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 가슴 미어지는 비애
사랑은 분노 철저한 증오
사랑은 통곡 피투성이 몸부림
일치를 향한 확연한 갈라섬
사랑은 고통 참혹한 고통
사랑은 실천 구체적인 실천
사랑은 투쟁 쉼없이 가야할
노동자의 새하얀 길이네
온 바다와 산과 들과 하늘이
들고 일어서 폭풍치고
번개 치며 포효하여 핏빛으로
새로이 나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사랑은
고요에 빛나는 바다
햇살 쏟아지는 파란 하늘
박노해 시, 이원경 곡
노래가 안 나오면 여기로 http://blog.naver.com/likeamike/150023857552
주말의 일기예보를 듣지 못했다. 하늘이 좀 흐리기는 했지만 앞마당 의자에 앉아 이야기 나누며 시작하는 하루에 어울리게, 적당히 햇발이 내리는 오전. 지난 금요일, 실은 거의 포기했었는데 꽤나 극적으로 본회의에서 표결 끝에 부결 처리된 거주외국인지원조례 덕에 다들 한 짐 덜었다는 홀가분한 마음이었다. 이제 딱 2주 앞으로 다가온 축제와 11월 중순 쯤으로 마감을 정해놓고는 너도 나도 다른 일에 치이느라 자꾸만 미뤄진 가이드북 작업에 집중하자고.
하여 마침 이직 기간 중에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기로 한 우리의 든든한 자원활동가 S가 그제 잠시 알바로 나섰던 나이지리아 통역 출장에서 돌아와 상근활동가마냥 출근 시간에 맞춰 당도했다. 도대체 상점을 찾을 수가 없어 도하에 스탑오버했을 때 겨우 샀다며 내미는 자상한 선물, 그야말로 잔잔한 감동까지 선사하며 씩 한 번 웃고마는 S덕에 아침부터 괜히 마음이 훈훈해졌다.
하지만 닥친 일은 또 일이라... S와 함께 가이드북이며 축제며 이것저것 회의를 하고 간단히 저녁을 먹고 맥주도 한 잔 하고 헤어졌다. 지난 겨울 처음 만난 S는, 그 한참 전부터 이주단체에서 꽤 적극적으로 자원활동을 했던 친구라고 들었다. 사무실 다른 동료들과는 짧지 않은 인연인 그는, 본업과 별개로 기특할 정도의 열정으로 세상과 이주노동자에 대해 성심과 열심을 보이는 친구다. 상도동에서 부천 구석까지 분명 가깝지 않은 길일텐데 손길이 필요할 때면 어김없이 달려오는 것은 물론, 우리가 하는 일 하나하나에 상근활동가 못지 않은 관심과 고민을 마다않는 사람이다.
함께 일할 식구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마다 늘 첫번째로 떠오르는 친구, 보잘 것 없는 초라한 단체인데다 급여도 변변치 않으니 차마 대놓고 말을 할 수 없기도 하지만. 실은, 그의 속에 끓고 있는 열정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그런 의중을 보이지 않으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참느라 애쓰는 편이다. 한 번씩 사무실에 왔다 갈 때마다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과 뛰어들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그가 얼마나 갈등하고 고민하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친구를 보내고 샘과 함께 집으로 걸어오는 길, 속내를 서로 감추지 않으며 한참 이야기를 해댔다. 지금은 돈 벌어야되니까 나중에 늙으면 같이 일하자고 하자, 그래도 혹시 적게 벌고 적게 쓰는 세상에서 함께 일하자고 하면 안될까? 분신한 노동자의 이야기에, 여전히 진행중인 이랜드 불매에, 좀은 급하게 가입한 민중연대 덕에 테이블에 놓인 이런저런 서명과 모금에, 하나같이 진지하고 성실하게 관심을 보이며 기꺼이 함께 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친구. 그런 사람이 주변에 있다는 것만도 고맙지만, 사람의 욕심이란 게 그러고보면 참 간단치가 않다.
그리고 지난 여름 외노협 수련회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던 이주판을 떠나 교회로 간다는 다른 단체의 상근자 송별회 자리에서 느꼈던 진한 아쉬움이 떠올랐다. 이 달이면 고작 일 년이니 나는 여전히 새파란 초짜지만, 몇 달 되지 않는 활동 속에서 처음으로 만난 친구 같았던 그가 참 좋았다. 실은 전혀 친하달 수 없는 관계였지만... 지난하고 징글징글했던 여수에서의, 소소하지만 근본적인 분열들에 분노와 회의를 감추지 못하고 쏟아낸 눈물을 받아준 게 그 친구이기도 했고, 어쩌면 그 덕에 작은 공부 모임을 꾸려 동대문과 용인과 부천을 오가며 정리되지 않은 고민이나마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시작에 선 활동가의 혼란이 좀은 전의와 각성을 동반하는 것이었다면, 나름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활동가에게 수년 째 반복되는 의미없는 분열의 답습을 목도하는 일은 무기력과 냉철한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누구에게든 편안함을 선사하는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가진 그 친구가 잔뜩 술에 취해 털어놓은 회복할 수 없는 절망감에 나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가시밭길 떠나 비단길 가는 게 아닌 바에야 잡을 수도 없는 게 그를 보내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었던 것 같다. 말 통하고 편한 동료를 발견하자마자 잃어버리는 것 같아 아쉽기 그지 없었지만, 그건 그저 내 사정일 뿐이었으니까.
그 여름 날 한밤의 술자리에서, 실은 민망하리만큼 과거의 향수에 도취되어 쩌렁거리며 투쟁가를 부르기까지 하는 사람들을 보며 적잖은 이물감을 느끼기도 했던 그 난망한 자리에서, 그가 문득 이 노래를 불렀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노래의 가사가, 당황스러울만큼 또렷이 기억이 났다. 이 노래를 듣고 부르던 날들의, 하릴없이 비장하고 애틋했던 도취된 심사가 떠올라 좀은 열적은 채로, 하지만 단지 수사의 힘만이 아닌 어떤 날 것이 주는 의연한 진실의 깨달음 같은 것들이 울컥 복받치는 그런 밤이었다.
이따금 찾아와도 좋지만 동지가 되어 꿈꾸는 세상을 함께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욕심도 사랑이고, 흔들리고 부딪치면서 마음 나누고 눈물 뿌리며 함꼐 가고 싶었던 사람의 뒷모습을 떠올리는 것도 사랑인지 모르겠다. 함께 싸우던 동지의 불타는 시신을 보며 미치겠다를 연발하는 것도,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 끝내 버티지 못해 기어이 제 몸에 불 붙여 발화하는 것도 어쩌면 사랑인지 모르겠다. 사랑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 적 없지만, 오늘은 그런 게 사랑인가보다. 배설하듯 주절거려봤자 곧 잊어버리고 세상속에 파묻히겠지만. 눈물 나게 극진하고 눈물 나게 아프고, 실은 눈물 나게 가짜여도. 그래도 가끔은, 오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