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큰 기대를 한 소설이었는데 무척 화가 나서 책을 덮었습니다. 역자가 설명했듯이 대단하기로 소문난 에도가와 란포상을 받은 책인데 너무 성의없이 번역,편집한 것이 아닌가요? 분명 3인칭의 소설로 시작을 하였는데 초반부터 갑자기 1인칭으로 바뀌는 번역이 있었습니다. (혹은 따옴표가 생략된 것인지... )그냥 한번의 단순한 실수려니 했지만 잊을만 하면 한번씩 잘못 표현되어 내용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긴장감이랄 것도 없이 대충 읽고 말았네요.
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14, 145, 327, 433, 447, 478페이지 입니다. 저의 이해가 잘못된 것인지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별한개도 아까워서...별점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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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20-03-04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다들 이런 번역이지 싶어, 이런 번역에 그냥 무디다고 해야지 싶은데요.
출판사 보도자료로 알라딘에 올린 본문 가운데..

˝그 말의 울림은 너무도 시의적절해서 경제 사정을 잊게 할 만큼 무시무시하고 불길했다 (60쪽)˝

.. 이런 글자락을 보니, 번역이라고도 번역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무늬는 한글인데 한국말이라 할 수 없는 이런 글을
‘돋보이는 대목‘이라며 따서 실었으니 따질 수 없지 싶습니다.

첫 글월이 ˝장례식장 장막만 보면 배가 고파진다˝라고 나오던데
˝배가 고파진다˝가 한국말일까요... ˝배가 고프다˝일 뿐인데..

그렇게 보면 책이름 ˝도덕의 시간˝도, 무늬만 한글이지
번역이라 할 수 없고...

vooc 2020-03-05 0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맞아요. 정말 좋은 책이라는 데도 번역이 이상하면 도저히 못읽겠어요. 반면 번역서인데도 문장이 너무 좋다는 느낌을 받으면 감동이 몇배는 되더라구요. 원서를 못읽는 탓이지만 그렇기에 전문 번역가들이 더 잘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생깁니다.

firesea 2020-03-18 0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클은 아니지만 소설 속에서 화자의 시점이 바뀌는 ‘이중 시점‘ 소설은 은근히 흔합니다. 일본 소설도 그렇지만 국내 소설 중에서도 황순원의 ‘소나기‘,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박완선의 ‘옥상의 민들레꽃‘ 등 소설 속에서 3인칭, 1인칭, 전지적 작가시점, 관찰자 시점을 넘나드는 작품이 꽤 있습니다.

vooc 2020-03-18 10:41   좋아요 0 | URL
네..조언 감사합니다. 저도 그런 정도는 알고 있지만 이 책은 너무 뜬금없어서요. (오죽하면 제가 페이지까지...ㅎㅎ) 챕터나 문단의 구분 없이 그런 식으로 인칭이 바뀌어 버리면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혼란하다는 개인적인 감상이었습니다...

살인교수 2021-01-05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부분들은 명백하게 잘못된 인칭 사용이네요. 아마도 작가의 잘못이라기보다 번역자가 번역 도중 실수한 부분을 편집자가 찾아내지 못한 채 그대로 인쇄된 듯싶네요. 편집을 꼼꼼하게 검수못한 출판사의 잘못이니 재판 때는 반드시 수정되어야겠죠.
 
내가 당신의 평온을 깼다면
패티 유미 코트렐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다들 우리가 늘 강요당하는 일에 반대하거나 의문을 던질 용기도 힘도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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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 우리는 잠시 매혹적이다
오션 브엉 지음, 김목인 옮김 / 시공사 / 2019년 9월
평점 :
품절


작가가 직접 쓴 언어가 아니고 취향에 맞는 글의 내용도 아니었지만 무척이나 아름답다운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그의 혼란한 마음이 전해져 잔잔한 바람에 흔들리는 호수가 된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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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옥타비아 - 2059 만들어진 세계 활자에 잠긴 시
유진목 지음, 백두리 그림 / 알마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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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년 전에 대해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삶이 곧 끝날 것이라 생각하며 하루를 살았다는 것이다. 삶이 곧 끝난다고생각하면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싼 세계를 그나마 견딜 수 있었다. 육십 년 전에는 다른 것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삶을 끝내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열아홉 살이었다. 그로부터 삶은 유유히 흘러갔고, 나보다 앞서 있거나 나보다 뒤처진 채였다. 나 와 삶이 나란히 함께였던 적은 드물었다. 뒤따르는 것보다는 앞 서는 것이 좋았지만 나란히 함께일 때는 말할 것 없이 기뻤다.
좀 더 나이가 들면서 삶은 나와 함께 자주 멈추었다. 지난 몇 년간은 방에 앉아 젊은 날 내가 오르내렸던 산의 능선과 망 설임 없이 뛰어들었던 바다의 온도를 생각하며 보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오랜 시간을 들여 생각을 하고, 생각한 그 모든것을 감쪽같이 잊어버린다. 하지만 이제 나는 세상이 필요로 하 는 사람이 아니다. 생각한 것을 잊어버린다 한들 문제될 것이 없다는 뜻이다. 내가 무언가를 잊음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거나 중요한 일들을 망쳐버리게 되었던 날들은 오래전에끝이 났다. 나는 오롯이 혼자가 되어서 모든 것이 떠나가고도 내곁에 남아 있는 삶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버려두면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고 스스로 두려 워 나쁜 짓은 저지르지 못하고 적당히 자신의 삶을 맡길 것을 찾으며 살아가는 사람들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고 그게 나였다.

나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으면서 자신을 살려두고 있다. 이 세상에는 나를 살아가게 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내가 삶에 대해 비참함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살려두는 것만으로도 살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우리는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 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처럼, 한때 나는 만족스러운 삶의 한가운데서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것만으로도 영원히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바로 그점에 절망했다. 우리가 함께 하는 삶이 반드시 끝나리라는 것. 나는 혼자 남겨지리라는 것. 그가 혼자 남겨진다면 그 역시 절망할 것이다. 그는 슬픔에 잠길 것이다. 하지만 그럴 때도 나는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잘 살아가기를 바랐다. 내가 먼저 죽었다면 그는 그렇게 했을까?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슬픔과 기쁨이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슬픔과 기쁨이 둘일 때는 그 어느 쪽도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지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살 수 있다면 당신은 지구를 떠날텐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삶의 본연으로 삼는일이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 되어버리는 때가 있었다.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는 비참을 견디며 어떻게든 살아야 하는때가 있었다.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오로지 혼자서만 책임지면서 타인의 요구도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타인은 요구만 할 뿐 책임은 없다. 타인의 요구를 거부하고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하는 순간 나는 고립된다. 하지만 본연의 모습대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은 곧 자신의 생계를 위험에 빠뜨린다는 것과 같은 얘기다. 하지만 적어도 스스로 위험을 택할 자유는 있었다. 삶이 끝날 때는어떨까? 그때도 희망이 필요할까? 끔찍한 범죄의 대상이 되거나고통스러운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면 어떨까? 다른 누군가에게삶은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고, 저마다 충분히 아름답다고 나로
서는 말할 수 없다. 만약 삶으로부터 충만한 감정을 얻고 싶다.
면 우리에게 당장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을 원하라고 말하고 싶다. 이를테면 날씨 같은 것. 흘러가는 구름 같은 것 말이다. 어느날 나는 우연히 올려다본 하늘에서 달빛에 투명하게 빛나는 기이한 구름들을 보았다. 내가 살아 있어서 이런 구름들을 다 보는구나 하고 시시한 생각에 한참을 잠겨 있었다. 한밤중의 다시없을 창문 밖의 광경은 내가 단지 살아 있기 때문에 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창문 밖을 보는 것만으로도 생동하는 마음을 지녀야 할 테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의 마음을좋아한다. 구름을 따라 움직이는 나의 마음을, 그러니 삶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타인을 향해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말 할 수 없다. 때로는 삶에 대해 입을 다물 줄도 알아야 한다. 내가 타인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

옛날에는 ‘운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당신과 내가 만난건 운명이야, 이렇게, 그러고 보니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사라진 말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다. 율리는 한참 후에야 그 말을 이해했다. 율리는 사람이 사람에게 운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신비롭게 여겼다. 그건 마치… 자기 자신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으로들려요. 내가 살아가는 데 다른 사람이 왜 필요하죠?
살아오는 동안에 나는 무엇보다 안전한 기분을 원했다. 큰질병에 휩쓸리지 않고, 끔찍한 사건에 휘말리지 않고, 불행한 시간에 굴복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와 함께 사랑 속에서 아무에게도 설명할 필요가 없는 밤과 낮을 원했다.

쇠락한 육체와 건강한 육체 중에서라면 단연코 건강한 육체가좋지만 나는 젊기만 한 정신은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하게 는 싫어한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들과 어떤 문제로 깊이 논쟁를 하다 보면 내가 젊은 시절에 했던 말들이나 행동들이 고스란내게 돌아오는 것만 같아서 괴롭다. 내가 했던 짓들로부터 고스란히 복수를 당하는 것만 같다.

삶은 이상한 것이다. 내가 원할 때 곧장 멈출 수 없다. 계수하고 싶을 때 계속할 수 없는 것처럼. 그런 걸 공평함이라고 하수 있을까? 살아 있는 동안에는 여러 번 삶을 멈추고 싶었다. 이젠 정말 그만하고 싶다는 충분한 감정이 아니라 지쳐서, 힘이 없어서, 원하는 삶이 너무 멀리 있어서, 그저, 단지, 멈춰버렸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그럴 때 정말로 자기 자신을 죽일 수 있다.
면 어떨까. 삶에 대해 이런 마음이 스칠 때 나는 슬픔을 느낀다.
내가 원해서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원해서 이 세상을 떠날 수가 없는 거라면, 나는 그 공평함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고, 또 받아들이면서 세상을 미워했다. 애초에 나에게 주어진 자유라는 것도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만 누릴 수 있는 제한적인 자유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받아들이는 만큼 또 세상을 미워했다. 삶은 어쨌든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인간이 매탈 수 있는 것만을 바랄 때 지속 가능한 것이다. 내가 인간으로 살아 있는 것을 잠시 멈추고 인간이 아닌 것으로 있기를 바랄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작가는 인가으로 살아 있기를 멈추고, 인간이 아닌 다른 것이 될 수 있다.
구름이라면 어떨까. 구름인 것을 멈추고 다른 형태의 것이 되기를 동경할까? 그래서 비가 되는 구름이 있는 걸까?
말하자면 나는 의도적으로 특정한 감각을 강화시키며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든 살아 있어야 한다는 쪽으로 말이다. 살아 있고 싶도록 깨끗하게 옷을 입고, 살아 있고 싶도록 정갈하게 책상을 정리하고, 살아 있고 싶도록 집 안에 쓰레기가 쌓이지 않도록 했다. 살아 있고 싶도록 아름다운 것을 보고 싶었고,
살아 있고 싶도록 나를 먼 곳으로 데리고 가고 싶었다. 그리하여 살아 있고 싶도록 맛있는 음식이 주는 기쁨을 즐기고 싶었다. 살아 있고 싶도록 나는 내가 벌어들이는 돈을 썼다. 내가 가진 적은 것들이 나를 비참하게 할까 봐 대범한 마음과 대범한태도를 가지려고 했다. 삶을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무엇보다 몸이 그 마음을 감당할 수 있도록, 나는 나를 훈련시켰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내가 나를 죽이려들까 봐 두려워하면서 평생의 시간을 살아온 것만 같다. 죽음에 대해 명확하게 생각하지 않는 순간에도 죽음에 대한 희미한 감정이 나를 계속해서 위축시켰던 게 분명하다. 결과적으로 나는 나를 죽일 수 없는 부류였다. 스스로를 죽일 수 있는 부류였다면 나는 벌써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미 세상에 없을 것이다. 아주 없어져버렸거나 내가 모르는 다른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토록 오랫동안 내가 살아온 날들이 애초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한낱 꿈을 꾸고 일어난 것처럼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러고 보면 기억과 꿈을 혼돈하기 시작한 지는 꽤 오래되었다. 그가 살아 있을 때만 해도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꿈처럼여기는 일은 오롯이 기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을 꿈처럼 돌아보는 것을 좋아했다. 세상과 나를 분리해 생각하거나 세상으로부터 나를 격리시킨다 하더라도 곁에 그가 있으니 괜찮았다. 혼자서 어떤 환상과 꿈을 헤매는 나는 그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되었다.

자신의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 건 자신뿐이다. 나는 인간이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도로는 입소자들이 죽지 않고 살아갈 마음이 들도록 그들을 재구성한다. 우리는 반드시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태어난 이상 반드시 살아야만 하는가? 스스로 존엄을 지키며 살아갈 수 없다면 스스로존엄을 지키며 죽어서는 안 되는가? 국가가 개인을 정말로 도울 수 있다면 왜 죽음만은 돕지 않는 건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인간이 자신의 죽음을 자신에게 올바른 방식으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언젠가 는 죽음을 결정한 사람이 편안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자신의 존엄을 지키며 생을 마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것이 나의 미래가 되기를 꿈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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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작가에게는 죄송하지만 “재윤의 삶” “서울구경”의 그 작가님인줄 알고 읽었는데 온통 살빼겠다고 징징거리는 글이라니요...저도 다이어트가 연속인 나날이지만 이렇게 자신의 몸을, 자신의 생활을 비관하고 체념하는 글은 읽고 싶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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