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 브리지트 미라 출연 / 미디어포럼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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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고해보면 저번에 저는 파스빈더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글을 썼었는데, 파스빈더가 자신이 연출하는 영화마다 배우로 나오는 것은 그러한 의미에서 꽤나 흥미롭습니다. 저는 파스빈더를 처음 영화 안에서 보았을 때 그저 매력적인 젊은 청년으로 생각했습니다. 조금 더 솔직히 밝히자면 사실 생긴 거 참 여자 좋아하게 생겼다, 라는 일차적인 생각을 했지요. 파스빈더가 사람의 성적 정체성을 가리지 않고 관계를 맺은 걸 생각해 보았을 때 아마 그러한 제 생각은 지나치게 일차적으로 나온 것이고, 또 동시에 편견에 가득 찼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저 저는 약간은 오동통하고 뵤루퉁한 그의 반항적인 얼굴에서 소위 남성성이라는 것을 강하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가죽 자켓 입은 남자를 개인적으로 좋아하는데, 가죽이 참 잘 어울려서 그게 또 인상적이기도 했고요. ... 이번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에서는 무려 여주인공의 사위 역할로 나오더군요. 멍청하고 폭력적인 인물이었습니다-어떻게 감독 본인이 자신의 얼굴이 그러한 역할에 잘 어울리는지를 그렇게 또 잘 아는지.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를 저는 사랑 영화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가장 정열적이고 순수한 환희이지만, 그러한 선에서 논의가 끝날 수 없는 주제입니다. 사랑도 인간과 인간이 소통하고 엮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이겠지요. 저는 이 영화를 딱 그 차원으로 보았습니다. 맨 처음 이 영화는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의 현격한 사회적 차이에 집중을 하게 만듭니다. 여성이 대략 남성보다 스무살 이상은 많고, 남성은 그 때 당시에 차별받던 (사실 지금도 차별받긴 하지만요) 아랍인이며, 여성은 독일인입니다. 그들을 둘러싼 주위 인물들의 반응은 경악 그 자체이지요. 심지어는 끝까지 그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물도 나옵니다. 이 영화는 이 논란 많은 커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반응에 관한 내용을 영화 전반부에 배치하고 있습니다. 전반부에서 젊은 아랍 남성과 결혼한 늙은 독일 백인 여성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분위기는 곧 영화가 후반부로 접어드는 국면에서는 소강되지요. 처음에 저는 이러한 분위기 전환이 단순히 파스빈더의 의외로 낙관적인 성품에서 나오는 것 아닌가라는 소소한 의문을 마음 속으로 제기했습니다만, 영화를 끝까지 보니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싶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결국 '반대와 반감'이라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들게 마련 아닙니까. 그런 점을 고려해보면 파스빈더의 전개가, 안 좋은 일이 있어도 결국 주위 사람들의 선량함과 무심함이라는 비폭력적인 요소로 좋게좋게 해결되는 게 사람 일이다, 라고 감독이 안일하게 생각한 것 아닐까? 라는 제 생각은 틀린 생각인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 전반부보다 후반부였던 것 같습니다. 후반부에서 이제 타인들과 이 '괴이한' 커플의 갈등은 소강상태를 벗어나, 일종의 적응 상태로 진입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난항에 부딪치게 되는 것은 이 커플 두 명 본인들입니다. 이들이 보이는 일종의 권태와 서로에 대한 몰이해는 단순히 이들이 엄청나게 다르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사실 이들이 갈등을 겪는 부분을 보면, 굉장히 사소하면서도 본질적입니다. 완전히 다른 이방인이라는 것을 알면서 서로를 사랑으로 품어주었지만 결국 그러한 사랑의 상대에게도 자신들이 감당해낼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알리에겐 에미가 쿠스쿠스를 만들어주지 않는 것이 그러했을 것이고 에미 입장에선 알리가 평범한 독일인인 자신의 삶의 방식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그러한 영역이었겠지요. 그러나 저는 이것이 이들이 나이 차이가 많고, 다른 국적이라서 그렇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즉, 이들이 보이는 이러한 갈등은 다른 모든 '일반적'이라 불리우는 모든 커플들에게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장면인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에미가 친구들이 있는데도 박차고 나가는 알리를 향해 '저이가 저러는 것은 아랍인들 특유의 우울한 문화 때문이지'라고 말하는 것은 그러한 제 의심을 키워주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딱 보기에는 상대방의 다른 문화를 타겟으로 삼는 것 같지만, 이러한 대사는 조금만 변용하면 우리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배우자를 공격하는 대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이가 저러는 것은 시댁 특유의 정신병적인 문화 때문이지'는 어떨까요?

 

 

  제가 말하는 방향이 잘 정리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향해서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히틀러 시대의 불평등한 사고방식이 남은 독일 사회를 꼬집은 것이라는 해석이 무효하진 않지만 그것보다 더 근본적으로 파스빈더가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과 인간의 사랑 안에는 그 의의와 동시에 한계점이 여실히 존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보았습니다. 엄청나게 다른 차이에서 오는 사회의 따가운 시선이 전자의 해석을 담아내고 있다면, 아무도 뭐라고 더 이상 대놓고 비난하지 않는 상황에서 즉 나와 사랑하는 대상 둘만이 관련된 상황에서 갈등과 권태와 일탈을 빚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가 제 눈에 더 들어왔다고 하는 게 좋겠군요. 이는 맨 마지막에 알리가 위궤양 때문에 병원에 갔을 때, 즉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매우 극적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보입니다. 알리는 위궤양을 본질적으로 고칠 수는 없습니다. 그는 6개월마다 발병하는 이 병 때문에 또 이 병원으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위궤양과 마찬가지로 아마 비슷한 주기로 에미와 자신과의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것은 근본적인 문제를 품고 있기 때문에 위궤양을 절대 고칠 수 없다는 의사의 확진처럼, '고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에미는 의사선생님에게 이렇게 말하죠. '제가 더 잘하면 나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의사는 또 이렇게 확진합니다.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과 인간은 어떠한 차이를 얼마나 크게 갖고 있든 서로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으며 이러한 필연적 몰이해는 서로가 서로를 분명하게 사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리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 거리감은 권태 혹은 일탈이 됩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지 않았다면 그 권태와 일탈이 어떤 식으로든 봉합되겠죠. 다만, 이것은 사랑이 서로를 말 그대로 하나로 만드는 풀딱지가 아니라는 점에서 단순한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뭐 어때요. 결국 그 둘이 꼭 서로 손을 잡고 있는 장면을 보면 그들은 자신들 나름대로의 사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서로 완벽히 하나가 아니라는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는 것, 혹은 먹어치우는 것 뿐이지요. 파스빈더는 편하게 그래, 그게 인간이고 사랑이지, 행복이 항상 즐거움을 의미하는 건 아니야, 라고 이야기해주네요. 생긴 것과 다르게 참 따뜻한 남자가 바로 파스빈더 같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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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를라 기담문학 고딕총서 8
기 드 모파상 지음, 최정수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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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에 접했던 기 드 모파상의 글들은 굉장히 사실주의적이었다. 어렸을 때 읽고 기억에서 지우지 못한 『비곗덩어리』와 『목걸이』와 같은 단편들은 특히 그러하였다. 모파상의 작품에서 느껴진 강한 사실주의적 색채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수업을 들으며 모파상의 작품이 환상문학의 세계 강의계획안에 올라와 있다는 것은 의외였다. 궁금증을 안고 본 모파상의 『오를라』는 상당히 강렬했다. 그러나 필자가 느낀 이러한 강렬함은 음침한 분위기에서 나오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냉정한 눈을 가진 작가의 치열한 고민에서 나오는 바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전공 특성상 문학과 철학, 그리고 교육이라는 학문 안에서 많은 고민을 한다. 여러 가지의 고민 중 현재 여실히 다가오는 것은 바로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관한 것이다. 필자는 『오를라』를 보면서 스스로가 갖고 있던 문학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이 안에 형상화되었다고 생각했다. 필자가 느낀 문학의 숙명적인 문제 상황은 바로 이것이다. “자신이 본질이라 느낀 것을 어떻게 다른 이에게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가?” 구체적으로 예시를 들어 질문을 해본다면 이러한 문장으로도 쓸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순전한 사랑이라면, 그 사랑의 강렬함을 다른 이들에게 그대로 담아내어 전달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러나 그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언어와 사물의 관계를 생각할 때 의미론적 기능으로서 언어는 구체적 체험을 추상화한다. 또한 감각의 전체성은 언어가 미치는 범위 밖에 놓이기 때문에, 언어는 감각적 대상의 전체상을 다 묘사할 수는 없고 결국 많은 부분이 생략될 수밖에 없다. 기표와 기의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기표가 기의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임의성을 통해 기의를 대표한다는 성질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는 언어의 자의성이라는 유명한 개념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기표는 단지 우연히 선택된 것뿐이다. 이처럼 언어로 무엇인가를 표현한다는 데 있어서 모든 글을 쓰는 이들은 본질적으로 실패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각주 : 『시론』제4판, 김준오, 삼지원, 2002년, p65) 우리는 사물과 경험, 감정을 그 본연의 성질만을 보이며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수많은 시인들과 소설가들을 끊임없이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게 한 문학의 본질적 요소인 것이다.

 

     필자는 단편 『오를라』에서 주로 나타나는 서술자의 자기분열이 바로 진실의 순간을 포착하지 못한 작가의 괴로움과 같은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였다. 『오를라』에서 등장하는 1인칭 서술자는 평온한 일상을 살다가 점점 자신의 주변에 있는 무서운 존재를 자각하게 된다. 그러나 필자가 인상적으로 주목한 것은 그 두려운 존재가 우선적으로 작품의 서술자에게 공포감을 야기했다는 것이다. 즉, 나중에 ‘오를라’로 이름 붙여진 그 두려운 존재가 객관적으로 서술자의 바깥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보다 ‘오를라’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느끼는 서술자의 불안함이 더 흥미로웠던 것이다.

 

     유쾌한 관광을 다녀왔다며 서술자가 전하는 몽생미셸에서의 이야기는 서술자의 불안함과 겉보기에는 어떠한 관련성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몽생미셸의 사제는 상당히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한다. 그는 서술자에게 당연히 있다고 존재하는 것들을 잠자코 생각해보면 보이지 않는 것들, 즉 실제로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명확하지 않는 것들이라며 바람을 예로 든다. 몽생미셸의 사제와 한 대화는 서술자가 겪게 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설명되지 못하는 집안의 사건들과 자연스럽게 엮어진다. 즉, 도저히 확신할 수 없는 일이 분명히 일어나고 있는 불명확한 상황 아래에서 서술자는 명백한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몽생미셸에서 서술자와 신부가 한 대화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설명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독자들에게 생각하는 계기를 제공해준다.

 

      그렇지만 독자들이 고민할 틈새도 없이, 이야기가 전개되면 될수록 서술자의 혼란은 심화된다. 이러한 와중에 필자를 재미있게 만든 부분들은 서술자의 혼란이 더 심화되면서 나오는 자기고백적인 서술들이었다. ‘오를라’를 보기 위해 거울에 비친 상을 보려고 시도했던 일과 사촌누이의 최면과 관련된 사건들에서 특히 그러하였다. 필자는 서술자가, 사촌누이가 최면에 의해 조종당했던 일을 상기하며 ‘그녀는 자신의 내부에 들어온 이방인의 의지를 따르고 있었다. 마치 또 다른 영혼이, 또 다른 어떤 영혼이 그녀의 내부에 기생하는 것 같았다.’라고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강력한 혼란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였다.

 

      서술자는 ‘오를라’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오를라’의 존재가 있음을 느끼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그 정체를 규명해내지는 못한다. 그리고 서술자는 ‘오를라’를 무서워한다. 필자는 여전히 이 단편에 대해 궁금한 것이 남아 있는데, ‘오를라’가 정녕 작품의 서술자에게 어떠한 위해를 직접적으로 가했는지가 그러하다. 필자는 글을 읽으면서 작품의 서술자가 느끼는 고통이란 것들은 모두 서술자 스스로가 느끼는 내적 공포와 괴로움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작품의 그 어디에서도 ‘오를라’가 그를 괴롭혔다는 명백한 사실 판단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모든 것이 추측일 뿐이며 상당히 불확실하다. 또한 필자는 사촌누이가 겪은 최면이라는 현상을 보며 서술자가 그 괴이한 광경을 설명하기 위해 끌어들인 표현은 주로 ‘오를라’에 대해 언급할 때 나오는 이방인 혹은 외계인과 같은 단어였다는 점에 주목했다. 즉, 필자는 작품의 서술자가 두려워하는 존재들은 모두 서술자 본인이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검은 그림자와 같은 존재들이며 그것들이 통칭되어 하나의 ‘오를라’로 설명되지 않느냐는 의심을 궁극적으로 하게 된 것이다. 더불어 그러한 ‘오를라’들, 즉 정확히 묘사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필자에게 고통을 야기한다고 결론지었다.

 

      알 수 없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충분히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세상에 대해 무지함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모른다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세상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무엇이든 잘 파악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모르는 것이 나타날 때 그 두려움과 공포를 추스르지 못한다. ‘오를라’를 처음 발견한 서술자가 필사적으로 논리를 사용해 ‘오를라’를 설명하려는 장면은 그러한 인간의 성격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서술자가 자신이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것들의 신비를 무서워만 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는 그러한 자연적인 존재들에 대해 경탄하는 법도 알고 있다. ‘이 보이지 않는 것의 신비는 얼마나 심오한가! 우리의 빈약한 오관으로는 그것을 측정할 수 없다.’와 같은 문장에서 그러한 서술자의 성격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경탄은 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이기에 이것이 단순히 자연경관에 머무르지 않고 점차 서술자에게 가까워지며 그의 머릿속으로 다가올 때 두려움으로 변질된다. 그러한 이유는 서술자가 대상을 단순히 보고 느끼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고, ‘머릿속에서’ 이성으로 작용하려 하지만 그것이 불가해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상술한 것처럼 이러한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서술자의 근원적인 공포와 동시에 잠재하고 있는 경탄이 바로 많은 것을 안다고 자부하는 문학인의 펜촉 끝에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관한 단편으로 창작되었다고 본다. 문학인들은 언어를 다루는 사람들이며, 뛰어난 묘사력을 자랑한다. 그러나 그들의 묘사와 표현력은 사건의 진상과 감정의 진실성을 일백프로 담아낼 수는 없다. 그러한 이유는 그들의 실력과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원래 언어라는 것이 본연적으로 그러한 한계를 갖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학인들은 이러한 한계에 부딪쳤다 하여도 포기하지 않는다. 손에서 펜을 놓는 순간 스스로를 문학인이라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항거라도 하듯이 그러한 상황에서 오히려 더 쓰기 위해 언어를 선택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원천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감정과 경험들을 묘사하기 위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필사적으로 짜낸다. 그들의 결과물에는 물론 그럴 듯한 것도 있고, 실패작도 있다.

 

      모파상의 『오를라』는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자신이 느낀 감정과 경험을 묘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설명 불가능함에 좌초되어 좌절한 문학인의 소설이다. 설명 불가능한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서술자의 시도들과, 자신이 언어로 이해시킬 수 없는 미지의 신비한 것들에 관한 동경과 동시에 표현과 이해가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두려움은 문학인을 밤새 잠 못 들게 하며, 그의 피를 빨아먹는 것처럼 문학인을 소생시키지 못하게 만든다. 그 끝에 문학인은 그러한 한계에 시달리다 쇠약해져 실패한 자기 자신을 징벌하게 되는 것이다. 문학인 본연의 의무와 한계에서 자기분열을 일으킨 자의 비극적 최후를 암시하는 결말은 작가의 냉소적인 모습을 엿보게 한다. 이렇게 모파상은 문학의 필연적인 실패를 ‘오를라’라는 존재로 그려낸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오를라』가 그렇게 치열한 고민에서 나왔다고 하여도 그 결말에 동의하지는 못한다. 물론 문학은 반복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본질적으로 이룰 수 없는 소망을 마음에 품는다. 모든 문학인들은 자신들이 말하고자 싶은 것을 전부 부분적으로만 형상화 해내는데 성공한다. 그들이 그리고자 하는 원본은 언어라는 여과기를 거치는 순간, 많은 부분들이 떨어져 나간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적인 섭리에 부딪친다 하더라도 작품의 결말이 이야기하는 방향처럼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인간의 한계에 감히 나동그라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이 언어의 한계를 직시하고 자기 자신을 완전히 표현하는 것에 대한 욕망을 멈추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인간은 스스로가 동물이라는 것에 만족하며 살았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서로에게 묘사하고 이해시키는 것을 일찌감치 포기했을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표현하려는 욕구를 가진다. 이것은 인간이 다른 인간과 소통하고자 하는 근원적 욕망에서 출발한다. 또한 인류는 그러한 소통의 욕망 속에서 서로를 동물이 아닌 대화와 공감이 가능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스스로의 동물성을 배격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만약 인간이 이러한 방향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동족상잔과 약육강식의 세계인 동물의 영역에서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그러한 빛의 선택은 힘든 방해물들을 내재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우선 인간이기 이전에 동물이라는 점과, 인간이 서로 소통하기 위해 개발한 언어가 근본적인 자연성을 설명해낼 수는 없다는 한계점이 바로 그러한 방해물들이었다. 이렇게 높고 냉엄한 방해물 앞에서 인류는 결국 사회의 결속을 향한 방향은 틀린 것인가 회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회의가 당연한 순간이라면, 회의의 끝에 남은 선택의 순간 역시 당연히 올 수밖에 없다. 즉 동물로 남느냐 인간으로 사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인간이 동물성을 포기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하기에는 순간순간의 선택 속에서 자신의 동물적인 욕망을 버리고 더 큰 지평으로 나아가 ‘인간으로서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지만 그 한에서 만족하며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비극적인 실패를 예견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하듯 언어로서의 소통과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킨다. 그러한 선택이 비록 찰나의 순간이며 일관성을 갖지 않더라도, 우리는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며 짐승처럼 자신만을 보며 살지 않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필자는 인류가 그러한 삶의 방식에 도덕적 우위를 주는 것이 비단 사회적 합의와 관습에서만 우러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필연적으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이고 가는 그 어려움을 모를 수가 없기 때문에 인류가 그러한 이들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그러나 인간은 분명히 자신의 한계를 저버리며 살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결국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표현할 수 없으며, 자신이 한 표현은 언제까지나 그 자신이 말하고 싶던 본질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 다른 자와의 공유를 애타게 바라지만 그러한 공유는 언제나 완전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의 동물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바라는 분열의 상태라고 해서 넋을 놓고 동물이 되자는 말을 할 수는 없다. 인간은 사회를 이루어 동물처럼 자신만의 이득을 취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스스로에 대한 이해를 바라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스스로를 설명시키는 것을 포기하고 살아간다면,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 안에서 그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오를라』에서 나타난 자기파멸은 필자가 살고 싶은 삶의 방향도 아니며 공동체를 위하는 결말도 아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스스로의 한계를 직시한 다음에 그러한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무수한 노력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노력을 무용하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원래 모순이다. 인간은 동물이 아닌 인간이 되고자 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가 인간을 규정짓는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의 고민도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고 본다. 이처럼 문학, 그리고 인간의 필연적인 실패는 우리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걷는 것 자체에 의의가 있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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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비우스
김기덕 감독, 조재현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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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시작 - 김기덕의 말 -

 


<<김기덕 감독, <뫼비우스> 작의(作意)>>

 

‘가족은 무엇인가

욕망은 무엇인가

성기는 무엇인가

가족 욕망 성기는 애초에 하나일 것이다

내가 아버지고 어머니가 나고 어머니가 아버지다

애초 인간은 욕망으로 태어나고

욕망으로 나를 복제한다

그렇게 우린 뫼비우스 띠처럼 하나로 연결된 것이고

결국 내가 나를 질투하고 증오하며 사랑한다.’

 

-네이버 영화에서-

 

 

1. 나는 왜 김기덕을 욕망하는가.

 

 

    김기덕을 사랑하기 시작했던 그 아름다운 순간부터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어린 나이에 - 몇 살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 양동근이 출연한 김기덕 감독의 [수취인불명]을 보게 되었다. 그 영화를 찾아본 이유는 당시에 양동근에 빠졌기 때문이다. [수취인불명]은 처음에는 재미없는 작품이었다. 양동근이 양공주 밑에서 태어나 혼혈인 연기하는 부분만을 띄엄띄엄 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대본을 읽으면서 한 번 집에서 혼자 연기를 해보자 하는 생각에 대본 사이트를 찾았다. 나는 [수취인불명]의 각본 안에서 양동근의 엄마인 양공주 역할과 양동근이 맡았던 소년 역할을 시도했다. 그 때 나는 무척 서투르게 연기를 했는데 이상하게 그녀와 그녀의 아들 연기를 할 때면 나도 모르게 안에서부터 깊은 울음이 솟구치는 것이었다. 나는 김기덕의 작품 안에서 인간을 울리는 힘을 발견하였다.

 

    사실 김기덕의 작품을 논리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냉엄한 위치에서 바라본다면 나는 그의 작품을 좋아할 이유가 없다. 그는 내가 긍정하는 인간관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니다. 김기덕 감독이 초기 몇몇 작품들과 가히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나쁜 남자]에서 욕을 먹은 것처럼 그의 작품 안의 여성들은 전형적인 피해자들이다. 그것도 그냥 피해자들이 아니라 가해자들인 남성들에게 스톡홀름 신드롬이라도 빠진 것처럼 군다. 그리고 김기덕 감독은 얼빠진 그녀들에게서 구원을 받고자 품 안으로 철없는 강아지처럼 끼어드는 남성들을 그려내곤 했다. 여성을 마치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보는 그 시선에 수많은 사람들 특히 여성이 불쾌함을 느끼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한 번은 수업시간에 [나쁜 남자]를 보는데 뒤에서 영화를 보던 두 여학생들이 김기덕 감독의 작품을 "더러워."라는 말로 묘사하더라. 사실 그들의 반응이야말로 정상적일 것이다. 김기덕 감독은 자신이 의도를 했든 안 했든 여성들의 얼굴에 침을 뱉는 남자와 같다. 아마 수많은 여성들, 심지어 남성들도 마찬가지로 김기덕 감독과 [나쁜 남자]의 양아치 건달 남자주인공을 큰 차이 없는 인간 군상으로 여겼을 것이라 짐작한다.

 

    하지만 인간은 재미있게도 모순적인 존재이다. 나에게도 두 얼굴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미워하는 존재를 사랑할 수 있으며 사랑하는 존재를 미워할 수 있다. 한 남자의 투박한 얼굴과 소인배적 근성을 혐오하는 일과 그가 보여주는 예술혼에 열광하는 일은 동시에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무절제하게 발생하지 않는다. 나는 마치 연애를 하는 여자와 같다. 사랑에 빠졌지만 우리 모두 사랑에 빠졌다고 해서 자신의 몸을 인당수에 빠트릴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우리는 이 남자와의 만남을 지속할지 아닐지 고려하기 위해 저울을 준비한다. 이 저울에는 기준이 있다. 이 남자와 있으면 좋은 게 더 무거운지 나쁜 게 더 무거운지가 관건이다. 나에게 김기덕은 이 저울에서 좋은 쪽이 나쁜 쪽보다 훨씬 더 무거운 남자이다. 김기덕의 작품들은 나에게 새로운 일정과 장소를 제공하는 김기덕과의 데이트나 마찬가지이다. 그는 불친절하고 날 것 위주이며 서툰 욕망을 제시하지만 언제나 솔직한 남자이다.

 

    사랑에 빠진 여자답게 그라는 남자의 매력을 좀 더 자랑해보고 싶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는 분명 더 많다. 그는 아름다운 짐승이다. 대한민국의 어떠한 영상 예술가들 중에서도 뮤즈 여신들의 옷 자락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이미 엇비슷한 유형으로 범람하는 대한민국산 영화들 속에서도 자신만의 얼굴을 잃지 않은 개성남이다. 김기덕만이 갖고 있는 정적인 배경들과 인물들의 충격적인 행동들은 많지 않은 대사들 속에서 아우라를 빛낸다. 그는 언어와 논리로 설명하고 재고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이 맞지 않는 옷임을 본인도 잘 아는 것이다. 인간의 사회적 코드이자 매개체인 언어를 배격한다는 것에서부터 그가 얼마나 인간이 부리는 도구를 신뢰하지 않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심장을 꿰뚫기 위해 영상으로 도전한다. 그는 인간이 아직 자연과 분리되기 이전의 에덴동산에 살았던 아담처럼 군다. 그에게서 우리가 원시성과 신화적 성격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점에 근거한다고 본다.

 

    김기덕 감독이 우리의 눈에는 유럽적이며 동시에 오리엔탈리즘에 근거한 사랑을 받는다는 지적은 그렇기에 더 의미가 있다. 그가 우리 대한민국 사람의 정서와는 멀어 보이는 유럽남자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유럽인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동양인의 면모를 유럽인들에게 팔아먹기 좋은 형태로 내놓기 때문인 것일까? 글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흥미롭고 가치 있는 지적이라 생각하지만 그 지적은 내 생각에 김기덕의 아우라를 너무 무시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나의 남자는 그렇게 매력 없는 남자가 아니거든!

 

   그러나 이는 사실 자세히 생각해 보면 쉬운 문제일 수도 있다. 김기덕 감독이 예술의 방식으로 선택하는 방식은 인간의 치부와 욕망에 대해 우리가 즐겨 쓰는 자제하고 돌려말하는 방식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밑바닥을 긍정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은 아니다. 예로부터 말 잘 하는 사람들을 사기꾼으로 생각했던 동양의 문화가 어느 순간 사라진 것이 아니다. 말 하나도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이 당연했던 우리 사상 속에서 우리가 제정신이 박혔다면 절대 입 밖으로도 꺼내지 않을 구질구질한 말들을 쏟아내고 있으니, 원! 김기덕 감독은 마치 미국 교포 출신이라서 성생활에 자유분방하고 당당한 겉만 한국인처럼 생긴 여학생이나 똑같은 꼴이다. 한국인들은 그 여학생에게 대놓고 감히 뭐라 말은 못하지만 뒤에서 그녀가 어떻게 그렇게 대놓고 그러한 말들을 일삼는지 입방아를 찧어대기 마련이다. 다만 그 여학생은 자신의 일상 언어로 그것을 표현할 뿐이지 김기덕 감독은 예술언어로 표현한다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기덕이 또 재미있는 것이 그렇게 솔직하게 자기 하고 싶은 말들을 풀어놓는 것과는 반대로 자신의 뱉어진 말들의 향방은 또 묘하게 동양적이라는 것이다.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불교적 감수성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는 죄의 사함과 죽음, 징벌, 욕망과 같은 인간의 원초적 감정에서 발생한 한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초월시키는 것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는 절대 그러한 한들이 악귀처럼 이승에 떠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영화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구원해주고 싶어 하는 선한 마음의 창조주이다. 아마 이는 자신의 마음속의 번뇌를 승화시키고자 하는 한에서 온 것일 터이지만 말이다. 자기 자신의 죄를 이고 손에서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한의 승화 혹은 한의 초탈은 뫼비우스에서도 죽음과 탈속으로 또 한 번 드러나는 바이다.

 

    내가 김기덕을 욕망하는 이유는 그의 철학적 고민과 치열한 질문들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의 그러한 작품들에 매료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김기덕 감독이 뫼비우스로 제시하고 싶었던 질문은 0에서 감독 본인이 밝힌 글, 그대로이다. 그는 대로변에 SEX를 써놓았다. 대한민국의 모든 성性이 음지의 늪지대와 같은 존재인데도 그는 그에 관해 큰 소리로 질문을 던진다. 성욕은 음지에서 그림자를 먹고 사는 욕망인가? 성기의 자극과 우리의 이성은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 성기의 욕망에서 우리가 정말 자유로운가? 아니다. 우리는 성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만약 그렇다고 대답했다면 아마 자기부정에 가까울 것이라 본다. 성욕이 이미 다른 식으로 발현되는 것일 수도 있고.

 

    우리는 성기에서 오는 그 뜨끈뜨끈한 자극이 우리에게 수많은 상상과 부정하고 싶은 더러운 짐승의 욕망들을 소환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부정하고 싶어 한다. 적어도 부정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그에 대해 침묵으로 다스린다. 나는 음담패설이 강력한 유머라는 것이 전혀 놀랍지 않은데, 그 이유는 침묵으로 여겨지는 것을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데서 오는 쾌감이 그 정도임을 보여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기덕은 그러나 음담패설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정색을 하고 분명히 질문한다. 배우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성과 섹스를 하는 것, 그것도 자기 아내의 젊었을 적 모습과 상당히 닮은 동네 슈퍼마켓 아가씨와의 섹스. 혹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을지는 몰라도 커다란 가슴을 부끄럽지도 않게 보이는 아가씨와의 섹스. 집단 윤간, 아버지의 여자와의 섹스. 집에서 같이 살고 있는 가족에게 느끼는 성욕. 그리고 그러한 상상들과 욕망들에서 오는 죄책감까지 김기덕은 하나하나 집어내며 묻는다. 우리가 민망해하고 숨기고자 하는 것들을 그는 면전에서 대놓고 깐다.

 

    왜, 우리가 깨끗하고 깔끔하고 이성적인 짐승이라 그러한 성욕은 없고 더러운 상상들은 해본 적 없다고 부정하는가? 감히 부정하지 말라. 방금 내가 열거한 이야기들을 사람들이 상상해 본 적조차 없다면 포르노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수요가 많다고 알려진 근친상간 포르노물들 역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김기덕이 위대한 이유, 내가 김기덕을 사랑하는 이유, 김기덕을 열망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김기덕은 우리가 음지로 몬 것들, 말하면 안 된다고 딱지 붙인 모든 것들에 반기를 들고 질문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입에 붙여진 청 테이프를 뗀 사람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용감하고 그만큼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마주한 자이다. 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 아니다. 그러니까 김기덕인 것이다.

 

 

 

 

2. 김기덕은 남자로서 여자를 어떻게 욕망하는가

 

 

    사랑, 사랑은 애증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김기덕을 어떻게 내가 사랑만 할 수 있을까? 김기덕이 남성으로서 갖는 욕망은 남성의 사랑의 대상인 여성으로서 필연적이게도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김기덕 감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돌을 던질 때 나는 그 돌들을 유심히 보았다. 분명 날카로운 지적들이 몇 있다. 공감하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 다른 사람들, 특히 페미니스트들이 하는 지적은 그대로 옳지 않은 경우가 있다. 어쨌든 내가 보기에 김기덕은 여성을 소비의 대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는 여성을 파괴하고 싶어 하지도 않고 여성을 괴롭히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는 연인의 마음을 시험하는 사람처럼 구는 것에 가까울 뿐이다. 내가 어쩌면 관대한 평을 내리는 지도 모른다. 이것은 인정하고 넘어가는 부분이다. 원래 사람은 자신이 애정을 갖는 대상에게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기가 힘든 것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 과한 애정도, 과한 미움도 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다만 그래도 내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김기덕 감독의 작품에 나오는 남성들은 (우리 그냥 여기서 앞으로 김기덕 감독 작품 안에서의 성별 이야기를 할 때는 모두가 이성애자들임을 상정하자, 뫼비우스에서 성적 소수자들이 나오는 경우는 없다고 본다) 섹스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엄청나게 좌절하는 보통의 우리 주변 남성들이다. 남성들이 거세당하는 것에 얼마나 큰 공포심을 갖고 있는지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그들에게 섹스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기본적으로 섹스는 인류 모두에게 중요한 행위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나는 여성들보다는 남성들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남성이 느낄 수 있는 쾌락에 끊임없이 집중하는 남성 인물들이 차고 흐른다. 여성이 없는 상황에서 다른 남성을 안음으로써 쾌락을 얻으려는 감옥 인물, 끝없이 검색하면서 계속 정보를 얻어 아들을 쾌락 없는 세상에서 구제해주려는 아버지, 돌로 상처내서 쾌락을 느끼는 거 보면 마음이 짠해져서 잔인하다는 생각보다는 실소가 먼저 터져 나온다.

 

    그런데 섹스에는 대상이 필요하다. 여성은 남성에게 있어 그러한 의미로 대상이다. 남성이 주체로 상정되는 순간 여성은 객체이다. 여성은 남성과 분명 생물학적으로 다른 구조이다. 슈퍼마켓의 젊은 아가씨를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묘하다. 그녀의 옷은 하얀 가슴과 살결, 매끈한 다리를 부각시킨다. 카메라는 회피하지 않는다. 어머니와 젊은 아가씨 역할을 한 배우 이은우의 다리 사이로 보이는 하얀 팬티는 여과 없이 드러난다. 김기덕이 보는 여성은 현대 남성들의 시선에 존재하는 보통의 여성상이다. 그녀들은 모델이 아니고, 그냥 평범한 주변의 여성인데 문제는 일상의 순간에서 그들이 자신의 여성성을 계속 섹스어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섹스어필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녀들이 스스로 노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시선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시선의 대상에 존재하는 여성은 남성들에게 미지의 존재이며 파악되지 않는 신기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성적인 측면으로 그러하다. 왜냐하면 여성과 남성이 다른 이유는 신체적인 측면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도출되기 때문이다. 그녀가 갖고 있을 인격이라는 측면은 그렇기에 뒷자리로 밀려난다. 여성이 남성에게 줄 수 있는 신체적인 쾌락이야말로 남성들이 강렬하고 짧은 시선으로 포착하고자 하는 무엇이다. 그러한 지점에서 여성은 남성에게 있어 무조건적인 구원인데 문제는 시선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뫼비우스에 나오는 여성들 역시 시선의 대상, 욕망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그녀들 본인은 상황 속에서 욕망의 주체로 그려진다기보다는 상대방 남성이 갖고 있는 욕망에 반응하는 유기물들로 그려진다. 남성의 바람이라는 욕망에 복수로 반응하고, 아들의 성욕에 해소로서 반응하는 것, 자신을 보고 흥분하지 않는 남성에 대해 좌절하고 자신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남자에게 성욕 해소를 제공하는 것이 그러하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성욕은 우리와 다르게 존재하는 것 같다. 우리가 만약 대상을 존중하지 못하고 영원한 객체로 만드는 것이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성욕이라는 측면에서 그렇게 대상을 객체로 남겨두는 것을 폭력이 아닐까? 우리는 이에 대해 우리의 머리가 성욕을 조절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다. 이는 당연히 맞는 말이다. 정당한 주장이며 합리적인 대안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비록 행동으로 옮기지 않을 지언즉 적어도 머릿속에 떠도는 순간의 욕망마저 차단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들이 어머니와 하는 상상을 몽정으로 꾼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욕망에서 그렇게 쉽게 탈출할 수는 없다. 만약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은 무지막지하게 강력한 강박에서부터 출발할 것이다. 욕망을 가진다는 것, 그것에서부터 우리는 이미 죄인이다. 우리의 죄를 스스로가 알고 있다. 만약 신자라면 하나님도 알고 있는 것이다. 직접 행동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죄책감이 생긴다. 뫼비우스에서 아들과 어머니가 유사성행위를 한 이후 오열하는 장면에서 나는 결코 놀라지 않았다. 욕망을 풀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 이는 동물로서 당연하다. 해소되지 않은 욕구불만 상태를 영원히 유지하고자 하는 인간은 없을 것이다.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다면 뫼비우스의 아버지가 선택한 자살도 어떻게 보면 꽤 괜찮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말을 자살 권장의 문장으로 읽는다면 안 됩니다, 정말) 우리의 욕망은 무조건 추잡하다. 우리는 우리의 상상 속에 허락도 받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대상화 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욕망들 속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가장 먼저로 두기 마련이다. 그 어처구니없는 이기심과 유치함은 추잡하다. 아버지가 권태와 욕망에서 도망치지 못해 젊은 여자와 바람피운 것을 보자. 우리는 자제하지 못하는 욕망들 속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는 어리석은 중생들이다. 남성의 여성에 대한 갈구는 그들의 육체적 쾌락에 대한 갈증과 같다.

 

    하지만 이를 어쩌나, 욕망은 사랑이 아니다. 즉 세련되고 문명화된 인간의 입장에서 정제되고 아름답진 않은 것이다. 남성들 중 잔인한 자들은 욕망에 대해 원시인과 같아서 여자를 마치 음식 먹듯 돌려 먹는 걸 즐겁게 행한다. 그들은 더 나아가 자신들의 부하 남성에게 강간의식에 참여할 것을 강요한다. 뫼비우스에서 그러한 짓을 행한 욕망의 “주체”는 결국 거세라는 징벌을 당한다.

 

    거세는 이 영화를 관통하는 분명한 주제의식이다. 예로부터 성기를 잘라버린다는 것은 인간 구실을 못하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성기는 인간의 욕망을 상징한다. 특히 성욕이 여성보다 많다고 알려진 남성의 성기를 떼버리는 것은 욕망에 대한 징벌인 것이다. 감히 더러운 생각을 품었다는 것에 대한 강박적 복수이다. 바람피운 남편의 성기를 거세하는 것에 실패한 아내는 자위 멀쩡히 하며 남자 구실 제대로 잘 하는 아들의 성기를 잘라버린다. 아들은 아버지와 남자들의 대리로서 배신당한 여성인 어머니에게 의해 벌을 받았다. 그는 그 벌로 인해 카인처럼 경멸당한다. 다른 남성들은 거세당한 아들을 비웃지만, 그들 역시 성기가 다리 사이로 달려 있다는 점 때문에 똑같이 거세라는 징벌의 대상자들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결국 끔찍한 윤간을 이끈 욕망의 주체는 거세로서 응징을 당하게 되는데, 그 강간범이나 아들이나 재미있는 점은 거세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쾌락에 집착한다는 점이다. 즉 남성들의 욕망은 사실 바로 “성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게 반전 요소이자 아이러니하고 동시에 희극적이며 해학적인 지점이다. 이것이야말로 김기덕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뫼비우스의 띠이다. 애초에 성기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는 그저 형식과 관습의 차원인 것이다. 종족 번식의 훌륭한 예시로서 존재하는 것이랄까? 남성의 성기에서 나온 정자가 여성의 질을 통해 난자와 만나 착상하는 것 말이다.

 

    그러나 성기를 잘려서 이제 여자가 필요 없을 것 같은 인간들이 여전히 여성을 간절히 필요로 한다. 이들은 여자라는 대상이 없으면 당최 온전한 즐거움을 못 느끼는 인간들이다. 왜 그러한 것일까? 이성애자 남성들은 도대체 왜 성기가 없어서 상처를 마찰시켜서 얻는 자위질에도 만질 여성의 가슴과 만지지 못하면 적어도 보기라도 해야 할 여성의 몸이 필요한 것일까?

 

     이는 말한 것처럼 김기덕 감독이 쓴 작의와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인간의 자아는 자기만의 세계에 철저히 갇혀 있다. 우리는 외부자극이 없으면 우리 자신의 존재 여부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여성이 필요한 이유는 남성이 자신의 자아를 남성으로서 여기고 느끼기 위해 필요하다는 뜻이다. 여성은 이성애자 남성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가슴과 질을 갖고 있다. 남성들은 그 안으로 자신의 성기를 삽입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욕망에 대한 성취를 이룬다. 그렇기에 여성의 존재 자체가 남성에게는 구원을 상징한다. 여성을 통해 남성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과 다름없다.

 

     자신이 강간해서 거세라는 징벌까지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징벌을 내린 자이자 피해자인 여성에게 찾아가 쾌락을 달라고 애원하듯 매달리는 남성의 모습은 김기덕 감독이 이때껏 구축해온 연약한 짐승이라는 남성의 이미지와 적확하게 부합한다. 김기덕의 카메라에서 여성들은 그러한 연약한 짐승들을 내치지 못한다. 김기덕 감독의 생각 안에서 여성의 존재 이유는 마찬가지로 여성들 역시 자신의 자아가 존재함을 느끼며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질과 가슴을 필요로 할 외부자극의 존재일 지도 모른다. 즉, 여성은 자신이 구원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을 욕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부분까지 김기덕 감독에게 공감하지는 못한다. 여기서부터 김기덕 감독과 나의 갈림길이 시작된다. 김기덕 감독은 여성을 남성의 관점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사실 갈림길은 당연한 것이며 나는 이를 비난할 생각도 없다. 왜냐하면 김기덕 감독이 남성이라는 점을 내가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남성의 시선으로서 자신의 의견을 말할 자유가 있고, 이 정도의 표현력과 예술적 능력이라면 언제나 환영일 뿐이다. 실생활에서도 남성과 여성으로서 만나 그 정도의 다름이라는 간격 없이 좁혀질 정도라면 애초에 성적으로 다르다는 긴장감도 발생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3. 끝

 

 

     어머니는 아들을 거세한 다음 길에서 본 중을 쫓아 떠났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누워서 코를 골아대는 그녀, 결국 그녀가 욕망을 절제하는 길을 동경하였지만 결국 현실로 만드는 것에는 실패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마 욕망 없는 사람으로 사는 것은 엄청나게 피곤한 일이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녀처럼 우리가 속세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욕망을 버리고 사는 것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김기덕이 제시한 결말은 언제나 그러했듯 아름다웠다. 자신의 집에서 내놓아진 부처의 얼굴을 플래시로 비춘 아들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보라. 중처럼 욕망을 버리고 내면을 비워내는 삶. 뫼비우스 띠에서 탈출하는 것은 욕망의 끈을 냉정하게 끊어버리는 길이거나 혹은 권총으로 스스로의 머리를 저격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자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아들의 미소는 편안해 보였다. 그러나 인간이 정말 그렇게 쉽게 초연해질 수 있을까? 인간은 욕망을 동력으로 삼고 선로 위를 항해한다. 가끔 욕망으로부터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게 인간이기도 하지만, 부처의 자비로운 마음씨를 상징하는 그 인자한 미소 아래에 시퍼런 칼이 숨겨져 있는 게 인간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아들의 성기를 자른 그토록 위험한 물건을 집 밖으로 버리지 않았다. 욕망에 대한 교만함, 욕망을 언제든 끝낼 수 있다는, 그 구렁텅이에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어 따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애초에 그렇게 쉽게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는 것이 운명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 욕망에서 태어나 욕망 속에서 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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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종사
왕가위 감독, 송혜교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비가 함빡 온다.

  

 

  왕가위는 정경을 그려낸다사람들은 빗속에 있다거친 발차기와 함께 엽문은 말한다세상에는 수평과 수직이 있다수평은 무너진 것수직은 꼿꼿이 서있는 것그는 자신의 몸을 단 한 번도 눕히지 않는다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허리를 세우고 직립한 그의 모습은 곧 승리요생존이다.

 

 

  엽문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사람이다그는 자신의 가족들에게 다정하다그와 아내의 사이 역시 좋다그 둘은 공익 광고처럼 건전하다그들의 삶은 사생활의 영역에 속해 있다엽문은 큰 어려움 없이 가족을 부양하며 아내와 오손도손 자식들도 낳고자신의 무예도 갈고 닦는다그렇게 그는 '자신'의 삶에서 아무런 부족함을 알 수 없다그가 설치한 무술 연습용 나무봉은 굳건하고 안정된 그의 사생활을 상징한다그의 짝인 장영성은 자신에게 굴레 씌워진 사대부 여인의 규칙을 엄격하게 지키지 않는다엽문 역시 금루로 출입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지 않는다그들 둘은 사회와 세상의 시선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그들은 자신들만의 사생활 속에서 안전했고행복했다외부와 딱히 연결되지 않는 삶을 산 것이다부모가 물려준 금전으로만 살아도 풍족한 삶이니 딱히 말도 안 된다 짐작할 순 없다하지만 궁가의 등장으로 그들의 일상에는 새로운 사건이 발생한다엽문은 일생일대의 도전을 받게 된다이 시점이 바로 그가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는 최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궁대인은 북방에서 온 사람이다그는 자신의 무예와 남방의 무예를 합치는 것에 관심이 많다그의 관심사는 개인적 측면에 국한되지 않는다그가 바라는 것은 진시황이 바란 천하통일과 같다하지만 궁대인은 분서갱유를 지시한 오만한 독재자는 아니다그보다는 오히려 대의와 중생을 바라보고자 한 인물이다그에게 무예란 것은 알려야 하는 소중한 것이며전통과 다름없다그는 중국적 가치를 일구어 내기 위해 분주하게 노력하는 자이다사회와 인간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이다그가 만들어 내고지켜내고자 하는 것은 궁 대인의 삶을 대변하며 동시에 철저히 궁가의 것이다그가 자신의 딸에게 설욕전을 하지 말 것을 주문하는 일은 그의 생각에 당연하다무예는 인간 개인 한 명의 좁은 차원이 아닌 더 넓은 차원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일대종사에서 무예란 무엇을 상징하는가이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영화 속 시간이라는 가로의 축 뿐만 아니라 세로의 축으로도 일대종사를 봐야 한다세로의 축이라 함은 왕가위 감독이 제시하는 철학이며 중국의 역사적 맥락을 동시에 의미한다왕가위 감독은 여러 곳에서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 속 엽문을 이야기한다중국의 위기 속에서 무예인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무예라는 것은 중국민족에게 전통이며 문화 중 하나이다괜히 그들의 삶에서 무협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이 아니다무술이란 개인 하나가 소유한 것이 아닌 집단의식에 가깝다공공재다그것은 스승이라는 부모로부터 자식에게 전달된다자식은 새로운 부모가 되어 자식인 제자에게 무예를 전달한다자신과 자연을 뛰어넘어 인간을 바라봐야 가능한 일이다그러한 교육의 형태는 민족적 정체성을 위협받는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삶의 방식이요저항하는 길이다.

 

 

  북방에서 온 자들이 엽문을 비롯한 남방계 사람들까지 자극시키는 이유는 그러한 사고방식으로는 당연한 일이다대의 앞에서 자신의 집단을 대표하지 않는 것은 진정한 능력자의 자질이 아니다그것은 비겁한 일이며 불효자나 할 짓이다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집단을 대표하는 일은 매우 피곤한 일이다병아리는 자신의 둥지 안에서 극치의 편안함만을 느낀다그 이유는 간단하다더 큰 책임감에서 개체가 자유롭기 때문이다엽문의 능력은 개인이 가진 것이 아니라 그를 낳은 스승과 문파에게 있는 것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능력에 책임감을 느낀다하지만 그는 아내의 허락을 받지 않는 한 움직일 수 없다그의 마음이 아내에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그의 가장 내밀한 공간은 장영성에게 내어준 방이나 마찬가지다결국 아내의 허락을 받고서야 엽문은 움직인다그 순간이 바로 병아리가 둥지 밖으로 발을 내딛은 때이다.

 

 

  거울로 자신만을 보는 사람은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그러나 타인을 보는 사람은 자신과 타인을 분리해서 보지 못한다새가 둥지를 벗어나며 보는 것은 무엇인가하얀 설원과 푸른 산과 파란 바다와 붉은 꽃이다세상은 아름답다단조롭고 평화로우며촛불과 집으로 둘러싸인 사적 공간을 벗어나 밝고 넓은 공적 공간천지대자연이 펼쳐진다엽문은 자연과 인생의 섭리를 체험하게 된다그는 자신의 이웃들한테서 많은 것을 배운다영특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기에 척척 알아듣는다엽문은 이러한 사람도 있고 저러한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그렇게 그는 동포들을 대표하기 위해 자신의 머리에 돌을 하나씩 짊어진다그 돌을 세 개 짊어진 다음엽문은 그 시대의 대인을 만난다궁대인은 적이요 스승이요 동시에 아버지이다먹어 삼켜야 할 우라노스이다자분히 밟고 지나가야 할 철쭉꽃이며 상대 역시 그것을 노린다궁대인은 더 넓은 곳을 본다자신이 끝나야자신의 유전자가 이어질 것을 아는 자이다그는 이타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이기적인 유전자가 무엇인지 역설하는 존재이다.

 

 

  궁대인은 사람들 앞에서 의식을 치른다자신의 새 아들에게 궁대인은 묻는다남과 북을 결합하고자 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엽문은 남과 북이 다른 것을 억지로 합치면 탈이 나며 다른 것은 다른 것대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답한다전병이 궁대인에게 단순히 무림이라면 자신에게는 세상이라는 엽문의 말까지 고려해서 본다면궁대인이 스스로의 패배를 인정함은 당연함이다궁대인은 무예만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지만엽문은 무예를 뛰어넘은 세상 만상의 중생을 바라보며 답했기 때문이다그 답을 지닌 엽문을궁대인은 축복으로 기원한다.

 

 

  다만 혈기왕성한 장쯔이의 궁이가 순간만큼이라도 양보할 수는 없다며 엽문에게 결투를 신청한다그렇게 한 데에는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은 젊은 후계자에 대한 궁금함이 더 컸을 것이다그러나 기본적으로 궁이는 스스로 인정한 것처럼 자신을 보고하늘과 땅을 봤지만 중생을 보지는 못했다그녀에게는 여성이라는 한계가 있었고본인의 기질적 성품이라는 담이 있었다가끔 세상 사람들 중에는 이상하게 어느 지점 위를 보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궁이는 자신의 사적인 감정과 궁가라는 사적 집단의 자존심만을 갖고 사는 사람이다그녀에게 그 이상은 존재하지 않으며 있다 해도 중요하지도 않고자신과는 상관도 없다하지만 궁이라는 인물에 대한 감독의 애정은 지고지순하다북방에서 온 궁이가 화려한 금루의 여자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마치 감독 자택의 거실에 조심스레 걸어놓은 한 폭의 서양화를 보는 것 같다중생을 보는 일대종사가 되지 못한 인물우리네 수많은 지고 피는 꽃들 중의 하나가 바로 궁이다궁이는 일대종사의 또 다른 주인공이자 평범한 인물들인 우리네의 자화상이다.

 

 

  궁이는 엽문이라는 새에게 둥지 바깥에서 보게 된 아름다운 꽃 한 떨기이다그가 궁이를 거절할 것은 운명이다당연한 귀결이다궁이의 감정은 그들이 겨루는 무예 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보는 자의 시선에서 그들이 겨루는 무예는 화려한 동작이지만당사자들에게는 순간이 영원처럼 흐르고그들의 몸과 몸 사이로는 생각이 주고받아진다신체의 만남은 쉽게 넘어갈 것이 아니다그것은 신경들끼리의 만남이다옷깃만 스쳐도 인연인 것처럼 잠시의 스침이라도 그 영겁을 느낄 수 있는 법이다이처럼궁이가 상징하는 것은 한 발 한 발 내딛기 시작한 엽문에게 있어 극복해야 할 높은 무예의 산 중 하나였다궁이와의 경합에서 그가 낸 규칙대로 하여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그는 고산 중 하나로 궁이와 같은 자들을 점찍었을 것이다무술의 세계로 나아간 엽문을 보며 장영성은 눈물짓는다그에게 다른 세계가 열린 것이다사진 속 거리는 그것을 보인다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사람의 변화를 견뎌내야 하는 순간이 있는 법이다.

 

 

  그렇게 엽문이 차차 발을 내딛던 중일제가 엽문의 도시로 들어온다.

 

 

  높은 자존심고고한 사생활의 평화는 깨진다아무리 안온한 둥지라도 거센 폭풍우에는 떠내려가는 법이다그것 역시 사회와 세상으로 나간 엽문이 배운 또 다른 천지의 이치이다대가 하나가 국을 저으며 때를 잘 알아야 한다고 말한 것과 상통한다개인은 바위로 내던져지는 달걀이나 다름없다엽문은 자신의 보잘것없는 가족의 삶이 깨지는 것을 막아보려 하지만새끼 새들이 뱀에게 먹히는 것을 어미 새가 막을 수 있느냐의 여부는 하늘에 달려 있다엽문이 아무리 잘난 자라 하여도 그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다혼돈 속에서 묵묵히 엽문은 자신의 무술 연습용 나무봉을 해체한다개인의 삶은 사회의 거친 혼란에서 온전한 형태를 유지할 수 없다사회의 혼란을 벗어나 편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은 자존심과 자부심을 파는 것이다자부심과 자존심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무예이다중국인의 전통이요윗대로부터 내려온 공통의 무엇이다궁대인에게 궁가 64수의 힘을 물려받은 마삼은 그 길을 택했다아름다움을 물려받지 못한 그의 선택은 바로 변절이었다.

 

 

  마삼은 스승을 죽였다그는 스승이 남긴 초식의 비기를 듣고서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마삼은 피가 끓는 열혈 청년이었다그는 자신의 핏 속에 담긴 혈기왕성함을 주체하지 못하는 힘 그 자체였다그에게 있어 세상이라 함은 그 본연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세상의 이치까지 파고들만한 자는 아니었다그가 거침없이 다른 사람들을 내리꽂는 것을 보라천지만물이 그에게는 자신의 힘을 증명할 수 있는 시험지에 불과했다그런 그에게 궁대인이 끊임없이 자제할 것을 요구한 것은 당연한 가르침이다왜냐하면 세상이란 한낱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그러나 천둥벌거숭이에게 기다리라 한들 자제할 수 있다면 동물이 아니리라짐승을 길들이려 하였지만짐승은 곧 아가리를 벌려 아버지를 물어죽이고 표표히 떠나버린다그러나 짐승 마삼은 궁이에게 패배하는 순간 초식의 비기를 이해하게 된다돌아보는 것그것을 진부하고 늙은 자의 굼뜸이라고만 해석했던 그였다그러나 순간 뒤를 바라보는 것은 굼뜸이 아니라 더 높고 멀리 날기 위한 제 1조건이다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자신에서 시선이 떠나 다른 곳을 보는 것이다그는 수직이 아니라 수평이 되면서 오히려 수직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그에게서는 아예 궁가의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궁이의 말대로 그것은 궁이가 되찾은 것이다마삼은 궁가의 것을 공유해 본 적이 없었다애초에 그에게는 자부심이란 없었다.

 

 

  그러나 궁이를 말린 노인들의 지적처럼궁이는 초라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천지와 중생을 보라고 가르쳤건만 그녀가 선택한 길은 사형과 사제끼리의 혈투였다궁가 64수의 아름다움과 힘이 서로를 헤친 것이다두 개로 나누어 무술을 보존하고자 했건만 하나의 욕심이 탑을 무너뜨렸다하지만 궁이는 말한다궁가 64수가 없어진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없어지는 법이다니힐리즘에 빠진 궁이는 아편을 마셨고 결국 자신의 몸을 파괴한다아름다움만 있고힘은 없는 그녀는 세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그녀는 결혼을 하여 자식도 낳지 못했고자신의 무술을 후세에 남기지도 못했다그러나 왕가위는 가련한 그녀를 비천하게 여기지 않는다배우 장쯔이에게 고고한 자존심과 기품을 선사하여궁이가 내린 선택을 마지막까지 조명한다그녀의 선택을 지지하는 아버지는 촛불을 하나 켜놓고 딸을 기다린다왕가위 감독은 우리 인간이 그렇게 간단히 감히 개인을 버리고 중생을 바라보는 삶을 선택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궁이가 복수를 한 것은 그녀가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필시 그저 그것이 그녀다운 길이었기 때문이다궁이를 보는 것은 그러므로 엽문을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엽문이 내린 선택과 정반대의 선택을 한 궁이그녀를 보는 것은 중국 최대의 위기 속에서 한 세상을 살아간 한 여인의 삶에 빛을 비추는 것이다그녀는 남자로 태어날 수도 없었고일가를 이룰 수 없었다자신의 몸과 일가에 갇힌 운명이었던 것이다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쓴 바대로 평범한 인간의 길이다.

 

 

  무술에서 궁이는 수직이었지만삶에서는 수평이었다그렇다면 수직으로 꼿꼿이 살아가고 있는 엽문은 위기 이후 무엇을 하였는가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자신의 핏 속에 남겨진 무술로 재기하는 것뿐이었다그는 자신의 무술로 제자들을 일궈낸다다시 생명의 바람이 분다교육그것은 무엇인가교육을 다른 말로 정의내릴 수 있다면 번식일 것이다자신의 사상을 가진 자식들을 양육하는 것이다그 안에 핏줄이 다르고자 한다 하여도 그들은 같은 정신과 자부심을 소유한다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그의 스승에서 나온 이야기이며그의 스승이 말하는 바는 스승을 가르친 스승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엽문은 그러한 중국의 전통에서 자라고 난 사람이다그는 중생을 외면하고 자신만의 삶에 천착하는 길로 치우치지 않았다영화 속 작은 비중으로 나온 것으로 보이는 일선천은 엽문과 다른 방향의 길을 걸은 것처럼 보이지만사실 엽문과 큰 차이는 없다일선천은 평범한 비극의 삶을 상징하는 한 여인에게서 도움을 받고 살아난 독립투사요자신만의 일파를 이루기 위해 피를 튀기며 조직에서 나온 인물이다그들은 자신의 뜻에 감화된 자들과 사진을 찍는다그들은 어린 자들에게서 희망을 보며다음 세대를 기약한다사생활이 부서진 엽문이 자신의 고향인 불산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아마 아내를 잃은 그로서 지켜야 할 다른 가족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그가 지켜야 할 가족은 요즘의 기업들이 제시하는 것처럼 가식적인 관계가 아니라같은 삶의 방향을 지향하는 동료들과 자식을 의미한다그들은 자신을 믿고 따르며엽문은 그들 중생의 손을 잡고 이끌어가는 존재이다.

 

 

  『일대종사이 영화는 동양적중국적인 의식으로 보지 않으면 힘든 영화이다왕가위 감독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분명히 자신만의 서양적 미학으로 그림들을 그려낸다곳곳에서 볼 수 있는 서양화적 시각과 색감들이 그러하다그러나 서구 문명의 상징인 기차가 압도적인 속도로 지나치는 그 바로 위태로운 옆에서 두 명의 중국 무술가들이 자신의 가치를 위해 싸운다왕가위는 우리의 현실을 포착한다바로 동양과 서양이 만난 역사의 최근이다하지만 만약 우리가 이 작품에서 서양적 아름다움에만 집착한다면우리는 궁이와 마삼의 장면을 보지 않고 기차가 지나가는 장면만을 본 것과 같다.

 

 

  왕가위를 읽기 위해서는 그가 홍콩인이라는 맥락을 읽어야 한다그는 촌스럽게 이 영화에 중국이 어떻고상황이 어떻고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고를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다그는 돌려서 말한다영상으로무술로물로장쯔이로양조위로 그려낸다하지만 그는 중국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홍콩인으로서중국의 위기에 봉착했던 그 시기 중국인이라면 무엇을 해야 했던 것인가를 엽문으로서 답하고 있다.

 

 

  다시 한 번 무술이 중국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한다무술은 단순히 경합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신체의 수양이었다또한 오랜 전통으로서 지방색 역시 갖고 있다무술은 몸에 대한 이해요하나의 종파를 묶는 같은 움직임이다하나의 공통 기호이다그들은 그 기호를 근육과 움직임에 새기며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

 

 

  자신의 정체성이 위협을 받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인간은 이 세상에 나서 개인으로 살아가는가아니면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가보았듯이동양의 정서는 거친 자연과 무한한 사람들 안에서 하나로 살아가는 것이지 자기 자신만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우리는 연결되어 살아간다잘난 개인이 자기 자신만의 둥지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숲 속에 만약 나무 한 그루가 쓰러졌는데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그 나무는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우리의 정서로 본다면 그 나무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한 인간이 부모로부터 태어나 자기 자신만의 삶에서 살지 않고다른 의미의 가족을 일구고더 큰 사회의 어버이가 되는 것번식과 번식으로 공동체를 유지하고 만들고 다음 세대로 나아가는 것그것이야말로 바로 왕가위 감독이 의미하는 일대종사’ The Grandmaster의 참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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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Hiroshima Mon Amour (히로시마 내 사랑) (1960)(지역코드1)(한글무자막)(DVD)
Criterion / 2003년 6월
평점 :
품절




  영화는 벌거벗은 두 사람이 서로를 애타게 끌어안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장면이 주인공들의 섹스라는 에로틱한 현재인지, 혹은 낙진을 잔뜩 묻은 채 죽어가는 히로시마 원폭 사태라는 과거의 두 사람인지 식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살뜰히 애무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을 간간히 삽입하며, 영화는 관객에게 히로시마 원폭 사태에 대한 이미지들을 제공한다. 여자주인공은 내레이션을 통해 자신이 히로시마 원폭 사태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했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남자주인공은 여자에게 당신이 본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그녀의 말을 부정한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국적이 다르다그들은 처음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지만 옛날부터 연인인 사람들 같다그들은 먼저 육체의 결합을 통해 가까워졌다서로 애정을 느끼는 만큼 그들은 서로의 영혼에 가까워지려고 한다그들은 서로의 과거를 탐색한다여자가 히로시마에 대한 자신의 기억을 공유하려고 했던 것은 그러한 시도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그러나 남자는 그러한 인위적인 이어짐여자가 시도하려 하는 공통된 과거를 거부한다그들이 그 대화에서 소통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히로시마 원폭이 각자에게 있어 동일한 기억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곧 다른 과거를 탐색하기 시작한다. 여자는 남자의 요구에 맞추어 자신이 기억하는 것들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그녀가 과거를 이야기할 때, 일본 남자를 ‘당신’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를 느베르에서 만난 첫사랑이자 죽은 독일인 병사처럼 대한다는 것이다. 술집에서의 이 대화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녀에게 죽은 군인이 아직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첫사랑이 죽었던 고통스러운 기억은 그녀의 눈에 가끔씩 다른 사람의 이미지 위로 생생히 겹쳐 보인다. 독일병사는 기억이미지로서 현재이자 동시에 과거이다. 그녀가 첫사랑을 서서히 잊어가지만 그래도 잊지 못하는 것은 변하지 않을 사랑의 맹세이며, 동시에 죽은 그를 언제나 마주할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이다.

 

  그녀의 과거를 들은 남자는 자신만이 여자의 기억을 온전히 안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왜냐하면 이때껏 그녀가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았던 사랑의 기억을 알게 된 순간, 자신이 그녀에게 있어 그 독일병사라는 과거와 동일한 위치임을 자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자신이 그녀의 영원한 첫사랑인 독일인의 현재형임을 알게 된 것이다. 남자는 그러한 사랑의 원리에 익숙하며 그것을 질투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그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듯하다.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은 시간 이미지를 사랑이라는 소재와 연결시켜 보여주는 명작이다. 과거는 현재의 잠재적인, 또 다른 얼굴이다. 여자에게 있어 자신의 사랑과 죽음으로 이별하게 되었던 그 순간에 그녀가 독일 병사에 대해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그와의 기억뿐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나누어 가진 기억 속에서 죽은 연인은 현존으로써 불멸이 되었고, 과거이면서 현재인 이미지가 되었다. 그 이미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그 때가 와야 독일병사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끝날 것이다. 또한 새로운 사랑에 있어서도 그들은 더 이상 일치하지 않는 과거를 공유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서로를 히로시마와 느베르로 기억하는 것이다. 그들이 결국 이 사랑을 통해 가질 수 있는 것은 서로에 대한 기억뿐이다. 여자가 독일병사를 느베르로 기억하는 것처럼 이 둘은 서로를 히로시마와 느베르로 기억함으로써 언제나 각자의 추억 속에서 그 기억을 잃지 않는 한 불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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