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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민주주의인가 - 한국 민주주의를 보는 하나의 시각, 민주주의총서 06
최장집.박찬표.박상훈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80년대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희망의 언어였다면, 90년대에는 실험의 언어였으며 2000년대에는 절망의 언어가 되었다. 최장집 교수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개정판에서 “나는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본다.”(최장집, 2005)고 말한 것처럼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못하였고, 이는 정치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였다. 그렇다면 왜 희망의 언어였던 민주주의는 이처럼 불신 받게 되었는가? 저자들은 그 이유로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정당체계가 제대로 확립되지 못하였음을 이 책에서 지적하며, 올바른 민주주의의 상을 정당민주주의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정당민주주의를 거칠게 정의하자면 한 공동체를 국가-정치사회-시민사회로 분류하여, 시민사회의 의견이 정치사회로 대리, 대표되고 그것이 정치사회 내부에서 토론과 합의를 통하여 국가의 정책으로 시행되는 것이다. 정당은 정치사회의 가장 중심적 행위자로서 시민사회의 모든 정치적 균열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지배적인 정치적 균열을 반영하게 된다. 저자들은 이런 정당민주주의의 상에 대해서 설명하며, 이러한 정당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한 한국 민주주의가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제시하고 있다.
저자들이 제시하는 정당민주주의는 한국 민주주의를 분석함에 있어 매우 적합하다고 생각된다. 예컨대 97년 외환위기 이후 양극화와 고용불안이 시민사회의 지배적 균열구조가 되었고, 노무현 대통령은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는 말로 많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지배적 균열구조로서의 양극화와 고용불안은 정치사회에서 배제되었고, 결국 많은 국민들이 노무현 정권에 대해 실망감을 넘어 배신감을 느끼고 현 정권의 지지율은 곤두박질치게 되었다. 또한 양극화와 고용불안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시민들은 정치사회가 이러한 균열구조를 반영하지 않음으로서 자신들의 이익에 맞는 ‘전망적 투표’를 행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이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대답한 사람들 중 많은 사람이 대통령 후보 중 이명박 씨를 지지한다고 대답했다는 한 설문조사의 내용은 이런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정당체계가 시민사회의 정치적 균열구조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함으로써 정당체계는 안정화되지 못한 채, 이합집산이 반복되고 있으며 정책을 중심으로 하는 정당정치가 아닌 이미지를 중심으로 하는 인물정치 혹은 명사정치가 행해지고 있다. 이는 민주개혁세력에 차기 대선주자로서 유력하게 거론되었던 혹은 되고 있는 사람들이 정당에서 오랜 시간 정치적 경험을 쌓고, 능력을 검증받은 후보들이 아니라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나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사장과 같은 외부인사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이처럼 저자들이 제시하는 정당민주주의론은 분명 현 한국 민주주의가 처한 위기의 원인과 그 대안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매우 유의미하다고 생각되나 당위에 그친 것이 아닌가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나의 짧은 역사적 지식에 비추어 봤을 때 역사적으로 정당체계가 바뀌기 위해서는 대공황이나 전쟁과 같은 사회·경제적 조건의 혁명적 변화가 있거나 독일의 녹색당과 같이 대중운동에 의한 정당체계의 변화, 이렇게 두 가지의 경우가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당체계가 불안정한 한국의 민주주의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보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대중운동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데, 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물론 ‘운동정치’에 대해 비판적 입장에 계신 저자들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면 현재의 정당체계를 정상적인 정당체계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닌 다른 방법을 제시해줬어야만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를 약화시키고 있는 초국적 자본에 대한 언급이 부재한 점은 최장집 교수님의 열렬한 팬인 나로서는 매우 아쉽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물결 속에 근대국민국가의 경계 속의 민주주의체제는 그것에 의해 통제받지 않는 권력인 자본에 의해 그 기능이 후퇴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시민들은 그들의 권리를 침해받고 있다. 민주주의체제가 작금의 초국적 자본에 의한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폐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는 못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런 고민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매우 크다. 그러나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국 민주주의론의 대부인 최장집 교수님의 글은 현 한국의 상황에서 매우 의미 있으며 또한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