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성과 현대문화 1
스튜어트 홀 외 / 현실문화 /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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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성(혹은 근대성)과 문화는 작금의 현대 사회를 바라보는 중요한 시각들 중 하나이다.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사회든 자기 사회를 정의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지속되어 왔지만 지금처럼 정체성 확립에 대한 욕망이 첨예화된 시기는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현대 사회의 정체성은 서구 유럽을 중심으로 한 민족적 국민 국가의 성립, 산업 자본주의의 부흥, 계몽주의적 실천 등 다양한 측면의 조망을 통해 시도될 수 있다. 그 방법과 시각의 다양함을 반증하듯이 우리 주변에는 현대성을 다루는 무수한 책들이 쌓여 가고 있다. 따라서 자칫 정체성 찾기가 정체성의 혼란으로 이어질 가능성마저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문화는 정체성 탐색의 또 다른 키워드로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 우리 주변에 문화 연구라는 분야가 독특한 영역으로 자리잡혀 가는 상황이나 문화비평가라는 신종 비평가 집단이 형성되고 있는 상황은 작금의 상황에서 문화가 새로운 정체성 찾기의 중요한 토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문화인류학적 시선을 통해 서구적 현대성이 야만적이며 미개한 것으로 열등시한 타문화에 대해 새로운 시선을 확보함으로써 서구 근대성의 오인된 우월감을 해체하는 작업에서부터 한 사회의 열등 문화로 인식되어 온 하위 계층 문화의 정당성을 복원해 내는 의미화 실천에 이르기까지 문화를 둘러싼 다양한 작업은 서구적 현대성의 정당성을 해체하는 우리의 실질적인 삶의 다양성에 그 의미를 회복시켜 주는 의미 있는 실천으로 다가서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중요시되고 있는 현대성의 탐구와 문화 연구에 관심을 두고 초보적인 수준에서나마 연구를 진행시켜 가려는 측면에서 보면 현재 나와 있는 책들은 그 가지 수도 많고 이론적 편차나 시각 면에서 볼 때 사뭇 방대하다. 따라서 의미 있는 독서에 대한 욕망은 얼마 가지 못해 미로 속에서의 헤매기가 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수많은 개론서 더미들 속에서 진정으로 길잡이 구실을 해줄 책을 찾는 일은 특별한 감식안을 필요로 하는 일이 된다.

레이먼드 윌리엄즈 이후 가장 주목받고 있는 문화이론가인 스튜어트 홀이 편집한 <현대성과 현대 문화>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 돋보이는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현대성과 관련된 다양한 6가지의 테마를 다루고 있다. 계몽주의, 현대 국가, 경제, 계급과 성, 문화, 서양과 타자들. 여기에 열거된 테마들은 현재 우리가 현대성과 관련된 담론들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주요 테마들이라는 점을 금방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2권의 책의 논지만이라도 잘 이해한다면 보다 심층적인 연구를 위한 탄탄한 기반을 확보하는 셈이다. 이와 더불어 이 책의 장점은 중간 중간에 독자들에게 문젯거리, 생각해볼거리를 던져 준다는 점이다. 어찌 보면 고등학교 교과서식 발상이지만 논자들의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자신의 이해를 재검토할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 그리고 논문 말미에 본문에서 언급된 저작들의 원본을 일부 제시함으로써 심층적인 읽기를 돕고 있다는 점이다.

흔히 모더니티라고 운위되는 현대성(근대성)이 왜 끊임없이 논의되어야만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작금의 모더니티 탐구는 현대 사회의 정체성을 형성 과정을 검토하는 일의 일환이다. 따라서 모더니티 탐구는 단지 사회라는 거대한 구성체를 다루는 작업만을 일컫지는 않는다. 가장 개인적인 수준에서 모더니티 탐구는 자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다양한 범주들, 즉 인종, 계급, 성별, 출신의 혼합 구성물인 현대인간의 형성 과정과 정체성을 탐구하고, 현대성의 파괴성, 억압성을 비판하는 작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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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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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어 가면서 내내 작가의 기억력에 감탄하게 된다. 나와 비슷한 세대 경험을 가진 작가는 유년 시절 초등학교 풍경을 마치 그 시절을 선명하게 추체험할 수 있는 그만의 보물 곽을 가진 것처럼 세세하고 정밀하게 그려낸다. 나에겐 도무지 가능하지 않은 그 기억의 세밀함은 소설을 읽는 과정에서 내내 감탄하게 만들었고, 작가의 창작 방법이란 게 있다면 그것의 비밀을 한번쯤 캐어묻고픈 충동을 느끼게 한다.

또 한 가지 이 작품의 주인공 한동구는 분명 남자아이이며, 작가의 실제 나이보다 2살 정도 연상이다. 보통 신인 작가는 자기와 동일한 주인공을 내세우기 마련이지만, 작가는 자기와 나이와 성이 다른 화자를 등장시켜 이야기를 전개해 가고 있다. 비록 나이는 큰 차이가 나지 않으므로 작품의 진실성에 해가 되지 않지만 성별 차이를 작품의 큰 얼개로 가져올 때 자칫 잘못하면 작품의 진실성에 큰 해가 될 수도 있으므로 이것은 어찌 보면 일종의 도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가 화자로 내세우는 남자 아이 한동구는 80년 전후를 경과해 낸 초등학교 학생의 사실성을 획득하고 있다. 그것이 이 작가에 대하여 감탄하게 만드는 또 다른 이유이다. 작가의 가계도 상 동구와 유사한 인물이 존재하고 그와 지근거리어서 그와 같이 생활했던 것인지, 아니면 동구 속에 작가의 캐릭터가 녹아 들어갈 정도로 작가의 유년 시절의 캐릭터가 남자 아이스러웠는지, 그것도 아니면 작가가 작품의 후기에서 밝혀 놓은 것처럼 작가의 삶에 충격으로 다가온 소년들에 대한 관찰과 반성과 상상의 산물인지 정확하게 드러낼 수는 없다.

그리고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이 작품의 매력은 그 특유의 유쾌함이다. 작가는 하나의 상황을 묘사할 때 동구의 시선을 취하기는 하지만 이때 묘사의 주체는 정확히 작가 자신이다. 그러므로 동구와 동구가 바라보는 것 사이에서 작가는 그 어수룩함, 그 순진함이 가장 잘 보이도록 동구가 보되 보지 못하는 것들의 구체적 정황을 묘사하고 있다. 그 사이에서 유쾌함은 묻어 난다. 그런 서술에 매료되어 읽으면서 내내 키득키득거렸다.

이 작품을 대하는 사람들은 이 작품의 제목을 <나의 아름다운 정원>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하지 않다. 정확한 제목은 <나......의 아름다운......정원 >이다. 이 제목 안의 말줄임표의 기능을 잘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이 말줄임표는 화자 동구의 머뭇거림의 표시이다. 갖은 고통만을 뒤로 한 채 서울을 떠나기로 한 동구에게 있어 인왕산 자락의 서울살이가 의미 있다면 그것은 동네 어귀의 3층으로 된 부잣집 정원이 존재하기 때문인데, 동구는 가끔씩 그 정원을 방문함으로써 번잡스런 삶을 초월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러나 그 정원은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딱히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 정원 한 곁에는 흔히 보는 잡스런 나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이 정원이 아름다운 것만은 아닌 이유가 따로 있다. 이 정원은 이제 서울살이를 청산하는 동구에게 있어 세월이 흐르면 항상 유년 시절 인왕산 자락의 서울살이를 상징하는 기호로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그 정원은 항상 시끄럽고 소란스럽기만 한, 그리고 끝내는 마음 아픈 상실들의 기억들에서 도피하려는 유년의 상처받은 자기 자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딱히 아름답다고만 말할 수 없는 정원이다. 이 머뭇거림의 태도는 흔히 성장 소설의 표준적인 세계에 대한 작가의 거리감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든 또 다른 생각은 이 작품을 영상으로 옮겨도 좋겠다는 것이다. TV 미니시리즈 판으로 만든다면 크게 자극적이지도 않으면서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작품이 될 것이다. 특히 동구의 캐릭터는 그 순진무구함으로 인해 시청자의 호응을 끌기에 충분하며, 박영은 선생, 주리 삼촌, 할머니 같은 뚜렷한 캐릭터들이 재미있게 부각될 것같기도 하다. 그리고 80년 전후의 급격한 시대 상황을 그리 무겁지 않게 조명할 수 있다는 점 또한 새롭게 다가올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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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림 평전
김학동 지음 / 새문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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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의 부조화를 뼈저리게 느끼며 객사한 이상을 기억할 것이다. 이상은 천재이되 그가 산 시대보다 항상 몇 발작 앞서 있었기 때문에 불운한 존재였다. 그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고 대부분은 그를 비난했다. 알 수 없는 문자와 기호로 점철된 <오감도>가 신문에 실리자 해당 신문사에는 항의가 빗발쳤다. 그러나 뚝심 좋은 상허 이태준이 사직을 결심하고 버티지 않았다면 그의 시는 그 한편으로 그쳤을지도 모른다. 이태준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이상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달리 보면 이상 없는 이태준이 존재했을리도 만무하다.

사람들은 이상에게서 묘한 아우라를 느낀다.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 백열등처럼 빛나는 그의 투명한 피부, 그리고 퇴폐와 절망이 눅진히 묻어나는 그의 어투, 그것은 어찌보면 이 땅의 문학 교육이 만들어낸 신화의 일종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신화적 존재 이상의 옆에 김기림이라는 시인이자 비평가이자 문학자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죽음을 얼마 앞두고 동경에 체류하던 이상이 간절히도 만나고 싶어하던 사람은 그의 어머니도 형제도 그렇다고 여자도 아닌 김기림이었다. 김기림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보면 이상이 얼마나 김기림을 갈망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이상에게 있어 김기림은 자신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이 둘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깊은 것인가는 이상 사후 발표된 김기림의 추모 시나 글을 읽어보면 단박에 확인할 수 있다. 경쾌하고 명랑한 근대성의 향유자 김기림은 이상의 죽음 앞에서 한없이 비통해한다. 경쾌하고 날렵하던 그의 언어는 갑자기 깊은 고뇌를 이끌고 무겁고 둔중한 울림을 드러낸다. 거기에는 김기림의 그 어느 글보다 진한 감정이 묻어나며, 구구절절이 비탄의 절조를 뽑아낸다.

그동안 문학연구자들은 김기림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어왔지만, 정작 그의 생에 대해서는 무관심했거나 무지했던 것이 사실이다. 거기에는 김기림이 북한 출신이며 전쟁 중 납북되었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김학동 교수의 지난한 열정의 덕을 입어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기림의 생애가 정리되었다. 이 책이 의미가 있다면 정확히 이 부분일 것이다. 미국에 살고 있는 기림의 누이의 편지에 근거해 재구한 기림의 생애는 애처로운 것이었다. 그가 그토록 과학을 강조했던 것도 알고 보면 출생과 성장 과정을 지배했던 슬픔과 우수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의 일종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게 된다. 삶이란 그런 것일터다. 자기를 억누르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필사적인 몸부림. 그런 것 하나쯤 없는 인생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해방 직후의 혼란스런 상황 속에서 좌우의 편가르기 앞에서 그의 심중을 짓눌렀을 고뇌의 한 자락도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 후의 생애는 밝혀진 것이 없다.

기림의 누이는 그와 어릴 적부터 무척 깊은 애정을 나눠왔음을 술회하는데, 미국으로 건너갈 적에도 기림의 시집과 책을 챙겨가 그가 그리울 때면 펴보곤 눈물짓는다 한다. 그리고 말뿐인 통일에 분통을 터뜨리며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 그의 생존여부만이라도 확인하고픈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그 편지가 88년께 보내진 것이고 보면 기림과 그 누이는 지금쯤 하늘 나라에서 애끓는 혈육의 정을 나누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기림이 전쟁 당시 변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한국문학은 적어도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 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그의 역량이나 태도로 보아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런 사정은 이상도 마찬가지이다. 김기림과 이상, 그것이 그들의 천명이라면 할 수 없지만 시간을 격해서 그들을 바라보는 후세인으로서는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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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란 무엇인가
토마스 소벅 외 / 거름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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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관련 서적을 일견해보면 몇 가지의 유형 분류가 가능하다. 저자의 국적별 분류도 그 중 한 가지 방법이겠는데, 영화의 본질론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 개론서의 경우를 살펴보면, 그 종류가 의외로 적고, 그것도 대부분 외국 저자의 번역서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때 영화 개론서로 가장 유명한 책은 루이스 자네티의 <영화의 이해>라는 책이었다. 영화 열풍이 불어닥쳤던 90년대 초반 너나 할 것 없이 한번쯤을 넘겨봤을 책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의 영화에 대한 관심은 일종의 광풍이었다. 20세기부터 영화는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극장에 걸리고 주말이나 휴일이면 사람들은 영화 보기로 감동과 재미를 한 묶음으로 간편하게 챙기곤 했다. 그 흐름은 역사의 격변기라고 해서 달랐던 것은 아니다. 정국이 어수선할 시절 가투의 주무대였던 종로거리에는 영화를 보러 나온 사람들과 가투 참가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 광풍의 내적 동력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세계사적 격변과 산업적 발전이 결합하며 생겨난 우연같은 필연이 아니었을까? VCR의 광범위한 보급으로 인해 영화는 극장이라는 공간적 제약, 특정한 시간이라는 제약을 벗어나 마음만 먹으면 비디오 테이프로 알뜰하게 몇 번이고 챙겨볼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몇 번이고 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볼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영화에 대한 비평적 욕망을 증폭시킨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진보적 운동의 정당성과 활동성이 쇠퇴되면서, 그동안 인간의 의식을 자본주의적 공세로 세뇌시키는 저급한 오락물이라는, 영화에 씌워진 오명이 벗겨졌다. 이념과 영화를 마치 상반된 그 무엇이라고 생각했던 그 의식은 지금으로 봐선 우스운 것이었으나 그 당시는 그것이 무시 못할 금제의 하나였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처럼 느껴진다. 그런 상황에서 영화는 대학생들로부터 폭발적인 관심을 얻게 되었는데, 지금의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의 상당 부분은 적어도 그 시절 대학생들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새로운 영화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때로는 영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흔드는 영화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영화 그 자체뿐만 아니라 관객의 감수성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적지 않은 변화를 겪게 된다. 소벅 부처의 <영화란 무엇인가>는 자네티의 책 이후 번역된 가장 훌륭한 영화 개론서이다. 자네티의 책이 영화사와 영화 기술에 대한 치밀하고 분석적인 해설에 치중하고 있다면, 소벅 부처의 이 책은 영화를 하나의 미학적 구성체로 보고, 영화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미학적 틀 내에서 영화를 조망하고 있다. 그리고 논의의 설득력이 더해져 영화 서적 특유의 지루함은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이 책을 영화 입문을 위한 스터디 교재로 사용한 바 있는데, 참가자들도 대체로 좋은 평가를 보였다. 영화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영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 권쯤 책장에 꽂아두고 필요할 때 꺼내보면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영웅>을 둘러싸고 이데올로기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 논쟁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겠지만, 그 한편에는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에게 영화는 현란한 스펙터클과 적당한 이야기가 골고루 반죽된 일회적인 볼거리이다. 영화는 영화 이외의 것과는 무관하다는 것, 그것은 또 하나의 편견이며, 관객들에게 만연한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이런 이데올로기의 열렬한 옹호자가 다름 아닌 영화 관련 업자들이라는 사실을 한번쯤 상기해봐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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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림 전집 5 - 소설, 희곡, 수필
김기림 지음 / 심설당 / 198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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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한국 문학에서 모더니즘을 얘기한다면 김기림을 제대로 읽어볼 필요가 있다. 리얼리즘의 영토를 벗어나 모더니즘을 논의하던 10여년 전 풍경을 되돌이켜볼 때, 김기림 붐이라고 할 정도로 김기림은 연구자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사람임에 틀림없다. 거기서부터 한국문학의 모더니즘 논의는 출발했고 김기림으로부터 분화되어 다양한 논의의 장이 마련되었다.

그는 이론과 과학의 지반이 척박한 식민지 조선 땅에 단순한 심정과 감성의 시가 아닌 과학과 이론의 지반을 가진 문학을 논의한 선구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는 부정적인 것이었다. 문학의 근대성을 사유한 최초의 인물이면서도 그의 근대성은 근대 문명에 대한 단순한 향수에 기반한 표피적인 것이라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었다. 그 이후 다양한 학계에서 근대성이 운위되면서 논의의 폭과 깊이가 어느 모로 보아 심화되었다고는 하나 적어도 문학에 있어 김기림은 문제적인 인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수많은 모더니스트의 감성의 원초적인 형태를 배태하고 있는 원뿌리로서 김기림은 주목을 요하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 김기림은 더 이상 큰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북한 출신의 수많은 문학인들이 그렇듯 그는 차츰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다. 그것은 남한 출신의 변변치 않은 문학인조차 끊임없이 후광을 씌우며 부각시키는 요즘의 세태와 비교해보면 부당하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렇다고 김소월처럼 북한 내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과 평가를 얻고 있는 문학인과도 다른 처지에 놓여 있다. 김기림은 6.25당시 반동분자라는 명목으로 납북되었고, 그 이후 북한 문학사 그 어디에도 김기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절친한 문우 이상이 동경 하숙방에서 불시에 싸늘한 시체로 돌변했을 때 이상을 시대를 잘 못 타고난 불운한 천재라고 묘사했듯이 김기림 그 역시 시대와 끝내 화합할 수 없는 시대의 이방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김기림은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재직하면서 창작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그 이후 몇 년 동안 왕성한 창작물을 내놓았다. 지금의 관점에서 봐도 그는 정말 많은 글을 써냈다. 잡문일 수도, 습작물일 수도 있지만 지금 놀라운 것은 그가 그처럼 왕성한 글쓰기를 할 수 있었던 내적 동력이 무엇일까 하는 문제이다. 글이란 글 쓰는 이의 자의식과 연계짓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다. 하찮은 글 속에서도 우리는 작가를 움직이는 미세한 감정과 의지같은 것을 발견해낼 수 있는 법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저널리스트이자 시인으로 잘 알려진 김기림이 그에 못지 않은 소설, 희곡, 수필을 써내고 있었다는 사실은 자못 시사적이다. 물론 소설과 희곡은 습작물의 성향이 짙으므로 논외로 친다고 하더라도 그의 수필은 문제적이다. 그는 대도시로 변모해가는 서울의 풍경을 책과 영화를 통해 길러낸 감수성으로 향수한다. 그에게 있어 대도시는 비판의 영역이라기보다는 향수의 영역이라는 성격이 짙고, 거기에 비판적 감수성을 드러낸다 할지라도 그것은 향수를 해칠 정도로 확대되지 않는다.

따라서 김기림은 근대화된 도시를 바라보는 고독한 산책자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표층을 뚫고 깊은 곳에 탐지침을 내리지 못하는 표층의 유랑자에 머문다는 사실을 가지고 그 자신의 얕음만을 문제삼을 수는 없을 듯하다. 그보다 좀 더 깊은 곳을 본 이가 있다면 이상 정도라고 할 것이다. 시간의 갭을 괄호쳐 놓고 본다면 지금 우리의 감수성과 김기림의 감수성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나치며 보게 되는 거리 풍경들에 적당히 유혹당하면서도 어느 순간에는 그것으로부터 조금 거리를 취하며 바라보는 태도, 즉 유혹과 거리의 태도는 대도시의 보편화된 감수성일 것이다. 김기림의 수필들은 그처럼 유혹과 거리의 긴장을 잘 보여준다. 사람들은 그의 수필을 읽으면서 그가 놓인 위치와 우리의 위치가 의외로 멀지 않다는 사실에 놀랄지도 모른다. 그 감수성을 발견하는 것, 그것은 서울 재발견의 경험이자 자신을 바라보는 또다른 경험이 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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