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무'의 가정 혹은 성과 등을 사르트르 철학의 연속성이라는 관점에서 생각나는 대로 대충 말해 보면 이렇다.

1). 실존이 인식(지식)에 앞선다. 간단하게 말하면 나의 구체적인 경험을 지식으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 헤겔에 대한 반박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존주의의 고유 테제다.

2). 전반성성이 반성성에 앞선다. 전자가 후자를 조건짓는다. 그러므로 근대적 주체(반성적 의식)의 우월성이라는 개념은 해체된다. 

3). 유일한 실재, 혹은 세계의 굳건한 토대는 언제나 즉자이다. 관념론에 대한 반박이다. (물론 여기엔 복잡한 사연이 있다.)

4). 세계(상황)는 언제나 무(의식, 자유, 경험자 등등 무엇이라 부르든)를 전제한다. 실증주의적 이론들에 대한 반박이다.

반면 한계도 명확하다. 즉, '존재와 무'는 존재론일 뿐이라는 것이다. '존재와 무'는 아직 추상적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전반성성에 대한 명확한 규명이 없다, 타자 관계를 시선 이론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등등의 한계를 갖는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존재와 무'가 유연성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존재와 무'가 후기 사르트르, 푸코, 데리다, 라캉, 들뢰즈 등의 철학의 생산적인 부분과 필연적으로 배치될까?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예를 들어 사르트르의 철학 안에 '구조'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 자가당착은 아닐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회성이라는 개념, 전반성성이라는 개념 등등이 더 발전될 필요가 있다. 후기 사르트르의 관심이 이것이었을 것이다. 그는 성공하였나? 나는 아직 모른다. 다만, 그것의 실패가 필연적일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존재와 무'의 존재론에 기반한 윤리학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존재와 무'를 읽으면서 잠정적으로 도달한 결론은, 그 확장에 필연적 장애로 작용할 것이 '존재와 무' 안에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너무 우호적인 스탠스라면 비판적인 스탠스로 바꾸어 다시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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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의 1961년 로마 강연 "Marxism and subjectivity"를 읽었다. (뉴 레프트 리뷰를 새로 구독했는데 온라인으로 과월호를 볼 수 있더라. 피디에프로 출력해서 읽었다.) 철학서를 읽고 감동을 받은 것이 언제였던지! 물론 이 감동은 상당 부분 감정적인 것이다. 사르트르가 숙련 노동자와 비숙련 노동자를 다루는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한국에서 공장 노동자로 살 때 일이 떠올랐고 그때 내가 느꼈던 문제의식을 50여년 전에 파리의 카페에 앉아 글을 쓰던 사르트르가 공유해 낼 수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것이 작가적 상상력의 결과든 지적으로 훈련된 통찰의 결과든 뭐든 나는 기꺼이 사르트르에게서 관념성의 표찰을 떼어주기로 했다.    

나는 이 로마 강연 문서가 이처럼 오랫 동안 잊혀진 상태였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 (프랑스 잡지 "현대"에 실린 것은 1993년이고 "뉴 레프트 리뷰"에 영어로 번역되어 실린 것은 2014년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 강연문은 사르트르의 후기 철학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사르트르 철학의 전회가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물론 이 전회는 실존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로의 개종이라는, 심각하게 유치하고 피상적인 관찰과는 별 상관이 없고 단지 사르트르 철학의 내적 전개 양상만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 전회에 대해 길게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가지 대비만 예시하기로 하자. 즉, self-deception/non-knowing. 아마 이 예시만 보고도 이 전회의 한 측면을 깨닫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서가 중요하다. 사르트르는 이 짧은 문서에서 자신이 '존재와 무'의 철학에서 얼마나 더 나아갔는지, 그렇게 하여 성취한 철학의 의의가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명확하게, 그리고 때로는 아름답게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철학 문장을 읽은 것은 또 언제이던가, 플라톤의 "파이드로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 이후로?)

(그러고 나면 철학의 문제가 남는다. 간단하게 말하면 새로 얻은 개념을 가지고 앞과 뒤를 다시 조명해 보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몇 년 치 장부를 꺼내들고 계산이 맞는지 하나 하나 추적하고 대조해 보는 것과 같다. 새로운 개념에는 항상 이런 번거로운 일이 뒤따를 것이다. 이보다 더 우리의 관성, 보수성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이 있을까? 그러므로 새로움의 의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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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캐머런 총리가 중국의 시진핑 대통령을 펍(한국으로 말하자면 호프집이나 고깃집)에 데려 가서 칲스에 맥주를 마시며 환담하는 장면을 테레비젼에서 보았다. 참 펍 땡기는 장면이었다. 맥주와 함께, 농부 엄지 손가락만큼 두툼한 칲스를 소금을 약간 쳐서 손가락으로 집어 먹는 맛은, 적어도 내게는 영국 문화가 제공해 줄 수 있는 최상의 경험이다. (이번 주말에 나도...)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번 중국 대통령의 영국 방문에 대해 한국 뉴스들에서 결례 이야기가 많은 것 같다. 예를 들면 화장실 표시가 보이는 곳에서 영국 외무부 장관이 중국 대통령을 맞았다든지 하는... 중국의 대통령을 맞는 영국 정치권의 태도에는 분명 온도차가 있다. 캐머런 총리나 왕실은 최대한의 성의를 보이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지만 영국 의회의 지도자들 입장은 또 다르다. 중국에 인권 문제 등 할 말은 해야 한다는 뻣뻣한 입장인 것이다. 그러나 그 뿐일 것이다. 

그래서 화장실 표지 같은 것은 그냥 영국스러운 에피소드로 보면 될 것 같다. 사람들 통행에 지장을 주지 않는 공간을 찾아 파티션 하나 치고, 소파 하나 놓고, 그리고 나서 중국 대통령을 맞은 것 뿐일 것이다. 중국 대통령이 왔다고 다우닝가 수상 관저 출입문 앞에 빨간 융단도 깔더라. 그래봤자 수상 관저 출입문 크기 정도 밖에 안되는 융단이다. 우리가 보기엔 우스울 수 있다. 한때 우연히도 전세계를 재패했던 나라의 수도 모습치고는 많이 소박하지만 그게 또 영국이다. 

엥겔스든가 마르크스가 괴테를 몇 트럭 갖고 와도 셰익스피어 하나를 당해낼 수 없다는 취지로 이야기한 적이 있다. 괴테에게는 없고 셰익스피어에게는 있는 것? 그것은 서민성이다. 소박하고 실용적인 것에 대한 취향. 영국 사람들이 가장 안들으려고 조심하는 말은, 물론 '인종주의자'라는 것이겠지만, 그 다음은 아마 '속물'일 것이다. 영국 문화는 전반적으로 바로 이 소박하고 실용적인 취향에 의해 틀지워져 있는 것 같다. 총리 관저의 소박한 출입구는 흔한 예 중 하나일것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그렇듯 현상에는 이면이 있다. 영국의 서민성은 영국이 계급 사회라는 이면을 갖고 있다. 한국의 경우에는 사회적 이동이 연속성을 갖는다. 예를 들면, 나보다 부자가 있고 그 보다 좀 더 부자가 있고... 등등으로 연속된 수직선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영국에는 그 수직선이 연속적이지 않다. 저쪽 너머에 태생적으로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 비연속성이 너무도 완강하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은 그 너머에 대해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사는 모습과 비교하여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는다. 그냥 자족하며 산다. 한국 사람들이 남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며 아득 바득 성취지향적으로 사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한국 사회에 아직 성취의 한계가 열려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음... 영국 사회에 대해 알면 알수록 나는 영국의 이런 계급 사회적인 면모가 결국은 영국의 발목을 잡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영국의 서민성의 이면은 계급 사회이지만, 둘 사이에는 아무런 필연 관계도 없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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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중국의 대통령이 왔다. 계속 비비씨 머릿 기사로 나온다. 윌리엄 왕자가 시진핑 대통령의 우산을 받치고 있는 장면이 보도되기도 한다. 어마어마한 돈이 걸린 방문이다보니 영국 정부 쪽에서는 중국쪽 심사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무척 조심스러워 한다. 그런데 이것이 좀 지나쳤나 보다. 어제자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에서는 영국 정부가 [미국이나 독일 정부와는 달리] 중국에 너무 발발 기고 있다는 논조의 기사를 여럿 내보냈다. 

영국은 10여 년 만에 핵발전소를 짓기로 결정했다. 중국과 프랑스의 기술과 자본으로 말이다. 장기적인 전력 공급 방안을 마련하고, 이산화탄소 배출 규제도 만족하면서 예산도 아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물론 공짜 점심은 없다. 에너지와 같은 인프라 산업을 해외 자본과 기술에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 옳은가? 핵발전소를 안짓는 세계적 추세에 역행하는 것 아닌가? 영국 정부가 아낀 예산은 10년 후부터 영국 국민들의 주머니에서 바로 빠져나가게 되는 것 아닌가? 등등의 비판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몇칠 전에는 영국 정부가 대체 에너지 관련 기업에 주는 보조금을 삭감한 것이 뉴스가 되었다. 그 결과로 기업 세 개가 파산했고 1000개 가까이 되는 일자리가 날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글쎄, 보조금에 의지하지 않고는 자립할 수 없는 기업이라면 망해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차라리 그 돈으로 기존 가스나 전기 회사에 혜택을 주어 가계의 에너지 비용 부담을 줄여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럴까? 그러나 어쨌든 이것이 현재 영국 정부의 생각이다. (대체 에너지 산업에 대한 보조금 삭제 문제도 이유 의회에서 제기하여 뉴스화된 것이다.)  

아마 어느 나라든 조금만 깊게 들여다 보면 저마다의 문제가 보이게 마련일 것이다. 내가 영국 정치를 바라보면서 거듭 느끼는 것은, 이 나라 정치인들이 참 상상력, 비젼이 부족하구나 하는 것이다. 말이든 뭐든 한국은 창조 경제든 신성장 동력 발굴이든 그런 논의들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영국은 그런 것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영국에서 기껏 의제가 되는 것은 고속 전철을 건설한다, 남의 돈과 기술로 핵발전소를 건설한다 따위이다. 최근 영국 철강 산업은 노동자들을 대량으로 해고하면서 장기적으로는 폐업의 길을 가고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대안 모색은 별로 없어 보인다. 일자리가 준다는 것에 대한 호들갑 수준 이상은 아닌 것 같다. 나는 그걸 보면서 영국 제철소의 설비들만 낡은 것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했다. 분명 과한 생각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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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존재와 무를 읽고 있다. 그렇다는 걸 기록해 두고, 또 느낌 몇 가지를 적어두자.

1. 어떤 의미에서 보면 존재와 무는 기적과 같다. 존재와 무 이전까지 사르트르는 철학자로서 분량이 그리 많지 않고 주제 범위가 작은 책만을 썼다. 그런데 존재와 무는 철학사의 거의 모든 문제를 다루고 있는 백과사전적인 저작이다. 게다가 20세기에는 보기 드물게 체계 철학, 혹은 총체성의 철학을 표방한다. 이런 도약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을까?

2.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를 쓰는 데는 2년 정도가 걸렸다고 한다. 빽빽한 활자로 700 페이지 안팎을 가득 채우는 데 이 정도 시간 밖에 들지 않았다니! 그러나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책에는 자잘한 실수가 넘쳐 난다.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를 출판하고 나서 이 책을 다시 읽어 보았을 것 같지는 않다. 사르트르는 텍스트에 더 이상 손을 대지 않은 것 같다.

3. 존재와 무의 영역 표준판, 그러므로 국제 표준판은 헤이절 반즈가 번역한 것이다. 5년 정도 걸렸다고 하고, 또 거의 혼자 힘으로 한 것 같다. 이 분은 철학자가 아니라 불문학자다. 번역 원고를 인쇄에 넘길 때까지 원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검토한 사람은 역자 한 사람뿐이라고 역자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번역에 많은 오류가 없기를 바란다는 말과 함께. 그러나 그럴 수 있겠는가? 내가 보기에 영역판은 문제가 많다. 문제가 없기를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상황 아닌가? 그런데 진짜 문제는 반즈도 영역판 출판 이후 텍스트에 더 이상 손을 대지 않은 것 같다는 것이다. 반즈는 이후 사르트르 전문가로, 뛰어난 번역자로 명성을 얻었다. 존재와 무의 영역판을 그 상태로 놔둔 채로...

4. 사르트르가 남긴 모든 것은 양녀 아를레트에게 유증되었다. 아마 사르트르는 아를레트가 직접 자신의 저작과 유고를 편집하고 출간하는 실무자 역할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를레트는 그렇게 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사르트르의 이름 아래 박아 놓을 수 있었다. 뭐 제대로 하기만 한다면이야! 그러나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종종 비판을 받는다. 내가 읽고 있는 존재와 무는 아를레트가 교정을 보고 색인을 단 판본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누락된 문장 하나를 발견한 것 같다. 영역판에는 있고 아를레트 교정판에는 없고. 나는 사르트르의 1943년 판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를레트 교정판의 문장은 문맥에 정확히 들어맞지 않으므로 이 교정판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철학서의 텍스트 문제는 유구하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화이트헤드까지. 그러나 이런 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거기에 담긴 사상일 것이므로) 

5. 내가 존재와 무를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모르긴 몰라도 이 책은 20세기에 출간된 가장 위대한 철학서 중 하나로 꼽혀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 책장 위로 먼지가 쌓여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 먼지 아래에는 '여전히' 유망한 출발점이 놓여 있다. 나는 이것을 발견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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