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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밖에 나다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곽상필.김문호.박영숙.성남훈.안세홍.염중호.이재갑.최민식.한금선 사진 / 휴머니스트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찰스 다윈은 인간이 어떻게 진화했는지는 설명했어도, 인간이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못했다. 우리 각자는 자신이 어떻게 성장해왔는지 과거를 뒤돌아보며 알 수 있어도, 자신이 진짜 누구인지 잘 모른다. 인간은 그 자체로 물음표 달린 존재다.」 p. 164
알면서도 애써 모르는 척 하는 것은 쉽다. 그냥 안 보면 되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건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리가 위로하고 있을 때, 내 눈이 빗겨간 그곳에서 여전히 사람들은 숨을 쉬고 있다. 그래서 이 책 「눈. 밖에. 나다」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 아마도 낯설었을 9명의 사진작가에게 기꺼이 모습을 드러내고 카메라 앞에서 선 그들은 우리가 애써 내 눈 밖으로 밀어내는 동안 그대로 눈 밖에 나버렸다.
우리는 ‘우리’라는 단어 안에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 그것은 친근함이고, 동질감이다. 너나 나나 다르지 않다는 것이고 그 안에 있을 때 안전하고 편안하다. ‘우리’는 ‘너’와 ‘나’보다는 ‘너와나’라는 친근한 울타리이고 그 안에서 안심하게 되지만, 그 울타리 안에 들지 못했을 때 ‘우리’는 냉혹한 벽이 되어 버린다. 영원할 것 같지만 의외로 울타리 안에서 내쳐지는 건 순간이다. 어느 날 교통사고로 한 쪽 다리를 움직일 수 없게 되었을 때,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가난한 나라에서 온 노동자일 때, 또 그 사람과 결혼을 해 아이를 낳았을 때... 안전했던 내가 눈 밖으로 밀려나는 건 순식간이다.
그것은 조금 다를 뿐이지만 우리는 틀리다고 한다. 차이일 뿐이지만 차별을 경험해야만 하고, 엄연한 차별임에도 소외라는 그럴 듯한 단어로 가끔 동정의 시선을 던진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펴낸 사진집 속의 사람들은 아무런 수식도 꾸밈도 없이 고스란히 자신을 드러낸다. 당신이 보지 않으려 하는 내가 여기 이렇게 존재한다고. 슬픔도 억울함도 없다. 오히려 그런 단어들은 오래 된 진부함일 뿐이다. 사진 속에 담긴 ‘그들’을 볼 ‘우리’가 어딘가 불편해 하고 있는 동안 그냥 그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산다. 휠체어가 뒤집어 지는 장면 대신 거울을 보고 있는 시각장애인과 고개를 속이고 얼굴을 감추는 대신 까만 피부 그대로와 김OO 세 글자 이름, 서울시로 시작하는 주소가 적힌 주민등록증을 보여주는 사진은 우리가 외면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도대체 정상인이 뭐냐고 묻는다면, 소위 정상적인 것을 주장하는 사람도 제대로 답하지 못할 것이다. 기껏해야 사회적 다수와 소수의 구분으로 정상인을 정의하려고 할 것이다. 또한 비정상인이 뭐냐고 물어도 그 대답은 궁색해질 것이다. 기껏해야 남과 다르게 생기거나, 남과 다른 신체적 조건을 갖고 있거나, 남달리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동어반복적인 정의에 머물 것이다. … 정상인으로 사회를 유지하려는 경향과 이상인을 지향하는 것은 차별의 문제를 불러온다. 차이는 자연스런 조건이지만, 차별은 인간이 야기하는 문제다.」 p. 166
장애, 노인, 혼혈, 외국인 노동자, 동성애, 가난. 인권이라는 커다란 주제에 하나의 카테고리로 붙박이가 된 단어들은 잠시 시야에 빗겨 서 있을 뿐 눈 밖에서 늘 존재하고 있다는 걸 증명하고 있다. 하나의 스티그마가 된 주제 아래 헤쳐모인 그들은 이미 인권 밖에서 이방인이고 불편한 존재들이며 차별을 감기처럼 달고 다니며 스스로 숨어버린 사람들이다. 그 덕에 우리는 약간만 시선을 달리하는 것으로 안심할 수 있었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사진을 보는 동안에는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덮고 나면 내가 울타리 안에 있음에 안심하면서 또 그렇게 잊겠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우린 이미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금기였던 동성애는 어느새 영화의 흥행 아이콘으로 급부상했고, 혼혈 보다는 다문화라는 용어에 익숙해지고 있다. 드라마 속에는 가족의 구성원으로 장애인이 나오기도 하고, 오래 전에 방영된 한 TV프로그램을 보면서 외국인 노동자에게도 가족이, 그리움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눈 밖에 있던 것들을 눈 안으로 들이려는 노력의 결과이다.
신이 만든 인간은 완벽하다는 환상을 이제는 버려야 한다. 우리는 인간일 뿐이다. 불안정하고 부족하며 나약하다. 누구나 늙고 병이 든다. 모두 다른 모습을 하고 다른 삶을 산다. 어느 한 사람도 같지 않다.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일 뿐이다.
「지상에 태어난 인간은 모두 자유인이다. 내가 말하는 자유는 여행하고, 삶의 자리를 선택하고, 생업을 선택하고, 삶을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모든 인간은 신의 아들 딸로 자유롭게 이 땅에 태어났다. … 그 자유를 가로막는 일체의 모든 제도와 규율과 금제는 인간의 이기적 탐욕에서 비롯된 죄악이다. 우리는 다른 어떤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우리와 같은 인간존재라는 이유만으로 평화롭게 지낼 수 있어야 한다.」 p. 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