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만이천원짜리 스페인산 올리브유 아홉 병을 한 번에 사는 사람은 무엇을 요리해서 먹는지, 십삼만구천원짜리 이탈리아산 소가죽 벨트를 쏜살배송으로 주문하는 사람의 생활은 어떤지 궁금했다. 진주 자신도 즉석밥이나 생수 따위를 종종 주문했는데, 그 점에 비춰보면 그들도 단지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일 거라고, 그래서 자기가 시급을 받고 시간을 팔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그들은 아낀 시간으로 무엇을 할까. 마트에 와서 물건을 담는 귀찮은 과정을 생략하고 오직 그 물건들이 주는 행복의 알맹이만을 누리고 있을까. 아니면 그 물건들을 사기 위해 자기처럼 또다른 누군가에게 시간을 팔고 있을까.

미미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워 담았고 그게 도움이 안 될 때는 불확실하지만 원대한 행복을 상상했다.

진부한 악과 싸우는 일보다는 감춰진 위선을 폭로하는 일이 자극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순수의 시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8
이디스 워튼 지음, 손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지만 뉴욕은 대도시였고, 대도시 에서 오페라에 일찍 나타나는 건 ‘유행에 어긋나 는‘ 일이었다. 그리고 뉴런드 아처가 살고 있는 뉴 욕에서 무엇이 ‘유행‘인지 아닌지는 수천 년 전 조 상들의 운명을 지배했던 두렵고 불가사의한 미신 만큼이나 중요했다.

뉴런드 아처에게는 ‘안목‘ 없는 처신이야말로 최 악이며, 안목에 비하면 ‘격식‘은 부차적이고 표면 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 말이 너무 재미있어서 아처는 앞서 들은 얘기 가 준 충격을 잊어버렸다. 밴 더 라이든과 친척지 간인 공작을 아둔하다고 생각하고, 감히 그 생각 을 말하는 여성을 만난 건 정말 가슴 설레는 일이 었다.


.

아처는 ‘접잖은‘ 여자들은 대체 몇 살 이 되어야 독자적으로 행동하게 되는지 궁금했다.
‘평생 못 그러겠지. 우리가 그렇게 놓아두질 않 겠지.‘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본인이 실러턴 잭슨 씨에게 퍼부었던 말을 떠올렸다. "여자들도 우리 처럼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어요••••.."

"바보 같은 애지!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린 지 그렇게 말했건만. 유부녀에 백작부인으로 행세 할 수 있는데 왜 늙은 엘런 곳으로 살려고 해!"

두 사람은 서로를 보지 않고 길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없이 앉아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고 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그대로네요."
아처는 ‘변해 있었어요. 당신을 다시 만나기 전 까지는‘이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냥 벌떡 일 어서서 무덥고 어수선한 공원을 둘러보았다.

"그렇다면 당신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처가 물었다.
"우리가? 그런 식의 우리는 있을 수 없어요! 우리 는 서로 거리를 유지해야만 같이 있을 수 있거든 요. 그렇게 해야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있을 수 있 어요. 안 그러면 우리는 그저 우리를 믿는 사람들 을 속이면서 행복해지려고 하는 엘런 올렌스카의사촌의 남편인 뉴런드 아처와, 뉴런드 아처의 아 내의 사촌인 엘런 올렌스카일 뿐이에요."
"아, 나는 이미 그 단계를 넘어섰어요." 아처가 신음하듯 말했다.
"아뇨,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한 번도 그 단계 를 넘어선 적이 없어요. 나는 넘어봤고, 거기가 어 떤 곳인지 알아요." 부인이 낯선 목소리로 말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본 헌터 - 어느 인류학자의 한국전쟁 유골 추적기
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국민은 국가에 요청받은 납세와 병역 등 여러 의무를 수행한다. 그렇다면 국가는 국민에게 무엇을 해줘야 하는가. 전쟁에 나가 죽어서돌아오지 않은 이가 있다면, 주검이라도 찾아서 가족에게 돌려주려 최선을 다해야 한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계약 위반이다. 선주는 이런 과정을 통해 국가가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 이를 내부 구성원에게 증명시켜줄 수 있다고 보았다. 이름 없는 군인의 유해는 대한민국 국가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식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계는 ‘정상성‘이라는 표준에 의해 상대적으로 구성된다. 장애는 몸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상황에 있는것이며, 그것을 바라보는 사회적 반응에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몸에 대한 지수씨의 사유는 그 몸이 놓여 있는 맥락과 조건을 새롭게 읽어내기 위한 재료가 된다. 지수 씨의 연극에는 이런 모든 질문들이 깊이 스며 들어 있다.

그러나 당신이 보고 있는 장애배우들의 연기는, 이러한 모든 고민과 반응, 그 역사적이거나 사회적인 맥락들을 충분히 숙고하고, 최종적으로 선택한 수행의 방식이다. 그들이 표현하고 전달하길 원하는 미학적 의미가 거기에 있다. 웃는 것이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져 꺼림칙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웃지 않는 것은 장애연극인들의 예술적 실천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무대 위에서 발생하는 무언가가 웃음을 유발한다면 마음껏 웃어도 좋다. 혹시 그 웃음 뒤에 복잡한 마음이 남았다면, 극장 밖 세계로 돌아가면서 그 마음을 기억하면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
김원영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온전한 평등은 추상적 규범이나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능력‘의 측면에서 지극히 차별적인 관계에 놓인 존재들이 상대의 ‘힘을 존중하고 신뢰할 때 달성된다. 당신이 나를 배려해 내 앞에서 발레를 추지 않는다 하여 우리가 온전히 평등해지는 것은 아니다. 발레를 잘 추는 능력‘으로 당신은 내가 모르는 세계에 접속하는 다양한 방법을 나에게 제안할 수 있다. 내게도 춤출 ‘힘‘이 있음을 깨달은 지금 나는 발레를 추는 당신의 능력이 나보다 뛰어나다는 데 좌절하지 않는다. 물론 나에게도 당신보다 능력이 뛰어난 차원이 있을 테다. 그것은 발레와 다른 종류의 춤일 수도, 논픽션 글쓰기일 수도, 일반 적으로는 매우 사소하다고 여겨지는 어떤 분야의 기술일 수 도 있다. 그 능력이 무엇이든 나는 이 능력들로 당신과 차별적인 개인이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내가 잘하는 영역을 섬세하게 이해하면서, 한편으로는 당신의 ‘힘을 믿으면서 나의 세계 로 당신을 초대할 방법을 고안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법 앞 의 평등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다. 각각의 차별적인 능력을 지닌 개인들이 서로의 동등한 힘에 주의를 기울일 때, 우리는 고유한 개인이면서도 더 큰 세계의 일부가 된다.

김지수는 이때 뭐라고 말했을까? 뾰족한 수가 있었던 것 은 아니다. 극단 애인‘은 그날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장애인 배우처럼 똑같이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저런 걸 못하겠지, 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각자의 방식 으로 그것을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했다. 대사를 줄이되 다른 감각과 움직임을 활용하고, 장애배우의 표현을 통해 더 깊은 사유와 정서를 전달하는 방식도 있을 거라고 믿었다.

춤을 바라보는 관점, 인간 신체의 가능성, 정상성,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경험하는 사람들 앞에서 데이비드는 최선을 다해 춤을 추고 워크숍을 진행했다. "장애가 있다고 해서 공연할 기회를 가지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자기 일에 성실해야 한 다"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는 30년 전쯤 불거진 가슴으로 바닥을 기어다니는 아이를 기이하고 의심스럽게 바라볼 무수한 시선들을 우려했다. 2020년대는 달랐다. 어떤 시선들은 여전 하지만, 약간 시선을 바꾼 몸들이 그 약간의 시선에 힘을 받아 더 빨리 바뀌었고, 그렇게 바뀐 몸이 더 많은 시선을 급진적으로 바꾸고 있다. 자신에게 맡겨진 그 몸으로 책임을 다해 잘 추려는 사람들이 좋은 춤의 의미를 확장했고, 확장된 좋은 춤의 기준 속에서 더 잘 추는 사람들이 나타났으며, 그 사람들이 다시 좋은 춤이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 시대의 가치관 을 재구성한다. 당당히 권리를 주장하고, 기꺼이 사랑하고 ,마음껏 춤추더라도 당신과 나의 삶이 파멸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 존재가 되어 야 할 과제만이 우리 앞에 있다.

한계는 ‘정상성‘이라는 표준에 의해 상대적으로 구성 된다. 장애는 몸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상황에 있는것이며, 그것을 바라보는 사회적 반응에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몸에 대한 지수 씨의 사유는 그 몸이 놓여 있는 맥락과 조건을 새롭게 읽어내기 위한 재료가 된 다. 지수 씨의 연극에는 이런 모든 질문들이 깊이 스며 들어 있다.

그러나 당신이 보고 있는 장애배우들의 연기는, 이러 한 모든 고민과 반응, 그 역사적이거나 사회적인 맥락 들을 충분히 숙고하고, 최종적으로 선택한 수행의 방 식이다. 그들이 표현하고 전달하길 원하는 미학적 의 미가 거기에 있다. 웃는 것이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드 러내는 것처럼 느껴져 꺼림칙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 고 웃지 않는 것은 장애연극인들의 예술적 실천을 인 정하지 않는 것이다. 무대 위에서 발생하는 무언가가웃음을 유발한다면 마음껏 웃어도 좋다. 혹시 그 웃음 뒤에 복잡한 마음이 남았다면, 극장 밖 세계로 돌아가 면서 그 마음을 기억하면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