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그의 시대
안미영 지음 / 소명출판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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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청소년들에게는 우상처럼 절대시된다. 한국 문학의 최대치가 이상의 문학이요 이상 앞에 천재 없고 그 뒤에 천재 없다는 천재론이 그들에게는 존재한다. 그리고 문학연구자에게 이상은 당대와 그 후대를 아울러 시간의 지평을 미래로까지 확장한 문제적인 문학인이다. 그런 탓에 한국문학을 논하는 마당에 이상을 에둘러서 간다는 것은 뭔가 꺼림칙한 일처럼 연구자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수많은 시간과 정력과 종이와 잉크를 소비하며 이상과 그의 문학을 논해왔지만 탄산음료를 마신 뒤끝처럼 항상 개운치 않아 연구자들은 쓰고 또 쓴다.

<이상과 그의 시대>는 일제 강점기 신체 담론의 근대적 변화에 대한 여성사적 관심사에서 이상 문학에 접근한 책이다. 신체 담론의 변화를 당대의 신문과 잡지에 산견되는 자료들을 통해서 재구하고 이를 이상 문학의 담론 양상에 결부 짓는 연구는 한번쯤 시도되었을 법한 영역이었지만, 저자에 의해 비로소 외화되었다. 전근대적이고 전통적인 신체 담론에 대한 막연한 인상을 중심으로 이상 문학의 담론적 근대성을 논하던 태도에서 한 차원 더 실증적으로 접근한 것이라고 보여지는 바, 논리적이고 정교한 서술 방식은 논의의 명징성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이런 측면과 함께 이 책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이상 문학을 중심에 놓고 당대의 모더니즘 소설가들의 문학적 담론과의 대비를 시도함으로써, 이상 문학의 담론적 특수성을 해명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한 편 한 편 찾아 읽는 학문적 꼼꼼함과 더불어 저자의 폭넓은 시각이 돋보인다.

하지만 이상 문학에 있어 신체 담론은 굳이 이상이 아니더라도 가질 법한 보편성이 개재되어 있는 이상, 이상 문학에서 현재 요구되는 문제 지점과는 다소 거리를 두고 있는 듯한 아쉬움이 느껴진다. 또한 저자의 전공상의 제한에서 비롯된 듯하기는 하지만, 이상 문학에 있어 신체 담론은 소설이나 수필의 영역으로 한정될 때 다소 제한된 의미만을 부여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문제가 된다. 이상 문학 중 시에 있어 신체 이미지는 신체 담론의 이상 문학적 특수성이 녹아들어 있는 진원지라는 점을 고려할 때, 장르상의 경계를 허물고 시와 산문 사이의 낙차를 고려하면서 포괄적으로 다뤄질 필요가 있을 듯하다.

그러나 최근의 여성사적 관심의 집적도를 반영한 연구라는 점에서 이상 문학 연구의 의미 있는 하나로 놓여질 수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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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의 문화 읽기 청년에세이
최혜실 지음 / 소명출판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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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년간 우리 일상을 가장 큰 폭으로 변화시켜간 동인은 무엇일까? 최혜실 선생의 이 책을 조금씩 읽어나가면서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나는 지속적으로 생각해왔다. 사회주의나 맑스주의같은 이념의 쇠퇴가 가장 큰 변화였다고 말이다. 내 앞에 놓인 시간들은 마치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시한폭탄처럼 항상 급박하고 초조했다. 섣부른 희망과 조급한 좌절이 질서없이 요동치면서 세상을 보는 시각을 만들어냈고, 그 시각 속에서 한치라도 벗어나는 것들에 대해서는 프루크루스테스의 도둑처럼 사정없이 잘라내곤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를 옭죄고 있던 거대한 이야기 체계는 마치 환상적인 동화 속에 빠졌다가 책장을 덮었을 때처럼 한순간의 거대한 꿈처럼 홀연히 사라지고, 세상과 나의 경계는 허물어졌다.

그런 과정과 더불어 그 공허한 구석을 또 다른 환상적인 체계가 비집고 들어왔다. 온라인, 디지털, 인터넷, 초고속, 전자같은 단어들은 이제 일시적 가상의 한 조각이 아니라 내가 기반해서 뭔가를 해야하고,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항구적인 실재로 다가왔다. 이처럼 인터넷과 연결된 컴퓨터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그 부재가 그 어떤 것보다 더 한 불안, 심지어 공포까지 유발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디지털 세상은 질적인 차이에 무심하다. 독특한 개성을 천편일률적으로 비트라는 단위로 처리하고 용량으로 계량화한다. 이 세상에서 고급과 저급 같은 이분법은 통하지 않는다. 고급한 것들은 저급한 것들과 같이 처리되고, 일탈적이고 반규범적인 것들에 씌어졌던 불명예와 규탄은 새로운 명예와 찬양의 대상이 된다. 억압적이고 규범적인 틀거리 속에 갇혀 있던 것들이 그 틀을 넘어 마치 뻥튀기 기계 속의 밥알처럼 세상을 향해 폭발한다. 그 과정에서 세상은 조금씩 정형화된 틀을 깨고 유동하며 그 흐름들은 어느 순간 세상과 우리를 뒤바꿔놓는다.

부지불식간에 이뤄진 세상의 변화를 돌이켜보면 과연 우리는 지난 몇 년간 놀라운 변화를 겪어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와 같은 변화를 쉽게 감지하지 못한다. 마치 예전부터 그래왔던 듯 사람들은 태연자약하다. 그러나 인문주의자들에게 세상은 여전히 낯설기만 하고 끊임없는 의구심을 자아낸다. 이런 변화가 인간의 자유와 행복에 봉사하는 것일까 하는 원론적인 질문에서 시작되는 인문주의자의 관심은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그 변화의 양상을 민감하게 포착하고, 그 변화의 의미과 방향에 대해 진단하는 쪽으로 흐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문주의자들은 대체로 변화의 양상 그 자체마저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 근심하고 안다고 가정하면서 섣불리 앞서나가는 제스춰를 취하거나 구태의연하게 거부의 몸짓을 보이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인문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동시대 대중의 꿈과 욕망, 환상의 세상에 침잠해보는 경험이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고서 내뱉는 말들은 기존의 자신을 되비추는 헛된 반사경이 될 수밖에 없다. 그와 더불어 때때로 대중과 함께 하는 자신의 욕망과 근심, 불안을 반성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 지난한 혼돈 속에서만이 우리 시대의 인문주의자들은 그 가치를 발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문학 전공자답게 주로 문학 영역에서 벌어지는 다채로운 풍경들을 논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곁다리로 광고와 건축도 다루고 있다. 디지털 서사라는 새로운 개념에 기반한 하이퍼텍스트 소설을 논의하고 저자 자신이 직접 그 가능성을 타진하기도 한다. 그리고 기존에 저급하고 통속적인 영역으로 자리매김되어 온 SF, 추리, 무협 소설에 드러나는 대중의 욕망에 진지하게 다가가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것들이 모두 고급문화의 상아탑처럼 군림해온 '소설'의 틀을 벗어나 대중의 욕망과 환영이 깃들인 일상을 긍정적 시선으로 포착하려는 모색의 결과들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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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타클의 사회 - 문화교양 7
기 드보르 지음, 이경숙 옮김 / 현실문화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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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를 '스펙터클의 사회'라고 규정하게 된 것은 기 드보르의 이 책이 알려지게 된 이후이다. 해마다 여름방학 시즌이면 개봉되는 <스타워즈> 시리즈를 보러 가며 다음 해에 이어질 속편을 공상하며 기대하는 태도가 하나의 일반적 문화로 보편화된 사회, 그 사회가 '스펙터클의 사회'일 수도 있다.

현대사회는 대중문화가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포획한 사회라고 할 수 있는데, '이미지는 모든 것을 삼킨다'고 할 때 '이미지'는 드보르의 '스펙터클'과 동궤에 놓인 것이다. 그러나 굳이 이미지가 아니라 스펙터클이라는 용어를 써서 저자가 가시화하고자 한 것은 좀더 특징적이며 역사적인 것이다. 그에 따르면 스펙터클은 '삶에 대한 시각적 부정'이자 '지배 경제의 이미지'이다. 진정한 삶의 체험 대신 시각적 이미지로서 체험을 대신하는 현대적 삶은 그에게 있어 진정성이 상실된 삶이다. 현대인은 텔레비전이나 신문 속에 등장하는 기사를 통해서만 자신을 구성하는 현실을 매개된 방식으로 접할 뿐이다. 이와 같은 문제 의식은 벤야민이 신문을 예로 들어 경험의 쇠퇴와 체험의 증가로 설명한 것과 비슷하다.

자본주의의 대량생산이 가져온 이미지들에 삶이 속박됨으로써, 현대인의 삶에서 시간이나 역사와 같은 역동적 요소는 거세되고 삶은 정태적이며 속박적으로 변한다. 스펙터클이 쏟아 놓는 이미지들은 현대인을 가두는 거대한 감옥이며, 스펙터클은 그 화려한 이미지를 통해 현존 체제를 정당화하는 독백만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자신의 삶이 계급적 분리에 기초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 이처럼 스펙터클이 지배하는 사회는 실제나 삶이 아니라 환상이나 외양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저자는 스펙터클을 종교가 결정적으로 쇠퇴한 이후 현대인을 보편적으로 사로잡은 종교적 환상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인간 관계의 분리와 소외가 교묘하게 접착된 환상으로, 인간은 끊임없이 소비를 통해 이 환상을 꿈꾼다.

드보르의 이 책은 1960년대에 나온 책이다. 68혁명 이전이며, 자본주의 체제의 물질적 번영이 영속화될 듯한 답답함이 지배하던 시절이다. 드보르는 무정부주의의 일종인 상황주의자로서 혁명적 삶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의 혁명은 체 게바라식의 혁명은 아니었다. 일상적 삶속에서의 혁명이 그의 목표였다. 삶의 진정성을 박탈하는 스펙터클의 지배를 분쇄하고 역사와 시간의 숨결이 도도히 맥동치는 삶을 꿈꾸었다. 그는 삶에 대해 지나치게 비관적이었고, 혁명에 대해 너무 간절했다. 그의 혁명 선언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이후 서구 유럽 68세대들의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했다. 68세대의 혁명이 현재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부르주아적 일상에 갇힌 자신의 삶을 혁명하라는 것 아니던가. 드보르는 자신이 유명해지는 걸 원하지 않았지만 이 책으로 그는 유명해졌고 그 탓인지 그는 결국 자살로 생을 끝맺고 만다. 그의 삶은 그가 믿는 만큼 비타협적이었다. 삶이 갖가지 타협들의 덩어리처럼 느껴질 때, 한 상황주의자의 죽음은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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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전의 명시 읽기
한계전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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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포스티노>는 이태리 망명 당시 파블로 네루다가 만나게 된 우체부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세계적인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아니라 그의 평범한 이웃에 불과한 시골 우체부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새롭게 시를 전유하는 기쁨을 안겨준다. 어느 날 사랑에 빠진 우체부는 네루다와의 대화를 통해서 짝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바치는 그의 진솔한 마음을 담은 편지가 바로 시에 다름 아니라는 네루다의 얘기를 듣고 놀란다. 그 순간 관객 역시 주인공의 내면에 이는 감정의 결을 따라 전해져 오는 진한 울림에 감동을 경험하게 된다. 무릇 시란 그 무엇을 진하게 사랑하는 마음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연서의 일종이라는 이 영화의 전언은 제도적 문학 교육에 익숙한 관객에게 일종의 충격으로 다가온다.

한 편의 시에 부여되는 해석을 넘어 시 그 자체를 바라보는 가치관조차도 주체의 입장과 관심, 욕망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특정한 형식에 난해한 언어를 구사하는 시를 시의 본령에 올려놓고, 특정한 해석을 경유한 대표시만을 향수하기를 강요하는 문학 교육 풍토는 예전과 비교해 그리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그 풍토가 제도적 문학 교육의 현장에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특정 가치관과 이데올로기의 표준적 생산 공정으로 존재한 학교의 역사적 특수성을 일단 고려해야겠지만, 이와 더불어 간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요인은 교육 주체의 안일과 고답적 태도이다. 국어 교사의 강의안은 십년이 지나도 쉽게 바뀌지 않으며 십년 전의 김소월은 오늘의 김소월과 달라지지 않는다. 텍스트 바라보기가 열린 세계로의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항상 닫힌 세계 속의 쳇바퀴돌기로 귀결되는 이와 같은 현상은 궁극적으로 학생들의 감수성을 특정한 테두리내로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하며, 이후 제한된 취향과 가치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문학 작품은 고립무원의 땅에서 생성되는 고결한 언어로 이해되며, 자본주의의 대량 문화 생산물에 대한 소비적이고 수동적인 태도와 몰취향적 선입견으로 인해 그의 감수성은 분열되고 파괴된다.

최근 들어 문학 교과서 상의 작품 선정 폭이 넓어진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학생들의 심미안, 감수성 계발에 대한 의지는 별로 눈에 띠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려할만한 일이다. 심미안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학교를 벗어나 접하는 대중문화에 대해서도 몰취향적인 억견에 사로잡힌 붕괴된 감수성의 소유자가 된다. 따라서 이제 시 읽기는 단순히 고상한 취미의 개인적인 만족이라는 차원을 넘어 대중문화가 넘치는 사회 속에서 인간이 자율성을 지닌 비판적 자아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교양이 된다.

<한계전의 명시 읽기>는 제도권 문학 교육의 공허함과 기계성, 고답성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앤솔러지다. 진정 좋은 시는 읽는 이의 몫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자신만의 시를 갖기 위해서는 시를 바라보는 심미안의 계발이 필수적이며, 이런 욕구에 따라 우리는 명시 앤솔로지들을 접하게 된다. 이때 앤솔로지는 자기가 일굴 밭을 위한 분묘집합장으로서 기능한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감수성에 개안을 가져올 꽃을 선별하여 자신만의 공간으로 모셔오는 것이다.

이번 앤솔로지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시들과 그렇지 않은 시들이 함께 한다. 그리고 한 편 한 편의 시들에 대해 저자는 ‘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깔고 그 시들에 대해 말한다. 그 말들은 대체로 시가 뿌려놓는 의미와 감성을 향해 다가가지만, 때로는 그 시들에서 한 발짝 물러나 시에 대해 말하고 있는 저자 자신, 그리고 그 말의 향연에 초대받은 청자인 독자를 함께 아우르는 삶의 지평을 향해 있기도 하다. 독자는 저자의 말에 자신의 말을 섞음으로써 말의 향연에 당당한 주체로 참여할 수 있다. 노신의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를 대하는 마음가짐으로 이 앤솔로지에 담긴 한 편 한 편의 시들을 매일 매일 읽는다면 하루 하루가 충만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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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구와 문화이론 - 문화교양 2
존 스토리 지음, 박모 옮김 / 현실문화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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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대중문화라고 지칭되는 영역은 자본주의 도래와 더불어 광범위하게 확산한 복제 기술의 발명으로 생성된 공간이다. 발터 벤야민은 그의 유명한 논문에서 그와 같은 변화가 불러일으키는 감수성의 혁명적 변화에 대해서 잠시 기술한 바 있는데, 그는 특히 영화를 이와 같은 변화의 시금석으로 생각하고 있다. 고유한 일회적 경험으로서의 예술(고급 문화)의 아우라(독특한 분위기)가 사라진 텅 빈 공간을 언제 어디서라도 반복될 수 있는 경험(동질적이며 비독창적인)의 질료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 변화는 자본주의의 복제 기술에 본질적인 것으로, 아도르노 같은 비관적 대중문화론자는 미국의 대중문화 텍스트와 마주하면서 격렬한 절망감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90년대 들어 마르크시즘이 파놓은 땅에 포스트 마르크시즘, 후기 구조주의,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마르크시즘 등 새로운 관점들이 차지하게 되면서 드러난 가장 뚜렷한 변화 양상 중 하나가 대중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관심이다. 이전까지 훌륭한 문학, 음악, 회화 작품들의 독무대였던 문화는 급속히 해체되고, 오락물이나 단순한 취향에 지나지 않았던 영역들이 문화라는 외피를 획득하고 사회적 정당성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는 마르크시즘 이후 사회를 지배하던 강력한 지적, 도덕적 정당성이 무규범적으로 해체되는 국면에서 빚어진 자연스런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고급 문화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해석과 비평의 절대성을 강조하던 흐름들은 힘을 잃고, 자본주의적 대량 생산물로서의 문화 상품의 미학과 소비적 생산성을 강조하는 대중문화 연구와 비평이 본격화되었다. 이런 상황은 고급 문화의 미학을 옹호하던 계층에게는 재앙일 수밖에 없었다. 그 계층 속에 상당수의 마르크스주의자까지 포함된다는 사실은 대중문화가 기존의 문화 관념을 완전히 재편하였다는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영화, 팝음악, 텔레비전,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대중문화을 아도르노처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대중을 무력화시키는 즉, 자본의 의도나 목적이 일방적으로 관철되는 공간이라고 파악하는 관점도 일면적이지만, 그 반대로 대중문화를 소비 주체의 의미 생산성이 정도 이상으로 실현되는 능동적인 공간으로만 보는 문화적 포플리즘적 관점도 일면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90년대 초기에 만연했던 아도르노식 관점이 지금은 결정적으로 후퇴하고 있는 듯하다. 이제 대중이 모든 옳고/그름, 좋고/나쁨 등을 판단하는 유일한 규준처럼 보는 관점이 차츰 사회 전반에 착색되고 있다. 이와 같은 대중 미학의 확산은 기존의 고급문화론이 일방적으로 배제했던 공간에 대한 정당한 의미 부여를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자칫 대중의 쾌락에 대한 해석 그 자체에만 관심을 가지고 실제에 대한 영향에 무관심한 비정치성을 가져올 수도 있다.

문화연구와 비평에 있어서 딱히 특정한 관점을 바탕으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편향으로 나아갈 우려가 없지 않다. 그럴 때 문화연구와 비평은, 특히 대중문화 연구와 비평은 소비자의 쾌락에 대한 일방적 해석이나 의미 부여가 아니라 기존의 고급문화론과 자본주의 체제 둘 모두를 타겟으로 삼는 방법론적 긴장 속에서 이뤄져야 할 것이다.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은 지금까지 문화연구라는 공간을 형성해 온 다양한 관점들과 실천들을 개괄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영국적 토양에서 비롯된 실천과 관점들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 바, 이는 자본주의 대중문화의 온상 미국의 영국 침공 사태를 무력하게 관망하거나 호기심과 기대 어린 눈초리로 바라봐야 했던 영국적 사정이 이 책의 저변을 감싸고 있다는 사실과 겹쳐 읽을 수밖에 없도록 우리를유도한다. 그리고 몇 년 전 독서계에 하나의 지적 열풍으로 다가온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를 포함한 풍속사, 문화사에 대한 우리 사회의 점증하는 관심의 원천이 이 책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관점을 제기하며 읽는 것도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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