이룬 모든 것들을 부정해버린다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무자아(無自我)다. 기억이 없는 자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이고, 기억을 버리는 자는 자기 자신을 생매장 하는 자이다. 글래스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 자신의 의무를 반복적으로 글과 꿈에 새겼다.

   글래스가 전초 기지에 귀환하자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이 두려움과 경이로 가득 찬다. 그의 생존은 모두에게 기적이다. 유령의 귀환에 겁에 질린 토끼가 잔뜩 내달린다. 피츠제럴드는 자신의 발을 묶어놓았던 돈을 훔쳐 달아난다. 글래스는 사냥을 시작한다. 차분하게 총을 들고,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숲 속을 응시한다. 원정을 함께 떠났던 대장 헨리가 동행하는데, 오히려 그가 피츠제럴드를 마주하고는 정의를 들먹인다. 피츠제럴드는 헨리를 비웃는다. 정작 아내의 얼굴은 까맣게 잊은 채 무의미한 말만 읊조리는 부잣집 도련님은 생존에 다급한 승냥이의 손쉬운 먹잇감이 된다. 하지만 글래스는 다르다. 그는 복수의 정당성을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피츠제럴드를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다른 사람의 모든 것을 빼앗는 것임을 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다.

   마침내 도망가던 피츠제럴드가 막다른 곳에 몰린다. 이제는 이판사판, 살기 아니면 죽기다. 글래스는 영화 초반에 곰과 사투를 벌였지만 결말에서는 피츠제럴드와 혈투를 벌인다. 이 싸움도 마찬가지로 살아남는 것은 둘 중에 하나뿐이다. 힘겨운 싸움 끝에 피츠제럴드가 무너진다. 피츠제럴드가 끝까지 약 올리려고 묻는다. 고작 나를 죽이러 이 먼 곳까지 왔느냐. 고작 나 하나를 없애러 온갖 고초를 거쳐 온 것이냐. 복수의 허무함을 상기시키는 것이야말로 죽어가는 피츠제럴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다. 그러나 글래스는 무너지지 않는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한다. 이 복수는 신의 손으로 행해졌다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 실린 피츠제럴드는 저 너머에서 이 광경을 구경하던 원주민들의 손에 잡혀 목숨이 끊어진다. 원주민들의 영역을 침입한 피츠제럴드는 범죄자다. 피츠제럴드로 대변되는 그 땅의 모든 침입자들 역시 범죄자다. 그러나 누가 불법이고, 누가 합법인지의 문제는 룰렛 위를 돌아가는 구슬이 어디에 멈출 것인지의 문제처럼 무작위적이다. 세계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지만 기막힐 정도로 무심하다.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 곰이 죽은 것처럼, 호크가 죽은 것처럼, 원주민들이 터전을 빼앗긴 것처럼, 글래스를 도운 원주민이 잔인하게 목매달려 죽은 것처럼. 만사는 원래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면 무의미하고 허무하다.

   그러나 복수에 성공한 글래스는 먼 빈 자연의 틈새에서 빛처럼 새어나오는 그녀를 만난다. 그녀는 그에게 너무나 장하다는 듯, 당신이 정말 자랑스럽다는 듯 환하게 웃는다. 그리고 그의 곁을 떠난다. 그제야 비로소 카메라가 글래스를 바라보고, 글래스도 카메라를 바라본다. 쉴 틈 없었던 글래스의 삶에 드디어 공백이 생긴다. 그의 시선이 대미를 장식한다. 이제야 카메라가 인정한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바로 죽음에서 돌아온 글래스, 그 사람의 이야기였음을.

   영화 「레버넌트」는 이처럼 인간의 삶이 증명 과정 자체라는 것을 보인다. 증명은 생존을 전제로 하며, 생존방식으로 그 내용이 구체화된다. 휴 글래스의 경우, 자신의 사랑을 잊지 않았고, 그 사랑을 삶의 목적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그것들을 빼앗은 자에게 똑같이 보복함으로써 분노가 아닌 사랑을 증명하였다. 그의 강인함은 자연의 무심함을 배경으로 삼았으며 비록 자연이 그를 보호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자신의 두 발로 그곳에 직립하였다. 이 영화에서 글래스가 피츠제럴드를 죽였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영화의 대결 구도는 글래스와 피츠제럴드가 아니다. 글래스 본인이 세계와 대결하는 구도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이 무의미한 세상에서 유의미를 창출한 의지의 인간이었으며 굳건한 사랑의 서사를 생존으로 증명해냈다는 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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