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이곳 영국 뉴스에 영국 100대 기업들이 이사진의 25%를 여성에 할당하는 목표를 채웠다는 기사가 났다. 영국에서 여성 이사 할당제는 법적인 강제 사항이 아니다. 그리고 그 실질을 보면 25%의 대부분은 (상임이 아닌) 사외 이사였다. 숫자만 형식적으로 맞추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어쨌든 다음 목표는 33%라고 한다.
영국 사람들이 이런 이슈에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졌다. 비비씨 사이트에서 이 뉴스의 댓글들을 몇 개 읽었다. 여성 할당제 때문에 능력 있는 남성이 오히려 기회를 잃을 수 있다는 댓글 등 부정적 의견이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몇 개 읽다가 그만 두었다. 비비씨 댓글들은 이런 이슈들에 대해 거의 언제나 보수적이었던 것 같다.
아마 여성 할당제를 양성 평등의 이념 위에서 주장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누구도 자유냐 평등이냐 하는 시대착오적인 논쟁을 재연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 할당제는, 말하자면, 기업 경쟁력,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다. 즉, 별 노력 들이지 않고(세금 쓰지 않고) 산업계에 이용가능한 인적 자원을 두 배로 확장해 주는 정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시행 초기에는 좁은 여성 인재 풀에서 임원급, 이사급을 골라 내느라 고생스러울 것이고 역차별 논란도 피할 수 없을 것이지만...)
이런 정책을 한국도 도입해야 할까. 당연하다. 조사들을 보면 한국이 양성 평등 지수에서 세계 최하위권으로 나오는 것들이 있다. 지금이 여성 우위의 시대라고 착각하고 있는 몇몇 한국 사람들은 이런 기사들에 황당해 한다. 그러나 국회의원 중 몇 %가 여성일까? 국무위원 중 몇 %가 여성일까? 기업 고위 임원 중 몇 %가 여성일까? 여성과 남성 사이 임금 격차 수준은 어떠할까? 등등. 이런 부분에서 한국은 세계 최하위 수준의 성평등 지수(아마 아랍 국가나 북한 등과 경쟁해야 할 수준)를 보일 것이다.
(여성들이 사시나 행시, 공무원 시험에 몰리고 또 두각을 타나내는 현상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이런 임용 제도(즉, 객관적 시험을 통하는)만이 성차별없는 공정한 경쟁을 담보해 줄 수 있다는 것, 둘째, 이런 공정한 경쟁 제도 아래에서 여성은 실제로 성과를 내고 있다는 것. 아마 멍청한 사람들은 이렇게 반론할지도 모른다. 원래 여성이 시험에는 더 강하다. 그래? 그래서 어쩌라고?)
사회를 주도하는 힘들에서 여성이 철저하게 소외된 결과를 우리는 매일 매일 어디서건 확인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전체주의적으로 획일화된 사회. 한국에서 남성-여성 관계의 원형은 전자가 후자를 보호하고 지도한다는 관념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남성 사이의 관계는 권력(지위, 나이, 돈 등)에 따라 철저하게 서열화된 형태를 보인다. 나는 한국 사회 특유의 경직성, 획일성, 피상성, 도착성 등의 근원은 결국 성 문제에 있다고 믿는다. 즉, 한국 사회는 여성을 끊임없이 소외시키며 대상화함으로써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대상화시키는 것이다.
(소외는 한 인간을 총체성이 아닌 성, 나이, 지위, 직업, 출신 지역, 기수 등으로 파악하는 것을 의미하고, 대상화란 그런 특성에 따라 인간을 사회의 전체 가치 구조 안에 배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컨대 '김영미'는 제2의 성(여성)이므로 전체 가치 구조 안에서 주변적인 곳에 위치해야 한다. 그러므로 김영미는 여자라고 보호받고, 여자라고 지도받는다. 그리고 여자이기 때문에 항상 주변부에 머물러야 한다.)
(한국의 이런 가부장적인 구조 때문에 앞서 말한 대로 한국의 고위직 여성 비율이 절대적으로 형편없게 된다. 다른 두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첫째는 박근혜 정권이다. 박근혜 정권의 통치 구조는 철저한 획일성, 철저한 서열성에 기반하고 있다. 그 서열 구조에서 박근혜는 정점에 있고 그러므로 절대적인 힘을 갖는다. 그러면 박근혜의 절대적인 힘의 근원은 어디일까? 물론 국민이다. 서열의 절대성을 내면화하고 있는 국민이다. 박근혜가 노령층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얻는다는 것은 노령층이 서열의 절대성(이 경우는 나이와 성별)을 내면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박근혜가 경북이라는 지역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얻는다는 것은 경북 지역이 서열의 절대성을 내면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쉽게, 그러므로 경북 지역이 매우 고령화된 지역이거나 매우 보수적인 지역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여기서 보수성은 무엇보다도 여성의 낮은 지위로 드러날 것이다. 서열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성을 근원적 범주로 파악하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즉, 김영미는 무엇보다도 먼저 '여성'으로, 인간이기에 앞서 '여성'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서열의 절대성이 성립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여성을 대상화하지 않고는 서열이 가능하지 않다.)
(두 번째는 한국의 걸그룹들이다. 현대 사회에서 여성을 절대적으로 대상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남성들은 현실에서 끊임없이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인간으로서의 '김영미'와 마주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가부장적인 구조에서 자신의 수컷성을 충족시켜 줄 대상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것이 곧 걸그룹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걸그룹을 소비하면서 한국의 가부장적 구조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것이다.)
결론. 한국은 어마 어마하게 남성 우월적인 사회이다. 그리고 나는 요즘 사람들이 헬조선이라고 부르는 것의 근원에는 바로 성의 문제가 놓여 있다고 믿는다. 문제의 근원 중 하나가 그것이라면 해답 중 하나도 거기서 나올 것이다. 거기서 나와야만 할 것이다.
(솔직히 이 포스팅을 쓰게 된 계기는 메갈리안이라는 사이트였다. 나는 (일베에 들어가 보았던 것처럼) 메갈리안에 들어가 보았다. 쓰레기라면 쓰레기다. 주제는 한국 남성 혐오다. 주로 서양 남성의 성기와 한국 남성의 것을 비교하면서 한국 남성을 조롱하고 있었다. 이 경우에 한해 말하면 솔직히 두 가지 흐름이 뒤섞여 있는 것 같았다. 하나는 한국 남성들에게 스스로를 되돌아 볼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제로 서양 남성을 선망하는 것이다. 전자가 운동이라면 후자는 자신을 또다시 대상화하는 덫이다. 실제로 메갈리안 이용자들은 이 두 극 사이에서 진동하면서 때로는 후자에 휩쓸리기도 하고, 또 그 모습에 스스로 혼란스러워 하기도 하는 것 같았다. 수 많은 쓰레기 글들이 있고, 때로는 성기 잘린 사진과 같이 눈으로 감당하기 힘든 것들도 있고, 매우 불철저해 보이는 글들(스스로를 대상화의 덫에 빠뜨리는 글들)도 많았다. 이러한 한계의 많은 부분은 미러링이라는 방법론 탓이라고 생각한다(말하자면 일베가 여성 혐오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남성 혐오를 표출하는 것). 요컨대, 왜 항상 여성을 남성의 안티테제로 설정하는 것일까? 그러나 그럼에도 미러링이 아니라면, 예컨대 단순히 논리나 도덕적 훈계를 이용한다면 한국 남성이 꼼짝이나 할까? 한국처럼 극단적으로 남성 우월적인 사회라면 극단적인 남성 혐오 담론이 튀어나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고, 오히려 메갈리안이 너무 늦게 등장했고, 방법론적으로도 너무 온건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는 메갈리안을 긍정적으로 본다. 메갈리안이라는 사이트의 모든 부작용을 안고서 나는 메갈리안을 긍정적으로 본다. 예를 들어 메갈리안은 한국 남성 혐오를 부추기면서 결과적으로 물질 지향, 외모 지향을 옹호하고 있지 않은가? 서양 남성에 대한 환상을 유포하고 있지 않은가? 글쎄... 그것이 이미 우리 사회의 모습 아니던가? 서양 남성의 거대한 성기 사진에 대해 침을 질질 흘려대는, 메갈리안 여성들의 댓글이 좍 달리는 것이나 걸그룹들을 소비하는 우리 남성들의 모습이나 이 어마 어마한 가부장적인 구조에서는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어느 쪽이든 돈과 능력이 되면 자신들의 환상을 실현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오히려 메갈리안들은 자신이 하는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의식하고 있는 반면, 한국 남성들은 추호도 그런 의식이 없다. 말하자면 한국 남성들은 자신을 비출 거울을 갖고 있지 않고, 그러므로 메갈리안의 미러링은 이 경우 아주 유효한 방법론인 것 같다. 고백하자면 나도 메갈리안의 글들을 통해서 다른 옵션, 다른 시각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이 블로그에 쓴 글들 중에 남성 중심주의를 드러내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나는 이제 깨닫고 부끄러워 하고 있다. 관성은 도발에 의하지 않고는 깨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