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엘리트의 만국 유람기 동아시아 근대와 여행 총서 2
나혜석 외 지음, 성현경 엮음 / 현실문화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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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해상 생활을 모두 아침 먹고, 운동하고, 음악 듣고, 춤추고,영화 보고, 또 밥 먹고, 자는 것으로 지내는 모양이지만, 나는 선실 문을 닫아걸고 밤낮으로 어학 공부에 진땀을 뺐다. 영어야 청년 시절에한성 외국어학교에서 ‘내셔널‘ 다섯 권 정도를 배웠고, 그 뒤에도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에 갈 생각을 품고 2년 동안이나 서울 모 영국인 밑에서 개인교수를 받았다. 또 도쿄 메이지 대학 다닐 때에는, 법률 외에어학에도 은근히 힘을 써서 그때만 해도 영자 신문쯤은 거리낌 없이 보았지만, 그동안 손을 놓은 지 하도 오래되어서 이제는 영어로 밥 먹으라는 말도 외우지 못할 지경이다. 이래서야 어떻게 코 큰 서양 사람 행세를 할까 싶다.

우리가 탄 미국 샌프란시스코행 배는 무슨 대통령의 이름을 따온 3만여 톤짜리 배이었다. 묘령의 백인 여자들이 어떻게나 많이 탔는지, 식당이나 갑판 위의 운동장이나 무용실에 들어가 보면 남성 출입 금지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리만치 꽃같이 어여쁜 여자들이 가득 차서 재깔거리고있는 것이 실로 장관이었다.

이제는 샌프란시스코 시가를 소개할 차례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피하려 한다. 여러분이 상상하시던 모양으로 20층, 30층의석조, 벽돌, 철근 콘크리트 등 웅장한 건축물이 하늘과 해를 가리고 또어디까지 갔는지 모를 만큼 기막히게 늘어섰으니, 이를 ‘가옥의 대림지대‘라고나 설명할까, 그 외에 다른 해설의 말을 나는 못 찾겠다. 또각국 인종이 거리마다 웍작웍작 따라가다가는 웍작웍작 따라오며, 자동차가 까만 개미떼같이 늘어선 것과 바다와 육지에서 울리는 쇠망치소리, 기적 소리 등 동원령이 내려진 전쟁 지대가 아니면 상상도 못 하리만치 복잡다단한 모습을 솜씨 서툰 내 붓끝으로 그려낼 재주가 없는것을 잘 아는 까닭이다.

최근 뉴욕 콘서트계는 많은 음악가, 무용가들로 상당히 성대해졌습니다. 파리, 런던, 뉴욕의 콘서트계는 서로 교류하고 있었으나 이번전쟁 때문에 파리, 런던이 중단 상태에 있는 이상, 오직 뉴욕이 유일한콘서트 예술 중심의 국제 시장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뉴욕 콘서트계의 이러한 성대함은 미국이 가진 콘서트의 숨겨진 재주가 성대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유럽과 해외 예술가들이 뉴욕을 일시적으로 빌려 쓰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다시 말해 해외 콘서트계의출장소로서 성대한 것입니다. 어쨌든 예술적 전통이 아직 어리고 그 위에 정신적인 것보다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데에만 분주했던 미국이요. 재즈 음악과 탭 댄스가 범람하는 장소인 까닭에 콘서트 예술을 길러내기에 필요한 관객층은 어느 특수층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감상력이 무척 저급합니다. 비평가까지도 오로지 관객층을 맹신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외로부터 우수한 예술가를 데려오더라도 그것을 비판적으로 섭취하며 거기서 미국 자신의 것을 생산시킬 힘은지 않은가 하고 생각합니다.

사월 초파일이 되면 개성에서는 초파일 놀이라 해서 남녀노소가 송악산에 올라 화전을 부쳐 먹으며 놀지 않습니까. 또 오월 단옷날이면 평양에서 단오놀이를 굉장하게 하지 않습니까. 또 팔월 보름날 함흥 감영(오늘날의 도청)에서 추석놀이를 만세교 난간이 내려앉게 잘 놀지않습니까. 파리기념일이라는 것은 이 개성의 초파일과 평양의 단오놀이, 함흥의 추석놀이를 한데 뭉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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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밤에 우리 영혼은
켄트 하루프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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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뒤에서 이러고 있어요? 애디가 말했다.

사람들 눈에 덜 띌 것 같아서요.

나는 그런 건 신경 안 써요. 어차피 다 알게 될 거고요. 누군가가 보겠죠. 앞쪽 보도를 걸어 앞문으로 오세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관심 갖지 않기로 결심했으니까요. 너무 오래, 평생을, 그렇게 살았어요. 이제 더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이렇게 뒷골목으로 들어오면 마치 우리가 몹쓸 짓이나 망신스럽고 남부끄러운 일을 하는 것 같잖아요.

하지만, 아빠, 이건 옳지 않아요. 아빠는 사실 애디 무어를 좋아하거나 잘 알지도 못했잖아요.

네 말이 맞다. 좋아하거나 잘 알지도 못했지. 그런데 바로 그게 내가 지금 좋은 시간을 보내는 요인이란다. 이 나이에 누군가를 알아가는 것, 스스로가 그녀를 좋아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 알고 봤더니 온통 말라죽은 것만은 아님을 발견하는 것 말이다.

그 작가가 우리 둘에 대한 책도 쓸 수 있겠네요. 그럼 어쩔 것 같아요?

나는 어떤 책에도 나오고 싶지 않아요. 루이스가 말했다.

그래요, 우리는 지금 그렇게 살고 있죠. 우리 나이에 이런 게 아직 남아 있으리라는 걸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거예요. 아무 변화도 흥분도 없이 모든 게 막을 내려버린 게 아니었다는, 몸도 영혼도 말라비틀어져버린 게 아니었다는 걸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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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조선 여성 첫 세계 일주기
나혜석 지음 / 가갸날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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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늘 불안을 주는 네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나. 둘째, 남녀 사이는 어떻게 살아야 평화스럽게 살까. 셋째, 여자의 지위는 어떠한 것인가. 넷째, 그림의 요점은 무엇인가. 이것은 실로 알기 어려운 문제다.

호수 난간에 날계란만한 전구를 줄에 끼워 굼틀굼틀 꾸며놓았다. 그것이 검은 호수에 비쳐 흔들리는 야경이 말할 수 없이 좋아 보였다.

대체 스위스 철도는 빙빙 돌든지, 언덕을 오르든 지, 10분 20분씩 굴속으로 들어가든지, 경색이 말할 수 없이 좋다. 문인 묵객을 상대로 하는 만큼 산촌이고 수변 마을이고 이르는 곳마다 호텔이 무수하고, 등산 열차가 곳곳에 보인다. 기차선로의 좌우 언덕은 솔로 씻은 듯이 잔디가 고르고, 군데군데 목초지는 말뚝 박고 목재를 좌우로 아무렇게나 걸쳐서 지은 것이 향촌의 흥취를 풍긴다. 붉은 수건을 쓰고 조선치마같이 긴 치마를 입은 농가 부녀들이 나무 위에 올라 앉아 과일을 따는 모습도 눈에 띈다.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좁은 길의 돌과 흙이 햇빛에 비쳐 부서지는 흰빛도 다른 곳에서 보지 못하던 진경이었다.

베를린은 전차, 버스, 택시, 지하철이 쉼 없이 왕래하여 대도시의 기운이 농후하였다. 교통경찰이 방망이를 휘두르며 통행을 안내하는데, 4거리에는 반드시 공중이나 지하에 전기 신호등을 달아놓아 붉은 불이 나오면 진행하고 푸른 불이 나오면 정지하게 되어 있다. 매우 합리적이고 바라보기에도 경쾌하였다. 모든 것이 과학 냄새가 난다.

흥겹게 노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돌아오는데 알 수 없는 적막과 슬픔이 머릿속을 채운다. 눈을 감고 먼 고국의 풍경을 그려보노라니 소리 없는 한숨이 목구멍을 감돈다.

그 외에 나는 여성인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지금까지는 중성 같았던 것이). 그러고 여성은 위대한 것이요, 행복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모든 물정이 여성의 지배하에 있는 것을 보았고 알았다. 그리하여 나는 큰 것이 존귀한 동시에 작은 것이 값있는 것으로 보고 싶고, 나뿐 아니라 이것을 모든 조선 사람이 알았으면 싶다.

나혜석 : 깃발에는 뭐라고 쓰여 있었나요?

S: ‘여성의 독립을 위해 싸우자’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우자’였습니다.

나혜석 : 물론 많이 잡혔겠지요?

S: 잡히고 말고요. 모조리 잡혀 들어가서 금식 동맹을 하고 야단났었지요.

나혜석 : 회원의 표지는 어떤 것이 있나요?

S: 있지요. ‘여성에게 투표를’이라고 쓴 배지를 모자에 달고, 띠를 두르지요. 이것이 그때 두른 것입니다.

부인은 노란색 글자가 쓰여 있는 다 낡은 남빛 띠를 보여주었다.

나혜석 : 이것 나 주십시오.

S: 무엇하시게요?

나혜석 : 내가 조선 여권운동의 시조가 될지 압니까? …

고야는 만년에 시력이 쇠약해지고, 귀머거리가 되고, 궁핍하였다. 판화를 그리려고 조국을 떠나 멀리 적막한 남프랑스 보르도에 우거하였다가 1828년 4월에 파란 많은 삶을 마쳤다. 그의 나이 82세였다. 그는 죽었다. 그러나 살았다. 그는 없다. 그러나 그의 걸작은 무수히 있다. 나는 그의 묘를 보고 아울러 그의 걸작을 볼 때 이상이 커졌다. 부러웠고 또 나도 가능성이 있을 듯이 생각 들었다. 내 발길은 좀체 떨어지지를 아니하였다. 내가 이같이 감흥해 보기는 일찍이 없었다.

동경 집은 모두 바라크 같고, 도로는 더럽고, 사 람들은 허리가 새우등같이 꼬부라지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

구라파 경색에 비하면 산이 높고 수려한 맛은 있으나, 마음을 적시는 기분이 적다.

아, 아, 동경하던 구미 만유도 지나간 과거가 되고, 그리워하던 고향에도 돌아왔다. 이로부터 우리의 앞길은 어떻게 전개되려는고.

가자, 파리로. 살러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나를 죽인 곳은 파리다.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준 곳도 파리다.

나는 파리 가서 죽으련다.

찾을 것도, 만날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돌아올 것도 없다. 영구히 가자. 과거와 현재가 텅 빈 나는 미래로 나가자. … 4남매 아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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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왕 형제의 모험 (1973 초판본 에디션) -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장편동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김경희 옮김, 일론 비클란드 그림 / 창비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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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멀고도 낯선 나라에서 온 이 유학생이 웬일인지 아주 가깝고도 낯익은 느낌이 드네요. 그 나라에도 내 이야기를 듣 고 싶어 하는 어린이들이 있거든 나 대신 얼마든지 들려줘요."

착하고 귀여운 나의 스코르핀,
네 영혼이 여기 온 걸 내가 안단다.
내 품에 안겨 편히 쉬려고
멀리서 날아온 너를••··••.

나는 무엇 때문에 요나탄 형이 그처럼 위험한 일을 해야 되느 냐고 물었습니다. 기사의 농장 벽난로 앞에 앉아 편안히 살면 안 될 까닭이 뭐란 말입니까? 그러나 형은 아무리 위험해도 반드시 해내야 되는 일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째서 그래?" 내가 다그쳤습니다.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지. 그렇지 않으면 쓰레기와 다를 게 없으니까."

"그렇지만 어림없어. 우리처럼 한데 뭉쳐 자유를 위해 싸우 는 사람들을 굴복시킬 수 없다는 걸 텡일은 상상도 못 하겠지."

등불에 비친 그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나는 일이 왜 오르바르를 그토록 두려워하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앙상 하게 여원 그의 가슴속에서는 여전히 무엇인가 불타오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옥처럼 어두운 동굴 안에서 도 살아남도록 지켜 준 것은 바로 그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불 길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불길은 몸서리치도 록 끔찍한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타오른 것입니다.

질문들이 여전히 내 안에서 생생히 살아 어른어른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그들은 그토록 사랑하는가? 그들을 둘 러싼 세상은 왜 그토록 아름다우며 동시에 폭력적인가?
그 열두 살의 나에게, 이제야 더듬더듬 나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절망하는 거라고. 존엄 을 믿고 있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우리 의 고통이야말로 열쇠이며 단단한 씨앗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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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나의 여왕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지음, 양영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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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밀쳐내고 들어앉은 혹독한 겨울이 슬금슬금 계곡을 빠져나가던 무렵이었다. 가엾은 봄은 두 계절 사이에 찡겨 있었다. 어떤 손님이 한 말이었는데, 내 귀엔 이말이 재미있게 들렸다. 마치 바람이 내 방과 산의 중간에 찡겨 있듯이.

오솔길은 마치 절벽에흰 분필로 상처를 내기라도 한 듯 거대한Z자를 그리고 있었다. Z자는 조로 덕분에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글자였다. 나는 소

우리는 영영 헤어지지 않고 함께 살 것이고, 나중에 누군가가 딱 붙어 있는 우리 둘의 해골을 보면서 〈이 두 사람은 정말’친구’였네>라고 말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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