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 표적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22
로스 맥도날드 지음, 이가형 옮김 / 해문출판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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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 맥도날드의 <움직이는 표적>은 흔히 '하드보일드'라고 일컫는 사회의 비정을 파헤치는 추리물이다. 실종된 백만장자를 추적하는 탐정 루 아처의 얘기를 그리고 있는데, 하드보일드가 언제나 그렇듯 주인공 루 아처는 사건에 대해 극도의 건조한 관계를 유지하며 사라진 백만장자의 행적을 쫓아 이리저리 부산하게 움직인다.

정통추리물들과는 달리 이 작품은 한 명의 특출난 영웅적 탐정의 천재적 추리 능력을 과시하는 고전적 스타일은 아니다. 루 아처는 상처를 입기도 하고 사소한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이는 현대의 영웅이 더 이상 전지전능한 능력의 소유자가 아닌 오류의 인간일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움직이는 표적>은 정의와 청렴을 생명으로 삼아야 할 법의 세계가 인간적 욕망에 의해 굴절되는 세계를 다루고 있고, 이와 더불어 이주민 노동자 문제, 탐욕스런 자본가 문제 등을 다루고 있어 때때로 사건과 추리 위주의 추리 소설이 놓치기 쉬운 추리문학의 사회적 성격을 훌륭히 보여주고 있는 대표작이다.

로스 맥도날드의 이 작품은 마치 한 편의 하드보일드 영화를 보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이는 이 소설이 캘리포니아 주변을 무대로 삼고 있다는 사실과도 연관된다. 태평양 연안을 따라 길게 뻗은 캘리포니아의 해안 풍광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은 그 자체가 충분히 영화적 감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무더운 여름날 이 소설을 읽고 있으면 마치 한 편의 기나긴 악몽을 헤쳐 나온 듯한 상쾌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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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보면 역사가 달라진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5
조한욱 지음 / 책세상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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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 간 우리 독서계에 역사 읽기 열풍이 불었을 때, 그 열풍이 혹시 가벼운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의심을 한 적이 있다. 역사의 대중화를 모토로 해서 이런저런 식의 가벼운 역사 읽기가 붐처럼 일어난 그 당시 특이하게 생각됐던 것은 그 전과는 다른 역사책의 모습이었는데, 그 책들은 제도적 변천이나 혁명같은 큰 틀에서의 얘기가 아니라 인간의 일상을 구성하고 있지만 이전까지는 그다지 큰 의미를 부여받지 못했던 사소한 것들을 통한 역사 읽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런 흐름들이 요즘에는 역사읽기와 쓰기의 중심권으로 진입하고 있는 듯 보이는데, 이는 실로 역사의 개념 자체를 수정하는 흐름이 아닌가 싶다. 그런 흐름이 '신문화사'라는 틀로 뭉뚱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조한욱의 <문화로 보면 역사가 달라진다>를 통해서 확연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정치사, 경제사에 편중된 역사, 과거의 기정 사실에 대한 재확인과 교훈 획득으로만 이해한 역사를 문화를 통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담론으로 이해하는 신문화사적 방법이 우리에게 완전히 친숙해진 것은 아니며, 최근의 흐름은 고작해야 새로운 방향으로 가는 이정표 정도라고 볼 수 있다.

몇 년 전 발간된 김진송의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가 독서층의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이 서서히 변해 가는 역사 연구 방법을 우리 역사 조명에 시의적절하게 적용하였기 때문인 것같다.

우리의 역사는 그동안 민족주의, 계급주의같은 거대담론에 휘둘려왔다. 그것의 장점이 분명한 만큼 그 단점도 명확하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역동적 관계 맺음을 통하여 이뤄지는 사건들의 세계가 지나치게 도식화되고 그 생생한 현장감을 상실하고 비대화적인 목소리로 일색되었다는 느낌을 가지는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역사'하면 대부분 따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조한욱의 이 책은 최근 역사 연구 방법 상의 변화를 이미 번역된 책들을 중심으로 소개함으로써 역사에 대한 관심을 혁신, 제고하는 계기를 제공해주고 있다. 비단 '역사'라는 담론이 역사학자만의 소유물이 아닌 이상 신문화사는 다양한 분야에서 지적인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이들에게 새로운 방식의 연구를 추동하는 매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은 개론서적인 관심에 치중하여 좀 더 높일 수 있는 논의의 수준을 애써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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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방의 비밀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8
가스통 르루 지음, 최운권 옮김 / 해문출판사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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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고전 추리소설을 읽어보는 것같다. 그의 소설 <오페라의 유령>은 오페라로 영화로 각색되어 그의 인지도는 다른 추리소설 작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그에 힘입어 그의 원작 소설이 적극적인 마케팅 대상이 되고 있다.

그의 최고작이라고들 하는 <노란방의 비밀>은 18세 신문 기자 조셉 룰르타뷰의 천재적인 추리 능력을 보여주는 작품인데, 프랑스적인 특성인지는 몰라도 호들갑이 대단하다. 노란방이라 불리는 고성의 작은 방에서 벌어진 괴사건을 둘러싼 추리가 주를 이루는데, 극적인 기교보다는 주인공 룰르탸뷰의 이성적인 장황한 추리가 이어진다. 특별히 가다듬어진 정교함을 보이지는 않지만 그 나름의 천재성은 인정해줄만 하다.

그런데 추리소설의 성격 탓이지만 추리 과정 그 자체에 너무 집중된 탓인지 그 당시의 사회문화적인 배경에 대한 이해를 기대하고 있었던 내 기대는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추리 소설적 건조함이랄까. 그런 것을 벗고 추리의 묘미와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등장인물들의 내면이나 그 사건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배경까지 아우르는 것이 있다면 그게 진정한 추리'소설'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제 기나긴 추리 여행의 테이프를 끊은 셈인데, <노란방의 비밀>은 아직까지 내 기대에 못미친다. 계속 여행을 떠난다면 내 기대를 충족시키는 작품이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싶다.

해문판은 편집 상태가 조악하고, 번역도 매끄럽지 못한 편이라 책 그 자체로는 큰 매력이 없지만 추리 소설을 펴내는 곳 중 그나마 읽을만한 책을 번역해내는 곳이 이곳뿐이라 달리 대안이 없다는 사실이 아쉽다. 현대적인 판형으로 새롭게 선보였으면 좋겠다는 게 독자로서의 내 욕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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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중국인, 중국음식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7
주영하 지음 / 책세상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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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에서 '음식'은 점점 더 큰 의미를 띠어가고 있다. 설탕, 커피, 담배는 현대인의 주요 기호 식품이며, 하루라도 이것들 중 하나라도 공급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돌변할 지 모를 지경이 이르렀다. 최근 이 기호 식품들의 의미를 정치사회적 관점에서 조명하는 책들이 번역되어 나오고 있다. 이는 일상성 탐구가 전반적인 사회현상 탐구의 주요한 방법론으로 주목받으면서 일어난 현상으로, 그동안 계급론적 관점에 밀려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으나 우리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다.

주영하의 <중국, 중국인, 중국음식> 역시 이런 맥락에서 흥미롭게 읽어본 책이다. 중국음식하면 당장 짜장면, 짬뽕, 탕수육, 군만두 등이 떠오르게 마련인데, 우리는 막연히 중국음식이라고 생각하며 먹어오기는 했지만, 그 실체를 제대로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중국 에 거주하며 그들의 문화를 연구한 주영하 선생의 재미있는 설명을 통해 우리는 한국화된 중국음식들의 후면에 놓은 역사와 중국음식을 통해 역추적된 중국식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요즘 현대 중국에 대한 접근이 지나치게 상업적 관심 위주로 흘러가는 세태는 현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도외시한 채 이뤄지는 경향이 다분하다. 만약 이런 현상이 지속된다면 그 노력만큼의 성과를 얻을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칫 섣부른 접근의 화를 면치 못하게 된다. 그 점을 저자인 주영하 선생은 무척 우려하고 있다. 나 역시 동감하는 편인데, 지금 현대 중국에 대한 관심이 일반 독자층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건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 문화 자체가 그다지 아직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나라에 대한 관심은 우선 국경을 초월하고 공유할 수 있는 대중문화 자체의 보편성에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지금 현대 중국의 대중과 우리 대중 사이에 공유의 접점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가 중국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중국이 생산한 대중문화가 우리 사이에서 일상적으로 공유되는 시점일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이런 책들은 대중문화 탐구의 시원으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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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그 가야금 소리
황병기 지음 / 풀빛 / 199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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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도 국악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가야금과 거문고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형편이니 그 악기들에서 나는 소리를 구별한다는 건 더 어림없다. 어느 순간 문득 찾아온 국악이 갈수록 내게서 멀어지는 느낌이더니, 오늘 황병기 선생의 <깊은밤 가야금 소리>를 접하고 나니 잃었던 친구를 되찾은 것마냥 정겹고도 새롭다.

황병기 선생은 누구나 알다시피 사라져 가는 국악의 현대화를 위해 누구보다 애쓴 분이다. 강제규의 영화 <은행나무침대>를 본 사람이 많으니 그의 곡조 한 곡쯤은 누구나 들어본 셈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선생의 진가는 깊은 밤을 새어가며 뜯는 가야금 소리에 있지 않을까 싶다. 깊은 밤 선생의 가야금이나 거문고 소리를 듣고 있으면 고뇌와 번민으로 가득 찬 가슴이 시원스레 뚫리는 느낌을 갖게 된다.

94년에 나온 이 책은 선생의 초창기부터 그 당시까지의 글들을 모아놓은 책인데, 선생의 성장담을 들려주는 1부 나와 우리집 사람들, 존 케이지나 백남준같은 전위예술가와의 만남 과정을 소개한 4부 동서음악 선책도 흥미롭지만, 국악에 대한 무지를 차근차근 해소해주는 2부 음악과 사색, 3부 국악이야기가 훨씬 깊이 다가왔다.

선생이 국악을 한다고 해서 국악 이외의 현대음악에 대해 무지하거나 국악에 대한 아집을 가지고 있을 않을까 하는 걱정은 기우에 그쳤다. 퓨전재즈의 거장 칙 코리아의 음악을 들으면서 보여주는 사유는 감동적이었다.

흔히 국악을 자신과는 동떨어진 구닥다리거나 이해할 수 없는 소음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 많은 것같다. 황병기 선생의 <미궁>을 3번 들으면 죽는다는 괴담이 나오는 것도 아마 이런 사정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처음 <미궁>을 들은 건 환하게 불 밝힌 밤이었는데, 홍신자 씨의 내레이션때문이었는지 상당히 소름끼쳤다. '이런 음악을 지리산 숲속에서 밤에 듣고 있게 된다면' 하고 상상할 때는 몸에 경기가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 곡을 작곡한 선생의 의도를 설명한 부분(86-87쪽)을 읽고 나서는 <미궁>은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미궁>에서 느꼈던 공포는 그 음악 자체에 있지 않고 무지로 가득 찬 내 속에 존재해 있었던 셈이다. 음악을 접하는 주체의 무지에서 외면이나 공포는 싹트는 것이다. 이런 경우가 대표적으로 보여주듯 국악에서 감흥을 얻기는 쉽지 않다. 이 세상 많은 것들이 그것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깊은밤 가야금소리>는 그 여정을 함께 할 좋은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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