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그녀에게 사랑이란 해이며 달이며 비이며 눈이었다. 그것들은 지상의 생명을 키우는 원천이지만 생명을 키우는 것이 소명이거나 소임은 아니어서 때로 엄청난 파괴를 불러오기도 한다. 무심히 내리쪼이는 햇빛과 달빛과 비와 눈을 성장의 원동력으로 쓰거나 죽음의 원동력으로 쓰는 것은 햇빛과 달빛의 의지가 아니라 그것을 흡수하는 생명의 의지인 것이다. 해와 달과 비와 눈을 맞으며 커가는 생명처럼 다른 존재들을 흡수하며 성장하는 것. 그리하여 언젠가는 성장을 멈추고 소멸하는 것. 여자에게 사랑이란 그런 것이었다. 여자에게 타인이란 세상 만물을 고루 비추는 저 태양과도 같았다. 그 빛이 우연히 한 생명과 맞닥뜨릴 때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빛이 생명을 키우는 동안 사랑은 찬란하게 빛난다. 그러나 때가 되면 약이었던 빛이 독이 되어 생명을 시들게 할 수도 있는 법,
여자는 우연이 빚어낸 한 빛나는 순간을 영원한 것으로 지속시키려는사람들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없었고, 사람들 또한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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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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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쯤 이 책이 나왔다. 

정지아 선생님의 소설이다. 

그녀와 인사동 어딘가에서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난다. 그녀가 단풍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주변 사람이 단풍을 보고 느꼈다던 감수성을 얘기했었는데… 그 자리가 선연한데도 이야기는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다. 죽을 때는 그 얘기들도 한번에 다 지나갈까. 예전에 토끼 한 마리를 키우다 아파서 그 토끼를 내가 제대로 돌보지 못해 그런가 밤새 간호를 하다 숨을 못 쉬는 토끼를 데리고 밖으로 나와 숨을 쉬게 해야 하나 했을 때 토끼가 온몸을 비틀었다. 그때 토끼와의 처음부터 그때까지의 모든 시간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구성이나 주인공은 전혀 달랐으나 그 이야기로 소설을 썼었다.

학교 소설 수업시간에도 그녀가 강의를 했던가. 기억이 희미하다. 그녀가 교수님석에 앉아있었던 것도 같고, 후배들 수업을 했던 것을 내 기억이 만들어낸 것도 같다. 빨치산의 딸을 썼다는 그녀, 그녀의 글을 좋아해서 '봄빛' 같은 작품집을 사서 읽었다. 계간지에 작품이 실려있으면 꼭 보곤 했다. 

그녀의 이 소설이 몇몇 유력 인사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유명해졌다고 했을 때, 내가 예전에 찜뽕해둔 누군가가 이제야 빛을 발하는구나, 기뻤다. 우스운 얘기다. 글을 쓰겠다는 나는 여전히 습작생 신세를 벗어나고 있지 못한데도 이미 소설가 반열에 올라 교수인 그녀가 대중들에게도 유명해지니, 기쁘다니, 그럼에도 기뻤다. 언젠가 그녀의 글이 빛을 발하기를, 그 가치를 세상이 알아봐주기를 바랐다. 그녀의 단편소설 중, '그래, 시상에 나와봉께 좋은가?'라는 대사가 있었는데, 그 말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다시 찾아 읽어봐야겠다. 

아버지 사고 소식이 들려오던 순간부터 죽음까지, 병원에서 장례식장까지, 산재로 그의 사고를 마무리짓기까지 몇 달의 시간은 버거웠다. 그전의 나의 삶부터 현재까지, 실은 그 죽음 속에 여전히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죽은 뒤의 결심과 그 결심을 약간 철회하였음에도 그때의 의지 같은 것은 여전히 내게 있기 때문이다. 혹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며, 결혼을 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겨우 그러고 싶은 사람을 처음으로 만나게 돼 인연을 맺은 것도, 그의 죽음이 빚어낸 시간의 연속 속에서 지금을 바라보게 되는 측면이 있다. 

아버지의 죽음을 글로 쓴다면, 나의 아버지의 죽음을 글로 쓴다면, 투철한 의식을 가진 이도 아닌, 결국 노동자로 생을 마감한 나의 아버지, 그의 죽음 속에 그의 한 생애와 한국사가 담겨 있는 것은 마찬가지라, 나 또한 나의 인생과의 화해를 위해 그에 대해 글을 써야 하는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신파 없이는 인생은 쓰여지지 않는다'는 한 문장을 쓸 수 있을 뿐인데, 그것은 내가 여전히 내 생을 동정하는가, 하는 질문에 닿는다. 그녀 역시 빨치산의 딸로 발목 잡힌 인생, 교도소에 간 아버지, 그의 주변인물들과의 관계들과 화해하는 그 죽음의 길목을 소설로 쓰며 죽음이 부활이며 화해나 용서를 위한 하나의 관문 같은 것이라 하였듯, 한 인생의 질곡이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여정 속에서, 그의 삶에 대해 가졌던 온갖 감정들이 풀려나는 그 응어리를 한 편의 소설로 썼듯,… 결국 소설은 심장을 꺼내야만 쓸 수 있다는 깨달음을 근 20년 전 좋아했던 소설가의 장편소설, 그녀의 생애의 심부와도 닿아있을 소설을 보며 오랜만에 다시 떠올렸다. 

그간 나는 심장을 꺼내 글을 썼던가, 심장을 꺼낼 용기, 그녀는 아마 첫 소설부터 그 심장을 꺼낸 것 같은데, ...

20년 동안 헤매던 세상이 한 줌 같기도 한데, 그 걸음걸음 헤매임도 떠오르고, 언젠가 집 근처 대학인 상명대 도서관에서 그녀의 소설을 보고 너무 좋아했던 기억도, 그때 만나던 사람도, 선연하여 20년 전 같지 않기도 한데, 금세 시간이 이리 흘러 눈앞에 그려질 듯도 한데 모두 연락할 수 없을 만치 멀어졌으나, 그녀가 여전히 좋은 소설을 쓰고 있고, 그녀 또한 마음에 품은 것들을 이리 소설로 펼쳐보이며 살고 있구나, …



사람은 어떻게든 세상과 만나야 한다. 

노동으로 만나든 글로 만나든 무엇을 하든.

소설을 읽고 든 또 하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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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사람들은 자꾸만 또 온다고 한다. 한번만 와도 되는데, 한번으로는 끝내지지 않는 마음이겠지. 미움이든 우정이든 은혜든, 질기고 질긴 마음들이, 얽히고설켜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들이,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다. - P197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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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갑자기 아버지의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자식에게 찾아온다. 그것이 자식의 운명이다. 인생은 꼭 그렇게 힘들어야 하는 건가 하는 의문 없이. 불만도 연민도 없이 말도 논리도 없이. 글썽거리는 눈물 따위 없이. 단 한 순간에. - P308

일행들이 화장실에 가서 둘만남았을 때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인생은 아름다운 거야. 강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네가 그걸 알았으면 좋겠어. 인생은 아름다운 거다. 난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그걸 영영 알지 못할까봐, 그게 가장 큰 걱정인 것처럼 그렇게 반복하셨다. - P322

어떻게든 폭력에서 존엄으로,
그 절벽들 사이로 난 허공의 길을 기어서 나아가는 일만이 남아있다는 것을. - P331

그 열두 살의 나에게, 이제야 더듬더듬 나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절망하는 거라고. 존엄을 믿고있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우리의 고통이야말로 열쇠이며 단단한 씨앗이라고.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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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작품 수록
한강 외 지음 / 문예중앙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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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이가 녹는 동안에도 지구 어딘가는 고통에 신음한다. 
전쟁은 끊이지 않고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죽음으로부터 살아남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 속에서 남겨져야 한다. 
 
'살아남의 자의 슬픔' 
브레히트의 유명한  제목이다. 



물론 나는 알고 있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속에서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한강의 '  송이가 녹는 동안'
권여선 '이모'
김애란 '입동'
황정은 '웃는 남자'
관심있는 작가들의 작품 4편을 읽었다.
오랜만에 한국 단편소설을 읽었는데한강의 소설 '  송이가 녹는 동안' 아주 좋아   읽었다.
  송이가 녹는 동안조차 지구는 고통이 없는 때가 없다는 지독한 사실을 오랜만에 떠올렸다.

 지독한 사실에 예전에 엄청 괴로워했는데
 소설은 정면으로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언제나  고통으로 비켜서있을 수밖에 없는 작가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고통을 이야기하지만 고통으로 비켜서있다는 희안한 고통.)

 
 소설을 읽으면 하는 생각은
 이렇게 소설은 쓸쓸하고 슬플까 이다
세상은 남의 슬픔에 관심이 없고
나의 성공과 행복과 손해보지 않는 데만 관심이 있으니
소설이라도 그래야 하는 걸까
세상에는 이런 마음들도 있다고 알려주듯.
 
생각해보면 서사는 전통적으로 그렇다.
그리스비극은 종종  고통을 생의 표지판처럼 떠올리라 하였지 않았나.
 
 
4편의 소설은 모두 죽은 자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죽은 자들이 때로 지금의 삶을 두드리는살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수도 있을 것이다.
직장 동료이자 친구가아이가애인이피붙이는 아닌  친척인 이모가 죽고  뒤의 이야기.
 
언제 죽음은 우리를 찾아올까
분명 죽음과 삶은 가장 극명한 경계인데도 불구하고
죽음이 삶을 붙들 
그것은 삶이 그만큼 경쾌하지 못할 
'애도'하지 못한 마음을 붙들  되는  아닐까.
아직 애도를 끝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얼까.
 
 
 
세상은 고통과 잔혹이 가득하고 오히려 착한 사람들이 먼저 죽는  같기도  현실이나
죄없는 아이가 죽었음에도  보험금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경제가 맞물려있는 삶이나
죽음이라는 불가해를 넘어서지 못하는 현실이나
쓸쓸한 생이나 그런 것들
 
 불가해함에 대해 소설은 토로한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세월호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여전히  앞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 고통으로부터 비켜선 채로이지만)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는  현실이 실은 아주 불가해하다는 
그런 세상을 우리가 겨우 살고 있다는 
그런 생각을 오랜만에 하며
나는 사람들이 소설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오랜만에 생각했다.
 
 
10  한국소설과는 확실히 달라져있다.
10  읽던 소설은 (박민규나 김애란이 떠오른다)
팍팍한 현실에 대해 얘기했지만
살아남은  때문에 스스로를 미워하지는 않았었는데,
살아남은 자책감에 시달릴 정도로
지금  현실이 지독해져가고 있다는 경보가 아닐까?




2016. 2. 29.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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