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Sons of Anarchy를 보다가 검색해서 어찌저찌 보게 된 영화이다. 말론 브란도가 나오는 고전영화가 전편이 다 올려져 있어서 보게 되었다. 링크는 아래
https://www.youtube.com/watch?v=KmOipZaw_qY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단순히 마쵸남자들의 으쌰으쌰 깡패놀이 보여주는 게 목적도 아니고, 혹자들이 비난하듯 약자나 여성 괴롭히는 것을 정당화하는 구린 영화도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공권력과 저항력, 그 영원한 딜레마 사이에서 괴로워 하는 민초의 마음을 주인공 "캐시"로 형상화하고 있는 명작이다. 이 영화는 나에게 어떤 한쪽의 단순한 구도로 읽히는 영화가 전혀 아니었으며 오히려 세상 본질이 단순한 선과 악의 사이드로 나뉜 것이 아니라 굽히려는 힘과 굽히지 않으려는 힘 사이에서의 불협화음을 그대로 보이는 예술작품이었다.
1. 말론 브란도가 주인공이 아니라 "캐시"를 주인공으로 본다면
나의 이러한 해석은 기본적으로 이 영화의 주인공을 말론 브란도가 주연한 쟈니가 아니라 마을의 삼촌 카페에서 아르바이트 하고 있는 캐시로 상정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물론 배우 이름값이나 상징성을 생각하면 쟈니도 매우 중요하다. 오히려 영화 제목이 The Wild One이니 당연히 쟈니가 주인공인데, 나는 생각보다 이 영화의 대칭성 때문에 쟈니가 주인공으로 여겨지지 않은 것이다.
무엇이 대칭이냐, 바로 쟈니가 몰고 다니는 wild, 날 것의 오토바이 갱단이 상징하는 반항하는 자들과 한곳에 상주하며 조그마한 마을을 이루고 공권력에 의지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마을사람들의 대칭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 사이에 바로 캐시가 서있다. 그래서 내가 캐시를 주인공으로 생각한 것이다.
사람들이 딱 보기에는 물론 오토바이 갱단 놈들이 깽판을 치고 캣콜링하며 술 마시고 행패부리는 것이 혼돈 그 자체에 무례하고 상스러운 마초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영화가 여성억압적인 깡패집단을 미화한다라는 비난들이 있다. 실제로 물론 어느 정도 그러한 면이 있다. 그 정화되지 않은, 여과되지 않은 날 것의 리비도와 자유로움, 무절제함과 내일 없이 사는 망나니들의 모습 안에서 섹슈얼한 상대를 대상으로 자신의 본능을 그대로 표현하는 무례함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지만 나는 캐시가 중간에 쟈니와 오토바이를 둘이서 타고 난 다음의 대화를 보며, 그리고 이 영화에 묘사된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밥그릇이 위험해지자 바로 무장과 폭력을 선택하는 그 양상을 보며, 과연 소위 마초적인, 그리고 여성억압적인 면이 그 "상스러운 마초"들한테만 있었던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즉, 만약 이 영화에 여성억압적인 측면이 있다면, 오토바이 갱단만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질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아내를 잃고 어울리지도 않는 마을의 보안관 노릇을 하며 껍데기처럼 남아 있는 "가부장제"와 기존 질서의 상징인 아버지에 대한 동정과 책임감으로 옆에 남아 있는 캐시에게는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강력하게 작동하며,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는 별개로 그녀를 무의식적으로 억압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캐시가 매일 어떤 "백마 탄 왕자님"이 나타나 자신과 사랑에 빠져 마을 밖으로 자신을 꺼내주기는 애타게 바랐던 것이다.
이 영화에서 성별에 대한 노골적이고 깊은 성찰은 아주 분명하지 않다. 사실, 성별이 문제가 아니다. 캐시가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억압적 측면도 같이 드러나는 것이지,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억압"에 대해 성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억압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 사회의 본질이다. 캐시가 만약 동네에서 자라나는 아들내미라고 생각해보자. 과연 마을을 떠났을 수 있을지? 떠나지 못하는 아들에게도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는 강력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캐시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시민의 모습에 가깝다. 외모는 평범하지 않지만, 항상 일해야 하고, 부모와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며,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탈을 꿈꾸기 때문이다. 쟈니가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 것은 어느 정도 이성적 호감도 있지만, 동시에 쟈니가 그녀에게서 자기 자신을 어느 정도 보았기 때문이다. 쟈니는 실제로 자신을 꿈꾸며 자신이 좋다고 들이대는 여자에게는 아주 냉정하다. 사실 들이대는 여자가 거의 답정너를 요구하는 식으로 나는 너 좋아 너도 나 좋니를 물어봐서 짜증을 낸 것이기도 한데, 캐시에 대한 끌림은 자연적이기도 하고 동시에 여러 모로 미묘하다. 쟈니는 캐시에게도 구속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캐시와 쟈니의 관계를 조금 더 상징적으로 보았다. 쟈니가 이 영화가 의미하는 the wild one이겠지만, 내 생각에 그는 캐시 안에 존재하는 the wild one이었던 것 같다. 캐시는 보통의 옛날 스테레오 타입의 상상을 거쳐 자신의 탈출 욕구를 "자신과 일시에 사랑에 빠지는 이방인"으로 미화를 거쳤지만, 사실 그게 로맨틱하게 들려서 그렇지, 결국 가출하고 싶다는 이야기 아닌가. 쟈니처럼 막무가내로 목적지 없이 정처없이 달리고 싶은 것, 그러한 야생성이 캐시가 받아들이기 두려워 울면서 도망쳐야 했던 그 지점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곱게 교육 받은 캐시에게는 결국 사랑에 빠지기에는 너무나 부담스러웠던 것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마지막 장면, 금상을 캐시에게 주는 쟈니, 그리고 그 둘의 마주 보는 웃음은 캐시 내면의 불만과 가출 욕구가 쟈니와 쟈니가 몰고온 폭주단들의 소동으로 인해 어느 정도 해소된, 즉, 캐시 내면이 평화를 어느 정도는 찾은 모습이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보면 이 영화는 모터사이클 갱단의 이야기가 아니라, 마을 안에서 누군가가 와주기만을 기다리는 한 여자의 갈등하는 내면이 해소되는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2. 정의가 아닌 공권력, 대책은 없는 저항력
아주 뻔한 인용을 이 시점에서 할 수 있다. 사실 너무 뻔해서 구절도 대충 기억은 안 나는 건데, 니체 말이다. 니체가 선과 악, 좋고 나쁨의 기준에 대해 접근할 때 이것조차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역사적 관점으로 쌓이고 쌓인 일종의 문화적이고 변동적인 가치라고 일찍이 이야기하지 않았나. 이 영화가 그 이야기를 고대로 한다.
마지막에 쟈니를 풀어주는 경찰 높은 양반이 쟈니를 보며 내가 너를 볼 때 너 안에 무슨 선/좋음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풀어준다는 이야기를 대충 하는데, 이 경찰 높은 양반은 공권력을 상징하고, 공권력의 눈에 자신에게 반항하고 저항하는 쟈니에게는 어떠한 선도, 좋음도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에게 저항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쟈니에게서는 선이나 좋음이 파악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쟈니나 모터사이클 갱단은 애초에 선이나 좋음을 쫓아서 그 일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하지 말라는 것이 너무 많고, 행동에 제약을 가하는 사회에 말 그대로 반항을 하고 저항을 하는 것 뿐이다. 반작용적인 것이다.
나의 야매 정신분석을 돌려보면, 마을 사람들한테 얻어맞는 쟈니가 옛날 내 애비가 때리는 것보다 약하다 라며 조롱하는데, 한 번 통밥 굴려 때려 맞춰보면 쟈니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한테 두들겨 맞은 것이다. 즉, 그는 자신보다 더 큰 권위한테 얻어맞는 것이 지긋지긋하던 찰나에 오토바이를 타고 튀지 않았을까 한 번 상상의 나래를 펼쳐볼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쟈니 아버지가 경찰이나 그 비슷한 것이었다면 이단 콤보로 그의 상위권력에 대한 알러지 반응이 더 이해도 될 것이고.
방금 이전 문단은 내가 영화의 대사 한 토막을 통해 상상의 나래를 돌려본 것이고, 결국 어쨌든 그들은 "상대방이 가진 무언가"에 대한 저항을 끝도 없이 하는, 한마디로 존재 자체에 대한 반항, 끝없는 혼돈과 변동, 격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이 상태에서 우리는 마을 사람들과 오토바이 갱단을 이들을 코스모스와 카오스, 공권력과 저항력, 질서와 혼돈으로 양분하여 바라볼 수는 있다.
그렇지만 강조하건대, 이것을 정의와 비정의로 나누는 것은 철저히 공권력 입장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물론 혼돈과 카오스가 불러 일으키는 짜증남과 혼란의 씨앗에 대해서는 우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할 수밖에 없다. 사고만 치는 것들, 자기들이 가장 강한 놈팽이들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싶어 안달이 난 놈들,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보자.
그런데, 그러면 공권력은?
그들이 질서를 지키며 공동체를 안정으로 유지시키며 자신들이 법이고 질서이고 정당성인양 서있네? 그런데 한 번 물어보자. 너희들이 그냥 대빵 깡패 아닌가? 즉, 국가가 가장 큰 깡패 아니냐는 말이다.
실제로 국가와 질서에 기댄 마을 공동체가 과연 정의롭고 비폭력적이고 이상적인 것이냐, 보면 그렇지 않다. 캐시의 아버지인 보안관은, 모터사이클 갱단에 맞서서 싸우려 드는 마을의 한 아저씨가 어렸을 때부터 깡패였다는 식으로, 그래서 말릴 수가 없다는 식으로 대사를 친다. 이게 무슨 뜻일까? 마을 안에 있는 사람들도 다 인간의 집단 군상이며 어떻게 보면 호전적이기도 하고 분연히 총으로 자신을 맞서는 놈들을 패주고 쏴서 죽이려는 그 사람들도 당장 모터사이클 갱단에 들어가서 오토바이만 안 끌고 다닐 뿐, 자신의 맥락에서는 충분히 사적인 제재와 폭력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수호하고 안위를 지키려고 하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영화에 나오는 안경 낀 아저씨는 우리 사회의 지식인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혔는데, 한쪽이 나쁜 짓 하다고 똑같이 나쁜 짓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나름 양식 있는 말을 호전적인 마을 아저씨는 겁쟁이가 하는 소리로나 치부해버리는 것을 보면, 지식인의 말을 대중은 항상 무시한다-는 패턴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아무튼, 공권력과 경찰에 힘을 빌리고 빗대어 있지만 결국 마을 공동체는 그 평화 안에 나름의 힘과 권력 앞에 붙어 있는 것이고, 그 큰 권력 앞에 이죽거리는 저항군단은 사실상 술 마시고 행패 부리는 폭도들이지만, 결국 경찰들이 너네 혼난다 하면 깨갱해버릴 수밖에 없는, 국가라는 최종보스 앞에서는 깨갱하는 소규모 양아치들인 것이다.
나의 이러한 해석에 빗대면 결국 우리는 이 길을 선택하나 저 길을 선택하나 억압, 억압, 억압 속에 갇혀 있는 중생들인 것이다. 마을 안에서 평화롭게 있는다 치손 결국 우리는 강력한 힘에 깃대어 돌아가고 있는 사회 질서의 억압에 갇혀 있는 것이며, 그 반대로 가봤자 철부지 양아치 짓하면서 손가락질이나 받고 금방 빨리 죽기에 딱 좋은 위험한 일이나 하는 또 다른 종류의 사회 질서의 억압에 갇히는 것이다.
3. 남자다움 혹은 badass에 대하여
마지막 관전 포인트는, 이 시점에서 나와야 하는 것인데, 바로 남자다움에 관한 것이다.
참 요즘 같은 시대에 미묘한 단어선택이 아닐 수 없다.
한 번 생각해보자. 대체 남자다움이 뭐냐?
영미권에서는 badass라고 속칭되는, 말론 브란도나 제임스 딘으로 형상화되는, 영원한 반항아들. 어떤 시점으로 보면 철부지 같은 놈들이기도 하고. 절대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말 같은 사람들.
우리가 남자답다, 멋있다-라고 표현하는 이 종류의 사람들은 내 생각에 기존의 문화 질서에서 남자들이 숭상하는 남성다움의 전형을 보인다고 생각한다.
남자답다, 멋있다 할 때의 기준은 보통 옛날 관용구들을 생각해보면, 사나이가 한 번 칼을 빼면 무를 썰어야지 이러한 말들이 떠오르는데, 나는 이게 주체적인 삶의 자세, 적극적이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어떠한 자세를 보통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여자는 "백마 탄 왕자"가 와서 꺼내주길 기다리고, 보통 남자라면 자신이 마을 밖으로 나가 사내라면 한 번 이것 저것 해보고 살다 죽어야지!라는 그 고정관념? 옛날 마인드의 결정체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나는 이 자세에서 남성이나 여성의 성별적 구별을 버려버리는 순간, 그것이 바로 이 딜레마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되는 자립의 마음가짐이나 태도의 씨앗이 드러나는 것 아닌가 싶다.
결국 인생은 억압받는 것이고, 위태로운 것이다. 공권력에 기대 있다고 해서 죽지 않는 것도 아니고 잃지 않는 것도 아니다. 저항력에 빠져 자유를 만끽한다고 해서 무조건 자유로운 것도 아니고 행복한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떤 종류의 선택을 내려야 하고 그 선택에 걸맞게 분연히 자기 갈 길을 걸어야 하며, 그 선택의 길에서는 변명도 딱히 필요 없고 두려워 하는 모습도 필요치 않은 것이다.
쟈니는 자신에게 억울한 순간이 왔을 때도 자신이 해야 하는 말만,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말만 군더더기 없이 했다. 그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말하고 행동했다.
자신은 자신만이 보호할 수 있고 자신만이 그 길에 책임이 있다는 그 분연한 자세-그것을 우리는 멋있다-남자답다라고 표현해 왔으나 이제는 앞으로의 시대에서 모든 개인이 바라는 그러한 자세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독고다이적 자세가 동시에 얼마나 공동체성을 취약하게 할 수 있는가. 약자에 대한 연대나 공감, 연민을 위해 어느 정도 길을 틀어줄 수 있는가. 자립은 연대와 어떤 종류의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 거기까지는 논의가 쉽게 갈 수는 없는 것 같다.
실제로 쟈니는 그냥 달린 것 뿐이고, 달리다 보니 어중이 떠중이들이 붙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쟈니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패고 싶기도 하다. 그들이 친구인가? 어떤 연대인가? 그 연대는 얼마나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그러한 막무가내 연대가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게 얼마나 정당화되는가? 그들을 그렇다면 항상 억압해야 하는가? 그렇지만 그들이 동시에 우리의 또다른 모습, 우리가 갖고 있는 양면인데?
그렇지만 인간이 자유를 꿈꾸는 한 그것에 대해 분연히 "자립의 길"을 가려는 그 지향성, 그리고 그 지향성에서 나오는 저항의 매력이라는 강력한 힘을 나는 부정할 수 없을 것 같고, 그 길에도 큰 매력이 있다. 오토바이 갱단이 찾아온 날은 아수라장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옛날 옛적 바쿠스 신을 모시는 무녀들이 벌였다던 환락과 혼란의 축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실제로 페스티벌이 있는 이유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루 쯤은 해방구를 주기 위해서라고 하지 않나.
이 모든 딜레마와 아수라장이 섞인 사이에서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가 바로 이 The Wild One이었다고 생각한다.
4. (사족)
영화에 대한 열망이 10대보다는 많이 시들해져 요즘은 무슨 영화를 봐도 시큰둥하였는데, 이 영화는 생각지도 않게 보았어도 이렇게 긴 글까지 적을 수 있었다. 나는 영화의 리뷰를 쓸 때, 내 안에 말이 차오르는 영화만 쓴다. 이건 마치 대화와 같은 것이다. 영화는 길기 때문에 마치 내가 술집에 앉아 있는데 어떤 낯선 사람이 들어와서 나에게 주욱 두시간 정도 일장연설을 늘어놓으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이다. 보통 흥미없는 경우라면 네 그렇네요, 대충 재미있는 경우라면 네 재밌네요, 답변하고 지나칠 것이지만, 가끔 정말 나한테 그 이야기가 의미가 있다면, 나도 내 이야기를 풀게 되고, 내가 느낀 바를 죽 대답하듯 적게 되는 것이다. 정말 최근에는 영화에 한참 시들해져 있던 나에게 영화의 중요성, 아름다움을 다시 가르쳐준 영화라 더 의미가 있는 리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