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원
후루하타 야스오 감독, 히로스에 료코 외 출연 / 프리미어 엔터테인먼트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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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원'을 보고 있자니 일본영화의 노장 그룹들이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발랄한 상상과 기괴한 욕망이 꿈틀거리는 일본의 젊은 영화 그룹과는 달리 지극히 전통적인 관념을 지극히 전통적인 방식으로 그려내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우리 영화에도 무리없이 적용될 듯하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에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는데, 그것은 노장 그룹으로서 가질 수 밖에 없는 세계관과 형식개념상의 한계이리라.

'철도원'은 외고집의 한 직업인의 순수한 결말을 그려내고 있는데, 그의 모습에는 어려웠던 시절에 대한 향수가 가득하다. 그리고 거기엔 평생직업이라는 일본 고유의 직업관에서 빚어지는 생과의 갈등이 포함되어 있다. 오토가 아내가 죽은 날도 작업일지에 '이상무'라고 적고 있는 것은 그 가장 극명한 예일 터이지만, 아무래도 우리의 경우 그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태도임이 분명하다.

만약 주인공의 직업이 우편배달부라면 모를 일이되, 철도원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주지하다시피 철도는 한 국가의 기간 동력으로서 국가발전의 가장 기초가 되는 시설이기 때문이다. 철도에 대한 주인공의 충직한 헌신은 그것이 인간적 갈등과 번민을 하찮은 것쯤으로 무화했을 때 다분히 이데올로기적 색채를 띠게 된다.

'철도원'은 철도로 상징되는 무반성적 헌신과 죽은 딸로 상징되는 인간적 회한이 절제되고 때로는 감정적인 톤으로 자연스레 변주됨으로 해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마음을 아련한 슬픔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뭔가 부담스런 점이 있다면 그건 이 영화를 통해 가리워진 것들을 정말 없는 것으로 만드는 영화의 힘때문이다. 군국주의 시절 일본 내 수많은 우직한 오토들에 의해 고통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이 영화만큼 공감하며 슬퍼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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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이 온다
Wen Jiang 감독, 지앙 홍보 외 출연 / 엔터원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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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내외적으로 과거 일본의 군국주의 역사에 대한 반성의 문제가 자주 거론되고 있다. 국가간의 협상은 이미 예전 협정을 통해 끝난 문제처럼 얘기되지만, 그로써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해결은 태도의 문제를 제기한다. 일본의 군국주의 역사는 마치 유럽에 있어 나치즘이 그러하듯 '기억의 정치'를 통해 끊임없이 반추해야 하는 역사의 미궁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지난 10여 년 간 일본의 행보가 보여주듯 일본 군국주의는 그 싹이 완전히 거세되지 않은 채 적당한 환경의 도래만을 기다리는 모습이다.(우려?) 우리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중국, 필리핀의 움직임은 조용한 듯하다.(과연 그럴까?) 우리와 비슷한 경험을 가진 중국에서 이런 문제들이 크게 거론되지 않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일본과 곧바로 맞닿아 있지 않다는 지정학적 조건이나 일본 정도는 충분히 대적할 수 있다는 중화의 자존심, 그런 것? 여하튼 그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일본 군국주의 시절 중국의 경우는 여하튼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을뿐더러 애써 알려는 사람도 드물다.

중국의 대표적 영화 배우이자 감독이기도 한 강문이 주연하고, 감독한 '귀신이 온다'는 일본 군국주의 말기 중국 한 촌락민들의 경험을 중국적인 해학과 능청의 어법으로, 그렇다고 이 영화의 톤마저 가볍지만은 않은 방식으로 보여준다. 해안가 마을에 사는 농부 다산에게 어느 날 밤 다시 찾으러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누군가가 일본군 포로를 담은 자루 두 개를 던진다. 그날부터 다산을 비롯한 마을 주민들은 일본군 병영 마을이라는 지정학적 요인으로 인해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동거를 시작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일본군 포로와 어렵사리 교신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해프닝은 중국인들 특유의 수다러움, 능청과 버물어져 짙은 순박미를 느끼게 하고, 그런 에피소드들만으로도 흥미롭다.

일본의 반식민지 '2류 신민'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일본군 포로들은 꽤 골치 아픈 존재다. 결국 중국인과 포로 사이에는 모종의 계약이 성립되고, 그 계약이 원만한 성사되어 마지막에는 한바탕 축제까지 벌어지지만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중국 촌락은 불바다가 되고, 다산과 그의 처만 다행히 참화를 면하지만, 다산의 그 복수심만큼은 지독해서 포로가 되어버린 일본군들을 도륙하고, 그 대가로 일본 포로의 칼날 앞에서 목을 떨군다.

목에서 떨어진 다산의 얼굴은 다소 생뚱맞게 눈을 껌뻑거리면서 영화가 끝나는데, 그 껌뻑거림은 마치 '역사의 황당함이여!'라고 외치는 듯하다.

플롯만 추리고 보면 이 영화의 스토리들은 비극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인 톤은 중국인들의 유머, 능청, 순박의 정경들로 인해 겹 톤으로 중화되고, 전체적으로는 유쾌와 비탄, 가벼움과 무거움이 주기적으로 교차하는 묘한 느낌을 준다. 결국 이 영화는 역사와 영화의 스테레오타입적인 만남을 거부하는 색다른 영화가 되어버린 셈인데, 난 이런 게 맞다고 생각한다. 'right'이라기보다는 'fit' 정도의 감각.

'귀신이 온다'는 흥미로운 중국 영화다. 그 흥미로움은 단지 한일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기억의 정치'가 좀 더 폭넓은 시야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깨우쳐주기 때문이다. 결국 '기억'이 문제가 되는 셈인데, 생각해보니 20세기는 이미 단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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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양식과 담론의 근대성
권영민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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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리의 근대를 바라보는 소실점이라고 할 개화기에 등장한 문화 현상을 담론이라는 문화적 기획 속에서 바라보고 있다.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근대적 언어가 확립되고 그 언어를 바탕으로 무수한 담론들이 난무하던 개화기를 주체-타자 담론과 신-구 담론 사이의 충돌로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은 국어국문운동이라는 독특한 문화 현상이 융성하게 된 배경을 근대 민족 국가로서 발돋움하려는 조선의 자기 정체성 확립의 욕구로 묘사하고 있다.

영웅전기나 우화, 풍자가 정체성을 주체성의 차원에서 확립하려는 의지의 소산이라면, 신소설은 일본의 식민주의 담론에 긴밀한 상관 관계 속에서 근대성을 가속화시키려는 음험한 제국주의적 기획의 소산으로 살피는 관점에는 기존의 중립성을 강조하는 국문학 풍토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목소리임에 분명하다. 푸코의 담론 이론에 기초한 미국의 탈식민주의 이론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자료에 대한 해석적 타당성을 겸비함으로써 자칫 신식 이론에 경도되기 쉬운 학문적 풍토에 경종을 울리는 효과가 가지고 있다.

그리고 권말에는 현대 독자가 굳이 도서관을 찾을 필요 없이 저자의 논의 대상인 실제 작품을 접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자칫 담론 자체에 대한 소홀한 파악 위에서 메타담론적 대상으로 화하기 쉬운 개화기 담론의 실상을 여실히 파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방법론적인 혁신과 실증성을 아울러 보여주는 이 책의 기획은 학문적 성과가 대중적으로 수용되는 메커니즘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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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평 2017-07-26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너무 어려워요. 쉬운 말이 너무 어렵습니다. 메타담론 이야기는 책 안 읽고 글 쓰거나 그 때 상황 이해하는 것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wasulemono 2017-07-26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4년 전에 쓴 글이네요. 너무 오래 전 글이라 제가 이런 글을 썼던가 싶을 정도로 낯서네요. 지적 감사합니다. 공부가 덜 여물어서 그런 것같아요.
 
표상 공간의 근대
이효덕 지음, 박성관 옮김 / 소명출판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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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지식인들의 자기 비판 담론을 다룬 책들이 최근 들어 부쩍 출간되고 있다. 이 중에는 재일 한국인 지식인의 책들도 간혹 보인다. 주류사회 속에서 늘 타자로서 경계 상의 존재론적 고민을 없을 수 없는 이들의 일본 비판은 내밀한 아픔을 느끼게 한다. 일본에 대한 내셔널리즘적 비판이 주류를 이루는 한국 지식인의 비판보다 더 한층 치밀하고 심도 깊은 비판 의식이 느껴진다. 그것이 어쩔 수 없이 일본에서 살며 연구를 하며 살아야 한다는 현실적 조건이 강제하는 치밀함이며, 일본, 일본인이라는 자명성을 의심하지 않는 무비판사회의 근저를 해부함으로써 비판적 성과를 이루겠다는 나름대로의 전략이라고 하겠다.

근대적 표상 시스템의 성립사를 문화의 전 방면에 걸쳐 추적하는 이 책은 일견 문화사 연구처럼 보이지만, 책의 뒷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궁극적으로 근대 국가로서의 일본의 자명성을 문제삼으려는 기획을 보여주고 있다. 석사 논문이라고 보기에는 턱없이 방대한 기획을 가지고 있는 이 책은 광의의 미디어를 매개로 하여 문화사 전반을 종횡으로 넘나들며 표상 시스템의 변화를 추적하고 있다.

푸코적인 방법론과 카라타니 고진의 역작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에서 이론적 자양분을 얻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저자가 검토하는 영역에는 분명 독창적인 사유와 검토가 있음이 분명하고, 비슷한 근대화 과정을 거쳐온 우리의 근대화 과정을 검토하는 데도 시사점이 적지 않다.

한국, 한민족, 우리에게 이처럼 자명한 사실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정체성이 어떻게 구성되었으며, 그러한 정체성과 경계 확립으로 인해 무엇이 배제되었는가를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근대의 시작과 동시에 발생한 일제 강점이라는 사건은 우리를 암묵적으로 하나의 시점으로 묶어놓았다. 그것이 외압에 의한 수동적인 현상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작금 우리가 스스로를 내셔널리즘이라는 잣대로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외압으로 인해 내셔널리즘의 발생이라는 구도는 일종의 환상일 수도 있다. 우리의 문제를 타자의 문제로 전치시킴으로써 타자의 문제가 해결될 때 우리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리라는 발상에 과연 문제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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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학연구
류광우 / 충남대학교출판부(CNU Press) / 199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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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학을 연구한 서적 중에서 이 책은 가장 오자가 많은 책이다. 책을 낼 때 섬세한 교정을 보지 않았던 듯하다. 대학교 출판부에서 펴낸 책의 수준이 이 정도라면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이상문학처럼 텍스트 자체가 혼란스럽고, 잘못된 텍스트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많은 텍스트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자는 적지 않은 문제가 될 수 있다.

저자는 이상문학을 일제의 검열 정책에 대한 은밀한 저항이라는 코드로 읽어내고 있다. 일단 이와 같은 관점은 한번쯤 제시해볼 만하다고 할 수 있다. 식민지 조선을 지식인으로 살다간 이로서 이상의 문학에 내면화된 코드 중 하나가 은밀한 저항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사용하는 시어 중에도 이와 같은 해석을 가능케 하는 것들이 꽤 있으며, 그가 작품 속에 제시하는 미묘하고 혼란스런 상황 역시 당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어둠의 분위기를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코드가 작품 전반에 대한 해석 코드로 등장할 때, 무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논지의 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과도한 해석이 불거져 나올 때가 있다. 그것은 이상문학의 불가해한 작품 상황에 숨어있는 코드를 추출해내려 하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작품 상황을 굳이 하나의 상황으로 단정짓는 것에는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특정한 몇몇 작품이나 한 작품 속에서도 부분적 정황에 대한 해석으로서 은밀한 저항을 이야기할 수는 있겠지만, 이상문학의 심층으로 은밀한 저항을 규정하는 것은 큰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이 책의 더 큰 문제점은 논증을 전개하는 방식에서 두드러진다. 이상문학에 대한 기존의 해석 코드를 지배하고 있다고 할 김윤식 교수나 여타 지배적 논자들에 대한 비판을 전개함에 있어서 섣부르고 얕은 논단이 횡행한다는 점이다. '-동의하기 어렵다'라는 식의 전단은 그런 전단에 걸맞은 근거의 제시를 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제시하는 근거를 보면 대체로 설득력이 없는 것들이 태반이다.

이처럼 섣부른 논증 방식은 이 책의 일 부분의 문제가 아니라 시종일관 저자가 취하는 논증 방식이다. 이것은 은밀한 저항이라는 다소 동떨어진 관점을 확보하기 위해 빚어진 초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를 대체로 비판하기 위해 끌어들일 뿐, 자신의 논의를 보충하고 그것을 전개시켜 나가는 부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저자의 프로필을 보면 고등학교 교사로서 근무하고 있는 듯하다. 저자가 이 책에서 그와 같은 코드를 내세우게 된 것은 고등학교라는 교육 현장의 분위기에 다분히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 것같다. 그런 조건 자체가 학적 분위기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관점을 구사하는 자유를 주었다고 할 수 있지만, 기존의 학문 공동체 내에서는 설득력을 별반 가질 수 없는 한계로 작용하는 듯하다.

흥미로운 관점을 보여주기는 하였지만, 기존의 학문성과를 발전적으로 수용하지 못함으로써 이상문학 연구라는 학적 과제에는 미달한, 대학 1학년 수준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볼만한 책이라는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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