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들 보르헤스 전집 2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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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역사상, 아니 문자가 나온 이래 인류 최대의 작품. 인간의 언어와 논리가 탈출하여 가상의 집을
짓고 부조리와 정신착란적인 읊조림을 통해 새로운 신화를 이룩한 놀라운 책. 개인적으로 특히 원형의 폐허들을 좋아한다. 어쩌면 인간의 본질이 마치 그와 같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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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9
윌리엄 골딩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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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보고 크게 충격먹은 소설. 윙윙거리는 파리떼들과 돼지시체, 뚱뚱하고 겁먹은 소년의 비명소리가 가득찬 그 섬은 인간에 대한 회의와 냉소로 가득차 있다. 마지막 정신을 차리고 눈물 흘리는 아이들의 시끄러운 울음소리조차 그것을 씻겨주지 못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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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통사 1 (제4판) - 원시문학 ~ 중세 전기문학
조동일 지음 / 지식산업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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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일 선생의 한국문학통사 1권을 읽고.

 


  조동일 선생이야 워낙 유명한 사람이니 내 군말 없이 우리 학교 수업 교재로서 묵묵히 들고만 다녔다. 12월이 닥치고, 기말고사의 시기가 오니 제대로 그 한 자 한 자를 땀땀이 읽고 있다. 찬찬히 읽으니 곧 저자로부터 흡사 수업 몇 강을 듣는 기분이 들어 신도 나고, 참 여러 의미로 좋은 책이다 싶어 한 권 뗄 때마다 간단하게라도 몇 글자 적어 보는 것이 좋겠다 싶어 타자를 두드린다.

  본격적으로 책의 국소적인 부분들에 대한 인상을 술회하기 전에, 이 책에 대해 가장 전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은 바로 저자의 관점이 이 책 전반에 뚜렷하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비록 이 글 형식이 문어체라도 활자를 넘어 존재하는 글쓴이의 생각을 그의 대화 듣듯 감상하는 것이 가능하다. 개인적으로 그래서 이 책이 더 좋다. 글쓴이가 통사라는 이름을 책 제목에 붙여 쓸 때 글쓴이는 자신이 무엇을 정리하겠다는 포부로 중립을 표방하려 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중립적인 입장의 고수는 음색에 아무 감정 없는 기교 좋은 꾀꼬리 하나 앉혀두고 간신히 노래 한 곡조 얻은 느낌을 줄 뿐이다. 자신의 의견이 확실하게 있어 저자의 글은 단호박처럼 여물어있다. 그 속이 달달해 계속 퍼먹게 되는 노랗고 꾸덕꾸덕한 맛난 글 같다. 물론 읽다보면 꼭 내 입맛에 맞는 부분만 먹게 되는 건 아니고, 호박 줄기 같은 부분도 씹기 마련이다.

  일단 맛난 부분부터 이야기하고자 한다.

  아무래도 가장 맛난 부분은 최치원에 대한 저자의 냉정한 평가였다. 최치원의 공에 대해서 언급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조 선생은 그가 도태된 이유를 시대현실을 외면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최치원이 입신에 몰두하다가 마음이 공허해졌으며, 자기 사상을 뚜렷이 세우지 못한 채 정신적 방황을 거듭하며 일생을 보냈다고 서술했다. 그런가 하면 그의 명시 추야우중을 해석하며 최치원이 홀로 고매한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니라 역사 현장을 외면하며 스스로 고독을 택한 것에 불과하고, 무엇 하나 이룬 것 없다고 신세타령하는 것이 실패의 증언이라 이야기하기까지 했다

  저자의 가히 박하다 싶을 정도로 냉엄한 평가를 보니 피식 웃는 소리가 흘러나올 정도로 재미났다. 저자의 글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그는 역사를 생성과 창조의 문제로 본다. 문학은 그러한 거대한 바다의 흐름에 부수적인 파도물결이라 보는 것도 같다. 그 차가운 물결은 역사 속에서 승전보를 울린 자들의 손에 의해 붓질되고, 승자들은 곧 자신이 타고 있던 물결의 흐름을 잘 파악한 자들이었다. 저자는 시대흐름을 읽고 그에 맞추어 행동할 줄 알았던 자들에게 높은 평가를 내린다. 그러하기에 저자의 눈에 최치원은 그저 글을 뛰어나게 잘 쓰지만 깊이와 통찰은 부족해 보였던 것 아닌가 싶다.

  저자의 전체 글 전개가 재미나고 유익한 것은 이처럼 그의 평가가 그만의 투철한 역사관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의 역사관은 분명 멈춘 것이 아니라 생동한다. 끝없는 힘들의 투쟁이며 인간 정치의 장이다. 문학은 그 역사 안에서 태동한다현대성과 역사성동시대성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저자의 논의는 또한 세련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그 이유는 고리타분하지 않기 때문이다고리타분함이란 무용함과 같다. 읽는 독자로 하여금 이 말을 지금 내가 왜 듣고 있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지게 하지 않는다현재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한국의 역사와 문학을 정리할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하고, 그 주장을 기반으로 삼아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끊임없는 자기 정체성 창조의 의지는 왕성한 청년의 힘을 느끼게 해주며, 당대의 석학이란 칭호가 붙는 그 의의를 인정하게 만든다.

  게다가 그 목적을 위해 자세히 상술되는 한반도 사람들의 이야기와 한반도 위의 문학사 이야기는 흥미롭기까지 하다. 자세하고 다채로운 자료를 습득하기 위해 노력했을 저자의 분투가 느껴진다. 저자의 글을 통해 큰 맥락을 조망할 수 있다. 게다가 고려 혜종의 잉태과정 같이 음란해서 재미있는 소소한 이야기까지 있어 읽는 이에게 긴장감과 흥미가 떨어지지 않는다. 이 정도의 박식하고 유익하며 전문적인 글쓰기를 하려면 어느 정도의 글자를 읽어야 하는지 가늠이 안 될 정도이다.

  그러나 저자의 갈래 이론은 여전히 조금 의아한 구석이 있다. 이는 저자의 관련한 책을 보아야 이야기를 제대로 할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신화와 민담, 전설 간의 갈래 구별이다. 이 의문을 해결하려면 그의 다른 책을 읽어야 한다. 한국문학통사 안에서 간략하게 나온 설명이 문제였다. 이 책 하나만 읽으면 한국문학사를 세세하게 알 순 있어도 저자의 독자적인 이론까지 파악할 수 있는지는 의구심이 든다. 

  또한 고려 왕실 혈통의 위기를 이야기하며 딸들이 드세다고 표현한 것은 지나가던 남의 집 딸 한 명으로서 직관적으로 불편한 묘사였다. 물론 천추태후가 긍정적인 인물은 아니기에 그러한 평가를 내렸다 본다. 자기 관점이 있을 때의 함정이 될 수도 있는 지점인데, 성에 대한 보수적인 관점이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단순화된 표현이라 읽다 중간에 작은 돌부리에 발가락이 걸려 넘어진 기분이었다. 이에 관해 이야기를 하자면 지나치게 길어질 것 같아 간단히 왜 기분이 불편했는지만 집고 넘어가고자 한다. 

  이때까지의 역사는 남성 위주의 역사였다. 여성은 남성을 중심으로 한 주변부에 불과하였으며 주도적인 위치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굳이 남과 여의 성을 분별해서 보면 역사 속의 모든 악한들은 다 남자였다는 식의 말이 나온다. 그러나 패악을 부린 남성이 있다 했을 때 드센 남성이 있었다는 표현은 하지 않는다. 단지 패악을 부린 여자가 있을 때 예외적으로 드센 여자가 있었다는 표현이 나온다. 인간의 욕망과 부도덕함에는 남녀의 구별이 없다는 것이 현대의 관점 아닌가. 한국문학통사를 읽어서 결국 도출할 수 있는 함의 역시 문학도 고대 신화적 시대의 일부 승자들에서부터 현대 만인의 대중에게까지로 그 향유범위가 확장되었다는 사실이다. 성姓에 대한 단순한 이런 표현은 저자의 의식이 이에 관해 어떤 지점 정도로 머무는지 궁금하게 만드는데, 이러한 문제에 깊은 의식이 있다면 딸들이 드셌다는 표현이 쉽게 나오진 않았으리라 본다.

  저자의 책을 읽으면서 든 한 토막의 생각이 이와 비슷한 지점에 맞닿아 있어 적고자 한다. 고려 시대에 여자들이 유난히 나설 수 있는 준거가 무엇인지의 문제에 관해서이다. 고려 시대에 외가와 왕비라는 힘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것이 왕의 혈통, 즉 순수하고 고결한 귀족적 혈통에 대한 신화적 인식 때문이었다. 고려 시대에서 더 앞으로 되돌아가 신라에서 선덕여왕 같은 경우가 가능했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아무 남자가 왕이 되는 것보다 신성한 혈통을 가진 자가 여자라도 왕이 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질 수 있었던 권위 혹은 권세조차 남성 중심, 부계 중심의 구조 안에서 부계의 혈통을 지녀야만 가능했다. 아니면 아버지가 있는 외가를 드높이고 그들의 이름을 빌려야 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태를 보니 지금 우리 시대의 대통령의 문제에 있어서도 아직까지 피와 혈통의 권위를 중시하는 풍조가 이어지고 있는 것 아닌가 싶었다. 진정한 남녀의 문제를 극복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을 업고 그 후광으로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고, 그것이 국민의 손으로 행해진 것이라면 여전히 이 시대의 여자가 얻을 수 있는 성공조차 남성의 힘 아니면 불가능한 것 아닌가 하는 한탄 섞인 걱정이 든다.

  글을 정리하고자 한다. 나머지 책들을 읽고 더 이야기하고자 한다.

 

(최치원의 추야우중을 이야기하면서)
가을바람에 괴롭게 읊조리기만 한다는 것은 만년의 처지를 잘 나타내주는 말이다. 세상에서 격리되어 할 일이라고는 시를 짓는 것뿐이지만, 시를 알아줄 사람은 드물다. 홀로 고매한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니고, 방안에 들어앉아서 역사의 현장을 외면하면서 스스로 고독을 택한 탓이다.
...
자기의 고독을 동정해달라고 지은 시인데, 독자는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앉아서 만리를 보고 만고흥망의 내력을 소상하게 훑을 수 있다 해도 자기 스스로 역사 창조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지식이 오히려 번거로운 짐이 되고 번뇌의 원인이 되고 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무엇 하나 이룬 것 없다고 신세타령한 최치원의 시는 실패의 증언이라는 점에서 소중한 가치를 가진다.

p276

그런데 딸들이 드셌다. 딸을 물려받은 외가세력을 업고 오빠이거나 아들인 왕을 억누르기도 하고, 외간 남자와 사통하기도 했다. 그런 것이 모두 이야깃거리가 되어 많은 왕실비화를 만들어냈다.

p296

조선왕조에서는 왕족의 혈통이 신성하다고 하지 않았고, 동성불혼의 원칙을 왕족에게도 철저하게 적용했다. 혈통의 신화와 관련해서 왕조의 흥망을 풀이하는 신비적인 역사철학은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
혈통신화는 고대의 유산이다. 고려가 중세국가로서 커다란 발전을 이룩하는 문화를 창조했으면서 왕족은 신성하다는 것을 낡은 방식으로 입증해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를 만들었다. 조선왕조의 창업자들은 그런 잔재를 완전히 없애고 유교 이념을 충실하게 구현해 널리 모범이 될만한 중세국가를 만들었다.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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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헤도로 Dorohedoro 1
하야시다 규 지음 / 시공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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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말할 것 없이 최고. 한 번 연구해보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고, 개성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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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사나이 (구) 문지 스펙트럼 20
E.T.A. 호프만 지음, 김현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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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와 그는 이 단편을 같은 날에 읽었다. 정독도서관에서 이 단편을 빠르게 읽은 내가 그에게 꼭 한 번 읽어보라는 연락을 취했기 때문이다. 두 시간도 안 되어서 곧 그에게 연락이 왔다. 다 읽었다는 말, 감탄을 금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악몽의 은유', 그것이 우리 둘이 내린 공통의 결론이었다.

  나는 현재 수업을 하나 듣고 있다. 이 수업을 통해 나를 비롯한 다른 학생들은 환상 문학에 접근하고 있다. 수업을 진행하시는 교수님의 특성상 독일문학이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한다. 


  '괴이하게도 내가 사모한 교수님은 독일어를 하시며 베를린 천사의 시를 추천해주셨고, 내가 애증한 교수님은 독어독문과였으며, 내가 사랑하는 남자도 독어독문과, 그리고 칸트와 헤겔과 니체가 독일인이다. 아쉽게도 미셸 푸코는 프랑스인이지만. 내일 볼 영화의 남자 주인공인 마이클 패스벤더도 독일 계열이다. 혹은 독일인일 것이다.'


  이 수업에서 얻은 나의 가장 큰 성과는 호프만의 작품들을 읽게 된 것이다. 호프만, 나는 그 사람의 이름을 길을 지나다 들은 정도에 불과했다. 처음 보게 된 것은 '호두깎기 인형'이었다. 그 유명한 작품은 우리 마음 속에 아름다운 발레리나의 상으로만 존재한다. 감동적이고 충직스러운 크리스마스 인형과 작고 사랑스러운 여자아이. 그렇기에 원작이 그렇게 변태적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호두 깎는 인형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장이 아니므로, 그 이야기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다만 호프만이라는 인물이 '밤의 마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을 따름이다. 


  '나는 카프카 생각을 했다. 카프카도 법조인이었는데 밤에는 글을 썼다지. 억눌린 듯한 그림자의 문체를 가진 것도 비슷하다.'


  하지만 '모래 사나이'는 '호두깎기 인형'을 넘어서는 엄청난 작품이었다. 나 역시 이 짧고 무서운 단편을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냈다. 이 단편은 편지로 시작한다. 나타나엘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어린 시절을 읽는 나는 이 흉측한 이야기가 마치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악마의 환영과 같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어렸을 때 부모님 말을 듣지 않고 밤을 새우다 본, 우리 집 베란다 복도에서 나를 쳐다보던 눈이 없던 그 검고 긴 외계인을 잊을 수 없다.' 


  나와 나타나엘은 완벽히 같은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었다. 다만, 그 요소들이 달랐을 뿐이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를 여러분들이 전적으로 믿을 수 없듯이 나 역시 나타나엘의 증언을 전적으로 믿을 수 없었다. 그는 미쳐있었다. 그가 유모한테 들었다고 한 그 끔찍한 저주의 말들도 십중팔구는 다 거짓일 것이다. 어떻게 독일인들의 환상 속에나 존재하는 모래사나이 따위가 잠자지 않는 어린 아이들의 눈을 뽑아내서 그 빈 눈구멍 안에 검고 뜨거운 쇳가루를 부을 수 있다는 말인가?

  나타나엘의 신경질적인 꿈은 그러나 사건들만이 아니라 인간들을 대상으로도 펼쳐진다. 클라라에 대한 그의 의심은 편지의 서술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자신에게 이성적인 클라라를 언짢아 한다. 그렇지만 클라라를 끊임없이 찬양한다. 그의 그러한 이중적인 태도는 남을 험담하기 위해 눈치를 보는 인간들의 작태와 동일하다. 그는 자신과 같은 환상세계의 정신을 가지지 않는 자신의 여자를 개조시키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지만 클라라는 그의 분에 넘치는 여자였으며, 그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의 손아귀에 놀아날 만한 여자는 움직이지 않는 나무인형인 올림피아 뿐이다. 자신이 쉽게 다룰 수 있는 존재, 자신의 말을 단지 '아-'라는 단말마의 외침으로만 응대해주는 올림피아만이 그의 영원한 자위와 성교의 대상인 것이다.

  이러한 부분들을 생각해보면 나는 프로이트가 이 단편을 분석하며 눈의 상실에 대한 나타나엘의 공포를 거세에 대한 공포로 연결시킨 것이 이해가 간다. 눈, 이성과 진실을 보기 위해 존재하는 눈, 그것을 똑바로 갖고 있는 클라라는 이성과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자신만의 환상을 보는 나타나엘 자신을 거세시킬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녀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그 비뚤어진 서술구조에서도 드러난다. 클라라는 아름다운 존재이며 동시에 아름답지 않은 존재이다. 자신을 굴복시킬 수 있는 힘은 위대하지만 동시에 없애고 피해야 할 권력이다. 그러한 두려움은 클라라 뿐이 아니라 자신의 성기보다 더 큰 성기를 가진 어른 남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읽을 수도 있다. 자신과 같은 피를 가진 미래의 모습인 아버지를 제거하고, 아버지를 빌게 만든 코펠리우스는 모래사나이로 나타나엘을 굴복시킨다. 그를 마치 어리고 무능한 쥐처럼 찍찍 울게 만든다. 그를 닮은 존재들은 무조건 두려움을 유발시킨다. 처음에는 그를 닮은 상인, 나중에는 보통의 회색 덤불조차 나타나엘을 미치게 만든다.

  그러나 서술자는 사형집행을 바라보며 냉정하게 미소짓고 있는 중세의 귀족처럼 그러한 나타나엘을 조소한다. 코펠리우스가 등장해 나타나엘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예견한다. 나타나엘이 죽고 나서 새로운 가정을 차린 클라라를 향해 당연히 그녀가 누릴 만한, 나타나엘이 절대 줄 수 없었을 행복이라고 이야기한다.

  나와 그가 생각하기에 이 단편은 그대로 '악몽의 은유'이다. 악몽, 자신의 남성성과 자신의 세계관이 처절하게 굴복되어 무너지고 비웃음 당하는 것, 프로이트가 말한 것처럼 인간 대부분이면 꾼다는 벌거벗은 채로 느끼는 수치심의 꿈, 사랑하는 것들은 산산조각나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들은 비이성적인 연결로라도 이루어지는 바로 그것이 악몽 그 자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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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4-11-30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프만의 소설에서 카프카적 느낌이 났다니 다시 한 번 호프만을 읽어보고 싶군요. 최근에 카프카를 읽었는데 정말 한 번에 읽어도 도통 이해가지 않을 정도로 악몽 같은 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읽고 싶은 매력 아니, 마력(魔力)이 있는 글입니다.

설표 2014-11-30 14:08   좋아요 1 | URL
카프카의 글이 악몽 같다면, 그것은 인간의 무력함과 나약함이 이해할 수 없는 여러 양상들 앞에서 처참히 깨지거나 적어도 그 앞에서 방황하게 되는 양상으로 드러나기 때문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 그러한 글쓰기를 하는 여러 작가들이 꽤나 있는 편이더군요. 호프만도 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미묘한 결은 다들 다르기 때문에 `카프카적 느낌`이란 표현도 굉장히 추상적인 분류에 불과하지만 말이죠.
이러한 계열의 책들을 보며 저는 자꾸 읽고 싶다기보다는, 반복적으로 머릿 속에서 재생하고 싶습니다. 문자들이 이미지화 된 것을 계속 상상하고 싶은 거죠. 읽은 이의 머릿속에 잔상을 남기는 힘을 마력이라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마력적인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재능 있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생각합니다.
cyrus님 댓글에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게 되었군요. 모쪼록 이렇게 생각을 풀 수 있게 해주신 댓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