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지금나는 세상과 타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을 배경으로하고 세상과 정면으로 대치되어 있다고도 볼 수가 있었다. 나는 아직 삶에 패배하지 않았으므로 결코 세상에 순종할 수는 없었다. - P196

해가 지면서 문득 사람이라는 것이 습관처럼 그리워져 왔다. 그립다는 것도 일종의 본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배고픔처럼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 P213

아무래도 실리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조잡하다. 하지만 이제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말들이야 모두 번드르르하지만 속셈은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인 것이다. - P235

스피커에서는 폴모리 악단의 <그리운 시냇가>라는 칸초네가 경음악으로 낮게 흘러나오고 있었으며, 이따금 손님들이 먼 과거 속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처럼 침침한 모습으로 들어와서는 하나둘 그리운 시냇가의 빈 의자들을 채워나가고 있었다. - P239

"나는 그 친구가 몹시도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결국 완전한 혼자가 되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에 불과하거든. 그 친구는 오래전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그런 것일까. 인간은 결국 완전한 혼자가 되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럴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혼자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쳐보아도 결국은 혼자가 될 뿐 그 어떤 것으로도 사람과 사람은 완벽하게 혼합될 수가 없다. 마치 물방울이 서로합쳐져서 하나의 물방울이 되듯이 그렇게 아무런 구분도 없이 합쳐져서 하나가 될 수는없다. - P259

목사님도 도둑놈도 스님도 깡패도, 교수도 학생도, 장관도 실직자도, 운동선수도 간질병 환자도, 할머니도 갓난애도, 살아 있는 한은 그 완전한 혼자라는 것 쪽으로 조금씩 발을 내디디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이 완전한 혼자라는 것을 느끼게 되고 그것으로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을는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거의 전부가 사실은 혼자가 아니려고 애를 쓰는 것 하나로 부질없이 한평생을 다 보내어버리고 마는 것 같기도 했다. - P260

나는 오래도록 그를 생각했다.
좋은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수가 있었다. 다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수가 있었다. 사는 게 참혹하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사는 게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사는게 외롭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사는 게 무엇인지 우리는 줄곧 마땅한 대답을 얻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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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과의 일체감이란 어떤 것인가요."
"모든 예술가들이 그것을 잘 알고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찌그러진 깡통을 그리든 종이비행기를 그리든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을 그 내부까지 묘사해보려고 할 때 비로소 떠도는 자기의 영혼이 지기 육체 속으로 불러들여지게 되는 것이죠."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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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 사이, 그 아득한 공간 사이로 소담스러운 눈이 퍼붓고 있었다. - P94

산파가 아들이라고 싱글벙글 웃으며 팔에 안겨준 갓난아기를 그는 무슨 불덩이인 양 화들짝 놀라 집어던지다시피 하고는 고무신을 꿰찰 시간도 없이 사립문을 달려나갔다.
그러고는 사나흘 술독에 빠져 집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술잔에 술을 따르면 처음으로 세상을 향해 열린 아기의 순결한 눈동자가 맑은 술 위에 고였다. 그 순결함을 짓밟는 심정으로 그는 술을 마시고 또 마셨다. 지금도 그는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도무지 순백의 폭설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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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녀에게 사랑이란 해이며 달이며 비이며 눈이었다. 그것들은 지상의 생명을 키우는 원천이지만 생명을 키우는 것이 소명이거나 소임은 아니어서 때로 엄청난 파괴를 불러오기도 한다. 무심히 내리쪼이는 햇빛과 달빛과 비와 눈을 성장의 원동력으로 쓰거나 죽음의 원동력으로 쓰는 것은 햇빛과 달빛의 의지가 아니라 그것을 흡수하는 생명의 의지인 것이다. 해와 달과 비와 눈을 맞으며 커가는 생명처럼 다른 존재들을 흡수하며 성장하는 것. 그리하여 언젠가는 성장을 멈추고 소멸하는 것. 여자에게 사랑이란 그런 것이었다. 여자에게 타인이란 세상 만물을 고루 비추는 저 태양과도 같았다. 그 빛이 우연히 한 생명과 맞닥뜨릴 때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빛이 생명을 키우는 동안 사랑은 찬란하게 빛난다. 그러나 때가 되면 약이었던 빛이 독이 되어 생명을 시들게 할 수도 있는 법,
여자는 우연이 빚어낸 한 빛나는 순간을 영원한 것으로 지속시키려는사람들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없었고, 사람들 또한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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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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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쯤 이 책이 나왔다. 

정지아 선생님의 소설이다. 

그녀와 인사동 어딘가에서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난다. 그녀가 단풍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주변 사람이 단풍을 보고 느꼈다던 감수성을 얘기했었는데… 그 자리가 선연한데도 이야기는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다. 죽을 때는 그 얘기들도 한번에 다 지나갈까. 예전에 토끼 한 마리를 키우다 아파서 그 토끼를 내가 제대로 돌보지 못해 그런가 밤새 간호를 하다 숨을 못 쉬는 토끼를 데리고 밖으로 나와 숨을 쉬게 해야 하나 했을 때 토끼가 온몸을 비틀었다. 그때 토끼와의 처음부터 그때까지의 모든 시간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구성이나 주인공은 전혀 달랐으나 그 이야기로 소설을 썼었다.

학교 소설 수업시간에도 그녀가 강의를 했던가. 기억이 희미하다. 그녀가 교수님석에 앉아있었던 것도 같고, 후배들 수업을 했던 것을 내 기억이 만들어낸 것도 같다. 빨치산의 딸을 썼다는 그녀, 그녀의 글을 좋아해서 '봄빛' 같은 작품집을 사서 읽었다. 계간지에 작품이 실려있으면 꼭 보곤 했다. 

그녀의 이 소설이 몇몇 유력 인사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유명해졌다고 했을 때, 내가 예전에 찜뽕해둔 누군가가 이제야 빛을 발하는구나, 기뻤다. 우스운 얘기다. 글을 쓰겠다는 나는 여전히 습작생 신세를 벗어나고 있지 못한데도 이미 소설가 반열에 올라 교수인 그녀가 대중들에게도 유명해지니, 기쁘다니, 그럼에도 기뻤다. 언젠가 그녀의 글이 빛을 발하기를, 그 가치를 세상이 알아봐주기를 바랐다. 그녀의 단편소설 중, '그래, 시상에 나와봉께 좋은가?'라는 대사가 있었는데, 그 말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다시 찾아 읽어봐야겠다. 

아버지 사고 소식이 들려오던 순간부터 죽음까지, 병원에서 장례식장까지, 산재로 그의 사고를 마무리짓기까지 몇 달의 시간은 버거웠다. 그전의 나의 삶부터 현재까지, 실은 그 죽음 속에 여전히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죽은 뒤의 결심과 그 결심을 약간 철회하였음에도 그때의 의지 같은 것은 여전히 내게 있기 때문이다. 혹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며, 결혼을 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겨우 그러고 싶은 사람을 처음으로 만나게 돼 인연을 맺은 것도, 그의 죽음이 빚어낸 시간의 연속 속에서 지금을 바라보게 되는 측면이 있다. 

아버지의 죽음을 글로 쓴다면, 나의 아버지의 죽음을 글로 쓴다면, 투철한 의식을 가진 이도 아닌, 결국 노동자로 생을 마감한 나의 아버지, 그의 죽음 속에 그의 한 생애와 한국사가 담겨 있는 것은 마찬가지라, 나 또한 나의 인생과의 화해를 위해 그에 대해 글을 써야 하는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신파 없이는 인생은 쓰여지지 않는다'는 한 문장을 쓸 수 있을 뿐인데, 그것은 내가 여전히 내 생을 동정하는가, 하는 질문에 닿는다. 그녀 역시 빨치산의 딸로 발목 잡힌 인생, 교도소에 간 아버지, 그의 주변인물들과의 관계들과 화해하는 그 죽음의 길목을 소설로 쓰며 죽음이 부활이며 화해나 용서를 위한 하나의 관문 같은 것이라 하였듯, 한 인생의 질곡이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여정 속에서, 그의 삶에 대해 가졌던 온갖 감정들이 풀려나는 그 응어리를 한 편의 소설로 썼듯,… 결국 소설은 심장을 꺼내야만 쓸 수 있다는 깨달음을 근 20년 전 좋아했던 소설가의 장편소설, 그녀의 생애의 심부와도 닿아있을 소설을 보며 오랜만에 다시 떠올렸다. 

그간 나는 심장을 꺼내 글을 썼던가, 심장을 꺼낼 용기, 그녀는 아마 첫 소설부터 그 심장을 꺼낸 것 같은데, ...

20년 동안 헤매던 세상이 한 줌 같기도 한데, 그 걸음걸음 헤매임도 떠오르고, 언젠가 집 근처 대학인 상명대 도서관에서 그녀의 소설을 보고 너무 좋아했던 기억도, 그때 만나던 사람도, 선연하여 20년 전 같지 않기도 한데, 금세 시간이 이리 흘러 눈앞에 그려질 듯도 한데 모두 연락할 수 없을 만치 멀어졌으나, 그녀가 여전히 좋은 소설을 쓰고 있고, 그녀 또한 마음에 품은 것들을 이리 소설로 펼쳐보이며 살고 있구나, …



사람은 어떻게든 세상과 만나야 한다. 

노동으로 만나든 글로 만나든 무엇을 하든.

소설을 읽고 든 또 하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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