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氣學 - 19세기 한 조선인의 우주론
최한기 지음, 손병욱 역주 / 통나무 / 2004년 3월
평점 :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일 년 전쯤인 것 같고 지금 다시 읽고 있다. 읽은 후 바로 리뷰를 쓰지 않은 까닭은 책에 무척 실망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영감도 얻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일반 독서가들이 최한기나 <기학>을 알게 되는 것은 김용옥이나 그의 책 <독기학설>을 통해서일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기학>에 대한 김용옥의 대대적인 광고는 <기학>의 표지에 인쇄되어 있다. (미리보기에서 볼 수 있다.) 19세기 조선의 한 학자가 서양 문명(자연과학)과 동양 문명의 정점을 두루 꿰면서 두 문명의 융화를 하나의 체계 안에서 성취해내었다고 상상해 보라.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물론 그 광고가 하는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런 융화는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두 문명이 접촉할 때 처음에는 표면적인 이해나 불가피한 오해 등등 이상의 것이 생산될 수 없다. 타 문명의 성취를 소화하는 데에는 절대적인 시간, 한 세대로는 부족한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집단적 인간들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니 그것을 한 개인이?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다. 광고에 넘어간 사람이 있다면 그 잘못은 순전히 그 사람에게 있다.
그러다 얼마 전 문명의 접촉을 주제로 한 BBC 도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18세기 일본의 화가 마루야마 오쿄의 그림을 보게 되었다. 나는 충격을 먹었다. 거기에서는 진정한 동서 문화의 융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본의 선불교적인 정신과 서양 회화의 원근법적 방법이 일체의 위화감 없이 융화되면서 더 없는 정신성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지 from: https://en.m.wikipedia.org/wiki/File:Cracked_Ice_Okyo.jpg )
나는 그동안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저 그림을 보고나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한국과 일본이라는 동아시아의 두 문화가 있을 때 제삼자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일본이 더 매력적으로 보일 수 밖에 없는 요소들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엔 이종의 문화가 융화를 이룰 계기가 없었거나 적었다. 일본에는 그런 계기가 상대적으로 많았고 깊었다. 저 그림이 적나라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진정한 깊이, 진정한 혁신은 동질적인 사회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이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물론 깊이에 대해 다른 태도를 취할 수도 있다. 예컨대 그것은 병적인 것이 아닌가? 아무튼, 어떤 식이든 한국 고유의 사상으로 현대의 문제에 빛을 던져 줄 수 있는 그런 것이 있을까 하는 문제 설정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깊은, 다시 말하면 병적인 숙고를 요할 것이므로.
그래서 최한기의 <기학>을 다시 읽기로 했다. 이 블로그에 리뷰 하나를 올리는 것을 끝으로 이런 류의 관심과는 영영 작별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면서 알게 된, 안된 사실 하나가 있다. 최한기가 동서 문명의 융화를 꾀했다고 한다면 그때 서양의 자연과학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을까? 예컨대, 최한기는 뉴턴을 알고 있었을까? 내가 짧게 조사한 바에 의하면 최한기가 응대한 서양 자연과학자는 뉴턴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이런 이런, 저 광고는 그러므로 완전한 헛소리였던 것이다.
그런데 <기학>을 다시 읽으면서 예전에는 그저 스쳐지나갔던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마 유기체 철학이라 통칭할 수 있는 그런 특성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관점의 변화의 이유는 내게는 자명해 보인다. 즉, 최근에 베르그송의 논문집 한 편을 읽고 있었다는 것. 베르그송에 대해 말하자면, 요즘의 철학적 사유 방식, 분위기에서 보자면 베르그송은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만큼이나 고대적 철학자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베르그송과 최한기는 서로 이웃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베르그송은, 적어도 내 눈에는, 매우 낡은 철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를 원용하고 있는 들뢰즈와 같은 현대 철학자들도 있는 것이다.
용건만 간단히 말하자. 그래서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첫째, 철학에는 영원한 주제라고 할 만한 것들이 있다. 이 영원한 주제는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문화에 공통적이다. 지역적으로, 그리고 시대적으로. 둘째, 어떤, 과거의 철학이나 철학자를 살리는 방법은 오직 그를 "기억"하는 것 뿐이다. 일반적인 관념이기도 하고, 사르트르의 철학의 한 귀결이기도 한 것인데, 나의 존재의 완전한 소멸은 나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모든 이들이 사라져버리는 것일 터이다. 그러니 역으로, 예컨대 베르그송의 철학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그의 철학을 지속시키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컨대 최한기의 철학을 살리는 유일한 방법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발명하는 것이다. 아마 과장 광고도 전략적으로 성공적일 수 있는 이야기 발명의 예일 것이다. 그러나 과장 광고의 문제점은 그것이 어항과 같아서 여차하면 물이 쏟아지고, 그 안의 물고기가 튀어나올 수 있다는 것이리라. 셋째, 현대에 사는 우리는 이미 문명 접촉 후의 성숙의 시기를 충분히 거치고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베르그송도 이질적이고, 최한기도 이질적이고 플라톤도 이질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에 대해 나름의 친숙성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이렇다. "주제를 제대로 이야기하는 방법만 안다면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 (프루스트) 예컨대, 최한기나 베르그송이 시대착오적이고 순진한, 엄밀하지 않은 철학자라고 판정하고 그들을 치운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최한기나 베르그송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 뿐이다. 이야기를 발명해야 한다. 발명은 고유성을 수반해야 한다. 그러므로 발명은 실존을 요구한다. 이야기는 실존을 요구한다. 이야기는 삶을 요구한다. 나는 우리가 최한기에 대해 이야기할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