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마르크스가 그랬다던가, "나이가 들어가면 사람이 유해진다고 하던데, 그게 맞는 소리인가?" 마르크스가 자신의 말을 긍정하고 있는 것인지, 부정하고 있는 것인지, 혹은 그것에 당혹해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나도 어제 아내에게 비슷한 소리를 했다가, 내가 나이가 들면서 유해진 것인지 어떤지 확정할 수 없어서 작은 당혹에 빠졌었으니까... 어쨌든 내 말의 의도는 이랬다. 예컨대, 나는 예전에 뮤지컬을 가장 저열한 예술 쟝르라고 생각했다. 스펙타클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예술이므로. 그래서 그동안 보았던 위키드, 레미제라블, 파우스트 등등은 내게 죄다 시간 낭비이자 돈낭비에 불과했다. 지금 나는 내가 그런 고정관념에 빠져 있었다는 점을 아쉬워 한다. 그냥 마음을 열어 놓고 즐기면 되었을 일을... 이런 강박을 찾으려면, 슬프게도, 너무 많다. 예를 들면, 모로코 여행 같을 때, 그곳 사람들에게 당하지 않으려고 자신을 너무 꽁꽁 싸맸었다든지 등등... 


하이데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철학의 희화화를 경계한다. 즉, 그 말장난을. 나는 하이데거를 서양 철학사에 대한 가장 탁월한 교사라고 생각하지만, 그의 후기 저작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을 읽어보지도 않고, 말장난일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사르트르적 의미에서 말하는 코기토를, 혹은 어떤 경험적 기초를, 혹은 여하한의 검증 방법을 떠나 있는 영역(흔히, transcendental하다고 하는) 주변에선 무성한 말들이 자유방임적으로 자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나름 꼼꼼하게 하이데거를 읽으면서(<예술 작품의 기원>), 나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고 있다고 느낀다. 그것은 사실 <존재와 시간>과 단절적으로 놓여 있지 않다. 똑같은 관점에서 보면서 다른 강조점을 주고 있을 뿐이다. 그 둘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하이데거의 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다고 느낀다. 내가 배운 것은 기술description에 절대적 가치를 두는 것이 우둔한 방법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고집하던 또 하나의 편견이 스그러져 가는 것 같다. 


경험의 확장은 시간 속에서 벌어진다. 그래서, 이제 나도 나이를 먹어서... 라는 말과, 좀 더 경험을 해보니... 라는 말이 비슷한 용례로 쓰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 관건은, 이런 평균적인 의미에서의 시간과 전혀 다른 데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열려있음'이라는 말로 잘 표현될 것이다. 아이는 가장 잘 열려있다. 그러므로, 어쩌면 나이가 듦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아이의 시간성으로의 회귀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운명이라는 것은 (내가 과거의 나에 대해 한탄하는 것은 운명의 흔한 에피소드이다), 바로 그 열림과 닫힘의 변증법적 운동을 지시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아마 그 상대적으로 견고한 닫힘 속에 놓여있음을, 생물학적 죽음 등과 상관없이, 우리는 죽음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까뮈는 <패스트>라는 책에서, 아침마다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어떤 노인에 대해 기술한다. 그리고 묻는다. 그는 성인일까? 이 질문은 까뮈를 당혹케 하고 독자를 당혹케 한다. 아마 우리는 이제 이렇게 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지 않아, 성인은 살아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니까. 우리는 지금 객관적인, 평균적인 시간성과 전혀 다른 의미에서의 시간성이라는 개념 위에서 이런 잡담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쉽게 영원에 대한 논의로 이끌어져 들어가게 된다. 영원이란 삶이고 열려있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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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 분석과 서술의 기초 - 여덟 번째 개정판
실반 바넷 지음, 김리나 옮김 / 시공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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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스킨에 대한 영화를 보고 생각이 나서 읽은 책. 미술 미평에 관해 많은 것을 아우르고 있다. 논문 쓰는 법, 실제 비평문의 예들, 간단한 사조사, 등등, 한 권의 책이 담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 이상을 담고 있다. 특히 좋았던 것은 학생들의 비평문을 싣고 있다는 점이다. 그 중의 한 편은 아주 인상적이었고 내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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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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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에 이 책을 첫 번째로 읽은 것은, 지금이 두 번째이고, 중2때였던 것 같다. 무척 충격적인 책이었다. 루팽 대 홈즈 수준의 독서에서 넘어갔으니 그랬을 수도 있는데, 첫 문장의 장황함, 충격적일 정도로 적나라한 인간 실재에 대한 묘사, 그러다 후반부의, 전혀 다른 분위기의 사상범들, 늙은 현자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신약에 대한 강독까지... 이런 것이 소설이구나 하는 깨달음에서, 이런 것이 소설인가 하는 의구심 사이를 오가게 하는, 쉽게 갈피를 잡기 힘든 작품이었다. 


이번에 다시 읽었는데 충격은 여전했다. 톨스토이 개인의 주관이 불쑥불쑥 끼여드는 것에 대해서는 선호나 평가가 엇갈릴 수 있겠지만, 그 점을 제하고 보면 이 책은 시간의 풍화를 전혀 겪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19세기에 톨스토이가 이 책을 출간하여 중2인 내가 그 책을 읽으면서 느꼈을 시간적 괴리감과 현재의 내가 부활을 다시 읽으며 중2적 시대를 되돌아보았을 때 느끼게 되는 시간적 괴리감 중 어느 것이 더 클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말도 안되는 엉뚱한 이야기일까? 종종은 우리가 사는 지금의 시대는 참으로 노회한 시대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부활의 곳곳을 장식하는 이상주의적 귀절들은 때로는 참을 수 없는 위화감을 주지 않는가? 그러나 아이러니는 부활은 철저하게 사실주의적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상은 어디에서 배어나오는가? 그것은 도저한 사실주의와 노회함 속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 부활이라는 작품은 이에 대해 긍정의 답을 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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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성에 관하여 - 개정판 비트겐슈타인 선집 6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이영철 옮김 / 책세상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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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얄팍한 책이지만, 읽는 데 정말 정말 오래 걸렸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이 책이 난해하다든지 심오하다든지 해서라기보다는, 솔직히 말해서, 지루해서 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이런 지루함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비트겐슈타인이 죽기 직전까지 써내려간 철학적 단상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이 철학자의 최종적인 검수가 이루어지지 않은, 말 그대로 날 것의 노트 묶음이다. 하나의 주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집요하게 고찰하고 있다지만, 반복은 불가피하고, 그 집요한 고찰들에서 빼어난 영감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독자 입장에서는 읽는 내내 긴장감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철학하는 방식을 알게 해준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는 있다고 본다. 


책의 내용은, 무어라는 영국 철학자가 쓴 일련의 논문들에 대한 코멘트들로 구성되어 있다. 철학을 희화화할 수 있는 사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무어는 "나는 여기 내 손이 있다는 것을 알아"와 같은 명제에서 우리 의식 밖에 세계가 존재한다는 명제를 도출해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비트겐슈타인도 여타의 철학자들에 동조하여 무어의 증명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한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에게 독특한 것은 무어가 '알다' 라는 말을 오용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즉, 무어가 제시한 명제들은 '알다'라는 말과 의미롭게 어울릴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도, 그 확실성을 부정할 수 없는 그런 명제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예컨대, "여기 내 손이 있어"나 "지구가 존속하고 있어"와 같은 명제들. 


내 관점에서는 비트겐슈타인에 별로 동조하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도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의미로움'에 대한 기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예컨대, 이른바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랭귀지 게임이라는 기준점을 도입하여, 예컨대 무어가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알다' 라는 말은 오용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철학 논고>에서도 기준점은 다르지만 똑같은 짓을 했다. 나는 사고에 자꾸 제한을 두려는 이런 검열관적 태도에 반감이 있다.) 그러나 오용을 말하려면 어떤 특정한 사용에 특권적 권위를 주어야 한다. 이 경우 비트겐슈타인에게 그것은, 참 혹은 거짓이 될 수 있는 진술이라는 의미에서의 명제와 어우러져 사용될 수 있는 한에서의 '알다'의 용법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러한 용법의 '알다'에 특권을 주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예컨대 비트겐슈타인은 "나는 여기 내 손이 있다는 것을 알아"와 "나는 지구가 존속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를 동일한 기준에 의해 '알다'라는 말을 오용한 것이라고 판단하지만, 이 두 문장의 기이함은 각각 다른 이유에서 연유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의의가 사태의 구체성에 우리의 주의를 돌리게 한 것이라 한다면, 그 사태의 구체성은 더욱 구체적인 구체성이어야 할 것이다. (이 책에는 재판정의 비유가 허다하게 나온다. 비트겐슈타인은 판사의 역할을 한다. 반면 나는 피고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본다. "말은 그렇지만, 법에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세상에나!")


(인간 비극. 소년이 얼마나 빨리 늙는가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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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나 스마트폰에서 BBC를 시청할 수 있는 앱인 BBC iPlayer 영화 섹션에 한국 영화 세 편이 올라와 있다. (아마 한국에서 iPlayer를 이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악인전, 공작, 그리고 버닝. 이 섹션에 올라와 있는 외국어 영화들이 별로 없기 때문에 한국 영화가 세 편이나 올라와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왜인지는 모른다. 어쨌든 기분 좋은 일이다.


악인전은 그렇고 그런 깡패 영화다. 마동석의 캐릭터 때문에 선택된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마동석은 기존의 동양계 남성 배우와 전혀 다른 스타일의 배우이다. 서구권에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매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공작은 매우 우아한 첩보물이다. "팅커, 테일러..." 같이, 총격씬이나 추격씬을 필요로 하지 않는 스타일의 첩보물. 르 카레 원작의 작품들보다 훨씬 좋았던 것 같다. 실화에 기반한 것이니 만큼 인물들 사이의 갈등이 매우 자연스럽고 필연적으로 보인다. 많은 한국의 작품들에는 서구권 작품들에서 찾기 힘든 매력이 있는데, 이 작품도 그렇다.


버닝.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작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나는 보면서 까뮈의 이방인을 떠올렸다. 이방인은 형이상학적 소설이다. 그런 고로 주인공 뫼르소가 소설의 마지막 몇 페이지에서 인격적 전변을 겪는 것도, 납득은 안되지만 그냥 넘어가준다. 어차피 우화 아닌가, 하면서. 그러나 버닝에서의 종수의 인격적 전변은 그런 식으로 양해되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이 작품의 핵심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어느 정도 전형적이기는 하지만, 벤이라는 인물의 성공적 형상화가 이 영화의 주제에 기여한 바가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훌륭한 감독이 만든 훌륭한 영화다.


악인전을 제하고 나 나름대로 평가해 보자면 역시나 한국의 작품들, 한국의 영화들의 장점은 리얼리즘에 있는 것 같다. 리얼리즘은 쉬운 쟝르이기도 하고 쉽지 않은 쟝르이기도 하다. 한국의 문화가 고도화될수록 리얼리즘에서 탈피하려는 유혹이 커질 것이다. 즉, 그러할수록 리얼리즘은 고수하기 어려운 것이 되는 것이 일반적인 여정일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한국은 일반 문화 대중과 문화 창작 집단 사이의 괴리가 크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에 이런 이반이 필연적일 것 같지는 않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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