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이름은 무성히 들었지만 최근에야 찾아보기 시작한 뮤지션이다. 이 노래를 듣고 충격을 먹었다. 나는 돈도 없고 아빠도 없고 애인도 없어. 그래, 그럼 뭘 갖고 있니? 응 나는 머리카락이 있고 귀도 있고... 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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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한 권 쓰자고 마음을 먹었고 이 블로그를 메모장으로 이용하자는 생각을 했다. 주제와 방향은 머리 속에 있지만 쑥스럽기 때문에 여기에 밝혀 두지는 않겠다. 매일 매일 메모를 남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한 일년 쌓아나가면 정돈된 생각을 가질 수 있을까? --언제나 작정만 하다가 늙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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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의미가 있을까? 철학자들은 더 이상 이런 문제를 다루기를 꺼려 한다. 그리고 철학적인 답변을 시도해 본다고 해도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의 답을 내놓지는 못할 것이다. 암튼, 그렇더라도 일단 시도해 보자.


그런데 시작하자마자 난관에 봉착한다. 즉, 의미라는 말은 너무나 다의적이다. 예컨대, 어떤 문장의 의미라는 말에서의 의미와 인생의 의미라는 말에서의 의미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 말을 정돈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거기에 질서를 부여할 기준이 필요하다.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의미'를 규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으로 지향성을 들어보자. 말하자면 의미는 인간이 어떤 의도 하에 수행하는 행위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의 가장 궁극적인 의미일까? 일단 그렇다고 해두자. '문장의 의미'에서의 의미는 이런 근원적 의미의 파생적인 부분일까? 일단 그렇다고 해두자.


의미라는 말을 일단 이렇게 이해했다. 예컨대, 나는 지금 커피잔을 들고 있다. 이것은 사실에 대한 하나의 기술이다. 그리고 그것의 의미는 내가 지금 커피를 마시려 한다는, 좀 더 커다란 기획 안에 포섭된다. 혹은 그 기획 안에서 내가 커피잔을 들고 있다는 사실에 의미가 부여된다. 나의 이런 사소한 행위는 내가 지금 블로그 글을 쓰고 있다는 것 등에 포섭되어 있다. 이런 식으로 주제는, 기획은 나 자신의 존재에까지 확대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나의 어떤 사소한 행위는 나의 존재, 혹은 실존, 혹은 인생, 혹은 인격 등의 한계 안에서 조명되어 그것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실존이니 인생이니 하는 말은 이미 한계 개념이 된다. 그것은 어떤 행위에 의미를 비쳐주는 지반이다. 그러므로 실존이나 인생에 의미가 있는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런 한계 개념에는 주체성이라든지, 실재라는 것 등이 있다. 예컨대, 모든 경험은 실재를 전제하므로 실재 자체를 의심한다든지, 실재를 이론적으로, 차후적으로 구성하고자 하는 시도는 모두 헛된 것이 된다. --간단하게 말하면 한계 개념들에는 외부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 인생에 부여하는 의미들은 무의미하다. 그런 것들은 그저 기분 탓일 뿐이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인생이나 실존의, 말하자면 색깔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예컨대, 낙관적인 사람과 비관적인 사람에 있어서 어떤 행위는 서로 다른 의미를, 서로 다른 색깔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 행위의 궁극적인 저자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의 행위의 의지적인 저자인 것은 아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이미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일상적인 의미에서는 모를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불교의 가르침은 진리다.


우리는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의 색깔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나 이외에도 또다른 주체성들이 존재하므로 비교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내가 나의 삶의 색깔을 바꿀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이르면 철학은 할 말을 잃는다. 철학은 이론적이므로 전회의 기준을 설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성, 혹은 영성이라는 개념이 도입되게 마련이다. 종교성이란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절대 긍정하는 것이다. 종교성이란 절대 긍정이다. 이런 맥락에서 철학이 인생의 의미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그것은 철학의 무기력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철학은 종교성에 대해 절대 긍정의 근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그 근거를 이론적으로 제시할 수 있건 없건, 인간이 변할 수 있다면 변할 수 있을 것이고 변할 수 없다면 변할 수 없을 것이다. 종교성은 그 변함의 방법론을 개발할 뿐이다. 


일상적인 의미에서 봤을 때 인생에 의미가 있느냐 하는 질문은 인생에 가치가 있느냐, 혹은 이 인생은 저 인생보다 더 나은 인생인가 하는 물음과 통해 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한 인생이 다른 인생보다 더 나은지, 그렇지 않은지를 말할 수 없다는 점은 자명하다. 각 인생마다 가치의 좌표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예수와 그 옆에 매달린 도둑의 인생의 가치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직접적인 결과는, 그렇다면 윤리가 불가능해 진다는 것일 테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개별 주체성을 넘어서는, 말하자면 인륜성 같은 개념을 만들어 내지만, 그런 것들은 착한 허위일 뿐이다. 


인간의 존재에 가치가 개재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에 기반하여 우리는 종교성이라든지 윤리성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윤리성이라는 개념 없이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그리고 상대적인 의미에서. 예를 들어 우리는 민간인에 대해 군사 공격을 용납할 수 있는가? 말도 안된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을 용인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이렇게 구축된 윤리 이론들은 기껏해야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아마 문제는 우리의 시작을 개별적 주체성에서 찾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간주관성이라는 것이 더 근원적인 사실이라는 점을 인정할 근거가 있는가? 나는 못찾겠다. 그러나 어쨌든 간주관성의 현상에서 윤리성을 다루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윤리는 타자성을 한 축으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정의의 영역에 머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궁극적으로 묻고 있는 것은 각 인생 사이에 가치의 우열을 부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더 나은 삶이란 어떤 것인가?  그리고 절대적인 의미에서 그런 것은 없다고 답했다. 이런 결론은 우리를 불안케 한다. 하나의 대답. 이런 불안을 안고, 실존적 결단을 통해, 외부적인 요구를 나의 주체적인 요구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하이데거는 나치의 대의에 자신의 실존을 걸었던 것일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질문들과 관련된 철학의 병폐를 깨닫게 된다. 절대적 자를 찾으려 하고, 그것을 찾을 수 없을 때는 항시 주관적, 절대적 자로 이를 대체하려 한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말하자면 저 불안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론화하려는 욕구. 사실은 아무 것도 문제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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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날짜가 급히 잡히어, 전전날엔 12시까지, 그리고 전날엔 새벽 두 시까지 짐을 싸고, 다시 아침 6시 반에 일어나 마저 짐을 싸야 했다. 이사 들어가는 곳에 미리 가서 이사짐을 실은 차가 오기를 기다리다 이사 나가는 이전 집주인 노부부와 맞닦뜨렸다. 동네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참으로 오래 살던(할머니의 경우는 77년 동안, 그러니까 평생을 그 집에서 살았단다) 집과 작별하는 중이었다. 건강하고 활기찬 모습이다. 할아버지한테 이 집을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에 빠졌다고 했더니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 열쇠를 받고 문을 열고 들어가니 부엌 탁자에 할머니가 집의 내력 등에 대해 쓴 편지가 있었다. 무거운 책 박스를 나르느라 고생한 이사짐 센터 사람 둘에게 돈을 조금 더 얹어 주었다. 동유럽 출신인 듯 하다. 옆 집 아줌마한테 쓰레기통 내놓는 요일을 물었는데, 음식 쓰레기통을 밤에 내놓으면 여우가 물어간다고 했다. 그래서 이사갈 때 가지고 온 음식 쓰레기 봉투를 가든에 놓아두어 보았다. 과연 담 날 사라져 버렸다. 누구네 마당에 음식 쓰레기들을 죄 흩뿌려 놓았을 것 같다. 민폐 죄송. 아침 무렵엔 가든에서 비둘기와 다람쥐가 와서 각자의 할 일을 열심히 한다. 그리고 저녁 무렵 세상에 지친 듯한 표정의 여우 한 마리가 다리를 절며 가든을 가로질러 갔다. 눈이 마주쳤는데 정말 가련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라. 영국에서 여우 노릇을 하기란 정말 힘든 일이다.

 

이사 다음 날 아침 이전 집에 쓰레기를 비워 치워 주러 갔다. 너무 급히 나오느라 청소도 제대로 못하고, 쓰레기통도 꽉꽉 채운 채로 나왔던 것이다. 일반 쓰레기만 검은 비닐 봉투에 담아 인근 쓰레기장에 갖다 버렸다. 재활용 쓰레기통도 가득 찼는데 샴페인 병이 하나 낑겨져 있었다. 어제밤 샴페인을 터뜨렸다 부다. 우리는 포도주를 땄었다.  

 

 

(사진은 내 방에서 바라 본 가든.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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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이사를 간다. 지금 짐을 싸고 있는 중이다. 생각보다 짐이 많아서 당혹스럽다. 이사를 가는 이유는 집이 좁아져서... 나의 기여 부분이라고 비판받는 책더미들 말고도 여기 저기서 생각도 못했던 것들이 나타난다. 이번에 이사 가는 곳은 지금보다 더 시골스럽고 조용한 곳이다. 1930년대에 지어진 구식 집. 집 보러 갔을 때 거실 소파에 노인 부부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두 세대와 빈틈 없이 함께 했던 집이 이제 이방인을 새로 맞게 된 셈이다. 이 노인 부부는 같은 동네의 단층집으로 이사 간다고 한다. 영국 사람들은 아이가 자기 방을 가져야 할 정도로 자라면 큰 집으로 이사를 하거나 지붕 밑에 방을 새로 만든다. 후자를 익스텐션이라고 하더라. 그리고 아이들이 커서 독립하고 나면 부모들은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한다. 이를 다운사이징이라고 한다. 노인 부부는 진작 다운사이징을 했어야 했는데, 부모대부터 살던 집이라 쉽게 옮겨 가지 못한 것 같다. 마침 읽고 있는 쥴리안 반즈의 책에 이런 귀절이 있다. "Old people died, you sold their flats and houses to people who in their turn would get old in them and then die." 그러니까 집을 늘이고 줄이는 것이 영국 사람들의 인생 사이클을 보여주는 셈이다. 집 보러 다닐 때마다 영국의 중년 남성들은 촉촉한 눈을 한 채, 20여년 전에 이 마을에 들어와서 아이들을 키우고... 중얼중얼 하면서 회상에 젖더라. 반면 그네들의 부인들은 언제나 쾌활했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강은 템즈강까지 이어진다. 나는 그 강을 따라서 런던까지 걸어가 본 적이 있다. 도심까지는 가지 못하고 영국 축구 2부 리그에서 경기하고 있는 풀햄 팀의 경기장까지 갔었다. (이 팀 경기를 두 번 봤는데 아직 한번도 이기지 못했다) 아마 이 동네를 다시 찾게 된다면 이 강가길을 걷기 위해서일 것이다. 강가를 따라, 내가 좋아하는 둠바를 파는 멋진 펍이 있다. (아래는 강가를 따라 이어지는 산책길. 이사가는 것이 확정되고 나서 찍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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