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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The Wild One (위험한 질주)(한글무자막)(Blu-ray)
Mill Creek Ent / 2015년 3월
평점 :
품절



0. Sons of Anarchy를 보다가 검색해서 어찌저찌 보게 된 영화이다. 말론 브란도가 나오는 고전영화가 전편이 다 올려져 있어서 보게 되었다. 링크는 아래


https://www.youtube.com/watch?v=KmOipZaw_qY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단순히 마쵸남자들의 으쌰으쌰 깡패놀이 보여주는 게 목적도 아니고, 혹자들이 비난하듯 약자나 여성 괴롭히는 것을 정당화하는 구린 영화도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공권력과 저항력, 그 영원한 딜레마 사이에서 괴로워 하는 민초의 마음을 주인공 "캐시"로 형상화하고 있는 명작이다. 이 영화는 나에게 어떤 한쪽의 단순한 구도로 읽히는 영화가 전혀 아니었으며 오히려 세상 본질이 단순한 선과 악의 사이드로 나뉜 것이 아니라 굽히려는 힘과 굽히지 않으려는 힘 사이에서의 불협화음을 그대로 보이는 예술작품이었다.

1. 말론 브란도가 주인공이 아니라 "캐시"를 주인공으로 본다면

나의 이러한 해석은 기본적으로 이 영화의 주인공을 말론 브란도가 주연한 쟈니가 아니라 마을의 삼촌 카페에서 아르바이트 하고 있는 캐시로 상정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물론 배우 이름값이나 상징성을 생각하면 쟈니도 매우 중요하다. 오히려 영화 제목이 The Wild One이니 당연히 쟈니가 주인공인데, 나는 생각보다 이 영화의 대칭성 때문에 쟈니가 주인공으로 여겨지지 않은 것이다.

무엇이 대칭이냐, 바로 쟈니가 몰고 다니는 wild, 날 것의 오토바이 갱단이 상징하는 반항하는 자들과 한곳에 상주하며 조그마한 마을을 이루고 공권력에 의지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마을사람들의 대칭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 사이에 바로 캐시가 서있다. 그래서 내가 캐시를 주인공으로 생각한 것이다. 

사람들이 딱 보기에는 물론 오토바이 갱단 놈들이 깽판을 치고 캣콜링하며 술 마시고 행패부리는 것이 혼돈 그 자체에 무례하고 상스러운 마초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영화가 여성억압적인 깡패집단을 미화한다라는 비난들이 있다. 실제로 물론 어느 정도 그러한 면이 있다. 그 정화되지 않은, 여과되지 않은 날 것의 리비도와 자유로움, 무절제함과 내일 없이 사는 망나니들의 모습 안에서 섹슈얼한 상대를 대상으로 자신의 본능을 그대로 표현하는 무례함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지만 나는 캐시가 중간에 쟈니와 오토바이를 둘이서 타고 난 다음의 대화를 보며, 그리고 이 영화에 묘사된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밥그릇이 위험해지자 바로 무장과 폭력을 선택하는 그 양상을 보며, 과연 소위 마초적인, 그리고 여성억압적인 면이 그 "상스러운 마초"들한테만 있었던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즉, 만약 이 영화에 여성억압적인 측면이 있다면, 오토바이 갱단만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질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아내를 잃고 어울리지도 않는 마을의 보안관 노릇을 하며 껍데기처럼 남아 있는 "가부장제"와 기존 질서의 상징인 아버지에 대한 동정과 책임감으로 옆에 남아 있는 캐시에게는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강력하게 작동하며,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는 별개로 그녀를 무의식적으로 억압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캐시가 매일 어떤 "백마 탄 왕자님"이 나타나 자신과 사랑에 빠져 마을 밖으로 자신을 꺼내주기는 애타게 바랐던 것이다.

이 영화에서 성별에 대한 노골적이고 깊은 성찰은 아주 분명하지 않다. 사실, 성별이 문제가 아니다. 캐시가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억압적 측면도 같이 드러나는 것이지,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억압"에 대해 성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억압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 사회의 본질이다. 캐시가 만약 동네에서 자라나는 아들내미라고 생각해보자. 과연 마을을 떠났을 수 있을지? 떠나지 못하는 아들에게도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는 강력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캐시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시민의 모습에 가깝다. 외모는 평범하지 않지만, 항상 일해야 하고, 부모와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며,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탈을 꿈꾸기 때문이다. 쟈니가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 것은 어느 정도 이성적 호감도 있지만, 동시에 쟈니가 그녀에게서 자기 자신을 어느 정도 보았기 때문이다. 쟈니는 실제로 자신을 꿈꾸며 자신이 좋다고 들이대는 여자에게는 아주 냉정하다. 사실 들이대는 여자가 거의 답정너를 요구하는 식으로 나는 너 좋아 너도 나 좋니를 물어봐서 짜증을 낸 것이기도 한데, 캐시에 대한 끌림은 자연적이기도 하고 동시에 여러 모로 미묘하다. 쟈니는 캐시에게도 구속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캐시와 쟈니의 관계를 조금 더 상징적으로 보았다. 쟈니가 이 영화가 의미하는 the wild one이겠지만, 내 생각에 그는 캐시 안에 존재하는 the wild one이었던 것 같다. 캐시는 보통의 옛날 스테레오 타입의 상상을 거쳐 자신의 탈출 욕구를 "자신과 일시에 사랑에 빠지는 이방인"으로 미화를 거쳤지만, 사실 그게 로맨틱하게 들려서 그렇지, 결국 가출하고 싶다는 이야기 아닌가. 쟈니처럼 막무가내로 목적지 없이 정처없이 달리고 싶은 것, 그러한 야생성이 캐시가 받아들이기 두려워 울면서 도망쳐야 했던 그 지점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곱게 교육 받은 캐시에게는 결국 사랑에 빠지기에는 너무나 부담스러웠던 것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마지막 장면, 금상을 캐시에게 주는 쟈니, 그리고 그 둘의 마주 보는 웃음은 캐시 내면의 불만과 가출 욕구가 쟈니와 쟈니가 몰고온 폭주단들의 소동으로 인해 어느 정도 해소된, 즉, 캐시 내면이 평화를 어느 정도는 찾은 모습이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보면 이 영화는 모터사이클 갱단의 이야기가 아니라, 마을 안에서 누군가가 와주기만을 기다리는 한 여자의 갈등하는 내면이 해소되는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2. 정의가 아닌 공권력, 대책은 없는 저항력

아주 뻔한 인용을 이 시점에서 할 수 있다. 사실 너무 뻔해서 구절도 대충 기억은 안 나는 건데, 니체 말이다. 니체가 선과 악, 좋고 나쁨의 기준에 대해 접근할 때 이것조차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역사적 관점으로 쌓이고 쌓인 일종의 문화적이고 변동적인 가치라고 일찍이 이야기하지 않았나. 이 영화가 그 이야기를 고대로 한다. 

마지막에 쟈니를 풀어주는 경찰 높은 양반이 쟈니를 보며 내가 너를 볼 때 너 안에 무슨 선/좋음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풀어준다는 이야기를 대충 하는데, 이 경찰 높은 양반은 공권력을 상징하고, 공권력의 눈에 자신에게 반항하고 저항하는 쟈니에게는 어떠한 선도, 좋음도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에게 저항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쟈니에게서는 선이나 좋음이 파악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쟈니나 모터사이클 갱단은 애초에 선이나 좋음을 쫓아서 그 일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하지 말라는 것이 너무 많고, 행동에 제약을 가하는 사회에 말 그대로 반항을 하고 저항을 하는 것 뿐이다. 반작용적인 것이다. 

나의 야매 정신분석을 돌려보면, 마을 사람들한테 얻어맞는 쟈니가 옛날 내 애비가 때리는 것보다 약하다 라며 조롱하는데, 한 번 통밥 굴려 때려 맞춰보면 쟈니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한테 두들겨 맞은 것이다. 즉, 그는 자신보다 더 큰 권위한테 얻어맞는 것이 지긋지긋하던 찰나에 오토바이를 타고 튀지 않았을까 한 번 상상의 나래를 펼쳐볼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쟈니 아버지가 경찰이나 그 비슷한 것이었다면 이단 콤보로 그의 상위권력에 대한 알러지 반응이 더 이해도 될 것이고.

방금 이전 문단은 내가 영화의 대사 한 토막을 통해 상상의 나래를 돌려본 것이고, 결국 어쨌든 그들은 "상대방이 가진 무언가"에 대한 저항을 끝도 없이 하는, 한마디로 존재 자체에 대한 반항, 끝없는 혼돈과 변동, 격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이 상태에서 우리는 마을 사람들과 오토바이 갱단을 이들을 코스모스와 카오스, 공권력과 저항력, 질서와 혼돈으로 양분하여 바라볼 수는 있다.

그렇지만 강조하건대, 이것을 정의와 비정의로 나누는 것은 철저히 공권력 입장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물론 혼돈과 카오스가 불러 일으키는 짜증남과 혼란의 씨앗에 대해서는 우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할 수밖에 없다. 사고만 치는 것들, 자기들이 가장 강한 놈팽이들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싶어 안달이 난 놈들,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보자.

그런데, 그러면 공권력은? 

그들이 질서를 지키며 공동체를 안정으로 유지시키며 자신들이 법이고 질서이고 정당성인양 서있네? 그런데 한 번 물어보자. 너희들이 그냥 대빵 깡패 아닌가? 즉, 국가가 가장 큰 깡패 아니냐는 말이다.

실제로 국가와 질서에 기댄 마을 공동체가 과연 정의롭고 비폭력적이고 이상적인 것이냐, 보면 그렇지 않다. 캐시의 아버지인 보안관은, 모터사이클 갱단에 맞서서 싸우려 드는 마을의 한 아저씨가 어렸을 때부터 깡패였다는 식으로, 그래서 말릴 수가 없다는 식으로 대사를 친다. 이게 무슨 뜻일까? 마을 안에 있는 사람들도 다 인간의 집단 군상이며 어떻게 보면 호전적이기도 하고 분연히 총으로 자신을 맞서는 놈들을 패주고 쏴서 죽이려는 그 사람들도 당장 모터사이클 갱단에 들어가서 오토바이만 안 끌고 다닐 뿐, 자신의 맥락에서는 충분히 사적인 제재와 폭력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수호하고 안위를 지키려고 하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영화에 나오는 안경 낀 아저씨는 우리 사회의 지식인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혔는데, 한쪽이 나쁜 짓 하다고 똑같이 나쁜 짓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나름 양식 있는 말을 호전적인 마을 아저씨는 겁쟁이가 하는 소리로나 치부해버리는 것을 보면, 지식인의 말을 대중은 항상 무시한다-는 패턴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아무튼, 공권력과 경찰에 힘을 빌리고 빗대어 있지만 결국 마을 공동체는 그 평화 안에 나름의 힘과 권력 앞에 붙어 있는 것이고, 그 큰 권력 앞에 이죽거리는 저항군단은 사실상 술 마시고 행패 부리는 폭도들이지만, 결국 경찰들이 너네 혼난다 하면 깨갱해버릴 수밖에 없는, 국가라는 최종보스 앞에서는 깨갱하는 소규모 양아치들인 것이다.

나의 이러한 해석에 빗대면 결국 우리는 이 길을 선택하나 저 길을 선택하나 억압, 억압, 억압 속에 갇혀 있는 중생들인 것이다. 마을 안에서 평화롭게 있는다 치손 결국 우리는 강력한 힘에 깃대어 돌아가고 있는 사회 질서의 억압에 갇혀 있는 것이며, 그 반대로 가봤자 철부지 양아치 짓하면서 손가락질이나 받고 금방 빨리 죽기에 딱 좋은 위험한 일이나 하는 또 다른 종류의 사회 질서의 억압에 갇히는 것이다. 


3. 남자다움 혹은 badass에 대하여

마지막 관전 포인트는, 이 시점에서 나와야 하는 것인데, 바로 남자다움에 관한 것이다.

참 요즘 같은 시대에 미묘한 단어선택이 아닐 수 없다. 

한 번 생각해보자. 대체 남자다움이 뭐냐?

영미권에서는 badass라고 속칭되는, 말론 브란도나 제임스 딘으로 형상화되는, 영원한 반항아들. 어떤 시점으로 보면 철부지 같은 놈들이기도 하고. 절대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말 같은 사람들.

우리가 남자답다, 멋있다-라고 표현하는 이 종류의 사람들은 내 생각에 기존의 문화 질서에서 남자들이 숭상하는 남성다움의 전형을 보인다고 생각한다. 

남자답다, 멋있다 할 때의 기준은 보통 옛날 관용구들을 생각해보면, 사나이가 한 번 칼을 빼면 무를 썰어야지 이러한 말들이 떠오르는데, 나는 이게 주체적인 삶의 자세, 적극적이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어떠한 자세를 보통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여자는 "백마 탄 왕자"가 와서 꺼내주길 기다리고, 보통 남자라면 자신이 마을 밖으로 나가 사내라면 한 번 이것 저것 해보고 살다 죽어야지!라는 그 고정관념? 옛날 마인드의 결정체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나는 이 자세에서 남성이나 여성의 성별적 구별을 버려버리는 순간, 그것이 바로 이 딜레마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되는 자립의 마음가짐이나 태도의 씨앗이 드러나는 것 아닌가 싶다.

결국 인생은 억압받는 것이고, 위태로운 것이다. 공권력에 기대 있다고 해서 죽지 않는 것도 아니고 잃지 않는 것도 아니다. 저항력에 빠져 자유를 만끽한다고 해서 무조건 자유로운 것도 아니고 행복한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떤 종류의 선택을 내려야 하고 그 선택에 걸맞게 분연히 자기 갈 길을 걸어야 하며, 그 선택의 길에서는 변명도 딱히 필요 없고 두려워 하는 모습도 필요치 않은 것이다. 

쟈니는 자신에게 억울한 순간이 왔을 때도 자신이 해야 하는 말만,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말만 군더더기 없이 했다. 그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말하고 행동했다. 

자신은 자신만이 보호할 수 있고 자신만이 그 길에 책임이 있다는 그 분연한 자세-그것을 우리는 멋있다-남자답다라고 표현해 왔으나 이제는 앞으로의 시대에서 모든 개인이 바라는 그러한 자세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독고다이적 자세가 동시에 얼마나 공동체성을 취약하게 할 수 있는가. 약자에 대한 연대나 공감, 연민을 위해 어느 정도 길을 틀어줄 수 있는가. 자립은 연대와 어떤 종류의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 거기까지는 논의가 쉽게 갈 수는 없는 것 같다. 

실제로 쟈니는 그냥 달린 것 뿐이고, 달리다 보니 어중이 떠중이들이 붙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쟈니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패고 싶기도 하다. 그들이 친구인가? 어떤 연대인가? 그 연대는 얼마나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그러한 막무가내 연대가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게 얼마나 정당화되는가? 그들을 그렇다면 항상 억압해야 하는가? 그렇지만 그들이 동시에 우리의 또다른 모습, 우리가 갖고 있는 양면인데?

그렇지만 인간이 자유를 꿈꾸는 한 그것에 대해 분연히 "자립의 길"을 가려는 그 지향성, 그리고 그 지향성에서 나오는 저항의 매력이라는 강력한 힘을 나는 부정할 수 없을 것 같고, 그 길에도 큰 매력이 있다. 오토바이 갱단이 찾아온 날은 아수라장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옛날 옛적 바쿠스 신을 모시는 무녀들이 벌였다던 환락과 혼란의 축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실제로 페스티벌이 있는 이유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루 쯤은 해방구를 주기 위해서라고 하지 않나.

이 모든 딜레마와 아수라장이 섞인 사이에서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가 바로 이 The Wild One이었다고 생각한다. 


4. (사족)


영화에 대한 열망이 10대보다는 많이 시들해져 요즘은 무슨 영화를 봐도 시큰둥하였는데, 이 영화는 생각지도 않게 보았어도 이렇게 긴 글까지 적을 수 있었다. 나는 영화의 리뷰를 쓸 때, 내 안에 말이 차오르는 영화만 쓴다. 이건 마치 대화와 같은 것이다. 영화는 길기 때문에 마치 내가 술집에 앉아 있는데 어떤 낯선 사람이 들어와서 나에게 주욱 두시간 정도 일장연설을 늘어놓으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이다. 보통 흥미없는 경우라면 네 그렇네요, 대충 재미있는 경우라면 네 재밌네요, 답변하고 지나칠 것이지만, 가끔 정말 나한테 그 이야기가 의미가 있다면, 나도 내 이야기를 풀게 되고, 내가 느낀 바를 죽 대답하듯 적게 되는 것이다. 정말 최근에는 영화에 한참 시들해져 있던 나에게 영화의 중요성, 아름다움을 다시 가르쳐준 영화라 더 의미가 있는 리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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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이 공각기동대 애니메이션을 재미로 다 본 게 아니라, 필요한 부분만 보았다. 나한테 이 만화는 재미의 차원보다는 언제나 철학적 차원으로의 접근이었기 때문이다. 



1. 타치코마들


타치코마들은 분명 정보를 공유하고 병렬화되어 있는 기계들에 불과하다. 그들은 원래 정보를 공유하는 말 그대로 기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 중 하나가 바토에게 '선택받고' 바토에게 '길들여지면서' 예상하지 못한 고스트, 즉 우리 말로 하면 영혼을 가지게 되고 개성을 가지게 되는 차원까지 나아가게 된다. 이 한 개체가 개성을 가지면서 정보를 공유하는 다른 타치코마들까지도 개성을 가지게 되면서, 어떤 타치코마는 온갖 책들, 문학 책까지 보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개성이 무기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본 쿠사나기 소령에 의해 타치코마들은 퇴역/폐기 절차를 밟게 된다. 


2. 웃는 남자


웃는 남자의 정체는 26화에 나온다. 진짜 정체로 밝혀진 아오이란 청년-사실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모든 사건들을 불러일으킨 "첫번째 오리지널"이 아니었다. 그조차도 어떤 논문을 보고 그 논문에서부터 자신이 해야 할 의미를 추출해내고 변용한 "복제품"이었던 것이다. 그는 6년 전 일에만 관계가 있었을 뿐, 사후의 모든 일들은 아오이의 행동에서 다시 영감을 얻어내어 "웃는 남자"라는 상징성에 기댄 자들의 홀로서기 증후군 Standing Alone Complex 때문에 생긴 일들이었다. 


3. 홀로서기 증후군의 이유


홀로서기 증후군이 생기는 이유에 대해 내가 주목한 것은, 이것이 바로 정보의 바다에 빠져 정보의 공유라는 현상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가는 인간 개체들의 우울함 때문이다. 비록 공각기동대가 픽션이긴 하지만, 이 픽션은 지금 현재 우리의 모습과 맞닿아 있다. 지금 우리 인간들 역시 그 어느 때보다도 내밀한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지만 동시에 그만큼 광범위하게 작동하는 여러 정보와 암시에 빠져 자기 자신의 개성과 인간성, 내러티브를 거대한 담론에 의해 좌지우지 당하고 있다. 특히 요새 이론적으로 바라보면,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내러티브에 좌지우지 당하여 "돈"이 모든 자유와 권력의 척도가 된 시대에서, 무수히 펀딩하고 투자하고 부동산을 바라보며 자신의 안위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다른 말로, 우리 삶의 의미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 요소에 의하여 결정지음 당하는 것이다.


이때 인간들은 괴로워한다. 돈에서 지면 자신의 가치를 잃어버려 우울해지고, 심지어는 어떤 사람들은 자살도 한다. 이처럼 거대담론에 치우친 사람들은 자신의 개성, 자신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 자기 자신의 내러티브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정보를 얻었고,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과 자기 주변의 관계를 상실하여 방향성을 잃어버렸다. 이때 그들은 완전히 상실된 채, 파편화된 채 홀로 고독하게 떨어져 있게 된다. 이때 이들은 자폐처럼 침전되거나 혹은 외부에서 보여지는 강한 목적의식에 자신을 맡긴다. 신자유주의적 내러티브에 빠져 돈이 최고 하면서 미친 듯이 돈을 벌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도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극 중에서 사람들은 비슷한 이치로 웃는 남자에게 빠져들었다. 웃는 남자는 일종의 안티히어로로써 강한 존재감, 혹은 강한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갑갑한 이 세상을 돌파하고 어떤 선례를 남기면서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은 적에게 맞서싸우는 자는 우리가 기다리고 상상해온 '영웅'의 이미지와 정확히 맞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파편화된 여러 사람들은 아무런 위치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다가 어느 날 만난 강렬한 "웃는 남자"의 의지에 빠져들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호응해버린다. 그들의 존재 의미가 존재하지 않다가, "웃는 남자"라는 상징에 의해 호응되면서 존재의 가치가 부여된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 '영웅'이란 오리지널은 없다. '영웅'이라는 이미지에 부응하여 '영웅적 행동'을 수행하는 '영웅이 되고 싶어 자신을 영웅으로 만드려 하는 주체화의 과정'만 있을 뿐이다. 아오이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들은 자신에게 없는 어떠한 "의지"를 보고 그대로 따라 하려 한다. 자신이 의지가 없기 때문에 "타인의 의지"를 보고 따라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근본적으로 그 모방행위가 바로 다시 오리지널의 위치에 올라간다. 이 세상에 진품은 없기 때문이다.


"원본의 부재가 원본 없는 사본을 만드는 것," 그것을 공각기동대에서는 "홀로서기 증후군"이라고 표현한다. 


4. 인간과 로봇을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만약 그들에게 모두 똑같이 영혼(고스트)이 있다면


공각기동대에서는 특이하게 고스트라는 개념이 있는데, 살펴보면 우리가 말하는 '영혼'이란 것과 같은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것은, 3번에서의 홀로서기 증후군에 대한 어떤 종류의 문제의식에 대해 쿠사나기 소령이 대답하는 해답이 바로 1번 타치코마들에게서 발견된 "개성"인 것이다.


이 시대의 문제는 사람들이 마치 로봇처럼 몰개성화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잃어버리고 외부의 거대한 정보를 공유하게 되면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고스트를 잃고 로봇이 된다. 


그런데 거꾸로 공각기동대에서는 인간들이 영혼을 잃는 반면 로봇들에게서 영혼이 태어난다. 그 태어나는 과정의 묘사를 살펴보면 나는 두 가지의 선행조건이 필요했다고 파악했다.


첫번째는 애정이다. 타치코마들은 바토라는 남자가 쏟아주는 애정(여기서는 바토가 규격과 맞지 않는 사제 오일로 상징한다)에서 발생한 "우연의 일치"로 "오작동"으로 인해 개성을 갖기 시작한다.

두번째는 쿠사나기가 말한 "호기심"이다. 쿠사나기는 바로 이 "호기심"이야말로 정보 병렬화 현상에서 너무나 많은 정보 공유 현상으로 사람들이 방향성을 잃었을 때도 개성을 잃지 않을 수 있는 해법이라고 제시한다. 


실제로 타치코마들은 정말 어린아이 같이 행동한다.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들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토론하고 질문한다. 그리고 그 와중에 자신들의 해답과 토론으로 자기 자신들의 개성을 만들어 나간다. 바로 이 "질문하는 힘"이야말로 그들 스스로가 "개성"을 만들어나가는 실마리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도대체 누구에게 영혼이 있는지 질문하게 된다. 인간의 육체와 로봇의 기계육신의 차이는 무엇인가? 고스트가 로봇에게 있고 인간에게 외려 고스트가 없고 아무런 질문의식 없이 조건에 따라 반응하며 살아간다면, 사실 로봇이 인간적인 것이고 인간이 로봇과 같은 것 아닌가?


5. 정치철학적 관점으로 연결지어서 생각한다-바로 "호기심"은 민주주의의 주체인 시민들이 필요한 "비판능력"이다


내 블로그를 보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나는 민주주의를 정치철학으로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긴말 필요 없이, 나는 현재 대의민주주의 문제가 바로 공각기동대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인간을 비인간적인, 탈개체화하고, 몰개성화하여, 일종의 거수기 혹은 물질을 소모하고 자본을 창출하는 기계적 인간으로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의 이 문제의식에 대한 대답은, 인간이 직접 참여하는 능력을 키워야 하며, 대의제가 궁극적으로 직접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강조하는 민주주의의 주체가 함양해야 할 능력을 범박하게 묘사하자면, 바로 이 "호기심" 다른 말로 "비판능력"이다.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은 철학자 미셸 푸코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에서 변용하는 자기 자신을 배려하는 실천윤리다.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단순히 철학 교과서에서 이야기하는 껍데기 식의 주지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나 자신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부모는 누구인가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 내가 속한 이곳은 어디인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 자신은 정해져 있지 않다-우리 자신은 그러한 질문들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끝없는 문답 과정에서 나라는 한 명의 개성이 만들어지고, 나를 둘러싼 내러티브들이 태어난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났고 어떤 성별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부모를 가지고 있고 어떤 조건 속에서 살아왔으며 어떤 선택을 내리고 어떤 취미를 가지고 어떤 특기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목적을 갖고 살아갑니다 -


이런 주체의 의식이 없이 우리는 민주주의에 참여할 수 없다. 그러한 주체의식이 없는 사람은 민주주의에 참여가 아니라 끌려다닐 뿐이다. 


이를 다시 한 번 공각기동대의 맥락에 적용시켜보자면, 원본이 없을 때, 원본이 진짜 있냐 없냐는 하등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 원본이라는 이미지에 감응하여 내가 만들어 나가는 원본과는 다른 사본, 그러나 원본과는 다르기 때문에 또 다른 종류의 원본이 되는 것- 그 행위에 필요한 것은 바로 호기심, 질문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옳습니까? 이대로 가면 괜찮습니까? 당신은 이렇게 사는 것에 만족합니까? 나는 이런 삶과 사회에 만족합니까?"


아오이는 지가 베르토프라는 영화감독의 말을 인용한다. 


"나는 내가 보는 세상을 모두에게 보여 주기 위한 기계다" 


나는 이를 이렇게 정치철학적으로 해석했다. 


나라는 인간이 스스로 질문하고 대답함으로써 만들어 낸 자기 자신의 세상을 타인과 공유할 때, 보여주는 나와 그것을 보는 관객들이 묶인 "공동체"가 태어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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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Vol.104 - 2016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 엮음 / 민들레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정말 수준높은 교육잡지. 자랑스럽습니다. 이때껏 잡지 1년 구독을 신청해 본 바 없는데, 꼭 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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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6년 6월
평점 :
품절


계간문예지 󰡔인간과 문학󰡕 2016 봄(제13호) 기고글

 

생존으로 사랑을 증명한 자의 이야기

-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The Revenant)」 평론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이하 「레버넌트」)는 글래스의 과거를 잠깐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런 다음, 화면은 곧 현재의 사냥 장면으로 넘어간다. 카메라가 뱀처럼 화면 위를 미끄러진다. 호흡이 길고, 시선의 곡선이 잘 끊어지지 않는다. 카메라가 호기심이 아주 많다. 사냥에 집중한 인물들을 이리저리 살펴본다. 가죽을 모으던 백인들이 원주민 부족의 기습을 받아 도망가는 장면처럼 급박한 순간에도 그렇다. 카메라는 유유히 좌우와 앞뒤, 그리고 위까지 올려다본다. 조금 어지러울 정도로 현란하다.

   인상적인 것은 인간들의 전투와 별개로 원거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자연이다. 인공 조명으로는 줄 수 없는 자연의 풍성한 햇빛이 영화를 가득 메운다. 장면에 인물만 있지 않고 산천초목이 어느 틈 사이에라도 자리한다. 만물이 적셔진 화폭은 풍성한데, 소리가 없다. 음악은 절제되어 있고, 대사도 마찬가지다. 풍경은 관조한다. 욕망, 증오, 살인, 복수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카메라는 화면을 집요하게 쳐다본다. 가끔 카메라가 인간을 보는지, 아니면 자연을 보는지 헷갈린다.

   곰이 글래스를 덮치는 장면은 기막히게 아름답다. 감독은 자연의 비정함을 외면하지 않는다. 자본의 힘은 사람들로 하여금 비릿한 현실에 달콤한 당을 입힌다. 우리를 지치게 하는 현실의 차가움이 곰의 압도적인 힘으로 대변된다. 인간이 왜곡한 곰의 여러 상(狀)을 뒤로 하고, 새끼들을 거느린 어미 곰은 본성대로 움직인다. 곰의 공격성은 당연하다. 글래스는 곰의 영역을 침입했다.

  글래스는 여러 번 내쳐진다.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단칼에 죽이는 것은 인간들의 낭만이다. 곰은 인간의 감각에 관심이 없다. 냄새 맡고, 건드리고, 물 뿐이다. 글래스에게는 한 가지 선택밖에 없다. 곰을 죽이는 것이다. 곰의 사정을 봐주는 것은 선택지에 있지 않다. 새끼 곰들을 향한 동정 역시 인간의 환상이다. 그곳에는 삶과 죽음만이 존재하며, 양 갈래의 길은 인간과 비인간을 차별하지 않는다. 자연은 공평히 무관심하다. 카메라는 글래스가 받는 고통의 일격들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공격당하는 그의 난관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대체 언제 끝나는지 모를 곰의 공격이 무섭고 끔찍해 신음소리를 내는 관객을 뒤로 하고, 글래스는 단도를 꺼내 있는 힘껏 곰을 찌른다. 결국 그는 산다. 카메라는 인간의 승리를 보지 않는다. 카메라 렌즈가 지켜본 것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다른 운명을 향하게 된 두 존재다.

   글래스와 혼혈아인 글래스의 아들에게 계속 시비 거는 피츠제럴드는 아주 평범한 인물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원주민을 야만인이라고 생각했다. 원주민들에게 머리가죽이 벗겨진 적도 있다. 그에게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목숨이다. 그는 브리저에게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말해준다. 목숨이 위험할 때, 피츠제럴드의 부친은 언덕에서 다람쥐와 마주쳤고, 굶주린 그에게 다람쥐는 신으로 보였다. 이처럼 피츠제럴드에게 신은 혹독한 세계에서 인간의 삶을 위해 그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다. 그는 이기적이다. 그에게 다른 존재들은 자신보다 중요하지 않다. 그는 자기가 잘 사는 것만 중요하다. 그의 신은 그에게만 자비롭다. 글래스의 죽음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된 것도, 글래스의 아들인 호크를 죽인 것도 그에게는 그저 그의 부친이 언덕 위에서 만난 다람쥐를 잡아 배를 불린 것과 같은 이치다.

   글래스의 아들이 목숨을 잃은 그곳은 을씨년스럽다. 하지만 동시에 매우 아름답고 고즈넉하다. 곰과의 사투 끝에도 죽지 않은 글래스의 끈질긴 삶이 피츠제럴드에게는 성가셨다. 하루 이틀 기다리던 피츠제럴드는 글래스에게 제안한다. 죽여주길 바란다면 눈을 깜박이라고. 눈을 움직이지 않는 글래스. 피츠제럴드는 말을 잇는다. 아들이 죽기를 바라는가? 어차피 곧 죽게 될텐데 모두 죽기를 바라는가? 글래스는 눈을 감는다. 신체적 한계 때문인지, 아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인지는 불확실하다. 분명한 것은 글래스가 아들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목을 조르는 피츠제럴드를 보고 놀란 호크가 소리를 질러대자, 피츠제럴드는 호크의 배에 기다렸다는 듯이 칼을 박는다. 이때 누가 자신을 보기라도 했을까봐 눈을 굴리는 피츠제럴드의 얼굴이 인상적이다. 브리저는 멀리 있고, 글래스는 누워 있다.

   피츠제럴드의 연기에 넘어간 브리저도 글래스를 남기고 떠나게 된다. 비참하게 남겨진 글래스는 네 발로 긴다. 아들의 죽음을 확인한 그는 아들에게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그런데 카메라가 갑자기 그들에게서 관심을 거둔다. 글래스의 거친 숨소리를 배경음으로 흐릿한 먼 설산의 봉우리가 비친다. 이 3초 이상의 응시가 인간사를 아득하게 만든다. 아들의 죽음과 글래스의 슬픔은 범사다. 눈 내린 산과 희뿌연 안개는 한 인간의 비극에 어떠한 응답도 해주지 않는다.

   세계의 무응답은 아름다운 배경이지만 서사는 아니다. 인간의 추상적인 말이 행위로 실현되듯, 글래스의 복수는 생존이라는 능동적 행위들을 전제로 삼고 그것이 이 영화의 이야기다. 영화는 글래스가 어떻게 자연의 역경과 원주민의 공격 속에서 살아남는지를 비중의 반 이상으로 둔다. 타당한 전개다. 글래스는 우선 살아남아야 한다. 관객들이 그 지난한 과정에 피곤할 수도 있지만 생존 자체가 그의 복수다. 그는 자연을 견디고, 온갖 위협을 거치면서도 자연물들을 활용한다. 세계의 무관심과 별개로 그는 스스로를 일으키는 자다. 그는 신이 남긴 사체의 복부를 가르고 그 안에 들어가 추위를 견뎌낸다. 그는 신을 먹고, 신의 냉기에 시달린다. 그러나 그가 하루하루 사는 것에 급급해서 그 고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길을 기어서라도 가고 있을 뿐이다.

   글래스는 끊임없이 피츠제럴드가 자기 아들을 죽였다는 기억을 되뇐다. 험준한 눈보라를 피해 동굴에 몸을 의탁하는 순간에도, 아무것도 없는 눈밭 위에서도, 피츠제럴드가 자기 아들을 죽였다는 사실을 쓴다. 묵묵히 살아남는 것에만 집중하니 말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 찰나에, 그가 언어를 전혀 잊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는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 자신의 과거와 감정과 서사를 잊지 않았다. 험로에서도 계속 마주하는 스스로의 무의식에서도 그는 끝없이 꿈과 환영으로 사랑과 과거를 정초시킨다.

   현실적이고 긴 카메라의 호흡 속에서 드문 빈도로 짧게 드러나는 장면들은 플래시백이다. 그 플래시백들을 통해서 우리는 글래스의 일면을 엿본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언어화하지 않는 유형의 사람이다. 그는 행동하는 사람에 가깝다. 그의 사랑과 기억은 꿈속의 짧은 접촉 장면과 여자의 음성으로만 드러난다. 코와 코를 맞대고 가깝게 있는 여인과 그, 아들과 셋이서 웅크리고 자는 모습은 그가 준거점으로 삼은 마음의 고향이 어디인지를 보여준다. 또한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여자의 속삭임은 그의 내면에 그의 사랑이 얼마나 깊히 박혀있는지 말해준다. 그러나 그 고향은 파괴되었고, 여자는 죽었다.

   글래스가 옛날에 미군장교를 죽인 이유는 단순하다. 그에게 국가의식 같은 거시적이고 추상적인 관념들은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가 사랑한 여자와의 결실이요 상징인 아들의 목숨이었다. 미군장교를 살해하는 것이 앞으로 그의 삶에 어떤 장애가 될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장교를 죽이고 아들을 보호했다. 그는 현실에 굴하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아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 정도로 소중히 여겼던 아들도 죽었다. 하지만 아들은 죽어서도 그의 마음에 머문다. 아들의 시선이 남아있는 한 글래스는 숨을 멈추고 포기할 수 없다. 아들의 곁에 남겠다는 맹세는 아내의 곁에 남아있겠다는 맹세이기도 하다. 그들이 그의 무의식을 장악하고 있다. 인간이 긴장을 풀 수밖에 없는 꿈속에서 그들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녀는 죽었지만 그를 아직도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글래스는 숨을 멈추고 포기할 수 없다. 그에게 피츠제럴드를 죽이는 것은 그들을 잊지 않았음을 보이는 유일한 입증 방법이다.

   가끔 복수를 하려는 자들이 복수 행위 자체에 매몰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를 잘 보여주는 예시가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이다. 그 영화의 주인공은 약혼녀를 죽인 살인마의 심연을 바라보다가 자기가 그 심연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는 자신이 결코 가질 수 없는 폭력성을 흉내 낸다. 그러나 그는 그 폭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한 복수는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하지만 동정심이 들 뿐, 공감은 할 수 없다. 비이성과 광기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레버넌트」의 복수극은 이성적이고 차분하다. 무절제하지 않고 단계적으로 정합적이다. 그의 보복 행위는 스스로 살아온 삶의 환경과 맥락에서 파생한다. 그는 과거를 방기하지 않는다. 자신이 선택하고 서술해낸 삶의 서사를 끝까지 지키고자 노력한다. 만약 한 사람이 자신을 이룬 모든 것들을 부정해버린다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무자아(無自我)다. 기억이 없는 자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이고, 기억을 버리는 자는 자기 자신을 생매장 하는 자이다. 글래스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 자신의 의무를 반복적으로 글과 꿈에 새겼다.

   글래스가 전초 기지에 귀환하자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이 두려움과 경이로 가득 찬다. 그의 생존은 모두에게 기적이다. 유령의 귀환에 겁에 질린 토끼가 잔뜩 내달린다. 피츠제럴드는 자신의 발을 묶어놓았던 돈을 훔쳐 달아난다. 글래스는 사냥을 시작한다. 차분하게 총을 들고,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숲 속을 응시한다. 원정을 함께 떠났던 대장 헨리가 동행하는데, 오히려 그가 피츠제럴드를 마주하고는 정의를 들먹인다. 피츠제럴드는 헨리를 비웃는다. 정작 아내의 얼굴은 까맣게 잊은 채 무의미한 말만 읊조리는 부잣집 도련님은 생존에 다급한 승냥이의 손쉬운 먹잇감이 된다. 하지만 글래스는 다르다. 그는 복수의 정당성을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피츠제럴드를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다른 사람의 모든 것을 빼앗는 것임을 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다.

   마침내 도망가던 피츠제럴드가 막다른 곳에 몰린다. 이제는 이판사판, 살기 아니면 죽기다. 글래스는 영화 초반에 곰과 사투를 벌였지만 결말에서는 피츠제럴드와 혈투를 벌인다. 이 싸움도 마찬가지로 살아남는 것은 둘 중에 하나뿐이다. 힘겨운 싸움 끝에 피츠제럴드가 무너진다. 피츠제럴드가 끝까지 약 올리려고 묻는다. 고작 나를 죽이러 이 먼 곳까지 왔느냐. 고작 나 하나를 없애러 온갖 고초를 거쳐 온 것이냐. 복수의 허무함을 상기시키는 것이야말로 죽어가는 피츠제럴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다. 그러나 글래스는 무너지지 않는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한다. 이 복수는 신의 손으로 행해졌다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 실린 피츠제럴드는 저 너머에서 이 광경을 구경하던 원주민들의 손에 잡혀 목숨이 끊어진다. 원주민들의 영역을 침입한 피츠제럴드는 범죄자다. 피츠제럴드로 대변되는 그 땅의 모든 침입자들 역시 범죄자다. 그러나 누가 불법이고, 누가 합법인지의 문제는 룰렛 위를 돌아가는 구슬이 어디에 멈출 것인지의 문제처럼 무작위적이다. 세계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지만 기막힐 정도로 무심하다.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 곰이 죽은 것처럼, 호크가 죽은 것처럼, 원주민들이 터전을 빼앗긴 것처럼, 글래스를 도운 원주민이 잔인하게 목매달려 죽은 것처럼. 만사는 원래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면 무의미하고 허무하다.

   그러나 복수에 성공한 글래스는 먼 빈 자연의 틈새에서 빛처럼 새어나오는 그녀를 만난다. 그녀는 그에게 너무나 장하다는 듯, 당신이 정말 자랑스럽다는 듯 환하게 웃는다. 그리고 그의 곁을 떠난다. 그제야 비로소 카메라가 글래스를 바라보고, 글래스도 카메라를 바라본다. 쉴 틈 없었던 글래스의 삶에 드디어 공백이 생긴다. 그의 시선이 대미를 장식한다. 이제야 카메라가 인정한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바로 죽음에서 돌아온 글래스, 그 사람의 이야기였음을.

   영화 「레버넌트」는 이처럼 인간의 삶이 증명 과정 자체라는 것을 보인다. 증명은 생존을 전제로 하며, 생존방식으로 그 내용이 구체화된다. 휴 글래스의 경우, 자신의 사랑을 잊지 않았고, 그 사랑을 삶의 목적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그것들을 빼앗은 자에게 똑같이 보복함으로써 분노가 아닌 사랑을 증명하였다. 그의 강인함은 자연의 무심함을 배경으로 삼았으며 비록 자연이 그를 보호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자신의 두 발로 그곳에 직립하였다. 이 영화에서 글래스가 피츠제럴드를 죽였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영화의 대결 구도는 글래스와 피츠제럴드가 아니다. 글래스 본인이 세계와 대결하는 구도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이 무의미한 세상에서 유의미를 창출한 의지의 인간이었으며 굳건한 사랑의 서사를 생존으로 증명해냈다는 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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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mocratic Schools, Second Edition: Lessons in Powerful Education (Paperback, 2)
James A. Beane / Heinemann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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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은 추상적이고 구체적 예시는 와닿지 않는다. 누구 잘못이 아니다. 교육은 실천하는 자의 것이라서 그런 거라 생각한다. 이들의 방향성에 동의한다 해도 그 자세한 이야기는 내가 맞닿아 있지 않는 맥락이하서 그런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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