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자책] 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평점 :
몇일 전 박완서 작가님의 마지막 산문집을 읽고나니 다른 글들이 더 읽고 깊어져 이 책을 골랐습니다. 작가님의 몇몇 책들을 이미 읽었으나 쉽게 지나쳤을 프롤로그와 애필로그만을 따로 모아두니 그녀의 마음이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매 글마다 미안하다, 송구하다, 부끄럽다는 말씀을 하시지만 그런 마음을 감추지 않고 쓰는 것이야 말로 그녀만의 솔직함과 당당함이겠지요.
요즘 연예인들이 읽어주는 오디오북이 유행이던데 박완서 작가님의 산문을 김영옥 배우님이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성우 출신이시니 발음은 말할 것도 없고 비슷한 시대를 사셨으니 더욱 진한 감동을 주실 것 같습니다. 아...괜히 기대하게 됩니다.
암튼 나는 남 안 하는 재수까지 하고 나서도 여전히 예수께서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었다는 것과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채 영세를 받고 말았다. 그분과 일단 관계를 맺어 보고 싶어서였다. 그분에게 매혹당한 게 그분의 전모가 아닌 극히 일부분, 아주 미소한 부분에 지나지 않을지언정 없었던 걸로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서였다. 매혹당하기가 잘못이었다. 신앙을 가지면 근심이 없고 매사에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고 크리스천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러나 아직 나는 그런 경지를 꿈도 못 꾼다. 미사 참례 할 때 성가대의노래와 복음서 낭독을 듣는 걸 매우 좋아하지만 보다 많이는 그 많은 신도들이 예수께서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죽은이들 가운데 부활하신 걸 조금도 의심 안하고 믿는 것일까를 궁금해하는 데 시간을보낸다.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문제만 해도, 오른뺨을 때린 자에게 왼뺨까지 내주라 는 무조건의 사랑과 용서가 그분인지, 타락한 성당의 기물을 부수고 장사꾼을 내쫓은 행동적인 분노가 그분인지 그것조차 분간못하게 아직 어리석고 어리다. 하긴 그분이 닮기 쉬운 분이었으면 매혹당하지도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분이 멀리서나마 나에게 모습을 드러낸 게 어쩌면 근심을 없애고 기쁨을 주시려고가 아니라, 내 몫의 고통을 피하지 않고 어떻게 정직하게 고통하게 할까를 가르쳐 주시려고 함일지도 모른다고생각할 수 있을 때 한결 그분을 가깝게 느낄 수가 있다. 내가 두려워하는 걸 실토해야겠다. 나는 행여 나의 종교가 절대적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주술적 의존을 가져와 창조적인 능력을 무능화시킬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그건 결코 그분이 바라는 일이아닐 것이다. 적어도 내가 발견한 그분은 그런 노예적인 의존을 바랄 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 속에서 문학과 종교가 조금도 서로 상관하지 않고 별개의 것으로 공존하길 바라는 건 아니다. 아직은 신앙이 움틀 까 말까 하는 단계이니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려면 아직 멀었겠지만 언젠가는 서로 은밀하게 내통하길 바라고, 때로는 드러내놓고 치열하게 갈등할 수도 있었으면 한다. 더 나아가 여지껏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에만 머물렀던 나의 문학이 제3의 눈을 얻어 사실을 넘어서, 사실과 함께 사실의 의미까지도 볼 수 있었으면 하는 게 나의 정작 바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