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미여사의 현대물은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시대물은 영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몇번을 읽어보려 했지만 어려운 단어가 너무 많이 나와 완독이 어려웠지요. 하지만 얼마전 ‘눈물점’을 재도전 한 것을 시작으로 에도시대에 푹 빠져 버렸습니다. 장편이라 하기에는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옴니버스식의 짧은 사건들이 담겨 있어 읽기가 수월했습니다.그리고 제가 에도전문가가 되지는 않을 바에야 어려운 단어는 그냥 건너 뛰어도 크게 문제되지 않음을 알게 되니 이야기가 더욱 재밌어졌지요. 게다가 등장하는 사건들은 무시무시하기도 섬뜩하기도 하지만 그 인물들은 어찌나 다정한지 같이 차한잔 하며 이야기 나누는 기분입니다.그리하여 새로 시작하는 미미여사의 시리즈를 놓칠 수 없었지요. 이전 시리즈는 방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방식이라 정적이었다면 이번에는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귀여운 기타군이 있어 더욱 활기차게 느껴집니다. 이번에 등장하는 기타도, 마쓰바 마님도 무척이나 다정하니 앞으로도 계속 만나고 싶어지고요. 특히 이번에는 번역자님이 뒤편에 간략하게 에도시대에 대해 설명해 주신 부분이 무척이나 도움이 되었습니다. 책을 읽기 전에 미리 보았다면 더 좋았을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요.
얼마전 중국집, 경양식집에 대한 리뷰책을 연달아 읽은 후 그 기세를 몰아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어리석었죠. 이 책이 음식점리뷰집이라 생각했다는 걸요. 하지만 제가 제일 귀여워 마지않는 장항준 감독님의 말을 따르자면 아무 정보 없이 읽은 책이 제일 재미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이세린의 직업세계도 흥미로웠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젊은이의, 직장인의 삶에 동감이 되고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특히 비빔밥편에서…)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나가며 직업인으로서의 자신감과 생활인으로서의 연민을 동시에 가지며 철학적으로 사색하는 이세린의 방식을 존경합니다.
1. 의무가 아닌 사명으로 일어나기2. 호기심이 아닌 궁금증을 가지고 질문하기3. 천천히 걸으며 생각하기4. 거리를 두고 어슬렁 거리며 보기5. 깊이 듣기6. 평범한 현재를 즐기기(충분하다=완벽하다)7. 주변에 공감을 가지기8. 옳음을 위해 싸우기9. 선한 마음으로 행동하기10. 자신의 감각으로 아름다움을 누리기11. 반복되는 매일을 즐기기12. 현재의 나를 다스리기13. 나이드는 자신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기14. 죽음을 두려워 않기
마르쿠스는 골치 아픈 사람에게서 영향력을 빼앗으라고 제안한다.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칠 자격을 빼앗을 것. 다른 사람은 나를해칠 수 없다.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있는 것은 나를 해칠 수 없기 때문"이다. 옳은 말씀이다. 왜 나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신경쓰는 걸까? 생각은 당연히 내 머리가 아니라 그들의 머릿속에서일어나는 일인데.
어쩌면 정말로 소크라테스는 일종의 지혜,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아는 지혜를 지녔는지도 몰랐다. 소크라테스에게 가장 최악의 무지는 지식의 가면을 쓴 무지였다. 편협하고 수상쩍은 지식보다는폭넓고 솔직한 무지가 더 나았다.
에피쿠로스는 정치적 유대가자족의 가능성을 낮춰 결국 행복을 외부에 위탁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에피쿠로스의 모토는 라테 비오사스Lathe Biosas, 즉 숨어사는 삶‘이었다. 세상에서 물러난 사람들은 늘 의심받는다. 우리는 은둔자에게서 위협을 느끼는 만큼 그를 조롱한다.
죽음에 관해서 에피쿠로스는 마음을 편하게 먹으라고 말한다.물론 죽어가는 과정이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것은 그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 고통에는 본질적으로 끝이 있다. 그 고통은 평생 지속되지 않는다. 고통이 가라앉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다. 어느 쪽이든 두려워할 것은 없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규정했다.우리는 존재의 차원에서,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긍정 정서positiveaffect의 차원에서 쾌락을 떠올린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결핍과 부재의 측면에서 쾌락을 규정했다. 그리스인은 이러한 상태를 아타락시아staraxia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를 만족으로 이끄는 것은 어떤 것의 존재가 아니라 바로 불안의 부재다. 쾌락은 고통의 반대말이 아니라 고통의 부재를 뜻한다. 에피쿠로스는 향락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평정平靜주의자였다.
충분히 좋음은 안주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변명도 아니다. 충분히 좋음은 자기 앞에 나타난 모든 것에 깊이 감사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완벽함도 좋음의 적이지만, 좋음도 충분히 좋음의적이다. 충분히 오랜 시간 동안 충분히 좋음의 신념을 따르면 놀라운 일이 생긴다. 마치 뱀이 허물을 벗듯 ‘충분히‘가 떨어져 나가고, 그저 좋음만이 남는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고민하지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만 잘하면서 즐겁게 사는 게 가장 현명한 생각이라는 것이지요.
내친김에 ‘경양식집에서’까지 단숨에 읽어 버렸습니다. 신기하게도 두권의 음식점 소개 책을 읽으면서도 그다지 허기가 들거나 식욕이 일지는 않더군요. 모든 음식이 대부분 아는 맛이니까요. 하지만 우연이라도 그 지역에 가게 된다면 들려보고 싶은 마음에 꼼꼼히 저장해 두었습니다. 경양식집과 관련된 이야기 하나! 어릴 적 동네에 ‘궁전 레스토랑’이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동네 유일한 경양식집이었지요. 셋집에 살던 우리 식구들이 정말 큰맘먹고 외식하는 곳이었습니다. 어느 날 엄마와 저만 외출을 하고 동생과 아빠는 집에 있었는데 귀가하니 문은 잠겨 있고 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휴대폰도 디지털키도 없던 시절이기에 엄마와 저는 집에도 못들어가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한참만에 아빠와 동생이 나타나서는 ‘궁전 레스토랑’에서 돈까스를 먹고 왔다 했습니다. ‘이럴수가!!!! 동생만 레스토랑에서 돈까스를!!!!’ 그 ‘궁전레스토랑’의 맛은 잊었지만 그날의 분노는 아직도 마음 구석에 남아 있습니다. 이야기 둘! 남편과 어릴적 먹던 경양식집 돈까스 이야기를 하다가 남편에게 “당신은 밥이랑 빵중에 뭐 달라고 해서 먹었어?”라고 물었더니 “우리엄마는 항상 ‘빵으로 주시구요, 밥은 서비스로 주세요’ 라고 해서 매번 같이 먹었어”랍니다. ‘이럴수가!!! 그런 방법이 있었다니!!! 어머님 존경합니다.’ 매번 빵과 밥사이에서 고민했던 시간들이 무의미해졌습니다. 다시 경양식집에 가서 돈까스를 먹게 된다면 어릴 적 이야기들이 다시 술술 나오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