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궤, 8일간의 축제
KBS 의궤, 8일간의 축제 제작팀 지음 / 민음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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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쾌할 수 있지만 여기서 ‘그친다.‘
피가 피를 부르는 악순환의 매듭을 끊어버린 정조. 비록 33년간의 원대한 계획은 아버지의 복수라는 사사로운 감정에서 시작했지만, 그 끝에서 선택한 것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었다. 더는 억울한 죽음이 없으며 일반 백성이 행복해지는 세상. 수많은 개혁 정책과 화성 건설을 통해 정조는 사심 안에 공심이 있는 사중지공을 만날 수 있었고, 겉으로는 국가와 백성을 위한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사심을 채우기에 급급했던 반대 세력들의 공중지사(公中之私)는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정조가 남긴 건배사는 "불취무귀", 즉 취하지 않은 자는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었다. 술을 즐기지 않던 정조가 8일간의 축제 기간에 신하와 백성들에게 던진 건배사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가 취하자고 했던 건 술이아니라 행복이 아니었을까? 모든 백성이 행복에 흠뻑 취하기를 바랐던, 그러나 그렇지 못한 지금의 상황을 미안해하던 국왕의 건배사. 다시 정조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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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 자폐는 어떻게 질병에서 축복이 되었나
존 돈반.캐런 저커 지음, 강병철 옮김 / 꿈꿀자유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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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레스트는 도널드에게 안전한 장소였다. 속속들이 알기도 했지만, 지역사회가 그에게 익숙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열대여섯 살때쯤 그는 마을 밖으로 이어진 고속도로를 따라 멀리까지 걷곤 했다. 여전히 하늘을 쳐다보며 허공에 뭔가를 끄적거렸다. 사람들은차를 몰고 지나가다 속도를 늦추고 인사를 건넨 뒤, 묻곤 했다. 태워줄까, 도널드? 돌아오는 길에 집에 데려다 줄까? 그저 걷고 싶다고해도 상관없었다. 도널드는 그들이 보호해야 할 존재였다. 누구나 그가 보호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없어서는 안 될 마을의 일부였으며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헌팅턴에서 입소자의 세계는 똑같이 생긴 두세 개의 병실로 구성되었다. 그것이 그들의 우주였다. 잠자는 방, 식사하는 방, 운이 좋으면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걸어다닐 수 있고, 저쪽 끝에 도달하면철창을 통해 잠깐 밖을 내다볼 수 있는 방. 아치는 이 공간을 다른수십 명과 공유했다. 출입문은 언제나 밖에서 잠겨 있었다. 세 개의방이 그들의 우주였다. 언제까지나.

실제로 "자폐증"이란 단어에 관련된 모든 갈등에도 불구하고 격렬한 논쟁을 밀고 나간 힘은 점차 사회를 변화시켰다. 자폐증을 가장 바람직한 방향으로 다루고자 노력했던 모든 사회는 그 복잡하고종잡을 수 없는 현상을 사회와 조화시키려는 과정을 통해 ‘어딘가다른 개인의 존엄성을 역사상 어느 때보다 크게 인정하는 쪽으로나아갔다. 이제 가장 심하게 대립했던 적들과 가장 관심없는 방관자들조차 자폐증에 대한 해석을 공유하게 되었다. 자폐증을 겪는다는 것, 자폐인이라는 것은 인류라는 옷감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주름일 뿐이며,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주름지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은 없다는 인식이다.

게르하르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소년을 괴롭히는 승객들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얘가 왜 그러냐구? 얘는 자폐인이요. 이제 당신들이왜 그러는지 말해봐요. 아니면 입 닥치고 조용히 가든지."
긴장 어린 정적이 흘렀다. 금방이라도 주먹다짐이 벌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두 남성은 버스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니콜라스 편이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 더 이상 니콜라스를 건드리지 않았다. 게르하르트는 어안이 벙벙했다. 동시에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이 솟아올랐다. 그는 그 버스가 즉흥적으로 자신이 평생 그려왔던 공동체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서로 정식으로 인사를 주고받은 것도 아니었지만,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노선을 달리는 버스를 타고 다녔던 십여 명의 승객 사이에 일종의 친근감이생겨났던 것이다. 미시시피주 포레스트처럼 이웃들은 어딘지 다른그 소년이 사실은 "우리 중 하나", 공동체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일은 뉴저지주의 한 버스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디서든 똑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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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재수사 1~2 - 전2권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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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되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다면 나는 태연히 살아갈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염치가 없거나 비열해서가 아니다. 내가 강해서도 아니다.
내가 자유롭기 때문이다. ‘살인하지 말라‘는 인간의 법과 신의 법 앞에 무조건 복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팀장님 말씀이, 아니라는 거야. 범인은 경찰 조직 전체가 함께 잡는 거지, 형사 하나가 잡는 게 아니라고. 사건이 나면 신고를 받는 사람이있고, 현장에 나가서 증거를 수집하는 사람이 있고, 그 증거를 분석하는 사람도 있고, 목격자 찾아다니면서 진술 받는 사람도 있고, 용의자몽타주를 그리는 사람도 있고, 수배 전단을 전국 곳곳에 붙이는 사람도있다, 그 모든 사람들이 힘을 합해서 범인을 잡는 거다, 그러시더라고.
뭐, 말하자면 이게 하나의 시스템이라는 거지, 수사시스템. 그리고그 시스템은 더 큰 시스템의 한 부분인 거야. 경찰은 수사를 하고, 검찰은 기소를 하고, 법원은 재판을 하고, 교도소에서 범인을 가두고 벌을주지. 뭐, 이건 형사사법시스템이라고 불러야 하나? 그 큰 시스템을 생각해보라고, 형사는 결코 범인을 잡아 응징하고 정의를 세우는 사람이아니야.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 일을 하는 건 커다란 시스템이고,
사람들은 거기서 자기가 맡은 역할만 할뿐이지. 형사도 그중 한사람이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생명과 자유와 행복 추구는 양도할수 없는 권리‘라는 선언에는 행복에 대한 정의 외에도 명료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
먼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두고 첨예한 논쟁이 계속해서벌어지고 있다. 인간과 비인간의 흐릿한 경계 지대가 있다. 태아라든가뇌사 상태처럼. 여기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구분선을 긋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태아의 생명권을 인정하면 필연적으로 임신부의행복추구권은 축소해야 한다.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이런 회색 지대는 더 넓어지리라. 머지않은장래에 인류는 유전자조작 기술로 반인반수를 만들 수 있을 것이고, 한사람의 기억과 의지를 기계에 옮길 수도 있을 테고, 네안데르탈인 같은우리의 옛 친척을 되살려낼 수도 있다. 그들에게도 기본권을 부여해야할까?
‘양도할 수 없다‘는 문구도 혼란스럽다. 한 개인의 행복추구권이 또다른 개인의 행복추구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100명의 행복추구권이라면 한 사람의 행복추구권보다 중요한 것 아닐까? 그 한사람에게 강제로 양보를 요구해도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혹시1만 명, 아니 100만 명의 생명은 한사람의 생명보다 중요한 것 아닐까?
계몽사상의 신봉자들은 이런 딜레마의 존재 자체를 애써 감추려 한다. 그들은 ‘한 사람의 생명이나 100만 명의 생명이나 똑같이 존엄하다‘ 고 말한다.
이는 삼위일체보다도 더 억지스러운 얘기다. 어떤 정부도 그런 원칙으로 국가를 운영할 수 없다. 현실 세계에서는 늘 우선순위를 따져야 한다. 어떤 백신이 매년 수십만 명의 사람을 살릴 수 있지만 백만 명에 한명꼴로 알레르기 쇼크로 인한 사망자가 나올 때, 우리는 그 백신을 모든아이에게 접종시킬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사람들은 그런 결정은 정부의 정책 담당자만이 하는 것이라고, 일반인들의 일상적인 고민거리는 아니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세계에는 하루 2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7억 명이 넘는다. 보통 사람이라도 구호단체를 통해 그들에게 돈을 보내는 방법은 아주 쉽다. 그러므로 내가 당장 필요하지 않은 최신형 스마트폰을 살 때, 나는명백히 선택을 하는 것이다. 사하라사막 남쪽에 사는 사람들 수백 명의끼니보다 과시성 소비로 인한 나의 만족감이 더 중요하다는향이 좋은 프리미엄 커피를 마실 때, 플라스틱 가구 대신 원목 가구를살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택시를 타거나 자동차를 운전할 때,
집에 있지 않고 여행을 할 때, 우리는 계속해서 절대빈곤 상태에 있는사람들이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 죽게 내버려두자고 선택한다. 우리는모두 학살자이다.
계몽주의 사회는 그런 선택을 허용한다. 스마트폰을 살까? 제3세계에 기부할까? 기부한다면 얼마나 할까? 그것은 온전히 개인의 자유다.
개인의 행복추구권을 사회가 침해할 수 없기에.
나는야그리고 그런 자유를 의식하는 순간 우리는 어리둥절해진다. 선의로가득한 사람들조차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른다. 어떤 이들은 주먹구구식으로 타협한다. ‘수입의 10퍼센트 정도를 기부하면 괜찮겠지‘ 하는식으로.

"동의합니다. 특히 청소년 범죄를 보면 그런 마음이 들어요. 왜 성인처럼 범죄를 저지를 힘이 먼저 생기고 성인처럼 충동을 자제하는 능력이 나중에 생기는 걸까, 하는 그 순서가 거꾸로였다면 세상이 훨씬 살기 좋을 텐데요"

연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에서 자란 사람만이 동물원에서 우리 안에 갇힌 육식동물을 보며 가슴 아파하고 가엾게 여긴다. 야생에서늑대를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은 창살에 대해 감상을 품지 않는다. 연지혜는 판사들이 우리에 갇히지 않은 범죄자를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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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경희
나혜석 / 메이크북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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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의 입술은 간질간질하였다.
‘먹고 입고만 하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배우고 알아야사람입니다. 당신처럼 영감, 아들 간에 첩이 넷이나 있는 것도 배우지 못한 까닭이고, 그것으로 속을 썩이는당신도 알지 못한 죄입니다. 그러니까 여편네가 시집가서 시앗(남편의 첩)을 보지 않도록 하는 것도 가르쳐야하고, 여편네를 두고 첩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도 가르쳐야만 합니다‘ 하고 말하고 싶었다. 이외에 여러 가지예를 들어 설명도 하고 싶었다.

이러므로 경희가 좋은 것을 갖고 싶고 남보다 많이 갖고 싶을진대 경희의 힘으로 능히 할 만한 일은 행여나 털끝만 한 일이라도 남더러 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남에게 빼앗길 것이 아니다. 아아, 다행이다. 경희의 넓적다리에는 살이 쪘고 팔뚝은 굵다. 경희는 이 살이 다 빠져서 걸을 수가 없을 때까지 팔뚝의 힘이 없어 늘어질 때까지 할 일이 무한이다. 경희가 가질 물건도 무수하다. 그러므로 낮잠을 한 번 자고 나면 그 시간 자리가 완연히턱이 난다. 종일 일을 하고 나면 경희는 반드시 조금씩자라난다. 경희가 갖는 것은 하나씩 늘어간다. 경희는이렇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얻기 위하여 자라 갈 욕심으로 제 힘껏 일한다.

"나는 이것을 가지고 巴里(파리)로 갈련다. 살러 가지않고 죽으러."
가면서 나의 할 말은 이것이다.
"靑邱(청구) 氏(씨)여 반드시 後悔(후회) 있을 때 내 이름 한번 불러주소. 四男妹(사남매) 아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社會制度(사회제도)와 道德(도덕)과 法律(법률)과 因習(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過渡期(과도기)에 先覺者(선각자)로 그 運命(운명)의 줄에 犧牲(희생) 된 者(자)이였더니라. 後日(일) 外交(외교관)이 되어 巴里(파리)로 오거든 네 에미의 墓(묘)를 찾아 꽃 한 송이 꽂아다오."

펄펄 날던 저 제비
참혹한 사람의 손에
두 쪽지 두 다리
모두 상하였네.
다시 살아나려고
발버둥치고 허덕이다
끝끝내 못 이기고
그만 척, 늘어졌네.
그러나 모른다.
제비에게는
아직 따듯한 기운이 있고
숨 쉬는 소리가 들린다.
다시 중천에 떠오를
活力(활력)과 勇氣(용기)와
忍耐(인내)와 努力(노력)이
다시 있을지
뉘 능(能)히 알리가 있으랴.

-舊稿(구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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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죽음 -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에 대하여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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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경멸받아 마땅한 조건 아래서 벌어진 경우에만 자유롭지 못한 죽음이다.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음에도 찾아온 죽음, 이는 겁쟁이의 죽음이다.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택한 죽음은 다르다. 아무런 사고 없이 똑똑한 의식을 가지고택한 죽음, 이것은 자유죽음이다."

즉, 그들에게 있어 인생은 ‘최고로 가치 있는 자산‘이 아니었다. 그뿐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줬다. ‘있어서 안 되는 것은 실제로 있을 수없다‘는 게 심오한 농담 그 이상이라는 것을! 그들은 죽음이라는 모순(살기 위해 죽는다는 사실)을 또 다른 보다 더 놀라운 모순이라는 값을 치르고 풀어버렸다. 그 더 놀라운 모순은 이렇다.
"나는 죽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나는 죽는다. 고로 지금까지 끊임없이 나에게 어떤 판단을강요하던 인생은 이제 없다." 아니,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해보자.
"나는 죽는다, 고로 나는 최소한 뛰어내리기 직전의 순간에서만큼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어리석게도 그토록 갈망했던 나 자신을, 있을 수 없었던 상황을 현실로 이루어냈다." 현실이 그토록 나에게 허락하지 않던 바로 그것을! 뛰어내리기 직전, 바이닝거는 비(非)유대인이었으며, 빗자루를 든 처녀는 꽃미남 가수의 사랑을 받는 애인이었다.

‘에셰크(échec)‘는 운명적인 단어다. 독일어의 비슷한 낱말들은 그 어떤 것도 같은 분위기를 나타낼 수 없을 정도로 서툴러서 프랑스어를 그대로 쓰기로 했다.
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쏜 상인은 ‘에셰크‘를 당했다. 바꿔 말하면 이는 다음과 같은 뜻이다. 죽음이 상인을 세상으로부터 몰아
내기 전에 이미 세상이 그를 버렸다. 그가 세상을 버린 게 아니다. 원칙적으로 따지고 든다면 사람은 ‘에셰크‘ 속에서도 살 수있다. 물론 아주 치욕적인, 말하자면 ‘비자연적‘인 꼴을 감수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서 남자는 ‘에크‘에 저항하는 유일한 방법이 자유죽음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마치 무슨 수치스러운 짓을 입에 올리기라도 하듯 자살이라고 부르는 자유죽음을 그는 감행했다. 그래도 ‘에셰크‘를 끌어안고 살아가야 한다면, 이제 ‘에크‘는 당사자의 등 뒤에서 상존하는 위협이다. 그리고 ‘에크‘는 죽음보다도 더욱 두드러져보인다. 그래도 참아내야만 한다?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견습공더러 최고 경영자와 똑같이 행동하라고? 공산당 당원들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목청껏 소리를 지르라고? 늘 남들을 두고 허약하다고 한다. 항상 남들이 더 강해 보인다고 투덜댄다.

내가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은 아니다.
지금 내가 확인하고자 하는 점은 다만 다음과 같은 것일 따름이다. 자유죽음으로 이끄는 ‘에셰크‘ 의식에는, 이 ‘에셰크’가 살아가면서 겪는 것(수험생의 불합격)이든 인생 자체가 가지고 있는
‘에셰크‘(결국 인생이라는 집은 무너지고 말리라는 바꿀 수 없는 사실)든, 먼저 구토의 감정이 선행돼야만 한다. 평범하게 살라는 말은 ‘에크‘를 끌어안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라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사회는 말 잘 듣는 온순한 사람에게 박수갈채를 보낸다.
요란을 떨지 않아 고맙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들의 눈에 자살하는 사람은 요란을 떠는 옹졸한 인간이다. 그러나 구역질을 늘 달고 사는 사람에게 인생 안의 ‘에크‘와 인생 자체의 ‘에셰크‘는도저히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이다. 아픔에 가슴이 쓰라리지만 이를 악물고 자부심을 내세우며 거부하기로 굳은 결심을 한다. 더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지 않기로 마음먹은 소수파에 가담하기로 한다. 이 소수파의 사람들은 말한다. 살아서 흘리는 눈물은 비겁함일 뿐이라고, 소심함에 지나지 않는다고! 마치 모든공포의 근원인 저 죽음의 공포에 이마부터 들이대는 것 이상으로 드높은 용기는 없다는듯이. 자살하기로 뜻을 굳힌 사람의 용기는 만용이 아니다. 정확하게 이해했다. 이 용기에는 언제나 일말의 부끄러움이 묻어 있다. 살아야만 한다는 인생 논리는 슬쩍부끄러움이라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고 뛰어내리기 직전의사람에게 묻는다. 왜 참아낼 수 없느냐고 왜 끝까지 버티지 못하는 거냐고. 다른 사람들 좀 보라고.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견뎌내고 있는데 어째서 너만 야단법석을 떠느냐고 찔러댄다.

이제 자살은 가난과 질병과 마찬가지로 치욕이 아니다. 자살은 더 이상 침울해진 정서를 가진 사람이 저지르는 비행이 아니다(중세에는 심지어 악마에게 사로잡힌 영혼이라는 표현을 썼다).
어디까지나 자살은 존재를 몰아붙이는 도전에 맞서 그에 응전하는 일종의 대답이다. 세월이라는 흐름에 휩쓸려 떠내려가다가 익사하기 직전, 지르는 단말마적 고통의 비명이 자살이다.
우리의 자아는 조각조각 끊어져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기억의색은 누렇게 바래고, 우리의 현실은 저 끝 모를 바닥으로 빠져든다. 자연 죽음으로서의 자살이라는 게 정확하게 무엇일까?
존재를 강타하며 파괴하는 ‘에셰크‘에 맞서 단호하게 아니라고말하는 게 자살이다. 곡물 상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그저 치욕을 감수하고 사회가 그 변화무쌍한 변덕 속에서 그의 행위를 잊어주기를 바라는 게 낫지 않았느냐고? 아니다. 그가 택한 방법은 자신의 ‘에셰크‘에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한 것일 따름이다. 시험에 떨어진 수험생이 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았다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사회의 낙오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는 실패자가 될 위험을 예방한 것일 따름이다. 우울증환자가 자신의 메말라버린 세계관 때문에 자살을 선택했다고 해서 그 세계관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누구도 말할 수없다. 우리는 적어도 그에게 인정을 해줘야 한다. 그의 선택은이성적인 것이었다고! 그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자신의기준을 가지고 그에 맞게 행동한 것일 뿐이라고! "그래도 끝까지 살아야만 해." 저잣거리를 떠도는 세속의 지혜는 이렇게 꾸짖는다. 아니다. 살아야만 하기 때문에 살아야 하는 인생이라는것은 없다. 어차피 반드시 찾아올 어느 날 더는 살 수가 없어서, 아니 살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저 꾹 참고 그날을 기다려야만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물론 자유쥭음에는 분명 호소의 성격이 담겨 있다. 하지만 나는 차라리 호소보다는 메시지라는 표현을 쓰고 싶다. 메시지는 호소를 넘어서는, 호소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메시지는, 단지 비유적인 표현이든 또는 공허한 개념의 장난으로 말해진 것이든, 일체의 선택을 하게 만드는 상황이 종결되었음을 뜻한다.
파랗게 질리게 만들 정도로 과도한 것일지라도 어떤 행위가 돌이킬 수 없이 결행되었음을 말하는 게 메시지다. 자유죽음의 경우, 그것은 인생이 끝났음을 알리는 선언이다.

자살자의 메시지를 일상 언어로 옮겨볼 시도를 해보자.
그의 행위는 이런 외침이다. 사회라는 네트워크의 한 부분인 너타자는 나에게 무엇이든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 점은인정하마. 그러나 똑바로 봐두렴. 나는 너희의 권력으로부터 얼마든지 탈출할 수 있다. 그것도 너희에게 조금도 해를 끼치지않고서.

자살의 뜻을 품고 문턱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은 인생의 불손한 요구에 맞설 당당함을 보여줘야만 한다. 그러지 않고서 자유에 이르는 길은 찾을 수 없다. 이런 당당함이 없다면 철조망에 가까이 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수용소의 포로와 마찬가지다. 저녁에 나올 죽을 들이킬 생각에 침을 삼키며, 아침에 도토리 삶은뜨거운 멀건 죽을 그리며, 다시 점심에 나올 무죽을 그리워하는 인생이라면 그렇게 계속 살아라. 그렇지만 여기서 인생의 요구는 인간다운 존엄과 자유가 없는 인생으로부터 빠져나오라는 요구다. 그리고 이런 요구는 여기서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이렇게 해서 죽음은 곧 삶이 된다. 삶이 탄생의 순간부터 죽어감이었던 것처럼, 죽기로 각오한 당당함은 삶의 길을 열어준다.
그래서 부정이 돌연 긍정이 된다. 물론 이런 게 아무짝에 쓸모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논리와 변증법은 서글프면서도 웃기는합의와 함께 실패하고 나가떨어졌다. 중요한 것은 나라는 주체의 선택이다. 그래도 살아남은 사람이 옳다고? 인간다운 존엄과 자유가 웃고 호흡하며 성큼성큼 걷는 것에 비해 뭐 그리 중요한 것이냐고? 무엇이 정의이고 뭐가 올바른 것인지 전혀 모르는 소리라고? 품위와 체면을 갖추는 모든 전제 조건을 거스르는 존엄이 무엇이냐고? 살아서 웃고 호흡하며 성큼성큼 걷는존재로서의 인간과 충돌하는 인간다움이라는 게 뭐냐고?
"자살할 뜻을 품은 사람을 둘러싼 정황은 좋지 않다. 이미
자살을 저질러 버린 사람의 상황도 최선의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그들의 선택과 행위 앞에 경의를 표해야만 한다. 그들을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는 데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더욱이그들 앞에서 우쭐대며 무시하는 행동은 보이지 말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따질 수 있지 않은가. 누가 봐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조리 있게 따지고 들 수 있지 않은가. 이처럼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자유로운 선택으로 우리를 떠나간 사람 앞에 차분하고 침착한 태도로 머리를 숙이고 왜 우리를 버렸냐며 조리 있게 따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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