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알라딘신간평가단님의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 서평단 알림"

1. 이름 - 정상호 2. 주소 -우편번호210-799 강원도 강릉시 학동 사서함 334-15호 헌병대대 경비4소대 소대장 소위 정상호 3. 연락처 -033-649-3244 010-9883-0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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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에 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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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노무사 노동법 Ⅰ.Ⅱ 기출문제 & 모의고사- 2010 시험대비
조흥연 엮음 / 시대고시기획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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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30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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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사회보험법- 공인노무사 시험대비
고준기 외 지음 / 고시계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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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18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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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노무사 핵심정리 민법- 2009
강양원 엮음 / 법학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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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8월 03일에 저장

스파르타 영어 7.9급 최종모의고사- 7.9급 공무원/법원.검철직 수험서
신홍섭 지음 / (주)스카이잉글리시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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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7월 21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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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란 무엇일까? 정치학에 기초를 막 배우기 시작한 사람들은 이런 질문에 대해 망설임 없이 답할 것이다.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고 말이다. 물론 나는 이런 이스턴의 정의에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정치에 대한 정의를 내가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은 정치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은 "적대"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적대"는 사회적 관계의 모순 속에서 다양한 차원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적대에서 내가 속한 사회적 존재 또는 집단의 이익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 그것이 정치라고 생각한다. 

 갑자기 정치에 대한 나의 생각을 이렇게 논한 이유는 진보와 보수가 추구하는 정치이념이나 가치는 다르지만 행위로서의 정치는 서로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진보와 보수는 현 사회의 가장 근본 모순이라 할 수 있는 자본주의라는 사회경제체제에 대한 입장에 의해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모순 이외에 다른 사회 모순에 대한 입장에 따라 진보와 보수도 그 내부에서 다양한 세력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민주노동당은 바로 진보세력을 대표하는 정치세력이었다. 물론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런 진보세력 내부에는 근본 모순에 대한 입장은 비슷하지만 그 외의 다른 사회모순 특히 분단모순에 있어서 그 입장의 차이가 다양하게 존재 했었고, 분단모순에 대해서 강력한 입장을 고수하던 자주파가 진보세력의 다수를 점했던 것이 여태까지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번 평등파의 창당 시도가 자주파로부터 진보세력의 대표 자리를 찬탈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사회 운동의 역사를 간략하게나마 살펴 본 사람은 알겠지만 학생 운동을 중심으로 사회 운동이 점차 확산된 한국의 역사에서 자주파는 언제나 평등파에 비해 다수를 점했다. 80년대부터 한국 사회 운동이 표면화 되었다고 할 경우 약 30년의 세월 동안 평등파 소위 구PD세력은 사회 운동에서 소수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전위당 중심의 민중운동 또는 변혁운동이 중심이 되었던 지난 시기 동안 평등파는 진보세력을 대표하는 정치세력이 될 수 없었다.

 자주파가 다수였던 진보진영 내에서 평등파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크게 두 개였다. 자주파에게 운영권을 내준 채 함께 하든지 사회적 발언권은 적어지더라도 독립된 조직을 갖든지 말이다.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자주파와 평등파는 초기에는 함께 하다 자주파의 패권주의에 평등파가 새로운 조직을 꾸리는 형식이었다.

 이번 평등파의 신당창당도 그런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과거 한총련에서 탈퇴해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와 학생운동의 혁신을 위한 전국학생연대회의"를 건설했던 것처럼 이번의 신당창당도 그런 수순을 밟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때와 차이가 있다면 현재 진보진영이 처한 상황이 변했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소견이지만 평등파가 이 상황을 이용해 여태껏 차지하지 못한 진보진영의 대표세력이 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와 가장 크게 변한 상황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한국의 진보진영이 의회주의적 대중정치를 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과거의 진보진영이 가진 기본적인 생각은 전위당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변혁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전략 속에서는 한 마디로 활동가의 수가 가장 중요했다. 하지만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 의회 정당으로서 민주노동당이 곧 한국의 진보진영을 대표하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운동이 아닌 의회를 통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있다. 즉 과거에는 활동가의 수가 그 정치세력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현재의 상황에서는 '국민적 지지'라는 보이지 않는 실체가 바로 그 힘이 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조승수 전 진보정치연구소장이 권영길 후보가 들고 나왔던 "코리아 연방 공화국"에 대해서 이걸로는 선거운동을 할 수 없다고 했을 때 나 역시 그것에 동의했으며, 선거 패배에 있어 그런 잘못된 주장이 분명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거기에서 '종북주의' 논쟁이 튀어 나왔어야만 하는 필연적 이유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평등파가 의도적으로 민주노동당 내에서 강력한 힘을 차지하려는 정치적 공격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나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나의 생각을 계속 전개하자면 초기의 '종북주의' 논쟁이 민주노동당 내에서 평등파가 운영권을 지려는 시도로서 나온 논의였다면, 조선일보, 동아일보로 대표되는 수구언론들이 그것을 부각시키면서 자주파를 공격하면서 '종북주의'의 성격이 크게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즉 초기의 '종북주의'는 단순히 민주노동당 내에서 평등파가 운영권을 차지하기 위해 제기한 것이었다면 조중동에 의해 증폭되고 사회화 된 이후의 '종북주의'는 진보진영 내에서 자주파를 말살하고 평등파가 완전한 패권세력으로 등극하기 위한 것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조승수가 조선일보에 인터뷰를 한 것이 좋은 근거라고 생각하는데 마치 신라가 자력으로 고구려를 이길 수 없기에 당나라를 끌어들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처럼 민주노동당 내에서 평등파가 자주파에 수적으로 밀리니 기존의 빨갱이 담론에 기대어 조선일보와 함께 자주파를 공격한 것으로 생각된다.

 내가 좀 오바하는 건가? 어쨌든 난 그렇게 생각한다. 보수진영이야 그 지지율이 높기 때문에 여러 정당이 존재할 수 있겠지만 진보진영은 그야 말로 없는 지지율을 나눠 먹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번 총선에서 어떤 정당이 더 많은 지지율을 얻느냐에 따라 그 명운이 크게 갈릴 것이다. 의회주의가 중심이 되고 있는 현재의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활동가의 수가 아니라 바로 국민적 지지도다. 바로 그 점에서 평등파는 조중동과 연합해 분단체제라는 그리고 그에 기생하는 반공이데올로기의 힘을 얻어 이번 기회에 자주파를 '압살!' 하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게 내가 이번 평등파의 신당창당 운동에 대한 생각이다. 그렇다고 평등파의 이번 행동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손석춘이 말하는 것처럼 평등파의 신당창당운동이 민주노동당 죽이기가 아니라 진보의 외연을 넓히는 것이 된다면 그래서 진보의 영역이 넓어진다면 가장 이상적인 것이 될 수 있겠지만 그것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 수 있지 않은가?

 다가오는 총선이 한국 진보진영의 대표세력을 결정 짓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을 때, 지금의 상황으로는 평등파의 신당이 진보진영의 대표세력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비록 민주노동당이 지역위를 포함해 전국정당으로서 그 면모를 갖추고 있는 것에 반해 신당은 아직 그 실체조차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국 사회를 60여년 동안 지배해 온 반공 이데올로기는 그런 차이를 뛰어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 된다.

 물론 나는 평등파의 이런 행동의 진보정치가 추구해야 할 '대의'를 저버리는 많이 치사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주사위는 던져 졌고, 나는 평등파이다. 적극적이지는 않아도 나 역시 소극적이나마 그네들의 등에 비수를 꽂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주파 사람들에게는 미안할 따름이다.

 

- 참고로 나는 임시 당대회가 열린 2월 3일이 되기 전인 2월 1일 탈당했다. 그 이유는 심상정 비대위가 내놓은 안이 사실상 자주파로서는 수용할 수 없는 안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결국 평등파의 신당창당은 당연한 사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민주노동당 분열의 책임을 자주파에게 돌리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의 이런 개인적인 생각에 그리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이왕 이렇게 된 것 평등파의 신당이 좋은 성과를 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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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이야기 -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강의
이영훈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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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금했다. 뉴라이트라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현대사는 무엇인지. 하지만 겁이 났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 가진 그 두께에 말이다. 그래서 미루고 또 미루고 있었는데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의 편자인 이영훈 교수가 그와 관련된 책을 냈다는 이야기를 듣고 처음에는 책을 구입할까 생각하다 이 책을 읽어보고 괜찮다 싶으면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사려는 생각에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보았다. 그리고 다 읽은 뒤 사지 않고 대출해서 읽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나는 "말과 행동이 다른 책"이라고 평하고 싶다. 물론 이런 평에는 나의 사심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오직 사심만으로 그런 평을 내리지는 않았다. 이전에 뉴라이트 진영의 이론가 중 한 명인 박세일 교수의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을 읽었을 때는 그 내용에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더라도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잘 구성된 책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책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많은 사람들이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물론 역사라는 것이 갖는 의미는 매우 다양할 것이나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는 나에게 역사는 특히 "기억투쟁의 공간"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된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듯이 역사는 결코 객관적이지 않으며, 결국 현재의 누군가를 위해 재해석된다. 뉴라이트 진영에서 지속적으로 이승만과 박정희의 역사를 재해석하려는 시도는 바로 이런 의도에서 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과 대립하는 '역사'는 무엇이며 이들이 제시하려는 대안적 '역사'는 무엇일까? 이영훈은 "언제부턴가 글쓰기에 자기검열이 걸렸다. ... 검열자는 한국의 난폭한 민족주의이다."(p.5)라고 이야기 한다. 또한 "지난 50년간 민족주의 역사학이 20세기 한국사의 기본 줄기를 얼마나 심하게 왜곡해" 왔는지 밝히겠다며 "본성이 자유이고 분별력 있는 이기심인 인간 개체가 민족의 대안이라고 주장"(p.6)한다.

 그는 많은 장에 걸쳐 민족주의라는 것이 근대의 산물이며, 그런 민족주의에서 벗어나야만 보다 선진화된 국가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 장들을 읽으면서 꽤 놀랐다. 마치 내가 베네딕트 앤더슨과 같은 진보적 학자의 글을 읽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민족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PD 혹은 평등파 선배들과 공부를 했던 나이기에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가 민족의 대안으로 내세우는 '인간 개체'가 정확히 무엇이며, 그것을 통해 해방전후사를 어떻게 재해석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매우 관심이 갔고, 책을 넘기는 나의 손은 점점 빨라졌다. 하지만 나의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내가 무지한 탓인지 몰라도 그의 글 속에서 그가 민족의 대안으로서 그토록 강조했던 '인간 개체'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역사의 해석을 '인간 개체'를 통해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체제'를 중심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그는 책의 초반부에서 "사회주의는 인류의 사회-경제생활이 걸어온 정상적인 진화의 코스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을 계급적이며 공동체적인 존재로 규정한 사회주의자들의 인간 이해는 잘못이었습니다. 대조적으로 자본주의는 번영하였습니다. 20세기 전반만 해도 자본주의는 위기의 시대였습니다. 도무지 희망이 없어 보였지요. 그렇지만 20세기 후반 자본주의는 일찍이 누구도 상상하 적이 없는 거대한 성취를 이루었습니다."(p.15)라고 적었고, 바로 이 이분법에 의해서 해방전후사를 살펴보고 있다. 그가 비판하려던 민족주의 역사학이 남과 북이 통일되지 못한 채 분단국가가 되었다는 것에 중심을 맞춰 역사를 해석했다면 그는 남은 자본주의체제로 성공하였고,북은 사회주의체제로 실패하였기 때문에 남한의 역사가 우월하며 그것의 정통성을 찾기 위해 그것에 중심을 맞춰 역사를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책은 바로 이러한 결과론적 인식을 바탕에 두고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 시대의 정치는 한마디로 '나라세우기'(state building)의 정치였습니다. 그 정치는 국가체제가 안정된 위에 다수결의 원리에 따라 행해지는, 토론과 조정이 가능한 공공선택의 정치와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한 나라를 세우는 데 정치원리를 자유민주주의로 할 것인가 아니면 프롤레타리아독재로 할 것인가, 경제원리를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할 것인가 아니면 공산주의 계획경제로 할 것인가를 두고 주민의 투표에 부칠 수는 없는 법이 지요. '나라세우기'의 정치는 전쟁과 같습니다."(pp.234-235) 바로 이 대목이 이 책의 모든 내용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즉 해방 이후 우리에게는 공산주의냐 자본주의냐 선택의 기로가 있었고, 결국 자본주의가 승리했기 때문에 자본주의 국가로서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의 업적은 위대하다. 물론 책 여기저기에는 여러 이야기가 너저분하게 이야기되고 있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을 통해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이 말이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그가 제시한 여러 사료들은 분명 소중한 것들이라 생각되고, 그동안 내가 알지 못했던 많은 사료들을 접하게 해준 것에 대해 감사함을 느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는 그가 처음에 의도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민족주의 역사학을 비판하면서 '인간 개체'를 대안으로 내세운다고 이야기했으나 그가 이야기 한 것은 결국 그가 그토록 비판해 마지 않던 민족주의 역사학의 다른 모습이었을 뿐이다. 그는 "나를 국가주의자로 비판한 사람은 내가 우리의 건국사를 남달리 소중하게 평가하는 데서 그런 인상을 받았을지 모른다. 국가가 중요하다는 주장을 국가주의로 익는 사람이라면 국가주의 또는 자유주의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이다. 자유주의에서도 국가는 소중하다. 왜냐하면 거기서 국가는 자유의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이다."(p.8)라고 하였다. 물론 그가 말한 것처럼 자유주의자에게 국가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는 착각하고 있다. 자유주의자에게 국가가 소중한 이유는 국가 그 자체가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도구로서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글은 모든 내용이 결국 건국 당시의 정체를 옹호하기 위해 그것에 대한 비판의 비판으로서 존재하고 있으며 그에게 국가주의자라는 비판은 매우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제기되었던 문제 즉 민족이 아니라 '인간 개체'로서의 역사를 써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는 일견 동의한다. 물론 그가 말하는 '인간 개체'가 무엇인지 아직도 그의 글을 통해서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가 민족이 아닌 '인간 개체' 중심의 해방전후사를 쓸 수 있기를 바란다. 나 역시도 민족 중심의 역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의 작업에 지지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이대로는 아마 그의 작업은 평생가도 완성되기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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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남동 너구리 2008-02-23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말씀하시는 ‘인간 개체’중심의 역사는 미시사 연구를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어떤 민주주의인가 - 한국 민주주의를 보는 하나의 시각, 민주주의총서 06
최장집.박찬표.박상훈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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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희망의 언어였다면, 90년대에는 실험의 언어였으며 2000년대에는 절망의 언어가 되었다. 최장집 교수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개정판에서 “나는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본다.”(최장집, 2005)고 말한 것처럼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못하였고, 이는 정치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였다. 그렇다면 왜 희망의 언어였던 민주주의는 이처럼 불신 받게 되었는가? 저자들은 그 이유로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정당체계가 제대로 확립되지 못하였음을 이 책에서 지적하며, 올바른 민주주의의 상을 정당민주주의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정당민주주의를 거칠게 정의하자면 한 공동체를 국가-정치사회-시민사회로 분류하여, 시민사회의 의견이 정치사회로 대리, 대표되고 그것이 정치사회 내부에서 토론과 합의를 통하여 국가의 정책으로 시행되는 것이다. 정당은 정치사회의 가장 중심적 행위자로서 시민사회의 모든 정치적 균열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지배적인 정치적 균열을 반영하게 된다. 저자들은 이런 정당민주주의의 상에 대해서 설명하며, 이러한 정당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한 한국 민주주의가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제시하고 있다.

저자들이 제시하는 정당민주주의는 한국 민주주의를 분석함에 있어 매우 적합하다고 생각된다. 예컨대 97년 외환위기 이후 양극화와 고용불안이 시민사회의 지배적 균열구조가 되었고, 노무현 대통령은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는 말로 많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지배적 균열구조로서의 양극화와 고용불안은 정치사회에서 배제되었고, 결국 많은 국민들이 노무현 정권에 대해 실망감을 넘어 배신감을 느끼고 현 정권의 지지율은 곤두박질치게 되었다. 또한 양극화와 고용불안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시민들은 정치사회가 이러한 균열구조를 반영하지 않음으로서 자신들의 이익에 맞는 ‘전망적 투표’를 행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이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대답한 사람들 중 많은 사람이 대통령 후보 중 이명박 씨를 지지한다고 대답했다는 한 설문조사의 내용은 이런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정당체계가 시민사회의 정치적 균열구조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함으로써 정당체계는 안정화되지 못한 채, 이합집산이 반복되고 있으며 정책을 중심으로 하는 정당정치가 아닌 이미지를 중심으로 하는 인물정치 혹은 명사정치가 행해지고 있다. 이는 민주개혁세력에 차기 대선주자로서 유력하게 거론되었던 혹은 되고 있는 사람들이 정당에서 오랜 시간 정치적 경험을 쌓고, 능력을 검증받은 후보들이 아니라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나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사장과 같은 외부인사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이처럼 저자들이 제시하는 정당민주주의론은 분명 현 한국 민주주의가 처한 위기의 원인과 그 대안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매우 유의미하다고 생각되나 당위에 그친 것이 아닌가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나의 짧은 역사적 지식에 비추어 봤을 때 역사적으로 정당체계가 바뀌기 위해서는 대공황이나 전쟁과 같은 사회·경제적 조건의 혁명적 변화가 있거나 독일의 녹색당과 같이 대중운동에 의한 정당체계의 변화, 이렇게 두 가지의 경우가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당체계가 불안정한 한국의 민주주의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보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대중운동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데, 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물론 ‘운동정치’에 대해 비판적 입장에 계신 저자들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면 현재의 정당체계를 정상적인 정당체계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닌 다른 방법을 제시해줬어야만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를 약화시키고 있는 초국적 자본에 대한 언급이 부재한 점은 최장집 교수님의 열렬한 팬인 나로서는 매우 아쉽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물결 속에 근대국민국가의 경계 속의 민주주의체제는 그것에 의해 통제받지 않는 권력인 자본에 의해 그 기능이 후퇴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시민들은 그들의 권리를 침해받고 있다. 민주주의체제가 작금의 초국적 자본에 의한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폐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는 못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런 고민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매우 크다. 그러나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국 민주주의론의 대부인 최장집 교수님의 글은 현 한국의 상황에서 매우 의미 있으며 또한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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