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어 공부는 올해 시작한 가장 도전적인 일 중 하나였다. 특별히 러시아어를 공부해야 할 하등의 절실한 이유는 없었다. 다른 언어들처럼 열광할 만한 대중문화가 있는 것도 아닌 것같고, 사회적으로 대접받기 위해 필요한 외국어의 부류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다만 차이코프스키를 좋아하고 고리키와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을 읽어봤고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 영화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 덧붙인다면 최근의 한반도 정세 속에서 러시아의 입장이나 역할에 대해서 잠시 생각했다는 것 정도를 덧붙일 수 있을까.
여하튼 여름 정도부터 러시아어 공부에 발을 담갔다. 내가 가장 먼저 한 건 유튜브로 러시아어 학습 동영상들을 찾아본 것이다. 유명하든 유명하지 않든 일관된 학습 시리즈를 가지고 있는 유튜버들의 학습 동영상과 어학원에서 제공하는 샘플 학습 동영상들, 그리고 네이버에서 제공하는 오디오 파일 등 닥치는대로 시간나는대로 들었다. 그와 더불어 현재 가장 많이 팔리는 러시아어 교재를 부록 동영상과 함께 공부했다.
투자한 시간은 상당했다. 그런데 러시아어에는 초기에 넘기 쉽지 않은 벽이 있었다. 여느 외국어 학습에도 그런 고비가 찾아오지만, 러시아어는 유독 심했다. 명사나 형용사에 남성, 중성, 여성 등 성 구분이 있다는 건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정작 엄청난 벽은 격 변화였다. 우리 말은 격 변화가 따로 있지 않고 주격이면 '은/는', 목적격이면 '을/를' 같은 조사를 붙여주는 걸로 간단히 끝인데, 러시아어에서는 주격, 생격, 대격, 여격, 전치격, 조격 등 무려 6개의 격 변화가 있어서 하나의 명사나 형용사가 이런 격 변화에 따라 모양이 변하는 것이었다. 이건 너무 심했다.
첫 번째 교재에서 엄청난 혼돈을 경험하고 정신을 못차렸다. 뭐가 뭔지 잘 모르는 이 상태에서 아마 포기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이왕 시작한 일을 스스로 포기한 적은 거의 없는지라 어떻게 러시아어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 결과로 두 가지 가닥을 잡았다. 일단 문법을 자세히 다룬 책을 구할 것, 그리고 이제부터는 양에 구애받지 말고 하루에 가볍게 소화할 수 있을 만큼만 찬찬히 공부할 것.
그렇게 정하고 기존 교재들을 찬찬히 검색하고 난 결과, 선택한 책이 이것이다. 이 책은 문법 중심이다. 그런 점에서 일단 만족했다. 그런데 이 책이 더 좋았던 이유는 이 책이 복잡하고 낯선 격변화는 약간 뒤로 미루고 어느 외국어 공부에서도 가장 먼저 하는 성, 수, 동사부터 순서로 잡고 있다는 점, 그리고 중요한 격변화 중에서도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전치격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을 시작하고서 하루에 평균 채 페이지를 보지 못했다. 이 책은 문법 설명 후 연습문제가 상당한 비중으로 수록돼 있다. 이전 교재에서는 연습문제는 귀찮다고 거의 풀지 않았는데, 이 교재에서는 거의 연습문제 중심으로 공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부분에 에너지를 많이 쏟고 있다. 몇 문제 풀다가 그날 힘들다 싶으면 그날은 공부를 접기도 했다. 또 어떤 날은 이해가 잘 돼서 평균 이상의 문제를 풀기도 했다. 연습문제를 풀면서 끊임없이 앞의 문법 설명을 계속 뒤적거리면서 풀었다.
하루에 적절한 분량만 공부하면서 쉽게 지치지 않고 하루 하루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그때그때 네이버사전을 찾으면서 단어도 조금씩 외우게 됐다. 처음엔 러시아어 자판도 제대로 설치못했는데 이제는 웬만큼 자판이 익숙해져서 단어 찾기는 전혀 어렵지 않게 됐다. 모르는 단어는 사전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니 러시어어 공부가 그때부터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
이 책 공부를 시작한지 이제 한 달 정도 됐다. 대략 330페이지 정도되는 분량 중 오늘 겨우 49쪽 진도를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내실있게 공부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한 번쯤 다 보려면 앞으로도 6개월 가량 더 걸리지 않을까 싶다. 오랜 시간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때쯤이면 불과 몇 달 전까지 전혀 몰랐던 러시아어가 친숙한 외국어의 하나가 돼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