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죽음은 죽은 자와 산 자들 사이에 명료한 선을 긋는 사건이에요,라고 다언은 진지하게 말했다. 죽은 자는지 나머지는 이쪽, 이런 식으로, 위대하든 초라하든 한인간의 죽음은 죽은 그 사람과 나머지 전인류 사이에 무섭도록 단호한 선을 긋는다는 점에선 마찬가지라고, 탄생이 나 좀 끼워달라는 식의 본의 아닌 비굴한 합류라면 죽음은 너희들이 나가라는 위력적인 배제라고, 그래서 모든걸 돌이킬 수 없도록 단절시키는 죽음이야말로 모든 지속을 출발시키는 탄생보다 공평무사하고 숭고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다언은 책을 읽듯이 담담하게 말했다. 오래 다져진 땅 같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죽음에 대한 다언의관념은 곱씹고 또 곱씹어 어떤 날도 들어가지 않는, 그래서 오히려 노인들의 그것보다 더 무섭고 더 죽음에 가까운 듯 보였다. 죽음은 우리를 잡동사니 허섭스레기로 만들어요. 순식간에 나머지 존재로 만들어버려요.
언니, 이 모두가 신의 섭리다, 망루가 불타고 배가 침몰해도, 이 모두가 신의 섭리다,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있어야 신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 말할 수 없어요. 섭리가 아니라 무지예요! 이 모두가 신의 무지다, 그렇게 말해야 해요! 모르는 건 신이다, 그렇게………
[작가의 말] 사람이 평범하게 태어나, 평화롭게 살다, 평온하게 죽 을 수 없다는 걸, 그게 당연하다는 걸 아는데, 저는 그게 가장 두렵고, 두렵지만, 두려워도삶의 실상을 포기할 수는 없어서, 삶의 반대는 평(平)인 것인가, 그래서 나는 평하지 못한 삶의 두려움을 쓰고 있는 것 일까,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현실 속 수많은 불평(不平)한 삶들은 이야기가 되고, 사에 대한 두려움과 삶으로 인한 고통 들은 의미를 띠게 되는 것일까, 모든 생명은 각자 의미심장하게 굴곡지고, 그 유일무이한 무늬가 우리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것일까, 삶이 결코 평범하지도, 평화롭지도, 평온할 수도 없다는 사실은, 늘 당연하면서 놀랍고, 이상하면서 또 궁금하고, 두려우면서 매혹적이어서, 우리는 자꾸 삶의 이야기를 듣고 읽고 쓰는 것일까, 생각합니다.
평범하게 태어나, 평화롭게 살다, 평온하게 죽는,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그 불가능한 생을 생각하면, 그러나 그 불가능함과는 별개로, 모든 사람과 모든 생명이평범하고 평화롭고 평온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부디 단 한번만이라도이 세상에 어떤 생명 하나가, 그게 날파리 한마리라 하더라도, 평범하게 태어나, 평화롭게 살다, 평온하게 죽은 적이있기를, 단 한번이라도 한번만은 그 불가능한 삶이 존재했기를 기도하게 되는 이 마음은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 불가능한 갈망 때문에, 이 갈망이 거대한 화폭의 틀처럼평하지 못한 삶의 다채로운 풍경들을 단단히 잡아주고, 팽팽히 당겨주기 때문에, 낱낱의 삶, 낱낱의 이야기 들은 모래처럼덧없이 흩어지지 않고 살아남는 것일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당신의 삶이 평하기를, 덜 아프기를, 조금 더 견딜 만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당신의 평하지 못한 삶의 복판에, 아프고 무섭고 견디기 힘든 삶 한가운데, 곱고 단단하게 심어놓으면 어떨까, 그러면 그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 한그루 이야기가 될까,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당신을 상상합니다. 사랑보다 어려운,
2019년 4월권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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