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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애플의 개발자 컨퍼런스를 챙겨 보았다. 스티브 잡스가 프리젠테이션을 진행한 부분만. 행복한 배우다. 청중들이 기꺼이 박수와 환호를 준비하고 있다.

2. 애플만이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뭘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것 같다(아마 구글도). 애플은 앨런 케이의 "The best way to predict the future is to invent it"이란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 같다. 애플은 자신의 방식대로 시장의 규칙을 바꾸어버렸고 애플의 속내를 알 수 없었던 다른 기업들은 허둥댔다. 항공모함같았던 노키아는 빠르게 가라앉고 있다.

3. 그렇다 해도 아이튠즈,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아이클라우드로 이어지는 애플의 행보는 놀랍다. 너무 일관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애플은 물리적 플랫폼(각종 기기들)과 운영체제, 생태계로서의 추상적 플랫폼 모두를 갖고 있는 유일한 기업이다. 구글도, 마이크로소프트도 삼성도 그 세가지 모두를 갖고 있지 못하다.

4. 애플은 제품에 미적 취향을 불어 넣으려 노력한 거의 유일한 기업이다. 애플의 기기들은 단순하며 직관적이며 성적이며 선적이다. 애플의 이러한 특성은 창업자의 인생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 같다. 스티브 잡스는 선에 심취해 있었으며 워즈니악이 디스크 드라이브의 배선을 축약하려고 머리를 짜내는 동안 케이스를 더 멋지게 만들기 위해 궁리하고 있었으며 제록스 파크에서 본 폰트들에 미쳐 날뛰었으며 마우스나 아이폰의 버튼이 하나여야 한다고 고집했다.  

5. 단순하고 직관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 사용자 인터페이스의 혁신자들이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를 살펴 보면 답이 나온다. 앨런 케이나 네그로폰테는 아이들과 컴퓨터를 연결하는 프로젝트에 자신들의 삶을 바치고 있다. 디지털 기기들은 인간화되어야 한다. 즉, 사용함에 있어 부대낌이 없어야 한다. 이번 컨퍼런스에서 스티브 잡스는 "It just works(그냥 됩니다)"를 연발했다. 나는 서핑을 하다가 "아버님 댁에 아이패드 놔 드려야 겠어요"라는 문구를 읽고 미소를 짓는다.

6. 스티브 잡스는 피카소를 인용해 "유능한 예술가는 베끼지만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의 뜻은 이렇다. 첫째, 전적인 오리지널리티는 없다는 것이다. 창의적인 것은 항상 기존의 성과물 위에 기반하고 있다. 뉴턴도 그런 말을 했고 베르길리우스도 그런 말을 했다. 애플이 혁신적인 기업이라고 하지만 애플이 전적인 혁신을 산업계에 도입한 것은 아니다. 누구나 알다시피. 둘째, 베낀 것과 훔친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베낀 것에는 위화감이 내포되어 있지만 훔친다는 것은 전적으로 자기화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제프 버클리의 "할레루야"는 제프 버클리의 대표곡이다. 원곡은 물론 레오나드 코헨의 것이지만 제프 버클리가 그것을 "훔쳤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전적으로 자기화하는 것이다.

7. 애플의 클라우드 서비스인 아이클라우드가 새로운 기술은 아니다. 나는 드롭박스를 통해 리눅스에서 작성한 문서를 윈도에서 보고 아이폰에서 수정하는 일을, 마치 로컬 폴더 속의 문서 다루 듯이 한다. 그러면 애플이 이 서비스를 도입한 것에 무슨 커다란 의미가 있다는 것일까? 물론 사용자 편의가 증대된다. 그리고 애플의 생태계는 더욱 공고해 진다. 예를 들면 내가 아이폰을 갖고 있다면 이제 테블릿으로 삼성이나 모토로라를 선택할 리가 없다! 아이클라우드를 통해 애플의 모든 기기에서 모든 것을 공유할 수 있는 마당에!

8. 이 모든 것은 애플이 아이튠즈 등의 생태계, 아이패드 등의 디지털 기기, 오에스텐 등의 운영체제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아이클라우드를 통해 애플이 그리고 있는 원의 마지막 조각이 맞춰 진 것 같다. 그래서 그 비젼이 놀랍다는 것이다.

9. 물론 한국 시장에서 애플의 힘은 미약하다. 한국 기업들이 벽 안의 갈라파고스를 짓는 것이 가능할 것도 같다. 그러나 세계 시장에서는? 아이폰을 갖고 있는 사람이 갤럭시탭을 사는 것이 바보같은 일이 되어 버렸다. 남편이 아이폰을 갖고 있는데 아내가 갤럭시를 사는 일이 바보같은 일이 되어 버렸다(아이메시지도 그렇고).

10. 결론? 애플이 쌓은 벽의 엄청난 두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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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스티브 잡스와 리버럴 아트
    from weekly님의 서재 2011-06-19 16:05 
    아래 포스팅(http://blog.aladin.co.kr/weekly/4850380)의 4번 항목은 과장이라고 생각할 사람도 많을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다시피 스티브 잡스는 기판의 회로 배선처럼 사용자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도 아름다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어쩌면 약간 미친 CEO임에 틀림없다.(공학적으로 우수한 것은 미학적으로도 우수하다는 것을 많이들 경험해 보았을 것이므로 그러므로 그리 튀는 얘기가 아
 
 
2222 2012-06-05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충분히 가능합니다. 조금 동떨어진 내용이지만 저같은 경우엔 폴더이름 하나 짓는데도 10분, 심하게는 하루종일 걸릴때도 있습니다. 디테일하게 설명하긴 어렵지만, 단순히 New Folder 가 아닌 윈도우에 있는 모든 폴더들과의 관계나 생성 원칙...으..도저히 설명이 안된다 ㅜㅜ. 여하튼 기판이 아름다워야 한다는건 납득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감적인 부분이 심화되면 어떤 현상이 발생하느냐 하면...회사에서 쓰는 PC 의 용도가 문서작성용이라면 PC가 고사양일 필요도, 클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대개는 PC 사양을 업그레이드 하길 바라는데 저는 반대로 다운그레이드 하길 원해 주변인들에게 미쳤다는 소리 듣습니다.

weekly 2012-06-06 05:54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좋은 댓글들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가 예전에 썼던 글들을 다시 읽어보게 되었네요.
폴더 이름을 짓거나 폴더 구조를 정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이는 것과 기판을 아름답게 디자인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비슷한 성향, 그러니까 일종의 편집증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편집증과 더 나은 것을 생산하려는 욕구는 별개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저는 항상 편집증을 존중하려고 합니다. 2222님께서도 비슷한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Eva Vertes looks to the future of medicine (from TED)

나는 문제 해결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DNA 구조를 해명하는 과정을 발견자인 제임스 왓슨이 매우 주관적인 관점에서 기록해 놓은 "이중나선"이란 책을 무척 좋아하고, 지금도 반복해 읽는다. 파인만의 "농담도 잘 하시네요!"가 내 작은 책장의 한 자리를 언제나 굳건히 지키고 있는 이유도 같다. 이런 이야기들에는 흔치 않은 모험과 화자의 독특한 개성이 담겨 있다. 재미있을 수 밖에 없다.

에바 베르테스의 TED 토크에도 강연자의 개성과, 문제 해결 과정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지적 모험이 가득 담겨 있다. 나는 이 강연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았다.

지적 모험이라는 관점에서 이 이야기를 들어보자. 19살 소녀 에바의 특출난 점은 그가 질문을 던질 줄 안다는 데 있다. 예를 들면 암은, 많은 경우 손상된 조직에서 발생한다. 음주로 손상된 간이나 흡연으로 손상된 폐에서 암이 발생하는 경우가 그렇다. 에바는 여기서 잠시 멈추어 서서 왜 그럴까, 하고 묻는다. 그리고 그에 대한 자신의 답을 제시한다. 즉, 가설을 세운다. 그런데 에바의 가설은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심오하고 비젼이 넘치는 것이다. 에바는 암이라는 개념 자체를 재정의한다. 즉, 에바는 암을 인체의 자가 치료 과정의 하나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심오하고 아름답다. 나도 강연을 보면서 절로 감탄사를 내뿜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떤 개념이 심오하다거나 아름답다고 하는 것과 그것의 진리성은 별개다. 아마 에바의 가설도 그 명쾌함에서 오는 미적 외관을 끝까지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이 가설이 매력적이라는 것은 후속하는 사고와 연구의 원천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좋은 질문이란, 혹은 좋은 가설이란 생산적인 것이다.

에바는 하나의 질문이, 하나의 가설이, 하나의 해결이 다른 수 많은 질문들을 낳을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연구에 자신의 인생 전부를 쏟아부어야 할 것이라고, 웃으며 이야기한다. 이 소녀는 자신이 터를 크게 잡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얘기다. 하, 19살 나이에 인생을 걸 연구 테마를 잡았다고 확신하다니!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열정일 것이다. 그리고 열정은 하나의 환경일 것이다. 에바라는 이름을 물려준 에바의 할머니는 헝가리 태생의 화학자였다고 한다. 에바는 혈연으로 연결된 동명의 여성 과학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가운데 의학 서적을 학생의 눈이 아닌 연구자의 눈으로 읽는 습관을 들였을 것이다. 또, 어린 나이에 의학계의 큰 상을 탐으로써 자신의 노력에 적절한 보상이 주어지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성공보다 더 성공적인 것은 없다"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용케도, 암에 대해 연구하려거든 이러 저러한 학위를 따야 한다, 그러니 질문을 멈추고 차분히 교과서를 읽으라고 조언하는 세상에 밝은 어른들을 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열정을 지속시킬 수 있는 환경을 성공적으로 강화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에바가 조성한 환경에는 우연적인 요소들도 많지만, 중요한 것은 에바가 그 우연적 요소들을 자신의 환경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에바의 강연을 들으면서 가장 놀라운 점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에바 스스로도 그 점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에바가 자신의 가족사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강연을 시작한 이유가 바로 그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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