씁쓸한 초콜릿
미리암 프레슬러 지음, 정지현 옮김 / 낭기열라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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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난 네가 싫어..”

내 기억 어딘가에 박혀 있는 말. 목소리조차 또렷하다. 혼자 그네를 탔고, 월요일 아침 조회시간이면 두 줄서기임에도 내 옆 자리는 늘 비어 있었다. 다급하게 체육복이나 책을 빌리러 오지 않는 이상 해가 지나고 반이 바뀌면 나를 보러 놀러 오는 친구는 없었다. 난 그런 아이였다.

「에바는 몸을 웅크리고 왼쪽 운동화의 매듭을 풀어서 끈을 뽑아냈다가 새로 꿰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라가 이름을 불렀다. ... 에바는 끈을 꿰는 속도를 더욱 늦췄다.」

선생님이 칠판 앞으로 불러내어 문제를 풀 반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는 동안 에바는 무릎 위에 가방을 올려놓고 고개를 깊게 숙인 채 지우개를 찾는다. 체육 시간에 팀을 짜기 위해 이름을 한 명 한 명 부를 때 에바는 운동화의 매듭을 풀어서 끈을 다시 꿰기 시작한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 에바는 혼자 청어 조각이 든 샐러드를 먹는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도록 산사나무 울타리를 뚫고 들어가 땅바닥에 앉아서.

에바는 뚱뚱하다. 뚱뚱한 에바는 친구가 없고, 늘 사람들의 관심에서 빗겨나 있다. “어머! 에바가 있었구나.” 잘 살피지 않으면 뚱뚱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내 곁에 에바가 있었는지 모를 만큼 자신의 존재를 작게 만드는 아이. 우리 곁에는 늘 에바가 있었다.

‘씁쓸한 초콜릿’은 그랬던 에바가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점점 드러내기 시작하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아주 우연하게 만난 남자친구 미헬로부터 시작된다. 미헬은 우리나라로 치면 상업학교를 다니는 친구였다. 물론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학교를 마치면 돈을 벌기 위해 떠날 계획을 이야기한다. 에바는 남자친구 미헬이 왜 뚱뚱한 자신을 좋아하는지 의문이다. 하지만 미헬에게 에바는 김나지움에 다니는 똑똑한 아이였고, 그것이 자랑이었다. 에바에게 미헬이 가난과 학교가 아무렇지 않았던 멋진 남자친구였던 것처럼, 미헬에게 에바는 뚱뚱한 체격 같은 건 보이지도 않는 똑똑한 여자친구였다.

「에바는 침대 옆에 있는 탁자의 서랍을 열었다. 역시나 초콜릿 한 개가 아직 남아 있었다. ... 부드럽고도 쓴 맛이 났다! 다정한 손길처럼 부드러웠고 슬픈 흐느낌처럼 씁쓸했다.」

에바가 슬픔에 빠져 있을 때마다 엄마는 초콜릿을 줬다. 그것은 부드럽고 쓴 맛이 난다. 초콜릿을 먹으면 뚱뚱해진다는 걸 알면서도 에바는 초콜릿을 먹었다. 초콜릿에게 위로를 받으면서도 다 먹고 나면 먹기 전보다 에바는 더욱 비참해진다.

학창시절을 이제는 추억하는 나이가 된 지금도 나에게 그때는 채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있다. 친구들과 재잘재잘 떠들고 몰려다니며 추억을 쌓기 바빴던 그 때의 난, 추억을 쌓아가는 친구들을 지켜보는 아이였고, 체육시간에 팀을 짤 때 운동화 끈을 고쳐 매는 아이였다. 그래서 어디에서든 에바를 발견할 때면 난 온전히 가슴 안에서 상처가 덧나고야 만다.

하지만 에바는 내 나이가 되었을 때 초콜릿을 먹던 자신을 아프게 돌아보지 않아도 된다. 미헬로 인해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말할 줄 알게 된 에바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점차 자신의 가치를 빛내기 시작한다. 뚱뚱하고 그늘에 있는 에바가 아닌, 수학을 잘 하는 에바, 친구들과 함께 의논하고 의견을 제시할 줄 아는 에바가 되어 간다. 체형을 가려줄 짙은 색깔의 원피스 대신 밝은 색의 티셔츠를 입을 줄 에바, 거짓말을 하고 음식을 버리다가 밤에 몰래 허겁지겁 먹어대는 대신 자신에게 맞는 저칼로리 식단으로 음식을 만들어 달라고 엄마에게 얘기할 줄 아는 에바.

누구에게나 장점은 있다. 단점을 상쇄하고도 충분할 만큼의 장점. 그리고 어쩌면 단점은 애초부터 단점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남들은 아무렇지 않아하는데 자신만이 어쩔 줄 몰라하고 필사적으로 가리려 노력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그건 여린 감수성을 지닌 사춘기뿐만이 아닌 어른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오늘도 씁쓸한 초콜릿 한 조각을 입에 물고 있는 나에게 에바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렇게 묻는다. “그게 뭐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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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사랑이었네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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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지금의 내 모습을 만든 건 애초에 나라는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서 낳아준 부모님의 공(?)이고, 특별한 굴곡 없이 평범했지만 결코 짧지만은 않은 나의 삶 속에 녹아든 경험이 쌓인 결과일 것이다. 평생 내 손을 거쳐 간 모든 책들도 한몫 단단히 했음은 두 말할 나위 없고. 
 

늘 움츠려있고, 바람의 움직임에 따라 고개를 숙이는 갈대처럼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았던 내가 어느 날 “나 이거 하고 싶어요..” 라는 말 한마디를 꺼내고, 그로부터 정확히 2년이 지난 지금, 하고 싶다던 그 일의 언저리나마 배회하면서 여기까지 흘러온 건 어느 한 순간에 정신이 번쩍 든 것도, 한 권의 책이 마음을 돌려놓은 것도 아니었다. 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마음 어딘가에 쌓이고 쌓인 결과일진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늦은 나이에 직장 그만두고 다시 학교에 다니느냐고 사람들이 물을 때마다 난 항상 한비야를 이야기한다. 다 그 사람 때문이라고. 그 책을 읽었기 때문이라고.

그만큼 한비야는 강렬했고,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내 가슴을 뛰게 했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한비야는 왜 그토록 강렬했으며, 한 권의 책은 내 가슴을 뛰게 했는가. 그건 순수함이었고, 열정이었으며, 진심이었다. 그래서 난 한비야의 손에서 내 손으로 촛불 하나를 건네받고 싶었고, 그 시작점에 선 즈음인 지금도 나 자신에게 자신감이 없어질 때면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의 첫 장을 펼친다.

그건 사랑이었네는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에 비하면 강렬함은 덜 하다. 오지를 헤매고 구호 현장을 뛰어다닌 그녀가 사람들에게 자신이 두 눈으로 본 것을 그대로 알리고 싶었던 간절함이 생생하게 재현되었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그 자체로 하나의 기록이었고, 영화 필름처럼 재생된 치열한 현장이었다.

그에 비해 그건 사랑이었네는 그토록 모진 현장에서 방금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마친 후에, 막 끓여낸 따끈한 차 한 잔을 옆에 두고 차분히 노트북을 열고는 창밖을 무심히 보면서 회상을 하는 듯한 느낌이다. 강렬함을 대신하는 따뜻함, 가슴을 뛰게 했던 눈물을 대신해서 책의 한쪽 귀퉁이를 접게 하는 기억해 두고 싶은 글귀들이 자리한다. 물론 한비야 특유의 열정은 그대로이다.

「지금도 나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있다. 내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렇다. 현실적인 꿈만 꾸자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바보, 멍청이, 미련 곰탱이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굶주리는 아이가 없는 세상, 모두가 공평한 기회를 갖는 세상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 세상이 올까? 청춘과 인생을 바치고 목숨까지 바친다고 한들 그런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보면 이건 한마디로 이룰 수 없는 꿈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도 이 꿈을 가슴에 가득 안고 바보들의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이룰 수는 없을지언정 차마 포기할 수는 없는 꿈이기 때문이다. 아니, 포기해서는 안 되는 꿈이기 때문이다.」  p.151-152

책은 온통 자신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자신에 대한 자랑부터 취미, 첫사랑, 구호현장에서 보고 느낀 것들, 좋아하는 책, 종교 이야기까지... 마지막, 구호 현장을 떠난 지금 무엇을 새로 시작하려고 하는가까지 쏟아낸 글을 읽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부러워지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한비야가 가지고 있는 능력 중의 하나는 부러워만 하다 책을 덮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비야는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늘어놓고는 은근슬쩍 괜한 사람 옆구리를 찌르곤 한다. 당신도 한 번 해봐! 그러면 나는 또 입맛을 다시는 거고. 어디 한 번 해 볼까?

맺을 수 없는 사랑을 하고
견딜 수 없는 아픔을 견디며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이룰 수 없는 꿈을 꾸자.

돈키호테에 나온다는 이 구절이 나를 또 다시 설레게 한다. 이 글귀를 툭 던지고는 한비야는 또 다시 쿡쿡 옆구리를 찔러 댄다.

「대단히 비현실적이고 비이성적인 말이지만 나는 이것이 젊음의 실체라고 생각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도전, 무모하리마니 크고 높은 꿈 그리고 거기에 온몸을 던져 불사르는 뜨거운 열정이 바로 젊음의 본질이자 특권이다. 이 젊음의 특권을 그냥 놓아버리겠다는 말인가, 여러분.」  p. 152

이러니 내가 ‘다 저 사람 탓’이라고 하는 것이다. 책임 질 것도 아니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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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밖에 나다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곽상필.김문호.박영숙.성남훈.안세홍.염중호.이재갑.최민식.한금선 사진 / 휴머니스트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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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은 인간이 어떻게 진화했는지는 설명했어도, 인간이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못했다. 우리 각자는 자신이 어떻게 성장해왔는지 과거를 뒤돌아보며 알 수 있어도, 자신이 진짜 누구인지 잘 모른다. 인간은 그 자체로 물음표 달린 존재다.」 p. 164

알면서도 애써 모르는 척 하는 것은 쉽다. 그냥 안 보면 되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건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리가 위로하고 있을 때, 내 눈이 빗겨간 그곳에서 여전히 사람들은 숨을 쉬고 있다. 그래서 이 책 「눈. 밖에. 나다」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 아마도 낯설었을 9명의 사진작가에게 기꺼이 모습을 드러내고 카메라 앞에서 선 그들은 우리가 애써 내 눈 밖으로 밀어내는 동안 그대로 눈 밖에 나버렸다.

우리는 ‘우리’라는 단어 안에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 그것은 친근함이고, 동질감이다. 너나 나나 다르지 않다는 것이고 그 안에 있을 때 안전하고 편안하다. ‘우리’는 ‘너’와 ‘나’보다는 ‘너와나’라는 친근한 울타리이고 그 안에서 안심하게 되지만, 그 울타리 안에 들지 못했을 때 ‘우리’는 냉혹한 벽이 되어 버린다. 영원할 것 같지만 의외로 울타리 안에서 내쳐지는 건 순간이다. 어느 날 교통사고로 한 쪽 다리를 움직일 수 없게 되었을 때,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가난한 나라에서 온 노동자일 때, 또 그 사람과 결혼을 해 아이를 낳았을 때... 안전했던 내가 눈 밖으로 밀려나는 건 순식간이다.

그것은 조금 다를 뿐이지만 우리는 틀리다고 한다. 차이일 뿐이지만 차별을 경험해야만 하고, 엄연한 차별임에도 소외라는 그럴 듯한 단어로 가끔 동정의 시선을 던진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펴낸 사진집 속의 사람들은 아무런 수식도 꾸밈도 없이 고스란히 자신을 드러낸다. 당신이 보지 않으려 하는 내가 여기 이렇게 존재한다고. 슬픔도 억울함도 없다. 오히려 그런 단어들은 오래 된 진부함일 뿐이다. 사진 속에 담긴 ‘그들’을 볼 ‘우리’가 어딘가 불편해 하고 있는 동안 그냥 그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산다. 휠체어가 뒤집어 지는 장면 대신 거울을 보고 있는 시각장애인과 고개를 속이고 얼굴을 감추는 대신 까만 피부 그대로와 김OO 세 글자 이름, 서울시로 시작하는 주소가 적힌 주민등록증을 보여주는 사진은 우리가 외면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도대체 정상인이 뭐냐고 묻는다면, 소위 정상적인 것을 주장하는 사람도 제대로 답하지 못할 것이다. 기껏해야 사회적 다수와 소수의 구분으로 정상인을 정의하려고 할 것이다. 또한 비정상인이 뭐냐고 물어도 그 대답은 궁색해질 것이다. 기껏해야 남과 다르게 생기거나, 남과 다른 신체적 조건을 갖고 있거나, 남달리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동어반복적인 정의에 머물 것이다. … 정상인으로 사회를 유지하려는 경향과 이상인을 지향하는 것은 차별의 문제를 불러온다. 차이는 자연스런 조건이지만, 차별은 인간이 야기하는 문제다.」 p. 166

장애, 노인, 혼혈, 외국인 노동자, 동성애, 가난. 인권이라는 커다란 주제에 하나의 카테고리로 붙박이가 된 단어들은 잠시 시야에 빗겨 서 있을 뿐 눈 밖에서 늘 존재하고 있다는 걸 증명하고 있다. 하나의 스티그마가 된 주제 아래 헤쳐모인 그들은 이미 인권 밖에서 이방인이고 불편한 존재들이며 차별을 감기처럼 달고 다니며 스스로 숨어버린 사람들이다. 그 덕에 우리는 약간만 시선을 달리하는 것으로 안심할 수 있었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사진을 보는 동안에는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덮고 나면 내가 울타리 안에 있음에 안심하면서 또 그렇게 잊겠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우린 이미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금기였던 동성애는 어느새 영화의 흥행 아이콘으로 급부상했고, 혼혈 보다는 다문화라는 용어에 익숙해지고 있다. 드라마 속에는 가족의 구성원으로 장애인이 나오기도 하고, 오래 전에 방영된 한 TV프로그램을 보면서 외국인 노동자에게도 가족이, 그리움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눈 밖에 있던 것들을 눈 안으로 들이려는 노력의 결과이다.

신이 만든 인간은 완벽하다는 환상을 이제는 버려야 한다. 우리는 인간일 뿐이다. 불안정하고 부족하며 나약하다. 누구나 늙고 병이 든다. 모두 다른 모습을 하고 다른 삶을 산다. 어느 한 사람도 같지 않다.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일 뿐이다.

「지상에 태어난 인간은 모두 자유인이다. 내가 말하는 자유는 여행하고, 삶의 자리를 선택하고, 생업을 선택하고, 삶을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모든 인간은 신의 아들 딸로 자유롭게 이 땅에 태어났다. … 그 자유를 가로막는 일체의 모든 제도와 규율과 금제는 인간의 이기적 탐욕에서 비롯된 죄악이다. 우리는 다른 어떤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우리와 같은 인간존재라는 이유만으로 평화롭게 지낼 수 있어야 한다.」 p.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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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뛰는 삶 - 간절히 원하는 그 모습으로 살아라
강헌구 지음 / 쌤앤파커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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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 아니라 오늘 시작하라. 순서는 아무래도 좋다. 내일은 너무 늦다. 현명한 사람은 내일이라는 공수표를 믿지 않는다. 영원히 일장춘몽에 빠져 살고 싶지 않다면, 내일이라는 ‘신기루’에서 그만 빠져나와야 한다. 취직만 하면, 결혼만 하면, 돈이 조금만 더 모이면, 아이가 대학에 합격하기만 하면, 아이들 결혼만 시키고 나면…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문제들, 과연 그 문제들이 끝나는 날이 오긴 올까? … ‘이 문제만 해결되고 나면 그 때 시작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영원히 시작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당신 지금 뭐하고 있는가. 당장 무언가를 해라. 인생은 짧다. 그리고 그 무언가를 시작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다. 첫 번째 통찰하라. 두 번째 작심하라. 세 번째 돌파하라. 마지막 네 번째 질주하라. 나를 돌아보고 얻은 결론을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겨낸다면 당신에게 성공은 보장되어 있다는 말이 되겠다.

성공에 목말라 있거나, 내 삶이 정체되어 있다고 느끼는 사람, 특히 누군가 내 엉덩이를 툭 치며 앞으로 내 달릴 용기를 불어넣어 줄 이가 필요했던 사람에게는 이 책에 적힌 하나의 문장, 한 마디가 가슴에 와 닿으리라 생각한다. 책에 적힌 저자의 말투가 직설적이며 단호한 이유는 저자 자신이 책에서 제시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스스로 저자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것도 있겠지만, 책을 읽는 독자에게는 바로 옆에서 말을 거는 듯 기운을 북돋기에 무척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할 것이다.  

‘가슴 뛰는 삶’에서 제시하고 있는 삶은 말 그대로 성공적인 삶이다. 총 4장으로 이루어진 책은 첫 번째 장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하고 싶은가를 발견하고 그것을 대표할 하나의 단어를 찾아내는 통찰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것은 1, 2년 안에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아닌 평생을 두고 이루어야 할 비전이 되어야 한다. 두 번째 장에 이르면 그것을 발견했다면 머뭇거리지 말고 운명의 루비콘 강을 건너라고 재촉한다. 혼자서 머뭇거리지 말고 남에게 보이고 세상에 선포하여 돌이킬 수 없이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장에는 비전이 실제로 성공할 수 있는 나름의 방법을 알려준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읽으면서 한비야의 말이 떠올랐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에서 한비야는 독자에게 어떤 삶을 살기로 결정했는가라고 묻는다. 가진 자의 밑에서 편안하게 살다 안락사 할 것인가, 새 장 밖에서 장렬하게 전사할 것인가. ‘가슴 뛰는 삶’에서 제시하는 삶은 가진 자 밑에서 편안하게 살다 안락사하는 삶도 새 장 밖에서 장렬하게 전사하는 삶도 아니다. 네가 평생을 바칠만한 가치가 있는 선택을 했다면 그것이 새장 밖이든 안이든 치열하게 그것을 향해 뛰라는 것이다.

어떤 삶을 살기로 결정했는가. 그리고 그런 삶을 살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지지부진한 나에게 누군가 용기를 북돋워주며 스타트를 끊어주길 바라는 사람에게는 읽어볼 만한 책이다. 하지만 조금은 다른 삶을 살길 선택했다면, 혹은 이미 자신만의 삶을 살고 있다면 요즘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는 그저 그런 실용서 중의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결국은 그렇지 않은가. 한 권의 책이 내 삶의 자양분이 될 수도 있고, 괜히 읽느라 시간만 낭비한 책이 될 수도 있는 건 나 자신의 선택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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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펭귄클래식 38
진 리스 지음, 윤정길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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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이 일단 발생하면 그 사건이 언제, 왜 발생했는지는 잊어버린다 해도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은 영원히 존재해요.」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는 당혹스럽다. 샬럿 브론테의 ‘제인에어’를 아련하게 기억하는 사람일수록 아마도 당혹스러움은 커질 것이다. 더 할 수 없이 쓸쓸한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읽는 내내 제인에어를 떠올리려 노력했지만, 워낙 오래전에 읽어서인지 제인에어는 이처럼 황량하지 않았다는 느낌만이 기억 날 뿐 로체스터가 과연 어떻게 묘사됐었나를 상기시키는 것조차 어려웠다.

결국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제인에어를 다시 읽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집어든 제인에어를 읽는 동안 그 로맨틱한 분위기에 완전히 젖어들 수 없었던 건,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제인에어’와 황량하기만한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의 차이는 로체스터가 두 여인을 보는 시각의 차이이며, 그래서 이 책이 세상에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비로소 공감했기 때문이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는 로체스터의 첫 번째 부인, 미치광이 버사 메이슨, 아니 앙투아네트의 이야기이며, 편협한 시각에 갇혀버린 가여운 여인에 대한 변명임과 동시에 온갖 우월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문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기도 하다.      

작가 진 리스는 ‘제인에어’를 읽고 분노한다. 일방적인 영국의 시선일 뿐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그리고 제인에어의 전편을 쓰기 시작한다. ‘제인에어’에는 미치광이 버사로 묘사되는 앙투아네트에 대해 몇 가지 단초가 나온다. 크리올 여인이며, 가문 대대로 미치광이에다 로체스터는 그런 사실조차 모른 채 아버지와 형에 의해 억지로 결혼했다는 것이다. 진 리스는 이 지점에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다.

크리올이란 식민지의 백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은 백인이었고, 많은 부와 노예를 소유했으나 노예해방이 된 후에 들어온 새로운 본토 백인들에게 아마 흑인과 피가 섞였을 것이라며 무시당했고, 해방된 노예들의 반란에 부딪히기도 했다. 앙투아네트는 바로 그 크리올이었다. 로체스터의 아버지는 재산을 장남인 형에게 물려주고 동생이었던 로체스터에게는 앙투아네트와의 결혼을 통해 부를 충족시켜준다. 로체스터는 결국 재산을 보고 결혼한 이 일을 후회하고, 앙투아네트를 멋대로 단정하고 이름마저 버사로 바꾸어버린다.

「버사는 내 이름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나를 부르는 것은 나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만들려는 거지요?」

당시 노예주들은 노예의 이름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때의 법은 여자의 재산은 결혼을 하면 남자의 재산이 되어 버린다. 비록 이혼을 하더라도 돌려받을 수 없었다. 부를 거머쥐자 로체스터의 눈에 앙투아네트는 아름다운 숙녀에서 더러운 크리올이 돼 버렸고, 자기 식으로 규정하고 지배하려 했다. 진 리스는 백인우월주의와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제도, 식민지 문화 등 유럽의 것들을 대표하는 로체스터와 그 반대편에 선 앙투아네트와 유모 크리스토핀으로 가치관을 대립시킨다. 그리고 앙투아네트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 모든 고통을 자기 식으로 거부한다. 자신을 가두고 정신을 잃은 것이다.

어릴 때 ‘제인에어’를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느낌을 받았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다시 읽은 ‘제인에어’는 누구나 꼭 읽어야 할 고전으로서보다는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와의 대척점으로 새롭게 다가왔다. 쓸쓸한 식민지 풍경과 아름다운 유럽의 저택. 척박한 땅과 분노에 찬 사람들 대신에 선량하고 우아한 귀족들. 예쁘지 않았지만 품행이 단정하고 기품 있는 제인에어와 아름다웠지만 크리올이었고 야생적이었던 앙투아네트. 그것은 로체스터의 시각의 차이였고, 각각 다른 눈으로 세상을 봤던 작가의 차이였다.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는 하나의 이야기에서 무엇을 보고 어떤 것을 끄집어 낼 수 있는 가의 차이이기도 하다.

제인에어를 폄하하는 건 아니다. 물론 과거와 현재의 시간차가 존재하듯 다시 읽은 ‘제인에어’가 그저 낭만적으로만 보이지 않고 마음에 안 드는 것들이 새록새록 눈살을 찌푸리게는 했지만 말이다. ‘제인에어’는 출간된 지 백년이 훨씬 넘은 지금까지 살아남아 전 세계에서 읽히고 있는 고전임은 두말 할 것 없지만 어쨌든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통해 어떤 시각을 갖는 것, 무엇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보이는 것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된 것만은 사실이다. 어느 한 쪽이 좋다, 좋지 않다가 아니라 둘 다 각자의 위치에서 존재가치가 있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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