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언론 10년 경향]“8년만에 만년필을 잡아보네”
입력: 2008년 03월 27일 17:45:21
 
ㆍ오리구이에 막걸리…마음 열고 4시간여 대화

리영희 선생의 말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옛날 수준의 내가 했던 말이나 글에 미치지 못하는 공허한 얘기를 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스스로 사회에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 된다”는 이유였다. “이제 몇 해 살지 모르는 병든 세대인데 정치가 어떻고, 국가가 어떻고 생각할 여가가 있나. 그건 다 할 사람이 하는 거지. 조용하게 생을 마감할 준비만 하는 거예요.”


리영희 선생(가운데)과 김봉선 국제부장(왼쪽)·오동근 기자가 지난 20일 경기 군포의 리 선생 자택에서 인터뷰를 한 뒤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우철훈기자>

리 선생은 인터뷰를 요청하는 전화를 했을 때 “나는 쉴 권리도 없느냐”며 난색을 표했다. ‘자유’와 ‘책임’이란 말을 기둥 삼아 꼿꼿이 살아온 지식인의 분위기가 묻어났다. 리 선생은 자서전 격인 ‘대화’의 서문에서 “진정한 지식인은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적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제자들로부터 오리구이를 즐긴다는 귀띔을 받은 터라 “오리구이나 함께 들고 싶다”며 약속을 받아냈다.

쉽지 않은 인터뷰의 물꼬를 튼 것은 이라크 전쟁이었다. 선생을 찾아간 지난 20일은 미국의 이라크 침략 5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라크 이야기가 나오자 미국 비판이 쏟아졌다. 격정적이었다. ‘열강’ 끝에 ‘강부자(강남 땅 부자들의 내각)’,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등을 거론해봤지만 “그건 모르고”라며 다시 선생의 주제로 돌아왔다. 1시간30분여. 리 선생은 “이제 끝이야”라며 ‘종강’을 선포했다. 그때 일행이 들고간 책 ‘대화’를 본 모양이다. 사인을 해주겠다며 펜을 잡았다. “8년 만에 만년필을 잡아보네”라며 적어내렸다. 떨리는 손을 부축해야 했다. ‘쓰지 못하는 손으로, 리 영 희 씀. 08. 3. 20’. 흔들림은 심했지만 글씨체는 그대로였다.(사진)


오리구이 얘기를 꺼냈다. 주섬주섬 나들이 준비를 하는 사이 선생이 몇 차례나 고쳐 물었다. “바쁘면 그냥 가도 돼.” “이미 계획을 세워 왔다”는 말을 듣고서야 선생은 일행을 따라 나섰다. 음식점으로 가는 길에 잠시 차를 세우게 했다. “저기 슈퍼에 가서 막걸리 몇 병 사오지.” 백미 90%짜리를 특별히 주문했다. “하나 빠트린 얘기가 있어” 하시더니 피겨 선수 김연아가 다니는 수리고등학교가 집 부근에 있다며 ‘자랑’하기도 했다.

단골 오리구이집은 10여분 거리였다. “소식(小食)을 하는데 오리고기는 소화가 잘돼.” 막걸리 찬가가 나왔다. “캬”하는 소리와 함께 한 모금, 또 한 모금…. 선생은 네 잔 가까이 비웠다. 막걸리에 추억을 담아 드시는 듯했다. 불콰해진 선생은 즉석에서 촬영한 디지털 카메라의 영상을 보여주자 “나 그렇게 안 생겼는데”라며 소년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음영이 도드라지는 바람에 더 여위어 보이는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4시간여에 걸친 인터뷰, 아니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식사가 파할 무렵 리 선생은 꼭 새겨들으라며 ‘노자’의 한 구절을 소개했다. “지족불욕 지지불태(知足不辱 知止不殆·족함을 알면 욕됨이 없고, 멈춤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

〈 김봉선·오동근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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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언론 10년 경향]“생명·자연·평화의 사회주의적 가치 받들 때”
입력: 2008년 03월 27일 17:41:10
 
ㆍ리영희 선생, 입을 열다

대담=김봉선 국제부장

지난 20일 오후 경기 군포의 산본에 있는 리영희 선생 댁을 찾았다. 2006년 9월 “이제는 지적(知的) 활동을 마감한다”고 선언한 뒤 1년6개월여 만의 인터뷰였다. 2000년 11월 뇌출혈로 쓰러진 뒤 건강을 많이 회복하긴 했으나 팔과 다리가 크게 불편해 보였다. ‘선언’ 뒤 집필활동은 접었고, 산책이나 독서로 부부의 ‘건강한 삶’에 몰두하고 있다고 했다.

실제 리선생은 세상 돌아가는 얘기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그러나 화제가 미국의 이라크 침략이나 영어 몰입 교육에 이르자 어조가 높아졌다. 한 평생 ‘고독한 소수자’로 살아온 그는 여전히 외로워 보였지만 눈빛은 형형했다. 리선생은 “내 책이 팔린다는 것은 이 사회가 아직도 내가 매진하는 것에 대해 부족하다는 뜻”이라며 “역설적으로 내 책이 안 팔린다면 정말 행복할 것”이라고 했다.

-댁 주변의 풍광이 아주 좋습니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나 같은 사람에게는 최고예요. 건강할 땐 아침마다 식전에 (수리산) 산 꼭대기까지 갔다 왔어요. 지금은 수직운동은 못하고 수평운동으로 산책만 하는데 오전에도 두시간 산책했어. 산길을 걷다보면 그 정도 돼. 요즘 재미있는 건 (TV에서) 동물의 왕국, 환경 스페셜 이런 것 보는 거야. 동물의 왕국 보고 있으면 맘이 편해. 생명 중에서 인간이 제일 못나고 악하다는 걸 깨닫게 돼.”

-4월1일로 경향신문이 ‘독립언론’으로 재탄생한 지 10년을 맞습니다.

“경향신문 내용이 좋다는 말은 의식 있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들어요. 나도 그렇고, 기획을 잘하더라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고, 참신해요. 몇 해 보는 동안 경향이 한결 나아졌구나 하는 것을 나도 느꼈지. 난 덕담 같은 것 잘 모르지만 사명감을 갖고, 자본의 지배를 받지 않는 신문이라는 긍지를 갖고, 왜곡하지 않고, 올바른 사고와 판단을 통해 내일을 여는 국민들의 길잡이가 됐으면 해.”

-지금, 언론의 역할은 뭘까요.

“그런 종합적인 얘기는 못하겠어. 요즘은 오로지 (나와 아내) 두 사람의 병을 치료하고, 서로 도우면서 마음 편안하게 살 수 있을까 그런 생각만 해요. 이제 몇 해 살지 모르는 병든 세대인데, 정치가 어떻고 국가가 어떻고 생각할 여지가 있나. 그건 다 할 사람이 하는 거지. 조용하게 생을 마감할 준비만 하는 거예요.”

-오늘로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한 지 만 5년이 됐습니다.

“한국의 지식인은 전혀 지식인이 아니야.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할 때 침략이라는 사실을 몰랐고, 미국인보다 더 미국을 사랑하고, 마치 미국인들을 세계를 구제하는 평화의 사도로 착각하는 인간들이지. 이라크 전쟁을 시작할 때 얼마나 요란하게 떠들었나. 돈 가진 자들은 이라크 전쟁에 참여하지 않으면 후에 무슨 이권을 놓친다는 식으로, 국가의 이권을 위해서 가야 한다고…. 그래서 한국이 무슨 이권을 얻었나. 베트남 전쟁에서도 그렇고, 이란이나 아프간 같은 가난한 나라에서 학살을…. 미국 제국주의의 본 목적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끌려 들어가서, 뭔가 그것을 하는 게 도의적이나 당위적으로 실리가 되고 국익이 된다는 한심한 소리를 했잖아요. 지난 대통령 선거를 이겼다는 당사자나 정당, 지지세력은 전부 그런 식으로 미국의 종 노릇을 자원한 사람들이 아닌가. 난 50년 동안 국제관계를 보면서 꽤나 노력해왔는데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됐어. 동남아나 중남미를 봐도 주체적인 주장이 나오는데, 남한 같은 곳은 내가 알기론 없어요. 반공주의는 그 자체가 창조적 사상을 갖는 인간의 자율성과 독립성, 사고의 명석함이나 건전한 세계관, 인류의 평화 등을 전부 거부하는 것이죠. 그런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가 돈 많은 소수가 지배하는 사회이고, 힘 있는 깡패나 군대, 폭력지배집단이 지배하는 국가예요. 난 미국이라는 나라의 본질에 대해 한국 사람들이 이제는 눈을 뜨게 되지 않았나 싶은데 어림 없는 것 같아. 거대 자본가들이 지배하는 신문, 수구가 지배하는 신문이 사회의 평화적 생존에 역행하고 있어. 그건 선전 ‘삐라’(유인물)야. 소수의 지배자들이 다수 피지배자들의 두뇌를 마비시키는….”

-CNN 여론조사 결과 미국인의 76%는 이라크 군비가 미국 경제난 중의 주요한 원인이라고 답했습니다.

“1961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임하면서 (취임하는) 케네디 대통령에게 조언했어. 미국이라는 국가는 군대를 지탱하면서 돈을 버는 군수산업체들의 합작품이라고. 그러니까 베트남 전쟁을 했지. 미국은 전쟁을 안 하면 못 사는 나라야. 그 전쟁을 위해 상시적으로 세계 유수 국가들의 군사비를 합한 규모와 맞먹는 지출을 하니 국내 경제시설, 하드웨어는 다 망가지지. 금융 제도도 저렇게 됐고. 군사적으로는 세계를 지배하지만 금융적으로 채무국가가 아닌가. 빚투성이 국가야. 말하자면 덩치는 크고 막강한데 실제 이것을 움직일 만한 건전한 정신적·육체적 기능은 다 무너진 거지.”

-한국 신문이 ‘신문다운 신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려울 거예요. 미국의 노예 상태로 있는 한. 지금 이라크 상황도 부시 정권이 들어서서 네오콘들의 계획에 따라 남한의 언론 지식인, 사회적 지도층을 미국식 처리 방향으로 세뇌하고 있어. 남북 문제도 마찬가지야. 그 예산을 ‘데모크라틱 펀드’라고 하지. 의회 승인을 얻어 3~4년 전 300만달러를 남한에 들여왔어요. 과거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미국이 전세계 약소국가들의 노동운동, 좌파 단체, 혁신세력을 내부적으로 붕괴시키기 위해 그런 돈을 썼어. 그때 미국 대사가 공언했지. 그 결과로 가장 폭력적인, 다시 말해 미국의 식민지 제국주의 정책에 하수인처럼 행동하는 그런 세력들을 내부에 만들어 낸 거지. 미국에 유학한 많은 지식인들, 한국 사회 모든 분야에서 최상에 있는 부류들이 미국 숭배의 기본적 체험에 마취당하고 있는 거지. 이명박 정부의 주요 세력, 각료, 인수위원회를 지휘했던 숙명여대 총장…. 전 국민 대상으로 영어 교육을 한다니 큰 문젯거리야. 미국의 사회, 문화, 교육, 돈, 경제, 이득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주장을 하는 것 아닌가. 국민을 전부 미국화하기 위한 노력이지. 뉴스에 무슨 영어교육 광란증 같은 문제를 놓고 이명박이라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정부 주요 인사, 매스컴, 지식인, 학부형 자신들까지 온갖 사람들이 정신을 잃는 것을 보면서 맹자의 말이 생각나. 무릇 남이 나를 업신여길 때는 내가 먼저 나를 업신여긴 연후에 남이 나를 업신여긴다. 어느 가문이 기울 때에는 그 가문의 형제들이 밖에서의 업신여김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가문이 스스로 그런 후에 남이 자기 가문을 쓰러뜨리는 것이다. 나라가 무너지는 것은 먼저 그 백성이 스스로의 나라를 무너뜨림으로써 그 연후 남이 그 나라를 망가뜨리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뼈아프게 반성하고 자기는 어떤가 스스로 뼈아프게 비판해야 내일이 있지 않나 싶어.”

-‘노블레스 오블리주’(상류층의 사회적 책임)라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때입니다.

“난 영어 몰입교육 논란을 보면서 꼭 영어를 다 알아야 하나라는 생각을 해요. 난 1960년대에 5개 국어를 했어요. 영어, 일본어, 중국어, 불어, 한국어. 언어라는 것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면서, 동시에 그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를 지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지. 언어는 그 인간의 철학, 사상, 문화, 심리, 정서 이런 것들을 지배하게 돼. 언어는 단순히 수단이 아니지. 의사 표시와 회의에서뿐만 아니라 언어에 지배 당하는 것이니까. 언어라는 것은 음의 발성학적 구성만으로 되는 게 아니야. 그 언어를 만들어내고 사용한 민족의 역사적 배경, 그 언어가 지금까지 오게 된 과정에서의 사회·인간 경험의 총체, 내포하고 있는 철학, 심리 이런 게 언어 속에 들어가 있어. 한국의 지식인들은 언어를 실용주의의 도구로 착각하는데, 그게 자기에게 돌아와 자신의 모든 생각을 정하지. 재미나는 건 한국 사람이 미국 가서 노동을 하고 아르바이트할 때 영어를 모르면, 영어 하는 미국인들을 뭔가 우수하고 탁월한 족속으로 생각한다 말이야. 노동판에서도 식당에서도 그들에게 지배받는 거지. 그러다보면 ‘아, 난 이들에게 지배당하는 민족이구나’라고 생각해. 그 언어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하는 절박한 욕구와 이런 것이 패배의식, 자기모멸 이런 걸 만들어 버리지. 우리 사회를 보세요. 전부 미국 미국 하면서 미국인을 보면 뭔가 우리 한국인보다 월등한 유전자를 가진 것으로 착각하고 그 밑에서 어쩔 줄 몰라해요. 그것이 커지면 자기 민족, 문화, 국가, 국민적 자존심을 다 버리게 되지. 지금 우리에게 뭐가 있나. 군사력이 막강해져야 하지 않나 하는데 우리 군대는 우리 군대가 아니야. 이제 북한이 전쟁할 상대가 되나. 우리가 자꾸 미국 무기를 사고 군대를 늘리고 하는 것은 미국과의 공개 조약이나 비밀 협정을 통해 한국의 군사력이 미군의 용병으로 쓰이게 돼 있기 때문이야. 남한의 군사력을 마치 남한의 주권을 지키기 위한 무력으로 착각하고 있는데, 그런 목적으로 쓸 데가 없어. 앞으로 미국이 동북아에서 중국과 싸워야 하는데, 그 때 남한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은 중대한 문제지요. 미국을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지식인에 대해 한 말씀 하신다면.

“안됐지만 거의 절망적이에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무슨 기능적인 지식인을 지식인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적어도 어떤 보편적 인류·사회에 대한 생존적 가치를 위해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악을 구분하고,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을 지식인이라고 한다면, 이른바 언론인이라고 하는 신문 만들고 방송하고 그런 사람도 지식인이지. 그런 걸 생각하면 퍽 실망스러워. 앞으로 나아질 가능성을 보기 힘들다는 게 더 문제지.”

-‘폴리페서’(정치에 뛰어든 대학교수), ‘폴리널리스트’(정치에 뛰어든 언론인)라는 말도 있습니다.

“지식인이라는 개념으로 포괄되는 개인이 여러가지 기능에 종사할 수는 있지요. 자기의 지식을 이용해서. 다만 그때의 지식인이라는 것은 진정한 지식인이 아닌 기능적 지식인일 뿐이야. 시장경제와 미국식 자본주의, 미국적 생활양식, 미국적 가치관에 푹 젖어버린 지식인에게 (올바른) 행동양식을 기대할 수 있나. 무한경쟁에서 이긴 자를 도덕적으로 우월한 자로 규정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협력이나 상호 부조, 평화와 같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더 높은 가치가 가능하겠나. 오로지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그런 형태의 사회 규범 속에서는 지식인이라는 것이 미국식 지식인이 되고 말아요. 지식인을 기대하려면 미국식 개인주의·물질주의·이기주의 등에 대한 처절한 인식이 있어야 해요. 미국식 자본주의의 물질 생산에 치중하는 환경 파괴나 비인간적 생존 양식, 이런 것이 이른바 신자유주의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거든. 지식인들이 자기희생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오늘 10개 먹는 것을 5개만 먹고 오늘 10가지 즐기는 것을 5가지만 즐기고, 이렇게 해야 그에 필요한 물품 생산이 줄어들고, 자연을 덜 파괴하게 되지. 자전거를 타는 풍습을 일반화하면 휘발유 수입을 덜하고 공기 오염도 덜하지. 모든 문화에서 그래요. 점점 사치화하고, 남보다 더 많이, 더 좋은 거, 더 예쁜 거, 더 편한 거 이런 물질주의적 욕구를 충족함으로써 경제가 돌아간다는 사회 자체가 문제인 거지. 북유럽만 해도 안 그래요. 거기는 역사적으로 사회주의 정당이 있었거든. 북유럽에는 100년 넘는 사회주의 전통이 있어요. 물질도 소중하지만 인간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생명과 자연을 생각하고, 조화의 정치철학과 사회철학이 오랜 사회주의적 사상과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얼마나 잘 이뤄지나요…. 세계에서 보건, 의료 등 복지·행복을 위한 지출과 정책이 제일 뒤떨어진 게 미국이라고 했지만 이제 우리 의료도 그렇게 하겠다는 것 아니에요? 우리의 사회주의적 사상과 교육, 가치관과 정당, 이것이 떳떳하게 우리 국민 생활의 당연한 부분으로 자리잡을 때 변화가 올 겁니다. 제도적·사회적·사상적으로 물질주의와 균형을 이루게 될 때 훨씬 나아지겠지요.”

-언론인으로서 무엇을 가장 갖춰야 할까요.

“첫째, 전문성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외무부에 출입하던 시절 무슨 정책이 나오면 항상 도서관에서 책을 먼저 빌렸지. 둘째로는, 인간적인 성실성을 갖춰야 해요. 기자라고 거들먹거리고 그러면 안돼요. 그리고 검소하게, 가난하게 사는 데 만족해야 돼. 돈이 흔해지면 권력에 붙게 마련이니까. 정치권력, 경제권력, 사법권력… 이런 것을 거부할 줄 알아야 해요.”

-티베트의 독립·자치 요구가 높습니다. 티베트와 중국이 공존할 수는 없을까요.

“내가 국제부장 할 때처럼 소상한 움직임은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달라이 라마의 제안이 좋은 것 같아요. 일정기간 동안 자치를 하면서 새로운 방법이 창출될 수도 있지. 달라이 라마는 인도의 간디를 연상케 해. 이번에 달라이 라마를 보고 간디를 연상하면서 비폭력 평화, 이 도덕주의적인 평화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티베트인들로 하여금 무기를 들고 중국에 대항하라고 선동하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그게 좋은 해법이겠나.”

-리 선생님의 저서 가운데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우편향되어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미국의 영향이지. 자꾸 오른쪽으로만 날개를 펴려고 하는 거지. 노동자 시위를 엄단한다고 하고. 그렇게 되면 사회 모순이 커져 결국 부메랑으로 돌아올 거야.”

-저서에 대한 인세는 계속 들어오는지요.

“내 인지세는 이제 다 끝났어. 지금은 거의 없고. 내 인세가 제로가 될 때가 내가 기쁠 때지. 내 책이 팔린다는 것은 이 사회가 아직도 내가 매진하는 것에 대해 부족하다는 뜻이니까. 이 사회가 리영희의 주장을 다 안다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지. 역설적으로 내 책이 안 팔린다면 정말 행복할 거야. 이런 말을 해주고 싶어. 지족불욕 지지불태(知足不辱 知止不殆). 족함을 알면 욕됨이 없고, 멈출 줄 알면 위험이 없다, 그게 내 삶의 신조야. 감투 쓰고 나서 자기 아니면 세상이 망할 것처럼 휘젓고 다니는 사람들, 학계·정치·언론계 모두, 그런 인간들이 멈출 줄 모르는 것이거든. 우리 동양철학이 중요한 점은, 삶의 지혜 즉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런 가르침을 준다는 거야. 노자의 가르침이 얼마나 좋아. 내가 할 것은 이 정도면 됐다, 스스로 자기 역할과 능력에 대해 이제 그만하면 됐다, 더이상은 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면 청산과 무릉도원에 사는 것 아닌가.”

〈 글 | 오동근·사진 | 우철훈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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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4월 1일자 신문에서 퍼옴


[송호근칼럼] 박근혜가 뿔났다


인간의 내면 풍경을 말과 몸짓으로 드러내는 데에 드라마작가 김수현의 솜씨는 가히 독보적이다. 김수현의 촉수가 닿으면 인물의 전형이 탄생한다. 인기 탤런트 김혜자는 작가의 이런 의도를 간파해 연기로 뿜어내는 데에 또한 독보적이다. 두 예인(藝人)이 만나 작품을 만들었다. 요즘 인기리에 방영 중인 ‘엄마가 뿔났다’가 그것이다. 엄마는 타고난 기질로 각자의 일에 몰두하는 가족들의 온갖 애환과 무거운 짐들을 짊어져야 하는 중심에 서있다.

엄마는 눙치기도 하고, 엄살도 떨고, 야단도 치고, 자제도 하면서 가족들의 인생사를 꾸려나간다. 권력은 중심으로 흐르지만, 엄마는 결코 그 권력을 세력화하지 않는다. 희로애락을 품고 보듬어 가족들이 각자의 위치에 충실하도록 만든다. 금시 무너질 듯한 가족이 건재한 것은 이해와 배려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사랑을 얹어 권력을 돌려주기 때문인데, 이것이 삼대 확대 가족을 경영하는 엄마의 지혜다. 그런 엄마에게 아기 양육을 떠넘기며 무심코 던지는 아들의 말이 아리다. “엄마가 집에 있잖아요.” 엄마가 뿔나는 순간이다.

무대를 한나라당으로 옮겨보자. 야당 10년에 한나라당은 살림도 축나고 가족들의 불평불만도 드세졌었다. 차떼기당이라는 손가락질에 주눅들어 몇 년 조신하게 처신했건만, 벗기지 않는 오명과 권력 허기증이 가족들을 사납게 만들었다. 드라마의 배경처럼 다선 의원, 중진, 젊은 피로 이뤄진 삼대 확대 가족이 빚어냈던 불협화음이 당을 출구 없는 위기로 몰아 갔고, 급기야 결딴을 내고 말자는 지도부의 조급한 탄핵 결정에 거센 역풍을 맞아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당을 추스를 엄마가 필요했다. 심사가 서로 꼬여 교착상태에 이른 삼대 가족들이 엄마를 불렀다. 박근혜가 나섰다.

결코 표독할 수 없는 여성 정치인 박근혜는 우선 가족들부터 다독였다. 중심의 역할은 포용하고 위로하고 원기를 회복시켜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일이다. 그리곤, 외부로 나가 유권자에게 한없이 머리를 숙였다. 마치 사고 친 아이의 엄마처럼, “한번만 너그럽게 봐주세요”라고. 어떤 정신 나간 사람에게 봉변도 당했지만, “대전은요?”라는 일성(一聲)으로 가족들을 감동시켰다. 그녀가 없었다면, 4년 전 한나라당은 군소 정당으로 전락했거나 와해되었을 것이다. 박근혜는 내부 갈등을 봉합하고 외부 비난을 무마해 한나라당을 정상화시킨 ‘엄마’였는데, 그러는 사이 그녀 스스로 세력화된 것이 문제였다.

어느 날 오랫동안 집을 비웠던 남편이 돌아왔다. 이 남편은 드라마 속의 백일섭과는 영 딴판이어서 매섭고 유능했다. 남편은 권력이양을 요구했다. 한판 승부에 엄마는 뒷전으로 물러앉았다. 대선 승리 후 논공행상에서 엄마는 살림을 유지한 대가를 요구했는데, 돌아온 것은 ‘원칙과 명분’이라는 싸늘한 답이었다. 공천 과정에서 칼로 에인 듯 잘려나간 아이들과 자신이 불협화음의 주역으로 몰린 것이 억울했다. 부엌 바닥에 주저앉는 김혜자처럼 그 심사를 홀로 삭였어야 했는데, 그만, 이렇게 말하고야 말았다.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 당 내부 기류를 알 길은 없으나, 국민들은 권력 허갈증이 난 아이들이 “엄마는 할 일이 없잖아”라며 밀쳐냈다고 느끼는 듯하다. 아무튼, ‘엄마’ 박근혜가 ‘뿔났다’. 뿔이 나도 단단히 났다.

정치판은 승부욕이 강한 사람들이 죽기 살기로 패권다툼에 나서는 살벌한 검투장이다. 유권자들은 이번 공천 과정에서 작렬했던 저 날선 남근(男根)주의를 새삼 경계하게 되었고, 정권 기대감이 낭패감 같은 것으로 살짝 바뀌고 있음을 느낀다. 승자 근처에 몰린 무리들이나, 엄마 치맛자락을 붙들고 ‘나 어떡해’를 외치는 친박(親朴)연대가 빚어내는 풍경은 지극히 한국적이며, 집권당이 출범과 동시에 쪼개지는 것도 지극히 한국적 현상이다. 그게 누구 탓이든, 한나라당을 여기까지 추스른 최고의 공신을 예우하지 않는 장수들의 욕심과 협심증은 문제다. 5년 뒤를 노린 검투사들이 거추장스러운 중진들을 몰아내 결국 중심을 교체하는 데 성공했는지는 모르겠다. 몇몇 힘센 검투사들이 의기투합해 당분간 실세가 된다 해도, 김수현 드라마 속의 ‘엄마의 지혜’까지를 날려버린다면, 언젠가 이들 간에도 처절한 혈투가 벌어질 것이다. 그때 엄마가 다시 필요해질지 모르겠다. 박근혜는 곧 다가올 그날을 기다리는가, 친박연대의 생환을 고대하면서 탈당은 하지 않았다. 모성정치의 상징인 박근혜가 핍박의 말을 쏟아내자 총선 표심이 요동치고 있다.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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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08년 02월 13일 자에서 퍼옴

[김우창 칼럼]자기가 선택하는 삶

오스트리아의 시인 후고 폰 호프만스탈의 시 ‘외면적 삶의 노래’는 큰 주제를 다루는 것은 아니면서 인생에 대하여 심금에 닿을 만한 관찰을 담고 있다. 사람의 삶에는 방황과 고독과 고통 또 기쁨과 열매가 있으나, 결국은 “이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 “이런 저런 많은 것을 보아서 의미가 있나?” 하는 물음들이 일게 된다. 그런 가운데에도 그것을 보상해줄 수 있는 것은, 작은 대로 깊은 느낌의 어떤 순간이다. 무슨 소용인가 하지만. “그래도 ‘저녁이군’ 하고 말하는 사람은 많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호프만스탈은 이렇게 말한다. “이 하나의 말-깊은 뜻과 눈물이 흐르는 이 하나의 말”로부터 “마치 벌집 구멍으로부터 진한 꿀 흘러 내리듯” 감미로움이 흐를 수 있다.

저녁은 해의 밝음이 가고 밤의 어둠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명암의 교체만으로도 저녁은 특별한 감흥을 준다. 또 이 감흥에는 더욱 지적인 인식이 스며 있다. 저녁 시간은 하루의 끝이다. 그것에 주의하는 것은 하루를 되돌아보고 그것을 하나로 포착하는 것이다. 저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감흥과 깨달음을 언어로 표현하는 행위이다. 외면화된 삶에서 귀중한 것은 이와 같이 작은 내면성의 깨달음을 분명히하는 것이다.

외적인 순응만 강요된 사회
‘외면적 삶의 노래’는 노년의 지혜를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호프만스탈이 이 시를 쓴 것은 스무 살이 갓 넘었을 때였다. 이 시를 썼을 때, 그는 빈의 심미주의적 시풍의 영향 하에 있었다. 감흥의 중요성을 말한 것은 이에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는 마음 깊이에서 분명하게 느껴지는 삶을 살겠다는 그의 젊은 시절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법학 공부를 하던 호프만스탈은 이 시를 쓸 무렵 문학과 철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렇기는 하나 이 시에서의 내면성의 강조는 그럴싸하게 들리다가도, 시인의 젊은 나이를 생각하면, 그것이 현실 삶의 도피일 수 있다는 의심을 갖게 한다. 내면이 없는 외면이 맹목인 것은 틀림이 없지만, 외면이 없는 내면도 공허한 일이다. 그러나 세상은 외면적 삶에 중요성을 두는 경향이 있는 만큼 내면을 강조하는 것은 균형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내면의 동의 없이 사는 삶은 결국 나의 삶이 아니라 남의 삶을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적인 삶은 스스로가 의미 있다고 느낄 수 있는 삶을 바깥세상에서 살고 또 가능하다면 그것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삶이다. 개인의 삶의 문제를 떠나서, 외면적 순응만을 요구하고 내면적 의미의 추구를 허용하지 않는 사회도 창조성의 근거를 잃고 무엇보다도 안정의 바탕을 마련하지 못한다. 그러나 안과 밖이 맞아 들어가는 삶이 쉽게 가능한 것이 아님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젊은 시절은 자신이 수긍할 수 있는 의미를 실현해줄 삶을 추구하다가도 대개는 사회의 요구에 타협하면서 안착점을 찾게 되는 것이 보통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젊은 시절이 없는 사회가 우리 사회가 아닌가 한다. 교육제도 그리고 대학 입시제도의 혼란도-사실 또 많은 사회 문제도--깊은 근본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외면화된 우리의 삶의 방식에 연유하는 것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이번 달로 오랫동안 계속되던 대학 선발 절차가 마감된다. 말할 것도 없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간 사람도 있고, 입학은 되었지만 원하지 않는 대학에 입학이 된 사람도 있고, 전적으로 새로 입시 준비를 해야 할 사람도 있다. 원하는 대로 된 사람에게는 축하의 말을,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위로의 말을 주어야 마땅하겠지만, 입시제도의 난관을 겪는 모든 젊은이들은 위로를 받아야 한다고 할 수도 있다.

우리 사회 제도에서, 대학에 지원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일류대학에 들어가기를 희망한다.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데에는 수문장이 있다. 들어가기 위해서는 수문장이 내놓는 물음과 지원자의 답이 맞아들어 가야 한다. “열려라, 참깨!”라는 암호를 발견하는 데에 학생들은 수없는 시간을 보낸다. 그것은 원서를 내기 전의 1년 또는 2~3년일 수도 있고, 요즘 추세로 보면 유치원을 들어갈 무렵부터 수문장이 내어놓을 법한 암호들을 익히는 데에 긴긴 세월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일류대학에 들어가려는 것은 얼른 생각하기에는 일류의 교육을 받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일류대학의 교육이 참으로 이류와 다른가? 교육의 내용의 높고 낮음은 교수와 교육 프로그램과 교육시설에 달린 것일 터인데, 참으로 이러한 항목들에서 일류와 이류의 차이가 그렇게 큰 것인가? 일류, 이류, 삼류 하는 말들이 시사하는 차이가 크다고 상정하더라도, 대학 지망생이나 그 부모가 이러한 것들을 고려하고 난 결과 일류대학을 선택하는 것일까? 대학을 가까이 돌아본 사람이면, 차별화해서 이야기되는 대학들에서 받는 교육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근무하고 있는 대학의 일류, 이류에 따라서 학문이나 사회봉사 활동에서 교수들의 수준이 반드시 크게 차이가 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차이가 난다고 하여도 학부 학생들의 수용 능력을 생각할 때, 그것이 크게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슷한 이야기는 시설이나 교육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

중요한 문제는 대학의 선택이 참으로 나의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대학을 선택하는 것 같지만, 실제는 나는 대학에 의하여 선택되는 것이다. 전공이나 학과의 선택에서도 그러하다. 내가 어떤 학문을 공부하고 싶은가는 중요치 않다. 어느 단과대학, 어느 학과가 나를 받아주고, 나중에 어느 이름 난 직장에서 나를 받아주겠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학·직장서 선택 당하는 현실
내가 원하는 공부가 어떤 것인가, 내가 살고자 하는 인생이 어떤 것인가를 아는 일이 쉽지 않다. 바른 판단의 한 요소는, 지혜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에 못지 않게, 무엇을 의미 있는 것으로서 절실하게 느끼는가-이에 관련하여 마음 속에 들려오는 부름을 아는 일이다. 심증이 생길 때까지는 방황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는 일을 시험하고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있게 하는 방황을 허용할 여유가 없다.

우리는 인생에서 값진 것은 모두 밖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한다. 물건을 고름에는, 무엇이 내 마음에 드느냐보다는 무엇이 명품이냐가 중요하다. 아파트를 구하는 데에도 기준은 편의나 보금자리로서의 느낌보다 부동산 시장의 전망이다. 삶의 의미는 사회적 지위의 명품 가치에 의하여 정해진다. 물론 외면적 사회에서, 이름은 실질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름은 허영심을 만족시켜준다. 그것은 취직이나 존경이나 사회적 지위와 교환할 수 있는 고가의 어음이다. 그러나 실질과 허상이 교차되는 명품의 세계에서 잃어버리는 것은 나의 인생이다. 나는 참으로 내가 원하는 공부가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다. 아마 더 중요한 것은 삶의 작은 순간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일일 것이다. 오늘날 하루가 끝난 다음, “저녁이군”하고 저녁의 감흥에 주의할 수 있는 사람은 실로 극히 희귀한,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 김우창 / 고려대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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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08.3.29)에서 퍼왔습니다.

[독립언론 10년 경향]“위기의 한국 언론, 가장 필요한 것은 객관성”
ㆍ김우창 교수에게 듣는다

대담 = 이대근 정치·국제에디터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와의 인터뷰는 한국 사회와 언론이 주제였지만 대화는 부동산에서 시작되었다. 역시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땅은 빠질 수 없는 화제였다. 김 교수는 땅값이 오르면 내야 할 세금이 오르는데 왜 사람들이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사실 그와의 인터뷰는 내내 이런 상식 아닌 상식에 바탕을 두고 전개되었다.

한국이 낳은 탁월한 사상가라는 상찬을 받는 그였지만, 한국 사회와 언론에 관한 그의 견해는 매우 담백했다. 사실과 의견이 서로 왜곡되지 않고 균형을 갖추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만큼 특별한 한국 사회, 한국 언론에 상식과 원칙의 처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향신문이 독립언론으로 새 출발한 지 10년째를 맞아 자화자찬보다 이번 기회에 한국 언론 전체의 문제를 부각시키고 그 속에서 경향신문의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돌아보고 성찰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는 취지를 소개했다. 그러자 그는 바로 말을 받으며 “신문이 자기가 한 일을 무조건 중요하다고 과장하는 것은 격을 떨어뜨리고 눈에 거슬리는 일”이라며 “신문에 나는 것은 언제나 공정하고 공공이익에 입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주제가 벌써 나온 것이다. 인터뷰는 지난 20일 오후 경향신문사 인터뷰실에서 2시간가량 진행되었다.

- 정년 퇴임하신 뒤 주로 댁에서 지내십니까.


“ 주로 집에서 왔다갔다 합니다. 집이 시내와 가깝고, 자연이 좋고, 특히 땅값이 안 올라서 좋아요. 한국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땅값이 오르면 좋아한다는 거예요. 팔려고 내놓으면 좋겠지만, 살려고 한다면 세금이 오르는데 왜 좋아하죠.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평창동·명륜동·혜화동 같이 서울에서 살기 좋은 데는 땅값이 안 오르고, 혼란스러운 동네는 올라가요.”

- 휴대전화를 사용하시지 않더군요.

“농담으로 하자면, 급한 전화가 있다는 것은 거는 사람이 급한 거지 받는 사람이 급한 것은 아니잖아요. 너무 정보가 많은 게 문제입니다.”

- 매체가 많아졌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매체가 다양해져서 민주주의가 향상됐다고 하는데, 이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뉴욕타임스의 어떤 칼럼니스트가 썼습니다. 아무리 이상한 의견이 있어도 반드시 지지자가 있게 마련인데 매체가 많으면 이런 의견을 담느라 정말 좋은 의견이 모아지기 힘들다는 겁니다. 물론 의견 표명이라는 면에서 보면 다양한 게 좋죠. 그러나 현실적인 해결책은 1~2개뿐입니다. 여러 의견과 방안을 종합해야 합니다. 전문가에게 종합적으로 물어볼 수 있는 절차가 중요한 것이지, 모두가 말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문은 인터넷 매체에 비해 접근이 선택적입니다. 그것을 부당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런 기능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매체의 다양화는 민주주의 확대를 위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에요.”

- 신문을 언제부터 보기 시작했습니까. 처음 신문을 대할 때 신문은 어떤 것이라는 인상을 받으셨습니까.

“신문을 언제 읽었느냐는 물음은 참 답하기 어려워요. 언제부터인지 기억도 나지 않아요. 아버지 때부터 읽었던 신문을 어렸을 때부터 계속 보았으니 계속 읽었다고 답할 수 있겠습니다. 신문은 네개를 봅니다. 저는 사실을 중시하기 때문에 사실이 가장 풍부한 신문을 가장 먼저 보고 그 다음 경향신문을 봅니다. 경향신문은 사실과 의견이 적절하게 있어서 좋아합니다. 의견이 매우 강한 신문은 네번째로 봅니다.”

- 즐겨 읽는 면이 있습니까.

“신문 편집 자체가 그렇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1면 기사를 먼저 보게 돼요. 보통 정치기사를 많이 봅니다. 자잘한 세상사에도 관심이 많아요. 그런 기사들을 보면 세상 사는 느낌을 받게 돼요.”

- 혹시 신문기자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습니까. 아니면, 기자가 되면 이런 것을 써보고 싶다고 생각하신 것이라도.

“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기자가 됐더라면 내게 도움이 됐을 것이란 생각은 했죠. 게을러서 잘 안되는 것을 기자란 직업 때문에 의무감으로 사람 사는 현실에 대해 자세히 봤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요. (기자란 직업에 대해) 그게 부러운 점입니다.”

-한 마디로 정의해서 신문은 무엇입니까.

“아침에 신문을 가지러 나갈 때 ‘아직도 세상이 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어떤 모양으로 있는지 확인시켜 주는 것이 신문입니다. 헤겔이 신문은 현대인의 기도서와 같다고 했어요. 기도서는 아니지만 신문은 세상의 모습을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하죠. 물론 잘못된 모양도 있고요.”

- 건강한 시민이라면 신문을 읽어야 한다고 봅니다. 신문은 민주주의를 위해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요즘 젊은 세대들이 신문을 잘 안 읽는다고 합니다. 요즘 누가 신문 보느냐 이런 말이 자연스러워졌다고 합니다.

“신문을 안 읽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신문 외에 정보매체가 많다는 것이 첫째이고, 그 다음 글을 읽는다는 것은 시각이나 청각 매체에 비해 정신집중이 더 필요한 일인데 요즘 젊은이들은 정신집중보다 몸 움직이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점이지요. 또 정보 과다로 정보가 필요없다는 인식도 있어요.”

- 그런 흐름을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보십니까. 그런 변화는 거부할 수 없는 대세이므로 수용할 수밖에 없다고 보십니까. 그리고 활자매체의 쇠락은 불가피한 것인가요.

“불가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확히 사고하고 검증하는 습관이 학교나 사회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말이지요. 말하는 것과 글쓰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있어요. 말은 문장이 완전하지 않아도 되고, 논리가 안 맞아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글은 논리와 사고에 입각해야 하고 문법도 맞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글마저 사고 표현의 수단이 아니라 자기 표현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 한국 언론은 신뢰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인터넷 미디어의 발달, 이미지 시대의 도래 등 언론 환경의 변화는 전세계적인 현상이지만, 유독 한국 신문의 타격이 큽니다. 게다가 신뢰도도 매우 낮습니다. 왜 그렇다고 보십니까.

“언론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사회의 지적인 힘이 약화됐어요. 그 책임은 언론에만 있다고 보기 힘들지만 언론에도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민주화 과정을 통해서 투쟁적인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입장이 위기 상황에서는 적절하지만 그런 입장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위기가 완화되고 나면, 사람 사는 방향이 여러 방향으로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걸 하나로만 묶으려고 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현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객관성입니다. 옳은 것이라고 해서 주관적인 입장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는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것으로 옮겨가야 해요. 사실이 무엇이냐고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것에 관해서는 의견에 관계 없이 사람들이 안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 외국신문은 어떤 것을 보십니까, 한국신문과 비교했을 때 인상적인 것이 있습니까.

“외국신문을 보는 게 몇 개 있는데 사실 검증이 중요한 기준으로 되어 있어요. 한국의 경우 정의의 이름일 수도 있고 국익을 위한 것일 수도 있는데 그것을 위해 사실을 부정하기도 하지요. 사실이란 일어난 일, 틀림없이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선택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요. 사실 보도 여부는 주관적 판단에 따라 하는 거지요. 이는 사실에 대한 존중이 약하다는 것도 되고, 주관적 판단이 중요하다는 뜻도 됩니다. 제가 오래 본 신문 중의 하나가 영국의 가디언입니다. 가디언이 사실을 선정하는 기준은 아주 객관적이에요. 예를 들어 영국 여왕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거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없어요. 왜냐하면 그게 중요한 기사도 아니고, 모두의 관심사도 아니기 때문이지요. 경향신문의 오늘 이 기사(3월20일자 1면 ‘반운하=반여당 최대 이슈 부상’)는 매우 좋은 기사입니다. 사실 선정의 기준이 공익적입니다. 그러나 제목 ‘최대 이슈 부상’은 사실이 아닙니다. 최대 이슈라면 유권자들이 이것을 기준으로 선택한다는 것인데, 상당히 주관적인 판단입니다. 공익적인 판단 기준에서는 아주 중요한 대목을 드러냈지만 ‘부상’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성이 약한 것이지요.”

- 정의와 국익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는 신문을 만드는 데 있어 항상 갈등하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정부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의 관점에서 보는 국익이 있고, 야당이 생각하는 국익이 있고, 신문도 저마다 다르게 국익을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문은 국익을 어떻게 다뤄야 한다고 보십니까.

“공익이나 국익, 정의가 중요한 가치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비판적 입장은 늘 유지해야 합니다. 어떤 정치적인 행동도 국익이나 정의를 내세우지 않는 것은 없어요. 그것이 참으로 정의, 국익이 되려면 실현하는 수단은 정의로운지 봐야 합니다. 정의나 국익이란 것이 책임을 기피하는 수단이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에요.



구체적인 예를 말씀 드리자면, 며칠 전 여러 신문에서 대학 강사가 미국 오스틴에서 자살한 사건을 다뤘어요. 비정규직 강사들의 부당한 대접에 공감하기 때문에 유심히 기사를 봤어요. 전적으로 강사들의 처우가 부당하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보도했습니다. 이것도 중요한 이유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 사람이 16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미국에 가서 호텔에서 자살한 것을 보면 책임 있는 어머니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을 볼 때 사회정의적인 관점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볼 수 있어요. 한국이 아닌, 미국까지 가서 자살했으면, 다른 이유도 있을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자살하지 않으면 안될 요인이 무엇이었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보도해야 해요. 사회정의의 관점에서만 처리하지 말고 좀더 사실적인 보도를 했으면 합니다. 너무 쉽게 강사 처우 문제로 가버려 충분히 해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얘기가 길어졌지만 사회정의 국익, 이런 것이 우리의 사고를 단축하는 역할을 하면 안됩니다. 사실을 먼저 탐색하고, 생각해보는 일이 필요해요.”

- 신문 역할이 사회 현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십니까, 아니면 사회를 선도하고 계몽하는 것이라고 보십니까. 신문의 역기능으로 사회 갈등을 확대, 증폭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신문이 사회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지 말고 조화로운 결과가 나오도록 유도를 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신문과 사회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이 돼야 합니까.

“계몽, 선도와 사실 보도, 이것들이 모두 어울려야 해요. 그러나 사실 보도가 1차라고 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은 공익의 관점에서, 사회의 건전성에 대한 관심으로 선정돼야 합니다. 여기에 계몽과 선도가 이미 들어가 있다고 봅니다. 이런 입장을 지키는 것이 상당히 중요해요. 왜냐하면 계몽을 앞세우면 주관적으로 되기 쉬워져요. 사실을 통해 주관적인 입장을 나타내면 어느 정도 검증이 되지만, 계몽을 앞세우면 주관적인 입장이 앞서서 공정성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 현재 한국 언론은 분열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은 신문에서 공익을 찾아 보기 어렵다고 하시지만, 신문 각자 나름의 공익에 대한 준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문마다 다른 여러 가지 공익이 존재할 수 있는 건가요.

“공익이란 것이 자기가 서 있는 입장에서 다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최근 중국의 티베트 문제가 좋은 예입니다. 중국 입장에서는 진압이 공익이고, 티베트 입장에서는 아니겠지요.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탄압이 옳지 않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신문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공익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제가 고려대학교에 있다고 해서 그 대학에 모든 것을 바치지는 않습니다. 제 충성심은 진리를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신문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성원들이 신문사 공동체로서 충성심도 있어야겠지만 무엇보다 사실에 대한 충성심이 필요합니다.”

- 티베트 얘기가 나왔는데, 선생님께서 신문 책임자라면 어떤 관점에서 보도하겠습니까.

“티베트, 중국, 세계시민의 세가지 관점을 모두 보도해야 합니다. 가장 보편적인 것은 티베트가 자유를 원한다면 자유와 자치를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내 개인적 입장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티베트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도 그런 의견을 수용할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지요. 중국의 52개 소수민족이 모두 자치를 원할 때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제일 넓은 관점, 즉 인간의 공적인 정의와 국가 현실 안에서의 정의, 이것이 어떻게 타협될 수 있는가도 보도해야 합니다.”

- 그러면, 한국 언론과 외국 언론이 티베트 사태를 올바로 보도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대체적으로 티베트 입장에서 보는 것이 좋은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중국 입장에서 보면 현실을 모르고 하는 얘기라는 의견이 나올 수도 있지요. 현재 세계적으로 공정한 보도라면 티베트 사람들의 소망을 그대로 보도해줘야 합니다. 지금 국내 사정도 그렇습니다. 기업에 더 많은 자유를 허용해서 경제를 향상시켜야 한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입장과 복지 등을 더 생각해야 한다는 입장, 이 두개를 모두 고려해서 어떻게 수렴해야 하는지도 보도해야 합니다.”

- 여론의 다양성이 중요한데 일부 보수 언론이 여론을 과점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불행한 일이지만 제도적으로 시장을 관리하려는 것은 잘못입니다. 불매운동도 하고 그랬는데, 전 신문에 쓴 적은 없지만 사석에서는 비판했어요. 정치권력을 통해 다른 신문이 확장을 시도하는 것은 안됩니다. 전 시장을 지지해요. 이런 얘기해도 좋을는지 모르겠지만, 정부 지원을 통해 한국문학 번역해서 외국에 보급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아요. 그런데 검증 없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번역하기 때문에 문제가 많아요. 아무 책이나 번역돼요. 그러면 그런 지원이 오히려 외국 보급을 어렵게 합니다. 번역하면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문학이 있으면 왜 외국출판사가 자기 돈으로 번역하려고 하지 않겠어요. 제도적 지원도 있어야 하지만, 시장경쟁도 중요합니다. 지금 열세에 있는 신문들도 제도나 정치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체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전 경향신문이 좋은 신문이라고 봅니다. 노무현 정부 때 경향신문만큼 비판하고 사실보도한 신문은 없었어요. 결국은 좋은 것이 승리한다는 신념을 가지기 바랍니다.”

- 여론형성에 있어 신문이 얼마나 제대로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다른 미디어가 그런 기능을 해야 하는지요.

“신문만큼 여론형성에 중요한 기구는 없어요. 인쇄매체의 선택적 기능이 중요해요. 더 깊이 있는 보도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뒷받침하는 것이 있어야 해요. 사회 전체가 깊이 생각하고 지적 규율을 존중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신문도 그런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특히 시청각 매체를 보면, 너무 여론을 쉽게 형성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한국방송들을 일본 NHK와 비교할 때 한국 기자들이 너무 급하고 긴박한 느낌으로 보도를 하더군요.”

- 신문의 당파성을 두고 논란이 많습니다. 당파성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탈피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당파성, 인민성, 이념성은 레닌주의에서 나온 말입니다. 레닌주의의 당파성도 그렇고, 마르크스주의에서 노동자의 계급의식을 강조한 것은 정당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계급의식을 강조하고 노동자계급을 중요시한 것은 2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들이 고통 받는 계층, 보편계급이기 때문이죠. 보편계급이란 이들만 해방되면 사회의 고통이 사라진다고 붙여진 것입니다. 현재 이런 고통을 없애기 위한 해결 방식이나 주장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해결 방식에 차이가 있을지언정 신문은 모든 사람이 고통 받지 않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 선생님이 경향신문에 쓰시는 장문의 칼럼에 대해 일부에서는 어렵다는 반응도 있습니다. 신문과 문학의 글쓰기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보십니까.

“신문이 사실보도를 훨씬 잘해요. 저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사실 제가 말하고 쓰는 것을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 콤플렉스를 느낄 때가 많아요. 그런데 경향신문에서 칼럼을 실어주니,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문에는)장기적인 관점에서, 추상적인 관점에서 얘기하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그때그때 일어나는 사건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끌려가다보면 잃어버리는 것이 있을 수 있어요. 장기적이고 추상적인 관점에서 보는 사람이 있어야지요. 물론 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 글 홍진수·사진 박재찬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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