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시의 퇴폐와 작은주체
신범순 지음 / 신구문화사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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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전에 이 책의 저자 신범순의 평론집 <글쓰기의 최저 낙원>을 구해서 몇 편의 평론을 읽어본 바 있다. 90년대 초반에 나온 그 평론집은 그 당시만 해도 지식 대중의 관심을 어느 정도 얻었던 문학평론의 후광을 입고 언론의 주목을 받은 책이었다. 그 당시 새롭게 떠오르던 신진 평론가 권성우, 이광호의 평론집과 비슷한 시기에 나온 이 책이 내게 의미롭게 다가온 것은 저자의 글쓰기가 내가 익숙해 있던 평론가들의 글쓰기와 미묘한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일급 화제였던 계몽을 계몽적인 방식으로 논하는 강한 주체들이 위세를 떨치는 지점에서 신범순의 글쓰기는 그들과는 다른 입지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신범순의 문화 분석, 시 비평에서 돋보이는 것은 그의 글이 읽어내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글이 난해한 개념이나 어휘를 동원하기 때문이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그의 호흡법에 있다. 그의 글은 일목요연하게 떨어지는 글이 아니라 꽤나 유장하고 때로는 한국어의 문법을 벗어나 있는 것같으면서도 그것에 투철한 글이다. 그것은 시 비평가로서의 그의 글쓰기 전략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바슐라르의 현상학적 방법에서 우러나온 바슐라르의 아우라를 입은 글쓰기를 그가 추구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의 글이 김현 글을 연상시키는 구석도 바로 이런 지점과 닿아 있다고 생각된다.

신범순의 이런 글쓰기는 너무나 단정적이고 교조적인 목소리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신선한 하나의 목소리였다. 물론 그는 계몽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날 것 그대로가 아니라 그의 사유를 통해 변형된 방식으로 되묻는다. 그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계몽적이지만 억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문제의 해결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한국 현대시의 퇴폐와 작은 주체>라는 다소 난삽한 느낌을 주는 제목은 생소함을 주지만 이 책에 담긴 하나 하나의 글은 한 권의 책을 위해 쉽게 주조된 글이 아니라 그가 긴호흡으로 차근차근 써 온 글이라는 점에서 글땀 내음이 물씬 풍기는 책이다. 그는 학문적 탐구와 동시대 비평을 오가면서 그동안 평가 절하 내지 보류, 무시되어 온 퇴폐의 위상을 끌어올리며 진지한 탐구의 주제로 삼기를 희망하고 있으며, 시의 주체를 하나의 동일한 주체로 보는 관점을 벗어나 한 편의 시에서도 다양한 주체가 등장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우리의 일상의 세세한 결에 대한 점검, 확인을 통해서 걸러지는 작은 주체들에 관심을 갖기를 당부하고 있다.

그가 다루는 퇴폐, 주체의 문제들은 그동안 경시되거나 일방적 시선으로만 이해되어 온 것들로서, 그가 글을 통해 보여주려고 한 것처럼 진지하게 탐구되어야 할 문제일 것이다. 그런 작업을 하자고 외치는 그의 목소리에서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건 그가 처한 상황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가 입론으로 삼고 있는 니체와 들뢰즈의 어떤 담론들이 아직 이 땅의 의식 지평에 이제야 서서히 떠오르고 있으니 말이다. 따라서 그가 국문학자로서는 드물게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을 번역해 보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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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장환 전집
김재용 엮음 / 실천문학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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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해금 조치 이후 북한과 관련된 시인들의 전집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비교적 초창기에 나온 김기림이나 정지용, 그리고 그 후 백석, 이용악의 전집이 나오고 오장환의 전집까지 나왔다. 그러나 아직까지 임화의 전집이 나올지는 미지수이다. 그는 남과 북에서 공히 미아 내지 기아 취급을 받는 유일한 시인일 것이다. 임화의 전집까지 나온다면 우리의 근대 문학은 좀 더 온전한 형태로 복원될 것이지만, 지금으로써는 그 가능성 여부가 불투명한 지대에 놓여 있다. 아마 어떤 형식으로든지 남북통일의 제도가 성립되면 그때 가서야 임화까지도 복원될지 모른다.

예전에 불완전한 형태로나마 오장환 전집이 나온 바 있는데, 이번 전집에는 소련 찬양, 북한 찬양의 기색이 농후한 시집까지 덧붙여져 있다. 사회주의 찬양의 이념시가 공공연한 출판물의 형태로까지 제작될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의 위대함, 그 잡식성의 증후가 아닐까.

이념과 진로를 잃고 고향에서 떨어져 나왔지만 병든 도시 서울에서도 편안한 안식의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오장환의 시들은 김기림의 표피적인 문명 찬양과 비판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김기림의 비판이 문명에 탐닉하면서 한 것이라면 오장환의 그것은 문명의 속살에 자멸적인 체념으로 몸을 던진 자의 그것이다. 그래서 자아의 병듦과 문명의 병듦은 그의 시에서 하나가 되어 노래되지만, 거기서 현실의 움직임과 전망을 하나로 꿰뚫을 수 있는 시선을 갖지 못한 것은 그의 약점이다. 그런 병든 자의 시선은 그의 시를 홍열과 화농의 이미지로 물들인다.

병상에서 맞이한 해방 소식을 접하고서 그가 내뱉는 격정과 자책의 목소리는 그가 얼마나 전망과 빛, 자신의 주체를 의탁할 투명한 시선에 목말라 했는지를 감지하게 한다. 따라서 그의 소련 찬양, 북한 찬양에는 시적인 논리 초월의 위험이 잠재해 있지만 그 열정만큼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서정주와 함께 <시인부락> 동인으로 출발했지만 끝내 결별하고 다른 길을 택한 오장환의 때 이른 죽음은 과연 역사란 마지막에 웃는 자의 승리라는 외침과 함께 묘한 대조를 이룬다. 역사의 간계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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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혁명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51
전진성 지음 / 책세상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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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20세기 역사상 가장 문제적인 나라의 하나이다. 인류사의 지각변동을 불러왔던 양차 대전의 참전국이자 지성에 대한 회의, 인간의 적나라한 악의 본성, 무의식적 충동을 진지하게 사유하게 했던 아우슈비츠 학살의 당사자가 바로 독일이다. 유럽의 낀 국가로서 어정쩡한 위치에 있던 독일이 자신의 우월감을 과시하기 위해 내세운 건 피의 순수성, 우월성이라는 생물학적 차원이었다. 유럽 국가를 통털어 볼 때 다양한 사회 조류 간의 역동성이 풍부했던 이 나라는 결국 나치즘의 길을 걷고 자멸의 길로 빠져들었다. 영국, 프랑스보다는 러시아에 한층 친근성을 느껴던 독일의 풍토는 20세기 초반 독일의 정치적 행보가 그 낀 국가라는 애매한 정체성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나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보수혁명>은 20세기 초반 독일 지식계에서 벌어졌던 지식사회의 보수주의 운동의 행보를 더듬고 있다. 그 전부터 급진적으로 불어 닥쳤던 청년운동의 변종이라 할 청년 보수주의 운동은 나치즘과도 유관성이 없진 않지만 오히려 그 전세기의 청년운동과 깊은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질풍과 노도’로 알려진 청년운동은 독일 특유의 낭만주의적 성향에서 자리 잡은 것으로, 사회적 혼란과 억압, 침체가 배태할 수밖에 없는 지식사회의 반이성주의적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반 독일의 보수주의 운동은 흔히 급변하는 사회에서 퇴락할 운명에 처해진 보수파의 처절한 몸부림으로 이해되는 것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전통에 대한 맹목적인 고수가 아니라 현대적 조류를 감싸 안으면서 그것을 전통적 인식으로 급진적으로 밀고나가는 것이 독일 보수주의 운동의 특징이다. 이로써 언뜻 형용모순인 듯한 ‘보수혁명’이라는 개념이 성립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런 측면에 대한 연구는 분명 새로운 것인데, 근대화 흐름이 급물살을 타던 우리의 20세기 초반과 비교해본다는 측면에서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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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상 20 - 한국 문학의 위선과 기만
강준만 엮음 / 개마고원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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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의 지식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항상 밝은 빛 속으로 꺼내기를 두려워하는 어두운 구석을 향하고 있다. 그 비판의 타당성도 충분하다고 믿는 편이지만, 그 용기 자체만으로도 광휘를 발휘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자기 전공이 아닌 분야에 대해서는 입 닫고 있는 게 옳다는 지식사회의 암묵적 동의를 강준만이 과감하게 깨트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사회과학 전공자의 문학 개입은 속류사회학적 비판이라는 두려움을 안기 마련이라 지금껏 그 누구도 하지 않았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준만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이는 그의 ‘<조선일보> 제 몫 찾아주기 운동’의 파생물이라고 하겠다. 언론의 대중 장악력에서 가장 미묘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부분이 문화 쪽이고 보니, <조선일보>와 관계하며 ‘일등 신문’의 프리미엄을 얻고자 하는 속류 진보 지식인들이 행사하는 문화 권력을 비판할 필요가 있었고, 전통적인 문인사대부적 전통의 끝자락을 움켜쥐며 권력의 단맛을 보는 문학지식인을 비판할 필요도 부가되었던 것으로 전후 사정을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측면에서 반강제적으로 半문학 텍스트인 문학평론들을 읽을 계기를 가졌던 것이 강준만 개인의 발전 측면에서는 오히려 유익한 경험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회과학 전공자의 문학 장에 대한 개입은 문학계에서는 그동안 이류 방법론으로 경시되었던 문학사회학의 구조, 제도적 측면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환기시키는 계기로 작용한다고 볼 때, 이는 논의가 오고가는 양측 모두에게 결국은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문열에 대한 비판은 강준만이 예전부터 줄기차게 수행해온 작업이기 때문에 신선도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일반 대중의 눈을 사로잡는 꼭지는 남진우, 윤지관(그리고 이와 연결된 백낙청) 비판이 아닌가 생각된다. 남진우는 탁월한 미적 문체로 잘 알려진 시인이자 문학동네라는 문학 출판사(계간지)를 대표하는 비평가로 잘 알려져 있고, 소설가 신경숙과 결혼했다는 사실로 세인의 관심을 끌기도 한 인물인데, 강준만은 남진우의 서정주 옹호로 대표되는 예술과 삶의 분리주의 경향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서정주의 시와 삶은 별개이며, 삶의 굴절은 시의 가치와는 무관한,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과거 서정주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사람조차 서정주 옹호로 돌아서고 있는 형편이지만 서정주의 시가 그의 행동과 과연 무관한 입지에서 씌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은 간과될 수 없으며 그의 시와 행동은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취하는 방식보다는 그 두 가지가 하나로 수렴되는 특수한 미학의 견지에서 평가되고 기억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윤지관을 통해서 강준만은 말로는 진보를 외치면서 생활 속에서는 기득권을 유지하는 이중적 분열을 보이는 일부 진보 지식인의 행태를 비판하고 윤지관의 아놀드 비평에 대한 찬사가 그의 스승이자 창작과비평이라는 문학권력의 대표자인 백낙청의 영향권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은 파생물임을 입증하고 있다.

강준만은 다양한 인물과 영역을 자기 담론의 대상으로 불러들이고 있지만 그의 작업은 궁극적으로 ‘자칭 자유주의자’의 기본 원칙인 언론의 진정한 자유로 귀착되고 있다. 문학 장에 대한 비판도 그 작업의 일환이라고 하겠는데, 그의 작업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막연히 의식상으로 진보를 자임하는 것으로 지식인이라고 믿는 것과 그것을 실천하는 일이 다른 일이며, 오히려 이율배반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는 우리에게 따끔하게 일깨우고 있다. 그리고 타 분야에 대해 전공자들이 부끄러워 할 정도로 성실하게 텍스트를 챙겨서 꼼꼼히 읽어나가는 그의 태도는 존경스럽기조차 하다. 그의 작업은 위선, 기만이 판치는 한국사회에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진 것으로 멀리서 지켜보는 것으로 만사를 삼는 이들의 자성의 욕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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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지식인의 주류 콤플렉스
강준만 지음 / 개마고원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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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지식인의 언행 불일치, 좌파 지식인의 사이비성을 비판하는 데 자신의 전력을 투구하는 강준만에 대해 나는 항상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동업자 의식으로 똘똘 뭉친 교수 사회, 지식인 사회에 대해 그만큼 솔직한 이야기를 쏟아낸다는 것은 자살행위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나를 놀라게 하는 점은 그가 보여주는 엄청난 필력이다. 양도 양이거니와 그의 글이 보여주는 비판의 방식 즉 상대방의 장점을 사심없이 인정할줄 알면서도 때로는 인정하는 척 능청을 부리다가 그걸 빌미로 역전의 화살을 날리는 그의 방식은 유쾌하기 그지없다. 출세를 위해 유학까지 갔다 온 평범한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그 솔직함은 그에 대한 어떠한 비판까지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점수를 주고 싶은 심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준만에 대한 나의 지지는 어디까지나 그가 수행하고 있는 작업 그 자체에 대한 지지일 뿐, 그의 인간됨됨이나 도덕성에 대한 지지로까지 확장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겐 고약한 습관이 하나 있다. 지식인론만 하더라도 강준만의 지식인론은 사르트르나 리오따르의 지식인론 못지않게 새겨들을 구석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사르트르나 리오따르의 글에 무의식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게 마련이다. 사르트르나 리오따르의 글은 원론이고 강준만의 글은 현상 분석론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인데, 사르트르나 리오따르와 강준만을 겹쳐 읽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사르트르나 리오따르만 읽고 강준만을 버리는 일은 적잖은 문제다. 이걸 지식 사대주의 현상이라고 하는 걸 게다. 여기에는 글쓰기 스타일의 문제도 한몫하는데, 점잖게 학문적 용어를 쓰는 글을 적당히 구어체를 섞어가며 쓰는 글보다 우위에 두는 습성도 지식 사대주의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여하튼 강준만은 세인이 습관처럼 생각하는 것보다 새겨들을 구석이 많다. 물론 엄청나게 써대는 글을 따라가며 읽는 일이 버겁긴 하다. 그리고 내용 상 중복되는 이야기도 종종 있다. 그러나 그런 부분을 괄호 치고도 새로운 구석이 많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현재 한국사회에서 지식인 행세 하는 이들의 새로운 면도 알게 되고, 그것이 어떤 측면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지도 알게 된다. 그리고 바쁜 탓에 전혀 눈치도 못 채고 지나친 사람들의 못된 행동, 비겁한 행동도 보게 된다.

<한국 지식인의 주류 콤플렉스>는 미디어 행위에 참가하는 지식인들의 위선, 허위, 무지를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흔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지식인도 강준만에게 걸리면 한 소리 먹기 마련인데 임지현, 박노해, 손호철같은 이들이 그 예이다. 꼴보수, 극우적 논리를 가진 이들이야 새삼 더 언급할 필요도 없지만, 위에 언급한 세 명의 지식인들은 평소 많은 사람들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온 사람들이어서 더욱 흥미롭다.

강준만의 이야기 중 제일 귀에 아프게 들려오는 건 실명비판 공포증 이야기이다. 사이버공간 상의 커뮤니티에서 가끔 논쟁이 벌어질 때가 있는데, 여기엔 실명(사이버 공간에서는 아이디) 비판이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실명비판이나 적어도 지명비판이 아닌 문제에 대해서 네티즌은 무덤덤하다. 그건 다른 공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특히 동업자들끼리의 실명비판은 여간 부담스런 일이 아니다. 특히 종종 얼굴을 마주치는 사이라면 실명비판은 인간 말종이나 할 법한 일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실명비판의 부재는 진정한 비판, 책임지는 비판의 부재로 이어지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그들 동업자 사회를 말아먹는 일로 발전하기도 한다. 문학계에서 한때 문학의 위기가 운위되었을 때 그 위기는 솔직히 말하자면 위기와 동근원인 비평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최근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라는 책이 등장한 것도 이런 문제의식일 텐데, 적어도 문학과 관련해서 이제 진정한 비평은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같다. 해마다 이런 저런 비평가들의 탄생 소식이 들려오지만 그들의 명은 짧아서 결혼도 하기 전에 주례사나 써대는 노년의 냄새를 풍길게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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