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4월 1일자 신문에서 퍼옴


[송호근칼럼] 박근혜가 뿔났다


인간의 내면 풍경을 말과 몸짓으로 드러내는 데에 드라마작가 김수현의 솜씨는 가히 독보적이다. 김수현의 촉수가 닿으면 인물의 전형이 탄생한다. 인기 탤런트 김혜자는 작가의 이런 의도를 간파해 연기로 뿜어내는 데에 또한 독보적이다. 두 예인(藝人)이 만나 작품을 만들었다. 요즘 인기리에 방영 중인 ‘엄마가 뿔났다’가 그것이다. 엄마는 타고난 기질로 각자의 일에 몰두하는 가족들의 온갖 애환과 무거운 짐들을 짊어져야 하는 중심에 서있다.

엄마는 눙치기도 하고, 엄살도 떨고, 야단도 치고, 자제도 하면서 가족들의 인생사를 꾸려나간다. 권력은 중심으로 흐르지만, 엄마는 결코 그 권력을 세력화하지 않는다. 희로애락을 품고 보듬어 가족들이 각자의 위치에 충실하도록 만든다. 금시 무너질 듯한 가족이 건재한 것은 이해와 배려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사랑을 얹어 권력을 돌려주기 때문인데, 이것이 삼대 확대 가족을 경영하는 엄마의 지혜다. 그런 엄마에게 아기 양육을 떠넘기며 무심코 던지는 아들의 말이 아리다. “엄마가 집에 있잖아요.” 엄마가 뿔나는 순간이다.

무대를 한나라당으로 옮겨보자. 야당 10년에 한나라당은 살림도 축나고 가족들의 불평불만도 드세졌었다. 차떼기당이라는 손가락질에 주눅들어 몇 년 조신하게 처신했건만, 벗기지 않는 오명과 권력 허기증이 가족들을 사납게 만들었다. 드라마의 배경처럼 다선 의원, 중진, 젊은 피로 이뤄진 삼대 확대 가족이 빚어냈던 불협화음이 당을 출구 없는 위기로 몰아 갔고, 급기야 결딴을 내고 말자는 지도부의 조급한 탄핵 결정에 거센 역풍을 맞아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당을 추스를 엄마가 필요했다. 심사가 서로 꼬여 교착상태에 이른 삼대 가족들이 엄마를 불렀다. 박근혜가 나섰다.

결코 표독할 수 없는 여성 정치인 박근혜는 우선 가족들부터 다독였다. 중심의 역할은 포용하고 위로하고 원기를 회복시켜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일이다. 그리곤, 외부로 나가 유권자에게 한없이 머리를 숙였다. 마치 사고 친 아이의 엄마처럼, “한번만 너그럽게 봐주세요”라고. 어떤 정신 나간 사람에게 봉변도 당했지만, “대전은요?”라는 일성(一聲)으로 가족들을 감동시켰다. 그녀가 없었다면, 4년 전 한나라당은 군소 정당으로 전락했거나 와해되었을 것이다. 박근혜는 내부 갈등을 봉합하고 외부 비난을 무마해 한나라당을 정상화시킨 ‘엄마’였는데, 그러는 사이 그녀 스스로 세력화된 것이 문제였다.

어느 날 오랫동안 집을 비웠던 남편이 돌아왔다. 이 남편은 드라마 속의 백일섭과는 영 딴판이어서 매섭고 유능했다. 남편은 권력이양을 요구했다. 한판 승부에 엄마는 뒷전으로 물러앉았다. 대선 승리 후 논공행상에서 엄마는 살림을 유지한 대가를 요구했는데, 돌아온 것은 ‘원칙과 명분’이라는 싸늘한 답이었다. 공천 과정에서 칼로 에인 듯 잘려나간 아이들과 자신이 불협화음의 주역으로 몰린 것이 억울했다. 부엌 바닥에 주저앉는 김혜자처럼 그 심사를 홀로 삭였어야 했는데, 그만, 이렇게 말하고야 말았다.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 당 내부 기류를 알 길은 없으나, 국민들은 권력 허갈증이 난 아이들이 “엄마는 할 일이 없잖아”라며 밀쳐냈다고 느끼는 듯하다. 아무튼, ‘엄마’ 박근혜가 ‘뿔났다’. 뿔이 나도 단단히 났다.

정치판은 승부욕이 강한 사람들이 죽기 살기로 패권다툼에 나서는 살벌한 검투장이다. 유권자들은 이번 공천 과정에서 작렬했던 저 날선 남근(男根)주의를 새삼 경계하게 되었고, 정권 기대감이 낭패감 같은 것으로 살짝 바뀌고 있음을 느낀다. 승자 근처에 몰린 무리들이나, 엄마 치맛자락을 붙들고 ‘나 어떡해’를 외치는 친박(親朴)연대가 빚어내는 풍경은 지극히 한국적이며, 집권당이 출범과 동시에 쪼개지는 것도 지극히 한국적 현상이다. 그게 누구 탓이든, 한나라당을 여기까지 추스른 최고의 공신을 예우하지 않는 장수들의 욕심과 협심증은 문제다. 5년 뒤를 노린 검투사들이 거추장스러운 중진들을 몰아내 결국 중심을 교체하는 데 성공했는지는 모르겠다. 몇몇 힘센 검투사들이 의기투합해 당분간 실세가 된다 해도, 김수현 드라마 속의 ‘엄마의 지혜’까지를 날려버린다면, 언젠가 이들 간에도 처절한 혈투가 벌어질 것이다. 그때 엄마가 다시 필요해질지 모르겠다. 박근혜는 곧 다가올 그날을 기다리는가, 친박연대의 생환을 고대하면서 탈당은 하지 않았다. 모성정치의 상징인 박근혜가 핍박의 말을 쏟아내자 총선 표심이 요동치고 있다.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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