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미학 - 혼돈과 질서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47
아시하라 요시노부 지음, 민주식 옮김 / 소화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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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미학이나 예술 개론서에서는 건축이 당대의 미적 감각을 선도해서 여타 회화나 조각, 문학, 음악 등의 감각 변화를 이끌어나간다는 점을 강조하곤 한다. 20세기 초의 모더니즘, 20세기 중반의 포스트모더니즘처럼 세기를 가로지르는 중요한 미적 감각은 건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인데, 이런 학설은 나처럼 건축 쪽에 대해서는 도무지 구별 감각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선뜻 이해되지 않을 뿐더러, 한국처럼 건축이 실용적 감각으로 일관된 나라에 살면 생활 감각적으로도 다가오지 않는다. 서울 거리 어디를 둘러 봐도 미적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건축물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건축은 소박하게는 주택 건축에서 넓게는 한 도시의 미적 조형물에 이르기까지 그 용도나 가치면에서 다양하고 그에 따라 그 면모가 정해지기 마련이나 우리처럼 건축문화에 무감각한 곳도 드물지 않을까.

도시공간의 관점에서 도쿄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세계적인 부국 일본의 심장부로서 그 구성원들이 경제발전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지만 엄청난 지가 때문에 정작 자기 집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고 설령 자기 집을 가진 경우도 대체로 그 공간이 그리 넓지 않다는 부정적인 측면이다. 이방인의 관점으로는 도쿄 시민들의 삶이 행복하지 않을 것같은데, 그것은 행복한 삶이란 경제적 여유뿐만이 아니라 공간적 여유 역시 고려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인간이란 사적인 공간인 집에서는 그 크기와 상관없이 바깥으로 보호받는다는 안온함을 느끼기 마련이지만, 도시는 주택같은 사적 공간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거리, 역, 도서관 등의 공적 공간과 공존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인간의 행복이란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이 여유롭고 조화롭게 배치될 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내 집이 잘 정돈되고 가꾸어져 있다 하더라도 거리가 혼돈투성이라면 주택내에서의 행복감은 일시에 파괴될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 책에서 제일 주목할 만한 부분은 거리 문화를 다루고 있는 2장이다. 여기서는 우리가 실생활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건물마다 가득 들어찬 간판, 곳곳마다 늘어선 전신주, 차들로 몸살을 앓고 있는 도로와 주택가, 근린 공원, 신문과 함께 배달되는 광고전단지 등등. 저자는 간판이나 전신주(전선)가 도시의 미관을 해치고 있다고 지적하고 간판 설치를 제한하고 우리의 하늘을 장악하고 있는 전선을 땅에 묻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교통난, 주차난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차량 생산 제한, 소유 제한, 운행 제한 등을 제안한다. 간판, 전선 문제는 그럴 듯하나, 차량 문제에 대해서는 저자 자신도 설득력있는 대안을 내놓고 있지 못한데, 이것은 도쿄나 서울이나 마찬가지로 좁은 땅에 수많은 인구가 거주한다는 특성때문인 것같다.

그런데 한 가지 그의 혜안이 번뜩이는 것은 광고 전단지 문제이다. 매일 아침 배달되는 신문에는 항상 광고전단지가 상당한 무게를 차지하고 있다. 누구나 그렇지만 광고전단지들은 신문을 들자마자 바로 버려지게 마련이다. 독자로선 쓰레기밖에 되지 않는 광고전단지는 생산을 위해 소비되는 나무에서 비롯해서 하나의 광고지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순전한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신문지국의 경영상의 이유로 끊임없이 유용한 자원과 노동력이 낭비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이를 위한 대안으로 광고전단지를 끼워넣는 신문에 대해 구독 중지 운동을 벌이는 방법도 괜찮으리라 생각한다.

서울도 도쿄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문제들로 시달리고 있다. 주택난, 교통난, 주차난은 여전히 심각한 문제이지만, 서구 도시처럼 아무런 거리낌없이 쉴 수 있는 광장이나 공원이 많지 않다는 사실 역시 서울에서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문제이다. 그리고 누구나 여유롭게 찾아서 필요한 책을 읽을 수 있는 도서관도 지금보다 훨씬 많아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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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심한 짝사랑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10
무샤노코지 사네아쓰 지음, 김환기 옮김 / 소화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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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일본소설하면 무라카미 하루키나 무라카미 류등이 가장 보편화되어 있고 그 외 요시모토 바나나같은 이들의 작품이 대중적으로 읽히고 있지만, 내 경우에는 이들 젊은 세대의 작품들에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편이고, 오히려 나쓰메 소세키같은 지금으로 따지면 거의 한 세기 전에 활동한 소설가들의 작품이 흥미로운 대상이다. 나쓰메 소세키로 말할 것같으면 동시대 우리 소설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사유의 깊이와 문장력이 큰 매력으로 이광수 정도에 비길 바가 못된다.

그리고 데카당티즘적 세계를 보여주는 다자이 오사무나 유미주의에 깊이 침윤되어 있는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들에서는 김동인류보다 한층 더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여기에 비하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은 이상하게도 흥미가 덜한데, 그가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 것은 오리엔탈리즘류의 서양적 환상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여튼 지금부터 거의 한 세기 내지 반세기 전을 비교 시점으로 설정한다면 일본 소설에는 동시대 우리 소설에서 볼 수 없는 깊고 강렬한 울림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일본 소설을 읽을 기회가 있으면 가급적 동시대 일본 소설보다는 그 전 소설들을 읽는 게 흥미로운 일이 되고 있다.

무샤노코지 사네아쓰의 <한심한 짝사랑>은 이러한 계기로 뒤적여 본 것인데 이 책에는 <사랑과 죽음>, <한심한 짝사랑> 두 편이 수록되어 있다. 무샤노코지는 흔히 시라카바파라 불리는 ‘白樺’ 동인으로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사람이다. ‘白樺’는 우리로 따지면 ‘創造’ 정도의 문학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동인으로서 초창기 우리 문단에도 정신적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다. 다소 생소한 작가의 작품이긴 하지만 소재 자체는 대중적인 측면이 강하다.

<사랑과 죽음>은 소설가 무라오카와 그의 선배 노노무라의 여동생 나쓰코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우연한 계기에 사랑을 싹 틔운 두 사람은 무라오카의 프랑스 여행을 앞 두고 혼인 약속을 하고 무라오카가 여행에서 돌아오면 결혼하기로 되어 있는데 그가 귀국할 날을 얼마 남겨 놓지 않고 나쓰코가 유행성 감기로 돌연사함으로써 둘의 관계가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는 스토리이다. 작품은 길이에 비해 단순한 느낌을 주는데, 구성이 그들이 주고 받는 편지 위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구성 형식은 우리 초창기 근대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한심한 짝사랑>은 쓰루라는 여자를 놓고 펼쳐지는 주인공 ‘나’의 공상적 러브스토리이다. 주인공은 소심한 탓에 쓰루를 만나 실제로 연애를 하지 못하고 상상 속에서 대화를 나누고, 마치 그녀를 애인인 것처럼, 아내인 것처럼 상상하며 지내는데, 결국은 쓰루가 다른 사람과 결혼함으로써 스토리는 끝을 맺는다.

이처럼 스토리나 플롯면에서 이 작품들은 대체로 단순한 면을 보인다. 요즘 소설처럼 뒤틀어짐이나 기괴함을 발견하기 힘들다. 단지 주인공의 내면의 추이를 시간적 흐름에 따라 충실히 추적하고 있는데, 복잡한 구성에 익숙한 요즘 독자로서는 지겨울 수도 있다. 그리고 가부장제에 순응하는 남녀간의 사랑의 순결성이라는 주제도 요즘 생활 정서에는 맞지 않는 고리타분한 면이 있다. 그렇지만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내면을 묘사하는 섬세한 문장 하나만은 깊게 음미해볼만하다. 푸코가 말한 바 있고 가라타니 고진이 패러프래이즈한 바 있듯 자기에 대한 고백을 제도화함으로써 근대가 탄생했다고 할 때 일본 소설의 고백체 문장은 근대의 탄생을 알리는 문학적 신호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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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줌의 도덕 - 상처입은 삶에서 나온 성찰 입장총서 18
테오도르 아도르노 지음, 최문규 옮김 / 솔출판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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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란 문화집적체 양식을 영혼의 양식처럼 생각해서 시시때때로 섭취하는 것을 중요한 일처럼 생각하는 나에게도 마치 이국의 특이한 요리처럼 쉽게 소화해낼 수 없는 종류의 책들이 있는데, 아도르노의 책들은 다른 책들과의 비교를 애시당초 불허할 정도로 이런 종류로서는 독보적이다.

미국 체류 시절 절친한 동료 막스 호르크하이머와의 공동 저작인 <계몽의 변증법>은 그 논지의 명료성으로 인해 대체로 상당수의 지적 대중들이 접했지만, <미학 이론>같이 특수 전공서처럼 인식되는 책들은 그 누구도 끝까지 읽어냈다는 얘기를 쉽게 접할 수 없고, 그 ‘끝장내기’ 자체가 대단한 지적 싸움 그 자체로까지 여겨지고, 그 싸움에서의 승패여부에 상관없이 그 싸움에 끝까지 함께 했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의 대상이 되기에 이른다.

한 마디로 아도르노의 저작은 우리에게 몇되지 않는 가장 치열한 정신적 모험의 대상이다. 누구나 짐작하듯이 그런 사태는 아도르노 저작의 스타일상의 난해함에서 비롯된다. 경구나 잠언처럼 단편 형식을 취하면서 그 전과의 맥락을 쉽게 발견하기 힘들고, 문장 하나하나가 변증법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어, 직선적이고 일면적인 읽기, 총체화된 읽기에 익숙해 있는 우리에게 아도르노 읽기는 니체 읽기에 버금가는 어려움으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도르노 읽기가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물론 이런 물음은 이런 물음 자체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만 의미있는 것으로 다가올 것이다.) 모든 사유와 현상들이 무반성적인 화해, 타협으로 거침없이 질주해가는 듯한 현대 사회에서 아도르노는 쉽사리 현대 사회가 부여하는 거짓 총체적 연관에 투합하기를 거부한 채 그 연관이 내포하고 있는 허위성을 들추어내며 고집스레 거부의 자세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자세는 지나친 외곬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그의 사유의 밑바닥에는 유태인으로서 목격한 파시즘의 잔혹한 실체에 대한 응시가 가로놓여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어떤 면에서는 댄디즘 취향의 속류 문화비평가가 쏟아내는 문화비평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절실함이 배어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한줌의 도덕>을 끝까지 읽는 데는 수년간의 시간과 그보다 더한 인내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에 상응하는만큼의 지식을 얻는다는 것을 불가능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줌의 도덕>은 지식을 위한 책이 아니라 상처받은 자신을 드러내려는 글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상처는 히틀러의 파시즘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 예술가이자 미학자로서 그가 체험한 미국식 자본주의 문화산업으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히틀러식 파시즘을 지금은 한때의 망령처럼 떠올리지만 파시즘은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넘어서 문화산업 형식으로 우리 삶에 가로놓여 있다.

한때 비판사회이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정통 맑스주의 이상의 관심이 쏠린 바 있지만 정확하게 검토되기도 전에 또 다시 관심은 다른 곳으로 이동해간 듯한 인상이다. 사람들은 맑스를 접고 아도르노를 펼치자 얼마 안돼서 이제 들뢰즈나 푸코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앗!참으로 주전자같은 세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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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여행의 역사 - 철도는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볼프강 쉬벨부쉬 지음, 박진희 옮김 / 궁리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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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여행의 역사'라고 하면 왠지 '여행'이라는 단어가 주는 모종의 해방감이 연상된다. 그러나 여행은 사업이나 특정한 목적을 위한 공간 이동이 주가 되는 현대의 기차 이용 경험과는 적잖이 거리가 있다. 기차는 더 이상 여행을 위한 매개가 아니게 되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를 기차로 이동하는 경우 그 시간은 따분하고 지루한 고역의 시간이 되기가 일수다. 잠을 자거나 책을 읽거나 하면서 시간을 때우고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여행이 끝난 아쉬움보다는 기계장치로부터의 시달림에서 해방된 기쁨을 느끼기조차 한다.

서구에서 기차 여행이 대중화되기 시작하던 무렵인 19세기 중반 기차를 통한 철도 여행이 사람들에게 불러일으켰던 지각과 인지의 변화를, 그리고 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 담론들을 문화사적인 감각으로 서술하고 있는 이 책은 그동안 우리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추 역할을 담당해 온 철도를 기술적, 경제적 시각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시각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책으로 언급되고 있다.

철도 여행이 일상화되어 애초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던 감각이 지금은 많이 무디어졌지만, 이 책은 우리의 근대화 초기 선조들이 느꼈을 법한 감각을 재구성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현대성의 경험이 일상생활의 감각과 지각의 변화를 핵심으로 한다고 할 때, 그 감각이 일상화되는 과정을 반추하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문화사적 감각이 많이 가미되었다고는 하지만, 기술적이고 경제적인 서술 시각도 들어 있는 만큼 평범한 일반 독자가 책 전체를 집중력을 가지고 읽기는 힘들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책의 인쇄 상태가 그다지 선명하지 않아서 독서의 집중력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 좀 더 뚜렷한 인쇄 방식을 썼더라면 좋았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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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문화와 문자문화
월터 J. 옹 지음, 이기우 외 옮김 / 문예출판사 / 199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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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마다 필독서처럼 권위를 가진 저자나 책들이 있기 마련이다. 90년대 중반 이후 마샬 버만의 <현대성의 경험>을 필두로 수많은 책들이 버만의 책의 후광을 입고서 출판되었는데, 옹의 이 책 역시 그 중의 한 권이다. 그런데 특별히 이 책은 대중교양서로서보다는 대학 내 필독서로서 더 큰 비중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이 책이 다루고 있는 테마가 인류학이나 문학, 사회과학의 관심사 중에서도 다소 특화된 분야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말과 문자는 인간 생활의 기본을 이루면서도 항상 투명하게 의식되지 않는 영역에 놓여 있다. 따라서 언어 그 자체를 논한다는 것은 적어도 의식의 차원에서는 항상 명료하지 못한 느낌을 주기 마련이다. 언어 그 자체를 논한다는 것이 비대중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언어가 다소간 무의식과 연계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고 할 것이다.

여하튼 문자를 통한 쓰기나 인쇄를 경험한 인간이나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가정으로부터 비롯되는 이 책의 논의는 변방의 구술 문화 속의 사람들에 대한 인류학적 조사 자료로부터 관련 학자들의 논의에 대한 검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펼쳐진다. 구술 문화와 문자 문화의 차이를 대비 방식으로 설명해 놓은 부분과 쓰기와 인쇄가 인간의 의식이나 사고에 끼친 영향을 설명해 놓은 부분은 특별히 흥미롭다.

문자 문화 속에서 형성된 의식으로 구술 문화를 보지 말라. 이것이 저자의 핵심 전언이다. 물론 그 정도의 가르침은 현대의 현명한 다문화주의자라면 감수할 수 있는 가르침이긴 하나, 저자가 논거로 삼고 있는 수많은 자료 역시 구술 문화 그 자체가 아니라 문자와 책이라는 형태로 고정된, 말하자면 문자 문화의 더미로부터의 추측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이것은 제3세계 원주민에 대한 조사 결과를 인류의 보편적인 과거로 재구성하려는 음험한 제국주의 연구자들의 가정과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이와 같은 연구에는 항상 차이를 논증하기 위해서 같음을 가지고 차이를 추론해 내야 한다는 어려움이 따른다.

이런 어려움은 비단 이 책만이 아니라 여러 책들이 공통으로 안고 있는 어려움이다. 한번쯤 읽어볼 책이긴 하나, 이 책과 더불어 맥루한의 <구텐베르크 은하계>를 같이 읽어본다면 좀더 유익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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