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전의 명시 읽기
한계전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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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포스티노>는 이태리 망명 당시 파블로 네루다가 만나게 된 우체부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세계적인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아니라 그의 평범한 이웃에 불과한 시골 우체부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새롭게 시를 전유하는 기쁨을 안겨준다. 어느 날 사랑에 빠진 우체부는 네루다와의 대화를 통해서 짝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바치는 그의 진솔한 마음을 담은 편지가 바로 시에 다름 아니라는 네루다의 얘기를 듣고 놀란다. 그 순간 관객 역시 주인공의 내면에 이는 감정의 결을 따라 전해져 오는 진한 울림에 감동을 경험하게 된다. 무릇 시란 그 무엇을 진하게 사랑하는 마음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연서의 일종이라는 이 영화의 전언은 제도적 문학 교육에 익숙한 관객에게 일종의 충격으로 다가온다.

한 편의 시에 부여되는 해석을 넘어 시 그 자체를 바라보는 가치관조차도 주체의 입장과 관심, 욕망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특정한 형식에 난해한 언어를 구사하는 시를 시의 본령에 올려놓고, 특정한 해석을 경유한 대표시만을 향수하기를 강요하는 문학 교육 풍토는 예전과 비교해 그리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그 풍토가 제도적 문학 교육의 현장에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특정 가치관과 이데올로기의 표준적 생산 공정으로 존재한 학교의 역사적 특수성을 일단 고려해야겠지만, 이와 더불어 간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요인은 교육 주체의 안일과 고답적 태도이다. 국어 교사의 강의안은 십년이 지나도 쉽게 바뀌지 않으며 십년 전의 김소월은 오늘의 김소월과 달라지지 않는다. 텍스트 바라보기가 열린 세계로의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항상 닫힌 세계 속의 쳇바퀴돌기로 귀결되는 이와 같은 현상은 궁극적으로 학생들의 감수성을 특정한 테두리내로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하며, 이후 제한된 취향과 가치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문학 작품은 고립무원의 땅에서 생성되는 고결한 언어로 이해되며, 자본주의의 대량 문화 생산물에 대한 소비적이고 수동적인 태도와 몰취향적 선입견으로 인해 그의 감수성은 분열되고 파괴된다.

최근 들어 문학 교과서 상의 작품 선정 폭이 넓어진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학생들의 심미안, 감수성 계발에 대한 의지는 별로 눈에 띠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려할만한 일이다. 심미안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학교를 벗어나 접하는 대중문화에 대해서도 몰취향적인 억견에 사로잡힌 붕괴된 감수성의 소유자가 된다. 따라서 이제 시 읽기는 단순히 고상한 취미의 개인적인 만족이라는 차원을 넘어 대중문화가 넘치는 사회 속에서 인간이 자율성을 지닌 비판적 자아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교양이 된다.

<한계전의 명시 읽기>는 제도권 문학 교육의 공허함과 기계성, 고답성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앤솔러지다. 진정 좋은 시는 읽는 이의 몫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자신만의 시를 갖기 위해서는 시를 바라보는 심미안의 계발이 필수적이며, 이런 욕구에 따라 우리는 명시 앤솔로지들을 접하게 된다. 이때 앤솔로지는 자기가 일굴 밭을 위한 분묘집합장으로서 기능한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감수성에 개안을 가져올 꽃을 선별하여 자신만의 공간으로 모셔오는 것이다.

이번 앤솔로지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시들과 그렇지 않은 시들이 함께 한다. 그리고 한 편 한 편의 시들에 대해 저자는 ‘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깔고 그 시들에 대해 말한다. 그 말들은 대체로 시가 뿌려놓는 의미와 감성을 향해 다가가지만, 때로는 그 시들에서 한 발짝 물러나 시에 대해 말하고 있는 저자 자신, 그리고 그 말의 향연에 초대받은 청자인 독자를 함께 아우르는 삶의 지평을 향해 있기도 하다. 독자는 저자의 말에 자신의 말을 섞음으로써 말의 향연에 당당한 주체로 참여할 수 있다. 노신의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를 대하는 마음가짐으로 이 앤솔로지에 담긴 한 편 한 편의 시들을 매일 매일 읽는다면 하루 하루가 충만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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