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다니듯 출퇴근을 반복했고, 선생님 대하듯상사와 선배들을 대했고, 자유의지보다 규범화된세계관을 우선하며 지내왔다. ‘어떤 기자가 되고싶은가‘의 세계도 있었던 것 같은데 ‘조직의 구성원이라면 이래야 한다‘의 세계가 늘 이겼다. 그런나를 조직은 싫어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살려뒀으니까. 그렇게 30대가 저물었다. 좋은 기자가 되지도못했고 즐겁게 살지도 못했다. 월급만 주룩주룩 받았다. 10년이 넘도록.
"천천히 걸으니까 좋다. 저런 나무도 보고."
당신은 역사책에서도, 도심의 전쟁 기념비에서도 이여성들의 이름을 찾지 못할 테지만, 내게는 그들이 진정한 영웅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가. 조금 더, 조금 더 끔찍한 이야기를 끝없이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어떤 괴물을 키우도록 부추기고 있는 건 아닌가? 포위됐던 콩고 동부에서 막구출되어 비행기에 가득 태워진 벨기에 수녀들에게, 아마 실화는 아니겠지만, "여기에 강간당했고 영어 할 줄 아시는 분 계세요?"라고 외쳤다는 그 텔레비전 리포터와 우리는 정말 다를까?
저희가 얼마나 가난한지 아시겠죠. 하지만 저희가 바라는 건 그냥 돈이 아니에요. 부당한 일을 당한 건 바로 저희라고 인정받는 것이죠."
이브 엔슬러는 나와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저는오랫동안 성폭력을 연구했어요. 그런데 남자들은 다 어디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건 우리 문제가 아닙니다. 여성이 여성을 강간하는 게 아니잖아요. 이건 남성들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기술과 통신 덕택에 나는 몰랐노라고 아무도 말할 수 없게 됐다. 이 드라마에 눈을 감는다면 공모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범죄의 책임은 가해자뿐 아니라 못본 척하는 사람들에게도 있다.
엄청난 페이지터너는 아니지만 계속 넘길 수 밖에 없는 힘을 가진 책입니다. 이 수첩이 우연히라도 그 가치를 아는 자의 손에 들어 간 것은 얼마나 행운인가요?
콕토는 피카소를 미치도록 숭배했다. 일기에서피카소를 "가난하게 옷 입어도 화려하고, 마치 구멍난 물탱크처럼 천재성을 사방으로 쏟아내는 사람으로 묘사했다.
막스 자코브의 유해가 파리 이브리 묘지의 유대인 구역에 묻히고 며칠 뒤 그의 사망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추도 행사를 마련했다. 레리스의 넓은 응접실에서 피카소가 그린 자코브의 초상화를 앞에 두고 피카소의 희곡을 처음으로 공개 낭독한 것이다. 피카소가 즉흥적으로 쓴 그 초현실주의적 희곡은 전쟁 동안의 궁핍굶주림, 추위에 관한 내용이었다. 제목은 꼬리 잡힌 욕망이지만꼬리도 머리도 없는 작품이었다. 피카소는 사흘 만에 자동기술로글을 써냈고, 아마 다시 읽어보지도 않았을 것이다.중요한 것은 작품 자체보다 캐스팅이었다. 레리스가 뚱뚱한발‘ 역을 맡았고, 레몽 크노가 ‘양파‘, 시몬 드 보부아르가 사촌장 폴 사르트르가 ‘둥근 조각‘, 루이즈 레리스가 ‘두 마리 개 도라마르가 ‘기름진 고뇌‘ 역을 맡았다. 그리고 알베르 카뮈가 연출을담당했다. 관객으로는 피카소를 중심으로 라캉부부, 조르주 바타유. 장루이 바로와 마들렌 르노‘ 조르주 브라크 마리로르드노아유, 앙리 미쇼, 앙드레이 뒤부아와 그의 친구 뤼시앵 사블레 등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콕토는 참석하지 않았다. 화가 났던 걸까?막스 자코브와 아무 상관도 없는 이 추모행사를 거부했던 걸까?도라는 클로드 시몽과 함께 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몽은 거의무명의 젊은 작가였다. 그러니까 그 자리에 장래의 노벨상 수상자가 사르트르를 빼고도 두 명이나 있었던 셈이다.
마리로르 드 노아유가 친한 사람들에게 자주 하던 질문이 있다."당신은 몇 살에 지금의 당신이 되었죠?" 이 질문에 나는 도라가"1951년!"이라고 대답했기를 바란다. 그렇게 내가 가진 수첩에의미가 부여되면 좋겠다. 도라는 피카소가 떠난 뒤 육 년을 살아냈다. 마흔네 살, 우울증에서 벗어났다. 균형을 잡아주는 세 기둥, 신과 라캉과 그림 덕분이었다. 물론 아슬아슬했지만, 그래도 그균형 덕분에 도라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남들 눈에 어떻게보이든 내 운명은 멋지다. 한때는 어떻게 보이든 내 운명이 몹시가혹하다고 말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