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포되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다면 나는 태연히 살아갈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염치가 없거나 비열해서가 아니다. 내가 강해서도 아니다. 내가 자유롭기 때문이다. ‘살인하지 말라‘는 인간의 법과 신의 법 앞에 무조건 복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팀장님 말씀이, 아니라는 거야. 범인은 경찰 조직 전체가 함께 잡는 거지, 형사 하나가 잡는 게 아니라고. 사건이 나면 신고를 받는 사람이있고, 현장에 나가서 증거를 수집하는 사람이 있고, 그 증거를 분석하는 사람도 있고, 목격자 찾아다니면서 진술 받는 사람도 있고, 용의자몽타주를 그리는 사람도 있고, 수배 전단을 전국 곳곳에 붙이는 사람도있다, 그 모든 사람들이 힘을 합해서 범인을 잡는 거다, 그러시더라고. 뭐, 말하자면 이게 하나의 시스템이라는 거지, 수사시스템. 그리고그 시스템은 더 큰 시스템의 한 부분인 거야. 경찰은 수사를 하고, 검찰은 기소를 하고, 법원은 재판을 하고, 교도소에서 범인을 가두고 벌을주지. 뭐, 이건 형사사법시스템이라고 불러야 하나? 그 큰 시스템을 생각해보라고, 형사는 결코 범인을 잡아 응징하고 정의를 세우는 사람이아니야.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 일을 하는 건 커다란 시스템이고, 사람들은 거기서 자기가 맡은 역할만 할뿐이지. 형사도 그중 한사람이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생명과 자유와 행복 추구는 양도할수 없는 권리‘라는 선언에는 행복에 대한 정의 외에도 명료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 먼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두고 첨예한 논쟁이 계속해서벌어지고 있다. 인간과 비인간의 흐릿한 경계 지대가 있다. 태아라든가뇌사 상태처럼. 여기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구분선을 긋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태아의 생명권을 인정하면 필연적으로 임신부의행복추구권은 축소해야 한다.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이런 회색 지대는 더 넓어지리라. 머지않은장래에 인류는 유전자조작 기술로 반인반수를 만들 수 있을 것이고, 한사람의 기억과 의지를 기계에 옮길 수도 있을 테고, 네안데르탈인 같은우리의 옛 친척을 되살려낼 수도 있다. 그들에게도 기본권을 부여해야할까? ‘양도할 수 없다‘는 문구도 혼란스럽다. 한 개인의 행복추구권이 또다른 개인의 행복추구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100명의 행복추구권이라면 한 사람의 행복추구권보다 중요한 것 아닐까? 그 한사람에게 강제로 양보를 요구해도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혹시1만 명, 아니 100만 명의 생명은 한사람의 생명보다 중요한 것 아닐까? 계몽사상의 신봉자들은 이런 딜레마의 존재 자체를 애써 감추려 한다. 그들은 ‘한 사람의 생명이나 100만 명의 생명이나 똑같이 존엄하다‘ 고 말한다. 이는 삼위일체보다도 더 억지스러운 얘기다. 어떤 정부도 그런 원칙으로 국가를 운영할 수 없다. 현실 세계에서는 늘 우선순위를 따져야 한다. 어떤 백신이 매년 수십만 명의 사람을 살릴 수 있지만 백만 명에 한명꼴로 알레르기 쇼크로 인한 사망자가 나올 때, 우리는 그 백신을 모든아이에게 접종시킬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사람들은 그런 결정은 정부의 정책 담당자만이 하는 것이라고, 일반인들의 일상적인 고민거리는 아니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세계에는 하루 2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7억 명이 넘는다. 보통 사람이라도 구호단체를 통해 그들에게 돈을 보내는 방법은 아주 쉽다. 그러므로 내가 당장 필요하지 않은 최신형 스마트폰을 살 때, 나는명백히 선택을 하는 것이다. 사하라사막 남쪽에 사는 사람들 수백 명의끼니보다 과시성 소비로 인한 나의 만족감이 더 중요하다는향이 좋은 프리미엄 커피를 마실 때, 플라스틱 가구 대신 원목 가구를살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택시를 타거나 자동차를 운전할 때, 집에 있지 않고 여행을 할 때, 우리는 계속해서 절대빈곤 상태에 있는사람들이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 죽게 내버려두자고 선택한다. 우리는모두 학살자이다. 계몽주의 사회는 그런 선택을 허용한다. 스마트폰을 살까? 제3세계에 기부할까? 기부한다면 얼마나 할까? 그것은 온전히 개인의 자유다. 개인의 행복추구권을 사회가 침해할 수 없기에. 나는야그리고 그런 자유를 의식하는 순간 우리는 어리둥절해진다. 선의로가득한 사람들조차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른다. 어떤 이들은 주먹구구식으로 타협한다. ‘수입의 10퍼센트 정도를 기부하면 괜찮겠지‘ 하는식으로.
"동의합니다. 특히 청소년 범죄를 보면 그런 마음이 들어요. 왜 성인처럼 범죄를 저지를 힘이 먼저 생기고 성인처럼 충동을 자제하는 능력이 나중에 생기는 걸까, 하는 그 순서가 거꾸로였다면 세상이 훨씬 살기 좋을 텐데요"
연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에서 자란 사람만이 동물원에서 우리 안에 갇힌 육식동물을 보며 가슴 아파하고 가엾게 여긴다. 야생에서늑대를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은 창살에 대해 감상을 품지 않는다. 연지혜는 판사들이 우리에 갇히지 않은 범죄자를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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