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가 불평등하다는페미니스트들의 비판과 달리 여성을 모욕하는 일에서는 남녀가평등해 모두에게 책임이 있었다. 여성도 둘째가라면 서러웠다.

진화론이라는 것이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점점 똑똑해졌다고 장담하지 않았던가?
적자생존을 통해서 살아남은 이들이 이렇게 폭력적이면서도 우둔하다고?

어째서 세상은 ‘화나다‘, ‘차분하다‘로만 사람을 판단하고 나누는 걸까. 인류의 감정이 그렇게 단순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화를 내는 사람은 차분하지 않고, 차분한사람은 반드시 옳다. 심지어 정의롭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는 인류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여성이 늘 이것저것 걱정하는 걸 싫어한다. 그러나 걱정이 많다는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걱정하는 것에만 불과하다는 게 얼마나좋은 일인지 그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눈앞에 있는 남자가 어떤 생각을하고 어떤 생각을 하지 않을지 반드시 알아내야 했고, 이들이 할일과 하지 않을 일을 고려해야 했다. 어쩌면 그 모든 일이 순간의선택으로 결정되는 일에 불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건우리의 안전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많은 걸 고려하면 사람들에게비웃음을 살 수 있지만, 대신 그날만큼은 안전하게 살 수 있었다.
아니, 물론 그들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니었다. 그들 중 대다수는 아주 좋은 사람들이니까. 여성을 강간하지도, 성희롱하지도 않았다. 그건 나도 알았다. 문제는 그들 중 누가 그러하고 누가 그러하지 않은지를 알 수 없다는 거였다. 어제 그러지 않았다고 해서 오늘도 그러지 않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가장 큰 억압이 평등권 추구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경쟁 게임에서벗어나지 못하는 데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각각의 세부 항목마다별 다섯 개짜리 호평을 얻으려고 어쩔 수 없이 애를 쓰다니. 그리고 가장 우스운 건 이거였다.

"아니지. 성적인 농담을 한다거나 사업적으로 성공했다거나 성격이 단호하다는 건 내 개인적인 특징이잖아. 이런 게 대장부랑무슨 상관이야. 그럼 성적인 농담을 안 하는 좋은 남자들이 너무억울해하지 않겠어?"

인생이라는 게 있잖아, 사실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지껄이든 신경 쓸 필요가 없어. 저들은 성희롱도 못 본 척하는 놈들이거든. 아줌마 욕도 대놓고는못해서 멀리서 속삭이는 놈들이라고. 저딴 놈들의 생각 같은 건신경 쓸 필요도 없어.

자기 아이를 픽업해 오라고 하거나 생활용품을 사 오라고 하거나 전처의 전화를 대신 받으라고 하는 대머리 배불뚝이 전 상사에게 사실은 온화함과 인내심, 인정이라는 또 다른 면모가 있었다면? 그러한 면모들을 정말로 알고 싶을까?

"아, 주인공 배우라는 그 딸이구나? 어쩜 이렇게 예쁠까. 엄마따라 시장에도 왔네. 자상하기도 해라. 친정에 자주 와서 엄마랑시간도 보내 주고 그래."
(아, 며느리구나. 요즘 통 얼굴을 못 봤네. 며느리가 집안일을 좀 더도와야지. 시어머니 연세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어. 젊다고 너무 자기놀 생각만 하면 안 된다고.)

저는 제가 타이완 여성에게서 보았던 보이지 않는 족쇄‘들을『여신 뷔페』에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엄청난 죄악처럼 보이는 족쇄는 아니지요. 가끔은 달콤한 설탕물이 입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족쇄들을 정확히 짚어 낼 수 있어야만 다음에 비슷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더는 가부장제의 공범이 되지 않겠다고자기 자신을 일깨울 수 있습니다.
비슷한 상황을 마주했는데도 이를 잊게 되었다면, 혹은 아직은그렇게 할 수 없는 거라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어쨌든 인류 사회에 수천 년이나 심어진 독소인걸요.
포기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다음에 안 되면 그다음에 하면 되는걸요. 우리 계속 함께 노력해요.


2025년 6월
류즈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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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건과 갈등없이 마치 인상파의 그림을 보는 듯한 소설이었습니다. (마침 책에서도 터너를 언급했더라고요.)책을 읽는 동안 유튜브로 iss에서 보여주는 지구를 한참이나 보았습니다. 수시로 해가 지는 광경이 비현실적이기는 했지만 그 아래 어딘가에 우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니 먹먹해 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어쩌면 지구에서 태어난 우리 모두 이미 죽어서 사후 세계로 온 게 아닐까. 죽어서 가는 곳. 이 비현실적이고 믿기 힘든 세상이라면, 저 멀리 아름답고도 외로이 빛을 발하는 유리구슬 구체야말로 그런 곳이 아닌가.

지구는 주변부도 중심도 아니다. 전부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 그러나 확실히 보통은 아닌 듯 보인다. 돌로 만들어졌지만 여기서는 어슴푸레한 빛이자 에테르처럼 보인다. 지구는 세 가지 방식으로 움직이는 민첩한 행성이다. 자전축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그 축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으며,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 이 행성은 중심에서 밀려나 주변부로 좌천되어 무언가를 따라 도는 존재다. 작은 혹 같은 달을 빼면 무엇도 지구를 따라돌지 않는다. 이런 존재가 우리 인간을 품고 있다.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를 계속해서 알려 주는, 나날이 커지는 망원경 렌즈를 닦는 우리를. 우리는 멍하게 거기 서 있다. 머지않아 우리는 우리가 우주의 주변에 있을 뿐 아니라 우주가 주변일 뿐임을. 중심은 없고 그저 어지러이 왈츠를 추는 것들의 무리뿐임을 깨닫는다.

이제 인류는 자해와 허무주의에 빠져 닥치는 대로 깨부수는 10대 후반기에 접어든 게 아닐까. 살게 해 달라고 한 적도, 돌봐야 할 지구를 물려받게 해 달라고 청한 적도, 이토록 혼자 억울하고암울하게 살게 해 달라고 바란 적도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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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40여년 전에 손택여사가 화내던 상황들은 아직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회는 젊음에 정서적 특권을 부여하고, 이것이 모두에게 나이 듦에 대한 불안을 일으킨다. 현대의 모든 도시화된 사회가(부족사회와 달리) 성숙함의 가치를 낮잡아 보고 젊은 시절의 기쁨에만 한껏 영광을 돌린다.

여성이 ‘미스‘와 ‘미세스‘로 나눔으로써 결혼을 했느냐 안 했느냐에끊임없이 관심이 집중된다는 사실은 혼인 여부가 남성보다 여성에게 훨씬중요하다는 믿음을 보여준다.)

나이 듦은 생물학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사회적 판단이다. 완경기(수명이 늘어나면서 갈수록 늦게 찾아오고 있다)에 겪는 혹독한 상실감보다 훨씬 광범위한 것이 노화로 인한 우울감이다. 이 우울감은 여성의 삶에서 실제로 벌어진 사건에서 비롯된 게 아닐 수 있다. 이 우울감은 여성의 상상력이 자꾸 ‘억제되는‘
상태이며, 이 상태를 명하는 것은 바로 사회다. 즉, 이 우울감은사회가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을 자유롭게 상상하지 못하도록 제한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여성은 변화가남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걱정하지 않고 스스로를 바꿔야 하고, 서로를 바꿔야 한다. 오로지 여성이 자기 자신을 생각하고 무엇이 남자에게 좋은지를 망각할 때만 여성의 의식이 변화할 것이다. 남성과 협업해서 이러한 변화에 착수할 수 있다는 생각은 여성 투쟁의 범위와 깊이를 축소하고 하찮게 만든다.

‘해방된‘ 여성의 첫 번째 책임은 최선을 다해 가장 충실하고 자유롭고 창의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두 번째 책임은 다른 여성들과 연대하는 것이다. 해방된 여성은 남성과 함께 살고일하고 섹스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이 처한 상황을 현실보다 더단순하거나 덜 의심스럽거나 타협으로 가득하지 않은 것처럼 묘사 할 권리는 없다. 남성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다른 자매를 배신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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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어두운 걸 좋아하십니까 : 하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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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시작한 커플은 날개를 받쳐 주는 바람이 있으니 우리처럼 관계를 유지하려고노력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래된 커플, 그중에서도 특히 피하고 싶은 과거의 끔찍한 그늘이 있는 커플은 날개를 퍼덕여야 한다. 우리가한게 그거였다.

내게 자신의 상상과 말초 신경을 맡긴 열혈 독자들에게도 무한한감사를 전한다. 그대들은 더 어두운 걸 좋아하는가? 좋다. 나도 마찬가지다. 이래서 우리가 영혼의 단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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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나는 유별나지 않다 - 채식을 넘어 삶의 태도에 관한 결정
헨리 스티븐스 솔트 지음, 서나연 옮김 / 이다북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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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을 반대하고 채식인을 폄훼하는 사람들과 싸우기 위한 대처법을 알려주는 책이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저는 그저 서로를 인정하기를 바랍니다. 채식인들에게 고기를 먹으라 강요하는 비채식인이 되지 말고, 비채식인들의 식당앞에서 피칠갑을 하는 채식인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각자의 숙고를 거쳐 내리는 판단에 따르는 길이 방해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 새롭고 낯선 개념과 싸우려는 사람들이 지적 안전장치도 갖추지 않은 채 오래되고 일반적인 오류만 맹목적으로 따르는 무모한 방식에 놀라곤 했다.

그들을억지로 끌어내어 우리 편으로 전향시키려는 것은 내관심사가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뿌리 깊은 신념으로 누가 육식을 하는지, 그들을 둘러싼 무지와오해를 걷어내고, 비록 그들 편에 있었지만 자연스럽게 우리를 이해하고 우리와 함께하고자 하는 이들을 우리 편으로 데려오는 것이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감정의 시험 못지않게 논리의시험에 도전한다. 식습관 문제, 아니 위대한 사회적문제라도 느끼는 만큼 생각할 수 있는 사람, 생각하는 만큼 느낄 수 있는 사람만이 올바른 해결책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유별난 것이 아니다.

채식주의자는 채소를 먹는 사람‘이라는 뜻이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활기 있는‘(vigorous)이라는 뜻의 라틴어 ‘vegetus‘(베제투스)에서 유래하는데, 엄격하게 해석하면 ‘활기를지향하는 사람‘을 뜻해요.

육식에 대한 혐오는 화학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사회적이며, 위생에 관련된다. 우리가 더욱 역겨운 형태의 식습관을 행하는 동안 동물에게는 어마어마한 고통이 불필요하게 가해지고, 인류의 건강과도덕에는 가장 해롭게 돌아온다는 믿음으로 우리는육식의 점진적인 중단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 운동이성공적으로 시작된 이상, 그 운동을 일컫는 명칭은단지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오만한 사람: 하지만 이 경우에는 충분히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만, 우유나 달걀 없이 식물성 식품만 먹는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이들의 행동은 적어도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습니다.

채식주의자: 맞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동료들보다 앞서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인정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우리 운동의 미래 단계를 지금부터 예상하는 선구자죠.

오만한 사람: 그럼 이 극단적인 채식주의가 더 이상적인 식습관이라고 인정하는 겁니까?

채식주의자: 그렇습니다. 하겠다고 약속한 일보다더 많이 하는 것은 귀중한 가치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약속한 일을 완수하는 사람들을 낮게 평가하는것은 아닙니다. 톨스토이의 표현대로 ‘첫걸음‘은 도축장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일에서 자신의 모든 공모관계를 깨끗하게 없애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만한 사람: 거듭 말하지만, 어떤 형태든 금욕주의를 실천해야 한다면 어설프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채식주의자: 물론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항상 그렇게 생각하죠.

채식주의의 존재 이유는 육식이 잔인하고 역겨우며 건전하지 않고 소모적인 관습이며, 인도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일관성이 없다‘라거나 ‘전부 아니면 소용없다‘라는 흔하디흔한 위선적인 말에 휘둘리지 말고, 스스로 할 수 있는 범위에서 할 수 있는 속도로 식습관을 개혁해야 한다는 인식을 널리 퍼뜨리는 데 있다.

‘잡식성‘이란 말은 어떤 뜻일까? 당연히 그것은 인간이 돼지처럼 ‘모든 것‘을 먹어야 한다는 뜻일 수는없다. 그렇다면 단지 육식뿐만 아니라 식인까지 허가할 것이다. 그리고 메이어 교수가 재치 있게 언급한것처럼 인간을 ‘식인성‘으로 분류해야 할 것이다! 추측건대 그것은 인간이 모든 것이 아니라 채식이나 육식 어느 것이든 먹기에 적합하다는 뜻일 것이다. 인간은 어떤 자연법칙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좋은 것을 선택하고 나쁜 것을 거부하며, 식생활에서절충적임을 의미한다.

‘살생‘이 비도덕적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불필요하게 목숨을 빼앗는 것이 비도덕적이지요.

그리고 《녹색의 장원》을 쓴 소설가이자 조류연구가 윌리엄 허드슨은 이렇게 언급했다.
"하등동물의 고통은 통제와 질병이라는 두 가지원인에서만 비롯된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자연상태의 동물들은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방해받지 않고 통제되지 않는다. 질병을 살펴보면, 야생동물이 병에 걸리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혹은 대부분 너무 급속히 치명적인 상태가 되어 인간이 질병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교하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것이나 다름없다. 자연상태의 동물에 관한 한 ‘생존경쟁‘이란 은유적인 투쟁이다. 짧고 격렬하게 벌어지는 다툼은 자연에서 너무 흔해 불행한 고통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다툼에서 유발되는 통증은 죽음을초래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곧 극복되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가 관심을 두는 일관성은 오직 후자의경우임을 명심하자. 채식주의자의 목적은 갤러해드처럼 결점 없이 완벽한 음식개혁가로서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야만적인 식생활 제도를인도주의적으로 개혁하기 위한 실천적인 조치를 하는 것이다.

채식주의자가 비난하는 것은 단순히 생명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하게 생명을 빼앗는 것이며, 모든 형태의 생명이 동등한 가치는 아니며, 고도의 감수성을 가질수록, 그리고 우리와 더 친밀할수록 우리의 인도주의적인 태도를 더강하게 요구한다는 사실을 무시한다면 채식주의에대한 어떤 비난도 부적절할 수 있다.

그들에게 장담하건대 우리는 일관성 있게 잔인하기보다는 차라리 일관성 없이 인도적이기를 원한다.

고통의 비용을 가장 많이 치르게 하는 음식은 가격도 가장 비싸지만, 자연이 우리에게 가리키는 건강에 유익하고 해를 끼치지 않는 식습관은 가장 저렴하면서도 가장 인도주의적인 방식이다.

우리가 식탁에서 누릴 즐거움을 위해 잔혹하게 도축한 우리와 같은 생명체의 시신을 두고신에게 감사를 표하다니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불손한 행위인가.

채식주의자들이 당면한 목표는 동물의 살육을 완전히 금지하거나 동물성 식품을 철저히 피해 단번에황금시대를 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불완전하더라도, 최소한의 혐오스럽고 야만적인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살육이 수반되는 현재의 식습관을 인도주의적으로 바꾸려는 실용적이고 명료한 시도다.

몇 년 전 한 채식주의활동가가 고기집에서 ‘당신이 먹고 있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폭력이다‘ 라는 피켓을 들고 영업방해 시위를 한 적이 있습니다. 유명한 플랫폼기업인 배민에서 열리는 치믈리에 행사장에서는 동물권활동가들이 ‘치킨을 먹지 말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행사장에 진입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들의 생각을 존중하고 옹호하는 입장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행동방식으로 누군가는 자유권을 침해당한다고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어떤 이는 채식을 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아~ 얼마나 오래 살려고 저러냐?" "그러면 풀뜯는 것 풀 죽이는 거 아니냐?" 라며 조롱하기도 하고 "유난 떨지말고 그냥 먹어먹어"라며 강요하기도 합니다.
육식을 취함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인간과 같은 고등동물의 육체를 함부로 대한다는 점이라생각합니다. 고대의 경우와 달리 인간은 더 이상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쾌락과 전시를 목적으로 다른 육체를 소비할 때가 있지 않나요? [아무튼, 비건]을 쓴 김한민 작가님은 채식을 하시지만 다른 사람들과의 식사자리에서 남겨 버려지게 되는 고기를 드신다고 합니다. 한 생명의 육체를 그저 쓰레기로 취급하고 싶지 않아서 라는데 그 와중에도 ‘이거 한민이 먹게 남겨라.‘라며 농담도 아닌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더군요.
저역시 고기를 먹는 사람이지만 식당앞에서 피켓을 들고 있는 사람을 보면 채식에 대한 거부감이 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책과 다양한 매체의 부드러운 안내를 받는 다면 조금씩 반대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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