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대가 되고 어느 순간이 지나면서부터 나는 삶의 기울기를 온몸으로 실감하게 됐다. 나이를 먹는 일 이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일처럼 느껴졌다. 인생에도 중력이 존재했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도, 냉장고에서 반찬 을 꺼내 밥을 먹는 것도 애를 써야만 할 수 있는 일이 돼버렸 다. 그러지 않으면 나는 자연스레 밑으로, 어둠으로 떨어지게 돼 있었다. 중력이란 그런 것이니까.

인생도 그런 게 아닐까? 나는 행복하고 슬프지 않다. 나는 복하지 않고 슬프다. 나는 행복하고 슬프다. 나는 행복하지 , 슬프지도 않다. 이 모두를 말해야 인생에 대해 제대로 말 는 게 아닐까?

겸재는 보이는 대로만 보지 않기 위해서는 보이는 모든 것을 의심해야만 한 다고 가르쳤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도 믿지 말고 자신이 직 접 가까이에서도 보고 멀리에서도 보며, 또렷하게도 보고 희 미하게도 보며, 가장 낮은 곳에서도 보고 가장 높은 곳에서도 보며, 앞에서도 보고 뒤에서도 봐야만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의심해야만 하는 것은 자신의 눈이라고 겸재는 강조했습니다.

믿음의 핵심이, 내가 없는 미래를 상상할 줄 아는 능력이라는 걸 저는 최근에 알게 됐습니다.

리나는 모든 문제가 마치 우리 를 개별적인 존재로 보이게 하는 몸 때문에 생긴 거라고 말하 곤 했다. 이 몸만이 자기라고 생각해 이 몸의 쾌락을 위해, 이 몸을 먹여 살리기 위해, 좀더 확장해봐야 연인이나 가족의 몸 만을 살리기 위해 인간종은 지구와 지구의 다른 모든 생물종 을 착취하고 있는 거라고. 기후 종말 사태를 가져온 이 끔찍한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 단계가 바로 육체를 버리 는 일이라고.

나와 다른 인공마음의 차이는 10퍼 센트도 안 된다는 말이지. 그러니 다른 인공마음에 오류가 생 기면 자기 안으로 들어가 그걸 수정하면 돼. 그건 인간도 마찬 가지야. 인간은 잠재의식을 공유하거든. 하지만 이 명백한 사 실을 인간이 알지 못하는 까닭은 몸이 있기 때문이야. 이 세계 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자기와 무관한 일이라고 보고 자기를 바꾸는 게 아니라 세계를 바꾸려고 드는 한, 인류가 당면한 문 제들을 해결할 방법은 없다네. 코앞에 있는 우물을 두고 샴스 를 찾아 멀리 다마스쿠스까지 갔던 나처럼 말이네. 자신의 바 깥에 있다고 생각한 오류가 자기 안에 있고, 그것을 모든 인류 와 공유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하네."

이미 몇천 년 전에 부처가 그 모든 사실을 밝혀놓았음에 도 인간의 현실은 그대로다. 자신이 직면한 현실에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많지 않다. 누구나 자신의 현실을 바 꾸려고 한다. 그러면서도 자아에서 탈출하려는 용기를 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현실에 불만을 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자아에는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인간 실존의 딜레마다.
그럼에도 세상에는 자아에서 탈출해 자신을 둘러싼 현실 을 바꾼 이들이 있었다. 한 사람이 현실을 바꾸면 모든 사람 의 현실도 달라진다. 그 덕분에 인류는 실현되지 않았던 가 능성들을 하나씩 실현해나가며 진보해왔고, 우리는 지금과 같은 세상을 가지게 됐다. 물론 용기를 내지 못한 사람들도 죽을 때가 되면 어떻게든 자아에서, 그러니까 이 현실에서 탈출한다. 그런 점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을 발명한 이는 신이다. 현실을 단숨에 바꾸는 가장 위대한 발명품, 그건 바 로 죽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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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회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1
아베 코보 지음, 송태욱 옮김 / 민음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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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됐고. 자네는 SOS를 남기고 소식이 끊긴 배에구조선을 보내는 것밖에 생각하지 못하나? 등대에 불을 켜는 방법도 있지 않겠나. 행동도 중요하지만, 개처럼 냄새를 쫓아다니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걸세. 없어진 사람을 위해 돌아올 길을 밝혀 주는 것도 꽤 근사하고 현실적인 대책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내 속셈을 말하자면, 이 노트는 자네 부인이 돌아올 때를 위한 지도 같은 거야. 알겠나? 헛수고인지 아닌지는결과를 보고 나서 판단해도 늦지 않을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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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나의 엄마는 도시의 청소부입니다 - 도시의 가장 낮고 뜨거운 일터에서 발견한 인생의 존엄
장샤오만 지음, 허유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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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자매들이 간섭하지 못하게 하고 늘 혼자서 모든 일을 주도했다. 나는 나중에야 깨달았다. 사실 다른 사람들이 지저분하고 고된일을 일찌감치 미뤄놓았기 때문에 엄마가 어쩔 수 없이 그 일들을 고스란히 떠안았다는 사실을.

선전은 ‘효율이 높고‘, ‘돈이 많기로 유명한 도시다. 내가 스물네 살에 처음 이 땅을 밟았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공원의 공중화장실이 아주 깨끗하고 세련되게 꾸며져 있으며, 단 한 번도 휴지가 떨어진 것을 본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박물관과 도서관은 언제나 번쩍번쩍 광나도록 닦여 있었고, 오피스 빌딩에도 먼지 한 톨 찾아볼 수없었다.
엄마가 미화원이 되기 전까지, 나는 공공장소의 말끔함과 근무 공간의 질서 정연함을 그저 당연하게 누렸다. 내가 시시각각 누리는 이‘청결함‘과 ‘편리함‘이 어떻게 유지되는지는 생각해보지 않은 채 말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다른 미화원들이 겪은 일도 우리 엄마가겪은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쉰몇 살이 된 자신이 꼭 젊은 시절 농촌에 있던 고물 디젤 엔진 같다고. 그 엔진은 꼭 방앗간에서 곡식을 빻을 때만 되면 시동이 잘 걸리지 않아 푸드덕푸드덕 검은 연기를 내뿜곤 했다. 그러면 라이터로 옥수수 속대에 불을 붙인 다음 그것으로 디젤 엔진에 불을 붙였다. 그러면 푸드덕푸드덕 소리를 내며 마침내 돌아가기 시작했다. 엄마가한숨 섞인 말투로 말했다. 이제 자기도 그런 불씨가 필요한 때가 된것 같다고. 한번 또 한번, 자꾸 불을 붙여줘야만 겨우 굴러갈 수 있게되었다고 말이다.

도시화가 고도로 진행되고 업무가 세분화된 오늘날, 우리는 완벽하게 정돈된 공간 뒤에 숨겨진, 평범한 청소 노동자들의 작업 현장을실제로 보기 어렵다. 그저 마흔아홉 살의 한 아주머니가 이틀 동안수만 개의 크리스털 구슬을 닦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세세한 부분까지 완벽해야 한다는 요구는 결국 가장 밑바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된다. 다른 여러 직종에서도 비슷한현상을 볼 수 있다.

지금의 나는 엄마의 청소 일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미화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도 기꺼이 귀를 기울인다. 그럴 수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사회생활을 하고 세상 물정을 알아가는 동안그들과 내가 결국 같은 곳에서 왔다는 사실을 점차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무직 노동자지만, 우리는 여전히 같은 계층에 속해 있다.

엄마의 두려움은 독일의 사회학자 하르트무트 로자Hartmut Rosa가 『소외와 가속』에서 말한 ‘미끄러운 비탈‘ 위의 감각을 현실로보여주는 것 같았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는 마치 미끄러운 비탈위에 서 있거나, ‘아래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느낀다. 사람은 끊임없이 그리고 여러 방향으로 변해가는 조건 속에서 살아가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나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결코 제자리에 머물 수 없다. 변화하는 조건에 적응하지 못하면 미래로 건너갈 발판과 선택지를 잃게 된다.

내가 노력이라고 믿어온 많은 일, 가까스로 닿았다고 여겨온 세계가너무나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나와 미화원들은 같은 곳에서왔다. 우리는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밑천이 없어 쉽게 자신을 내던질수 없는 사람들이다. 자기 출신을 정직하게 마주해야만 내 삶의 기반도 비로소 단단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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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나무
윤고은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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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는 ‘윤고은 작가님의 당도초과 로맨스라니!!!‘라며 감탄하며 읽기 시작했지만 사건이 시작되고 두 연인이 휩쓸리면서 정신없이 읽게 되었습니다.

"날을 잘못 잡았나 싶네요" 했더니 태오가 "여기 앉으면 에어컨 바람 나와요" 하며 역 앞의 의자를 가리켰다. "이게요?"
워낙 자동화를 내세우는 K선이니 역 주변부도 다 손을 썼나보다 하면서 그 평범해 보이는 의자에 앉았다. "바람이 어디서......" 고개를 들어 머리 위를 살피자 태오가 리플릿을 두손으로 잡고 부채질을 해주는 게 보였다. 그는 "저의 다른 용도!"라면서 씨익 웃었다.

"한 입 베어 물면 여기까지 새콤한 맛이 쫙 뻗칠 것 같지 않아요? 저 열매요."
그러자 태오가 그것이 테니스공인 걸 모르는 사람처럼 "어느 나무에서 떨어진 거죠?" 하고 말했다. 나는 "그야 테니스나무겠죠" 하고 대답했고, 그렇게 우리는 테니스코트 옆 커다란 나무 한 그루를 테니스나무로 지정했다. 공들은 나무줄기에 매달렸던 기억이 없겠지만, 그 밤의 나무는 분명히 테니스공의 출처처럼 보였다. 아침이 되면 공은 다시 코트 안을 오가다가 밤이 오면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조금 더 라임빛으로 물들테고.

"매일 꾸준히 해요.‘
"아아, 이렇게 지압을 매일?"
그래서 시력이 좋구나, 대꾸하려는데 그가 얼른 말을 이었다.
"사랑이요. 매일 꾸준히."
슬쩍 넘어버린 날짜변경선이었는데 내가 모르는 척하자 그는 다시 말했다.
"임미아를 사랑한다고. 매일매일 꾸준히. 눈에 보이든 안보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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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빵충 사육 준수 사항 ㅣ 안전가옥 오리지널 48
김혜영 지음 / 안전가옥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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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박정민 배우님의 어록을 따라하자면 “넷플릭스 왜 보나? ‘빵충 사육 준수 사항‘읽으면 되지”라는 말로 설명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이상하게도 인간은 그런 짐승들조차 결국 통제 가능한 존재로 여긴다. 철창 너머에 있다는 이유로, 혹은 오랫동안 그래왔다는 이유로. 사람을 찢어발기는 곰도 귀엽게 포장된 인형이 되곤 하니까. 위험은 언제나 매뉴얼로 만들어 관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안전한 범주에 모든 것을 가두고는 스스로 안도한다. 우리가 길들이지 못할 것은 없다는 환상, 우리가 만든 것은 반드시 우리 편일 것이라는 기만, 그리고 그 모든 착각이 아무런 경고도 없이 무너지는 순간을 나는 보고 말았다.

"피해자인 척, 불쌍한 척, 억울한 척하면 니가 한 좆같은 선택들은 뭐, 갑자기 박수 받을 일이 되는 거냐고. 이 비겁한 새끼야."

빵충은 시스템이 허락한 형태로만 존재를 허용받은 사육종이다. 시스템의 실패작들이 돌아갈 야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폐기되는 미래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입맛대로 사는 것을 거부하는 순간, 비로소 야생이 만들어지는 것 아닐까. 나는 비위를 맞춰야지만 사랑받는 삶이 싫었다. 그 견딜 수 없는 마음을 붙잡으며 이 책을 썼다. 사육종으로 스스로를 명명했던 존재가 야생종으로 탈피하는 순간을 목격할 수 있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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